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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작성일  2000-06-21
 제목  아펜젤러의 필적을 따라서
 주제어키워드  기획(아펜젤러의 자취찾기:문건)  국가  
 자료출처    성경본문  
 조회수  3504  추천수  7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시고 이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자유와 빛을 허락하소서”

한국에 첫발을 디디며 이렇게 기도했던 아펜젤러. 어둠과 혼돈에 싸인 이 땅에 참 자유와 빛을 주기 원했던 그의 열망과 간절함은 그가 남긴 문건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정동제일교회 역사편찬위원회가 전 7권의 영문 문건 중 일부를 번역, 출간한 「자유와 빛으로」는 보고서 1권, 일기 1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용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 보고서는 당시의 정치적·종교적 배경을 중심으로, 일기는 그가 선교답사여행을 하면서 경험한 상황, 느낌을 중심으로 옮겨 보았다. 아래의 문건을 읽다보면 어느덧 ‘사역’보다는 ‘사랑’으로 살다간 그의 삶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다음날 부산을 떠나 제물포로 향했다. 춥고 비가 오는 불유쾌한 날이었다. 이러한 날씨는 항해의 나머지 기간중에도 줄곧 계속되었다. 그래서 항해 속도가 매우 느려졌고 배멀미가 오래, 그리고 심하게 계속되었다. 우리는 반도의 남단을 돌아서 서해안 쪽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하여 이달 5일 일요일 정오경에 한강 어구에 들어섰고 오후 3시경 항구에 닻을 내렸다. 이 강은 폭이 넓으나 수심이 얕은 편이라서 우리는 삼판(뱃사공들에 의해 움직이는 작은 배)을 타고 해변가에 닿았다. 우리는 아직 아무도 만지지 않고, 개발되지 않은 미개척의 뭍에 도착한 것이다.

더럽고 누덕누덕한 많은 수의 하급 노역자들이 맨머리를 드러낸 채 배안의 짐을 향해 몰려 들었다. 그러는 동안 모두가 한껏 심호흡을 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며칠동안 사람들의 끊임없는 고함소리에도 불구하고 “왜 이교도를 찬양하는가?”라는 시편의 물음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아펜젤러 부인은 황량한 바위 위에 첫 발을 내딛었다. 어디로 무엇을 하러 가는가? 그것이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갑작스러운 반응을 요구하던 때의 질문들이었다. 이곳에는 미국인이나 영국인이 운영하는 호텔은 없고, 일본인의 것만이 하나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하급 노역자에게 우리의 짐을 옮길 것을 몸짓으로 지시하였고, 그것이 다 내려지자 우리는 그 자리를 떠났다. 호텔 방은 편안할 정도로 컸지만 상당히 더웠다. 저녁식사를 위해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서양 음식이 잘 마련되어 있었고 입에도 잘 맞았다.

정치적으로 이 나라는 아직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다. 수도에서 일하는데 그들이 뿌리를 내리기까지 몇가지 장애적인 불안 요소들이 존재하였다. 유약하고, 혼란스런 정부는 우리가 약간의 진보마저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과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많은 불화가 있음을 매우 강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우리는 부활절날 이곳에 왔다. 죽음의 경계에서 산산히 흩어져 파멸하고 있는, 그동안 유지된 서로간의 단합을 깰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이 사람들, 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빛과 자유를 가져다 주리라. <한국 제물포, 1885년 4월 9일, H. G. 아펜젤러>



ⅠⅠ

스크랜톤 박사와 내가 1885년 처음 여기에 왔을 때, 이 나라가 선교사에게 폐쇄적인 것을 느꼈습니다. 1884년 12월 서울에서 일어난 폭동은 한국에 매우 불안정한 정치적 상황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주위에는 온통 전쟁이 터지리라는 소문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우리를 향한 정부측의 태도는 적대적이라기 보다는 무관심에 가깝습니다. 관공리이건 하급 노동자이건 보통의 한국인들은 쌀, 담배, 또는 현금을 받기만 하면 무엇을 믿으며 무엇을 배우건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가르치는 종교가 좋은 것인지, 우리가 하는 것이 인간적인 일인지 판단하는데 꽤나 주저해 왔습니다. 그들은 카톨릭이 나쁘다고 판단을 내렸으며, 개신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불확실한 상태였습니다. 전자는 한국 사람들에게 무언가 숨겨져 있으리라는, 후자는 개방적이라는 인상을 준 것 같습니다. 전자에게는 의혹이, 후자에게는 호의적인 평가가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서구문명을 향하여 전속력으로 달려 온 동양인들의 희망적인 태도이며 고대종교와 미신을 움켜쥐고 있던 중국인들의 완화 정책과 더불어 이 고요한 은둔의 나라에서 종교의 자유를 누릴 날이 멀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황제 주치의를 맡고 있는 선교사는 개인적으로 나의 친구입니다. 나는 내친 김에 황제께서 이 나라에서 가장 진보적인 사람이며, 가능하다면 그 직분은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가족과 같은 나라속에서 적절한 위치를 차지하며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임금님은 자신의 주치의에게 “당신은 한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으셨다고 합니다. 마치 등불을 들고 있는 디오게네스 옆을 지나는 것같은 그런 사람들에 둘러 싸인 채, 의사는 제대로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지만 그래도 끝내 “정직한 관리들과 재산권의 보호”라고 대답했답니다. 이것이 세계적인 의미에서 이 나라가 번영을 누리는데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한국이 정신적으로 번영하기 위해서는 우리 주님과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필요로 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교도의 어두움과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순수하고 소박한 가운데 모든 정성을 다하여 말씀으로 전파되어야 할 것입니다.

가정교회는 우리가 이곳에 와 있는 4년동안 좋은 역할을 해 왔습니다. 우리가 내딛은 첫발걸음이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목회에 대한 확신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 출신의 목사님 두분을 가지고 있으며, 학생들 중 몇 명은 여름동안 책을 팔았고 한국 목사님 한 분은 겨우내 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고통을 이겨내는 인내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진지합니다. 이튿날 나는 한 학생을 삼백마일 떨어진 시골로 보냈습니다. 새로 개척한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는 뜨거운 열정으로 용기있게 나섰습니다.

한국에서 우리는 지금 많은 돈을 원하지 않습니다. 초대 교회의 신조를 지키는 그런 선교활동에 대한 이야기란 좀처럼 하기가 어려운 것임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돈을 가지고 있었고 이 대도시 서울 뿐만 아니라 다른 세군데에도 교두보를 마련하였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죄를 깨닫고 개종을 하는 힘, 즉 권능있는 세례입니다. 한국의 불신자들이 비로소 자신의 죄를 깨닫는 모습을 보기를 원합니다. 제가 올해 보고 싶은 것은 무엇보다도 한국인들의 깊은 죄의식일 것입니다. 악마가 여기에서 제멋대로 모든 일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어서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셔야 합니다. 영혼이 죄를 깨닫고 개종되어야 합니다. 나는 베푸는 일에 인색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곳 한국땅에서는 엄청난 불길같은 강력한 세례를 위해 기도하는 일에 최우선권을 두고 싶습니다. 그 밖에는 어느 것도 이 은둔의 나라를 구원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나라가 섬기는 신을 바꿔 세울 수 있도록 함께 싸웁시다. 우리 외국인 선교사들은 여러분들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곳의 형제들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쉬지않고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 <매우 신실한 당신의, H. G. 아펜젤러>



1886년 12월 4일

저녁에 미국인들의 식사 모임을 가졌다. 몇 사람을 빼고는 거의 모두가 참석했다. 19명이었다. 매우 즐거운 저녁이었으며 모두들 흐뭇해 했다. 자정이 다 되어서 헤어졌다. 엘라의 탁월한 음식 솜씨 덕분에 모임이 더욱 성황을 이루었다. 이곳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셈이며 매우 즐거운 추억을 가지게 되었다.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학생들에게 특식을 제공했는데 맛있게 먹는 것 같았다. 그들은 모두 신사처럼 점잖게 행동했다.

지난 목요일, 학생들이 한덩어리가 되어 나를 찾아왔다. 그들에 따르면 우리 학교가 선교학교(Mission School)라는 보고가 들어가 정부의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세명의 학생들만 남았다. 그나마 두 사람도 조금 있다가 떠났다. 계속 남아있는 학생은 한 사람뿐이다. 이런 학교에 남아 있다가는 박해를 받을까 두려워서였다(여기서 박해는 참수를 말한다). 학교를 일으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나 먼저 무엇이 방해물인가를 알아야 할 것 같다. 초조해야 할 일은 아니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분명하다. 용감하게 일어설 수 있도록 하나님이여 도우소서.



1887년 4월 19일

헌트씨와 나는 시골의 생활 개선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생산을 하되 자기들이 소비하는 것 이상으로는 하지 않는다. 잉여생산물에 대한 수요가 없기 때문이다. 먼 곳에 재배하는 특산물을 수송할 수단도 없다. 관리의 부패가 너무 심해서 자본을 만들어 낼 의욕을 꺾어 버린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들의 생활 조건이 나아질까? 첫째, 개인의 권리와 소유가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한다. 둘째, 운송수단이 바뀌어야 한다. 지금 사용되는 것은 사람들이나 짐승에 의존하는 무겁고 조잡한 우마차 뿐이다. 철도 건설은 돈이 너무 많이 들고 운하는 곳곳에 물이 적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좋은 도로를 건설하고 현재의 도로를 넓히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위에 마차를 놓고 말이 그것을 끌게 하면 농산물이 쉽게 시장으로 갈 수 있다. 여행에서 얻은 결과로는 그것이 이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그럴 듯한 방법일 것 같다.



1887년 4월 20일

길 옆에서 목에 칼을 차고 있는 사람 둘을 보았다. 칼은 나무판인데 크기는 길이 약 6피트, 넓이 9인치, 그리고 두께는 거의 1인치 정도 되어 보였다. 목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 있고 그 뒤에는 죄명과 벌을 집행한 날짜와 그 기간이 적혀있다. 헌트씨의 말에 따르면 중국에서 칼이 많이 사용된다고 하며 이 사람들은 도둑질을 한 것 같다고 한다. 때로는 입에도 칼을 물고 있는 경우가 있으니 분명히 하루종일 굉장히 불편할 것이다.

이곳은 아직 황해도 땅이다. 부인네들은 간혹 예의를 갖추고 있긴 하지만 대개 사람들은 우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곳 부인들은 서울이나 그 근교의 부인들보다 더 크다는 인상을 받았다. 2~3일 여행을 해보니 시골 부인들은 세상에서 격리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문을 열고 우리를 내다보는 부인들을 아주 많이 보았다. 그들은 들판에서 일하면서 아기를 등에 업은 채 땅을 파거나 씨를 뿌리기도 한다. 그런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들이 노동의 중요한 몫을 담당하고 있어서인지 매우 수척해 보인다. 그들의 생활조건이 참으로 안쓰럽다.



1887년 4월 22일

어제 밤에는 벼룩과 빈대에 조금 시달렸다. 제 철이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일시적 현상일 것이다. 아직까지는 여행 전에 기대했던 것보다 모든 면에서 만족한다. 식욕도 왕성한데 너무 과식할까 걱정된다. 아마 물을 끓인다해도 그냥 마시면 안될 것 같다.

황쥬(황주)를 향해 떠났다. 길을 건너는데 마침 한 소녀가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가다 나와 마주쳤다. 약 12살쯤 되어 보였고 아마 외국인은 여지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 소녀는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라는 듯 하더니 잠시 우뚝 서 있다가 비명을 지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물동이를 내려 놓을 틈도 없이 달아났다. 물론 물동이는 떨어져 깨지고 말았다. 그로 인해 그녀는 더욱 딱하게 되었다. 그녀를 불렀지만 그럴수록 더 멀리 도망갔다. 나는 깨진 물동이 값으로 50냥을 주었다. 그 아버지는 딸이 처음으로 외국인을 만나 무서워 그랬다며 변상한 데 대해 감사를 표했다. 문제가 잘 해결되었다고 생각한다.



1988년 3월 15일

어제 저녁에 우리 선교부 사람 전원과 장로교 선교부의 한 사람이 참석한 가운데 우리 응접실에서 결혼식이 있었다. 내가 주례를 맡아 한용경과 과부인 박씨 부인을 부부로 만들었다. 나에게는 첫 결혼식 주례이며, 또한 한국 최초의 개신교 결혼식이다.

한씨는 병원에서 일하는 나의 두번째 한국인 개종자이다. 넉달 전에 그의 아내가 죽어 그의 친구가 이번 결혼을 권유했다. 그의 아내 될 여인에게 마가복음과 십계명을 보내면서 자기가 그것들을 믿는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녀는 좋게 받아들였다. 그런 후 그가 우리 예식서를 번역하여 그녀에게 사본을 보냈다. 모든 일은 스크랜톤 의사와 내가 제안하는 대로 진행되었다. 이들이 앞에 나와 기독교식으로 부부가 되기로 한 것은 더할 수 없이 용감한 일이다.

오늘 프랭크 크라우스씨가 한국에서 처음 만들어진 1센트짜리 동전을 보여주었다. 일이 이렇게 훌륭히 진척된 데 대해 그와 한국 정부에 축하를 보낸다.



1898년 10월 7일

나같은 방법으로 여행을 할 때는 마부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외국인들이 그들을 남용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는데 이는 그들이 마부에 대해 대개는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제나 착하고 처음이나 나중이나 늘 자기 말을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성실성에 깊은 감사를 표해야 한다.

마부는 거친 말로 자기의 말을 부릴 때도 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짐을 가지고 타는 사람, 정도 이상 더 빨리 가기를 원하는 사람, 가파른 언덕길에서 내리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아예 태우지를 않는다. 빨리 가게 하거나 특히 뛰게 하면 자기 말이 아주 못쓰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마부는 그런 사람들을 적대시한다. 그들은 자기 말에 대한 애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부모가 죽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한국 사람들은 감정 표현을 억제하고 절제한다. 마부도 예외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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