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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관리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6-12-26
 제목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
 주제어  [외국인]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토마스는 1225년경 로마와 나폴리 사이에 있는 아퀴노 마을 인근의 로카세카 성에서 태어났다. 형제들 가운데 막내였던 토마스는 5살이 되었을 때 몬테카시노 수도원의 봉헌자로 보내졌다. 열 네 살이 되던 1239년 교황영토와 황제영토의 경계선에 위치한 몬테카시노 수도원이 황제의 군대에 의해 점령당하자 집으로 돌아와 나폴리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여기서 토마스는 자신의 전 생애를 결정할 운명적인 두 가지, 아리스토텔레스와 탁발수도회를 만나게 된다. 나폴리는 시칠리아에 속하는 지역으로 동서방의 경계지역이자 전투지였다. 따라서 국경지역의 특성상 그리스나 아랍 등의 외래문화가 상존해 있었다. 여기에 나폴리 대학은 프레드리히 2세에 의해 세워진 순수 국립대학으로 교황청의 영향력에서 어느정도 비켜나 있었으므로 교황청의 공식적인 아리스토텔레스 강의 금지령을 글자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이런 환경 아래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을 배우게 된다. 또 나폴리에는 1231년부터 도미니코회가 설립되어 있었다. 토마스는 19살이 되던 해 도미니코회에 입회했다.


토마스가 도미니코회를 선택한 것은 진리선포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그는 신학대전에서 『가르친다든가 설교하는 일은 관상이 차고 넘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일은 단순한 관상보다 더 우월하다. … 따라서 갖가지 수도회 가운데 최고의 단계를 점하는 것은 가르치는 것과 설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수도회다』(188문 6항)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귀족이었던 그의 가문은 토마스가 구걸승이 된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토마스는 가족을 피해 파리로 가는 도중 형제들에게 납치돼 아버지의 성에 감금된다. 1년 후 풀려난 토마스는 파리대학으로 가 알베르토 마뉴스의 지도아래 1250년까지 5년간 공부하고 알베르토가 쾰른에 수도원 대학을 세우기 위해 갈 때 동행해 학생들을 가르치며 한편으로 알베르토에게 강의를 들었다.

 

1252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중요성을 간파한 알베르토는 토마스를 파리대학에 보내 연구할 수 있도록 했다. 토마스는 스물일곱의 나이로 프란치스코회의 보나벤투라와 함께 파리대학교 교수가 됐다. 이때 성서학과 롬바르두스의 명제집을 강의하며 명제집을 간결히 정리하고 논증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과 원리를 도입한 신학을 전개했다.
1259년 이탈리아로 파견된 토마스는 같은 수도회 소속으로 희랍문헌들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던 뫼르베케 빌헬름을 알게된다. 그가 번역해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은 그리스어를 잘모르던 토마스의 철학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됐다. 이 시기에 토마스는 자신의 대표작인 「신학대전」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마흔넷이 되던 1269년 토마스는 다시 수도회에 의해 프란치스코회와의 학문적 대립이 첨예해진 파리대학교로 가게 됐다. 신앙을 강조하는 극단적인 아우구스티노주의와 이성을 강조하는 극단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사이에서 자신만의 노선을 추구하던 토마스는 이 시기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저술을 하게되고 방대한 신학대전 2부도 이때 씌여진다. 1272년 로마로 되돌아온 토마스는 나폴리에 수도원 대학을 설립하라는 명을 받고 나폴리로 갔다가 1274년 리옹공의회에 참석하라는 교황의 명을 받고 리옹으로 가던 중 1274년 3월 7일 선종했다.

이탈리아의 스콜라 신학자. 아퀴노 백작 가문에서 출생. 빠리에서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문하에서 공부하여 스콜라주의를 완성했다. 1252년에 빠리에서 교수활동을 시작하고, 최초의 저서인가De ente etessentia가(유와 본질에 관하여)를 저술하여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1256년). 1265년부터 로마의 성 사비나 수도원에서 연구생활을 하고, 1269-1272년에 빠리의 도미닉회 신학교의 학장으로 활약.가신학대전가저술. 1272년 빠리를 떠나 이탈리아의 나폴리에서 신학교수와 수도사로 생활. 1273년 겨울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의 초빙을 받아 제2회 리용총회의에 초청되어 떠났으나 도중에 병에 걸려 포사누오바 수도원에서 별세했다. 14세기에 교황 요한 22세는 그를 성도반열에 봉했고, 16세기 이후에는 그에게 교회박사 칭호를 부여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로마 가톨릭주의를 완성한 신학자로 신구약 주석과 교의학과 윤리학 강요를 집필했다. 그에게서 현대적 신학체계의 윤곽이 잡혔고, 신학사상 많은 문제점을 새롭게 제시했다. 그는 신비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었지만 철학을 인정하고 그 방법을 채택했다. 그래서 신학의 모든 신비적 요소는 이성을 초월하지만 이성과 상반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하나님을 제일 원인이며 절대적 실체로 보았고, 철학을 신학 또는 교회의 시녀로 간주했다. 또한 처음으로 교황 권위에 신학적 근거를 부여하여 교황의 무오성과, 그리고 교회와 국가에 대한 교황의 절대적 지배권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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