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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6-12-23
 제목  리드(C. F. Reid, 한국명 이덕, 1849-1915) 선교사
 주제어  [내한 선교사] [감리회] [미국] [선교사]
 자료출처  감리회  성경본문  
 내용

1. 서론

 남감리회의 첫 선교사로 1895년 10월에 내한한 리드(Reid,C.F.)목사를 한국명으로 李德목사라 부른다.
남감리회 탄생의 역사적 배경과 리드 목사가 내한하기 까지의 배후 설명을 한 뒤 그의 선교사업을 소개하고자 한다.

2. 미감리회와 남감리회의 분열

1844년 6월 제14회 미국 감리회 총회에서 "안드류감독의 직권 정지안"이 110표 대 68표로 가결이 되자 남부 총대들은 오히려 노예를 소유하고 있는 안드류 감독(Bishop Andrew,J.O)에 동정하여 남부 노예주에 속하는 14주 연회 대표들이 별도로 총회 조직을 서둘렀다.그리하여 1846년 5월 피터스버그시(Petersburg,Va.)에서 미국 남감리회 창립총회를 개최하므로 분열되어 해외선교도 각각 추진하게 되었다.
한국 선교도 미감리회는 1885년 4월에 아펜 젤러(Henry G.Appenzeller)를,1895년 10월에는 남감리회가 리드(Clarence F. Reid)를 10년 사이를 두고 각각 처음으로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미감리회와 남감리회가 서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오다가 1930년 12월 합동하여 "기독교 조선 감리회"라는 이름으로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비록 미국에서는 두 모교회가 한국 선교를 실시했으나 선교지 한국에서는 하나로 통합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에 영향을 받은 탓인지 미국에서도 한국보다 10년 늦게,1940년 4월에 미감리회, 남감리회,감리회프로테스탄트 등 3파가 합동하였다.

3. 윤치호와 남감리회 한국선교

미감리회의 선교는 어디까지나 미국측에서 일방적으로 한국선교를 실시하였으나,남감리회는 미국 유학 중에 윤치호의 선교기금 기탁과 귀국 후에 그의 활동에 힘입어 실현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윤치호(1865-1945)는 1881년 봄 17세 때에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다녀 왔고, 1884년 12월 갑신정변 때 초대 주한 미국 공사 푸트(Foote,L.H)의 통역을 맡았었다. 그리고 푸트공사가 1885년 1월 귀국할 때 함께 한국을 떠나 푸트공사의 소개장을 가지고 중국 상해로 건너가 미국 남감리회에서 경영하는 상해 중서대학(Chinese-Anglo College)에 입학하여 재학중에 예수를 믿고 지도교수인 본넬 목사(Rev.Bonnel.W.B)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리하여 윤치호는 최초의 남감리교인이 되었다.

1888년 10월 윤치호는 중서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미국으로 가서 11월 테네시주(Nashivill,Tenn)에 있는 벤더빌트대학교(Vanderbilt Univ)신학부에서 공부하였다. 그후 1890년 9월 죠지아주(Oxford,Ga)에 있는 에모리대학(Emory College)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틈틈이 순회강연을 하고 받은 돈과 학비를 절약하여 모은 돈 등 모두 200달러를 1893년 3월11일 캔들러 (Dr Candler,W.A)총장에 한국에 기독교학교 설립하는데 쓰도록 청탁하였다.

윤치호는 정치적 망명을 한 몸이기 때문에 귀국하지 못하고 1893년 11월 모교인 상해 중서대학으로 가서 교수로 재직하였다.
1894년 새해 갑오 동학 혁명이 청일전쟁으로 확대되어 일본이 승리하게 되자 청국을 배경으로 하던 정권이 무너지고 친일정권이 조직되자 윤치호는 조국을 떠난지 10년 만인 1895년 2월 그리던 조국의 품안에 돌아왔다.

1895년 4월 청일간의 조약이 체결되자 잠시나마 한국은 청국의 속국에서 벗어나 독립국이 되었다. 윤치호는 귀국하자 곧 갠들러총장과 중서대학장(Allen,Y.J.)에게 하루 빨리 한국선교에 착수하도록 간청하였다.

4. 리드목사의 내한과 남감리교 선교시작

윤치호는 미국 유학 시절에 기탁한 한국선교 기금과 남감리회 감독과 총장들과 이미 친교가 있었던 관계로 순조롭게 한국 선교가 실현되었다.

1895년 8월에 윤치호의 한국선교 요청이 10월 13일 핸드릭스 감독(Bishop Hendrix,E.R)이 최초의 선교사 리드 목사와 함께 선편으로 인천을 경유하여 서울에 도착하였다.

1) 리드의 중국선교

리드(Reid,C.F) 는 한자로 이덕이라 표기하여 한국에서도 이덕 박사로 알려졌다.
그는 1849년 7월 19일 미국 뉴욕주(South Oxford.N.Y)에서 출생하였고 목사가 되기 전에 "평신도 선교운동(The Laymen's Missionary Movement)"의 총무로 활동하다가 1878년 남감리회 켄터키연합회원으로 목사 안수를 받고,그해 중국 선교사로 파송 받아 상해로 부임하여 선교사로 일선에서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추진하여 크게 공헌하여 서주지방의 감리사(장로사)가 되었고, 1886년에 중국 선교연회를 조직하는 데도 중심 인물이었다.

중국에서 17년간 선교 경험을 쌓은 뒤 새로운 선교지를 찾다가 직접 자진하여 헨드릭스 감독(Bishop Hendrix E.R)과 함께 한국을 방문하여 남감리회 최초의 주재 선교사가 되었다.

2) 고양읍교회를 창립

그는 우선 단신으로 한국을 직접 현지답사를 하고 현재 한국은행이 있는 곳에 선교 기지를 구입하고,1895년 10월 20일 서울을 떠나 갔다가 1896년 5월 두번째 내한하여 주택을 수리하고 상해로 가서 가족을 데리고 8월 14일에 완전히 내한하였다.

몇주 뒤에 "중국 연회 한국지방 감리사(장노사)"로 임명되었다. 1896년 12월부터 전도사엽에 힘쓸 때에 미감리회 상동교회 담임자 스크랜튼 목사(Rev,Scranton,W.B)가 그 교회 청년 김주현과 김홍순을 리드 목사에게 보내어 협조하도록 하였는데 그들을 매서인으로 서울 근교에 복음을 전하여 경기도 고양읍내에 그 결실을 보아 1897년 5월2일 리드목사 집례로 고양읍에서 장년 24인 유년 3인에게 세례를 베풀고 교회를 조직하니 남감리회에서는 최초의 고양읍교회가 탄생하여 이날이 남감리회 기념일이 되었다.

3) 광화문교회 설립

먼저 농촌 교회로 고양읍교회를 세우고 그 다음 달인 6월 21일에는 서울 리드 목사 댁에서 처음으로 공중 예배를 시작하였는데 윤치호 선생이 설교했다. 이 교회가 뒤에 광희문교히가 되었다.

같은해 9월 10일에 리드 목사 사회로 제1회 한국 지방회를 개최하고 서울구역과 개성구역으로 분할하였으며 리드 목사는 한국지방 회장이 되었고 윤치호 선행은 서기가 되었다.
1897년 5월에 선교연회에서 공식으로 "한국 선교처"로 인정받아 리드 목사가 관리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리드 목사는 부인의 병환으로 1899년 4월 20일 귀국하게 되자 교우들이 전송하면서 하루 속히 한국으로 다시 와서 전도하기를 원하였으나 부인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1901년 5월 17일 미국에서 별세하였다.

그러나 리드 목사는 한국선교를 잊을길 없어 그해 9월 14일부터 18일까지 서울에서 열리는 제5회 선교회 때에 한국에 나와 선교 관리자로서의 모든 선교업무를 처리하고 귀국하였고,그의 아들인 이위만 (W.T.Reid M.D)의사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개성에서 의료선교에 크게 공헌하였다.
리드 목사는 귀국하여 평신도 선교운동에 총무로 1909년까지 활동하였고 총회에서 제반 입법위원으로 1914년까지 활동하였으며,1915년 10월 7일 켄터키주(Erlanger,Ky)에서 66세로 별세하였다.(이성삼)

 

 

>> 목차고리 : 신학 > 선교 > 선교사

>> 연결고리 : 미국, 감리회선교사, 내국인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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