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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작성일  2000-08-25
 제목  가장 한국적인 방법으로
 주제어키워드  기획/ 문건  국가  
 자료출처    성경본문  
 조회수  2764  추천수  4
다음의 글은 펜윅이 남긴 자서전적 선교 사역의 기록인 『The Church of Christ in Corea』의 역서인 『대한기독교회사』에서 발췌한 것이다. 사역보다는 그가 바라본 한국, 한국인에 초점을 두었음을 미리 밝혀둔다. 아래 기록들을 읽노라면 선교지의 풍습과 관습을 인정하며 한국인의 순수함을 사랑하였던, 그리고 자신의 성급한 판단을 겸손히 인정할 줄 알았던 펜윅 선교사의 삶과 내면을 함께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수도인 서울거리를 지나서 소래로 가는 길을 한국의 나귀를 타고 여행했었는데 노상에는 신기한 풍경으로 가득했다. 궁궐의 출입문을 지키는 석호상(해태상)을 지나서 바깥 성벽에 서 있는 석호상(해태상)을 지나서 바깥 성벽에 서 있는 파수대 주변에는 재미있는 사람들과 흥미로운 것들이 많이 있었다. 궁궐 출입문 밖에는 관리들이 타는 당나귀들과 더불어 마부들이 대령해 있었고 새 성벽을 만들기 위해 삽 하나로 다섯 사람이 진흙을 이기고 있었는데 협동심이 돋보였다. 명절옷을 입은 소년들은 그들의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러 가고 있었고 옷도 제대로 입지 않은 한 어린 아이는 과식으로 인해 배를 불룩하게 내밀고 있었다.

도시의 숙녀들은 등을 돌리며 지나가거나 나들이에 사용하는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으며 어떤 여인들은 가마를 타고 지나가고 또 어떤 여인들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지나 다니는데 외모에 대해서는 무관심한듯 보였다. 도시의 양반들은 뒷산을 산책도 하고 외출할 때는 의기양양하게 말들을 타고 다녔다. 이처럼 이런 시기에 록펠러는 이 은자의 나라에 석유시장을 개척했으며 물장수들은 석유를 담아 왔던 양철통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황소나 혹은 당나귀에 소나무 장작짐을 실은 나뭇꾼의 긴 행렬이 성안으로 들어오고 있었으며 가축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의 지게로 큰 짐을 져 날랐다. 성문을 지나 확트인 시골로 나오면 광경이 전혀 달랐다. 순박한 아이들이 바지 저고리를 입고 다녔다. 여인들은 1910년대의 미국 숙녀들이 쓰고 다니던 모자보다 더 큼직한 모자로 그들의 얼굴을 숨기고 다녔다. 시골 양반들은 집의 대청 마루에 태평스럽게 담뱃대를 들고 앉아 있었다. 들에는 어수룩 하지만 건장하게 생긴 하인들이 일을 하다가 일손을 멈추고 우리 일행을 응시해 보았다. 그런가하면 농부들이 쟁기질을 하는데 기막히게 능숙했다. 논에서 벼를 베는 무리들은 동양 특유의 이상한 노래를 제창하면서 일을 했다. 한국에는 부락공동체 노역(품앗이)이 많이 행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현금의 지출을 적게 만들며 품삯 이상으로 일꾼들의 기분을 돋아준다. 남자들과 때로는 여자들까지도 무리를 지어 풀을 뽑고 모를 심으며 다른 작물 재배도 즐겁고 흥겹게 가락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일했다. 한국 사람들은 가장 지칠 줄 모르는 일하는 사람들이다. 농부들이 무리를 지어 품앗이로 일하는 풍습은 미국 개척시대의 벌채일꾼들에게 널리 보급되었던 노동 교환 풍습과 아주 흡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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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밭을 만드는 동안 서양 선교사인 내가 옷을 벗고 일하는 것이 그들을 약간 놀라게 만들었다. 동양인의 관점에서는 선생이나 양반은 어떠한 경우에도 육체 노동을 하지 않는 것이 보편화되었던 것이다. 서양의 양반 계층에 속한 내가 자질구레한 일들을 이 이방 사람들의 손을 빌어서 하지 않는 것을 그들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50여 명이 넘는 사람들 가운데 일하는 사람은 세 사람뿐이었는데 한국인 고용인 두 사람과 나 자신이었다. 토질은 작은 돌이 섞여 있는 것 외에는 좋은 편이지만 가뭄을 견딜만큼 성토를 두텁게 해 준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1자 깊이로 흙을 파고 돌을 골라 내어 밭을 일구었다. 그리고 적당히 비료를 주었다.

늦은 가을에 나는 처음으로 한국인들의 보수적인 기질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 채소들은 서양의 종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좋은 것들이었으므로 나의 정원에서 아주 잘 자란 채소들을 보며 한국인 친구들은 온갖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그 종자를 주문해 주겠다고 제안했을 때 그들은 거절했다. 그들은 서양의 농산물들은 한국의 것들보다 더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 내가 씨앗을 주문해서 준다 할지라도 그들은 밭에 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칫 생각하면 배은망덕하고 느리며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여러분은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어리석은 사람은 바로 서양사람인 나였다. 내가 그후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예를 들어, 그들이 서양 종자와 바꾸기를 거절했던 그 메주콩은 “간장콩” 씨앗이었으며 후에 가서 미국에서도 유명해졌으나 그때만 해도 서방 세계의 여러 나라엔 알려지지도 않았던 것이었으며 지금에 와서는 전문가들에 의하여 자주개자리보다도 수확이 풍성한 것으로 지구상에서 비교할 수 없는 가치있는 곡물로 판명된 것이었다.

한국인들은 여러 방법으로 우리 서양인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동양인은 그들이 행하는 일들에 대하여 훌륭하고 실제적인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일반적으로 주어진 환경에 잘 적응하고 언제나 경제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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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운명이 던져져 한국에 온 서양 학도들은 한국인이 어떤 사람들이며 그들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알려고 한다. 우리가 잘은 모르지만 한국인은 몽고계 혈통에다 아랍의 피가 조금 섞인 약간의 증거가 있다. 그러나 확실하지는 않다. 7세기에서 9세기 사이에 아랍 사람들이 교역을 했으며 그때 그들은 한국에 그들의 관습을 약간 남겨놓은 듯하다. 아랍인들의 관습이었던 매사냥이나 새의 선종과 길들이는 것까지도 한국에서 하고 있는 것과 똑같다. 한국 사람들의 그 놀라운 손님 접대도 이스마엘 자손의 그것과 유사하다.

한국인들은 공자의 윤리에 크게 기초하고 있으며 공명정대하게 말해서 그리스도를 떠나서 본다면 한국과 중국의 문명은 서양의 문명보다 전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는 더 많은 공헌을 한 것이 사실이다. 느린 손노동이 일확천금의 기계보다도 인간에게 더 공헌해 온 것이다. 나의 의견이지만 동양이 서양의 문명을 답습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미개한 사람들의 활과 화살은 개명된 사람의 최신예 자동소총보다는 해가 적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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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을 손쉽게 감독할 수 없는 먼 곳으로 보내고 많은 불안에 휩싸였다. 그는 많은 가르침을 받지도 않았으며 기독교 신앙의 바탕도 견고하다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다. 그가 지닌 증거라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충성을 다하는 사람으로 단정되므로 그의 아버지와 형제들이 그를 집안에서 쫓아내어 버림을 받았다는 것 뿐이었다. 그는 어머니와 아내하고도 헤어졌다. 그후에 나는 그의 가족들이 구세주를 그들의 구세주로, 하나님을 그들의 하나님으로 믿기로 선포한 내용의 편지를 보았다.

주일날 상복을 입은 남루한 차림으로 교회에 왔던 사람, 그가 바로 신씨였다. 그는 조상의 3년 상을 끝내고 묘에서 마지막 제사를 드리고 집에 오는 중이었다. 이 의식은 옷이 헝클어지고 헤어질수록 상을 잘 치른 것이라고 하는데 신씨의 초라한 외모는 상을 잘 치루었음이 분명했다. 우리와 같이 무릎을 꿇고 기도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을 얻었다. 마귀숭배의 남루한 옷을 예수님의 의의 흠없는 흰 세마포로 갈아 입었다. 그 흠없는 옷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비천한 몸으로 오셔서 타락한 인간의 적들을 하나하나 정복하신 사람으로 살아오신, 완전한 생명의 실로 짜여진 옷이었다. 이 신씨는 어린 아이와 같은 순박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10일 정도 되었을 때 그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를 “스스로 자신의 삶을 다룰 수 없습니다” 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주님께 드리기를 원했으며 주님의 좋으실대로 주님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주관하시도록 요청했다.

여러분은 아무리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은혜의 체험을 지닌 사람을 파송함에 있어서 보여준 나의 우둔함에 놀랐을 것이다. 이것은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는 교회를 향하여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성령께서 말씀하신 안디옥을 회상시키는 오랜 외침이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는 마치 숙련공이 연장을 다루듯이 사람을 사용하시며 그리고 신씨가 바로 하나님께서 그 특별한 일을 위해 준비하신 사람이라고 하는 극명한 일을 나는 도무지 깨닫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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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에서 48㎞나 떨어진 새로운 임지에서 일을 맡은 후 신씨가 행한 첫번째 일은 귀신들렸던 한 젊은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내쫓는 일이었다. 그 젊은이의 부모는 매우 점잖은 집안 사람들이었고 상당한 재산도 있었으며 좋은 양반 가문이었다. 이 가정은 거듭나서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고 14살 먹은 어린 아들을 제자로 삼도록 신씨에게 맡겼다.

신씨의 가정은 전도사업의 중심지역으로 이사를 했는데 진흙벽과 초가지붕을 한 오두막집이었다. 신씨와 그의 가족들이 이러한 옹색한 곳에 사는 것을 본다는 것은 이 서양 사람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기에-신씨와 그의 어머님간의 애정은 각별한 것이었다- 나는 50달러를 마련하여 이들에게 조그마한 집을 장만하도록 보냈다. 그후에 내가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들은 전과 다름없이 초라하게 살고 있었다. 그 연유를 묻는 나를 피하기에 다른 사람에게 물었더니 이 헌신적인 사람은 인근 마을에 전도자를 파송하는데 그 돈을 사용한 것이었다. 그 이유를 신씨에게 묻자, “목사님 저는 그것을 제 자신을 위해 사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주위엔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모르고 죽어가고 있질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신씨는 곧 12개의 교회를 개척했으며 박해를 받았으나 핍박을 받게 되면 학생들을 모아놓고 그의 대적들이 그와 화평하게 되기까지 끊임없이 기도했다. 이것은 학생들에게 산교육이 되었으며 혈기를 자제할 수 있게 하였다. 혈기를 자제한다는 것은 백인들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의 주위에는 백인 선교사가 없으므로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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