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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1999-03-06
 제목  유관순의 신앙과 삼일운동
 주제어  3.1운동 유관순
 자료출처  신광철(한신대 조교수, 종교문화학과)  성경본문  
 내용  

□ 제168회 연구모임 주제발표(1999. 3. 6)


 

Ⅰ. 유관순의 家系와 信仰


 

호적에 따르면, 유관순은 光武 6년(1902년) 11월 17일 충남 천안군 동면 용두리(지령리) 338번지에서 興陽 柳씨 重權과 모친 李少悌 사이의 3남 2녀 가운데 둘째 딸로 태어났다. 유관순의 가문은 용두리(이하 지령리)에서 대대로 살아온 선비 집안이었다. 유관순의 가문이 충남 천안에서 50리쯤 떨어진 이 곳 지령리로 옮겨 정착하게 된 것은 1695년경이었다. 유관순의 가문은 이 곳에서 충효와 문맥을 이어온 전통적인 가계를 형성하였다. 유관순은 於于堂 柳夢寅의 11대손이었으며, 유관순의 집안은 한말의 의병장 柳麟錫과 가까운 친척이기도 하였다. 유관순의 외가 역시 절개 있는 선비 집안이었다고 한다.

유관순의 부친 柳重權은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는가 하면, 향리에 교회를 설립하여 신앙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유중권은〈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 등의 여론에 자극 받아 사회개혁, 부녀자 계몽, 교육 발전 등을 통한 자주독립의 길을 모색하였는 바, 이들 과제중 학교의 설립 및 운영은 당시 우국지사들이 추진했던 대표적인 구국운동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이 지역에서 설립·운영된 대표적인 학교로는 長明普成學校(趙鼎植·洪承哲 등이 설립), 興湖學校, 靑新學校(金球應 등이 설립) 등이 있었다.

유중권은 李貞來·姜世馨·李載苾·李春凡·韓禹錫 등과 힘을 모아 향리에 興湖學校를 설립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들은 향리의 대표적인 우국지사들이었다. 우리는〈황성신문〉광무 11년 4월 23일자에 실린 "國債報償義務金集送人員及額數" 기사 木川郡葛幷川 지역 부분에서 姜世馨과 韓禹錫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興湖學校와 관련해서는〈황성신문〉隆熙 3년(1909) 3월 21일자 雜報에 실린 "흥호기흥"(興湖其興)이란 제목의 기사를 찾을 수 있다.(내용생략)

우리는 위의 기사를 통해서 흥호학교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우선 흥호학교는 본래 병진학교였으며, 병진학교는 1907년 어간에 설립되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 학교의 운영에 대해서 적어도 1909년 당시에는 이 지역의 관리들과 자본가들이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기존 연구에서 대체로 일치되어 나타난 흥호학교 설립에 대한 설명에는 적지 않은 모순이 존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위의〈황성신문〉기사를 전제할 때, 유중권 등이 흥호학교를 설립하였다는 기존의 결론은 신중하게 재고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아울러 학교의 성격에 대해서도 순수한 사립학교였는지에 대한 의문도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할 때, 유중권 등이 처음부터 흥호학교를 설립했다기보다는 흥호학교의 운영에 관여해 오다가 정세의 변동으로 관리들이나 자본가들이 학교 운영에 손을 떼면서 학교 살림을 도맡게 된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유중권 등이 학교 살림을 맡게 된 이후 학교 운영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유중권 등은 학교 운영이 어려워지자 일본인 고마다(菰田)에게서 급전(300냥)을 빌려쓰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고마다는 일제가 정책적으로 육성한 악질적인 고리대금 업자였다. 유중권 등은 채무 관계로 인해 고마다로부터 갖은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다. 비록 채무 관계를 통한 압박이었기는 했지만, 흥호학교 운영진이 일제로부터 압박을 받았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학교 운영 주체의 성격이 변화하면서 흥호학교의 교육적 성격도 민족적인 색채를 보다 강하게 띠게 되었던 것이다. 흥호학교는 이처럼 어려운 운영 상황과 일제의 교묘한 탄압으로 인하여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중권은 교육을 통한 구국의 가능성과 함께, 기독교 신앙을 통한 구국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유중권은 친척인 柳斌基(1883∼1928)의 전도를 통해 기독교 신앙을 수용하게 되었다. 유빈기는 공주에 들렀다가 미국인 선교사를 만나게 되어 그의 전도로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게 되었다. 유빈기는 긔이부(奇怡富, E. M. Cable, 1874∼1949) 선교사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를 계기로 향리에 기독교의 실체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1908년 유빈기에 의해 지령리교회(現 매봉교회, 이하 매봉교회로 표기함)가 시작되었다. 유중권은 기독교 입신 후, 趙仁元(趙炳玉의 부친)과 함께 이 곳 매봉교회의 활동을 주도했다. 유빈기는 그 후 공주로 가서 복음서관을 개관하게 되었다. 자연히 매봉교회 지도의 책임은 유중권과 조인원 두 사람에게 맡겨졌다. 두 사람은 훗날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의 한 축을 형성한 매봉교회 교인들의 운동을 지도하게 되었다.

유관순의 형제는 이복 언니(癸出), 오빠(寬玉=愚錫), 그리고 두 동생(寬福=仁錫·寬錫)이 있었다. 오빠 유관옥은 후일 공주 지역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옥살이를 하게 되었으며, 유관순의 두 동생은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으로 졸지에 부모를 잃고 형제들과도 떨어지게 되었다. 유관순의 동생들을 돌본 이는 공주영명학교 교사 趙和璧(1896∼1975)이었다. 조화벽은 유관순의 두 동생이 천애고아가 된 채 영명학교 교감 黃仁植의 돌봄을 받고 있는 것을 보고 이들을 친동생처럼 양육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화벽은 유관순의 오빠 관옥(우석)이 공주 만세시위 주동자로 투옥되어 있을 때 그의 옥바라지를 하기도 했다. 조화벽은 이 인연으로 후일 관옥(우석)과 백년가약을 맺게 되었다. 유관순의 친형제는 아니지만 사촌언니 柳禮道(1896생) 또한 유관순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유예도는 충남 홍성군 금마면 부평리에서 아버지 柳重武와 어머니 金씨 사이의 3남 4녀 가운데 맏딸로 태어났다. 훗날 유예도는 선교사들 사이에 그 총명함이 알려져 이화학당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몇 년 뒤 유관순 또한 비슷한 과정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하게 됨으로써 함께 배우면서 신앙과 나라 사랑의 결의를 다지게 되었다.

유관순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활달하고 의협심이 강하고 매사에 적극적인 태도를 지녔다고 한다. 유관순의 어린 시절에는 그의 家風이 끼친 영향이 지대하였다. 앞서 유관순의 부친 유중권의 삶을 통해 볼 수 있었던 것처럼, 그녀의 집안은 전통적 가풍과 기독교적 가풍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와 같은 전통적 가풍과 기독교적 가풍의 조화는 유관순의 "신앙을 통한 나라 사랑"의 배경 가운데 하나를 이루었다.

향리에서 학교와 교회에서 배움과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유관순은 어느 일요일 지령리 예배당에 순회전도차 온 공주예배당의 사애리시(史愛理施, Alice J. Hammond Sharp) 선교사의 조용한 부름을 받았다. 유관순은 사애리시 선교사에게 "신앙이 든든한 소녀로 알려져" 그녀의 주선으로 공주 영명학교(明宣女學堂)를 거쳐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편입하였다. 유관순이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편입하기 위하여 서울에 도착한 것은 1916년 3월말 경이었다. 유관순은 4월 1일 보통과 3학년으로 편입하였으며, 당시의 담임은 金克培였다. 유관순은 이 곳 이화학당에서 교비생으로 공부하는 동안 기독교 교인으로서의 신앙 생활에 가일층 진보를 나타냈으며, 방학 때는 고향에 내려가 문맹 퇴치에 진력하기도 하였다.

유관순은 이화학당에서 배움을 통해 특별히 두 사람의 선생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한 사람은 정동교회 손정도(1882∼1931) 목사이고, 또 한 사람은 박인덕 선생이었다. 유관순은 손정도 목사의 설교를 2년여 들으면서 하나님 사랑이 곧 나라 사랑임을 배우게 되었다. 유관순은 또한 朴仁德(1897∼1980) 선생으로부터 매우 강한 영향을 받았다. 박인덕은 1912년 이화학당 중학과를 졸업하고, 1916년에는 같은 학교 대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녀는 졸업후 이화여고보 교사로 1925년까지 9년간 재직하면서, 신앙의 에너지를 나라 사랑의 실천으로 승화시킬 것을 가르쳤다. 박인덕 역시 1919년 3·1운동과 관련하여 4개월간 옥고를 치른 바 있었는데, 서대문감옥에서 제자 유관순과 함께 수감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또한 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유관순의 신앙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사료가 전무하므로 구체적인 서술이 용이하지 못하다. 따라서 우리는 유관순과 함께 신앙 생활을 했던 인사들로부터 유관순의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간접적이나마 확인할 수밖에 없다. 특별히 유관순과 이화학당에서 신앙생활과 구국운동을 함께 했던 서명학의 증언은 유관순의 신앙의 면모를 살필 수 있게 하여 준다. 서명학(후에 장로가 되었음)의 증언에 따르면, 이화학당에서 취해진 종교생활은 매일 같이 오전에는 학교 채플이 있었고, 또 성경 시간이 있어 성경을 공부하였는데, 학생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성경이 말하는 내용을 그대로 실천하려 애썼다고 한다. 또한 새벽마다 학내에서 새벽기도회가 열렸다고 한다. 유관순은 밤중과 새벽에 텅 빈 채플에 혼자 들어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었다고 한다. 유관순은 이화학당의 이러한 신앙 프로그램에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고 한다. 유관순은 새벽마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였다고 한다. 아울러 이화학당에서는 봄·가을 2회의 부흥회를 개최함으로써, 신앙적 연단을 추구하는 한편, 신앙의 비전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얼마전 열린 부흥집회에서 유관순은 신의 비전을 보는 계기를 가졌다고 한다. 특별히 유관순은 김종우 목사 초청 부흥회를 통해서 신앙과 나라사랑의 고리를 잇게 되었다.


 

Ⅱ. 유관순과 3·1운동

1. 이화학당과 초기 운동

3·1운동은 전국적인 범위의 운동인 동시에 여러 부문에 걸친 총체적인 운동이었다. 3·1운동의 각 부문 운동 가운데에서도 특별한 위상을 차지하는 것은 학생운동이었다. 수많은 학생들이 3월 1일과 3월 5일의 서울 지역 만세시위운동에 동참하였다. 이화학당 학생들 역시 학교 당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만세시위운동에 동참하였다. 당시 이화학당 학생들 가운데 일부는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여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유관순은 이 비밀결사대의 일원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유관순은 고등과 2학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유관순은 일단의 동료들과 함께 학당장 등 학교 당국의 만류를 뿌리치고 기숙사 뒷담을 넘어 탑골공원으로 달려가서 만세시위운동에 동참하였으며, 3월 5일 학생시위운동에도 동참하여 만세를 부르다가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다.

이화학당 학생들은 3월 5일 학생 연합시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학생들은 기숙사 뒤의 허물어져가는 성곽을 타고 숲속으로 빠져 배재학당 쪽의 좁은 골목을 돌아 시위 장소(남대문)로 향하는 행렬에 합류하였다. 시위에 참여한 이화학당 학생들은 행렬을 따라가다가 신특실 등은 열을 따라 종로쪽 대열을 따라갔고, 서명학 등은 진고개쪽 대열을 따라가서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지금의 신세계백화점이 있는 곳에 못 미친 주택가에서 해산하였다. 이 때 학생들은 이 집 저 집에 몸을 숨기게 되었는데, 주민들은 학생들을 정성껏 숨겨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이 무사히 歸校할 수 있도록 돕기까지 하였다. 3월 5일 만세시위로 많은 학생들이 검속·투옥되었는 바, 그 가운데에서 이화학당 학생들로는 신특실·유점선·노예달 등이 있었으며, 교사 金篤實 등도 서대문감옥에 투옥되었다.

2. 병천(아우내)운동

천안 일대는 예로부터 애국애족의 기운이 매우 강한 지역이었다. 실제로 이 지역에는 한말 애국의병이 산화한 전적지가 많은 편이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도 이 지역에서는 산발적인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흔히 기존 연구에서는 이 지역에서 3·1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지 못하다가, 유관순의 귀향을 계기로 본격적인 3·1운동이 일어난 것으로 이해되어져 왔다. 하지만 실제로 4월 1일 병천(아우내)운동 이전에 이 지역에서 수차례의 만세시위운동이 펼쳐진 바 있다. 병천 운동 이전에 벌어진 만세시위운동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목천면 보통학교 학생 의거(3월 14일), 전화선 방해 시위(3월 16일), 입장면 양대·입장 시장 만세시위(3월 20일, 28일), 천안면(3월 29일), 풍세면 횃불시위(3월 30일), 성환면 만세시위(3월 31일)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3월 28일 입장의 만세시위는 직산금광회사 광산노동자 2백 명이 참여한 운동으로서 주목할 만한 것이었으며, 3월 31일 성환면 시위에서는 수천 명의 농민들이 봉기하였다.

일반적으로 '유관순 운동'으로 알려진 병천운동은 호서지방을 대표하는 3·1운동이자, 충청남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격렬한 운동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가장 격렬한 독립만세 시위 운동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병천운동은 또한 단위교회(지령리교회)가 운동의 중요한 축을 형성했다는 점에서도 중요성을 지닌다. 병천운동이 지니는 이와 같은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병천운동의 전개과정 및 의의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진 바 없다. 이와 같은 연구 상황은 아마도 자료의 부족에 기인할 것이다. 실제로 병천운동에 관한 한, 재판기록 정도를 참고할 수 있는 실정이다. 앞으로 자료 발굴을 위한 학계의 노력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본다. 여기에서는 재판기록을 토대로 기존 연구를 수렴하여 병천운동의 대강을 정리해 보기로 한다.

병천운동은 크게 보아서 두 가닥의 물줄기가 합류한 형국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병천운동은 수신면·성남면계와 동면의 조인원·유관순계의 두 흐름이 각각 나름의 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운동의 역량을 하나로 모아서 극대화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수신면·성남면계는 홍일선의 발의 아래 김교선·한동규·이순구·이백하·김상철 등 20대 청년들이 뜻을 결집하여 운동을 펼치게 되었고, 동면의 조인원·유관순계는 조병호(조인원의 아들)·유중권·유중무(유관순의 숙부)·조만형, 수신면의 김상훈·김용이, 갈전면의 박제석·박봉래 등이 뜻을 모아 운동을 펼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유관순의 운동에 대한 평가는 일단 두 흐름의 개별성을 인정하는 위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면 먼저 수신면·성남면계의 총화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수신면·성남면계의 동향에 대해서는 재판기록과 운동의 주요 참여자 가운데 한 사람인 金敎善의 증언을 참고할 수 있다. 우리는 아래의 '대정 8년 공 제172호' 판결 이유문을 통해서 수신면·성남면계의 동향과 동면의 조인원·유관순계와의 합류 과정을 정리할 수 있다.(내용 생략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pp. 1160∼1161)

우리는 위의 자료를 통해서 수신면·성남면계의 만세시위운동 기획 과정의 윤곽을 살펴볼 수 있다. 수신면·성남면계의 만세시위운동은 홍일선의 발의를 계기로 시작되었으며, 김교선이 적극적으로 조직화 작업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김교선은 한동규와 이순구와 규합하였으며, 한동규가 이백하를 규합함으로써 운동 조직의 근간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수신면·성남면계는 운동 세력을 규합하여 시위 장소인 병천시장에서 만세시위운동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으며, 오후 1시경에 동면의 조인원·유관순계가 병천시장에 들이닥치면서 운동은 본격화되었다. 그런데 위의 자료만으로는 병천운동의 두 흐름이 사전에 뜻을 함께 하였는지의 여부를 직접적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수신면·성남면계가 병천시장에 이르러 여러 시장 입구를 각각 맡아서 장에 모여드는 장꾼들에게 시장에서의 독립 시위운동을 미리 당부하고 있었는데, "별안간 동면계가 하오 1시에 만세운동을 시작하여 만세 소리가 진동하였으므로, 그 때부터 시장으로 들어가 이들과 합류"하였다는 해석도 있지만, 두 흐름의 운동세력이 "별안간" 합류하게 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운동의 주요 참여자 가운데 한 사람인 金敎善의 증언을 통해서 두 흐름의 운동 세력의 합류 과정을 정리할 수 있다.

김교선은 두 흐름의 운동 세력을 연계시키는 역할을 맡은 인물로 金相勳을 언급하였다. 수신면·성남면계의 만세시위운동이 기획되는 과정에서 김교선이 卜多會里의 김상훈을 만나게 되었는데, 김상훈은 김교선에게 "병천쪽에서도 한창 일을 꾸미고 있으니 합류하기로 하지. 내가 趙仁元 씨랑 柳重模(柳重武의 誤記로 여겨짐, 필자 주) 씨들과 상담하겠으니 같이 행동을 하도록 하세"라고 하여 동면의 조인원·유관순계와 연대할 것을 권유하였던 것이다. 수신면·성남면계는 이러한 제안을 염두에 두면서 나름대로 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동면의 조인원·유관순계로부터 "김상훈 선생편에 詳報 접했음. 明 3월 1일(음력) 병천 장날을 이용하여 아우내장터에 모여 거사키로 작정했음. 조인원"이라는 전갈을 받게 된 것이다.

이상으로 수신면·성남면계의 만세시위운동을 그 기획 과정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다. 이상에서 정리한 흐름을 염두에 두면서 동면의 조인원·유관순계의 만세시위운동 기획 과정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마찬가지로 재판기록을 통해서 운동의 윤곽을 그려보기로 한다. 일제는 '大正 8년 刑控 제513호' 판결 이유문을 통해서 동면의 조인원·유관순계의 운동 기획 과정을 정리하고 있다.(내용생략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pp. 1162∼1163)

위의 자료를 통해서 일제가 유관순을 병천운동의 중심 인물로 규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제는 유관순의 귀향과 병천운동을 논리적으로 관련짓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유관순의 귀향은 향리에 움트고 있던 운동에의 지향을 구체화하는 계기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중앙에서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던 학생들 가운데 상당수가 휴교령으로 인하여 귀향하게 되었는 바, 그들은 각자의 고향에서 운동을 촉발하고 활성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난 후 총독부의 휴교령에 의하여 고향에 내려간 학생들은 각기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는데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유관순이 주도한 천안의 만세운동이었다.

유관순의 귀향이 정확히 언제 이루어졌는가에 대해서는 3월 8일설, 3월 10일설 등이 제시된 바 있다. 그런데 위에 인용한 재판기록에는 유관순의 귀향 날짜가 3월 13일로 언급되어 있다. 일제가 휴교령을 내린 것이 3월 10일이었음을 감안할 때, 유관순의 귀향은 3월 10일에서 13일 어간에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만약 유관순이 3월 10일 휴교령이 떨어지자마자 귀향하였다면, 향리에서의 운동을 위한 준비가 미처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재판기록에 언급된 것처럼 유관순의 귀향이 3월 13일에 이루어졌다면, 향리에서의 운동을 위한 준비 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유관순의 귀향과 병천운동의 기획 과정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유관순이 3월 5일 남대문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했다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내려와 향리 어른인 조인원(당시 감리교 속회장)·아버지 유중권·숙부 유중무에게 보이고 서울의 정경을 자세히 보고했다는 해석이 있는가 하면, 이와는 약간 달리 향리 어른들이 유관순과 유예도에게 "너희들이 서울에서 만세를 부른 식대로 우리도 부르자. 그렇지 않으면 독립 후에 우리는 무슨 면목이 서겠느냐?"라고 하여 향리 어른들이 먼저 만세시위운동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는 해석 또한 제기되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해석 가운데 후자가 보다 설득력을 지니는 것으로 본다. 나이 어린 학생들이 처음부터 향리의 여론을 주도했다기 보다는, 향리 어른들에 의해 제기된 과제를 운동의 정황에 밝은 학생들이 도운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자연스러울 것이다. 우리는 병천운동의 중심적 인물 가운데 하나인 조인원의 아들인 조병옥의 회고록을 통해서 이와 같은 추론의 타당성을 확인할 수 있다.(회고 내용 생략)

유관순과 향리 어른들 가운데 어느 쪽에서 먼저 만세시위운동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앞으로 관련 자료가 발굴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여하간 유관순은 향리 어른들이 만세시위운동을 추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유관순은 아버지 유중권을 위시하여 조인원 등 마을 어른들과 함께 교회당에서 서울의 만세시위운동의 정황을 토론하고 병천 지역을 중심으로 한 만세시위운동을 기획하고 구체적인 방침을 정하였다.

이 방침 가운데 각 고을의 뜻을 모으는 연락 및 조직 사업은 매우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였다. 유관순은 연락 및 조직 사업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유관순은 20여 일 동안 천안·청주·연기·진천 일대를 왕복하면서 만세시위운동 조직을 위해 온 힘을 다 쏟았다. 유관순은 천안에서 장명리 청산학교 교사 金球應을 만났으며, 천안읍에서 안창호 목사 내외를 만났고, 송정에서는 유림 대표 金相訓을 만났으며, 왜마루(環村)에서는 안동 김씨댁을 방문하여 만세시위운동의 뜻을 모았다. 청주에서는 방하울의 兪씨댁, 자포실의 申씨댁, 栢峴의 유씨댁, 盛寸洞의 유림 대표 박씨, 드무실(杜陵洞)의 白川 趙씨댁, 무들이(水入里)의 경주 김씨댁 등을 방문하여 만세시위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해서 호응을 얻었다. 유관순은 또한 연기에 가서 남산동리의 박씨댁, 속새말(俗倉里)의 이씨댁, 발이미(鉢山里)의 김씨와 송씨댁, 閒身의 이씨댁, 上盧亭의 권씨댁, 鳥致院의 임씨댁 등을 방문하였으며, 진천에 가서는 普坪의 이씨 문중, 播溪의 윤씨댁, 花山의 전주 이씨댁, 삽다리의 청주 이씨댁, 茅山의 朱씨댁 등을 방문하여 만세시위운동의 의지를 결집하였다.

이와 같은 일정은 어린 소녀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힘든 일이었다. 유관순이 이와 같이 힘든 일을 맡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도 독립을 향한 그녀의 열정 때문이었겠지만, 당시 이 지역의 사정이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지역 일대에서는 3월 내내 만세시위운동이 계속적으로 추진된 바 있었다. 유관순의 고향에서도 일찍이 만세시위운동에 대한 열망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실제로 이종성이라는 청년이 주동이 되어서 만세운동을 꾸미다가 사전에 잡혔기 때문에 곳곳에 헌병들이 배치되어 건장한 청년들은 이미 검속 대상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남자들의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였므로, 나이 어린 소녀 유관순이 남자의 할 일을 다 했던 것이다.

유관순은 연락 및 조직 사업을 전개하는 동안 틈틈이 향리 어른들에게 정황을 보고하였다. 유관순은 며칠에 한 번씩 중앙연락기관장인 장명리교회의 김구응을 만나 선전조직에 대한 상황을 보고하였으며, 부친 유중권도 지령리 총본부 위원의 일원인 만큼 아버지에게도 매일 경과를 보고하였다. 거사를 하루 앞둔 2월 그믐날 밤 유관순은 마침내 자기네집 머슴에게 홰를 들려 가지고 동생 관복과 친척집 도령 유제한과 함께 어두운 산길을 더듬어서 매봉 꼭대기에 올라가서 봉화를 올렸다. 매봉의 봉화는 각 고을의 독립에 대한 열기를 이끌어 내었다. 약속대로 봉우리마다 독립의 염원을 담은 불길이 타올랐다.

4월 1일 거사의 날이 밝자 병천 장터에는 독립을 갈망하는 민족혼의 파도가 밀어닥쳤다. 사람들은 하나 둘 병천 장터로 모여들었다. 앞서 서술하였듯이 수신면·성남면 주민들을 중심으로 하는 일단의 그룹이 만세시위운동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을 즈음, 매봉교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한 동면의 조인원·유관순계가 태극기를 앞세우고 병천 장터로 진입하였다.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는 일은 여자들이 맡기로 되어 있었다. 유관순의 모친 이소제는 청주 나들이 동남쪽을, 유관순의 친구 부덕은 연기쪽 전의 나들이 아래 뚝 길목을, 유관순의 사촌언니 예도는 천안 나들이 새고개목 서쪽을 맡아 사람들의 손에 독립의 꿈이 담겨진 태극기를 건네주었다.

병천운동은 오후 1시경 조인원이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함으로써 절정에 달하였다. 일부 연구에서 병천운동의 독립선언식을 유관순이 주도했다는 설명이 제시된 바 있지만, 자료와 정황을 종합해 볼 때 병천운동의 선언식은 일차적으로 조인원에 의해 주도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유관순은 선언식에 뒤이어 대한독립의 필요성을 가열차게 토로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간단한 독립선언식을 마친 군중은 대오를 형성하여 만세시위 행진에 나섰다. 대오 맨 앞에는 큰 깃발을 든 조인원이 서고, 바로 뒤에 유중권·김구응·김상헌·김교선·조병호 등이 뒤를 따랐다. 이 때 일제측 헌병대와의 충돌이 일어나서, 헌병이 내리친 칼에 김상헌이 가슴을 찔리는 사태가 발생했으며,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군중들이 격분하여, 순국자의 시신을 떠메고 헌병분견소(헌병주재소)를 습격, 투석전이 벌어졌다. 이 때 김교선 일파는 분견소 뒤쪽에 있는 전화선을 절단하였으며, 전주를 전복시키기도 하였다. 이상과 같은 병천운동의 전개 과정은 대체로 3단계의 추이를 보였다. 하오 1시경에 약 3천여 명의 군중 만세시위가 있었으며, 이로 인하여 헌병·수비대와 충돌이 있었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1단계) 하오 4시경에는 일제의 폭압적인 진압에 격분한 군중들이 순국자의 시신을 주재소로 운반하여, 일제에 대해 항의하였고, 그 과정에서 투석전이 전개되었다.(2단계) 투석전이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일부 군중은 천안·병천간 전선을 절단하는 한편, 면사무소·우편소 등을 점거하여 만세시위의 타당성을 천명하였다. 이 날의 만세시위에서 주동자급으로 지목되어 재판을 받은 사람들은 아래와 같다.

 

<표> 병천운동 주요 인물 일람

성 명

주 소

직 업

나 이

형 량

金敎善

천안군 수신면 발산리

농업

28세

징역2년

韓東奎

천안군 동면 수창리

농업

22세

징역2년

李栢夏

천안군 성남면 신덕리

농업

21세

징역2년

金相喆

천안군 갈전면 가전리

농업

23세

징역6월

李旬求

천안군 수신면 발산리

무직

22세

징역2년

趙仁元

천안군 동면 용두리

농업

56세

징역3년

金相勳

천안군 수신면 복다희리

농업

46세

무죄

柳寬順

천안군 동면 용두리

학생

18세

징역3년*

柳重武

천안군 동면 용두리

농업

45세

징역3년

金用伊

천안군 수신면 발산리

농업

24세

징역2년6월

趙炳鎬

천안군 동면 용두리

농업

21세

징역2년6월

白正云

천안군 수신면 복다희리

농업

24세

무죄

申 氏

천안군 동면 동리

농업

67세

무죄

趙萬衡

천안군 동면 용두리

농업

21세

징역8월

朴萬奭

천안군 갈전면 변천리

농업

19세

무죄

朴鳳來

천안군 동면 동리

이발업

27세

징역8월

(출전: 大正 8년 공 제172호 및 大正 8년 형공 제513호)

* 유관순은 상고심 법정에서 일제의 부당한 재판을 받을 수 없다고 항의함으로써 법정모욕죄가 추가됨

으로써 징역 7년형이 부과되었다.


3. 옥중 만세운동

유관순은 병천운동의 주모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체포되어 천안 헌병부대 유치장에 10여일 동안 구금되었다가 공주법원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유관순은 이 곳 공주검사국에서 공주지역 만세시위운동으로 체포·투옥된 오빠 관옥을 만나기도 하였다. 1919년 5월 9일 열린 초심에서 유관순에게 조인원·유중무와 마찬가지로 7년 구형에 3년 언도가 내려졌다. 유관순 등은 이에 불복하여 항고하였으나 1919년 6월 30일 열린 경성복심법원 상고심에서 일제의 부당한 재판을 받을 수 없음을 항변하면서 재판정에 걸상을 집어던지는 등의 저항을 한 끝에 법정모독죄가 추가되어 7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으로 이송되었다.

당시 서대문감옥에는 독립운동에 참여한 우국지사들이 상당수 수감되어 있었다. 유관순은 민원숙·어윤희·박인덕·이신애·김신의, 이화학당생 권애라, 호수돈여고 사감 신관빈, 장님 전도사 심명철, 수원 기생운동 주모자 金香花 등과 함께 수감생활을 하게 되었다. 유관순은 이 곳 서대문감옥에서 어윤희·박인덕 등과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함으로써, 독립을 향한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옥중 만세운동은 1920년 3·1운동 1주년 만세운동을 맞이하여 더욱 가열차게 전개되었다. 이 옥중 만세운동에는 절도·강도·파렴치범·사기범 등으로 수감되어 있던 이들까지 합세하는 등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만세 소리는 감방을 지나 꼬리를 물고 모화관·냉천동·애오개·합동·서소문 일대로 번져 전차가 불통되고 경찰 기마대가 출동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많은 우국지사들이 심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그로 말미암아 유관순은 방광이 터지고 이신애는 유방이 파열되기까지 하였다.

계속되는 투쟁과 고문 끝에 유관순의 건강은 날로 악화되어 갔으며, 급기야 1920년 10월 12일 유관순은 옥중에서 사망하기에 이르렀다. 유관순의 사망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기존 연구는 유관순의 사망에 대해 간수에게 심하게 매를 맞아 복막이 터져 옥중에서 병고 끝에 순사하였음, 장독으로 옥사하였음, 왜경의 칼에 사지가 토막·살해당하였음, 그의 모교 이화학당이 시신을 인수하였으나 여섯 토막으로 참살된 처참한 모습이어서 수의를 입힐 수 없었음, 그리고 일제 옥리의 칼에 몇 토막이나 되는 참살을 당하였음 등 엇갈린 추정이 제시되고 있다.

유관순의 사망과 관련해서는 당시 시신을 수습한 이들의 증언을 참고할 수 있다. 유관순의 사망 소식을 들은 이화학당 학당장 프라이(Miss Lilu E. Frey)와 교사 월터(Miss Althea Jeannette Walter)는 그녀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하여 일제에 대하여 공식적인 요청 절차를 밟았다. 처음에 시신 인도를 거부했던 일제는 외국 여론에 이 사실을 알리겠다는 프라이 등의 항의에 못이겨 유관순의 시신을 인도하였다. 이 때 유관순의 친척인 유빈기와 유중영 부자가 참관하였다. 유중영의 증언의 따르면, 유관순의 시신은 실로 처참한 상태이긴 하였지만, 오늘날 세간에 알려진 바처럼 토막·살해된 것은 아니었으며, 해방 직후 유관순 기념 영화를 제작하면서 극화된 것이라고 한다. 이화학당 측은 유관순의 시신을 수습하여 정동교회 김종우 목사의 주례로 정성껏 장례식을 치렀다.

3·1운동 이후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통치가 계속되는 동안 유관순의 3·1운동은 세간에서 잊혀진 채 세월이 흘러갔지만, 해방을 맞이하면서 유관순을 가르쳤고 서대문감옥에서 같이 수감생활을 했던 박인덕에 의해 유관순에 대한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화학당을 중심으로 해서 1947년 8월 '순국처녀 유관순 기념 사업회'가 발족되어 유관순의 신앙과 민족 사랑을 기리게 되었으며, 1962년에는 유관순에게 대한민국 건국 공로 單章이 추서되었다.

이화학당은 또한 유관순의 신앙과 나라 사랑의 얼을 기리기 위하여 유관순이 자라난 충남 천원군 동면 용두리 지령 부락과 1962년부터 연관을 맺었으며, 이화 MRA 클럽을 중심으로 매년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봉사 활동을 계속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화학당의 후원 아래 1967년 11월 11일은 유관순 기념 교회가 복원되어 유관순의 신앙과 나라 사랑의 얼을 되새기게 되었다.*

> 참고자료 : 삼일운동의 배경삼일운동과 기독교, 전주의 삼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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