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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 동구 좌천1동 763번지(부산진교회)에는 호주장로교 최초의 선교사 데이비스(Davies) 추모비가 있다. 마산시 합성2동 1번지(창신대학)에도 순직기념비가 있다. 그의 묘는 부산시 중구 동광동 5가 26번지(本町 5町目 26, 복병산)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멸실(滅失)되었다. 멕케이(Macay, 1892)부인, 베어드(Baird,1894)애기, 아담슨(Adamson, 1895)부인 등 9기의 선교사 묘도 이곳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져 보다 깊이 있는 연구와 고증을 통하여 “부산선교성지” 복원이 요청된다. 자료에 도움을 주신 이상규 교수(고신대)께 감사드린다.
데이비스(1856-1890)의 성장 배경과 내한 과정
조셉 헨리 데이비스(Davies, Joseph Henry, 한국명: 德培時)는 1856년 8월 22일 뉴질랜드 왕가라이(Wangarai)에서 출생하여 1860년 호주(Melbourne)로 이주했다. 1881년 3월 멜버른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코필드(Caufield Grammer)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에 취임했다.
울프(J. R. Wolfe) 주교의 호소문을 읽고 한국 선교를 결심하여 빅토리아 장로교회로 이적하였다. 영국 에딘버러(New College)대학에서 단기 신학교육을 받고 1889년 5월 13일 호주로 돌아가 8월 5일 목사 안수를 받았다. 청년연합회(The Fellowship Union in the State of Victoria) 파송 선교사로 메리(Mary) 누이와 함께 멜버른을 출발 했다.
내한(來韓) 경로는 1889년 8월 21일 오후 기차 편으로 멜버른을 떠나 시드니에 도착하여, 8월 28일 치난(Tsinan)호 증기선으로 브리스베인(Brisbane)을 경유하여 9월 2일 다윈(Darwin)항에 도착했다. 9월 12일 오후 3시 호주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출항하여 9월 21일 오전 7시 홍콩에 도착, 해변 휴식과 런던선교부를 방문했다. 9월 28일 투키오(Tokio) 배편으로 비가 오는 가운데 홍콩을 떠나 9월 30일 아침 일직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그리고 1889년 10월 2일 이른 아침 부산에 도착하였으며 일본인 거주지를 돌아본 뒤 오후 4시 부산을 출발하여 남․서해안을 돌아 10월 4일 오전 11시 인천에 도착했다. 10월 5일 말을 타고 서울에 도착하여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 최초 선교사로 미국 선교사들의 환영을 받았다.
데이비스 선교사의 한국 활동과 서울-부산 도보 과정
서울에 도착한 그는 다음날(10월 6일) 언더우드가 설교하는 외국인 연합예배에 참석하였으며, 한국어 공부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10월 8일 월세로 집을 빌렸으며 11월 3일 외국인 연합예배에서 “고난 받는 종”에 대하여 설교하고, 11월 5일에는 학교에서 첫 성경 강의를 했다. 1890년 1월 1일에는 헤론(Heron), 기포드(Gifford) 선교사와 대 축호전도를 했다.
1월 7일 영국 총 영사(서리) 힐러(Hillier, Walter C., 禧在明)를 만났으며 그를 통하여 1월 10일 내지(內地) 여행허가를 구한국 정부에 요청하고 같은 날 독판교섭통상사무 민종묵(閔種黙)으로부터 경기, 강원, 충청 지방을 순회할 수 있는 여행 허가(護照)를 받았다.
1월 16일 기도회 인도를 마치고, 1월 19일 처음으로 한국인에게 성찬식을 집례 했다. 2월 5일부터 10일까지 경기도 과천, 수원 등지를 순회하며 전도했다. 서울로 돌아와 ‘내가 너희 가운데 있느니라’(2월 16일),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얻으리라’(3월 2일) ‘예수님이 사랑한 제자’(3월 9일) 등의 제목으로 설교도 했다. L. H. 언더우드는 데이비스에 대하여 “남편과 똑 같은 열정적인 정신, 힘, 언어의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두 사람은 완전히 마음이 통하여 협력자로 동역하기를 원했다.”라고 했다.
그는 서울과 평양 등에 이미 다른 교단이 정착하여 있으므로 부산에 정주(定住)할 계획을 세우고 선교지 개척을 위하여 1890년 2월 28일 구한국 정부로부터 전라, 경상 지방 여행허가를 받아 서울-부산 간 장거리 여행을 도보(徒步)로 시도했다.
이에 따라 1890년 3월 14일 서울에서 어학선생과 수행원을 대동하고 판매 목적의 성서와 전도지와 키니네(金鷄蠟)약을 준비하고 과천으로 향했다. 중부(中部)지방 행로(行路)는 수원(3월 15일), 천안(3월 18일), 공주(3월 20일), 경천(3월 21일) 등이었다. 이 때 수원 성(城)을 거닐었으며,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둘러싸이기도 하고, 로스역 마가복음과 요리문답서를 팔았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며, 천안 삼거리의 여인숙에서는 목화솜을 파는 호남지방 상인들과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설교도 했다. 공주를 지나는 시골 풍경은 아름다운 라인 계곡을 연상케 한다고 했다. 공산성의 금강(錦江)과 계룡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느낀 것으로 짐작된다.
남부지방 행로는 논산(3월 22일)을 지나 만경강을 건너 전주(3월 24일), 오수(3월 25일)를 지나 남원(3월 27일)과 하동(3월 29일)사이의 지리산 기슭 산악 지역을 통과했다. 전주를 향해 걸어 갈 때에는 많은 비로 인하여 길이 물에 잠겨 장화를 벗고 걸어야 했다. 지리산 지역에서는 호랑이 울음소리도 전해 들었다. 1890년 3월 27일 드디어 서울에서 부산을 향하여 670리를 걸었다고 했다. 이처럼 힘든 여행 중에도 그는 매일 5-6시간 씩 공부하면서 사람들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듣고 조금씩 말을 하려고 노력했다. 마지막 부산 행로는 진주(3월 31일) 부근을 경유한 것으로 추정되나 그 후의 경로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그는 무리한 도보 여행을 하는 가운데 추운 날씨와 불편한 잠자리, 맞지 않는 음식으로 허약해진 체질에 폐렴과 천연두에 감염되어 마지막 5일간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게일(Gale, J. S.)의 도움으로 4월 4일 비 오는 금요일 부산으로 이동하였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일본인 병원(北村)에 입원하여 하룻밤을 병상에서 지내다가 치료도 제대로 받기 전에 1890년 4월 5일 순직하였다. 임종을 지켜본 게일은 “그는 병원에서 죽어가면서 내게 뭔가를 말하려 했다. 오후 1시 평온한 모습으로 숨을 거두었다”고 메리(Mary)에게 편지 했다. 결국 데이비스의 헌신적인 활동과 순직은 호주장로교회의 한국선교를 가능하게 만든 값진 시발점이 되었다.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었고, 친목과 교제를 위해 시작된 청년연합회는 선교사를 파송하는 조직체로 발전하였다. 후속 사업으로 멕케이(Mackay) 선교사 등이 내한하였다. 또한 여전도회연합회(Presbyterian Women's Missionary Union)조직의 동기도 부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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