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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작성일  2000-07-31
 제목  사무엘 오스틴 마펫
 주제어키워드  기획1  국가  
 자료출처    성경본문  
 조회수  3072  추천수  6
미북장로교 한국 선교사 마펫. 한국명 마포삼열 혹은 마삼열 선교사는 1864년 1월 25일 미국 인디애나주 매디슨에서 출생하였다. 하노버대학에서 자연과학 석사 학위까지 취득한 그는 특별한 소명감을 자각, 1885년 미국 보수주의 신학의 요람지이자 수많은 해외선교사를 길러낸 매코믹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마펫은 이곳에서 이후 한국 선교사로 일했던 베어드(William M. Baird)와 함께 수학하였다. 신학교를 마친 뒤 1889년 4월 15일 미북장로회선교부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었고, 1890년 1월 서울에 도착한다.



한국 전도 여행



6개월 동안 한국어를 공부한 그는 그해 8월에 제1차 전도여행을 떠났다. 평양에 도착하여 2주간을 체류한 후 압록강변의 의주까지 여행하였다. 이때 백홍준의 소개로 한석진을 만났는데 그는 그의 선교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어 황해도 솔내를 방문하였다. 그의 여행은 항상 선교활동을 겸한 것으로 비록 처음의 탐색여행이었지만 많은 결신자를 얻는 성과를 올렸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언더우드로부터 「예수교학당」(경신학교의 전신)을 인수받아 교육사업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곧 새로운 선교활동을 계획하고 제2차 전도여행을 준비하여 게일(J. S. Gale)과 함께 만주지역까지 여행할 것을 합의하였다. 1891년 2월 긴 여행의 장도에 올라 서상륜의 안내로 개성을 거쳐 다시 평양에 당도하였고, 안주·박천을 지나 용천·의주에 당도하였으며, 의주에서 잠시 머문 뒤에는 압록강을 건너 만주까지 여행하였다. 돌아오는 길에는 강계를 거쳐 함경도 지방을 경유했는데, 함흥·원산·철원을 지나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 여행 중에 그는 선교의 근거지를 평양으로 정할 것을 결심하였으며, 이와 함께 한국의 북부지방 선교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게 되었다. 1891년 가을, 그는 그의 전도여행 중 가장 길고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실시된 제3차 전도여행을 떠났다. 1893년까지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남북도, 황해도 일대를 순회하며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곳곳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특히 평북지역은 김관근, 평남지역은 한석진에게 각각 전도 책임을 맡겨 이들로 하여금 많은 한국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는 방법도 사용하였다. 마펫의 적극적인 전도활동은 노방전도 중에 불신자들로부터 조롱과 야유는 물론 투석에 의한 부상까지도 당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교회의 설립



1893년 평양에 선교부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전도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처음의 어려움은 대단한 것이었다. 평양 서문통을 지나던 중 이기풍의 돌팔매질에 피를 흘린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러나 그는 선교의 개척자답게 모든 어려움을 관용과 아량, 그리고 인내로 이겨나갔다. 이에 따라 점차 많은 이들로부터 「마포목사」로 불리며 존경과 칭송을 받게 되고 전도활동의 성과도 점차로 나아지게 되었다. 1893년 처음에는 평양의 초기 교인 최치량이 경영하는 주막에서 전도하다가 그 부근의 방 하나를 얻어 교인 4-5명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곧 장소가 협소하게 되어 최치량과 협의한 끝에 당시 평양의 중심지인 널다리골 홍종대 소유의 기와집 한채를 사들였다. 이 집이 바로 평양에서 마펫이 최초로 설립한 널다리골 교회가 되었다. 1894년 1월 8일 이곳에서 22명의 학습교인이 생겼고 이중에는 7명의 세례교인도 포함되었다. 이 교회는 평양 중앙교회로 명명되었다가 이후 장대현교회로 개칭, 발전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평안도·황해도에 직간접적으로 세운 교회의 수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평안남북도에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으며 평양을 중심으로 3백리 주위에 한사람의 교인도 없었던 곳에 그가 은퇴할 때에는 1천여 교회가 서게 되었으니 그는 무엇보다 교회설립에 큰 공을 세웠다.



교역자 양성



마펫은 한국인 교역자 양성에 뜻을 두어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창설하였다. 1901년 그는 자신의 선교구역인 평양에서 신학교육을 시작하여, 자신의 거처에서 김종섭과 방기창 등 두학생을 리 선교사와 함께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902년에는 학생수가 6명이 되었고, 1904년에는 19명, 1905년에는 40명으로 증가하였다. 1907년 최초의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그중에 마펫과 직접적인 인연을 맺고 개종하여 신학에 뜻을 둔 사람만 해도 한석진, 방기창, 길선주, 이기풍, 양전백 등 5명이나 되었다. 마펫이 정식으로 평샹신학교 교장에 취임한 것은 1904년의 일로 평양 선교사공의회의 결정에 의하여 취임하였다. 이후 1924년까지 교장직에 머물면서 수많은 교역자를 배출시켰다.

그는 선교사(宣敎史)를 강의하였고 학교 행정이나 공적인 일에 있어서는 매우 엄격하였으나 모든 이들에게 진실과 성심으로 대하였다. 그의 신학경향은 보수주의에 입각한 소박하고 단순한 신학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선교 의식은 한국 초기 선교사들의 공통적인 특징이기도 하지만 특히 신학교를 책임지고 있는 마펫의 확고한 입장은 당시 한국 교회의 신학적인 혼란을 방지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그는 1919년 조선예수회장로회 제8대 총회장으로 선임되어 혼란기의 한국교회를 이끌어 나가는 수완을 하였다.



교육 선교



마펫의 또하나의 업적은 숭실학교의 설립에 있다. 1894년 널다리골 교회에서 이영언을 교사로 하여 학생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숭실학교의 시초였다. 이와 함께 1918-28년에는 숭실학교 교장으로 시무하였다. 그동안 일제의 신교육령에 성경과 종교과목 폐지 압력을 끝까지 이겨내고 교육사업이 곧 전도사업이라는 신념을 고수하였다. 뿐만아니라 행정의 일선에서는 물러나 있었으나 평양의 북장로교계통 학교들의 고문격으로 있을 당시, 신사참배 문제로 숭실전문학교, 숭실중학교, 숭의여학교의 소위 3숭 학교가 존폐문제로 시끄러울 때 그는 신사참배하면서라도 학교를 유지해야 한다는 학생과 교직원들과 사회 유지들 앞에서 “아무리 하여도 신사참배하며 학교 경영을 할 수가 없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위해서 기도하시오.”라는 한마디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한국 교회를 위해 평생을 한결같은 자세로 신앙의 지조와 신학의 정통성을 지켜오던 마펫은 병을 얻고 요양을 위해 귀국하였다가, 1939년 10월 24일 캘리포니아주 몬로비아에서 별세하였다.진실로 마펫 목사는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불멸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뛰어난 인물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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