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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선교정보기타  작성일  2000-07-18
 제목  [종교기행] 신앙의 고향을 찾아서 - 웨슬리와 런던-브리스톨
 주제어키워드  웨슬리 감리교 종교기행  국가  영국
 자료출처    성경본문  
 조회수  5152  추천수  15
1739년 4월 2일 영국 서부의 도시 브리스톨 부근에 있는 한 들판에서

존 웨슬리라는 30대 중반 영국 국교회 사제의 야외 전도 집회가 열렸다.

청중들은 대부분 인근 광산 광부나 공장-부두 노동자들. 정해놓고 교회에

갈 수 없는 형편의 사람들이었다. 바야흐로 산업혁명이 시작되어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들었고 이들이 사회의 하층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 노동 계층은 가난으로 고통을 겪었고 신앙 생활에서도 소외되어

있었다.



옥스퍼드 대학 출신 존 웨슬리(1703~1791)는 그러나 이들과 사뭇 다른

사람이었다. 청중들은 품위있는 고급 영어를 사용하는 사제가 교회에서

중산층을 상대로 목회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층민을 찾아와 설교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웨슬리는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직접 종교적 체험을 통해 얻은 진리를 전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직접 만남을 통해 구원을 얻는데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완전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 그것은 믿음과 성령(Holy Spirit)의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라도,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으로 선을 행하라 는 것이었다.



웨슬리는 가톨릭적 전통을 중시하는 고교회파(high church)가 지배하던

당시 영국 국교회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사제가 된 후에도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10년 가까이 방황하던 그는 1738년 5월 24일 런던의 한 종교 모임에서

루터의 글을 읽다가 믿음과 성령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는다 는 것을

확신하게 됐다. 그날 웨슬리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오후 8시45분쯤 나는 가슴이 이상하게 따뜻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없애주었고 나를 삶과 죽음의

법칙에서 구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영국 국교회는 개인의 직접적인 종교 체험을 강조하는 웨슬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기존 교회들에게서 따돌림 당해 낙담해있는 웨슬리에게

비슷한 생각을 지닌 한 동료가 소외계층에 눈을 돌릴 것을 권했다. 웨슬리는

런던을 떠나 당시 신앙심이 가장 약한 지역으로 알려졌던 영국 서부로 향했다.

개신교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하게 되는 웨슬리의 유명한 야외 목회(field

preaching)은 이렇게 해서 시작됐다.



브리스톨 시내에는 260년 전 웨슬리의 활동 모습을 보여주는 세계 최초의

감리교 예배당 `뉴 룸(New Room)'이 있다. 웨슬리가 서부 지역에 도착한지

한달 만에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 집회 장소로 만든 곳이다. 새로운 신자를

얻는 데는 야외 목회가 효과가 컸지만 그렇게 얻어진 신자들의 신앙 생활을

위해서는 역시 예배당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정표가 워낙 잘 되어 있어

`뉴 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보아

온 웅장하고 화려한 교회 건물들에 비해 `뉴 룸'은 너무나도 작고 소박했다.

꼭꼭 채워 앉아도 1-2층을 합해 150명 정도가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정도였고

내부는 나무로 만들어져 아무런 장식도 없다. 웨슬리가 사용했다는 강단이

오른쪽에 놓여 있었는데 나무판을 다듬지도 않은 것이었다.



강단 오른쪽 뒤로 나 있는 계단을 올라가자 웨슬리와 그가 파견한 순회

설교자들이 사용했다는 `목회자의 방'이 있었다. 이곳에는 웨슬리가 입던

사제복을 비롯해서 초기 감리교의 활동을 잘 보여주는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1m50 남짓한 작은 키였던 웨슬리가 사용하던 방의 문이 유난히 낮아

이채로왔다. `뉴 룸'의 앞 마당에는 말을 탄 채 오른손에 성경을 들고

사람들을 바라보는 웨슬리의 동상이 서 있었다. 웨슬리는 기존 교회 밖의

소외계층을 전도하기 위해 평생토록 영국 전역을 누볐다. 누군가의 계산에

의하면 웨슬리는 약 22만5000마일 이나 전도 여행을 했고 설교 회수도 약

4만회에 이르렀다고 한다.



`뉴 룸'의 뒤쪽에는 웨슬리의 동생인 찰스 웨슬리(1707~1788)의 동상이

있다. 역시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고 영국 국교회 사제가 됐던 찰스는 형의

가장 확실한 조력자였다. 그는 유능한 설교자이기도 했지만 특히 찬송가

작가로 유명해 생전에 4500편 이상을 발표했고 3000여 편의 원고를 남겼다.

웨슬리파의 집회에서 찰스가 만든 찬송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브리스톨을

비롯한 지방에서의 성공에 힘을 얻은 웨슬리는 다시 런던으로 돌아왔다. 그는

런던 동부 시티로드의 한 버려진 주물공장을 사들여 수선해서 활동 본거지로

삼았고 이 곳은 `파운드리 채플(Foundry Chapel)'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웨슬리는 1778년 이 곳에 새롭고 산뜻한 예배당을 세웠고 새 교회는 `뉴 채플

(New Chapel)'이라고 불렸다. 이제 나이가 들어 설교 여행을 할 수 없게 된

웨슬리는 그 옆에 집을 지어 여생을 보냈다.



`뉴 채플'은 오늘날 `웨슬리 채플'이란 이름으로 전세계 감리교 신자들의

순례지가 되어 있다. 건물 지하에는 `감리교 박물관'이 들어서 있고 뒤쪽 뜰에는

웨슬리의 무덤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 얼마 멀지 않은 런던 박물관 앞에는

1738년 웨슬리의 개심을 기념하는 거대한 동판이 세워져 있어 이 일대는 감리교와

관련된 기념물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이다. `뉴 룸'과 마찬가지로 `웨슬리

채플' 역시 밖에서 볼 때는 교회인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평범한 건물이었다.

그 흔한 십자가 하나 세워져 있지 않아서 정원의 웨슬리 동상과 안내판이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칠 뻔 했다.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입구에

꽂혀 있는 안내문 중에는 한글로 된 것도 있어 한국인 순례자도 꽤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배당 내부는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씩 만들어진 스테인드

글라스와 장식으로 `뉴 룸' 보다는 한층 세련된 모습이었지만 여전히 소박함과

경건함이 물씬 느껴졌다. 마침 강단 앞 오르간에서 연주자가 연습을 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예배석에 혼자 앉아 그 연주를 들으면서 이곳을 찾는 한국인

감리교 신자들은 예배당과 웨슬리 무덤의 소박함을 보고 무엇을 생각할까

궁금해졌다. (* 영국=이선민기자 smlee@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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