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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6-12-23
 제목  유관순(1902-1920) 민족운동가
 주제어  [한국인 순교자] 3.1운동
 자료출처  홍석창  성경본문  
 내용
3.1운동의 주역

1902.3.5 천안군 병천면 용두리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서대문형무소에서 1920년 10월 12일 "일본은 반드시 망한다"는 말을 남기고 순국

1. 3.1정신과 유관순

 3월은 우리 민족에 있어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달이다. 그것은 바로 지금부터 68년전,기미년 3월1일,온 국민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 총 궐기했던 달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국인들은 모이면 흔히 7.4정신을 말하면서 7.4정신으로 돌아가자고 말하고 있다. 또 중국인들은 역시 그들이 모이면 5.4정신을 말하면서 5.4정신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는데 오늘 우리 한 민족에게도 전세계적으로 자랑스러운 독립정신이 있다. 그것은 바로 3.1정신이다. 이 정신은 한때 인도의 네루 수상이 옥중에 있으면서,자기 딸에게 편지형식의 글을 써 보내면서 말하기를 "한국의 3.1정신을 본받으라"고 할 정도로 전세계 약소민족을 고무시켰던 정신이다. 이 위대한 3.1정신이 낳은 3.1운동,그리고 그 3.1운동의 꽃이요,열매인 감리교회의 자랑 유관순양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2. 항일운동가의 가문에서

유관순은 1904년 3월 26일 충남 천안군 목천면 지령리에서 유중권의 4남매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지령리에서 대대로 살아오던 선비의 집안으로,그의 아버지는 한일합방 이후,국권을 회복하는 길은 무엇보다 교육이라 생각하고,몇 동지와 힘을 합하여 홍호학교를 설립하였다. 동시에 이러한 사업을 성공하기 위해서는,절대적으로 기독교 신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그는 일찌기 그의 동리에 유무기,조인원 등과 함께 교회를 세웠다. 유관순의 어린시절은 바로 이러한 가정과 배경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활달하고 의협심이 강하며,무슨 일이든지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부정불의에 대해서 용감하며, 불쌍한 이웃에게 사랑과 동정을 아끼지 않는 소녀였다.

유관순은 당시 공주 및 천안지방 순회선교사였던 사부인(Mrs.Alice H.Shap)의 소개로, 이화학당 프라이(Frey Miss Lulu E)당장(堂長)시 보통과 3학년에 편입하였다. 이화 80년사에 의하면 "그는 학교에 들어와 공부하는 동안,남이 하기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해줄 뿐 아니라,청소도 남의 몇배를 하였고,기숙사 식비를 못내어서 괴로워 하는 친구의 식비를 서슴치 않고 내주는 의협의 소녀"였다고 한다. 유관순은 이 학교에서 3.1운동의 분위기에 휩싸이게 된다. 당시 학생운동의 총지휘자였던 박희도 전도사의 지시에 의해서,처음에는 전교생이 참가할 만세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3월1일 막상 교문을 나서려고 할때,이를 눈치챈 학교당국의 만류로 말미암아 유관순을 포함한 15명 정도만이 기숙사 뒷담을 넘어 만세 대열에 참가하였다. 그후 3월5일에 또다시 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그때 학생들이 학교당국 몰래 참가하였다.

이렇게 학생들마저 운동에 적극 참여하게되니 일제당국은 더 이상 수습할 길이 없어 3월 10일 임시휴교령을 내렸다. 유관순은 이렇게해서 고향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3. 매봉에 불붙여진 독립의 횃불

고향에 내려 온 유관순은 고향에서는 아직도 만세운동에 참가하고 있지 않음을 놀라와 하면서 오빠와 동리유지들의 협조를 얻어 곧 운동준비에 착수하였다. 양력 4월 1일이 바로 음력으로 거사날을 잡았다. 그리고는 뒷산으로 올라가 매봉에 봉화를 올릴 때 그것을 신호로해서 장터로 모이게 하였다. 드디어 3월 1일이 되자 오후 1시경 3,000여명의 군중이 모였다. 조인원이 군주앞에 나서 선언서를 낭독하고 공약 3장을 읽은후 독립만세를 불렀다. 장터에 모인 군중들도 모두 만세를 부르며 선도자를 따라 군중들을 향해 닥치는대로 총을 쏘고 칼로 내리쳤다.

이것을 보고 격분한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은 "왜 평화적 시위에 마구 사람을 죽이느냐"고 항의하자. 살기가 등등한 헌병은 항의하는 그를 한 칼에 내리쳐서 쓰러뜨렸다. 이렇게 시작한 헌병과의 충돌로 아오내장터는 순식간에 피바다를 이루었다.이때의 사망자는 유중권(유관순의 아버지),이씨(유관순의 어머니),김구응,김상헌,서병순,박상규,김치관,한상필,윤희처,유중오,채씨,윤해영,이성하,박병호,신을우,박유복,박학형,방치성,박준규 등 19명이다. 그리고 부상자는 적어도 30여명이나 된다.

4. 독립제단위에 바쳐진 꽃

만세운동으로 체포된 유관순은 먼저 천안 헌병부대 유치장에 갇힌 채 한 10여 일동안 고생한 후,공주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그는 1919년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초심을 받고 불복,공소하여 6월30일에는 병천시위의 주동자 조인원 등과 같이 3년 언도를 받았다. 3년 언도를 받은 유관순은 또 다시 서울 복심법원으로 상고를 하였다. 그는 재판장에게 의자를 내던지며,"일본인에게는 재판을 절대로 받지않겠다"든지,"무슨 잘못이 있어 재판을 받느냐"는 등 대드는 바람에 일본인들에게 극도로 미움을 사 법정 모독죄로 4년이 추가되어 7년 언도를 받았다. 그래서 다른 동지는 다 공주로 내려갔지만,그만은 혼자 서대문 감옥에 남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개성 운동의 주동자였던 감리교인 어윤희,권애라,신관빈을 만나게 되었다. 1920년 3월 1일,3.1운동 1주년이 되자 또 다시 감옥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유관순도 여기에 참가하여 여러번 모진 고문을 받았다. 끝내 매맞은 독으로 인해서 소생하지 못하고, 1920년 10월 12일,꽃다운 17세를 일기로 옥사하였다. 그의 유언은

["일본은 망한다. 절대로 망하고야 만다."] 는 것이었다. 그가 죽자 형무소에서는 그 시체를 몰래 처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를 후에 탐지한 이화학당 교장 미쓰 프라이오 미쓰 월터는 곧 형무소로 찾아가 그 시체를 요구하였다. 처음에는 그의 참혹한 형체를 보고 소동이 일어날까봐 내어주지 않으려 했으나,만일에 내어주지 아니하면 국에 알려 세계 여론에 호소하겠다고 하니,마지막에는 어쩔 수 없어 내어주었다. 그래서 시체를 가지고 돌아와 정성껏 수의를 장만해서 동강난몸을 맞추어 입히고는,새벽녘 정동교회당으로 가 조용히 장례식을 마친후,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 독립 제단위에 17세의 처녀 유관순은 아낌없이 그의 몸을 바치게 된 것이다.

5. 3.1운동이 준 교훈

이글을 마치면서 3.1운동을 이끈 유관순을 생각해 보면, 첫째로 3.1운동을 통해서 기독교 여성의 참가를 다시 한번 생각케 한다. 당시만 해도 서구문명의 물결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남존여비라든가 여성은 가정 깊숙히 앉아서 가정이나 지켜야 한다는 사상이 팽배했던 시대였다. 또한 기독교가 도처에 들어와 신앙을 통해서 여성을 해방시키는 때였다고 하지만, 아직도 옛 사상을 버리지 못한 이가 많을 뿐 아니라.선교사들 역시 대부분이 정치운동에 참가하는 것을 금기로 여겨왔었다.

이렇게 생각할 때 남성도 아닌 여성이 그렇게도 열렬하게 참가하였다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사실이다. 다음으로 그 참가 정도와 방법의 문제인데, 3.1운동 속의 유관순은 여성은 물론 그 어느 남성도 따를 수 없는 적극적인 운동을 벌리었다. 그러한 사실은 그가 7년형을 받았다는 데서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여성의 운동은 대개가 자금을 모금,전달한다든지 서류 또는 선언서를 전달하고 배포하는 일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유관순은 16세의 소녀로 나이많은 어른들과 어깨를 같이하며 운동을 계획하고 실행하였다.

그래서 여성도 남성 못지 아니하게 독립운동 대열에 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하였다. 끝으로 그의 운동의 경향이 그렇게도 열렬한 것이었기 때문에 ,결국은 소극적인 자치론에서 적극적인 독립론으로 기울어지게 한 것이다. 당시 3.1운동 이전에 미주 일각에서는 위임통치같은 자치론이 대두되고 있었으며,국내의 지도자 중에도 이러한 주장이 있었다. 이러한 때 3.1운동 같은 적극적인 운동의 경향은 제한 독립론을 말끔히 물러가게 하고 완전독립론으로 정착하게 하였다.

1962. 대한민국 건국공로로 단장을 추서함. (홍석창)


유관순의 노래

작사 : 강 소천

작곡 : 나 운영

  1.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 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 합니다

    옥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 며 숨이- 졌대요

  2.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 보며

    유관순- 누나를 불-러 봅니다

    지금도 그 목소리 들릴 듯 하여

    푸른 하늘 우러-러 불러- 봅니다


 1919년  음력 3월 1일은  아오내  장날이었다.  하늘은  성스러운 거사의  날을 축복하는 것처럼  맑았다.  유관순은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씨 부인과 함께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아오내 장터로 갔다.  그리고  전날  밤새도록 그린 태극기를  장터로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마침내  정오가  되었다.  유관순은  쌀 가마니가  높이 쌓여있는  꼭대기에  올라가서 큰 소리로 외쳤다.
 
   " 우리는 단결해야 합니다.  삼천리 강산이 울리도록 만세를 부릅시다.
   대한 독립 만세 ! "
 유관순이  외친  만세 소리를  신호로  수천을 헤아리는 군중들은  제각기  품속에 있던  태극기를  꺼내 흔들었다.
  " 대한 독립 만세 ! "   " 대한 독립 만세 ! "
 순식간에  아오내 장터는  만세 소리로  천지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일본 헌병들은  뜻밖에 벌어진 사태에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였다. 태극기의  물결이  거센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음을  본  그들은  사정없이  총칼을 휘둘렀다.  이 때,  맨 앞에서  만세를  부르던  김상원이 칼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유관순의  어머니와 아버지도  헌병들이  쏘아대는 총에 쓰러졌다.  이리하여  아오내 장터는  삽시간에 피바다가 되어 버렸다.  유관순은  천안 헌병대 본부로 넘겨졌다.  그는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쳐대는 바람에  형이  가중되어  7년의 구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감옥 안에서
 도  계속 만세를 부르던  유관순은 결국  1920년 10월 일본 헌병의  칼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다.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일어선 그녀는  끝까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다  죽어간  장한 대한의 딸이었다.                               < 봉화가 올랐던 봉수대 >

 

 

> 유관순의 신앙과 삼일운동삼일(3.1)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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