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site   게시판   메일   M1000선교사홈   Mission Magazine
 

 

      자료등록
 
주제 주제어 출처 내용 등록일   ~
 현재위치 : HOME > 선교정보보기


 작성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작성일  2000-08-25
 제목  소명, 헌신 그리고 삶
 주제어키워드  기획/ 포커스  국가  
 자료출처    성경본문  
 조회수  2908  추천수  8
말콤 C. 펜윅은 1865년 캐나다 마캄에서 아치빌드 펜윅과 바바라 앤 라담 사이에서 11남매 중에 열 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펜윅이 다섯살 때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는 넉넉지 못한 가정에서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자라야만 했다. 그는 학교에서 정규 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고 신학 교육도 받은 적이 없었다. 펜윅은 어릴 때부터 엄격하고 경건한 가정 분위기에서 자라났다. 그의 신앙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스코틀랜드 장로교 목사인 매킨토시와 그의 어머니 바바라였다. 매킨토시 목사는 펜윅의 가정에서 같이 살면서 펜윅에게 이상적인 목회자의 본을 심어 주었다. 매킨토시는 글래스고우 대학을 우등생으로 졸업하였고 풍부한 문학적 자질과 학식, 그리고 성숙한 지혜를 겸비한 사람이었으나 펜윅이 그를 가장 높이 평가한 것은 그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소박하고 어린아이와 같은 제자였다는 사실이다.



열악한 가정환경 때문에 그는 18살에 집을 떠나 온타리오의 한 시범 농장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는 후에 “나는 하나님이 나를 가르치고 계심을 믿는다. 그 분은 나를 흙 가까이 두시고 농사와 원예, 상업 등을 가르치셨다. 그런 다음에 그 분은 나를 북쪽으로 보내셨고, 나는 그 곳에서 개척자의 생활을 배웠다. 다음에는 법률 사무실에서 법 절차를 배우게 하셨으며 이 모든 일은 내가 하나님의 권속으로 태어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의 일이었다.”라고 고백했다.



부녀자를 가르치는 선교사 부인





인격적인 만남과 소명



1886년 어느 날 펜윅은 토론토의 한 거리를 걷다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너는 보잘 것 없지만 나는 그렇지 않아, 내가 너를 살리기 위해 죽었단다”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고 이로써 자신이 구원받은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 당시 펜윅은 토론토의 한 철물점 도매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40명의 일꾼을 거느린 창고 관리인이었고 그 후에 그는 해변가에 있는 한 매장의 경영인으로 승진되었다. 고린도전서 11:27과 요한복음 10:3 등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구원의 확신을 가진 이후 펜윅은 오대호 연안의 사경회의 성경공부에 참여했으며 집회가 있으면 어느 곳에나 평신도 전도자로 복음을 증거했다. 북침례교의 고든 목사는 이 사경회의 주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펜윅이 고든 목사와 깊은 친분 관계를 맺은 인연도 바로 이 나이아가라 사경회 참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사경집회에 참석하면서 선교적 소명을 받게 된 그는 사실 조용히 평신도 전도자의 길을 걷고자 했으나 마태복음 28:18-20과 사도행전 1:8을 통해 강한 도전을 받고 선교적 사명을 받게 되었다.



한국으로



펜윅은 1889년 7월에 한국으로 가라는 강한 부르심을 받았고 1888년 10월에 조직한 한국연합선교회의 도움으로 그해 12월 독립선교사로 한국선교 길에 오른다. 그의 나이 26세였고 독신이었다.

한국에 들어온 펜윅은 처음 10개월 동안 서울에 머물면서 한국어 습득에 전념하였다.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자 자신은 영어로 말하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서 한국인들 가운데 섞여 지내기 위해 서울을 떠나 황해도 소래로 갔다. 펜윅의 한국어 선생인 서경조와 함께 떠난 그는 궁궐 출입문 앞의 해태상과 궁궐을 지키는 파수꾼, 장옷을 걸친 도시 여인들의 가마행렬, 의기양양하게 말을 타고 외출하는 양반들의 모습, 황소나 당나귀에 소나무 장작짐을 실은 나무꾼들이 도성으로 들어오는 행렬, 가난한 지게짐꾼의 모습 등 대원군의 섭정으로 쇄국의 장막에 가리워 있던 폭풍 전야의 이 고요한 나라의 마지막 모습을 아주 예리한 문학적 필치로 기술하였다.

그는 안대벽(安大闢)의 집에 숙소를 정하고 그 집에 마을 소년들을 모아 성경 공부반을 만들었다. 그 성경 공부반은 성경을 가르칠 뿐 아니라 그 마을에서 안씨 부인만이 글을 읽을 줄 알았기 때문에 여인들과 소년들에게 안씨 부인을 통해 글을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펜윅은 복음을 한국인에게 전해주기 위해 찬송을 사용하였다. 그는 찬송가를 번역하면서 “할렐루야”는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다. 이것은 한국인들이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전혀 사용한 적이 없었던 여호와를 뜻하는 즐거운 히브리어 외침을 한국어의 어휘에 첨가시키는 ‘기쁜 특권’을 사용하기 위함이었다고 밝혔다.



1차 귀국 및 재입국 후의 사역



소래에 온 지 1년도 채 못되어 귀국한 펜윅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정착하여 사역하게 될 지역을 확정하는 일과 그에 필요한 선교자금 확보 문제 때문인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재입국 후 개신교의 선교회가 없는 곳을 찾아 1891년 가을에 소래를 떠나 함경도의 원산으로 자리를 옮겨 정착함으로써 펜윅은 한국 개신교 역사상 최초로 원산에서 선교사업에 착수한 인물이 되었다. 펜윅은 원산의 동산(東山)에 정착한 이후에 토지를 구입하여 과수원도 만들고 하나의 시범 농장을 마련했다. 그는 소래에서처럼 외국으로부터 좋은 씨앗을 구입하여 우리 풍토에 맞는 품종으로 개량했다. 농부의 농사짓는 모습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우리의 영농법 개선에도 커다란 관심을 보였다. 또 많은 한국인을 이 농장으로 안내하여 효율적인 영농법과 과수원 관리에 대해 지도하기도 했다.

그는 자영 영농에서 자신의 선교사업의 자립성을 시도했으며 씨앗의 품종 개량에서 한국 풍토에 맞는 일의 토착성을 모색하였고 이 정신은 이후에 그의 선교사역에 투영되었고 원리에 적용되었다.



2차 귀국



1893년 역시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펜윅 선교사가 언더우드 선교사에 대해 비난한 내용의 편지가 Truth지(誌)에 실려 결과적으로 한국연합선교회의 선교위원회가 펜윅의 선교사업을 중단하고 철수를 제의한 것과 관련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또한 그 당시에 펜윅은 독신 상태였으며 안수도 받지 않은 평신도 선교사라는 그의 처치가 한국이라는 선교 현장에서 어떤 한계를 실감하게 만들어 주었을 수도 있다. 캐나다에서 머무는 동안 그는 미국의 북침례교 목사이며 부흥 전도사였던 고든 목사와 긴밀한 교분을 갖게 되었으며 고든 목사가 경영하는 보스턴 선교 훈련학교에도 참석했다. 또한 한국연합선교회와 관계를 끊고 몇몇 독지가들의 지원을 받아 초교파적이고 복음적이며 진취적인 성향을 가진 “한국순회선교회”를 조직하였다.



한국에서의 사역



1896년 봄, 한국순회선교회의 책임자로 한국에 돌아와 만주와 시베리아를 향한 선교사업을 전망하여 원산 중심의 선교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개인 전도에 의해 신명균을 만나게 되었다. 신명균과의 만남은 펜윅의 선교사업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고 사역의 결과로 많은 교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1903년과 1906년 즈음에 펜윅은 장차 복음사역에 종사할 일꾼을 양성하기 위하여 젊은이 네 명을 택하여 성경학원을 개원했다. 이 성경학원은 그의 한국순회선교회의 토착적 선교사업의 이상을 실현하는 최초의 시도이며 그 시험장이었다.

펜윅은 그들을 이론적인 사람으로 만들지 않기 위하여 하루의 반나절은 그의 농장에서 일하도록 하고 반나절은 공부하도록 했다. 그들의 교육과정은 원칙적으로 성경 읽기·쓰기·셈본에 국한시켰고 성경공부는 한 부분의 내용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을 때까지 읽게 했다. 그러나 4년 후의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 그는 이때 “다른 나라에서 온 외국인은 이곳에 필요한 사업을 수행하기에 가장 적절한 일꾼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실히 깨달았다. 그에 비해 신명균은 백인 선교사 다섯 사람의 일을 혼자서 해내고 있었으며 신명균의 일하는 모습은 백인 우월주의에 빠져있던 펜윅의 선교철학과 방법론에 일대 변화가 일어나게 만드는 데 충분했다. “한국인에 의한 한국선교”라는 그의 ‘토착선교’ 전략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오지 선교



‘엘라 씽 선교회’의 사역을 흡수하면서 더욱 많아진 교회들을 보다 체계적으로 정돈하기 위해 교단의 조직을 구상하게 된 펜윅은 1906년 31개의 교회들을 강경교회로 모이게 하고 침례교단의 전신인 “대한기독교회”를 조직하였다.

공주, 강경, 철산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의 농촌 중심 사역은 대한기독교회가 조직되면서 다른 교단이 교회를 세우거나 전도사역을 시작한 도시와 농촌 지역을 피하여, 복음의 소식을 전해 듣거나 접하지 못한 오지의 산골과 빈들로 파송했다. 이것은 당시 한국에 주재하던 다른 ‘교파 선교회’의 선교사들이 추구하던 한국의 선교정책-네비우스 정책에 입각한 도시 중심의 선교정책-과는 전혀 성격과 방향을 달리하는 선교정책이었다. 펜윅이 한국이라는 선교 현장에서 10여년 동안 동양의 문화와 풍습 그리고 한국인에 대한 깊은 관찰과 실험을 통하여 터득한 체험적 확신과 또 그가 고든 목사에게 영향을 받은 “오지선교”에 대한 그의 선교철학을 접목시킨 것이었다.

성경번역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펜윅은 1893년에 요한복음을 번역하였고 1899년에 빌립보서를 번역하여 전도에 사용하였다. 그리고 1915년에 신약성경 전부를 독자적으로 번역하여 1919년에 출판하였다.

1940년에 이르러 국내에 100여개 교회, 만주지역에 100여개 교회, 시베리아에 약 40개의 교회, 그리고 몽고에 수개의 개척전도소의 교세를 지닐 만큼 개척의 영역에 있어 눈부신 활동을 펼쳐온 펜윅 선교사는 일제가 만주를 군사기지로 삼아 만주의 교회들을 탄압하고 있던 1935년에 원산에서 별세하였다.



※ 말콤 c. 펜윅의 참고문헌

『한국침례교회사』 허긴, 침례신학대학교출판부, 1999

『한국침례교회와 신앙의 특성』 침례교신학연구소 편, 침례신학대학교출판부, 2000

『대한기독교회사』 허긴 역, 침례신학대학교출판부, 1989

                  






  선교정보리스트

 

 


홈페이지 | 메일 | 디렉토리페이지 | 인기검색어 | 추천사이트 | 인기사이트 | KCM 위젯모음 | 등록 및 조회

KCM 찾아오시는 길 M1000선교사홈 미션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