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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선교정보기타  작성일  2004-02-25
 제목  2000년세계선교대회(목회지도자)-선교에로의 부르심과 홀로서기
 주제어키워드  WMS2000 중동선교  국가  
 자료출처    성경본문  
 조회수  11674  추천수  35
8월 16일 (수) 선교대회(1) 선교보고



선교에로의 부르심과 홀로서기





총신대학 신학대학원 졸업(M Div)

국립 마르마라 대학교 대학원 졸업 (MA 역사학)

동 대학원 박사과정 중 (Ph.D can)

현, 예장합동 GMS 소속 소아시아 14년째 사역 중(안식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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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이 빛나는 밤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12:2)"

어느 날 하나님은 별이 빛나는 밤에 아브라함을 밖으로 불러 장차 그를 통하여 이루실 일들을 말씀하셨다. 열국의 아비, 복의 근원자가 될 것이라고 말이다. 너무도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당황도 되었지만 아브라함에게는 비전이었다. 이 일들은 하란에서 이루어졌다. 사실 하란 지방은 필자가 사는 남부에 있다. 아브라함을 불러 세우시고 하늘을 향해 말씀하시던 그 하나님은 필자에게도 어릴 때이지만 동일하게 말씀하셨다. 난 촌에서 농부의 아들로 자랐다. 나의 고향은 보리밭으로 이름난 전북 고창이다. 그곳은 저수지가 있고, 긴 들녘이 있었다. 여름이 되면 친구들과 저수지에서 내려오는 물에 멱을 깜고 토끼풀을 뜯으며 메뚜기, 개구리를 잡곤 했다. 누구나 자기가 태어난 고향은 좋지만 나의 살던 고향은 특히 좋은 것이 있다면 일찍이 한 선교사를 통하여 복음이 전해져 교회가 세워졌다. 여기에 나의 증조 할머니가 초기 예수를 믿으셨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난 어릴 때 영문도 모르고 주일학교에 나갔고, 일가 친척들이 기독교인들이라 복음에 전혀 거부감이 없이 교회에 출석하게 된 것이다. 그후 우리 가족은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난 이유로 숙부께서 우리 가정의 정신적인 지주(支柱)였기에 -숙부님이 당시 군인으로 부산에 근무했다- 그 연고를 따라 항구 도시 부산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갔다. 너무도 어려웠던 그 시절, 우리 가족은 시골에서 농사를 지었기에 배운 것이라곤 농사와 관련된 것뿐 시골사람이 할 수 있는 도시 생활의 직업은 없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쌀가게 였다. 그런데 경험 없는 모친과 형은 함께 일을 하다가 많은 외상으로 깔고 결국 손을 털고 구멍가게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우리 가족은 오직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이 전부였다. 형은 세월이 흘러 군에 입대했고 두 누님은 출가하여 난 두 동생과 모친을 모시는 가장(家長)이 하루 아침에 된 것이다. 꿈 많은 고등학교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가정 환경 때문에 난 미군 부대의 신문을 돌리며 학교와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끊임없는 어머니의 기도로 교회 생활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학생회 회장, 교회의 성실한 일꾼이라고 칭찬을 받으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진로 문제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때 나를 아껴 주시던 한 선배님이 있었는데 그분은 나에게 진지하게 신학을 하라는 권면을 했다. 어려운 가정 환경, 그렇다고 남보다 뛰어난 공부를 하여 장학생으로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실력도 없는 상황에서 나의 분수와 한계를 일찍 알고 부족하지만 주님이 써 주시면 당신의 일을 하겠노라고 단순한 기도를 한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전적 주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서인지 신학 공부를 하면서 한번도 고민하거나 길을 잘못 선택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나의 분수와 역량으로 볼 때 주님의 일꾼으로 부르시고 써 주심, 그 자체가 감사였기 때문이다. 그런던 어느 날 신학 공부 시절, 창세기를 보며 아브라함의 삶을 묵상하게 되었는데, 바로 어릴 때 희미하게나마 아브라함의 사건을 묵상했던 바로 그때 생각이 났다. 별이 빛나는 밤에 주님과 함께 믿을 수 없는 꿈만 같은 얘기하던 장면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주님은 말씀하시고 아브라함처럼 난 듣고, 별하나, 나 하나, 별둘, 나 둘... 이 사실은 나에게 주신 생생한 비전이었고 꿈이었다. 그 때부터 난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도를 시작했고, 그리고 그 당시 내가 이름만이라도 알고 선교사들이 있으면 그 지역과 나라들을 위해서 기도를 시작했다. 처음 기도를 시작할 때 막연한 것 같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세계 선교의 비전이 구체적으로 되어졌다. 나에게 이런 비전을 주신 것을 생각할 때 은혜이다. 아니 누가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비, 민족의 조상이 되리라고 하는 말씀을 받고 70세까지 살았던 하란 지역이 나의 선교지가 될 줄을 알았겠는가?





* 선교의 첫발을 내딛으며

1987년 5월 20일 첫 선교 길을 떠났다. 얼마나 기도하며 준비했던 선교의 길이었던가? 사랑하는 가족, 친지들, 조국, 섬기던 교회 성도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김포 공항을 빠져나가는데 수많은 생각들이 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 이제 떠나는 모양이구나! 사랑하는 가족을 남겨 두고 혼자 떠난다는 부담감도 또한 큰 짐이었다. 그러나 사역지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나 혼자 먼저 떠난 것이다. 김포 공항을 출발하여 태국으로 향하여 갔다. 사실 이곳은 경우지(經由地)인데 멈추고 싶어서 멈춘 것이 아니고, 촌놈이 처음 비행기를 타다 보니 비행기 몸살을 한 것이다. 마침 태국 방콕에 교단 선배 선교사이신 J 선교사가 있기에 염치 불문하고 연락을 하여 공항을 나오라고 했다. 그 분 역시 내 얼굴도 모르고 공항에 마중 나온 것이다. 처음 상견례를 하고 한 주간을 쉬면서 전열을 정비했다. 날씨가 습기 있는 더위라서 몹시 견디기가 힘들었지만 선교 훈련이라고 생각하고 참았다. 이런 표현이 걸 맞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전화 위복(轉禍爲福)이 되었다. 그 분과 여러날 동안을 대화하며 선교 경험담도 듣고, 태국 선교 현장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고, 계획된 방문은 아니었지만 선교지를 출발하는 선교사로서 매우 유익된 시간이었다. 이제 방콕에서 25일(금) 새벽 2시30분 쿠웨이트 비행기를 타고 장장 10시간을 날아가 쿠웨이트 공항에 도착했다. 사막의 뜨거운 모래 바람, 50도를 오르내리는 더위는 과히 혹 더위를 실감하는 날씨였다. 이곳에 가게 된 이유는 그 당시 한국에서 선교사 여권을 발급 받기란 하늘에서 별 따기 보다 힘들었던 시절이다. 그래서 때 마침 그곳에 근무하는 한 집사님의 도움으로 여권을 받았기에 그곳을 방문하는 것이 예의일 것 같아 방문한 것이다. 아무튼 석유의 나라 쿠웨이트, 우리 나라 강원도 만한 땅에 모래땅을 파면 석유가 나온다 하니 하나님은 공평하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 나라 같은 곳에 석유가 난다면 중동 사람들에게는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사막의 나라, 어디를 가도 그늘이 없는 나라, 삭막한 콘크리트 아파트 이것이 이 도시의 전부였다. 그러나 여기에도 우리 민족이 건설 현장에서 피 땀 흘리며 일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했다. 이곳에서 며칠을 멈추고 다시 비행기를 타고 그리스 아테네로 날아갔다. 그리스 아테네는 중동에서 가니 천국처럼 보였다. 여기서는 비행기 스케줄 때문에 1박을 하고 다음 날 나의 선교지인 T국 I시(市) 공항에 30일 아침에 도착했다. 공항에는 나의 책임자 미국인 형제와 이곳에 국비 유학생으로 와 공부하며 사역하는 몇 형제들이 반갑게 마중을 나와 함께 기쁨의 만남을 나누었다.



* 첫 밤을 선교지에서

중동은 겨울이 우기 철이다. 대략 이른 비가 11월경 시작하면 늦은 비는 익년 4-5월이면 마친다. 이 계절이 지나면 글자 그대로 건기로 접어드는데 그때부터 10월까지는 비 한 방울 없는 작렬하는 태양이 온 대지를 삼킬 듯이 이글거리는 것이다. 그해는 유난히도 겨울비, 봄비가 많이와 유연탄 냄새와 함께 봄을 맞이했다. 가족이 오기전 한 형제의 집에 머물며 정착을 시작한 것이다. 하루 생활이 너무 단조로운 생활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계획된 일이 없기에 버스를 타고 길을 익히고, 우체국과 문방구, 은행에 가는 일이 하루의 중요한 일과였다. 그 당시 I 시(市)에 교통 신호등이 두개뿐이었다면 안 믿겠지만 그러나 사실이다. 달러 1$ 370 리라, 버스 요금이 30리라(한국의 10원정도), 200리라를 주면 오랜지를 한 묶음씩 주던 시절이었다. 어딜 가도 인정이 있고 사람들이 여유가 있어 있었다. 택시를 타고 가다가 운전사들에게 다른 볼일이 있으니 기다리라고 하면 그 일 보는 동안 기다리고 있다. 한국 같으면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시절, 한번은 시내버스를 타고 길을 익히는데 그 당시 난 종점에서 살았다. 한국적인 상황이면 당연히 종점에서 차를 타면 종점에까지 오는 것이 당연한데 이곳은 가는 길이 다르고 오는 길이 다르다는 것을 몰랐다. 한참 가다 보니 집으로 오는 길이 아니지 않는가? 지금 생각하면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당황히 되어 중간에 내렸던 것이다. 길을 물으려 해도 언어가 통해야 말을 할 수 있지, 그때 당황함이란 마치 길을 잃은 어린아이 심정을 연상케 했다. 그후 조금씩 언어를 배우면서 문화를 익히는데 또 한번의 에피소드가 있었다. 은행을 가서 돈을 환전을 하려고 길가는 사람에게 물으니 외환은행을 물었는데 치과(원래 터어키에서는 외환은행의 외환은 드쉬이고, 치과는 디쉬인데 발음을 잘못하여 내가 외환은행을 이, 치아로 발음을 하니 이가 아픈 줄 알고 치과로 안내해 준 것이다.)로 안내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너무 당혹스러워 어쩔 줄 모르니 안내하는 사람이 미안스러워 하지 않는가? 이런 크고 작은 문화 충격을 겪으며 정착을 시작한 것이다. 세월은 흘러 5-6개월이 지났다. 이젠 몸짓 언어지만 언어 소통이 조금씩 되고 있었다.



* 언어를 배우는 기쁨

한 사역자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생명과 같은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나는 그해 가을, 그러니까 1987년 10월, I 시(市)에 있는 대학교 언어 과정에 입학하여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엔 입학을 앞두고 기초 문법을 조금 배우고 갔다. 내 딴엔 그러기에 약간 현지어 한다고 생각하며 갔는데 첫 시간 선생님의 강의는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 한마디로 무슨 말인지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처음엔 내 귀를 의심했다. 아랍권에서 온 학생들은 자기들이 이해를 조금 못해도 옆 친구들로부터 금방 통역을 하여 알아차리는데 동양 사람은 딱 한사람인데 도저히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현지어와 한국어의 사전도 없는 시절이어서 영어와 현지어 사전 그리고 한영, 영한 사전을 가지고 의미를 알려고 하니 가방에 사전만 한 짐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언어에 자신을 잃게 되고 매일 매일 숙제와 시험은 정말 스트레스였다. 이제 언어를 배우는 기쁨보다는 극복할 수 없는 부담감이 더 많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언어를 공부했다. 그후 세월이 조금씩 흐르면서 언어가 들리기 시작했고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언어가 처음엔 계단을 오르듯이 일정한 기간은 진보하는 것 같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정체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때에 그 단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언어의 진보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언어란 세월이 흐르면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노력과 자기 싸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역자들이 세월이 지나면서 자기 수준에서 만족하고 모르면 모르는 대로 살아가는데 익숙해진다. 이것이 계속 쌓이면 그 정도에서 더 이상 언어는 진보하지 않는다. 현지어 속담에 이런 재미있는 말이 있다." 모르는 것이 창피한 것이 아니라 배우지 않는 것이 창피한 것이다." 언어 그것은 사역의 성패를 가른다.





* 경찰과 현지인 의심 소동

사람이 사는데 제일 힘든 것은 어디까지 사람을 믿어야 할지, 그리고 어디 가지 인내하며 기다려야 할지 참 어려운 것 같다. 누군가 말하길 " 사람은 믿지 말고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는 말이 생각난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 말은 명언임이 틀림없다. 난 처음에 팀에서 개척한 현지 교회에 출석했다. 이 교회는 사실 현지인 교회로서 효시(嚆矢)가 되는 교회이다. 다시말해서 그전엔 이곳에 소수 민족들이 자기들의 언어로 예배를 드렸고, 이곳 현지인들이 오는 것을 가히 반가워하지 않았다. 왜 이들이 같은 나라에 살면서 그렇게 했는가? 한마디로 이들은 소수 민족들로서 너무 많은 피해를 당했기에 그리스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포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중에 젊은이들 중심으로 현지인 교회를 나의 팀 책임자를 중심으로 세운 것이다. 처음엔 이 교회가 매우 왕성하게 활동을 하며 잘 성장해 나가는데 현지 종교 경찰이 이것을 알아차리고 서서히 압력을 시작한 것이다. 지금도 이 사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그 당시 명문 대학 출신이고 너무도 성실했던 한 형제가 경찰의 끄나풀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팀 전체 식구들이 너무 충격이 커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이미 알려진 사실인데 누굴 원망할 수 있단 말인가? 마지막 우리의 기도 제목은 그 형제가 팀 식구들 명단을 전부 경찰에 넘겨주었느냐 아니면 거기까지는 하지 안았느냐가 관건이었다. 우린 최후를 기다렸다. 그런데 다행히 경찰이 조사하는데 몇몇 외국인 사역자들을 알려주었지만 팀 전체 식구들을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감사를 드렸다. 그후부터는 나 자신이 현지인들을 볼 때 모두 형사의 눈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이 형제는 교회에 그 당시 처음 나온 형제인데 팀의 형제가 나보고 개인 접촉을 해보라고 했다. 가뜩이나 신경이 곤두서 있는데 형제를 접촉하라는 소리에 난 속으로 시간을 좀 두고 진의 여부(眞意與否)를 알고 접촉하자는 판단으로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런데 웬일인가? 팀의 한 형제가 이 형제를 저녁에 초대하여 예수 영화를 보여 주었는데 그 날밤 주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한 것이 아닌가? 나에게는 충격과 아울러 회개하는 시간이었다. 선교사라고 한 녀석이 이렇게 사람을 의심해서 되겠는가? 하며 자책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후 난 개인적으로 그를 찾아가 회개와 용서를 구하며 나의 그 당시 상황을 말했다. 아무튼 이 형제는 지금 결혼도 하고 믿는 직장에서 잘 성장하고 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접하면서 나에게 몇 가지 교훈이 되었다.



첫째는 사역자는 절대 형사의 눈을 가져서는 안된다.

사역자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현지인을 사랑해야지 의심의 눈을 가지고, 형사의 눈을 가지고 이들을 바라보지 않아야 겠다는 다짐을 했다. 사탄은 이런 마음을 주면서 사역을 지치게 하고 남을 의심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후 나에게 이 교훈은 큰 스승이 되어 가능한 한 현지인을 볼 때 형사의 눈을 갖기 않으려고 노력하며 설령 속이는 한이 있어서도 그것 때문에 분해하는 마음이 없어졌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지 있지, 그러나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고 여유가 생긴다.



둘째는 그는 흥하고 나는 쇄 하리라 (요3 31)

이 말은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면서 고백한 말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세례요한의 인격과 됨됨이를 알 수 있다. 당시 자기를 추종하는 수없는 군중들 앞에서 한번쯤 의시댈만도 한데 그의 대답은 아주 명쾌하게, 아주 정확하게 자신의 한계와 분수를 알고 주님을 향해 소개하는 내용이 인상적이다. 누군가 말하길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하는 그 장지 손가락이 복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 세례요한의 성숙한 인격 그리고 그의 됨됨이가 여기 한 표현에서 잘 나타났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흥하고 나는 쇄 하리라" 이것을 선교사는 이렇게 대입하는 것이 어떻까? "현지인은 흥하고 나는 쇄 하리라" 사실 우리는 사역자들이 여기서부터 갈등이 현지인들과 생기고 서로 흥하려고 하니 깊은 골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어차피 사역자는 현지인이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들이 잘 일어설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으로 족해야 한다. 여기에 사역자의 멋진 인격이 드러나는 것이다. 선교지마다 현지인과 주된 갈등이 누가 주도권을 잡느냐로 인해 권모술수가 오고가는 모습을 보며 이런 초라한 싸움은 이제 선교지에서 없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는(현지인) 흥하고 나는 (선교사) 쇄 하리라"



셋째는 선교사는 보조 타이어다.

너무 식상한 얘기 인줄 몰라도 선교사가 이 부분에까지 올라 와 있으면 그 어떤 일에도 욕심 부리지 않고 현지인을 격려하며 사역할 수 있을 것이다. 난 어느 날 긴 여행을 하면서 차가 펑크가 나는 경험을 했다. 15년이 넘은 중고차이기에 펑크 나는 일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타이어를 갈아 끼우려는데 보조 타이어를 보니 새것이 아닌가? 이것을 보면서 머리에 불현듯 스치는 교훈이 있었다. 보조 타이어는 지금 진가가 발휘하는 것을 보며 선교사는 바로 현지인들이 필요로 할 때 도움을 주고 그들이 스스로 할 수 있을 때 뒤로 물러가는 모습, 먼 발치에서 도움을 기다리는 현지인들을 향하여 그때 그때마다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모든 영광은 현지인들에게! 이 얼마나 멋있는 모습인가?

나에게 경찰과 의심 소동 사건 없었더라면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바로 이 사건은 나 자신이 사역을 균형 있게 하는 교통 신호등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아픔들이 없었다면 아직도 형사의 눈을 가지고, 내가 스타가 되어, 현지인은 보조 타이어로 생각하고 모든 일들을 내가 처리하는 스타 플레이어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 지금의 나의 처지가 아무 것도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지만 먼 발치에서 현지인을 격려하며 사역이 사역되도록, 교회가 교회 되도록 기도하며 섬길 때 기쁨과 희열이 있다. 선교사의 섬김의 멋, 그것은 선교사의 뺏지가 아닐까?



결 어

이것은 한 선교사의 선교에로의 부르심과 홀로서기에 대한 간증이다. 이제와 생각하니 14년전 일들을 더욱 더 생생하게 기록하기 위해서 자료나 그 당시 글들을 조금이라도 더 남겼더라면 보다 생생하게 기록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한가지 감사한 것은 틈틈이 적어 둔 일기와 기도 편지가 귀중한 자료가 되었고 부족하지만 여기까지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고 본다. 이제는 후회 없는 사역을 위해서 주님이 힘주시는 날까지 무슬림 영혼들을 사랑하며 살고 싶다. 이 밤도 선교지에서 별은 동일하게 빛나고 있다. 아브라함을 부르셨던 신실하신 하나님은 부족한자를 무슬림 영혼을 향해 부르심에 감사하면서 처음 부르셨던 사랑으로 일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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