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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작성일  2000-08-25
 제목  오지선교에 일생을 바치며
 주제어키워드  기획/ 인터뷰  국가  
 자료출처    성경본문  
 조회수  2186  추천수  4
10분 연착하여 밟게 된 대전역. 작년 겨울, 충청지역 전도 여행시 대전의 영혼들과 복음화를 위해 역 광장 앞에서 기도하며 찬양했던 시간들을 회상하니 밟고 있는 땅의 느낌이 참 새로웠다. 이런 저런 생각에 차는 어느새 침례신학대학교에 도착했고 기자는 약속된 시간을 넘기고서야 허긴 총장과의 인터뷰를 시작할 수 있었다.



Q : 총장님의 이미지에 맞지 않게(?) 너무 젊어 보이시네요. 먼저 총장님 소개와 최근 근황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A : 저는 침례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충남대학교, Southeastern Baptist Seminary, Southwest Baptist University 등에서 수학한 후 본 대학 역사신학과 교수로 36년간 재직하였고 12년 전부터 총장으로 일해오고 있습니다. 학생들과 가까이에서 접촉하면서 계속 강의하고 싶지만 시간이 여의치 않아서 약 5년 전부터 총장 일에만 전념하고 있습니다. 얼마전에는 당침례총회가 있어 한 달여간 미국에 다녀왔고 최근엔 전국 총장회의가 있어 좀 바쁘게 보냈습니다. 사실 학생들은 방학 중이지만 저는 밀렸던 일과와 다음 학기 준비에 많은 시간이 필요한 때이지요.



Q : 총장님께서 알고 계신 펜윅 선교사에 대해 소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A : 펜윅은 사실 국내에는 그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주 독특한 사람입니다. 1889년 내한했으니까 언더우드, 아펜젤러보다 불과 4년 뒤에 들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초창기에 들어온 선교사임에도 국내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까닭은 그가 역사적 기록물을 남기는 것에 대해 자칫 공명심을 내세울 수 있다고 여긴 나머지 이렇다하게 남겨진 자료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학교를 다니거나 신학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체험적 신앙을 바탕으로 불굴의 의지력과 함께 영적 카리스마를 겸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와 막역한 사이였던 캐나다 출신의 독립선교사인 영재형 선교사는 그를 엘리야나 세례 요한을 연상케 하는 인물이라고 표현했었지요.

그는 위엄과 귀족적인 기품이 풍겼고 걸출한 체구를 지녔었는데 오직 주님을 위해 초가삼간의 한옥에서 소박한 생활로 일관해 모범을 보였습니다. 한국인의 순수함을 참 사랑했던 사람이었는데 초기의 한국인 전도자들이 그런 그의 모습을 더욱 존경하고 따른 것은 당연하다고 보여집니다.



Q : 내한할 당시 한국의 선교적 배경과 그가 느꼈던 한국, 한국인은 어떠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A : 펜윅 선교사가 내한하고 얼마 안되서 을사보호 조약이 체결되지 않았습니까? 당시의 국내 사정은 말 그대로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양반들은 여전히 폐쇄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고 일부 개화 사상에 물든 지성인들은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려 서양 사람들을 “양대인”이라 높여 부르며 접촉을 시도했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복음을 접한 사람들은 예수를 모르고 죽었기에 천국에 못갔을 조상을 생각하며 조상과 함께 지옥에 가겠다고 하는 사람과 하나님은 죄인인 내게 은혜를 베풀었다며 복음을 받아들이는 대조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의 자서전적 문건을 보면 그는 한국인을 영리하며 주어진 교훈을 모두 습득하는 지력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했고 창의적이며 중노동을 하는 사람들로서 적자생존을 하는 야생동물과 같은 활기를 가지고 거의 초인적인 분량의 고생과 고난을 견딜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한국인은 일본인과는 완연히 다른데 일본인보다도 신장이 크며 신체적 발달이 좋고 지적인 면이 두드러지며 일본인들에게 많이 볼 수 있는 말레이지아인들의 잔인한 혈성을 찾아볼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Q : 펜윅 선교사만의 특성이라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A : 펜윅은 철저하게 ‘반문화적(反文化的)’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타 선교사들이 의료나 교육 선교를 내세웠던 것 과는 달리 그는 아주 극보수로 육적인 인간으로서 먹고 입는 물질적 생활과 현실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한국인의 절망적 현실, 한국의 정치적·문화적·교육적 진보를 열망하는 개화 사상과 한국인의 한에 대해서는 아예 마음이 없었습니다. 자연히 타 선교사와의 교류가 없어지고 일을 추진하는 방법과 방향도 보편적인 사람들과 달랐지요. 독립선교사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선교 철학은 ‘오지 선교’를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타 선교사들이 도시 중심의 선교를 했던 반면, 그는 임박한 재림 사상이 강하였기 때문에 남들이 전하지 않는 오지로의 복음을 전하는데 그의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주, 시베리아 등지까지 복음을 날랐고 마침내 250여개의 개척 교회가 세워지는 위업을 남겼습니다.

또 한가지 그는 철저한 ‘신앙 선교(Faith Mission)’를 표방했습니다. 모든 필요에 대해 하나님만 의존하고 그분의 섭리가운데 자급, 자족 원칙을 내세웠습니다. 물론 파송될 당시 몇 명의 개인 후원자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교파적인 모금 등은 없었습니다.



Q : 그의 주된 사역과 그것이 한국 교계에 미친 영향력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A : 그의 선교 사역을 한두 마디로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의 선교 행적으로 미루어 볼 때 그에게 몇 가지 중요한 선교 정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순회전도’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성경을 판매하며, 전도지를 나누어 주고,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함경도 지역 뿐 아니라 충청도 지역 그리고 만주와 시베리아까지 여행하며 산골 등 ‘오지’를 중심으로 사역했습니다.

또 펜윅은 전도 대상자에게는 중국어 성경을, 자신은 영어 성경을 가지고 성경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실제로 철저하게 복음을 전파하는 수월한 방법은 성경 공부방을 열어 성경 공부를 운영하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현지인 제자를 양성하고 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토착 교회의 설립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처음에 그는 백인 우월주의가 강했던 사람입니다. 성경이 왜곡될까봐 현지인을 복음 사역자로 양성할 생각을 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자신의 사역은 실패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토착인 사역자 1호라 할 수 있는 신명균의 사역을 보면서, 또 수차에 걸친 자신의 현장 실험 속에서 자신의 백인 우월주의 선교 정책과 철학이 한국이라는 풍토와 환경에서 적합하지 않으며, 한국 사람에게는 서양 방식이 동양 방식보다 실제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것 같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일정기간 펜윅의 집에 거하면서 가르침을 받아야 했고 세 주에 걸쳐 전도 실습 시간을 갖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역의 결과는 그 어떤 것으로도 오염되지 않았던 “순복음 신앙”으로 사람들이 양성되었다는 것과 “토착적 자생신앙인의 배출”로 나타났습니다. “펜윅의 토착인 전도자의 활용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으며 당시의 모든 선교회들이 활용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의 새로운 것이란 그들을 한 교회에 붙들어 두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계속적으로 움직이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의 방법이란 말 그대로 순회선교였다”라고 윌리엄 스코트 선교사가 언급한 것처럼 인위적인 인간 문화에 전혀 오염되지 않은 순우무구(純愚無垢)한 한국인을 찾아서 오직 믿음과 성령의 능력으로 일하도록 연단시킨 것이지요. 이렇게 연단된 이들이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간도와 시베리아의 빈들과 산골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날라다 주었기에 초인적이고 영웅적인 믿음의 본을 보여 준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철저하게 자급, 자족하며 평생을 전도사역을 위하여 자비량으로 활동하도록 한 것은 펜윅만이 가진 은사라고 여겨집니다.



Q : 펜윅 선교사가 번역한 성경과 그 의의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지요.

A : 물론 1887년 심양의 문광서원에서 간행된 『신약젼서』을 비롯, 한국성서번역위원회에서 1900년에 완역한 신약성서도 있었지만 1919년 10월 18일에 발간된 대한기독교회의 원산 번역 『신약젼셔』는 국내에서, 그것도 한 개인이 신약 27권을 한글로 완역했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때, 그는 원어를 그대로 살리면서 한국인이 쓰는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예를 들면 성령을 성숨님으로, 세례를 침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펜윅이 성서를 한국어로 번역할 때에 토착적인 한국 낱말을 발굴하려고 얼마나 고심했으며 또한 성서 원어의 의미를 순수하게 전달하는 단어를 찾으려고 부단히 애쓴 흔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성서 번역이라는 방대한 작업이 오직 한 사람에 의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에 보편적인 객관성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고, 한문 성서의 지나친 영향으로 인명, 지명 표기가 성서공회에서 출판한 용어와 차이가 많아 독자들에게 적지 않은 혼선을 빚게 하는 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Q : 펜윅 선교사의 사역에 아쉬움이 있다면 어떠한 것인지 총장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A : 유능한 목회자로 성장시키기 위해 공을 들여 양성한 젊은이들이 4년간의 학업이 끝나자 모두 펜윅의 곁을 떠난 것을 통해서도 증명되듯이 당시 한국인이 서양 선교사에게 접근하는 동기는 신앙이나 복음이 아니라 서양 문물에 대한 호기심과 영어에 대한 욕구였습니다. 이것은 한국 근세 개화기의 이른바 “한국의 르네상스”를 맞이하여 서구 근대 문화에 눈을 뜬 한국의 뜻있는 젊은이들이 열렬히 추구하고 선망하였던 서구 지향적인 개화사상이었고 타 선교사들은 그것에 부응하는 계몽, 문화 사역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펜윅 자신이 가장 금기시하고 철저히 배제시키려 했던 정신과 사상이었습니다.

그래서 펜윅은 글을 읽고 쓸 수 있으면 족하다고 생각해서 인재를 키우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전인격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펜윅에 의해 조직된 대한기독교회가 나중에 사회의 흐름을 타지 못하고 역사 발전에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비슷한 시기에 시작했지만 침례교의 교세가 커나가지 못한 커다란 요인 중의 하나라 생각됩니다. 요컨대, 반문화 사역과 인재를 양성하지 않았다는 것이 펜윅식 선교의 아쉬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침례신학대학교

(305-358)대전시 유성구 하기동 산 14번지

Tel : (042)828 - 3111 Fax : (042)828 - 3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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