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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관리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6-12-23
 제목  김창식(金昌植, 1857-1929) 목사
 주제어  [한국인 목사] 정동교회 올링거
 자료출처  홍석창  성경본문  
 내용 한국의 사도 바울

1.요리사로부터 전도자로

 김창식 목사는 1857년 황해도 수안군 생금촌 바리봉골에서 경주 김씨의 세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20세까지 부모를 도와 농사일을 하다가, 이러다가는 일생을 농사군으로 살게 될 것 같아 부모에게 알리지도 아니하고 집을 나와 버렸다. 그는 그후 10여년 동안 8도를 다 돌아다니며 머슴살이며 마부생활이며 객주집에서의 심부름 등 아니해본 것이 없이 살아가다가,29세가 되어 박노득이라는 처녀를 만나 결혼을 하고는, 이때부터 그의 방랑생활을 끝나고, 가정생활을 통해 정착하는 생활로 접어들게 되었다.

 

1888년 어느날인가 한번은, 그가 길을 가다가 큰 돈뭉치를 줍게 되었다. 어렵게도 그 돈의 주인을 찾아주게 되었는데 그 주인이 바로 올링거(Rev Frankln Ohlinger0 선교사의 개인 교사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김창식은 선교사 올링거에게 알려졌고, 그의 정직한 성품이 인정을 받아, 곧 올링거의 집 하인으로 취직하게 이르렀다. 김창식은 이 올링거의 집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성경을 읽다가 자신의 부족을 고통스럽게 느끼게 되었는데, 그 고통을 면하기 위해 기도하다가,갑자기 자기 죄를 용서해 주심을 받고 가슴에 고통이 사라져버리는 체험을 하였다.

 

그후 그는 정동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김연창,한용경,유치겸,이무영과 함께 정동교회의 창립멤버가 되었다. 김창식은 처음에는 올링거의 집에서 단순한 심부름꾼이었으나 이렇게 체험을 하고 올링거의 집에서 단순한 심부름꾼이었으나 이렇게 체험을 하고 세례를 받은 다음에는 그 신임이 두터워져,이제는 그의 가정에 요리사로 승격이 되었다. 그후 그는 얼마나 열심히 성경을 읽엇는지 그의 성경은 종종 빵가루가 자욱히 엎인채 빵굽는 판의 한쪽 끝에 펼쳐져 있었다. 그래서 그의 전도자로서의 부름을 가르켜 아펜젤러는 말하기를 "주전자로 부터의 부름"이라고 하였다.

2. 평양지방의 개척자

1891년 그가 35세가 되던 해에 선교사 올링거는 그의 한국 선교 5년만에 미국으로 돌아가고, 그가 귀국한 후 그의 뒤를 이어 제임스 홀(W.J.Hall 1860-1894)이 곧 파송되어 왔다. 그는 의사로써 평양선교의 아버지이다. 그는 1891년 저물어가는 12월 13일에 한국에 와서, 3개월 동안 한국선교에 필요한 준비를 하고,1892년 3월 처음으로 평양 등지를 여행하고 돌아와, 그해 8월에 모였던 선교 연회에서 평양선교를 적극 주창함으로,마침내는 평양선교의 책임자로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그해 9월과 그 이듬해 (1893) 2월에 평양을 또 다시 다녀왔고, 드디어 서문밖에 두개의 좋은 자리를 살 수 있었다. 그때 장로교는 감리교와 함께 일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의료사업을 하는감리교 선교사는 평양감사로부터 보호를 받았지만,순전히 전도사업만을 목적한 장로교 선교사는 보호를 받지 못하고 도리어 방해를 받아 평양에서 철수하고, 감리교 선교사가 당분간 장로교도 함께 돌봐 주었다. 이렇게 평양 선교가 제임스 홀에 의해서 시작될 때, 김창식은 올링거가 귀국한 후 그의 소개로 제임스 홀의 조수로 일하고 있었다. 제임스 홀은 평양에 선교기지를 마련한후 우선 김창식의 가족과 박유산을 1893년 3월에 보냈다. 그리고 제임스 홀의 가족은 그해 5월4일에 배로 인천을 떠나 평양에 도착하였ㄷ다. 이렇게 모인 그들은 이제 힘을 합쳐 선교의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로제타 홀(제임스 홀의 부인)의 고 김창식 목사 추도사에서 보면, 특별히 평양에서의 김창식의 공헌은,남산현교회를 개척한 것이라고 하였다.

3. 살아있는 순교자

평양에 도착한 김창식은,이제는 요리사로부터 제임스 홀의 조수로 일하였다. 평양선교가 활발히 진행될 즈음,즉 1894년 5월 박해가 시작되었다. 한번은 관리들이 제임스 홀과 김창식으로부터 돈을 받아낼 목적으로, 김창식을 비롯해서 몇명을 옥에 가두었다. 그 가운데서도 김창식은 심한 고문은 말할 것도 없고 목에 칼을 쓰고 사형당할 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

제임스 홀은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서울에서는 이 일을 위해 밤마다 모여 기도하며 직접 영.미 영사관을 통해 국왕에게 석방을 호소하였다. 이러한 노력이 이루어져 결국은 석방되었다. 이렇게 해서 김창식은 순교 직전에 생명을 구원받게 되었다. 아펜젤러의 1894년도에 쓴 끌에 의하면, 김창식은 옥중에서 '하나님을 욕하고 외국인들을 섬기는 일을 그만두라'는 협박을 받았다고 한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지금까지 자비로우셨습니다. 나는 그를 저주할 수 없습니다. 라고 보기좋게 거절함으로 다른이들과 같이 석방되지 못했다고 한다. 김창식이 석방되던 날 그는 관가에서 집으로 오는동안 성난 군중들로부터 계속 돌을 맞으며 피투성이가 된 채 비틀거리며 돌아왔다. 그의 석방 소식을 듣고 몇사람 안되는 성도들이 모였다. 김창식은 그때 사도행전 16장을 읽으며 옥중에 갇혔던 바울실라에 대한 설교를 하였다. 이 비장한 모습을 바라본 제임스 홀은, 존경한 나머지 김창식의 발아래 꿇어 엎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훗날 말하였다. 김창식의 이러한 핍박의 역사는 평양선교 내지는 한국감리교 선교에 있어서 부흥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고 당시 세계 도처에 있는 감리교도들을 고무시켰다.

4. 제1호 목사

이러한 핍박이 태풍처럼 지나간 다음 폭풍 후의 고요처럼 좀 평온한 가운데 선교사업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아픈 상처가 가시기도 전에,그해(1894)여름 또다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것은바로 청.일전쟁의 발발인 것이다. 이러한 전쟁의 기운이 돌자, 선교회의 요청으로 선교사와 그의 가족들은 서울로 철수하였다. 1894년 7월 23일 서울에서 시작된 청일전쟁은 1894년 9월 15일에 평양에서 대전투를 함으로 막바지에 이르렀다. 이 평양전투가 전환점이 되어 일본은 전승국이 되었고,청국군들은 패주하여 아주 한국으로부터 물러나게 되었다.김창식은 약탈과 살인이 난무하며 괴질이 유행하고 있는 평양성에 남아 있으면서,상처받은 양떼들을 돌보느라 또 한번의 살아있는 순교자의 길을 걸어갔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시련은, 김창식의 믿음의 연단을 가져와 빛나는 믿음을 갖게 되었을 뿐 아니라,또한 이때로부터 선교계에 인정을 받게 되어,이제는 혼자서도 일할 수 있는 성숙한 전도인이 되었다. 그래서 1899년에는 처음으로 다른 곳으로 가서 교회를 짓고 개척을 하였다. 이제는 그에게 일을 능률있게 할 수 있는 어떤 직임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1901년 5월9일에서 14일까지 서울 상동교회에서 모였던 제 17회 한국선교회에서는 최초로 김창식에게 김기범과 함께 목사안수를 주었다. 이것은 감리교회뿐 아니라 한국 개신교계에 처음있는 일이다. 장로교는 이보다 훨씬 후인 7년 뒤에야 길선주외 6명이 안수를 받았다. 이때로부터 미선교회는 그 지도자를 한국인으로 점차 바꾸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선교정책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것이다.

5. 조선의 바울

목사 안수를 받은 김창식은, 이제는 선교사들의 조수의 자리에서 동역자의 자리로 올라가 일하게 되었다. 1904-1910년 까지는 영변구역장으로 일하였으며 1912년에는 평양서지방 감리사, 1913년에는 영변지방 감리사가 되었다. 이 영변지방(평북,평남외 6개군 포함)은 새로 생긴 지방으로써, 평양 서지방의 다섯고을보다도 4배나 큰 지방이며,대개가 산악지대로 다른 곳보다 늦게 세워진 교회들이다. 이 지방을 한번만 순행하여도 1720리나 된다고 한다. 이러한 넓은 지역을 1년이면 2,3번 순행하였다. 그때의 선교사들은 자동자전거(오토바이)를 타고 다녔으나 김목사는 주로 도보로 순행하였다. 그의 수고를 가히 알만하다. 그후 1918-1921년까지는 수원지방의 순행목사로 파송을 받아,유능한 감리사 노블과 함께 독립운동을 직접 간접으로 도와 주었다. 1921년에는 독립운동의 책임을 물어 노블은 평양 지방으로 김창식목사는 해주 지방으로 각각 흩어져 파송 받았다.

 

그때 해주에는 김창식 목사의 아들인 닥터 김(김영진 장로)이 있었다.김창식 목사는 해주에서 1922년 사경회를 인도하다가 고혈압으로 쓰러져,7년 동안 병상에 누워있다가,1929년 1월 9일 72세를 일기로 하나님 품에 안겼다. 김창식 목사는 일생동안 48개교회를 개척했으며,125곳의 교회를 맡아 일하였다고 한다. 그가 그렇게도 일을 많이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건강 덕택이었다. 김창식 목사야말로 한국감리교회가 낳은 바울이다.(홍석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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