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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7-01-05
 제목  장기려(張起呂, 1911-1995)
 주제어  [한국인 의사]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1. 시작하면서
  그동안 장기려 선생님(이하 장기려, 그분은 생전에 박사, 원장, 회장 등의 호칭보다는 선생이라는 호칭을 더 좋아하셨다)의 헌신적인 삶을 기념하고 계승하기 위해 많은 행사들과 강연, 출판 그리고 연구소 설립등이 이루어져 왔다. 과연 성산 장기려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기위해 노력했고, 범인보다 한층 높은 수준의 그리스도인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 장기려를 추앙하거나 본받으려는 것이 아니다. 장기려로 하여금 그러한 삶을 가능케 했던 근원과 그가 그토록 닮으려고 애썼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또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려는 그분의 삶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과 우리의 후손들에게 한 모범으로 삼고저 한다.

2. 장기려의 생애와 삶
◆ 2.1. 출생
  장기려(張起呂, 1911-1995)는 1911년 음력 8월 14일에 평안북도 용천군(龍川郡천) 양하면(楊下面) 입암동(立岩洞) 739번지에서 장운섭(張雲燮)과 최윤경(崔允卿)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일이 호적상으로는 1909년 7월 15일인데, 그 무렵까지도 한국에는 전통적인 조혼풍습이 있었고 한국을 강점한 일본인들이 10대가 장가가는 이런 풍습을 비판하게 되자, 당시 동장으로 있던 삼촌(張日燮)이 그를 일찍 장가보내는데 도움이 될까하여 두 살을 올렸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 장운섭(張雲燮)은 글씨를 잘 쓰고 한학에 소양이 있고 동리에서는 지도자였기에 마을 사람들이 장 향유사(鄕有司)라고 불렀다. 장기려는 그의 조모(이경심; 1851-1922)의 이름에 관해서 두 자(이 경)만 기억하고 있으며, 조모에 대하여 회상하기를 "할머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독실히 믿는 분이어서 입암동에 세우는 교회에 많은 연보를 하셨던지 그 예배당 대들보에 할머님의 이름이 씌여졌던 것이 생각난다"라고 한다.
  이처럼 장기려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조모에게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음을 확신한다. 그의 조모는 그가 일곱 살 때까지 한 이불에서 같이 잠을 잤고, 그를 없고 예배당에 다녔으며, 아침과 저녁의 가정 예배를 인도하며 기도할 때마다 "이 금강석(애명)이가 자라나 하나님 나라와 현실 나라에서 크게 쓰여지는 일꾼이 되게 하소서"하고 기도했다. 그 기도의 응답으로 장기려 자신이 살고 있음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그의 조모의 기도는 부친의 신앙교육과 함께 그에게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그는 '어머니의 젖을 먹고 할머니의 믿음과 기도로 자라면서 아버지로부터 성경에 나타난 인물에 대하여 옛 이야기로 듣고 자신을 성경의 역사적인 인물에 동일화시켜 생각했던 것이다.' 그로 인해 그는 경건한 신앙인의 가정에서 자라났으며,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되어갔다.

◆ 2.2. 학업
  비교적 총기가 있었던 장기려는 한학자였던 부친에게서 천자문을 배워서 비록 뜻은 몰랐으나 일곱 살 때에 다 외우고 있었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일곱살 때인 1917년 부친이 설립하고 교장으로 있던 의성소학교(義聖小學校)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일본어를 가르치지 않았으며 오히려 배일사상을 가르쳤고, 성경을 가르침으로써 인격과 도덕생활을 가르쳤다. 이 학교에서의 교육은 이상에서 살펴본 할머니의 가르침과 함께 장기려를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1923년 신의주고보의 입학시험에서 합격하지 못한 장기려는 개성의 송도고보에 합격하여 입학했다. 그 당시 만 13세가 되지 못하면 입학이 되지 않았으나, 장기려는 호적이 두 살 많게 되어 있어서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송도고보에 입학한 장기려는 자신이 표현하는 것처럼 '시간을 낭비하며 2년을 보냈다.' 3학년이 되어서야 '하나님의 시간을 도적질하고 부모님이 주신 학비를 남용하고 있는 불효막심한 자식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공부에 열중하려고 노력했다.' 이 때 장기려는 인간은 죄인이며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지 않고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동시에 '앞으로 무엇을 해서 사명을 다할 수 있을까?'는 문제로 고민하던 중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속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으니, 자신의 전 인격을 그리스도에게 바치고 그의 뜻대로 살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던 것이다.' 장기려는 이 때를 '자신이 거듭난 때요, 하나님께 전부 바쳐 드리기로 결심한 때라고 생각했다.' 시간을 낭비하던 그의 습관은 고쳐졌고, 1925년 여름 어느 날 감리교 감독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 때, 남은 70여년의 생(生)을 영위할 그의 인생관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장기려의 인생에 있어서 첫 번째 전환점이었다고 볼 수 있다.
  송도고보 3학년 때인 1925년 고종황제가 붕여하자, 장기려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만월대(고려시대 집정하던 터전)에서 일주간 이상 매일 기도했는데, 이때부터 장기려는 자신의 장래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다. 그는 교육자가 되고자 하는 뜻도 있었는데, '교육자는 인격이 가장 고상하고 또 유익한 인물을 길러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교육자가 되려면 당시 일본 동경에 있는 고등사범학교 또는 광도에 있는 고등 사범학교에 입학해야 했는데, 실력도 모자랄 뿐 아니라, 학비조차 없어서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4학년 2학기가 되면서 '공업이 국가 사회를 유익하게 하는 데 가장 크게 이바지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4학년을 마치면서 여순공과대학 예과시험을 응시했으나, 실패였다.
  1928년 송도고보를 졸업한 장기려는 가정 형편상 수업료가 비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포기하고, 수업료가 적은 경성의전에 입학했다. 이때 그는 "들어가게만 해주신다면 의사를 한번도 못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습니다."라고 매일 서원했다고 술회하였다. 이상규 교수가 이것이 '선한 의사'로서의 그의 생애를 결단했던 첫 출발이라고 지적하는 것처럼 이때로부터 '선한 의사' 장기려의 남은 66년의 인생이 시작되었고, 그 삶은 그 때의 기도의 응답이자 하나님께 드린 약속의 시행이었던 것이다.
  그의 기도의 결과, 경성의전에 입학한 장기려는 과외활동이나 전공외적인 탐구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그 대신 전공학업에 열중하였다.

◆ 2.3 성실한 의사 장기려(1932-1950)
  5년간의 공부를 마친 장기려는 1932년 3월 20일, 22세의 나이로 경성의전을 졸업하였고, 그해 4월 9일 김봉숙과 결혼하였다. 졸업후의 전공에 관해서 안과나 내과등의 전공에도 관심을 보였으나, 결국은 자신의 장인이 될 김하식(金夏植)이 권유로 백인제 선생 문하에서 외과를 전공하기로 결정했다. 김하식은 내과 의사였는데, 장기려가 외과를 전공해서 같이 개업할 것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1932년부터 백인제 선생의 문하에서 외과를 전공하던 장기려는 1936년까지 "충수염(筮垂炎) 및 충수염성(筮垂炎性) 복막염의 세균학적 연구"에 관한 270 예의 실험을 마쳤고, 1940년 3월 나고야 제국 대학에 제출, 9월에 통과되어 의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학위 논문이 통과되자, 장기려는 '삼십이립(三十而立)이라는 생각으로 경성의전을 떠나 이용설(李容卨)의 소개로 1940년 3월 평양의 연합기독병원(기홀병원) 외과 과장으로 갔다. 그가 이 병원으로 옮겨간 지 8개월 후인 1940년 11월에는 그는 이 병원의 원장이 되었는데, 이는 엔더슨(Albin Garfield Anderson, 在韓기간 1911-1941) 원장이 귀국하게 되었고, 당시 학위를 가진 사람이 그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불만을 가진 자들의 텃세 때문에 두 달만에 외과과장으로 강등되었고,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였는데, 이는 그가 이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기도하기를 "예수님이 만일 저와 같이 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했을 때, "무엇을 어떻게 해. 너에게 맡기는 그 일에 충성하면 되잖아"라고 하는 응답을 받았기 때문이며, 그는 그러한 응답에 순종했던 것이다.
  '사면초가(四面楚歌) 속에서 모욕적인 대우를 받으면서도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신념을 갖고 일한 결과 1년 후에는 텃세를 부리던 그들이 오히려 창피를 당하게 되었다'고 술회하는데, 이는 그가 어릴 때, 요셉의 꿈 이야기 속에서 얻었던 교훈이 바로 자신에게 이루어지던 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942년부터는 그의 후학인 민광식(閔珖植)과 함께 "농흉(膿胸)에 관한 세균학적 연구"라는 논문을 '조선의학회지(朝鮮醫學會誌)'에 발표했고, 단독 연구로 "근염(筋炎)의 조직학적 소견"을 일본외과학회(日本外科學會)와 조선의학회(朝鮮醫學會)에서 발표한 일도 있었다. 1943년에는 당시만 해도 간농염(肝膿炎)은 수술할 수 있어도 종양은 수술을 못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간암이 간상변부에 발생한 한 예에 대해서 설상절제수술(楔狀切除手術)을 실시해서 조선의학회에 발표했던 것이다.
  평양연합기독병원에서 일하던 1945년 5월, 장기려는 황달에 걸렸다가 박소암(朴小岩) 박사(이비인후과)의 치료덕분에 한달만에 치유되었으나, '신경쇠약'으로 묘향산 부근 약수터에서 요양해야 했다. 요양중인 8월 15일, 소화(昭和) 천황의 무조건 항복으로 해방을 맞았던 것이다.
  해방후 장기려는 김명선(金鳴善)선생의 추천으로 조만신 선생이 위원장으로 있던 평안남도 인민위원회의 위생과장이 되었다가, 1945년 11월에는 평안남도 제1인민병원(도립병원) 원장겸 외과 과장이 되어 약 1년간 일했다. 1947년 1월부터는 김일성대학의 의과대학 외과학 교수겸 부속병원 외과학 강좌장으로 일하게 됐는데, 그때 그는 주일은 일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그곳으로 갔고, 이 학교에 근무하는 동안 주일을 지키는 일과 환자를 수술하기 전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에는 일관된 삶을 살았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동안, '극성파 학생들이 종교에 대하여 짖궂은 질문을 해도 그는 하나님의 실재를 믿는다는 것을 단호하게 대답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탄압받지 않은 것은 의사로서 할 일을 열심히 했기 때문이라'고 회고하는 것처럼, 그의 성실함과 신실함은 공산주의자들에게도 인정을 받았고, 결국 1947년 말에는 모범일군상을 받았으며, 1948년에는 북한 과학원으로부터 북한 최초의 의학박사 학위를 수여 받기도 했던 것이다.

◆ 2.4 참된 의사 장기려(1950-1995)
  1950년,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장기려는 차남 가용(家鏞)과 함께 남하(南下)하였는데, 안광훈(安光薰) 소령의 도움으로 야전병원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대동강을 무사히 건녔으며, 닷새 동안을 걸어서 개성에 도착한 후, 개성서 서울까지는 기차로, 서울서 화차를 타고 부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날이 바로 1950년 12월 18일이었다. 그가 부산에 온지 3일 후인 12월 21일에 그는 제3육군병원에 취직되어 약 6개월 동안 봉사하게 되었다.
  1951년 6월 20일 한상동 목사와 경남구제위원회의 전영창선생의 요청으로 부산 영도구 남항동에 위치한 제3영도교회 창고에서 무료의원을 시작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유학하던 전영창선생은 졸업을 일주일 남겨둔 채 조국을 위하여 5천 달러를 모금하여 귀국했고, 이 돈이 복음병원의 초석이 되었다. 이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으며, 장기려는 1976년 6월까지 25년간 복음병원 원장으로 값진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평생을 통해 신앙생활로서 가장 보람이 있었던 때가 평양 기홀 병원에서 사면초가를 극복한 시절이라고 한다면, 의사로서 처음 뜻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때가 초기의 복음병원 시절이라 할 수 있다"고 술회한다.
  한상동 목사는 복음병원을 고려신학교 부속병원으로 하여 한 곳에 함께 건물을 지을 것을 건의했고, 한부선 목사, 말스베리(D. R .Malsbary, 馬斗元)선교사, 장기려는 그 뜻에 찬성했다. 먼저 교인들의 헌금으로 송도의 땅 1만 5천평을 구입했으며, 건축자재는 말스베리 선교사가 AFFAK에 가서 원조물자를 구해왔고, 건축비는 말스베리 선교사가 친구들에게 편지해서 1954년 3만불을 얻어서 고려신학교 셋 채를 지었고, 1955년에 다시 3만불을 얻어서 약 30병상의 현대식 복음병원 건물을 짓게 되었다.

  장기려는 복음병원에 근무 하면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학 교수로(1953. 3-1956. 9),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및 학장으로(1956. 9-1961. 10), 서울 카톨릭의대 외과학 교수로(1965-1972. 12) 봉사하기도 했다.
  장기려는 1959년 2월 간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었던 당시에 간의 대량절제수술을 성공하여 중요한 기여를 하였으며, 이로인해 1961년에는 대학의학회 학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56년에는 부산대학에 '부산모임'이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그 모임은 '처음에는 개인적인 전도와 구원을 위해 성경공부를 하였고, 후에는 평화를 위한 기도를 하였다. 이것은 장기려가 평화에 대한 갈망이 컸기 때문'이라고 회고한다.
  1959년에는 일신병원장 메켄지(Dr. Helen Mackenzie), 내과의사인 이준철(李俊哲), 치과 의사인 유기형(劉基亨) 등과 함께 '부산기독의사회'를 조직하였는데, 행려병자들을 돌보기 위한 목적이었으며, 이러한 노력은 장기려선생이 얼마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려고 했는지를 보여주는 일면이라 하겠다.
  1968년에는 채규철(蔡奎哲), 조광제(趙光濟), 김서민(金瑞敏) 등과 함께 의료보험조합을 만들 것을 합의했고, 그해 5월 부산시 동구 초량동에 위치한 복음병원 분원에서 조합원 700명으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발족했다. 이는 채규철씨가 덴마크에서 유학하면서 경험한 덴마크 의료혜택이 계기가 되었고, '북한에서 강제적으로 시행되는 것에 비해 자의로 협동해서 하면 더 좋을 것이라'는 장기려의 생각이 일치했고, 열매를 맺었던 것이다. 병원의 문턱이 높다고 하던 당시에 적은 돈을 내고 "건강할 때 이웃 돕고, 아플 때 도움받자"라는 기치하에 시작한 이 운동은 많은 영세가정에 의료의 길을 열어줬다고 하는데, 큰 의의가 있었다.
  어느 날 어느 조합원 한 가족이 건강진단결과 건강하다는 결과가 나왔고, 장기려는 이 순간이 그가 청십자운동을 시작한 이래 가장 기뻤던 일이라고 술회하는데, 이는 그가 청십자운동에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였는지, 또한 이 운동을 통한 그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정부가 의료보험제를 실시하기보다 10년 앞서 시작된 이 의료보험조합은 1975년에는 의로보험조합 직영의 청십자의원의 개원을 가능케했고, 이듬해에는 한국 청십자 사회복지회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그의 지역사회 봉사활동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1979년 8월에는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장기려는 1976년 6월 복음병원을 은퇴했고, 그후에도 청십자의원에서 진료하는 등 여러 사회봉사활동을 계속했으며, 은퇴가 없는 일생을 살았다.

3. 장기려의 이상
  장기려의 삶에 대한 이상규 교수의 평가처럼 그의 삶의 원동력은 기독교 신앙이었다.
그의 기독교 신앙이 그의 삶을 인도해왔음이 틀림없다. 또한 그의 기독교 신앙의 뿌리는 경건주의라 볼 수 있다. 그는 어린시절, 신학적으로는 정통주의이며 신앙적으로는 경건주의인 북장로교 신앙전통 하에서 자랐다.
  우리는 장기려를 기독교 이상주의자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에서 가르치시는 그 원리들을(산상수훈, 황금률) 원칙적으로 지키려고 애썼으며, 그렇기에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현실을 모르는 사람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이상적인 삶은 우리들이 추구해야할 교과서적인 삶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대로 "달라는 자에게 주는" 그러한 사람이었으며, 필요한 자를 찾아서 채워주는 사람이었다. 그러한 그는 자신의 것을 포기해야 했으며, 무소유적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의 무소유적 삶은 그를 '위대한 성자'라는 수식을 붙게 했으며, 그의 선하고 양심적이며 헌신적인 의료행위는 그에게 '한국의 슈바이쳐'라는 별명을 붙게 했다.
  나아가 장기려는 그의 교회관에 있어서도 무소유적인 성향을 나타냈는데, 그는 관념적인 교회의 일원으로 남기를 원했지만 제도적인 교회의 소속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한 그의 성향은 그에게 무교회주의자라는 오명을 남겼다.

◆ 3.1. 무소유 사상
  장기려는 어린 시절 부친으로부터 야곱과 요셉, 다윗의 이야기를 들었다. 특히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은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소유하지 못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교훈을 주는 요셉의 이야기는 그에게 무소유의 경제관에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장기려의 어린시절은 그의 조부 대에 치부하였기 때문에 비교적 부유한 편이었다. 그는 그 시절을 회고하면서 "남의 마름을 지낸 할아버지가 당대에 4백석을 했으니 좋게 번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후에 아버지가 별 잘못도 없이 그 4백석지기를 다 날린 것도 하나님의 뜻이었을 것이다"라고 술회한다. 이는 자신의 가계사에 대한 기독교적 신앙에 입각한 의미를 투영한 해석이기도 하거니와, 그 가산에 대한 집착을 나타내지 않는 것은 그의 재물에 대한 무소유적 관점때문일 것이다.

  1947년 말 장기려는 모범일군상을 받았으며, 1948년에는 북한 과학원으로부터 의학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는데, 이는 그가 9200원이라는 당시 최고의 연봉을 받으면서도 '47년까지는 가재도구를 팔아서 썻고, 48년 이후에는 아내가 재봉틀로 환자복 따위를 짓는 등 부업을 해서 생계를 꾸려나갔기' 때문이었다. 비록 공산주의자들은 장기려의 이러한 청빈한 삶을 치하해 의학박사학위를 주었지만, 장기려는 하나님을 소유하면 모든 것을 소유했다는 성경적 무소유 개념으로 삶을 살았고,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었다.
  장기려는 지나치게 잘 먹는 것은 죄가 된다고 생각했다. 한 사람이 잘 먹는 한끼의 식사로 몇 사람이 굶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그는 항상 가슴 속에 새겨놓고 있었던 것이다.
장기려는 물욕이 많은 불행을 불러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한 사람의 안위를 위해서 돈을 사용하는 것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그것으로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돈을 사용하려고 했다. 그러한 그의 생각의 바탕에는 다른 사람도 나처럼 소중한 존재라는 이타주의와,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평등한 존재라는 인간존중의식이 내재되어 있었다.
  장기려는 그의 수입의 일정액을 매달 '남을 돕는 약속된 일'에 썼으며, 79년 「막사이사이」상금도 모두 진료장비 확충을 위해 사용했다. 집 한 간 없는 문제에 대해서도 '정년퇴직한 복음병원 명예원장으로 있어 그 사택에서 살면 족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나아가서 장기려의 무소유적 정신은 이웃사랑에 근거해 있다. 이러한 그의 이웃사랑은 하나님 사랑의 한 표현이었는데,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것에 대하여 장기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만 있다면 사람에 대한 사랑은 자연히 그것으로부터 일어나리라고 해서 사람에 대한 사랑의 부족을 변호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우리들에 대한 사랑의 보답은 우리들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보다는 차라리 형제들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안된다."
  함석헌 선생은 장기려의 회갑 때, "그 사람이 어디 능력이 있어서 일을 하나. 욕심이 없으니 다 되는 거지."라고 했는데, 이는 장기려의 무소유적 성품이 가장 친한 벗에게 어떻게 비쳐졌는지 알 수 있다.
  장기려는 "이 세상의 지위와 명예, 권세와 능력, 부귀와 영화를 자기 중심주의의 사람들의 분깃처럼 여겼다." 그는 이러한 관점에서 그 자신이 인생을 바쳐 헌신한 복음병원이 건물과 규모가 크지는 것을 '슬퍼하며 염려하는 일들'로서 묘사했다. 그는 병원이 건물과 규모가 커짐에 따라 유지비가 많이 필요하게 되고, 따라서 수입을 올려야만 되는 기업적인 원리가 복음병원에도 역시 적용되는 것과, 복음병원 역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 환자들을 끌 수 있는 병원의 모양은 하고 있으나, 실속은 수입을 위주로 하는 병원이 되어가는 것을 슬퍼하고 염려했던 것이다.
  또한 장기려는 자신이 '늙어서 별로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은 다소 기쁨이긴 하나 그러나 죽었을 때 물레밖에 안 남겼다는 간디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가진 것이 너무 많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무소유적 관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계속해서 그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아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아직은 급제했다는 생각이 안들어 부족을 느끼면서 살고 있다. 나 자신을 부정하고 육(肉)의 세계를 부정하고 영(靈)의 세계로 가려는 노력을 안하는 것은 아니지만.....'라고 말하면서 그렇게 청빈했던 자신의 삶도 아직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느끼면서 자신이 부족하다고 고백하며, 자신이 그렇게 무소유의 삶을 살려는 것의 궁극적 목적은 이 땅에 소망을 둔 것이 아니라, 저 너머의 삶(천국)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 3.2 무소유적 교회관
  장기려의 교회관은 그의 무소유사상과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그의 교회관은 무소유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는 교회의 외형적이고 조직적인 화려함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이고 규범적인 가르침의 신실한 시행속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찾고 실천하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그러한 그의 사상적 배경속에는 무교회주의자들의 영향이 침전되어 있음을 간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교회관을 살피기 위해 무교회주의자들의 영향과 교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3.2.1 무교회주의의 영향
   장기려는 "오로지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구원을 받으면 된다고 생각한 것인데 현실나라에서 구원하도록 애써야만 비로소 나 자신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학교를 졸업하고, 후지이 다께시(藤井武),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 함석헌(咸錫憲), 김교신(金敎臣) 등 진짜로 위대한 저서를 읽고 마음에 접한 후부터다" 라는 자신의 회고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경성의전을 졸업한 후 그는 후지이 다께시(藤井武),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 함석헌(咸錫憲, 1901-1986), 김교신(金敎臣, 1901-1945) 등 일본과 한국의 무교회주의자들의 저서를 접하면서 신앙상의 변
화를 겪게 되었다.
  이때로부터 장기려의 신앙에 변화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당시의 장기려선생의 신앙에 대하여 "개인구원을 강조하면서 내세지향적인 신앙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현실 나라에서 사회를 구원하도록 애써야만 비로소 나 자신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은 구원의 영역을 개인적인 것에서 사회적인 것을 포용하는 단계로 확대하는 한편 내세지향 일변도에서 현실나라를 인식하는 차원으로 신앙적인 단계를 승화시킨 것"이라고 평가하는 이만열교수의 지적에 유념하고자 한다.

-3.2.1.1. 김교신과의 교제
  장기려는 장기려는 김교신에게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무교회주의자의 제1인자라고 할 수 있는 있는 김교신 선생은 내가 가장 영향을 받은 사람 중의 하나다'라고 자처할 정도로 장기려는 김교신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 사실이다.
  김교신은 1919년 3월 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고, 1920년 4월 16일 동경에서 노방전도를 받고 신자가 되어 그해 6월 27일 동경 시래정(矢來町) 성결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시래정 교회가 훌륭한 목사님을 쫓아내는 모습을 보면서 제도 교회에 대한 불신이 생겼고, 그후로 1년간 방황하다가 우찌무라 간조의 문하에서 성경을 배우게 된다. 이때부터 7년간 우찌무라 간조의 문하에서 1922년부터 김교신은 우찌무라 간조를 "나의 유일한 선생"이라고까지 극찬하였다. 김교신은 우찌무라 간조에게서 교리를 배웠으나 한국과 일본이라는 현실세계의 차이로 인해 어느 정도 우찌무라 간조를 극복하고 민족주의적인 기독교 가치관을 성공적으로 세운 것으로 평가된다.  김교신이 일본 유학에서 귀국한 때는 1927년 3월이었고, 우찌무라 간조의 무교회주의에 영향을 받아서 「성서조선」을 발간하여 그의 교회관을 전파하였는데, 장기려는 김교신의 「성서조선」을 정기구독하였고, 동일한 유형의 역사적인 변천을 겪으면서 김교신에게 깊이 빠져들었다. 1942년 3월 「성서조선」제 158호의 권두문인 "조와"(弔蛙)라는 글이 문제가 되었을 때 장기려는 정기 구독자라는 이유로 김석목(金錫穆), 유달영(柳達永) 등과 함께 평양 경찰서 유치장에 12일간 구금된 일도 있었다.
  김교신은 하나님이 위탁하신 모든 직업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귀중한 예배라고 규정하고 조직화된 교회를 반대한다. 장기려가 의사로서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그 책임을 충실하게 수행한 것은 그의 성실한 성격도 원인이었겠지만, 모든 직업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귀중한 예배라는 김교신의 가르침에 대한 내적확신이 있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김교신은 분명 신앙을 고백하고 또 교회 생활도 영위하는 인물이었지만, 그의 사상은 한마디로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우찌무라 간조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었다. 또한 김교신은 교회안의 구원을 외치는 것은 마치 중세 로마 교회가 저질렀던 교권주의의 오류에 빠지는 것으로 간주하였는데, 이 때문에 그는 교회주의를 반대할 뿐만아니라, 교회의 세례와 성찬, 교리 등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이러한 김교신의 영향을 받은 장기려 역시 "진리는 기독교 보다 위대하다.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3.2.1.2. 함석헌과의 교제
  장기려는 함석헌과의 교제를 통해서 무교회주의적 영향을 받았다. 장기려가 함석헌을 처음 만난 때는 1940년 1월초 서울 정릉에 있던 김교신의 집에서였다. 1940년, 장기려는 경성의전 내과에서 근무하던 때에 친구 손정균의 소개로 정능 김교신 선생댁에서 1월 1일에서 3일까지 열리는 겨울집회에 참여하고 무교회주의자 김교신과 함석헌의 성경강의를 듣게 되었다. "함석헌은 '묵시록을 강의했는데, 그 박식함과 종말관적 역사관을 풀어 일러 주시는데, 탄복했으며, 이때부터 그가 '김교신, 함석헌, 송두용, 유달영 선생을 알게 되었고, 믿음의 교제를 하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그 겨울집회 이후 장기려는 함석헌 선생과 일생을 가까이 지내며 영향을 받았는데,  장기려는 1951년 1월에서 6월에 제3육군병원에 근무하던 동안에 함석헌을 초빙하여 설교와 강의를 하게 하였으며, 1957년 부산의대에서 함석헌을 초빙하여 주일모임을 가졌다. 1968에 시작된 부산모임에서도 함석헌을 초빙하거나 그의 글을 게재하였다.
   함석헌은 1921년 오산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유영모(柳永模)를 통해 무교회주의를 배우고 도일한 이후 김교신을 따라 내촌감삼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적어도 1960년대까지는 무교회주의자였다. 그러나 1960년대를 거쳐가면서 퀘이커교도(Quaker)로 전향하였다. 객관적 말씀 혹은 외적 말씀으로서 기록된 성경보다는 내적 말씀 곧 내적 빛(Inner light)을 강조하는 퀘이커는 함석헌에게 매력적이었고 결국 함석헌은 무교회주의를 떠났다. 특히 함석헌은 제도교회의 무용론을 지나치게 역설했고, 심지어는 교회주의는 바리새주의라고 매도하고 "조직적 교회를 시인하는 것은 분명히 비그리스도적이다"라고 하였다. 함석헌은 교회주의를 이처럼 비판하면서도 타종교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관용적인 측면이 있었다. 함석헌은 19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감옥에 있는 동안 "불교경전을 조금 읽었다. --- 그러는 동안에 불교와 기독교는 근본에서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고, 6.25 동란중에 "인도교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됐고 읽을수록 종교는 하나라는 생각이 분명해졌다"고 하였다. 또 1964년에는 "나는 지금 종교는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함석헌은 교회제도를 부인할 뿐만 아니라 신앙, 성례, 교의, 신앙고백, 교회조직까지 부정하는 극단적 무교회주의자였는데 후기에 와서는 기독교의 유일성까지 부정하고 종교상대주의 혹은 종교다원주의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그의 후기 행적을 보면 어떤 점에서 함석헌은 기독교 신앙인이라기 보다는 범종교주의자(凡宗敎主義者)였다. 모든 종교를 포용하는 듯하면서 동시에 타종교와의 경계선을 제거하였다. 말하자면 그는 종교상대주의 혹은 종교다원주의에 머물지 않고 범종교주의적 사상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장기려는 함석헌으로부터 적지않은 영향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와 함석헌 간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함석헌은 1970년 4월 「씨 의 소리」를 발행하면서 민주화 운동의 선두에 서 있었으나 장기려는 이 일에는 직접적으로 간여하지 않았다. 함석헌이 민주주의와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한 점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했으나 한국사회의 문제, 곧 민주화를 이룩하려는 정치적 활동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어떤 점에서 함석헌은 현실주의자였다면 장기려는 이상주의자였다. 그는 차라리 김교신처럼 신앙운동, 사랑의 실천을 통해 사회의 문제를 개혁하고자 했다. 그러나 장기려는 함석헌과의 교분을 계속하였다. 그는 함석헌을 1968년 1월부터 1988년 6월까지 20년 이상으로 '부산모임'의 매월 한차례 정기 강사로 청하였는데, 복음전도를 위한 부산모임에 범종교주의자를 강사로 청했다는 점은 상당한 모순이며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 이런점을 보면 장기려는 교회의 전통이나 신학 혹은 교의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장기려는 함석헌, 김교신외에도 그는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1940년 5월(혹은 6월), 서울에서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 선생이 로마서 강의를 열자 장기려는 그 강의에 3일간 참석했고, 그 후 약 1주일 후에 야나이하라 다다오 선생이 평양 신양리 예배당에서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도운 일도 있었다.
  이렇듯 함석헌, 김교신 등과의 교제로 인하여 장기려는 무교회주의적 성향을 받아들였고, 그의 경건주의적이고 복음주의적 교회관이 변해갔던 것이다.

-3.2.2 무교회주의자 장기려
  1940년부터 장기려는 무교회주의자들과 교제하였고, 거의 일생동안 그들과의 교제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가 과연 무교회주의자였는지, 과연 언제부터 무교회주의자였는지 정확하게 규명하기는 힘들다. 만일 장기려가 무교회주의자라고 한다면 그는 함석헌과 김교신과는 다른 무교회주의자였으며, 제도적 교회에 남아있는 무교회주의자였다. 그는 김교신과 함석헌과의 교제로 영향을 많이 받고 있던 1948년 8월에 평양의 산정현 교회에서 장로로 장립받았다. 말하자면 교회주의자로 제도교회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무교회주의자들의 성경연구와 그 가르침을 수용하는 입장이었다. 또한 함석헌과 여러 면에서 생각을 달리하면서도 그와 깊이 교제했던 점을 보아 그는 어느 양극단에 안주하여 다른 하나를 무시하는 편협성에 빠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장기려는 남하한 이후 첫 주일인 1950년 12월 24일에 한상동 목사가 시무하던 초량교회에 참석하여 예배드렸고, 그날 정보기관에 끌려가 일주일간 조사를 받은 일이 있는데 이때 한상동목사와 미국정통장로교(OPC) 선교사인 치과의사 최의손(崔義遜, Dr. William H. Chisholm)이 그의 신원을 보증해 주어 풀려난 일이 있다. 분명치 않으나 그 이후부터 산정현교회를 재건하기까지 초량교회에 출석했다. 한상동목사와는 평양에서부터 이미 교제가 있었고 그의 요청으로 복음병원을 개원, 상호 협력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상동 목사가 당시 장로교총회 유지재단으로부터 초량교회 명도를 요구받고 1951년 10월 초량교회를 떠나 삼일교회를 설립할 때, 한상동목사를 따르지 않고, 이이라장로, 박덕술권사와 함께 1951년 10월 부산 중구 동광동에서 북에 두고 온 산정현 교회를 재건하였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이상규교수는 그가 "아마도 제도교회, 다시말하면 교회주의의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뜻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라고 했는데, 그가 설립한 산정현교회가 1978년 8월 통합교단 소속이었던 박광선 목사가 부임할 때까지 독립교회로 있었던 것이 그 증거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장기려는 비록 제도적교회에 발을 딛고 있었으나, 그의 머리로는 무교회적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그의 태도에 대하여 송두용은 "교회도 떠나지 않고 무교회의 신앙을 이해하며 그것에 대하여 변치 않는 태도가 좋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산정현교회의 장로로 봉사해 온 장기려는 1981년 12월 시무장로에서 은퇴하였고 원로장로로 추대되었다. 그후 1987년부터 치료차 서울로 올라갈 때까지 '종들의 모임'이라고 흔히 불리는 비교파적, 비조직적 신앙운동 단체에 관여하였다. 그는 제도교회의 모습을 보았고, 그 모순의 한계성을 뛰어넘으려 노력했다. 그는 모든 외형적인 것이 한계를 만들어낸다고 보았고, 외형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는 순수한 복음운동에 관심을 가졌으며, 따라서 그는 '종들의 모임'에서 영적 안식을 추구한 것이다. 그는 무교회주의자들에 대하여 '진짜로 위대한 크리스챤'으로 추앙하였고, 함석헌 선생을 '부산모임'에 자주 초빙하여 만년에 이르기까지 교제를 계속하였다. 나아가 그의 말년에는 그가 속한 산정현교회를 출석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그의 무교회주의적인 성향은 점진적으로 짙어갔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한 세심한 연구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1946년 겨울, 장기려는 서포(西浦장:평양에서 20리)에 있는 장면 박사가 환자를 봐 달라는 연락을 받고 20리의 눈길을 걸어서 갔는데, 그가 서포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기차도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기쁨을 말했을 때, 장면 박사는 "먼 데를 갈적에는 기차를 타셔야지요."라고 했다. 이것에 대하여 장기려는 회고하기를 "기차를 교회에 비유한 것이다. 신교는 자유롭게 믿어서 천국에 가지만 카톨릭은 모자나 의상에도 여러 가지 표현이 있고 교회(기차)를 통해야만 천국으로(먼 데) 간다는 입장을 암시한 말이었던 것이다."라고 한다. 이 말 속에서 장기려는 교회를 통해 구원받는 카톨릭에 비해 신교는 자유롭게 믿어 천국에 간다고 언급한다. 이것은 그의 교회관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는데, 그는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음을 믿었던 것이다.

  장기려는 한국교회의 지나친 외적 성장운동이나 교회당 건물을 크게 짓는 것 등을 포함한 외형적 확장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교회가 건물을 크게 짓는다던가 외형적 확장에 우선적인 관심을 가지는 것은 신앙의 본질일 수 없다고 보았고, 이런 경향을 자본주의적 맘몬이즘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밀톤의《실락원》에 맘몬이 고층건물을 잘 짓고, 물질세계의 발전을 잘 일으키는 재능이 있는 마귀로 묘사된 것을 읽고서, '고층 건물을 보면 맘몬의 힘을 연상하게 되고, 특히 하늘을 찌를듯한 고딕건물 예배당도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느껴지지 아니하고 사람의 예술품은 될지언정 맘몬의 재주인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하였다. 이는 그의 무소유적인 사상이 지나치게 비관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그의 생각은 그의 무교회주의적 성향과 관계없지 않을 것이다.
  장기려는 교회가 복음의 본질적인 활동보다는 외적 성장이나 외형적 확장을 중시하는 것에 대하여 비판적이었고, 그것은 맘몬이즘으로 강조하였다. 그는 또 "나는 한국의 기독교는 자본주의 기독교라고 해서 혹독히 비평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이 맘몬과 타협해서 보조를 같이 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도 않았었다"라고 말한 일이 있다.
  장기려는 가난한 자가 고통받는 현실을 외면하는 교회와 성도들의 현실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나는 무신론, 사회주의를 찬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자계급에 대한 가난한 자들의 외침은 실로 인류의 여론이다. 부자들이 고통을 당할 때가 오리라. 이 문제는 다만 부자 계급만의 일이 아니다. 부족하다고 해도 우리도 어느 정도 재물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형제의 궁핍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는 일은 없는가? 아, 크리스챤이 믿음의 형제의 궁핍을 보고도 단순한 동정심조차 일으키지 않고 조금의 기부금도 내는 사람이 적은 것은 이 얼마나 저주받은 사회인가요! 물질적 원조나마 순수한 마음으로 자유롭게 행해지지 않는 사회에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그의 비판에 합당한 그의 삶이 없었다면 그는 한갖 판단자밖에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에 합당한 무소적이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이러한 장기려 자신의 검소하고도 청빈한 삶은 이런 자본주의적 가치와 물질지향적인 사회와 교회에 대한 비판이었던 것이다.

  또한 장기려가 자신의 생애 말년에 '조직된 교회'(산정현교회)에 출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교회주의자라는 수식어를 그의 이름앞에 붙이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전술한바와 같이 그는 제도적인 교회에 대한 집착이 없었을 뿐이었으며, 단지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노력하는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이 되며,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을 이웃사랑으로 구체화시킴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것이 구원을 이루는 데 필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제도적 교회에 대한 소속감만으로 구원에 대한 착각속에 살아가는 현대 교인(크리스챤이라고 보기 어려운)들에게 교훈과 경고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장기려의 신앙사상은 이상규교수의 언급처럼 '교회역사와 전통을 중시하기보다는 현실적 응답을, 공동체적이라기 보다는 개인적인 성격이 짙으며 모든 기구, 조직, 제도로부터 떠나고자 했던 것이다'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의 신앙사상에 무교회주의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건전한 종교"라는 글에서 "종교가 사람의 손으로 지은 회당에 서 있고 사람의 의식에 치중하고 또 신앙개조 만을 고조하고 음악과 예술적 표현 및 통계만을 들어 평가하게 될 때에는 그 종교가 불건전하다"고 말하고 이런 외형적인 것에 메이지 않는, 외적이 것으로부터 자유한 복음적 신앙이 참된 종교라고 강조한 바가 있다. 이렇게 볼 때, "그는 교회의 전통이나 신앙고백, 교리적 내용에 대한 관심 보다는 이런 것들에 메이지 않는 신앙운동, 신앙적 실천, 삶이 있는 신앙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즉 그는 신앙의 정통성의 문제보다는 신앙의 정체성의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가졌던 분"으로 평가한 이상규 교수의 평가는 정당하다고 하겠다.

◆ 3.3. 고향(본향)의식
  인간은 실향인(Heimatlose)이고, 귀향자(Heimkebrer)이다. 인간은 누구나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본성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 전광식 교수는 고향 개념을 네 가지 지평에서 설명하고 있다. 첫째, 고풍성(古風性)의 지평이다. '고향'의 '故'는 '예' 내지 '오래됨'을 뜻하므로, 고향은 급변하는 시대에 따라 변모한 그런 새로움의 세계가 아니라 '예스러운 모습'을 가리킨다. 둘째, 회상성(回想性)의 지평이다. '고향'의 '故'는 또 '떠나보낸' '떠나온'의 의미가 있으므로, 고향은 내가 떠나온 지나간 과거에서의 내 삶의 공간이다. 그래서 고향은 늘상 '추억' 및 '동심'과 결부되어 있다. 셋째, 은닉성(隱匿性)과 순수성(純粹性)의 지평이다. 고향은 일반적으로 '시골'과 바꾸어 쓸 수도 있을 정도로 도회지처럼 노출되는 때묻은 공간이 아니라 감춰지고 숨겨진 영역이다. 넷째, 풍경성(風景性)과 풍물성(風物性)의 지평이다. 고향은 어떤 곳이든지간에 내가 어린 시절 뛰어놀던 들녘과 강, 산과 바다가 있으며, 또 고유의 풍물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 그것은 인위적 문화의 저편에 있는 천연적 자연을 지니고 있으며, 그 나름의 고유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네 가지 지평은 우리에게서 '고향'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 의미를 드러내 주는 요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고향에 대한 이러한 설명처럼 '예스러운 모습'을 지닌, 어릴 때의 추억과 남겨놓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있는 고향이 장기려의 가슴속에도 남아 있었다. 이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 북(北)에 두고 온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김봉숙)와 자녀들에 대한 연민의 정이 일생 그를 실향인(Heimatlose)이자, 귀향자(Heimkebrer)로 살게 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 장기려의 삶을 인도해 간 것은 현실적인 고향(北)에 대한 그리움만이 아니었다. 그의 삶을 인도해 간의 또 하나의 축은 영원한 본향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그러므로 장기려의 내세적·현실적 고향의식을 살펴보는 것은 그를 이해하는 좋은 방편이 될 것이다.

- 3.3.1 내세적 고향(본향)의식
   실향인으로서의 인간의 존재 규정을 근원적으로 추적하자면 에덴 동산에서의 원초적인 사건에까지 소급해야 한다. 인간의 범죄와 그 결과는 존재의 근원인 하나님에게로부터의 일탈은 물론 삶의 터전이던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후 인간은 하나님과 영원한 거처로 귀환하기전까지는 '나그네'와 '순례자'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장기려는 이 땅의 삶이 영원한 종말이 아님을 알려주는 성경의 가르침을 순전히 믿었고, 이 땅에 자신의 재물과 명예를 쌓아두려는 어떤 이들과는 다른 범인의 삶을 살았다.
  장기려가 남한에서 결혼하지 않은 것은 북한에 두고온 그의 아내 김봉숙과의 백년가약때문이었지만, 그가 남한에서 자신의 재산을 축적하지 않은 것은 내세적 본향의식이 그 근저에 있다고 보여진다. 그는 '죽었을 때 물레밖에 안 남겼다는 간디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가진 것이 너무 많다'라고 했는데, 이는 이 땅에서의 삶에 애착을 갖기 보다는 자신의 닮으려고 노력했던 그리스도와 연합의 그 날을 더욱 소망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무소유의 삶을 사는 것이 육(肉)의 세계를 부정하고 영(靈)의 세계로 가려고 하는 노력'으로 간주하는데, 자신이 그렇게 무소유의 삶을 살려는 것의 궁극적 목적이 이 땅에 소망을 둔 것이 아니라, 저 너머의 삶(천국)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3.3.2 현실적 본향의식
  6·25가 발발하자, 장기려는 차남 가용(家鏞) 만을 데리고 남하하였다. 잠시 동안의 이별이라 생각한 그의 남하는 45년이라는 이산의 아픔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그의 일생 북에 있는 가족을 그리워했으며, 특히 그의 사랑하는 아내와의 혼인서약을 잊지 않았다. 그는 그의 생의 말년에 "낙조"라는 노래를 애창하였는데, 이 노래는 결혼초기에 아내에게서 배운 노래였기에 아내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이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장기려가 생애의 거의 대부분을 보냈던 송도 복음병원의 옥상에 있는 사택에는 그가 말년에 즐겨 부러던 노래들을 파일로 만들어 두었는데, 그 파일 속에 있는 노래들은 "사랑하는 이와 고향에 대한 동경"을 주제로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노래들로 보아서 그가 말년에 얼마나 고향과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을 그리워했는지 알 수 있다. 그가 말년에 즐겨불렀던 노래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낙조", "아이 아이 아이", "오! 내 사랑 오! 내 기쁨(Caro mio ben)", "희망의 나라로", "먼 산타루치아", "사공의 노래", "그 집 앞", "한 송이 흰 백합화", "아! 목동아", "언덕 위의 집", "목련화", "봄처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봉선화", "푸니쿨리 푸니쿨리", "아침", "순례자의 노래", "사랑의 송가", "사랑의 종소리", "희망의 속삭임", "등대지기", "동무생각", "바위고개" 등이 있다.

4. 끝맺으면서
  장기려는 이 시대를 살다가 진정한 모범적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리스도인이란 호칭대신 그를 표현할 다른 말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노력했고, 그러한 삶의 결과로 그는 '가진 것이 없는 청빈한 자',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고 천국을 소망하는 자', '물질주의 원리가 지배하는 교회보다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가 나타나는 교회를 더 사모했던 자'로 우리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성향 때문에 혹자는 그를 무교회주의자로, 평화주의자로, 휴머니스트로, 표현하려한다. 그러나 많은 표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기려 그는 일생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의 삶은 "이 아이가 자라서 하나님 나라와 이 나라에서 크게 쓰여지는 일군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던 그의 할머니의 기도처럼, 또한 조국의 평화와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죽게 되기를 원했던 그의 소원대로 그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진정한 평화와 사랑을 실천했던 사람이었다.
  참다운 스승을 찾기 어려운 시대에 우리에게 영원한 스승이신 그리스도를 우리보다 한 발자국  앞서 따라가신 장기려 선생님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각계의 노력들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 있는 성자’, ‘바보 의사’, ‘작은 예수’ 등으로 불리며 우리 곁을 살다간 성산 장기려 선생(1911-1955)은 이면과 표면의 경계를 허문 사람이었다. 감출 것이 없는 삶을 살았고, 어떤 상황에서든 있는 그대로를 드러냈다. 진실과 정직을 포기하느니 감옥행을 결심할 정도였다. 1950년대 초반, 장기려 선생은 수술 중에 출혈점을 잡지 못해 결국 환자를 사망시킨 일이 있었다. 장기려 선생은 경찰서에 가서 자기의 실수로 환자가 죽었다고 사실대로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경찰은 “면허증 있는 의사가 환자를 수술하다가 죽었는데 그걸 어떻게 하겠소. 할 수 없지 뭐” 하며 풀어주었다. 선생의 이런 고백은 그의 생애에서 반복되었다.

 

장기려 선생의 또 다른 인간됨은 어떤 사람을 거지, 대통령, 행려병자 등 그가 가진 권력·돈·신분에 따라 각기 다르게 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선생은 이북에서나 이남에서나, 그러니까 젊었을 때나 나이가 많았을 때를 막론하고 자기 집에 구걸 온 거지와 겸상을 했다. 오죽했으면 북한의 아내가 40년 만에 남편의 사진을 받아들고 자식들에게, “두 개 가지면 벌받는 줄 아시는지 번번이 거지에게 옷 벗어 주고 퍼렇게 얼어서 들어오셨어. 내가 부엌에서 굶는 것도 모르시곤 길 가는 거지들을 불러와서 겸상 차려 먹이신 양반”이라고 했겠는가. 차남 장가영의 집에 머물 때는 가정 일을 돕는 아주머니와 함께 밥상을 차려야지 그렇지 않으면 차별한다고 불호령이 떨어졌다.

 

선생이 6·25전쟁 이후 우직스럽게 무료병원을 계속한 것이나 부산대학교 뒤편 창고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행려병자들을 식구처럼 돌보았던 것은 그들을 자기 자신처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정부가 의료보험을 시작하기 10년 전에 가난한 환자들을 위한 의료보험조합을 설립했던 것, 그리고 몇 년 뒤 보사부 장관이 영세 사업자를 위한 의료보험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23만 명의 회원을 둔 의료보험 조합을 만들 수 있었던 것 또한 차별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선생에게는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든 거지든 행려병자든 모두가 사람으로 보일 뿐이었다. 때문에 누군가가 선생의 가장 훌륭한 점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신분이 높든 낮든 사람을 사람으로 대한 사람’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를 통해 이루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죄로 상실된 창조 당시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내가 선생의 어떠한 업적보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했던 인간됨에 매료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정직하게 자신의 내면과 맞서는 모습이나 사람을 사람으로 대했던 인간됨에 매료된 나머지 선생이 의학도로서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를 놓친다면 그 또한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그런 점에서 이제까지 나온 선생의 전기들에 대해 나는 할 말이 많다) 선생의 차남 장가영 박사가 회고하는 아버지는 평생 공부밖에 몰랐던 사람이었다. 1947년에 김일성대학의 교수가 되었을 때, 다른 교수들은 일본 의학서적을 번역하여 강의했지만 장기려 선생은 영어 원서로 가르쳐 학생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러시아어를 배우지 않고 김일성대학 교수가 되었지만 3년이 지난 6·25전쟁 직전에는 소련의 첨단 외과학 서적을 번역하라고 김일성대학이 공식 휴가를 내 줄 정도로 러시아어의 실력을 인정받았다. 아무것도 챙기지 못하고 급하게 부산까지 피난 와 제3육군병원에 근무할 때는 오가와(小川) 교수가 쓴 외과학 책을 암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의관들에게 막힘없이 강의할 수 있었다.

 

1953-1956년까지 이미 서울대 교수를 지냈던 선생은 1959년 또 다시 서울의대로부터 교수가 되어 달라는 요청을 계속 받았다. 복음병원 때문에 몇 년째 고사하던 선생이 1961년에 스스로 서울대 교수가 된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새까만 후배 민병철 박사가 미국 의사 라이센스를 획득하고 서울대로 돌아오자 그에게 미국 의학을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선생은 70이 넘어 선진 의학을 공부하고 들어 온 후배 의사들에 비해 자신의 전문지식이 크게 뒤지고 수술도 예전만 못하여 심각하게 은퇴를 고려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선생은 80이 다 된 나이에 인제대학 의과대학 대학원생 강의에 들어가 후배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새로운 의학지식을 익히며 자신의 존재 의의를 회복했다. 선생이 수술 직전에 늘 기도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만 수술을 앞두고 해당 의학 서적을 다시 한 번 공부한 후 수술실로 갔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그러나 선생이 학자로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았는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은 1992년에 뇌혈관 장애로 쓰러졌을 때였다. 선생은 3개월 동안 병원에 있으면서 자신이 69년에 지은 외과학 교과서에 오류가 있는 점을 발견하였다. 당시 선생은 오른쪽에 마비가 와서 글씨를 쓸 수가 없었던 관계로 제자에게 타이핑을 부탁하여 교재 편집위원 교수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문제가 된 것은 “《외과학 각론》 356 page 아래에서 열 번째 줄” 딱 한 줄이었다. 


한국 교회가 사회로부터 조롱거리가 된 지 이미 오래되었다. 양적 성장을 내세우며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호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한국 교회들은, 최근 더 탐욕스럽고, 더 뻔뻔스럽고, 더 사악한 모습을 자주 드러내고 있다. 선생은 일제 때 신사참배에 굴복한 한국 교회에 크게 실망하였다. 해방 후에는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던 교회들의 독선으로 한국교회가 갈가리 찢어지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70년대부터는 교회가 자본주의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이 아니라 돈을 섬기면서 벌이는 온갖 추태를 지켜보아야 했다. 때문에 선생에게 있어서 교회 개혁은 매우 중요한 관심사였다. 선생은 교회 개혁을 열망하다가 77살에 진정한 교회 개혁을 실천하는 작은 무리들을 만난 후 장로로 평생을 봉사한 산정현교회를 버렸다. 늘그막에 찾은 진정한 교회 개혁 공동체라 확신한 ‘종들의 모임’을 위해 자신이 한국 교회 안에서 누리고 있었던 모든 명성이나 관계들을 포기했다. 나는 한국 교회의 젊은 청년들이 선생의 이웃을 향한 무한 봉사와 함께 진정한 교회에 대한 눈물과 애정, 그리고 자본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본래 기독교에 대한 동경을 배웠으면 좋겠다.


우리 사회는 2002년 대선을 분기점으로 세대 간의 갈등이라는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하였다. 비교적 단순하던 좌와 우의 이념적 갈등은 극좌와 좌파 사이, 진보와 개혁 사이, 그리고 냉전적 수구와 합리적 보수 사이의 싸움으로 더 한층 복잡해졌다.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의 생각과 이념을 그대로 간직한 채 서로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를 유지하는 일이 매우 힘겨워 보인다. 그것이 정치적인 이념의 문제이든, 문화적인 취향의 문제든, 우리 사회는 의견 차이 앞에서 너무 쉽게 이성을 잃는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취향의 문제 앞에서도 인간에 대한 존엄성이나 인간에 대한 예의 또한 너무 쉽게 상실된다. 장기려 선생은 기독교 교파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고신대학 복음병원에서 수십 년 동안을 병원장으로, 주기철 목사와 조만식 선생을 배출한 보수적인 산정현교회에서 장로로 40년 이상을 봉사했다. 그런 가운데서 선생은 당시 한국교회가 거의 이단시하던 무교회주의적 색채를 지닌 부산모임을 32년간이나 이끌었다. 교단이나 교회의 입장에서 보자면 대표적인 반정부 인사일 뿐 아니라 퀘이커교도였던 함석헌 선생과 계속 친분을 유지하며 매월 그 분을 공개적인 성서모임의 강사로 모셨다. 어떤 때는 함석헌 선생의 공개성서 강좌를 산정현교회로 유치하기도 했다. 선생은 함석헌 선생과 처음 첫 만남을 가졌던 1940년 이래, 공산 치하에서든, 6․25 전쟁 중이든, 또는 군사 정권 하에서든, 심지어는 함석헌 선생이 ‘분홍색 스캔들’로 진보 진영의 일부 인사들로부터 외면을 당할 때조차도 한 결같이 그의 곁을 지켰다. 스승 유영모 선생마저도 끝내 외면했던 함석헌을 선생은 죽는 날까지 친구로, 또한 결정적인 재정 후원자로 관계를 유지했다. 선생은 함석헌 선생 사후에 부산모임을 접게 되는데, <부산모임>에 쓴 종간사의 한 구절은 의미심장하다. 부산모임의 사명 중 일부는 함석헌 선생께서 예수의 제자라는 것을 전하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선생은 지금 이 땅의 지식인이나 정치인, 심지어 종교인과 많은 점에서 달랐다. 나는 함석헌 선생 주변의 진보적인 인사들이 장기려 선생이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또는 정치적 보수성 때문에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점은 선생 주변의 친구나 후배나 제자들도 마찬가지여서 선생이 너무도 정치적이고 신앙적으로도 혼란스러운 함석헌 선생을 가까이하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두 분이 걸어 온 길은 달랐지만, 함석헌과 장기려는 평생을 함께 한 신앙과 삶의 동지였다. 저들의 다름은 인간의 존엄을 훼손할 수 없었고, 취향은 본질을 흔들 수 없었다. 더 중요한 사실은 함석헌과 장기려가 자신들의 주장이나 취향을 숨기거나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때문에 아수라 같이 변해버린 정치판을 보면서, 그리고 지엽적인 차이로 상대방의 인격까지 죽이려드는 우리 사회의 천박한 싸움들을 보면서 선생이 그리워진다.


장기려 선생은 해방 후 북한 공산 치하에서 5년을 살았다. 사실 북한 정권 치하에서 선생의 5년은 승승장구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 선생은 끊임없이 감시에 시달려야했다. 긴장을 너무 한 탓에 종종 구토를 했다. 월남한 뒤로 선생은 이미 1968년부터 민족의 평화와 통일, 그리고 세계 평화를 위한 기도를 시작했다. 그런 점에서 선생은 한국전쟁이 지난 지 6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북한에 대해 증오로 일관하는 우리 사회의 보수 원로들과는 많이 달랐다. 물론 진보 그룹이 주장하는 통일이나 북한에 대한 생각에 선생이 분명하게 반대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동포는 물론 김일성과 김정일 일당을 위해서도 매일 기도했다. 선생은 형식적으로 김일성을 위해 기도했던 게 아니다. 1983년의 아웅산테러사건 전까지 그는 김일성 부자와 그 일당들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았다. 통일은 저들이 전쟁의 책임을 지게 될 때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웅산테러사건 이후 선생은 자신의 완고함을 깊이 회개하고 그들을 위해서도 눈물로 기도했다. 어떤 글에서 선생은 “김일성님”이라고까지 호칭한다. 선생은 “사랑이 없다면 이념은 쓰레기”라는 지론을 평생 유지했다. 때문에 우리 사회의 갈등과 남북문제를 바라보면서도 선생이 그립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이야말로 통일의 실마리를 풀 열쇠를 쥐고 있었던 사람이 아닐까.


장기려 선생은 약 500여 편의 글과 90여 편의 번역 원고를 남겼다. 거의 모두가 기독교적인 내용이다. 때문에 선생의 사회봉사에 깊이 매료되어 그를 더 깊이 알려 할 때 사람들은 당황하게 된다. 너무도 기독교적인 내용으로 그의 글이 도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생은 다른 신앙을 가졌거나 무신론자들이 함께 공감할 수 있으면서도 진리를 표현할 수 있는 술어를 찾기 위해 고심을 했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도로서 어떻게 하면 유물론(무신론)자들에게 같이 이해될 수 있는 술어(단어)는 없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왜냐하면, 무신론자들에게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이라고 말을 하면, 알아 볼 생각을 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곧 적개심을 가지고 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진리)을 표현하는 술어는 무엇일까?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단어는? 하고 생각해 보았다. 이것은 귀중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는 선생이 평생 이룬 업적과 의사로서의 실천에 누구나가 감동을 받는 것은 그가 끊임없이 비기독교인들과 소통하려는 마음이 강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는 스님, 신부님을 선생이 주최하는 부산모임에 참여하는 것을 기꺼이 환영했다. 선생의 실천적인 사회봉사는 물론 자신이 글을 쓰는 목적이 비기독교인 들을 섬기려는 것이었다. 자신의 묘비에 오직 “주님만을 섬기다 간 사람”이라고 써 달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지만 선생으로 하여금 평생 남을 위해 봉사의 삶을 살게 만든 요인은 누가 어떤 각도에서 조명한다 해도 기독교 신앙이었다. 선생의 신앙을 살펴보면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는 분들에게, 또는 진보의 색채를 지닌 신앙인들에게 다소 불편할 요소가 없지 않다. 그러나 선생은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묻지 않고 다 주었던 의사였다. 그리고 선생은 그것을 줄 때 조건을 달지 않았다. 이것 받고 예수 믿어야 한다거나, 예수를 믿으니 내가 이런 것을 너에게 준다는 식의 생각이 선생에게는 없었다.  선생의 말이 혹시 어떤 사람들을 거슬리게 할 지 모르겠지만 그 분의 실천은 그런 사람까지도 끌어안았다. 행복은 때때로 이처럼 멋진 역설을 타고 우리 삶으로 들어온다.

 

추신: 월간 <기독교 사상>11월 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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