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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5-31
 제목  한국선교의 전초기지
 주제어  [한국 교회사]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1. 한국 선교의 전초기지 (1)

 

1) 문화적 충격

 

게일(J. S. Gale)은 내한한 선교사들이 겪어야 하는 문화적 충격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첫째, 하루 종일 온돌방에 의자도 없이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둘째, 환기도 잘 되지 않는 더운 방에서 잠을 자는 것도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셋째, 음식이 맞지 않는 것으로서, 기름진 양식을 먹고 자란 자기들로서는 쌀밥과 지독한 냄새가 나는 김치와 된장국 등의 한국음식을 먹는 것도 아주 힘겨운 일이다.

넷째, 일반 대중인데, 다리를 꼬아 앉고 쓸모 없는 질문을 해대는 대중을 상대하는 것은 고역스러운 문화충격 중의 충격이다.

다섯째, 여러 가지 해충인데, 불교가 융성한 곳에 기생하는 빈대·이·벼룩 등 해충이 주는 고통을 참아내는 일도 만만치가 않다.

여섯째, 많은 질병과 죽음이다. 선교 현지에는 무서운 질병과 전연병이 만연하며 이런 질병을 앓고 있는 가정을 선교사는 심방을 가야 한다. 그리고 장례식은 공포스러울 만큼 법석대고 떠들석하다. 이런 것도 문화적인 충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일곱째, 언어가 통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언어가 통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상상 할 수 없으리만큼 고통스러운 것이었다고 하였다.

이런 여러 가지 악조건을 가지고 있는 한국에 선교차 내한한 선교사들이기에 소래교회의 존재는 저들에게 큰 힘이 아닐 수 없었다.

 

2) 완충지대

 

우선 선교사들은 모든 것이 부자유한 입장이었다. 정치적으로는 선교의 자유가 허락되지 아니한 상태여서 활동에 제한을 받아야 했고, 언어도 능통하지 못하여 의사소통에도 많은 곤란을 겪었으며, 여행의 자유와 현지의 정보도 전혀 없는 상태였다. 이런 선교사들에게 소래교회의 존재는 매우 소중한 것이었다. 더욱이 이 교회의 개척자들은 뜨거운 사명감과 희생을 감내하는 투철한 신앙을 가진 평신도 사역자들이기에 선교사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동역자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언더우드를 비롯하여 마페트·아펜젤러 등 모든 초기 선교사들이 소래를 방문하였고, 그들은 소래교회를 서북지역을 향한 선교의 전초기지로 활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저들이 소래를 활용하는 방법도 다양하여 언어훈련장으로 삼는가 하면, 서북지방 선교여행의 중간 기착지로 삼기도 하고, 이 곳에 장기간 유숙하면서 자신들의 미래를 구상하며 실제로 자신들의 선교능력을 시험해 보기도 하였고, 한국과 한국인들을 이해하고 익혀가는 문화적 완충지대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친 대표적인 선교사가 펜윅과 매켄지이다.

 

1. 한국 선교의 전초기지 (2)

 

3) 펜윅의 내방

 

1889년 겨울, 사경회에 참석한 서경조는 펜윅(Malcolm C. Fenwick, 한문명 片爲益. 1863-1935)과 처음 대면하게 된다.

그는 1889년 9월, 26세의 총각 선교사로 내한한 카나다 선교사이다. 이 펜윅은 성품이 괴퍅하여 어학선생들과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지 못하였고, 이 소문이 유포되면서 어느 누구도 그에게 접근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형편에서 펜윅이 서경조에게 접근하자 언더우드는 서경조에게 그를 조심하라고까지 충고한다.

이런 딱한 사정을 알게 된 서경조는 오히려 그를 선도하여 좋은 선교사가 되도록 적극 협조하기로 결심하고 1890년 초 소래로 인도한다.

그러나 그는 이 곳에서도 오래 머물지 아니하고 1893년 귀국하여 3년간 카나다에 체류한다. 그가 카나다로 급히 돌아가게 된 이유는 카나다에서 지낸 행적으로 보아 선교현장에서 자신의 부족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싶다. 그는 이 때 보스톤 선교훈련학교(The Boston Missionary Training School) 과정을 마치는 한편 목사안수도 받는다. 그리하여 선교사로서의 자신을 준비하는데 시간을 많이 소비하였다.

그가 본국에 체류하면서 조직한 한국순회선교회 (The Corean Itinerant Mission 1894년)는 중국내지(內地) 선교단의 강령과 흡사한 것이다.

이런 준비를 마친 그는 1896년에 다시 내한하여 서경조에게 원산에서 함께 전도하기를 요청하였고, 그들은 잠시 동안 함께 사역에 임하기도 한다. 인내심이 강하고 관용과 넓은 도량을 가진 서경조이지만 처음 의도와는 달리 원만한 관계를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결국 헤어지게 된다. 이 사건은 한국 복음화의 큰 뜻을 품고 내한한 선교사와의 미묘한 관계이기 때문에 서경조 자신의 글을 통하여 직접 읽어 보도록 한다.

"이 때에 셔울에셔 또 사경을 하난대 셔울 사람과 쟝연 사람과 의쥬 사람이 모혀 한달 동안 공부를 한지라. 맛치기 젼에 침례회 목사 편육을 수차 샹죵하니 이 사람의 셩픔이 이샹하야 어학션생을 각금 갈아대니 필경은 션생을 얻을 수 업난지라. 一日은 울며 말하기를 나는 어학 션생을 얻을 수 업서 말공부를 못하게 되니 본국으로 도라가난 수 박게 업다하며 비감하여 하난지라. 이에 나와 의론하고 숑쳔으로 같치 내려가 어학도 하며 젼도도 하기로 작뎡하고 사경을 마친후에 원목사가 날다려 釜山에 배목사와 같치 내려가 자리잡고 일하라 하거늘 내가 편육을 위하야 어학하기로 작뎡한 일을 말하고 一年동안 지내 보겟노라 하니 원목사는 블평하여 하더라. 원목사는 본국에 드러가고 마삼열 목사가 그 대신 셔울 일을 보게 하더라. 나는 매셔일을 놋코 집으로 도라 오니라. 一千八百九十年에 편목사가 숑쳔에 내려와 일년이 못되여 본국에 단녀온다 하고 다녀온 후에 元山에 가셔 자리잡고 일하자고 하야 나는 솔권하야 셔울 가셔 가권을 伯氏宅에 두고 단신으로 원산에 내려가셔 젼도하며 간간이 신쟈의 요긴한 책이라 하고 셩경졀에셔 택하여 번역을 하난대 편목사의 서투른 죠션말대로 고집하니 나는 그 말대로 못한다고 하야 피차에 쟁론만 됨으로 할 수 업시 작별하고 上京하엿다가 도로 숑쳔으로 내려오니 편목사는 돈 업난 사람이라 水陸간 왕래에 내 돈으로 썻스니 이럼으로 내가 빗을 지게 된지라"

펜윅과 소래교회, 그리고 서경조와의 관계는 서경조가 경제적인 부담까지 지는 것으로 끝을 맺고 말았다.

 

4) 펜윅이 남긴 업적

 

하나님은 그의 종들을 쓰실 때 저들의 능력과 은사에 따라 쓰신다. 이런 하나님의 위대하신 손길을 펜윅의 경우에서도 발견하게 된다. 펜윅이 비록 소래에서 많은 업적을 남기지는 못하였을지라도 유익을 준 일이 없지 아니하였다.

본래 펜윅은 많은 공부를 못한 사람으로 신학적 기초가 전혀 없는 평범한 평신도에 불과하였다. 그런 그에게 한국선교에 대한 강한 사명감을 불러 일으키게 된 동기는 한국에 있는 선교사 헤론(J. W. Heron)이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되어 교수형 직전이라는 신문보도가 있은 후의 일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 배우지 못하여 준비되지 못하였다는 사실때문에 주저하고 있었으나 윌더(Wilder, of India)의 조언과 격려가 그를 한국으로 나오게 하였다.

그의 성격이 괴퍅한 것도 배우지 못하였다는 열등의식의 소산인지 모른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소래에서 아주 유용하게 쓰신다.

그의 부모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캐나다로 이민하여 농사를 지었다. 이 때 습득한 농사와 원예 기술은 소래에서 새로운 농사법을 강의하고 장려하는데 쓰임이 되었고 또 실제로 과수·채소·꽃 등을 재배하며 시범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이 일에 대하여 펜윅 자신은 그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다음해 봄, 서울을 떠나 소래로 올 때 데트로드 형제들이 보내 준 여러 가지 씨와 미국의 수도에서 보내 온 묘목들을 가져왔고, 이것들은 주택 곁의 채소밭에 뿌렸다"

"그리하여 채소밭을 만들었는데 소래사람들은 서양 선생님이 옷을 벗고 일을 하는 것을 큰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이유는 동양의 관습으로는 훈장이나 선비는 그들의 손으로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만일 좀 더 장기간 소래에 머물렀다라면 더 많은 영농기술을 전수할 수 있었을 터인데 그렇지 못하여 별로 유익을 주지 못한 인상을 남기고 말았다.

그 후 펜윅은 원산에서 [동아 기독교]를 창설한다.

 

1. 한국 선교의 전초기지 (3)

 

5) 소래교회와 매켄지

 

펜윅과는 반대로 소래에 내려와 어학을 공부하며 서경조를 도와 교회의 일과 학교를 설립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선교사는 매켄지(W. J. Mckenzie)이다.

그는 1894년 12월 마페트의 소개로 소래에 내려와 한국 옷을 입고 한국 음식을 먹으며, 마을 청년들과 씨름도 하면서 한국을 이해하고 한국의 언어와 문화를 익히기 위해 노력한 열정적인 총각 선교사이다. 그러나 그는 단기 사역으로 생을 끝마치고 만다.

1895년, 예배당 건축공사가 거의 끝나, 마무리 작업을 진행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전도차 장연읍을 다녀왔는데 뜻하지 않게 일사병에 걸려 정신적으로 약간 이상을 일으키며 고생하게 된다. 병중임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도움을 거절하고, 아직 완공되지 못한 예배당 부속실에 거처하면서 5일간 고열에 시달린 끝에 결국 6일째 되는 날인 1895년 6월 23일 (음력 5월 4일) 소지하고 있던 권총으로 자살하고 말았다.

 

6) 매켄지의 일기

 

그는 자살하기 전 병과 싸우며 다음과 같은 글을 그의 일기 마지막장에 남겨 놓았다.

6월23일 (토)

" (전략) 잠을 잘 수도 없고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너무 약해졌기 때문이다. 오늘 오후에는 전신이 추워지는 것을 느낀다. 옷과 더운 물주머니가 있어야겠다. 땀을 내야겠다. 조금 나은 듯하기도 하다. 죽음이 아니기를 바란다. 한국과 내가 한국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게 될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이다. 내가 조심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낮에는 뜨거운 햇볕 아래서 전도하고 밤이면 공기가 추워질 때까지 앉아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중략) 내 마음은 평안하며 예수는 나의 유일한 소망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이루신다. 몸이 심히 고통스러워 글을 쓰기가 너무 힘이 든다."

그는 같은 날 에비슨(Oliver R. Avison)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써 놓았다. 이 편지는 발송하지 못한 채 그는 숨졌고,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것이다.

사랑하는 에비슨 박사님

일주일전 저는 60리정도 떨어진 장연읍에서 타는 듯한 폭양밑에서 2일간이나 걸어서 급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하룻 밤은 흰 한복을 입고 한기를 느낄 때까지 밖에 앉아 있기도 하였습니다. 그랬는데 일주일전부터 열이 나고 입맛을 잃고 힘을 잃게 되었습니다. 더운 물을 가지고 땀도 내고 두꺼운 옷도 입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밖으로 나가지를 못하겠고 지독한 고통을 느끼고 있습니다. 잠도 잘 수가 없습니다. 나를 돕기 위하여 박사님이나 다른 분이 올 수 있겠는지요? 나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박사님이 할 수 있으면 부디 친구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WM. McKenzie'

그는 낯선 땅에 와서 열악한 환경과 체질에 맞지 않는 자연조건과 싸우며 선교활동을 하다가 마침내 이기지 못하고 주님 곁으로 간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책임을 자신이 짊어지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선하게 주장하실 것을 믿고 있었다(God does all well).

비록 자살로 생을 끝맺기는 하였지만 그의 정신은 살았고, 한국선교를 위하여 살아야겠다는 집념은 우리의 머리를 숙이게 하는 거룩함이 있다.

이 청년 선교사의 죽음은 큰 충격과 끝없는 슬픔을 주었다. 그리하여 온 교회와 인근 마을에 사는 주민들까지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그의 장례식은 교회장(敎會葬)으로 엄숙히 거행되었고, 그의 유해는 꽃상여에 실려 소래교회에서 약 5백 미터쯤 떨어진 양지바른 언덕으로 운반되었고, 아담한 무덤을 만들어 고인의 업적에 경의를 표하였다.

 

그의 비석은 흰 차돌로 되었으며, 비문은 다음과 같다.

전면(영문으로 되어 있다)

윌리암 죤 매켄지씨

1861년 캐나다에서 출생

1895년 조선에서 사망

그이는 죽었으나 말하고 있다.

후면 (한글로 되어 있다)

1893년에 [매켄지]목사가 [캐나다]로부터 여기 내주할 때 동포는 외인을 살해하려고 하고 교인은 몇이 안되는 때라 폭양에 열심전도 하더니 열병에 정신없이 기세(棄世)하매 일동이 애석하여 다 주를 믿는지라 주의 말씀에 밀알 하나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열매가 많다 함이 옳도다 송천교회는 조선의 처음 열매요 목사의 몸은 여기서 자도다.

이창직 명

매켄지의 약혼녀는 앞길이 창창한 청년 선교사와 함께 한국을 위하여 헌신하게 될 장미빛 미래를 그리며 태평양을 항해하고 있을 때 애인의 부음을 듣게 된다. 이 소식은 그녀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지만 도중하차하지 아니하고 소래에 내려와 애인이 잠들어 있는 무덤 앞에서 경건하게 기도를 드렸다.

그는 고인이 된 애인을 위하여 몇 가지를 남기는데, 첫째는 애인을 위하여 비석을 세워 준 것이며, 둘째는 한국을 떠나지 아니하고 원산지방에 머물면서 열심히 전도한 것이며, 셋째는 한국에서의 매켄지의 생애 "A Corn of Wheat or the Life of the Rev W. J. McKenzie of Korea"라는 제목의 책으로 남겨 준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매컬리(Miss Elizabeth A. McCully)이다.

 

1. 한국 선교의 전초기지 (4)

 

7) 충 격

"1895년 초여름에 매켄지씨는 언더우드씨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 예배당의 헌당식에 참석하여 수 많은 세례 지원자들을 받아 달라고 청했다. 언더우드씨는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그가 막 떠나기 직전인 7월의 어느 슬픈 날, 그 때 우리는 금식 기도를 하려고 여럿이 모여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인 매켄지씨가 치명적인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그가 죽었다는 놀라운 소식을 받은 바로 뒤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가 손수 쓴 애처로운 편지가 도착했다. 구절구절마다 끔찍한 고통과 이미 흩어진 마음을 뚜렷이 드러낸 편지였다. 우리는 마치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토록 열정에 넘치고, 헌신적이고, 능력 있는 사람이 그렇듯이 빨리 쓰러지게 되다니!"(L. H. 언더우드. 앞의 책. 119쪽).

이상은 언더우드의 부인이 남긴 당시의 상황이다. 매켄지의 죽음에 대한 충격은 선교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또 다른 교훈으로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소화하려고 노력하는 단면을 보여준다. 그의 글을 계속 소개한다.

"그보다 더 현명했던 조선 사람들이 그에게 의사를 부르라고 설득을 해보았으나, 그는 그저 잠깐 스쳐가는 영양부족쯤으로 밝혀질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 불결한 여름철에 자기일을 제쳐 두고 멀고 험한 여행을 떠나도록 하는 것이 내키지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전혀 돌보지 않는 그 마음과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그 양심에 따라, 자기 스스로 진단을 하고, 도움을 청하기를 미루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 친구인 한 조선 사람 지도자에게 긴긴 밤을 악마와 힘겹게 싸우고 나서 다시 구세주를 보는 황홀함을 몇 시간씩 겪는다고 말했으며 최후의 순간까지 견딜 수 없이 머리가 아팠다고 한다."(앞의 책. 119-121쪽).

그는 발병 초기에 정신적으로 약간 이상한 증세가 있었으며 이 증세는 [어찌 선교사가 자살을 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해결해 주는 실마리가 된다. 그리고 소래 교인들이 한국의 복음화를 위하여 고향을 떠나 고생하는 외국 선교사를 결코 소흘하게 방임함으로써 이런 불상사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밝혀 주고 있다.

 

8) 용마루의 십자가

 

현존하는 소래교회의 사진들 중에 용마루 위에 십자가 형태가 희미하게 보이는 사진이 하나 있다. 이 사진에 근거하여 "한국의 초대 교회는 십자가 기를 높이 계양하여 교회를 상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한 것은 소래교회의 여러 사진자료들 중 오직 한 곳에서만 십자가 형태를 볼 수 있다. 즉, 첫 번째 건축한 건물(1885) 사진과 그 후 증축한 건물 사진에도 십자가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다. 그래서 과연 소래교회 용마루에는 십자가가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 일어나게 된다.

이 부분에 대하여 소래교회 출신 증인들은 말하기를 "1896년 증축하는 건물 용마루 연결부분에 기와로 십자가를 설치했으나 후에 파손되어 혼적만 남았다"고 한다. 이 기와로 만든 십자가는 "기와 공장에 특별히 주문하여 만든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면, 이 용마루의 십자가는 언제 누구에 의하여 창안되었고 시작된 것일까?

동학란으로 많은 사람들이 동학과 예배당을 겸하여 출입하면서 자신들의 신변안전을 도모하고 있을 때, 매켄지는 기독교와 동학을 구분하는 동시에 주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상징물로 교회와 모든 성도의 집에 [죠오지의 십자가]를 달 것을 제안한다.

이 사실을 1894년 12월 12일에 기록한 그의 일기에서 읽을 수 있다.

"죠오지의 십자가와 함께 예수의 기()를 세우기 위하여 깃대를 세우자고 간단하게 말한 후 저들은 약간 떨어진 곳에서 나무를 찍어다가 깃대를 세우고 기를 게양한 후 십자가의 깃발이 한국의 모든 골자기에 나부끼게 되기를 기대하면서 찬송을 부르며 그 기를 빙빙 돌았다"(E. A. McCully. 앞의 책. 154쪽).

이것이 효시가 되어 신실한 교인들은 자기의 집에도 십자가 기(旗)를 걸어 기독교인임을 표시하게 되었다고 한다.

용마루의 십자가는 매켄지로 인하여 된 것이다.

 

9) 매켄지의 후신

 

그의 죽음을 어떤 학자는 순교라고 하였으나 순교는 결코 아니다. 다만 순교적 가치가 있는 죽음이었다고 평가할 수는 있다. 그 이유는 첫째, 그의 약혼녀도 한국 선교를 위하여 헌신하였으며 둘째, 캐나다 교회가 한국 선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때문이다. 그의 죽음에 자극되어 한국선교를 자원한 사람은 맥레(D. M. McRae 한국명; 馬求禮)이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장로교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한국에서 온 편지를 읽게 된다.

이 편지는 서경조가 캐나다 교회에 보낸 것으로 [매켄지의 공백을 채울 후임자를 보내달라]는 호소의 글이었다. 그 편지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소래 마을은 매우 취약한 곳이긴 하여도 축복 받은 곳이기도 합니다. 지금 이 곳에는 매켄지의 본을 따르려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의 육신은 더 이상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며 우리의 옛 캐나다 친구들이 우리를 위해 더 많이 기도 해 주기를 바라며 또 크리스챤 교사 한명을 보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1895. 12. 26.

한국 소래 교인   서 경 조"(E. A. McCully. 앞의 책. 254쪽).

이 편지가 맥레의 가슴에 큰 감동으로 다가왔고 결국 한국 선교사로 자원하여 1898년에 내한하게 된다. 그 후에도 캐나다 교회는 그리어슨(Robert G. Grierson)부부를 비롯하여 푸트(W. R. Foote)목사 부부 등을 보내므로 매켄지의 죽음을 값지게 하고 있다.

 

 

>> 목차고리 : 숨겨진 한국교회사

>> 참고고리 : 소래교회

>> 연결고리 : 한국 교회사, 내한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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