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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6-06
 제목  니케아 신조의 배경(니케아신조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비교)
 주제어  [니케아신조] [콘스탄티노플]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본론 


1. 니케아 신조의 배경 - 아리우스 논쟁의 발발과 니케아 회의 ; A.D. 318-325 


 1.1. 아리우스 논쟁의 발단.

 아리우스 논쟁은 콘스탄틴이 등장하기 오래 전부터 계속 되고 있었던 신학적 발전에서 그 기원을 찾아야만 한다. 가깝게는 오리겐의 기독론이 갖는 모순적인 요소들과 알렉산드리아 신학과 안디옥 신학 간의 대립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멀게는 속사도들에게까지 소급된다.


 1.1.1. 속사도에서 오리겐까지


 주후 약 90년부터 140년 사이에 활동했던 속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분명한 싱앙을 고백하고 있었다. 속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분명한 신앙이 있었다. 안디옥의 감독 익나티우스(Ignatius)는 "육신적으로나 영적으로, 나신 분이면서도 나시지 않은, 인성 안에 계신 하나님이신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고 했으며, "에수 그리스도는 만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계셨으며 때가 차매 나타나셨다"고 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견해는 변증가들에게로 오면서 한층 더 분명해졌는데, 변증가 유스틴(Justin)은 성육신 이전에 선재하신 로고스는 "하나님의 첫아들"이며 "하나님에게서 나오신 하나님 다음되시는 분"이라고 했다. 그러나 변증가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성부와 성자간의 차별을 두는 종속설적 경향이 따라다녔다.
 한편 교부 이레니우스는 변증가들보다 상당히 진보된 신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레니우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로고스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지은 바 되었으며, 그는 또한 역사 속에서 모든 인류에게 나타나셨으니, 아버지의 약속에 따라 이 마지막 시대에 말씀이 자신의 솜씨를 연합하여 감성있는 인간이 되셨음은 이제 명백히 증명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일 그리스도가 어느 때에 태어났다면 태어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모든 반박을 일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와 항상 존재하셨기 때문에, 존재하기 시작한 어느 때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레니우스는 성자와 성부의 영원한 공존을 언급함으로써 성자의 신성을 확증했지만 성자와 성부가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설명하지는 못했다.


 이런 면에서 터툴리안(Tertullian)은 이레니우스보다 훨씬 앞선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는 본질(substance)과 인격(person)이라는 두 용어를 통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구별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통일성을 추구했다. 즉 세 개체는 하나이면서 나눌 수 없는 본질을 소유하면서 서로 방해받지 않고 세 개의 개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그렇지만 셋은 지위에 있어서가 아니고 정도에서이며, 본질에서가 아니고 형식에서이며, 능력에서가 아니고 그 양상에서 나뉘인다. 그렇지만 그 분이 한 분 하나님으로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이러한 정도들과 형상들과 외양들로 생각되어질 수 있다면 여전히 하나님의 본질이며, 하나의 조건이며, 하나의 능력을 갖는다." 그러나 터툴리안이 사용한 용어들은 그 뜻이 모호했다.


 한편, 오리겐(Origen)은 이레니우스나 터툴리안보다 훨씬 발전된 견해를 피력했는데, 로제(Bernhard Lohse)에 의하면, 그는 주장하기를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아들과 성령에도 적용시킬 수는 있어도 아버지 한 분만이 하나님이며, 아들과 성령의 신성은 아버지로부터 파생된 것이고, 하나님은 아들을 영원한 행위로써 산출한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종속되듯이 성령도 아들에게 종속된다"고 하였다. 신격의 세 위격에 대해서 오리겐은 본체(Hypostasis)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그것은 개별적 요소 혹은 개별적 존재라는 의미에서이고 아들과 성령은 본질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다름이 없다. 그렇지만 동시에 세 위격은 의지와 조화와 통일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하나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종류의 통일성을 말하기 위해서 오리겐은 동일본질(Homoousios)이란 개념을 사용했다. 이처럼 오리겐은 아들을 아버지의 피조물이라고 아들의 종속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이들과 아버지의 본질적인 동일성을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삼위 간의 차이점을 말하는 쪽이 항상 우세해서 삼위 간의 통일성을 말하는 쪽은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했다.


 오리겐의 죽음과 아리우스 논쟁이 시작되었던 몇 십년 사이에 오리겐이 주장하는 삼위일체 교리는 어떻게 하든지 새롭게 다듬어져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영원한 창조를 거절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종속을 엄격하게 주장하든가 아니면 오리겐을 넘어서서 상이한 실체 간의 본질적 하나됨을 강력하게 주장하든가 하는 두 범주에 속하게 되었고, 그 후에 등장하는 모든 신학이 오리겐의 좌파에 서든지 혹은 우파에서 그의 주장을 폈다. 


 1.1.2 아리우스 논쟁의 발발과 전개


 아리우스 논쟁은 약 318년경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감독 알렉산더(Alexander)와 그 교회 장로 아리우스(Arius) 사이에서 발생한 논쟁을 말하는데, 한마디로 오리겐 좌파인 알렉산드리아 장로 아리우스와 오리겐 우파인 알렉산드리아 감독 알렉산더 사이에 일어난 논쟁이었다. 이 논쟁은 역사가 소크라테스(Socrates)에 의하면 이렇게 발단되었다. 디오클레티안 박해 하에 순교한 알렉산드리아 감독 베드로를 승계하여 아킬라스(Achillas)가 알렉산드리아 감독이 되었고, 다시 아킬라스를 이어 알렉산더가 알렉산드리아 감독이 되었다. 그는 용기있는 행동으로 교회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감독이었다. 한번은 알렉산드리아 감독인 그가 자신의 교구 장로들과 교직자들을 모아 놓고 그들 앞에서 삼위일체의 통일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설명을 하면서 야심적이고 확신에 찬 신학적 견해를 펴고 있었다. 바로 그 자리에 있던 장로 가운데 한 사람인 아리우스가 일어나 감독은 사벨리우스(Sabellius)의 교리를 말하고 있다고 하면서 정면으로 감독의 삼위일체 견해를 반박해 버렸다. 아리우스는 만일 성부가 성자를 낳았다면 난 자는 존재의 시작을 가졌을 것이며 아들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아들의 존재는 성부와 같은 본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로부터 나왔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리우스. 소크라테스가 장로라고 언급한 아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12교구 중 하나인 바우칼리스(Baucalis)를 담당한 수석 사제였다. 아리우스는 역동적 단일신론을 주장한 사모사타의 바울의 제자였던 루키안(Lucian)의 문하생이었다. 루키안의 지적 세계는 오리겐의 많은 사상을 계승했는데, 아리우스는 루키안보다 훨씬 더 오리겐적으로 신학을 재구성했다. 이로 보건대 아리우스는 동방에 유행하던 두 가지 신학 사조, 곧 알렉산드리아와 가이사랴를 중심으로 전파된 오리겐의 사상과 안디옥을 중심으로 전파된 루키안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아리우스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의 유일성과 초월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아리우스의 신앙고백을 보면, "우리는 홀로 유일하게 비출생적이고 홀로 유일하게 영원하시고, 홀로 유일하게 시작이 없으시고, 홀로 유일하게 주님이시며, 홀로 유일하게 만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고백한다"고 되어 있다. '하나님'이라고 쓰는 아리우스의 사상에는 하나님 아버지 한 분만을 뜻한다. 하나님의 존재는 절대적으로 초월적이고 불변적이므로 다른 어느 존재에게도 전달될 수 없다. 그러므로 초월하신 한 분 하나님 이외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창조되었음이 확실하고, 무에서 창조되었음을 뜻한다. 아리우스는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나왔다는 사상을 단호하게 거절한다. 이와 같은 사상 형식은 하나님의 육체적인 범주에만 적용될 수 있을 뿐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이 이상 이외의 다른 생각은 하나님을 '복합체'로 만들려는 것이며 따라서 그릇된 것으로 여겼다.


 그렇다면 아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아리우스도 자기 앞의 변증신학자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처럼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말씀과 지혜로 더불어 계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말씀과 지혜를 위격과는 전혀 관계 없는 것으로 보았다. 그렇지만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이 되었는데, 하나님의 피조물로써 시간의 시작 이전에 무로부터 창조된 것으로 보았다. 아리우스는 아들을 다른 피조물과 같은 수준으로 보지는 않았다. 그에 의하면 아들은 완전한 피조물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아들을 피조물이라고 할 때, 아리우스는 아들의 산출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면 아들과 아버지가 너무도 가깝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로지 "파생적인" 의미에서 아들의 "출생"의 뜻을 사용했다. 아버지와 아들의 본질적인 동일성은 어떠한 경우를 막론하고 있을 수 없다.


 여기에 덧붙여서 하나님은 항상 아버지가 아니고, 하나님은 혼자 계신 때가 있었으며, 아직 아버지가 아닌 때도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경우와 같이 아들의 불가변성을 주장할 수 없다. 아들은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그의 신성을 속성에까지 연장시킬 수는 없다.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수여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알렉산더.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더(Alexander, 312?-328 재위)는 오리겐의 성자의 영원 발생 교리를 좀더 발전시켜서 성자는 성부의 본질로부터 영원 발생된 동일본질의 위격적 존재라고 보았다. 즉, 말씀은 한 위격으로서 성부와 구분되며, 또한 성부는 말씀 없이 계실 수 없기 때문에 아들은 성부와 동등 영원하다. 그러나 말씀의 아들됨은 실재적이고 형이상학적이지 입양에 의한 것이 아니다. 둘은 상호 불가한 두 실재이며 완전히 같으나 하나는 아니다는 것이다. 그는 아리우스의 견해가 그릇되며 그는 더이상 그 견해를 제기해서는 안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이 무렵 아리우스는 팔레스타인으로 도피해 있었으며, 이곳에서 자기 견해에 공감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을 찾아나서 실제로 목적한 바를 성취하였다. 그 중에서 제국의 동방 수도의 주교인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Nicomedia)라는 유력한 인물이요 루키안의 동료 제자를 지지자로 만들었다.


 아리우스는 한동안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와 함께 지냈으며, 이곳에서 자신의 견해를 다소 체계적으로 정리한 '탈리아'(Thalia)를 썼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아리우스와 유세비우스는 편지 공세를 통해서 알렉산더에게 아리우스를 복권시키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알렉산더도 이에 못지 않은 편지 공세를 통해서 아리우스가 로고스의 신성을 부인한 것은 신성모독이라고 주장하였다. 감독 알렉산더는 성자가 시간과는 무관하게 영원히 발생하며 '무로부터'라기 보다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오며 불변하고 완전하다고 주장하였다.
 이 양 당파는 모두 성경으로부터 뽑아낸 증빙 구절들과 아울러 상대방의 위치를 붕괴시킬 수 있다고 확신하였던 논리적 이유들을 가지고 있었다. 아리우스는 우선 알렉산더가 기독교적 유일신론을 부인한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알렉산드리아 감독의 주장에 의하면 신성을 지닌 존재가 둘 있게 되므로 결국 두 신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알렉산더는 이에 답변하기를 아리우스의 이론은 말씀의 신성을 부인함으로, 이에 따라 예수님의 신성이 부인된다고 하였다.


 알렉산더는 결국 감독의 권위와 책임에 근거하여, 320년경 약 100명의 이집트 주교들로 구성된 공의회에서 아리우스와 그의 동료 성직자들을 파면하였다. 아리우스는 이러한 처분에 승복하지 않고 알렉산드리아 시민들과 안디옥에서 그와 함께 수학하였던 동방 제국의 중요한 감독들에게 호소하였다. 곧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아리우스의 신학적 요절들을 외치며 행진하는 일반인들의 시위를 볼 수 있었다. 또한 아리우스의 호소를 받은 감독들은 아리우스의 입장을 옹호하여 알렉산더의 이론이 오류라는 서신들을 띠우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알렉산드리아 지방 신학 논쟁이 전체 동방 교회를 분열시킬 위협을 가져왔다.


 이것이 바로 리키니우스를 패배시킨 직후 콘스탄틴이 중재에 나섰을 때의 상황이었다. 제국을 위해 교회의 통일을 원했던 콘스탄틴은 우선 종교 문제에 관한 한 그의 고문이었던 코르도바(Cordova) 감독 호시우스(Hosius)를 파견하여 양파의 화해를 꾀하였다. 양자간의 갈등은 결코 중재로 해결될 수 없다고 호시우스가 보고하자, 콘스탄틴은 제국 전역으로부터 기독 교회의 감독들을 소집하여 대 종교회의를 열게 되었다. 당시 선명하게 기준이 되는 정책들을 필요로 하였던 몇 가지 문제들과 아울러 이 대회의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작된 논쟁을 해결해야만 했다.

 

 

>> 목차고리 : 니케아신조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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