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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작성일  2000-08-25
 제목  그들의 발자취
 주제어키워드  선교세계  국가  
 자료출처    성경본문  
 조회수  3300  추천수  12
William Carry 선교사는 1761년 영국의 한 시골(North hampton)에서 가난한 직조공의 아들로 태어나서 1834년 선교지인 인도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위대한 선교사이다. 그의 사역은 후대에 많은 선교단체와 선교사들에게 큰 영향을 끼침으로 인하여 오늘날 그를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부를만큼 그가 행한 일은 참으로 많기만 하다.



스스로 선교사로 헌신



W.캐리의 위대성, 그를 우리가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그 자신이 성경을 읽는 가운데 깨달은 것들, 즉 주님의 지상명령인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될 것을 아무리 외쳐대도 반응이 없자 스스로 선교사로 헌신하고 인도로 떠나기 직전에 써낸 87p 분량의 적은 소책자 『이방인들을 위하여 기독교인들이 강구해야 할 수단들을 찾아 봄(1972년)』이라는 글을 통하여 잠자던 당시의 교회들을 선교지향적으로 일으켜 세우고 많은 젊은이들을 선교사로 헌신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의 글에 대하여 혹자는 마틴 루터 95개 조항이 기독교 역사에 큰 영향을 준 것 만큼이나 현대 기독교가 선교의 역사를 펼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하기도 한다.

W. 캐리가 제일 먼저 도착하여 사역을 시작한 곳은 지금의 방글라데시 남쪽에 있는 ‘보리샬’이라고 하는 지역이다. 방글라데시가 지금은 독립국가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인도의 한 부분이었는데 이곳에서 그는 자비량 선교의 일환으로-실질적으로는 선교비 조달이 원활하지 못하여 택한 방법-‘말다’ 농장에 일자리를 얻어 낮과 밤으로 끝없는 일속에 파묻혀 지내면서 언어를 익히고 선교의 장을 만들어 보려고 몸부림을 치지만 궁극적으로는 가족들(아내)의 몰이해와 아들 피터의 죽음 그리고 아내 ‘도로시’의 정신병 등으로 결국 7년만에 ‘보리샬’ 지역에서 철수하여 지금의 인도 칼카타 근방인 Serampore 지방으로 내려가서 자리를 잡게 된다. 그리고 이곳 ‘세람포르’에서 대학설립, 성서번역, 벵갈어 등 각종 언어의 정리(문법책), 문서사역 등등의 일들을 이루어 낸다.



사람은 갔어도



벵갈 지역에서 일할 때 기차타고 배타고 릭샤 타고 걷고 그러면서 윌리암 캐리가 사역하던 ‘보리샬’ 지역을 방문했던 일이 있다.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항상 시도하고 그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결과를 기대하던”

이 말은 캐리가 선교사로 떠나기 전 침례교 목회자들의 모임에서 이사야 52:2-3을 본문으로 설교한 내용으로 후에 선교의 金科玉條처럼 모든 선교사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말이다.

사람은 갔어도 그의 사역의 흔적은 남아서 그와 그가 떠난 후에 다시 그 지역에 들어가서 사역하던 선교사들에 의하여 설립되어지고 계승되어진 Oxfofd Mission의 흔적들과 캐리의 첫번째 아내인 도로시가 큰아들 피터의 죽음으로 받은 충격으로 정신병에 걸려서 전후좌우를 분간 못할 때 그녀를 가두어 두었던 오두막집 등을 보며 한 위대한 선교사 뒤에 있었던 말로 표현 못할 진한 슬픔과 고통 그리고 계속되는 고난에 항의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향하여 적어도 한두번 가량은 삿대질을 하며 대들었을 것 같은 상황들을 상상해 보았다.

보리샬 지역을 다녀오고 나서 한 4, 5년 후에 이번에는 그의 두번째 사역지이자 하나님 앞에 부름받기까지 34년간 사역하던 ‘Serampore’ 지역을 방문했다. 이곳은 캘커타에서 40Km 정도 떨어진 강변 마을로서 뱃길을 이용하여 들고나던 당시로서는 교통이 매우 편리한 지점이었을 것으로 생각되어 지는 곳이다.

캐리가 생전에 설립하고 사역했던 Serampore 대학은 이미 인도에서 명문대학이 된지 오래이고 그곳에 세워진 도서관에는 캐리가 생전에 직접 번역하였던 3개 국어로 된 성경의 초판본 및 41개 언어로 번역되어진 성경과 그가 스스로 정리하여 만들어낸 벵갈어 문법책, 그와 그의 동료들의 묘소 등이 잘 정리되어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를 더 감동시킨 것은 그의 말년에 침침한 호롱불 아래서 계속된 저술 및 성경번역 사업을 하다가 거의 실명 단계에까지 이른 상태에서 그가 쓰고 있었다던 안경의 모습이었다. 한 귀퉁이에 금이 가 있는 두께가 웬만한 돋보기 보다도 더 두꺼운 그 안경….



후방에서 도왔던 이가 있었기에



이제까지 W.캐리에 대하여 정리해 보았는데 사실 오늘 말하고자 하는 것의 주제는 캐리 자신이 아니고 그의 충실한 조력자였던 Andrew Fuller 에 관한 이야기이다. A. 풀러는 W.캐리와 그의 동료들을 지원하는 선교후원회(영국 침례교 선교부)의 행정 책임자이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선교부 총무 내지는 선교국장 정도의 지위에 있으면서 캐리 일행이 선교현장에서 마음놓고 일할 수 있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 그들의 뒷바라지를 했는데 적어도 그가 있는 동안에는 단 한번도 현지 선교사들과 선교부 간에 마찰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취한 선교정책은 매우 간단하였다. 그것은 선교본부에서 현지 사역에 대한 정책 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역의 정책 결정을 선교사들에게 맡겼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선교현장을 가장 잘 이해하고 아는 사람들은 선교사 자신들이며 어차피 선교 본부와 현장은 거리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에 선교본부가 현장 사역을 지휘하기가 힘이 들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선교현장의 일은 모두 선교사들에게 맡기고 본부는 오직 행정적인 뒷받침과 영적 지원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을 그는 그대로 실천하였다.

W.캐리가 위대한 선교사로서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울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그가 그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뒤에 있던 사람, 보이지 않고 묵묵히 일만 했던 A.풀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선교사들과 선교본부와의 갈등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생각해 본 W.캐리와 A.풀러의 발자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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