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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작성일  2001-07-27
 제목  <이상규 교수가 쓰는 선교역사(8)>복음주의 운동과 선교(1)-웨슬레 활동 중심
 주제어키워드    국가  
 자료출처    성경본문  
 조회수  3112  추천수  15
이성주의와 이신론의 팽배

영국은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 아르마다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사건을 계기로 해상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였고, 18세기에 와서는 강대국으로 부상하여 프랑스와 함께 우열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특히 영국은 북아프리카, 인도, 호주, 남아프리카 아메리카 등지에 식민지 개척을 통해 국익을 챙기고 있었다. 곧 이어 일어난 산업혁명을 통해 영국은 농업중심의 국가에서 공업국가로 발전해 가게 되는데 이 일련의 과정에서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많은 사회적 문제가 제기되었고, 또 도덕적으로도 심각한 문제를 안게 되었다.

이 당시 교회, 곧 국교회도 나태와 안일 속에 빠져 있었고, 성직자들은 영성을 상실한 채 안일주의에 빠져 있었다. 일부의 성직자들은 사회 귀족층과 교제하며 사치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18세기 초엽에 와서는 교회의 나태가 더욱 심해졌다. 성직자들이 쾌락을 추구하고 사냥을 즐기고 음주에 빠지기도 했다. 이 시기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그 시대의 사상조류에 함몰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즉 이성주의와 이신론(deism)이 팽배하였고, 교회와 신학은 이런 철학적 영향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 이성주의적 복음주의 운동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복음주의적 각성은 흔히 청교도 운동이후 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일컬어지고 있는데, 영어사용권에서 비슷한 시기에 복수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즉 영국에서는 웨슬레, 휫필드가 주도하였고, 미국 식민지에서는 요나단 에드워드와 테넌트 등을 중심으로 일어났고, 웨일즈지방에서는 그리피스(Griffith)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 일련의 운동은 경건주의처럼 정통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조류였던 이성주의에 대한 반동이었다.

즉 17세기 합리주의, 신앙고백에 대한 논쟁, 그리고 형식주의(formalism)에 대항하여 18세기에 일어난 반 이성주의적 복음주의 운동을 흔히 복음주의 각성운동(Evangelical Awakening)이라고도 부른다. 이 운동은 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이 복음주의 운동은 교회와 사회 각 영역에 영향을 끼쳤지만 특히 선교각성과 함께 선교운동을 고취하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정리해서 말하면, 18세기 선교운동은 대륙에서는 경건주의 운동을 통해 일어나지만, 영국에서는 존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의 복음주의 각성운동을 통해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또 미국에서는 휫필드와 요나단 에드워드를 통해 일어났다. 이 시기에 활동한 인물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존 웨슬레(John Wesley, 1703-1791)-감리교 창설

복음주의적 각성이라고 일컬어지는 영적 갱신운동이 독일에서는 경건주의 운동을 통해서, 그리고 북미대륙에서는 대각성운동을 통해 이루어져 갔다면, 영국에서는 웨슬리 형제와 조지 휫필드에 의해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웨슬레는 영국교회의 부흥을 일으킨 인물이자 후일 감리교를 창설하게 된 인물로서 교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1) 생애와 사역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는 1703년 6월 17일 영국국교회 목사인 사무엘 웨슬리와 경건한 여성이었던 수잔나(Susanna) 사이의 19명의 자녀 중 15번째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는 고교회파에 속한 학식있는 목사로서 링컨셔의 엡워스(Epworth)에서 목회하는 교구목사였다. 또 어머니는 비국교도파, 곧 분리주의적 청교도의 목사인 사무엘 앤니슬리(Samuel Annesley)의 딸로서 경건한 여성이었다.

웨슬리 형제는 어머니의 신앙교육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존은 런던의 차터하우스학교(Charterhouse school)를 거쳐 그의 나이 17세 때인 1720년 옥스퍼드 대학의 크라이스트 쳐치 칼리지(Christ Church College)에 입학하였다. 그는 이 기간동안 광범위한 독서를 통해 교부들과 경건서적을 읽었다. 그가 대학을 졸업한 후 다시 옥스퍼드로 돌아왔을 때 당시 대학에는 이신론(Deism)이 창궐하였고 기독교복음에 대한 관심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현상은 대학만의 현실이 아니었다.

당시 영국은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종교에 대한 관심이 쇠퇴하고 있었고 세속주의의 영향력이 지대하였다. 교회마저도 형식주의에 빠져 있었다. 복음에 대한 열정을 가진 이들은 도리어 열광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을 만큼 이성주의가 교회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찰스 웨슬레(Charles Wesley, 1707-1788)는 1729년 봄 그의 두 친구와 함께 홀리 클럽(Holy club)을 조직하여 복음주의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존은 1729년 11월경에 이 모임에 가담하였고 자연스럽게 이 모임의 지도적 위치에 서게 되었다.

기도와 성경읽기, 고전연구, 금식과 성찬식 거행 등 규칙적인 생활을 통해 이들은 자신을 돌아보고 경건한 삶을 추구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후일 메도디스트(Methodist)로 불리게 된다. 이들은 개인적 경건활동 뿐만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병든 자를 돌아보고, 감옥에 갇힌 자를 방문하고 주일학교 교육을 실시하는 등 사회 봉사에도 힘썼다. 또 이들은 성찬식을 자주 갖고, 어린이들을 위한 주일학교도 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존과 동생 찰스는 미국의 조지아로부터 청빙을 받약 2년 간 체류하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는데, 자신의 영적 상태를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2) 메도디스트 부흥운동 시작

1735년 5월 24일은 존 경건협회라고 불리던 올더스게이트(Aldersgate)의 작은 집회에서 그는 중생의 체험을 하였는데, 이 사건이 전통적으로 웨슬레의 회심으로 간주되고 있다. 웨슬레는 모라비안들로부터 구원의 확신과 선교에 대한 열정, 그리고 그들 상호간의 뜨거운 형제애를 보았고 이들의 조직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이들의 독선적인 모습과 진센돌프 백작에 대한 과도한 숭상을 보고 실망하였고, 성화(聖化)와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견해차로 이들과 결별하게 되었다.

회심을 경험한 웨슬리는 1738년 가을부터 전도와 집회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복음 전도자로서의 그의 삶의 시작이었다. 이무렵 웨슬리는 요나단 에드워드가 쓴 메서추세츠주의 노스햄톤(Northhampton)에서 일어난 부흥에 관한 글을 읽게 되었다. 이 글은 그에게 큰 감동을 주었는데 웨슬리도 이와 유사한 부흥을 경험하게 되었다.

즉 그는 휫필드의 요청으로 1739년 봄 브리스톨에 가서 야외설교를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메도디스트운동의 뚜렷한 특징이 되었다. 많은 회심자가 일어났고 하나님의 역사가 분명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웨슬리 자신의 변화도 놀라운 것이었다. 매사에 불안과 소심한 사람이었던 웨슬리는 능력있는 전도자가 되었고, 그를 중심으로 메도디스트 부흥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은 당시 영국 국교회로부터는 환영받지 못했다. 특히 옥외설교에 대해 아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이것은 당시 영국교회가 불신의 깊은 수렁에 빠져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실이었다. 성직자들의 거의 전부가 도덕주의를 전하는 정도였고 그리스도안에서의 구원의 확신을 증거하는 일에는 소홀했다. 국교회에 속한 교회당에서는 설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주로 경건협회를 중심으로 부흥집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여러 곳을 순회하였는데 당시는 오늘날과 같은 교통수단이 없던 때였으므로 주로 말을 타고 여행하였는데, 1774년 6월 28일자 일기에 보면 그는 일년에 평균 4,500마일(약 8,000km)을 여행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볼때 그는 평생동안 250,000마일을 여행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거리는 지구를 열바뀌 도는 거리였다. 그가 평생동안 한 설교횟수는 약 4만회에 이른다. 웨슬리는 부흥전도자로서의 한 생애를 마치고 1791년 3월 2일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최후의 말은 “내 생애 가장 좋은 말은 임마누엘이다” 였다고 한다.



3) 모라비안, 휫필드와의 토론

1730년대 스코틀란드, 웨일즈, 영국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새로운 관심이 일고 있었는데 에벤에셀 어스킨(Ebenezer Erskin)과 랄프 어스킨(Ralph Erskine, 1685-1752, 스코틀란드), 호웰 해리스(Howel Harris, 1714-1773, 웨일즈),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영국), 조나단 에드워드(아메리카)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들 복음주의자들은 대체적으로 청교도적 배경의 칼빈주의적 성향의 인물로서 인간의 죄,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 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알미니안주의자였다. 그는 여러 경건 서적을 읽고 큰 영향을 받기도 했다.

웨슬리의 신학사상은 그의 생애 여정 속에 나타나 있는데 이 점을 두 종류의 토론을 통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는 모라비안과의 토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웨슬레는 오직 믿음으로의 사상(sola fideism)과 성화(聖化)를 위한 구체적 노력의 결핍, 곧 웨슬리적 표현으로 말하면 정숙주의(Quietism)를 반대하였다.

웨슬리는 모라비안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는 의, 곧 루터의 의인화의 교리만을 강조함으로서 성화 혹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향한 구체적인 노력의 결핍, 곧 정숙주의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는 모라비안들에게는 믿음만 있지 행함이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웨슬리는 의인화(義人化)는 루터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모라비안들처럼 수동적 혹은 정숙주의적인 것 혹은 전가된 의인화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모라비안과 결별하게 된 이 견해차 속에 웨슬리의 알미니안적 사상이 나타나 있다.

두 번째로는 휫필드와의 토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함께 홀리클럽에서 일했고, 또 메도디스트 부흥운동의 동지였으나 웨슬리는 로마서 8장 29-30절의 해석에 있어서 휫필드와 견해를 달리하였고 결국 서로 결별하였던 일은 잘 알려진 일이다. 웨슬리는 칼빈주의 예정론은 신자로 하여금 성화에의 노력을 등한히 할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는 완전주의자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에 의존하기보다는 완전을 향해 노력하는 것을 중시하였다. 웨슬레는 칼빈의 예정론을 반대하였는데, 예정론은 하나님을 독단적인 존재로 만든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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