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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작성일  2000-08-25
 제목  <주님의 사도들> 루드비히 잉베르 노멘젠(1834∼1918)
 주제어키워드  주님의 사도들  국가  
 자료출처    성경본문  
 조회수  3530  추천수  4
루드비히 잉베르 노멘젠은 노르트슈트란트의 북 프리젠 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페테르는 그 섬의 수문관리인으로 일하였는데 루드비히가 열네 살이 되었을 때 돌아가셨다. 그의 어머니 안나는 영리하지만 제멋대로 구는 자녀들을 양육하기 위해서 자신의 일을 그만두어야 했다. 그녀는 그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항상 잘 알고 있었다. 열두 살이 되었을 때, 그는 거의 1년 동안이나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하는 사고를 당했는데, 이 기간 동안에 성경을 읽음으로써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는 만약 하나님께서 그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신다면, 선교사가 되겠노라고 서원했다. 병이 회복된 후에 그는 농장의 노동자로 일했다. 그후에는 슐레스비히에서 최초로 철도를 건설하는 일을 도왔고, 결국에는 보조 교사가 되었다.

노멘젠이 스무 살이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는 그가 선교사가 되는 데 동의했다. 젊은 그리스도인의 열정과 재정적으로 넉넉하지 못하다는 두 가지 이유때문에 그는 해외로 나갈 수 있는 선원이 되기 위하여 포르로 갔다. 그러나 선원이 되는 대신, 어느 목사님의 도움을 받아 부프탈-바르멘에 있는 “라인”선교신학원에서 4년 과정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곳에 있는 동안, 노멘젠은 프라이드리히 파브리스와 루드비히 폰 로덴이라는 두 명의 선교학 교수로부터 신학사상 형성에 있어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결국, 노멘젠은 선교사로 파송되었고 1861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암스텔담에서 수마트라로 항해하는 배 위에서 그의 선교 사역은 시작되었다.



시작



4주가 지난 후, 노멘젠은 북서 해변인 파당에 상륙했다. 그는 한동안 바루스에서 살다가, 앙콜라에서 살았는데, 그곳은 이미 네명의 선교사가 사역했던 바탁지역의 이슬람 남쪽이었다. 1861년 10월 7일에 그들은 바탁 교회 설립 문제를 두고 시피록에서 첫 회담을 열었다.

1864년 5월에 이 교회는 가장 중요한 시점에 도달했다. 노멘젠은 북쪽에 있는 중앙산맥으로 가서, 북 수마트라의 비옥하고 인구 밀도가 높은 고지 계곡의 한 쪽인 사이트니후타 지역에 정주했다. 이때 실린둥 마을은, 정치적으로 독립을 하여, 남자나 여자를 무론하고 개인의 뿌리 즉 자신이 속한 가족, 부족에서 얻은 사회적 근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고대 바탁 부족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시기였다. 실린둥 마을에는 네덜란드의 영향이 퍼지지 않았었다. 그 대신에, 바탁의 모든 자연과 영을 예배하는 신앙인 정령 숭배 종교가 자리잡고 있었다. 바탁 사람들의 생활은 가정을 통하여 유전되는 관례와 관습인 아다트에 의해서 질서가 잡혀 있었다.

그런 마을에 노멘젠이 온 것이다. 그래서 후에 그의 친구가 된 족장, 폰타스 룸반토빙의 후원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곳 주민들로부터 환대받지 못하였다. 노멘젠이 식민 정부의 사람이라고 생각한 그들은 당연히 그들의 독립을 염려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를 조롱하고 위협했다. “우리는 너의 다리를 잘라서 강에다 던져 넣어버릴테다.” 그러나 노멘젠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위협에도 그가 굴하지 않자 그들은 그를 죽이려고 했다. 조상 숭배의 성대한 경축 행사 중에 그 선교사는 정령들의 희생제물로 바쳐질 운명이었다. 그러나 그가 침착하게 격노한 군중들 사이를 뚫고 걸어나가자 아무도 그에게 손을 대는 사람이 없었다. 이 사건은 군중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의 신뢰를 얻어내려는 그의 숱한 노력들은 결코 헛되지 않아 마침내 몇 명의 청중을 얻을 수 있었다. 1865년 8월 27일, 그는 실린둥에서 처음으로 4쌍의 부부와 5명의 아이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로 인하여 ‘아다트 공동체’인 그들의 부족으로부터 출회를 당하였다. 그들은 재산을 잃게 되었고, 같은 부족의 남자들로부터 살해위협을 받았다. 그래서 노멘젠은 그들을 작은 선교의 기초 공동체로 삼고, 그들이 새로운 사역지를 건설하는 일을 도왔다. 심한 적대감, 습격과 약탈에도 불구하고, 바탁인들은 날이 갈수록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와 연합하였고, ‘후타 다메’라 불리우는 그 기초 공동체는 점차적으로 누벽(壘壁)들과 참호들로 보호받는 ‘새로운 종교’의 공동체로 변모되어 갔다.

1866년에 그의 아내가 된 약혼녀인 카롤린너 구트브로트가 함부르크로부터 도착하고, 슐레스비히의 시골친구인 피터 힌리히 요한젠이 노멘젠을 돕는 교사와 성경 번역가로 일하려고 옴으로써, 노멘젠은 지원군을 얻었다. 조금 지난 후, 루드비히는 다른 작은 교회들을 세우는 것을 본보기로 삼아 그 계곡의 서동쪽 끝에 있는 판수르나피투에서 제2의 선교 기지를 설립하였다.



새로운 시기



그후 노멘젠은 1876년에 우호적인 족장들과 함께 답사했던 북쪽에 있는 이교도 지역인 토바로 향하였다. 그러나 네덜란드 정부가 이 지역을 복속시키고, 기독교의 철천지 원수였던 대사제 싱스만가라댜 12세가 일으켰던 반란을 진압한 후에야 노멘젠과 그의 선교사들은 그곳으로 갈 수 있었다.

결국 1886년에 노멘젠은 토버 호수의 동쪽 기슭에 있는 시굼파르에 정주하고 그곳을 그의 사역의 중심지로 삼았다. 족장들을 사귀고 선교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하여 그는 지치는 줄도 모르고 배로 왕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러한 거점들은 번창하는 교회로 발전하였고, 토바 사람들은 그 때 전 가족과 전 부족이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급속한 성장 하에서는 피상적인 기독교인이 되기 쉽다는 것이 명백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실린둥에서와 같이, 노멘젠은 대중 운동에 지나지 않는 상태에서 국가적인 바탁교회가 되도록 지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지역 교회의 자기 보존에 초점을 맞추어 지혜롭게 조언을 해 주었다. 처음부터 그는 본토인들을 훈련하여, 장로나 목회자, 특히 교회 내부 사역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교사(설교자)로 만들었다. 그 결과 그 교회는 상당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면서 ‘아다트’라는 사회구조를 지키면서도 기독교 공동체와 국가 공동체가 거의 하나가 되는 마을 공동체로 통합되었다. 물론 이것은 기독교화를 더욱 용이하게 해 주었다.



“앞으로의 전진”



20년 이내에, 전 토바 지역에 복음이 전해졌고, 바탁 교회는 거의 5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 때에, 노멘젠은 시말룽군-바탁 접경지역의 동쪽 해변까지 그의 사역을 확대시키기로 계획하였다. 거기서는 한동안 이슬람 추종자들이 바쁘게 사역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것이 선교를 더욱 더 절박하게 만들었다. 노멘젠이 부퍼탈에 있는 선교 센터에 그의 계획에 관하여 의뢰했을 때, 그는 바탁어로 된 다음과 같은 전보를 받았다. ‘톨레’ 이것은 곧 ‘앞으로 전진’이라는 뜻이었다. 그가 28명의 선교사들을 더 보내달라고 기도했을 때 받은 주님의 응답도 그러했다.

노멘젠은 이어서 질서 있고 잘 짜여진 교회를 개척할 준비를 위하여 시말룽군까지 한번 대모험을 감행해 보자고 주장하였고, 그 다음 몇년 동안에 선교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다른 곳에서 만큼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노익장에도 불구하고 그는 새로운 지역을 위한 선교사들을 찾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바탁 선교의 전체 지도자로서 앙콜라에까지 이르는 거대한 선교 사역지를 계속해서 방문하였다. 1911년, 바탁 교회의 창립 50주년이 되는 희년에는 50명이 넘는 선교사가 그 곳에서 사역하고 있었다. 같은 해에 노멘젠은 오라니야-낫소 국의 ‘장교’라는 화란 작위를 서품받았다. 일찍이 1904년, 그의 70회 생일에는 본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었다.



1918년 5월 23일, 여든 넷의 나이로 노멘젠은 죽었다. 그가 세웠던 바탁교회는 18만 명의 성도와 500여 교회, 34명의 목회자와 800명에 달하는 교사(설교자)가 있는 교회로 성장했다. 지금 그 교회는 2,500,000명에 달한다. ‘바탁의 사도’라는 이름은 1954년에 설립된 ‘노멘젠 대학’에 남아 있다. 노멘젠은 그의 개척정신, 지도자로서의 자질, 흔들리지 않는 인내, 그리고 용기있는 기독교 신앙을 통하여 ‘바탁인의 사도’임을 보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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