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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4-01
 제목  신사참배 거부와 폐교 (전주신흥고등학교 90년사 21)
 주제어  
 자료출처  전주신흥고등학교  성경본문  
 내용

목차

 

갑오개혁이후의 신교육   

선교사들의 내한과 기독교학교의 설립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의 내전과 선교 활동의시작

최초의 신흥인 김창국   

시대적 배경

신흥학교의 개교

희현당

일제의 무단정치

초창기의 신흥학교

삼일운동의 배경

의 삼일운동

삼일운동과 신흥

일제의 문호정책

기독교의 재흥과 시련

학생수의 증가와 증축

1920년대 신흥학교 개황

인톤교장과 1930년대 초

조선총독부 지정 신흥학교

항일의 몸짓

광주학생운동과 신흥

신사참배 거부와 폐교

종교교육과 신앙생활

 

> 참고자료 :  삼일운동 

 

 

제3장 신사참배 거부와 폐교

1. 신사참배의 배경

우리 나라에 천신인 환인의 아들 환웅이 태백산 및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서 신시를 베풀었고, 그 환웅과 웅녀 사이에서 단군이 태어나 나라를 시작했다는 국조신화(國祖神話)가 있는 것처럼 일본에도 이러한 신화가 있다. 즉 태양신인 아마테라스 오호미가미(天照大神)가 그의 손자 아마쯔히꼬히꼬호노니니기에게 구슬과 거울, 검의 세 가지 보물을 주고 5부(五部)의 신들을 데리고 내려가서 아시하라(葦原)의 미즈오(瑞穗) 나라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한다. 이 중 세 가지 보물은 환웅이 가지고 온 천부인(天符印) 3개와 같은 것이고 단군신화에서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와 함께 3천명의 신들을 데리고 내려온 것은 일본신화에서 5부의 신들을 데리고 내려온 것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이와같은 신화에 근거해서 일본 사람들은 태양신인 아마데라스 오호미가미를 그들의 조상으로 생각하며, 따라서 일본인들은 자신들을 태양신의 후예라고 여긴다. 일본 국기가 붉은 원 하나로만 되어있는 것도 곧 태양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日本)이라는 나라 이름도 곧 태양과 관련된 것이다. 우리 나라에 단군을 섬기는 대종교(大倧敎)가 있듯이 일본에서는 그들 신화 속의 아마데라스 오호미가미를 섬기는 신도(神道)라는 종교가 있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대종교는 그 세력이 극히 미미한 데 비하여 일본의 신도는 전 국가적인 종교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이 신도를 통하여 민족의 구심점을 찾으려 하였다.

일본의 천황은 정치적인 통치자임과 동시에 이 신도의 최고 사제로서의 기능을 담당한다. 천황이 정치적 실권이 없었던 시기에도 최고사제로서의 기능을 계속 담당해왔기에 일본의 천황제도는 장구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일본 고대 사서(史書)에 기록된 바 일본 천황의 기원은 B. C.660년에 일본을 건국했다고 하는 신무(神武) 천황이 1대이고, 그 후 하나의 가게를 유지해와서(소위 萬世一系說)오늘날 125대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건국설화와 천황사의 초기 부분에 대한 기록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받지 못하며, 실제 그 존재가 역사적으로 확인되는 것은 33대 추고(推古) 천황(A. D 592-682)때부터 라고 한다. 실제 천황이나 일본이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도 이 시기이다. 천황은 종교적 권위와 함께 일본 국가의 주권자로서 일체의 국가권력의 근원이 되었으며, 내정과 외교의 최종적 권한을 가진 최고 통치자였다. 그러나 천황제의 성격과 기능은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었고. 이에 따라 천황의 권력도 달라졌다. 7세기 후반이래 약 2세기 정도 천황의 친정이 이루어졌으나 귀족권이 강화되는 9새기부터는 이른바 섭정, 관백(關白) 에 의한 대리정치가 행해졌으며, 이에 따라 천황제는 형식화되었다. 이어 12세기부터 19세기 후반까지 계속된 무가막부(武家幕府) 시대에는 천황의 통치권이 극도로 제한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있어서도 천황이 지닌 상징적인 권위와 맹목적인 권한 자체는 유지되었다. 무가막부의 장군 중 그 누구도 천황의 이러한 상징적인 권위에 도전할 생각은 하지 않았으며, 실제 정치에 초연한 천황을 적대세력으로 타도할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천황이 지닌 이러한 정신적 권위와 국가통합의 상징으로서의 역할을 10분 활용하려 하였으므로 천황제는 유지될 수 있었다.

1868년에 명치유신(明治維新)에 의해 덕천막부(德川幕府)가 타도되고 신정부가 들어서자 천황제는 1000여 년만에 다시 부활되었다. 천황은 최고통치자로서의 권능을 회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의 확립에 따른 정치적, 정신적 구심체로서 신격화되었으며. 이후 1945년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이 체제는 유지되었다. 물론 이 시기에도 천황 개인이 정치를 독점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권한의 책임자로서 국가통치를 수행하였다. 특히 히로히토가 재임한 소화(昭和)시대 (1926-1989)에는 일본의 군국주의화가 진행되었고, 중일 전쟁을 비롯해 세계 제 2차 대전을 일으킴에 따라 천황에 대한 신성불가침과 신격화가 가장 철저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소화시대에 일본의 군국주의화가 진행되면서 일본이 민족종교인 신도는 국민의 결속을 위하여 한층 강화되었다. 일본정부는 신도의 신사(紳士)에서 참배하는 것을 국민의 애국교육 정책의 기초로 간주하였다. 신사에 경의를 표하는 것은 모든 일본국민들의 정상적이고 당연한 의무이며, 일본정부는 모든 학생들의 신사참배를 충성과 애국심의 훈련으로서 요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요구는 한국과 같은 식민지 나라를 일본에 동화시키기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그들은 생각하였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한 국민을 최대한으로 이용할 필요성을 느낀 일본은 한국사람들에게 한국인도 일본인이라는 의식을 심어주어야 했고, 그 한 방편으로 일본의 조상신이며 태양의 여신인 아마데라스 오호미가미를 모신 신사에 참배를 강요하게 된 것이다.

신사참배는 모든 학교의 학생들에게 일본에 대한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실시되었다. 신사참배의 의식자체는 간단하였다. 한 집단이 지도자가 신사 앞에서 세 번 박수를 치 면 학생들의 위폐를 모셔 놓은 사당 앞에서 고개 숙여 인사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박수를 치는 것은 사당 안에 있는 "영혼"들에게 막 인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는 뜻이요, 인사하는 것은 복종을 표시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진다고 한다. 일반학교의 학생들에게는 이러한 의식자체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 기독교계 학교에서는 이것이 우상에 대한 숭배라는 점에서 문제가 되었고, 여기서부터 일본의 민족 종교인 시도와 기독교의 갈등이 시작되는 것이다.


2. 신사참배의 강요와 선교부의 입장


1930년대에 있었던 일제의 신사참배에 대한 강요는 교회에 대한 무서운 시련이며 거침돌이었다. 신도가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정신적 지주라는 점에서 뜻있는 애국 인사들의 민족적 반감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교회에 대해서는 신앙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반발은 더욱 컸다. 물론 일본 정부는 신사참배가 기독교학교를 난처하게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견해를 취하고 있다. 왜냐하면 신사참배는 애국심을 위한 것이고 종교적인 취지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부 인사들 중에는 이와같은 일본 정부의 견해에 따라 신사참배가 국가의식에 불과하다고 안이하게 해석하여 일제의 정책에 순응 동조한 사람들도 있었다.

천주교와 감리교에서는 신사참배가 종교적 의식과는 다른 애국적 행사라 하여 이에 참여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장로교회의 주류는 신하가 신도라는 일본고유의 종교에 근거하여 있으며, 거기에 참배하는 일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견해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사참배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신사참배가 종교적 행위라는 근거를 풀톤(C.Darby Fulton)목사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이유를 들어서 말하고 있다.


1. 모든 일본문학은 신도를 종교로서 언급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

2. 일본과 한국의 일반 대중들 뿐만 아니라 지도적인 학자들도 신도를 종교로 여기고 있 다.

3. 숭배의 대상은 신성을 나타내는 모든 부속물까지를 포함한다. 그것들은 창조적인 힘, 초인적인 용감성,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 기동에 답할 수 있는 힘 등으로 여겨지 고 있다.

4. 숭앙의 대상물들은 신화와 미신의 범위 안에서 날조된 것들이다. 섬기라고 강요하거 나 그것을 인정하라고 하는 것은 단지 종교의 자유뿐만 아니라 지적 정직에도 위반 되는 것이다. 똑같은 어려우에 당면한 불교 신자들이 정부에 대항하기 위해 기독교인 들과 때때로 제휴해 왔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5. 신사에서 행해지는 의식은 확실히 종교적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 의식을 진행하는 절차의 어느 시점에서 위로부터 영(靈)들을 불러오기도 하고, 몸을 깨끗하게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죄를 씻는 것을 상징하는 정화(淨化)의 의식이 수행되기도 한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성장하고 공부를 한 풀톤 목사의 신사참배의 성격에 대한 위의 지적은 신사참배가 분명히 종교적 의식임을 밝혀주고 있다. 따라서 남장로회 선교사들은 이런 입장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신사참배 강요의 마수는 먼저 1935년 기독교계 학교에 뻗쳐왔다.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장 윤산온(尹山溫, G. S. Mc Cane)은 이 문제로 인한 최초의 희생자로 알려져 있다. 학교를 대표하여 신사참배를 하지 않을 경우 강제출국을 시키겠다는 협박적인 통첩을 받자 그는 분명하고도 단호하게 신사참배가 가지는 종교적 성격 때문에 개인적 신앙 양심상 불응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로 인하여 윤교장이 교장직을 박탈당하고 미국으로 돌아가자 일제는 신사참배 강요 범위를 모든 기독교 학교(중등학교)에 확대시켰다.

일제가 점점 강경한 태도로 나오게 되자 지금까지 반대 입장을 고수해 오던 장로교회 안에서도 일부의 선교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종전의 태도를 바꾸어 신사참배 문제는 개인의 신앙 양심에 맡겨야 하며, 학교는 당국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신사참배 문제로 많은 기독교계 학교들이 폐쇄될 것을 우려한 불신자들도 학교만은 어떻게 해서든지 계속해야 된다고 충고하였다. 그것은 기독교 학교를 민족문화 또는 민족정신이 전승될 수 있는 기관으로 생각하여 한국 독립의 최후의 보루처럼 생각했던 많은 한국민들의 우려를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신사참배가 기독교의 유일신론(唯一神論)과 직접적으로 대립이 되고, 이것을 강행할 때 교회의 반발이 크리란 것을 알게 된 일제는 간악하게도 교회가 이 문제만 양보한다면 앞으로의 교회행동에는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는 등 그 저항을 둔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남장로 선교회에서는 시종여일하게 신사참배 문제에 있어서 강력한 태도를 취하였다. 1935년 11월에 열린 연례회에서는 신사에 참배하기보다는 학교문을 닫는 편을 택하기로 결의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인톤목사를 위원장으로 뽑아 4,787의 등록자가 있는 10개의 기독교 학교를 폐지시키기 위하여 정부와 협상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임시위원회는 이러한 결정이 정부에 노골적으로 반대를 표시하는 것이요, 또한 한국인들에게 평판이 나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극도의 긴장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선교부는 실행 위원회(Executive Committee)의 충고와 지원이 필요함을 느꼈다. 그래서 그들은 Nashville에 있는 사무실에 연락해서 가능한 한 빨리 풀튼 목사가 현지에 와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의 심각성을 느낀 남장로교 해외선교부는 1937년 2월 2일 총무인 풀톤목사를 파견하여 조사 보고하도록 하였다. 풀튼목사는 일본실정과 신사문제를 포함한 일본문화 이해에 있어서 각별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남장로교 해외선교부가 한국교회의 신사참배 문제의 종교성 여부를 판가름하는 데 있어서 그의 의견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눈치챈 일본경찰은 풀튼목사가 한국에 체류하면서 활동하는 동안 엄격한 감시를 하는 한편 그에게 사람들을 보내어 선교회가 취하고 있는 강경 입장을 유화시키는데 영향력을 행사하여 주도록 요구하기도 하였다. 전주에서는 학교를 계속하게 해 달라고 3,000명이 시위를 했다. 그가 가는 곳 마다 목사들과 학생대표들, 교사, 학부모들, 관리들이 있었다. 그러나 문제에 대한 솔직한 토론은 불가능하였다. 왜냐하면 도처에 일본 형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는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솔직한 대화 내지는 조사가 불가능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20여 일간을 이곳에서 보낸 풀튼 목사는 남장로교 선교사들과 그 입장을 같이 하기로 결심하였다.

드디어 1937년 2월 말경 전주에서는 풀튼성명이 발표되었다. 이 자리에는 20여명의 한국인들이 참석하여 학교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청하고 있었으며, 밖에서는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드디어 풀튼 목사는 현재의 상태로는 학교사업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다는 간단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결정에 대한 모든 책임을 자기가 진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성명서를 발표한 후 풀튼목사는 전주역에서 군중들이 시위할 것에 대비하여 비밀리에 이리로 가서 기차를 타고 부산을 거쳐 귀국하였다.

풀튼 성명에 따라 남장로교 선교회가 경영하고 있는 10개의 중등학교는 1937년부터 신입생을 받지 않았고, 당국이 재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않는 한 나머지 학생들에 대한 교육은 계속해 나가기로 작성하였다. 남장로교 선교회와 당국과의 긴장은 팽팽히 계속되고 있었으나 그 후 수개월 동안 신사참배에 대한 강요가 없었기 때문에 9월 초까지 학교는 계속 문을 열 수가 있었다.


3. 신사참배의 거부와 폐교


남장로교 선교회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기로 결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총독부에서는 신흥학교에 신사참배를 계속 강요해 왔고, 그 때마다 학교당국은 심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1936년 1월 25일 자 조선일본의 "神社參拜 問題로 全北當局도 警告"라는 제하의 기사에 잘 나타나 있다.


[전주지국전화]이십사일 오전 열한시 도학무과(全北學務課)에서는 전주신흥학교 교장 <린튼>씨를 초청하여 한시간 가량이나 학무와 문을 굳게 잠그고 비밀한 속에서 의견을 교환한 바 있었는데 이는 오로지 신사에 참배하겠느냐? 못하겠느냐? 의 문제라 한다. 그리하여 목하(木下) 학무과장과 회견을 마친 <인턴>씨는 오늘 저녁차로 광주에 가서 그 곳서 참배 문제를 가지고 열리게 될 전라남북도 학교 관리이사회에 참석해 가지고 목하 학무과장의 요구조건을 제추하리라 한다. 그 이사회에는 전주를 비록해서 목포, 순천, 군산, 광주 등 다섯고을에 있는 남장로교 관계자들이 모일 터인데 그들이 결의하는 데 따라서 신사참배? 불참배? 문제가 결정되게 될 것으로 그 결과는 주목을 끈다.


위의 기사를 통해서 보면 신흥학교에 대한 신사참배 압력이 계속되었으을 알 수 있고, 이로 이한 인톤 교장의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학교 문을 닫더라도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는 선교회의 입장과는 달리 교사들이나 학부모 학생들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학교는 계속해야 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므로 학교의 책임자로서 인톤교장의 결단이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신사참배를 하고 학교를 계속하느냐, 학교 문을 닫더라도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느냐 하는 문제는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위원회 총무인 풀톤 목사의 내한과 그의 판단하에 달리게 되었다. 1937년 2월 말경 그가 신흥학교에 왔을 때 학교가 폐위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학생들은 그가 폐교여부를 결정짓는다는 말을 듣고 절대적인 환영이 뜻으로 강당을 가득 메운 음악회와 연극공연을 개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환영도 무위로 끝나고 끝내 풀톤 목사가 신사참배를 하고서는 학교를 계속할 수 없다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신흥학교는 폐교를 목전에 바라보게 되었다.

1937년 7월 7일 만주에서 중일전쟁(대동아전쟁)이 발발하였다. 그 후 일본은 매월 6일( 일본 천황이 중일전쟁의 칙서를 내린 날)을 애국일로 정하고, 이 날을 기해 전국 학교로 하여금 신사참배를 실시하도록 지시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이날 각 학교의 교사와 학생들로 하여금 중국에서의 일본군의 승리를 위해 기원하도록 한 것이었다. 전라남북도 지사들은 9월 4일 관내에 있는 학교장들을 소집하여 애국일 행사에 대한 사전 협의를 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참석하고 있던 선교학교의 교장들은 동방요배(東方遙拜)의 행사에는 참석할 수 있으나 신사참배는 선교회의 지령에 의해 참석할 수 없다고 잘라서 말했다. 선교회에서는 또한 학교 직원들과 학생들에게도 이와같은 학교의 방침을 시달하고, 학교 직원이나 학생들 중 그 누구도 학교를 대표하여 이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공포하였다.

드디어 9월 6일 아치이 되었다. 이날 아침 일본 경찰은 신흥학교 학생들을 강제로 집합시켜 다가공원에 있는 신사(현재의 충혼탑 자리)로 강제로 인솔하여 갔다. 이에 앞서 인톤 교장에게 찾아가서 "학생들은 황국신민인데 당신은 미국인이 아니오, 황국신민이 의무를 행하는데 당신이 무슨 권리로 막으시오?"하고 위협을 하였다고 한다. 이날 아침 신사참배를 하기 위하여 강제로 끌려가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인톤 교장은 눈물을 흘렸다. 다가공원에 강제로 인솔되어 온 학생들은 신흥학교와 기전학교의 학생들이었다. 당시 주변에는 많은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학교가 계속되기를 희망했던 학생들은 학교의 폐교냐, 계속이냐의 문제가 달린 이날 아침의 신사참배에 강제로 끌려가면서 신사참배를 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하여 착잡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막상 신사 앞에 섰을 때 신흥학교 학생들은 신사 앞에서 경례하기를 거부하였다. 신사에 대한 경례의 구령이 떨어지자 일본순사와 관리들만 허리를 굽히고, 학생들은 뻣뻣이 서서 지켜만 보고 있었다. 일본 경찰이 다시 경례하기를 강요하자 신흥학교 학생들은 이를 거부하고 퇴장하였고, 기전학교 학생들은 땅에 주저 앉아 울어버려 신사참배는 엉망이 되어버렸다. 마음 속으로는 착잡한 갈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신사참배를 하지 않음으로써 많은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일제의 억압에도 굴하지 않는 신흥인의 기개를 보인 것이었다.

학생들에 의해서 신사참배가 거부되자 총독부는 학교를 폐교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에 앞서 신흥학교 자진 폐교 청원을 내고 문을 닫았다. 이 사건으로 호남지방에 있는 광주 숭일, 수피아, 목포 영흥, 정명 등 네 학교는 폐교조치를 받았고, 순천 매산, 전주 신흥, 기전은 자진 폐교 청원을 내고 문을 닫았으며, 군산 영명학교 역시 폐교되고 말았다.

1937년 9월 22일 만 37년의 역사를 가지고 이제 막 웅비를 시작한 신흥학교는 일제 식민통치의 강압에 끝내 굴복하지 않고 비장한 폐교식을 거행하였다. 이날의 상황에 대해서 1937년 9월 23일자 조선일보는 "신흥학교 직원 생도 눈물겨운 석별식"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전주지국전화]파란중첩한 역사를 남기고 드디어 문을 닫히고 만 신흥학교 고등과 생도들은 이십 이일부터 짝없이 사랑하던 모교를 떠나 고창고등보통학교로 이사를 시작하였다. 이날 아침 열시에 신흥학생회에서는 교장 직원과의 분산석별회(分散惜別會)를 열었는데 그 석상에서 주고 받는 석별의 인사는 한마디 한마디가 눈물을 자아내는 것이어서 식장은 비장한 기운이 가득하였으며, 학생회에서는 여러 해 동안 저축한 돈을 가지고 만든 금메달을 이날의 기념으로 교장 이하 전직원에게 하나씩 진정(進呈)하였다.

그리고 고창고보로 전학하게 된 생도는 이날 열두 시 반까지에 전교생 246명 가운데 197명이었다. 나머지 49명은 학자(學資), 기타 학교에 바치는 일시금이 150원 가량 되는데 이것을 물지 못하여 전학하지 못하게 된 것으로 도당국에서는 학교당국으로 하여금 그 실정을 조사케 하는 한편 그 대책을 고려중이다.

추억 깊은 모교를 떠나 전학가는 생도들의 사항을 보면 이날 오후 두시에 버스 3대로 3학년 2학년생 75명을 보내고, 23일 오전 여섯 시에 25명과 그날 오후 세시에 25명, 24일 오후 두시에 50명, 25일 오후 두시에 25명을 보내기로 되었으며, 신흥학교 교원 중에서 고창고보로 전근된 것이 다섯명이다.

위의 기사에 의하면 전체 학생 246명 가운데 197명은 고창고보로 전학을 했고 나머지 49명은 중도에 학업을 포기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정든 모교가 폐교되어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는 학생들의 착잡한 심정은 그래도 나은 편이지만 150원의 돈이 없어서 더 이상 학업을 계속 할 수 없는 학생들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 것인가는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4. 신흥학교를 구하기 위한 움직임과 폐교 이후


38년의 역사를 가지고 호남의 대표적인 사학으로 성장했던 신흥학교의 폐교는 전주지역의 큰 손실이었고 동시에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래서 신흥학교의 학생이나 학부모뿐만 아니라 많은 전주 시민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신흥학교가 다시 학교를 계속 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 이러한 전주시민들의 소망에 부응해서 당시 전주의 유지였던 인창환(印昌桓) 씨는 신흥학교와 기전학교의 부흥자금으로 십 만원이라는 거금을 내놓았다. 1937년 9월 13일 자 조선일보는 "復興資金 十萬圓 印昌桓氏 欣然寄附"라는 제목하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싣고 있다.


[全州支局電話]신사참배 문제로 마침내 폐교 운명에 빠지고 만 전주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를 살리기 위하여 현금 십만 원을 내겠다고 11일 밤 11시 전주 사회에 쾌연히 발표한 조선 교육계의 명랑한 소식이 있다. 그는 다년간 전주 교육계를 위하여 물질, 정신 양 방면으로 거의 희생적 활동을 계속하여 오던 전주부내 인창환(54)씨로 일찍이 교육사업에 뜻을 두고 15년 전부터 전주 유치원에 매월 1백원씩 보조하는 것을 비롯하여 무산아동교육을 위하여 6년 전에 전주 화원정(花園町)에 5천원을 던져서 숭덕학교(崇德學校)를 설립하였으며, 또 연전 전주사범학교 설립 당시에는 1만 5천원의 거액을 기부하는 등 실로 전주 교육계에 둘도 없는 은인이다. 그런데 씨는 이번에 전주 교육계에 기나긴 역사를 가진 신흥 기전 남녀 중등학교가 일시에 없어지게 됨에 깊이 느낀 바 있어 10만원의 대금을 내어서 이 두 학교의 부흥자금으로 쓰기로 되었는데 전주 교육계는 물로 전조선 교육계를 위하여 많은 감격을 주게 하였다. 교육계를 위하여 10만원을 일시에 던진 일은 전라북도를 통하여 공전의 쾌사라 하여 전북 교육계에 크나큰 충격을 주고 있다. (후략)


이와 같은 인창환 씨의 장거(壯擧)에 대하여 전주의 모든 시민들은 크게 감격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당시 손영목 전라북도 지사는 뜻있는 지방 유지들의 활동을 보아가면서 폐교인기여부를 결정하겠다는 뜻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신흥 기전 두 학교의 폐교 수속은 저간 도 당국에 제출되었는데 그 인가에 대하여 명재명간 발표할 예정이다. 전주 유지 인창환 씨가 전기 두 학교를 위하여 십만원을 내겠다는 뜻은 지금 들었는데 그 열성은 전주 교육계를 위하여 실로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이 두 학교를 할리려면 50만원의 기금을 요하게 된다. 방금 전주 인사들이 그 방면으로 활동하는 중인 즉 금명간 부민 유지의 활동상황을 더 모아 가지고 폐교인가 여부를 발표하려 한다.


당시 선교회에서는 학교를 팔지도 않을 것이며, 지금까지 모든 학교들이 견지해왔던 기독교적인 기준에 의하여 운영할 수 없는 단체에게 양도하거나 빌려주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따라서 어느 단체나 개인이 신흥학교와 기전학교를 사거나 양도받을 수 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학교를 새로 지어 학생들만 인도해 가는 길뿐이었다. 그리기 위해서는 총 50여만원의 비용이 드는데 인창환씨가 기부하기로 한 십만원은 비록 큰 돈이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는 금액이었다. 당시 신흥학교를 살리는 데는 30만원만 모금이 되면 가능하였다. 그 당시 돈이 있는 유지들이 학교를 드나들면서 학교의 명의를 그대로 인계해 주면 그대로 이어받아 학교를 살리겠다는 뜻을 전했으나 인톤교장은 이를 거절했다고 하며, 학교의 이와 같은 태도와 모금의 한계 때문에 학교를 다시 살리고자 하는 노력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37년 9월 22일 폐교식을 마친 학생들은 고창고보로 전학을 했다. 많은 학생들이 단체로 전학을 했고, 선생님들도 다섯분이나 함께 갔기 때문에 아주 낯설지는 않았다. 거기에다 당시 고창고보 교장인 김종흡 선생은 신흥학교에서 교무주임을 하다가 1934년 9월에 고창고보 교장으로 오신 분이어서 학생들은 친근감이 있었다. 고창고보에서는 신흥학교에서 전학 온 학생들은 따뜻하게 맞아 주었으며 기존 학생들과 전학온 학생들 사이에는 자그마한 마찰도 없었다. 오히려 고창고보는 신흥학교 학생들을 맞이함으로써 학교가 더욱 번창하였다. 신흥학교 학생들이 고창고보로 간 후 고창고보가 전북 체육대회에서 연4승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시의 사정을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다.

신흥학교에서 사용하던 책상과 걸상의 일부는 고창고보로 옮겨졌으며, 모든 서류는 도청 학부부에 보관되었고, 건물은 후에 일본인들이 저금 관리국수련소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또한 당시 창설중이던 순창 농고에서는 과학기재와 비품을 가져 갔으며 학교 운동장은 뭇 사람들이 밭으로 경작하였다. 이때 고창고보로 전근된 교사들은 김태훈, 김교문, 박준영, 최주남, 김병수 선생들이었다.

일제의 군국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강요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신흥학교는 38년이라는 장구한 역사를 마감하고 말았다. 신사참배가 우상숭배라는 차원에서 남장로교 선교회의 결의에 따라 신흥학교도 끝내 신사참배를 거부한 것이며, 당시 학생들이나 교사들, 그리고 많은 학부모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학교를 계속하기를 희망했지만 최종적으로는 학생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함으로써 우상 앞에 절을 할 수 없다는 신흥인의 의지를 보인 것이다. 이 폐교로 인하여 신흥의 역사가 일시 단절되기는 하였지만 신흥인의 기개와 정신은 그대로 남아 복교된 신흥의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될 신흥인의 얼 속에 더 큰 생명으로 살아남을 것이다.

2. 신사참배의 강요와 선교부의 입장


1930년대에 있었던 일제의 신사참배에 대한 강요는 교회에 대한 무서운 시련이며 거침돌이었다. 신도가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정신적 지주라는 점에서 뜻있는 애국 인사들의 민족적 반감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교회에 대해서는 신앙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반발은 더욱 컸다. 물론 일본 정부는 신사참배가 기독교학교를 난처하게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견해를 취하고 있다. 왜냐하면 신사참배는 애국심을 위한 것이고 종교적인 취지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부 인사들 중에는 이와같은 일본 정부의 견해에 따라 신사참배가 국가의식에 불과하다고 안이하게 해석하여 일제의 정책에 순응 동조한 사람들도 있었다.

천주교와 감리교에서는 신사참배가 종교적 의식과는 다른 애국적 행사라 하여 이에 참여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장로교회의 주류는 신하가 신도라는 일본고유의 종교에 근거하여 있으며, 거기에 참배하는 일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견해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사참배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신사참배가 종교적 행위라는 근거를 풀톤(C.Darby Fulton)목사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이유를 들어서 말하고 있다.


1. 모든 일본문학은 신도를 종교로서 언급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

2. 일본과 한국의 일반 대중들 뿐만 아니라 지도적인 학자들도 신도를 종교로 여기고 있 다.

3. 숭배의 대상은 신성을 나타내는 모든 부속물까지를 포함한다. 그것들은 창조적인 힘, 초인적인 용감성,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 기동에 답할 수 있는 힘 등으로 여겨지 고 있다.

4. 숭앙의 대상물들은 신화와 미신의 범위 안에서 날조된 것들이다. 섬기라고 강요하거 나 그것을 인정하라고 하는 것은 단지 종교의 자유뿐만 아니라 지적 정직에도 위반 되는 것이다. 똑같은 어려우에 당면한 불교 신자들이 정부에 대항하기 위해 기독교인 들과 때때로 제휴해 왔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5. 신사에서 행해지는 의식은 확실히 종교적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 의식을 진행하는 절차의 어느 시점에서 위로부터 영(靈)들을 불러오기도 하고, 몸을 깨끗하게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죄를 씻는 것을 상징하는 정화(淨化)의 의식이 수행되기도 한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성장하고 공부를 한 풀톤 목사의 신사참배의 성격에 대한 위의 지적은 신사참배가 분명히 종교적 의식임을 밝혀주고 있다. 따라서 남장로회 선교사들은 이런 입장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신사참배 강요의 마수는 먼저 1935년 기독교계 학교에 뻗쳐왔다.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장 윤산온(尹山溫, G. S. Mc Cane)은 이 문제로 인한 최초의 희생자로 알려져 있다. 학교를 대표하여 신사참배를 하지 않을 경우 강제출국을 시키겠다는 협박적인 통첩을 받자 그는 분명하고도 단호하게 신사참배가 가지는 종교적 성격 때문에 개인적 신앙 양심상 불응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로 인하여 윤교장이 교장직을 박탈당하고 미국으로 돌아가자 일제는 신사참배 강요 범위를 모든 기독교 학교(중등학교)에 확대시켰다.

일제가 점점 강경한 태도로 나오게 되자 지금까지 반대 입장을 고수해 오던 장로교회 안에서도 일부의 선교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종전의 태도를 바꾸어 신사참배 문제는 개인의 신앙 양심에 맡겨야 하며, 학교는 당국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신사참배 문제로 많은 기독교계 학교들이 폐쇄될 것을 우려한 불신자들도 학교만은 어떻게 해서든지 계속해야 된다고 충고하였다. 그것은 기독교 학교를 민족문화 또는 민족정신이 전승될 수 있는 기관으로 생각하여 한국 독립의 최후의 보루처럼 생각했던 많은 한국민들의 우려를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신사참배가 기독교의 유일신론(唯一神論)과 직접적으로 대립이 되고, 이것을 강행할 때 교회의 반발이 크리란 것을 알게 된 일제는 간악하게도 교회가 이 문제만 양보한다면 앞으로의 교회행동에는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는 등 그 저항을 둔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남장로 선교회에서는 시종여일하게 신사참배 문제에 있어서 강력한 태도를 취하였다. 1935년 11월에 열린 연례회에서는 신사에 참배하기보다는 학교문을 닫는 편을 택하기로 결의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인톤목사를 위원장으로 뽑아 4,787의 등록자가 있는 10개의 기독교 학교를 폐지시키기 위하여 정부와 협상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임시위원회는 이러한 결정이 정부에 노골적으로 반대를 표시하는 것이요, 또한 한국인들에게 평판이 나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극도의 긴장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선교부는 실행 위원회(Executive Committee)의 충고와 지원이 필요함을 느꼈다. 그래서 그들은 Nashville에 있는 사무실에 연락해서 가능한 한 빨리 풀튼 목사가 현지에 와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의 심각성을 느낀 남장로교 해외선교부는 1937년 2월 2일 총무인 풀톤목사를 파견하여 조사 보고하도록 하였다. 풀튼목사는 일본실정과 신사문제를 포함한 일본문화 이해에 있어서 각별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남장로교 해외선교부가 한국교회의 신사참배 문제의 종교성 여부를 판가름하는 데 있어서 그의 의견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눈치챈 일본경찰은 풀튼목사가 한국에 체류하면서 활동하는 동안 엄격한 감시를 하는 한편 그에게 사람들을 보내어 선교회가 취하고 있는 강경 입장을 유화시키는데 영향력을 행사하여 주도록 요구하기도 하였다. 전주에서는 학교를 계속하게 해 달라고 3,000명이 시위를 했다. 그가 가는 곳 마다 목사들과 학생대표들, 교사, 학부모들, 관리들이 있었다. 그러나 문제에 대한 솔직한 토론은 불가능하였다. 왜냐하면 도처에 일본 형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는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솔직한 대화 내지는 조사가 불가능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20여 일간을 이곳에서 보낸 풀튼 목사는 남장로교 선교사들과 그 입장을 같이 하기로 결심하였다.

드디어 1937년 2월 말경 전주에서는 풀튼성명이 발표되었다. 이 자리에는 20여명의 한국인들이 참석하여 학교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청하고 있었으며, 밖에서는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드디어 풀튼 목사는 현재의 상태로는 학교사업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다는 간단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결정에 대한 모든 책임을 자기가 진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성명서를 발표한 후 풀튼목사는 전주역에서 군중들이 시위할 것에 대비하여 비밀리에 이리로 가서 기차를 타고 부산을 거쳐 귀국하였다.

풀튼 성명에 따라 남장로교 선교회가 경영하고 있는 10개의 중등학교는 1937년부터 신입생을 받지 않았고, 당국이 재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않는 한 나머지 학생들에 대한 교육은 계속해 나가기로 작성하였다. 남장로교 선교회와 당국과의 긴장은 팽팽히 계속되고 있었으나 그 후 수개월 동안 신사참배에 대한 강요가 없었기 때문에 9월 초까지 학교는 계속 문을 열 수가 있었다.

3. 신사참배의 거부와 폐교


남장로교 선교회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기로 결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총독부에서는 신흥학교에 신사참배를 계속 강요해 왔고, 그 때마다 학교당국은 심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1936년 1월 25일 자 조선일본의 "神社參拜 問題로 全北當局도 警告"라는 제하의 기사에 잘 나타나 있다.


[전주지국전화]이십사일 오전 열한시 도학무과(全北學務課)에서는 전주신흥학교 교장 <린튼>씨를 초청하여 한시간 가량이나 학무와 문을 굳게 잠그고 비밀한 속에서 의견을 교환한 바 있었는데 이는 오로지 신사에 참배하겠느냐? 못하겠느냐? 의 문제라 한다. 그리하여 목하(木下) 학무과장과 회견을 마친 <인턴>씨는 오늘 저녁차로 광주에 가서 그 곳서 참배 문제를 가지고 열리게 될 전라남북도 학교 관리이사회에 참석해 가지고 목하 학무과장의 요구조건을 제추하리라 한다. 그 이사회에는 전주를 비록해서 목포, 순천, 군산, 광주 등 다섯고을에 있는 남장로교 관계자들이 모일 터인데 그들이 결의하는 데 따라서 신사참배? 불참배? 문제가 결정되게 될 것으로 그 결과는 주목을 끈다.


위의 기사를 통해서 보면 신흥학교에 대한 신사참배 압력이 계속되었으을 알 수 있고, 이로 이한 인톤 교장의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학교 문을 닫더라도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는 선교회의 입장과는 달리 교사들이나 학부모 학생들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학교는 계속해야 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므로 학교의 책임자로서 인톤교장의 결단이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신사참배를 하고 학교를 계속하느냐, 학교 문을 닫더라도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느냐 하는 문제는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위원회 총무인 풀톤 목사의 내한과 그의 판단하에 달리게 되었다. 1937년 2월 말경 그가 신흥학교에 왔을 때 학교가 폐위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학생들은 그가 폐교여부를 결정짓는다는 말을 듣고 절대적인 환영이 뜻으로 강당을 가득 메운 음악회와 연극공연을 개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환영도 무위로 끝나고 끝내 풀톤 목사가 신사참배를 하고서는 학교를 계속할 수 없다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신흥학교는 폐교를 목전에 바라보게 되었다.

1937년 7월 7일 만주에서 중일전쟁(대동아전쟁)이 발발하였다. 그 후 일본은 매월 6일( 일본 천황이 중일전쟁의 칙서를 내린 날)을 애국일로 정하고, 이 날을 기해 전국 학교로 하여금 신사참배를 실시하도록 지시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이날 각 학교의 교사와 학생들로 하여금 중국에서의 일본군의 승리를 위해 기원하도록 한 것이었다. 전라남북도 지사들은 9월 4일 관내에 있는 학교장들을 소집하여 애국일 행사에 대한 사전 협의를 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참석하고 있던 선교학교의 교장들은 동방요배(東方遙拜)의 행사에는 참석할 수 있으나 신사참배는 선교회의 지령에 의해 참석할 수 없다고 잘라서 말했다. 선교회에서는 또한 학교 직원들과 학생들에게도 이와같은 학교의 방침을 시달하고, 학교 직원이나 학생들 중 그 누구도 학교를 대표하여 이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공포하였다.

드디어 9월 6일 아치이 되었다. 이날 아침 일본 경찰은 신흥학교 학생들을 강제로 집합시켜 다가공원에 있는 신사(현재의 충혼탑 자리)로 강제로 인솔하여 갔다. 이에 앞서 인톤 교장에게 찾아가서 "학생들은 황국신민인데 당신은 미국인이 아니오, 황국신민이 의무를 행하는데 당신이 무슨 권리로 막으시오?"하고 위협을 하였다고 한다. 이날 아침 신사참배를 하기 위하여 강제로 끌려가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인톤 교장은 눈물을 흘렸다. 다가공원에 강제로 인솔되어 온 학생들은 신흥학교와 기전학교의 학생들이었다. 당시 주변에는 많은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학교가 계속되기를 희망했던 학생들은 학교의 폐교냐, 계속이냐의 문제가 달린 이날 아침의 신사참배에 강제로 끌려가면서 신사참배를 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하여 착잡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막상 신사 앞에 섰을 때 신흥학교 학생들은 신사 앞에서 경례하기를 거부하였다. 신사에 대한 경례의 구령이 떨어지자 일본순사와 관리들만 허리를 굽히고, 학생들은 뻣뻣이 서서 지켜만 보고 있었다. 일본 경찰이 다시 경례하기를 강요하자 신흥학교 학생들은 이를 거부하고 퇴장하였고, 기전학교 학생들은 땅에 주저 앉아 울어버려 신사참배는 엉망이 되어버렸다. 마음 속으로는 착잡한 갈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신사참배를 하지 않음으로써 많은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일제의 억압에도 굴하지 않는 신흥인의 기개를 보인 것이었다.

학생들에 의해서 신사참배가 거부되자 총독부는 학교를 폐교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에 앞서 신흥학교 자진 폐교 청원을 내고 문을 닫았다. 이 사건으로 호남지방에 있는 광주 숭일, 수피아, 목포 영흥, 정명 등 네 학교는 폐교조치를 받았고, 순천 매산, 전주 신흥, 기전은 자진 폐교 청원을 내고 문을 닫았으며, 군산 영명학교 역시 폐교되고 말았다.

1937년 9월 22일 만 37년의 역사를 가지고 이제 막 웅비를 시작한 신흥학교는 일제 식민통치의 강압에 끝내 굴복하지 않고 비장한 폐교식을 거행하였다. 이날의 상황에 대해서 1937년 9월 23일자 조선일보는 "신흥학교 직원 생도 눈물겨운 석별식"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전주지국전화]파란중첩한 역사를 남기고 드디어 문을 닫히고 만 신흥학교 고등과 생도들은 이십 이일부터 짝없이 사랑하던 모교를 떠나 고창고등보통학교로 이사를 시작하였다. 이날 아침 열시에 신흥학생회에서는 교장 직원과의 분산석별회(分散惜別會)를 열었는데 그 석상에서 주고 받는 석별의 인사는 한마디 한마디가 눈물을 자아내는 것이어서 식장은 비장한 기운이 가득하였으며, 학생회에서는 여러 해 동안 저축한 돈을 가지고 만든 금메달을 이날의 기념으로 교장 이하 전직원에게 하나씩 진정(進呈)하였다.

그리고 고창고보로 전학하게 된 생도는 이날 열두 시 반까지에 전교생 246명 가운데 197명이었다. 나머지 49명은 학자(學資), 기타 학교에 바치는 일시금이 150원 가량 되는데 이것을 물지 못하여 전학하지 못하게 된 것으로 도당국에서는 학교당국으로 하여금 그 실정을 조사케 하는 한편 그 대책을 고려중이다.

추억 깊은 모교를 떠나 전학가는 생도들의 사항을 보면 이날 오후 두시에 버스 3대로 3학년 2학년생 75명을 보내고, 23일 오전 여섯 시에 25명과 그날 오후 세시에 25명, 24일 오후 두시에 50명, 25일 오후 두시에 25명을 보내기로 되었으며, 신흥학교 교원 중에서 고창고보로 전근된 것이 다섯명이다.


위의 기사에 의하면 전체 학생 246명 가운데 197명은 고창고보로 전학을 했고 나머지 49명은 중도에 학업을 포기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정든 모교가 폐교되어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는 학생들의 착잡한 심정은 그래도 나은 편이지만 150원의 돈이 없어서 더 이상 학업을 계속 할 수 없는 학생들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 것인가는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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