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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매일선교소식  작성일  2007-10-19
 제목  중국 귀조우성, 산이 높아 하나님과 가까운 곳(2)
 주제어키워드    국가  중국
 자료출처  푸른섬선교정보 / 매일선교소식 1,636호-2007.10.19(금)  성경본문  
 조회수  3360  추천수  8
사무엘 클라크는 귀조우성의 팡가이라는 도시에서부터 활동을 시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큰 문제점을 발견했다. 그의 존재를 못마땅하게 여긴 성정부 관리들이 그에 대한 갖은 박해를 시작한 것이다. 그나마 1877년 이전까지는 대부분의 내지 성정부들이 선교사들이 들어오는 것 조차 거부한 것에 비하면 훨씬 나은 상황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여하튼 행정당국의 갖은 방해로 클라크는 무진 고생을 해야 했다.

1900년에 벌어진 북청사변도 그의 사역에 큰 차질을 보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북청사변이 벌어지기 1년 전부터 귀조우에서는 외국인에 대한 반감이 극심하게 고조되었고, 이어서 사변이 터진 것이다. 1899년에는 윌리안 플레밍과 판 씨우샨 등이 순교하기도 했다. 플레밍은 사무엘 클라크의 동역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씨우샨은 클라크의 사역의 결과로 생겨난 미야오족 첫 신자였다. 이들 모두 불법 무기 밀매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되었다. 북청사변은 점점 확대되어 귀조우성까지도 사변에 휘말렸고, 치열한 전투가 여기 저기서 벌어졌다. 클라크와 그의 새로운 동역자인 JR 아담스 등도 위험을 피해 귀조우에서 철수했다. 그나마 그들이 안전하게 귀조우를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귀조우성 정부가 그들을 안전하게 경호 주었기 때문이다. 이 역시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작은 기적이었다. 외국인 선교사의 철수에 성 정부 소속 군대가 호위해 준 것은 중앙정부의 명령에 반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전투는 1902년까지 계속되었고, 아담스는 다시 미야오족이 살고 있는 귀조우로 돌아왔다. 이미 사변으로 인해 철수하기 전에 클라크와 아담스에 의해 회심한 사람이 250 명 가량 있었다. 그러나 복귀 후인 1902년에 세례를 받은 사람은 불과 20 명에 불과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이 사변의 통에 목숨을 읽었기 때문이다. 또 일부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신앙을 포기하기도 했다. 세례를 받은 20명은 대부분 미야오족의 하부종족인 플로우리 미야오족에 속한 사람들이었고, 이들은 이후 귀조우성의 미야오족 기독교의 핵심멤버가 되었다.

아담스와 새로운 동역자인 커티스 워터스는 플로우리미야오족 마을을 순회하면서 설교하기 시작했다. 1907년까지 그들은 7천 명을 주께로 인도해 냈다. 이들 종족 사이의 부흥은 인근 윤난성까지도 이어졌다. 사람들은 긴 거리를 걸어와서 복음을 들었다. 이렇게 해서 복음을 듣고 돌아간 윤난성의 미야오족 신자들을 돌보기 위해 또 다른 선교단체에서 윤난성에 선교사를 파견했다. 결국 귀조우은 인근 지역을 모두 통할하는 복음의 전파 기지로의 역살을 시작한 것이다. 1932년까지 플로우리 미야오족 사이에서는 윤난성과 귀조우성을 합쳐서 30만 명의 신자가 생겨났다. 중국내지선교회는 이 숫자가 플로우리 미야오족 전체 인구의 70%에 해당한다고 추정했다.

이를 기반으로 중국내지선교회는 두 성의 다른 소수종족들에게까지 사역의 범위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제이스 브룸홀이 이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이족은 윤난성과 귀조우성에서 가장 큰 소수종족 집단이었다. 2차 대전이 끝날 때가지 약 20만 명의 이족 기독교인이 생겨났다. 1945년이 지나고 2차대전이 끝나면서 평화가 찾아오는 듯했다. 브룸홀은 또다른 선교조직을 조직하여 시추안성 접경지대에 거주하는 노수족을 향한 사역을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은 노수족이 이족의 하부그룹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어쨌든 프룸홀은 이족 출신 개종자들을 중심으로 이족을 공략하기 위한 팀을 조직하고 발빠르게 활동을 개시했다. 그러나 노수족은 이족의 하부그룹으로 오해를 할 정도로 두 종족간의 공통점이 많지만 이족 사역자들은 노수족과의 언어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사역을 접었다. 그는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본부에 중국 정부와 선교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중국의 소수종족 통계에 큰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앞으로의 체계적인 선교활동을 위해서는 종족 통계를 바르게 확보하기 위한 연구작업이 먼저 진행되어야 한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이 연구활동은 1949년에 불어닥친 공산혁명의 혼란으로 인해 착수조차 되지 못했다. 마오쩌뚱이 중국 전체를 통치하는 통치자로 등극하면서, 모든 외국인 선교사를 추방했다. 제임스 브룸홀과 그의 동역자들도 추방되었다. 마오쩌뚱은 새로 구성될 의회 격인 전인민대표회의에 모든 소수종족들도 대표를 파견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실제로 이후 중국정부는 중국 내 다양한 소수종족 그룹을 제대로 파악하고 분류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조사과정을 통해 중국 정부는 중국 내에 큰 그룹으로 묶어 분류하면 55개의 소수종족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그러나 이 역시 세분화해서 분류하자면 한이 없기 때문에 큰 덩어리로 묶어 분류하다보니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하나의 종족으로 묶이는 등 상당한 오류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중국이 부분적으로나마 다시 선교사들의 입국을 허용한 것은 1989년의 천안문 사태가 발생한 후이다. 이때부터 기독교 선교계도 중국에 인종분석 전문가들을 파견하여 중국 정부 통계와는 별도로 중국 내의 소수종족에 대한 통계자료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이러한 연구노력을 거쳐 선교계는 중국 내에 약 300 개 이상의 소수종족 그룹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앞으로 계속 연구가 진행된다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날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 결과로 나온 책이 Operation China이다. 이 책은 세계 어느 자료보다도 중국 내의 소수종족 실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49년에 선교사들이 추방될 무렵 중국에는 약 1백 만 명 가량의 기독교인이 있었다. 그러나 1990년에 선교사들이 다시 들어갈 수 있게 되고 교회의 문이 다시 열렸을 때 놀랍게도 중국의 교회는 은밀하게 부흥을 거듭하여 5천 만 명의 기독교인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귀조우에 들어간 선교사들도 귀조우성에만 140만 명의 신자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는 그들이 철수하던 1949년 당시의 10만 명에서 무려 14배나 성장한 수치이다. 1990년부터 새로운 사역이 시작했다. 화이트미야오족을 위한 복음라디오방송이 시작되었고 이로 인해 윤난성에서 또다른 부흥이 시작되었다. 1992년부터 1994년 사이에 수천 명의 화이트미야오족이 주를 영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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