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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전문정보 ()  작성일  2008-03-22
 제목  설교가 전달되지 않는 18가지 이유
 주제어키워드  설교학
 자료출처  박영재  성경본문  
 조회수  5788  추천수  25
 

서문 · 들어가는 말

1장 공감대 형성을 방해하는 요인들

1. 공감대를 형성하라

2. 공감대 형성의 원리를 활용하라

3. 창문 너머 사물(진리)을 보라

4. 자연스럽게 흐르게 하라

5. 긴장을 유지하라

6. 청중의 수준을 뛰어 넘으라

2장 진부함에 빠지게 하는 내적 요인들

7. 평범한 본문을 독특하게 만들라

8. 힘을 불어 넣으라

9. 들리게 말하라10. 감정에 파도를 치게 하라

11. 귀납법적 접근을 하라

12. 주입하려 하지 말고 설득하라

3장 전달과 소통을 가로막는 방법상의 요인들

13. 예화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라

14. 예화를 정확히 사용하라

15. 하나님을 경험하게 만들라

16. 감각있는 설교를 위해 커뮤니케이션의 7대 원리를 적극 활용하라

17. 설교감각을 키우기 위해 5단계 기초 커뮤니케이션 이론에 익숙해지라

18. 무릎으로 설교의 힘을 키우라


저자 소개  박영재

침례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미국 사우스웨스턴(Southwestem)침례신학교에서 목회학석사과정(M.Div)을 텍사스 주에 있는 타일러 한인 침례교회를 섬기면서 강해설교로 유명한 달라스신학교(Dallas Seminary)에서 신학석사과정(ST.M)을 마치고 켄터키 주 소개 서든침례신학교(Southwestem Baptist Seminary)에서 신학석사(Th.M)와 신학박사(Ph.D)과정을 마쳤다. 서든침례신학교에서는 한국인 최초로 ‘설교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같은 학교에서 목회학 박사과정 담당 디렉터로 섬겼고 한인소망교회에서 사역했다. 현재 침례신학대학교 강사로 많은 설교학 워크숍, 세미나, 심포지움을 이끌면서 설교자의 자질과 심성, 설교를 위한 성경해석의 기본원리, 효과적이고 감동적인 전달을 위한 설교방법론을 참신하게 가르치는 일에 힘쓰고 있다. 최근 실천신학에서 논의되는 다양한 설교이론과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우리 심성, 우리 교회 형편에 맞게 소개하는 창의적인 형편에 맞게 소개하는 창의적인 젊은 신학자로 교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 들어가는 말

원론 수준을 뛰어넘는 설교호흡법

  내가 지금껏 선포한 수많은 설교들 가운데 청중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설교들이 많이 있음을 고백한다.  이러한 고백은 나뿐 아니고 모든 설교자들에게도 해당될 것이다. 무엇보다 설교를 하고 난 후 강대상을 내려오면서 ‘왜 내 설교는 전달되지 않을까?’ 하고 참담한 심정에 휩싸일 때가 많다.

  이런 고민 속에서도 자신의 설교가 더 나아지게 하려는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첫째, 설교자 자신이 설교를 잘하고자 하는 불같은 열정을 포기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설교 세미나들이 원론적인 가르침에서 머물고 그 이상으로 발전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설교 세미나들이 설교자들의 설교에 무엇이 문제인가를 깨닫게 하고 문제있는 부분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교정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에 침묵해왔다.  단지 설교 초보자들에게 어떻게 설교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기본틀만을 가르쳐 주거나 강해설교의 원리만이 강조된 채 목회자의 설교의 문제점들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는 상태이다.

  이 책은 기존의 설교학 책들과는 달리 설교의 문제를 안고 고민하는 설교자들을 구체적으로 돕기 위해 쓰여진 책이다. 「설교가 전달되지 않는 18가지 이유」는 설교의 문제점과 해결방안에 대해 자극을 주는 설교 안내서이다.  일종의 설교 클리닉(Clinic)인 셈이다.

  가장 중요한 것 18가지에 우선적으로 초점을 맞췄다.  예를 들어 우리 설교가 잘 전달되지 않는 이유는 첫째,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일방적으로 선포하기보다는 청중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라고 지적했다. 이를 위해 나는 설교에 공감대 형성이 왜 필요한가를 다루었다.  동시에 공감대를 이루지 못한 예들과 그로 인해 설교가 전달되지 않은 경우들을 실례를 들어가며 설명했다.

  그리고 나는 문제 제기에서 끝나지 않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방법들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이것은 설교자들이 당면한 설교의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책이 될 것이다.  동시에 공감대 형성을 통해 설교가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되는지를 예들을 들어가며 설명했다.  이러한 설명의 절차는 ‘설교가 전달되지 않는 18가지 이유’의 한 가지에 해당된다.  이런 식으로 나머지 17가지에 대한 주제를 다루게 된다.




1장  공감대 형성을 방해하는 요인들


1. 공감대를 형성하라

“그래, 맞아!”가 공감대 형성이다

  왜 시장 사람들이 대중가요에 흥미를 갖고 적극적인 반응을 보일까? 물론 따라 부르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삶의 정서에도 맞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공감할 수 있는 가사 내용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대중가요란 대중들의 삶을 말하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사람들의 폭넓은 관심을 자아내지 않는가.  자신들이 느끼며 생각하고 있는 내용과 일치하는 무언가를 발견할 때 그들은 마음을 활짝 연다.  마음을 연 채 그 다음 내용을 듣고 싶어한다.

  공감대란 성도들이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래, 맞아!” 하고 동질의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며, 상대의 의견이나 생각에 동조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성도들이 일단 동의하게 되면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도 쉽게 받아들이려고 자신들의 마음문을 활짝 연다.  이렇게 만드는 작업이 공감대 형성이다.


공감대가 왜 필요한가?

  마음을 열지 않은 상태에서 설교를 듣게 되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까?  불행한 사태가 발생한다.  미국에 유학하는 동안 밤낚시를 간 적이 있다.  캄캄한 밤에 잡은  고기를 통해 열심히 집어넣었다.  그런데 새벽녘에 집을 가려고 고기통을 들여다보니 고기는 그 안에 한 마리도 없었다.  뚜껑이 닫혀 있었던 것도 모르고 그 뚜껑 위로만 던졌기 때문이다.  얼마나 서운하던지….

  청중의 마음문이 닫혀 있는 상태에서 열심히 외쳐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  닫힌 마음은 던져진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열심히 설교하는 것도 좋지만 청중의 마음문을 열게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평범한 설교라도 마음을 열게 하는 공감대를 형성한 설교는 힘이 있고 설득적이다.

  막무가내식으로 설교자를 따라오라고 하는 것은 더더욱 어리석다.  설교자가 청중에게 맞추어야 한다.  즉 설교자가 청중과 공감대를 만들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마음을 연다.

  공감대 형성의 기능은 크게 두 가지 면에서 중요하다.  첫째는 설교자가 하고 싶은 말을 청중이 잘 받아들이도록 마음을 활짝 열게 한다.  둘째는 이렇게 청중의 열린 마음에 말씀이 스며들 때 청중은 말씀을 쉽게 받아 들이게 된다.


공감대를 이루지 못한 설교의 예들

1. 주입식 설교는 청중의 마음을 열지 못한다.

  예를 들어, 설교자가 성도들에게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자고 제안하기 위해 “이웃을 사랑하자”는 제목으로 설교할 수 있다.  여기서 설교자는 서론에서 “여러분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자신의 삶을 불우한 이웃을 위해 나누는 삶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라고 한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청중들에게 무언가를 주입하려고 할 때 우선은 그들의 마음을 열어놓아야 한다.  즉 주입식으로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훈계하고 명령하기 전에 청중들이 그 설교 내용을 잘 받아들일 준비를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쇠귀에 경 읽기일 뿐이다.  위의 예가 바로 그러하다.  이 상태에서는 청중이 주입되는 내용을 들으면서 절대로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는다. 무엇이 삽입되어야 하는가?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설교자가 빌1:3#빌1:3" target=_new>빌립보서 1장3-8절을 ‘기쁨을 누리며 사는 비결’이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설교하게 되었다고 하자.

  본문은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계속될 것임을 기억할 때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6절에 보니,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히는 역경 속에서도 자신과 빌립보 성도의 삶을 인도하시는 주님을 끝까지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다가가셔서 구원을 베푸시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위험을 만날 때마다 막아주시고 삶에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공급하셨습니다.  늘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체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감옥에 갇히는 고난이 닥쳐왔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삶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중단되지 않고 계속될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주님의 끊임없는 인도가 자신에게 계속되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을 때, 바울은 피곤할 수밖에 없고 포기하고 싶은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담대하며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위의 내용은 6절에 대한 본문 설명이다.  대개 많은 목사들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본문을 설명한다.  아마 어떤 독자는 이 정도면 별 문제 없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내게는 이것이 큰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왜 그런가?  다음의 예를 우선 읽어보고 문제점을 얘기해보자.

 …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의 피곤한 삶속에서도 역동적인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까?  6절을 다같이 읽읍시다. “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A】 사람들은 언제 기뻐합니까?  꿈이 성취되거나 삶의 욕구가 실현될 때 기뻐합니다.  또 주어진 환경이 남보다 앞서 있다고 생각할 때 만족스러워합니다.

【B】 하지만 바울은 주어진 환경 때문에 기뻐하거나 만족스러워하지 않습니다.  불행해보이는 갑갑한 감옥 생활속에서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서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고 말합니다. 밭을 갈다가 보화를 발견한 농부처럼 마음 깊숙한 곳에서 기쁨이 넘쳐나는 모습입니다.  무엇이 그에게 역경을 뛰어넘는 기쁨을 갖게 만들었을까요?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다가가셔서 구원을 베푸시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아주셨습니다.  후에 그의 사역 속에서 하나님은 그가 위험을 만날 때마다 막아주시고 삶에 필요한 것들을 이 모양 저모양으로 공급하셨습니다.  바울은 늘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체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믿음 가운데 있는 바울에게 고난이 닥쳐왔지만, 그는 고난을 본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그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이 계속될 것임을 빋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끊임없는 인도가 자신에게 계속되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을 때, 바울은 피곤할 수밖에 없고 포기하고 싶은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담대하며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C】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여전히 나를 통해 선한 일을 이루실 것임을 확신할 때 우리는 기쁨을 잃지 않는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박영재 설교)

  자, 두 가지 예를 서로 비교해 보라.  어느 것이 마음에 더 와닿는가?  후자가 아닌가?  왜 그럴까?  전자는 본문을 읽고 본문에 나타난 사실을 설명해나갔다.  즉 곧바로 본문 설명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후자는 청중에게 공감대를 형성하려고 【 A】단계를 삽입했다.  즉 “사람들은 언제 기뻐합니까? 꿈이 성취되거나 삶의 욕구가 실현될 때 기뻐합니다.  주어진 환경이 남보다 앞서 있다고 생각할 때 만족해 합니다.” 하는 내용을 삽입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본문 설명인 【B】단계를 연결했다. 여기서 삽입된 내용, 즉【A】단계인 “사람들은 언제 기뻐합니까?”의 첨가는 청중들을 사로잡는 효과가 있다.  즉 이 삽입으로 말미암아 현대 청중의 영적 현주소를 고발하고 그 고발을 통해서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게 하였고, 그것이 사실이라고 인정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되고 나면 청중은 바울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자신들의 신앙과 비교하게 된다.

  그러므로 본문을 설명할 때 청중에게 공감될 수 있는 부분을 삽입하라.  그  삽입의 내용은 현대화된 것이어야 청중이 흥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또 본문 내용과 반대되는 개념을 설명하라.  그러면 청중은 본문의 내용과 현대인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빠르고 정확하게 인식하게 된다.  동시에 마음을 열고 관심을 갖는다.  즉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이다.


2. 흑백논리의 설교는 청중의 마음을 열지 못한다.

  저는 어제 저녁 깜짝 놀랄 만한 뉴스를 접했습니다.  이웃집의 잘 알려진 모 교회 집사가 술을 먹고 자기 집에 들어와서 난장판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집사로서 그럴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 망신, 집안 망신, 자녀들에게 아버지 망신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 안에 있으면서도 세속적인 모습을 벗지 못한 육에 속한 신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육에 속한 신자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도 육에 속한 신자는 육신의 열매만을 맺는다고 했습니다.  그 열매는 결국 사망 아닙니까?                                                                            (모 목사)

위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해보자

  저는 어제 저녁 깜짝 놀랄 만한 뉴스를 접했습니다.  이웃집의 잘 알려진 모 교회 집사가 술을 먹고 자기 집에 와서 소란을 피운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의 집사로서 그럴 수가 있느냐며 실망들을 했습니다.  저는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오죽 속상한 일이 있었으면 그 점잖은 분이 술을 먹었을까?  지금쯤 후회하고 있을 것입니다.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가?’하고 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보면 나도 모르게 내가 원치 않는 일을 할 때가 있습니다.  본 마음을 그렇지 않은데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안타까운 상황을 초래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분이 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성경은 그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나갈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박영재 설교)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하게 느껴지는가?  후자가 더 바람직하다고 느껴질 것이다. 왜 그런가?  전자는 설교자가 청중을 매도했다.  결국 청중의 마음문을 닫게 했다.  모든 사물을 흑백의 논리로 생각하는 설교자의 견해가 결국 청중을 설교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후자는 설교자가 청중을 이해하려 한다.  결국 청중의 마음을 열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 성도의 삶을 흑백논리로만 따질 수는 없다.  회색지대에서 갈등하며 고민하는 성도들이 대부분이다.  어쩌다 세속적 삶의 모습을 보일 때, 설교자는 흑백논리 속에서 성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속좁은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므로 공감대 형성을 위해서 청중을 이해하는 마음을 넓혀라.


2. 공감대 형성의 원리를 활용하라

공감대 형성을 이룬 전달되는 설교의 예들

1. 중요성을 밝히는 일이다.

  가슴 아픈 젊은이 이야기입니다.  생존경쟁에서 뒤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부모가 아들을 미국 로스엔젤레스로 조기 유학 보냈습니다.  하고 싶은 것 다 할 수 있도록 넉넉하게 뒷돈을 대주었습니다만, 그것도 모자라 고국에 돌아와 부모에게 더 많은 돈을 요구했습니다.  주는 돈마다 탕진하는 것을 알고 있는 부모가 더 이상 돈을 줄 수 없다고 버티자 그 젊은이는 부모를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왜 부모를 죽였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돈이 탐나서였다.”고 말했습니다.  박한상 군의 이야기입니다. 

  자식 기를 꺾지 않고 키우는 것도 중요합니다.  쟁쟁한 학벌을 지니게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사람답게 살지 못하면 돈의 귀중함도 모르고 부모도 몰라보는 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려고 애쓰기 전에, 성공하는 법을 가르치기 전에, 바르게 사는 법을 어려서부터 심어주십시오.(박영재 설교).


 위의 설교가  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가? 중요성(필요성)을 제기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중요성이나 필요성을 자각할 때 그 설교에 공감할 뿐만 아니라 도전을 받는다.  즉 “그래, 우리 자녀들이 어려서부터 정신을 바르게 갖게 해야 겠구나!”하는 각오를 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 필요성이 절실히 깨달아지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의 예를 아래와 같이 했다고 가정해보자.

  성도여러분,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람답게 사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잘못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 결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픔을 겪습니까?  사람답게 사는 법을 가르치지 못하면 아이들이 커서도 사람답지 못하고 탈선하며 사회에 무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사람답게 사는 법을 가르치시길 바랍니다.                                                      (모목사)

  자, 무엇을 느끼는가?  후자의 예를 읽는 동안은 마음이 열리지 않음을 알수 있을 것이다.  왜 마음이 열리지 않는가?  전자의 예는 사람답게 살아야 할 이유나 필요성(혹은 중요성)을 선명하게 언급한 반면, 후자의 경우는 필요성이나 이유를 거의 언급하지 않고 당위성만 언급했다.  게다가 후자는 피상적이며 이론적인 설명인 반면, 전자는 그 필요성을 예를 통해서 명확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감대를 불러 일으키기 위해서 성도들이 평소의 삶에서 놓치고 있는 필요성을 언급하라.  필요성 언급에 천재가 되어라.


2. 목적을 제시하라.

  선명한 목적 제시는 설교를 듣는 청중들의 공감대를 불러일으킨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왜 읽습니까?  안 읽으면 마음이 허전해서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읽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읽음으로 진리를 깨닫기 때문이고, 말씀을 읽음으로 우리의 영적 상태를 진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는 것입니다. (박영재 설교)


그런데 위의 내용을 아래와 같이 했다고 해보자.

  우리는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 우리에게 참 좋습니다.  매일매일 말씀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말씀에 깊이 빠져서 사는 우리가 됩시다. (모 목사)

전자와 후자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성경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하는가?  전자가 아닌가?  전자는 읽을 목적을 선명하게 부각시켜주고 있다.  목적이 분명할 때 청중들은 확실히 공감을 잘한다.  설교자와 청중이 쉽게 하나가 된다.

3. 상식적이어야 한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상식적인 내용을 언급해야 청중은 공감을 표시한다.

4. 문제를 제기하라.

  평소 직시하지 못했거나 느끼지 못했던 문제를 꺼내면 청중들은 놀란다.  때론 두려워하거나 걱정에 휩싸이고 불안하게 된다.  예를 들어, 담배가 폐암에 걸릴 확률을 높인다는 내용을 밝히면 담배를 끊게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식생활 습관이 나쁘면 위암에 걸릴 확률이 많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청중들이 식생활 습관을 고치도록 만들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문제를 제기한 것이고, 이를 통해 두려워하거나 걱정케 해서 행동의 변화를 일으키기 위한 방법이다.  사람들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될 때 생각하게 되고 동시에 그 문제에 주의를 집중하게 된다.  결국 문제 제기로 시작된 설교에 청중들이 공감하게 된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 기독교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90년대에 들어서 기독교가 둔화 또는 쇠퇴의 기미를 보이더니 ‘94년 이후에는 매년 3~4퍼센트 이상씩 감소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젊은이들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제가 아는 모 교회는 4천여 명의 장년 출석교인 가운데 청년은 겨우 30여명에 불과합니다.  5년전 교인수 500여 명의 10퍼센트도 채 되지 않습니다.  이러다가 10년 후에는 한국교회가 청년이 거의 없는, 늙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껍데기 교회가 될지도 모릅니다. (박영재 설교)


  정확한 통계자료를 통해 기독교의 위기를 날카롭게 제기하고 있다.  즉 이러한 문제 제기에 놀란 청중은 그 심각성에 큰 우려를 나타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에 뒤이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관심을 갖고 듣게 된다.  결국 문제의 심각성을 청중들에게 인식시킴으로써 청중이 설교에 공감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공감대를 계속 끌고 나가려면 문제 제기 후에 그 문제 해결의 필요성을 언급해야 한다.  그러면 청중들의 공감대는 게속해서 형성된다.  즉 교회 갱신의 필요성을 언급하면, 청중은 문제 제기로부터 필요성 언급으로 이어가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공감대를 지속하게 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의 문제나 신앙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하지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설교자는 바로 이러한 문제들을 파헤쳐 청중들에게 제시해야 한다.

  한 일본인 교수가 “한국의 대학은 입학 후 4년이 지나고 나면 졸업장을 수여하는 졸업식장”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정도로 우리의 대학교육 수준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뿐입니까?  모 미션대학에서는 채플을 거부하는 학생과 학교 당국이 법정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또한 지난 20여년 동안 대학가에서 복음을 전해 수많은 학생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고, 그나마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시다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주려 애써온 선교단체들이 요즘에는 흐물흐물합니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습니다.  캠퍼스 상황에 대해 듣는 이야기마다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벌어지는 일마다 답답함을 느끼게 합니다.  오늘 우리나라 대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 젊은이들을 멍청하게 만들고, 무엇이 오늘의 젊은이들의 힘을 빼앗고 있습니까? (옥한흠, 「빛과 소금」)

  이 설교가 왜 공감대를 형성하는가?  옥 목사의 문제 제기가 우리가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들을 꼭꼭 집어서 들추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청중들이 그 문제를 들으며 심각성을 인식하게 된다.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한다는 것은 설교에서 제기한 문제가 타당하다고 동감한다는 것이다.  청중들이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주제들, 즉 문제 자체를 알려주는 것이 곧 청중을 깨닫게 해주는 ‘문제의 알림’인 것이다.

  문제 제기로 시작하는 설교는 훌륭한 설교구성법 가운데 하나이다.  설교할 본문을 놓고 본문에서 무엇을 문제시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라.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소득을 올릴 아이디어를 찾아 낼 때가 종종 있다.

5. 칭찬하라.

  칭찬을 들으면 듣는 자들은 으레 기분이 좋아지는 법이며 동시에 자신들을 칭찬하는 설교자를 향해 마음을 열게 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성도들에게 칭찬을 자주하라.  잘못하는 점만 지적하지 말고 잘한 점을 더 부각시켜서 칭찬하라.  그러면 청중은 자신들의 마음을 설교자를 향해 더 활짝 열게 되고, 이는 곧 설교와 청중 간의 공감대 형성으로 이어진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사실이 아닌 것을 칭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자칫 아첨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실에 기초한 칭찬거리를 찾아내는 통찰력을 발휘하라.  그리고 표현법을 익혀라. 한가지 중요한 것은 설교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칭찬하신다는 말을 반드시 챙겨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신앙생활하게 하려 함이다.  청중을 자주 칭찬하라.  그러면 그들의 마음과 하나되는 공감대가 형성된다.

6. 접촉점을 만들라

  훌륭한 설교는 청중과 본문간에, 혹은 청중과 설교의 주제 간에 언제나 접촉점이 있다.

  바울도 아덴에서 전도설교 할 때 접촉점을 활용했다.  예를 들어, 당시 아덴 사람들은 우상을 섬기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그 열성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심지어 알지 못하는 신까지 섬겼던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바울은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 절을 하며 섬긴다고 하는데, 제가 소개하는 신은 당신들이 알지 못한 채 섬기고 있는 바로 그 신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이라고 시작한다.

  이것은 청중들을 분석하고 그들의 형편과 상황을 잘 알고 난 뒤 복음과 접목시킬 부분을 언급한 것이다.  결국 복음의 핵심과 자연스런 접목이 이뤄지게 만들어, 마침내 그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해준다.  그러므로 설교에서 접촉점을 꼭 필요하다.

  결국 접촉점이란 현대인의 심리 상태와 설교 주제를 연결시켜주는 것이다.  이러한 접촉점은 청중이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미 마음을 열고 본문에 귀기울이게 하는 공감대를 만들어주고 있다.

잠깐만! 청중은 메시지의 처음과 끝 부분을 가장 잘 기억한다. 

      가장 중요한 말은 바로 이 시점(처음 혹은 끝)에서 하라.


3. 창문 너머 사물(진리)을 보라

  어느 목사의 설교를 읽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왜냐하면 본문 속에 깊은 영적 진리가 들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문을 꿰뚫어보지 못한 채 표면적인 현상만을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교의 틀이 얄팍하면 설교의 수준 자체가 낮아질 수밖에 없다.

왜 창문 너머 진리를 보아야 하는가?

  설교자는 깊은 해석을 통해서 본문의 깊은 진리를 찾아내야 한다.  결국 우리의 설교는 본문에 근거한 성경적 설교여야 하는데, 그 성경적 설교는 본문의 핵심이 짚어주는 깊은 의미를 찾아내야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설교의 구성을 끝내기 전에 정작 중요한 것은 설교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 본문을 깊이 보는 훈련이다.

  본문으로부터 깊은 진리를 끄집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설교자는 본문의 내용을 놓고 질문을 던져야 한다.  워렌 위어스비(Warren Wiersbe)는 말하길, “당신이 성경에게 말을 건네지 않으면, 성경도 당신에게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워렌 위어스비, 「상상이 담긴 설교」, p.123). 즉 성경은 우리가 본문을 향해 질문하면 답변할 충분한 자료를 갖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설교자는 성경에서 아무런 진리도 찾아낼 수 없다.  그러므로 깊은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서 본문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래야 성도의 마음을 깊숙이 어루만져줄 깊은 진리를 끄집어낼 수 있다.


창문 너머 진리를 보지 못한 설교의 예들

  본문 해석에 깊이가 없으면 본문 설명도 깊이가 없어지고, 본문 설명에 깊이가 없으면 설교의 적용도 얕은 수준이 된다.  결국 설교는 본문을 해석하는 과정 속에서 원인을 찾아내야 본문 설명에 있어서도 날카롭게 설교를 전개할 수 있다.

  분석이란 어떤 이가 특정 행동을 했다면 그렇게 행동한 동기에 대해 구체적인 이유를 찾아내는 것이다.  단순한 행동의 뒷면에 있을 복잡한 이유를 찾아내는 것이다.  분석이 제대로 되어야 처방도 제대로 되며, 설교에 깊이를 더하게 되는 것이다.

  잘못된 설교는, 장황하게 늘어놓긴 했는데 정작 분석이 없는 경우의 설교이다.  “흑인들은 매우 게으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들을 미워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들을 돕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줍시다.  이것이 사랑이 아닙니까?” 하는 것보다, “흑인들은 매우 게으릅니다.  그들이 왜 게으른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그들에겐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희망을 잃었습니까?  백인 중심의 사회가 그들의 사회 진출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들을 사랑한다면 제도적으로 그들이 사회에 진출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 아닙니까?” 라고 한다면 이유가 설명된 깊이있는 내용이 된다.  결국 결론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원인을 분석한 뒤에 맺는 결론은 좀더 구체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이제 원인을 분석하는 힘을 맛보았다.  그러므로 우선 “왜?”라고 하는 질문을 설교자는 던져야 한다.  다시 한번 두 가지 설교를 비교해보자.  우선 질문을 던지지 않은 채 설교가 깊이 없이 만들어진 예를 살펴보자.

  출15" target=_new>출애굽기 15장 22-27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직후 마라에 이르자 먹을 물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나 3일 동안이나 헤매다녀도 물을 찾을 수 없었던 그들은 마침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게 됩니다.


■ 적용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하다보면 항상 기쁜 일만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원망거리가 생깁니다.  목회하다가 원망이 터져나올 만한 어려운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가정에서도 남편이나 아내로부터 실망스런 일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역시 원망거리가 생길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원망거리를 만나도 믿음으로 이깁시다.  하나님이 원치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며 오히려 감사함으로 이겨나갑시다. (모 목사)

  이 설교는 무엇이 문제인가?  본문을 깊이 있게 보지 못한 매우 단순한 설교이다.  논리에 큰 헛점이 생겼다.  이 설교자는 원망의 결과만을 삶에 적용시켰다.  원인을 밝히는 논리를 전개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 이제 “왜?”라는 질문(원인 분석)을 통해 논리를 전개한 설교를 살펴보자.

  출15" target=_new>출애굽기 15장 22-27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직후 마라에 이르자 먹을 물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나 3일 동안이나 헤매다녀도 물을 찾을 수 없었던 그들은 마침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게 됩니다. 

  그들이 왜 원망합니까?  물론 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이 없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생각해봅시다.  홍해를 건넌 직후인 3일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어떤 고백을 했습니까? “바다를 가르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여, 원수를 물에 빠트리시고 죽음 가운데에서 우리를 건지신 구원의 하나님이여, 당신을 찬양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까지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실 줄로 믿습니다!”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은 결국 자신들을 끝까지 책임지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불신한데서 온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물이 없는 가운데서도 여전히 역사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고 보면 이스라엘이 마라에서 하나님을 원망한 것, 그것은 열악한 환경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습니다.

■ 적용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목회를 시작했지만 갈수록 교회가 시들시들해질 수 있습니다.  이때 감사와 확신이 실망과 원망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원망은 힘든 목회 상황 때문이 아닙니다. 출발할 때 가졌던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믿음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의 믿음을 상실하지 않았다면 환경이 아무리 열악하다 하더라도 감사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감사와 기대 속에서 시작한 사업이지만 갈수록 어려운 상황에 접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답답할까요? 그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 한숨이 나오고 땅이 꺼지는 실망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실망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불신앙 때문입니다.  아무리 열악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의지한다면 우리는 캄캄한 밤에도 찬송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현재의 상황속에서 우리에게 원망이 생기고 실망이 찾아드는 것은 환경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믿음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박영재 설교)

  결국 전자의 경우와 후자의 경우는 완전히 딴판이 되었다.  똑같은 본문일지라도 말미에 가서는 완전히 다른 설교가 된 것이다.  전자는 얄팍한 전개, 즉 깊은 생각을 하지 않은 채 만들어낸 설교이다.  하지만 후자는 깊이 있는 전개임을 알 수 있다.  “왜?”란 질문을 던졌을 때 이처럼 깊은 아이디어를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창문 너머 진리를 보는 방법들

  이제 본문의 깊이를 파헤치기 위한 실제적인 방법을 생각해 보자.  질문을 던짐으로써 본문 속에 숨겨진 진리를 파헤칠 수 있다고 했다. 이를 위해 설교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질문들을 고려해야 한다.

1. 본문은 무엇을 말하는가? 2. 본문은 어떻게 말하는가?

3. 본문은 처음의 독자들에게 무엇을 말하려 했는가?

4. 본문이 오늘의 교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5. 본문이 내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6. 본문이 청중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7. 설교자가 청중들에게 어떻게 본문을 의미있게 만들 것인가?

  많은 설교자들이 본문의 핵심을 파악하지도 않은 채 본문 속에서 전달할 교훈들만 찾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이것은 위험한 준비 과정이다.  도도히 흐르는 큰 강줄기를 보면서 핵심을 파악해야 한다.  지류에 해당되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파악하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 본문은 어떻게 말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요즈음 문학 비평이 인기를 끌고 있다. 문학비평은 역사적 비평방법을 뛰어넘어서 성경의 문학 장르들을 구분하고, 그렇게 구분된 문학의 독특성에 따른 해석을 강조한다.  이러한 방법은 본문에 대한 바람직한 이해를 돕는다. 설교자들은 본문의 문학의 종류도 세밀하게 관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본문이 어떤 문학의 종류로 진리를 전달하고 있는지를 파헤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시, 소설, 편지, 강론등의 형태 가운데 어떤 문학의 종류로 전하고 있는지를 구분해야 한다.

  셋째, “본문은 처음의 독자들에게 무엇을 말했는가?”를 생각한다.  이것은 본문 자체에 대한 역사적인 연구의 필요성 때문이다.  본문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연구하지 않고 본문을 다룰 수 있을까?

  얼마전 유명한 목사 한 분의 설교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은혜롭고 좋았다.  그런데 아쉽게도 본문이 말하는 내용은 그 목사가 설교한 내용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평신도들이야 알겠는가?  설교가 은혜로웠지만 하나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전달되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움을 금할 길 없었다.  역사성 연구를 등한히하면 이런 안타까운 상황에 빠질 수 있다(이에 관한 참고서적으로는 권성수의 「성경해석학」〔총신대학출판부〕을 참조하라.  쉬우면서도 설교자들에게 바람직한 해석 방법론을 제시한다).

  넷째, “본문이 오늘 교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본문이 내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본문이 청중들에게 무엇을 의미 하는가?”등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러한 질문은 적용을 위한 것이다.  청중은 과거의 사건이나 이야기를 다룬 본문인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해 큰 관심을 갖지 않는다.  단지 그 본문이 지금 나와 나의 삶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지를 듣기 원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설교는 본문을 설명하느라고 많은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청중들의 삶을 다루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결국 우리의 설교는 청중들의 삶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적용을 위한 질문은 실로 중요한 부분이다.

  다섯째, “설교자가 청중들에게 어떻게 본문을 의미있게 만들 것인가?” 하는 질문은 해석되어진 본문과 적용할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설교 구성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은 결국 이 책 전체를 다 파악해야만 이해할 수 있으리라 본다.

  다섯 번째 질문을 제외한 나머지 질문들은 본문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적인 질문들이다.  그런데 이런 질문들 외에 던져져야 할 질문들이 있다.  그것은 육하(六河)원칙이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란 질문을 던지면 본문을 깊숙이 보는 데 도움이 된다.  설교에서는 특히 “왜? 어떻게?”란 질문이 본문의 핵심을 찾는 데 절대적인 공헌을 한다.  “어떻게?”란 질문은 청중들이 관심을 갖는 또 다른 영역임을 기억하라.

  예를 들면, “쉽고도 유익한 영적 성장의 5단계에 대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 혹은 “도덕적 실패를 극복하는 길에 대해서…”, “물질을 효과적으로 누리는 삶에 대해서…” 등등의 제목이나 주제 혹은 설교의 서론은 청중의 흥미를 끌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접근법은 실제적이기 때문이다.  설교가 성도의 영적, 육적 삶의 필요를 채워주는 실제적인 대안을 제시할 때 성도의 관심을 사로잡게 된다.


창문 너머 진리를 본 전달되는 설교의 예들

  “왜?”란 질문을 던짐으로써 본문의 사건이나 현장 혹은 행동의 동기 등에 대한 원인을 분석하는 것이다.  또 “어떻게?”란 질문을 던짐으로써 청중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해결책을 끌어낸다.  “왜?”란 질문을 통해 설교를 깊이있게 만드는 과정을 위에서 살펴보았다.  이제는 “어떻게?”란 질문을 던져보라.

  앞선 예에서 출15" target=_new>출애굽기 15장 22-27절을 통해 “왜?”란 질문을 던진 뒤 마라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유를 찾아내었다.  즉 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 설교자는 이것에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해볼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불만스런 상황을 빠져 나갈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그 해결책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본문 24절에 보니 모세는 그 불만스런 상황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리고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이여, 지금의 이 어려운 상황을 보옵소서. … 이스라엘이 물이 없는 상황을 원망했지만 상황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원성의 입술에 재갈을 물리고 단지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 원망스런 환경을 바꾸시는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하나님이 한 나무를 지시하시고 모세는 그 나무를 물어 넣으니…그 순간 쓴 물이 달게 변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원망스런 환경을 바꾸는 길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 가까이에 있습니다.  어느 것을 행하고 어느 곳으로 가야 복스런 환경을 경험하는지 우리 하나님이 가르쳐주십니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이 그 해결자이십니다. (박영재 설교)

  지금 설교자는 문제의 상황을 헤쳐 나가는 방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결국 우리의 설교 목적인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인데, 위의 설교는 그 목적을 잘 달성하고 있다.

  결국 성도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길을 발견하는 것이다.

  본문을 깊이있게 해석해야 설교 속에서 청중의 깊숙한 내면의 문제들에 해답을 줄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설교를 써 내려가기 전에 깊이있는 본문 해석을 하라.  결국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상상할 거리나 생각할 거리를 주어 다른 것에 주의를 빼앗기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다.

  잠깐만, 이때 어휘를 다양하게 활용하는 것이 요점이다.  다양한 어휘 사용은 설교의 가치를 높인다.  뿐만 아니라 청중에게 지루한감을 없애준다.


4. 자연스럽게 흐르게 하라

  설교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만들 수는 없을까?  설교의 흐름이 인위적이거나 억지스럽다는 느낌 없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우면 얼마나 좋을까?  한국 설교와 미국 설교의 큰 차이점 가운데 하나는 자연스러움의 차이이다.  미국 설교의 큰 차이점 가운데 하나는 자연스러움의 차이이다.  미국 설교를 들어보라.  설교가 자연스럽다.  그리고 부드럽다.  그러나 한국 설교는 부자연스럽다.  억지로 전개하는 설교들이 많다.  이런 부자연스러움은 인간의 본성에 역행한다.  또 설교자가 천장이나 바닥만을 쳐다보며 설교를 해도 청중은 답답함을 느낀다.  또한 시간적 의미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부자연스런 모습에 부담스러워하고 자연스러움에 대해 편안한 마음을 갖는다.

  예를 들어, 설교자가 어떤 사건이나 사상에 대한 기원을 다루면 그 다음은 발전해온 단계를 알고 싶어하고, 그 다음은 완성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게 된다.  결국 청중은 논리적인 차원에서도 자연스런 전개에 대한 동물적 감각을 지니고 있다.


설교는 왜 자연스럽게 전개되어야 하는가?

  설교는 자연스런 전개를 통해 성도의 마음을 열게 하고 열려진 그들의 마음을 파고들어가 결단하게 만드는 일련의 자연스러움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첫 번째 개요가 끝난 뒤 두 번째 개요로 들어갈 때, 대개 우리는 어정쩡한 상태로 넘어간다.  또 서론에서 본론으로 들어갈 때에도 억지로 진행한다.  청중들이 받아들일 준비가 안되었는데도 말이다.  이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다.  청중들은 자연스러움을 선호하고 그 자연스러움에 익숙해져 있다.  모든 드라마나 영화, 소설은 사건이 전개되고 복잡하게 얽히면서 절정에 이르렀다가 대단원을 맺는데, 이 과정이 자연스럽게 진행되면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는다.

  그러나 인위적인 과정들이 드러나면 이는 곧 삼류소설이나 삼류 영화로 취급받게 된다.

  그러면 설교에서의 자연스러움은 무엇인가? 이 문제는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특별히 취급해보고자 한다.  우선 서론에서 청중의 마음을 여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릉 위해서 청중의 세계, 청중의 수준에서 서론을 시작하는 것이다.  둘째, 본문을 접근해 들어갈 때도 역시 본문과 서론 사이에 접촉점이 있어야 한다.  즉 본문을 접했을 때 “지금 설교를 시작하는구나!” 하는 감을 줘선 안된다.  언제 설교가 시작되는지를 모르도록 자연스런 진행이 이뤄져야 한다.  셋째, 청중이 알고 싶은 욕구를 따라서 진행해야 한다.  청중의 욕구 순위를 따라 설교를 진행한다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다.  그러므로 좀더 깊이 생각해 보자.  설교를 자연스럽게 진행하려면 본문의 순서를 따르는 것에 우선 순위를 두지 말고 청중의 심리를 먼저 고려해야 한다.  즉 “어떤 순서를 따라서 진행해야 성도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지는가?”에 대한 생각이 최우선이다.  그것은 곧 청중이 가장 먼저 알고 싶어하는 욕구를 따르는 것이다.  그래야 청중의 심리에 자연스럽게 접목되는 것이다.

  신문을 보거나 뉴스를 보라.  기자들이 어떤 한 사건에 대한 소식을 전할 때 가장 먼저 전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예를 들어, 모 비행기가 괌에서 추락했다는 사고를 접했을 때 가장 먼저 전해지는 소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건의 결과이다.  “몇 명이 죽었느냐에 대한 대답”이 최우선이다.

  사람들이 결과에 가장 많은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 두 번째 다룰 주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원인에 대한 분석이다.  사람들은 결과를 접하고 난 뒤 “그러면 왜 사고가 났느냐?”에 대한 답변을 듣고자 한다.  그래서 기자들은 사고의 원인 즉 기상조건이 최악이었고, 비행기의 하강 각도에 대한 관제탑의 정보 제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등의 내용을 다룬다.

  사람들은 이렇게 원인을 분석하고 난 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미래를 생각한다. “도대체 앞으로 비행기 사고를 막을 대책은 없는가?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대비책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을 듣고 싶어 한다.

  기자들은 항공사의 대표로부터 “앞으로 희생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어떻게 하겠다.  또 이런 대형 사고가 나지 않도록 비행사를 더 실력있는 사람으로 대체하며 악천후일 경우 비행을 자제하겠다.”는 등의 말을 마지막으로 언급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의 본문도 결과, 원인, 해결책, 혹은 대비책(방법)등을 본문이 다루고 있다고 하자.  그러면 이제 어떤 순서를 따라서 설교를 진행해야 하는지 자명해진다.

  그런데 어떤 본문은 아무리 분석해보아도 본문 속에서 결과, 원인, 해결책 등을 알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어떤 본문이든 간에 본문을 분석해보고 그 분석의 결과를 토대로 순서를 정하되 청중의 심리를 따라서 하면 된다.  이것이 자연스런 전개를 위한 최선책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에는 “첫째는, 둘째는” 하는 식으로 하지 말고 반드시 질문을 던지는 것이 좋다.  질문을 던짐으로 청중으로 하여금 던져진 질문에 답하려는 기회를 줌으로써 자칫 지루할 수 있는 부분을 재치있게 뛰어넘어갈 수 있다.


자연스럽게 전개되지 못한 설교의 예들

  자, 이제 자연스럽지 못한 설교를 보자.  모 목사는 롬8" target=_new>로마서 8장 1-9절로 ‘영적 승리의 삶을 사는 법’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설교하였다.

■ 서론

  그리스도인이 영적 삶을 사는 것이 무엇인지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면서 여러분과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영적 삶은 영의 일을 생각하는 삶입니다 (5,6).

  둘째, 영적 삶은 생명과 평안을 누리며 주님과 동거하는 삶입니다(6,7).

  셋째, 영적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9).

  위와 같은 예는 보통의 목사들이 선호하는 설교 전개법이다.  위의 설교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구절의 순서를 따라서 설교한 것이다.  그러면서 전통적인 삼지창법 (3개의 개요)을 사용한 것이다.

  이 삼지창법은 설교자들 가운데 가장 널리 사용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 방법의 큰 단점은 자연스런 흐름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나는 위의 방법을 효과적인 전개 방식으로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연스런 전개 방식이다.  예로 든 설료의 원래 의도를 훼손하지 않은 채 자연스럽고 박진감 넘치는 전개 방식으로 바꾸어보자.

■ 서론

  1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새 생명을 얻은 성도들이 우선적으로 취해야 할 태도는 영적 삶을 사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A. 그러면, 성도는 왜 영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 6절과 9절에 보니… 영적 삶이 우리에게 생명과 평안을 주며 그리스도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기회를 주기 때문입니다.  또, 육체적 삶은 사망이요, 허무함만을 경험하게 할 뿐입니다(9).… 결국 영적 삶은 성도에게 이처럼 영육간에 큰 유익이 있습니다.…

(예화 삽입 : 영적 삶을 사는 성도가 영적 기쁨과 유익을 얻고 있는 예).

이처럼, 성도에게 유익을 주기 때문에 하나님은 성도에게 영적 삶을 살라고 권고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영적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B. 그러나, 오늘 8절에서 하나님은 성도가 영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더 큰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적 삶을 살 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의 삶과는 달리 영적인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영적인 삶을 사는 것은 우리 자신의 영적, 육적 유익만을 얻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더 큰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예화 삽입 : 자신의 영적 생활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임을 확신하고 있는 성도의 삶의 경우).

피조물로서 이 땅을 사는 동안 할 수 있는 최대의 일은 창조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야말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 아닙니까?  어리석고 연약한 내가 창조주 하나님을 기쁘시게 만들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 모두가 영적 생활을 하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C. 그러면 한 가지 질문해봅시다.  영적 생활이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어떻게 해야 나의 삶에 기쁨과 평안이 주어지는 유익을 얻으며 창조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오늘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영적 삶을 살 수 있는지 그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5절에 영적인 삶은 곧 영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영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영의 일을 생각하는 데 구체적인 예가 될 만한 것을 들어준다).

■ 결론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삶을 살아야… (박영재 설교)

  자, 위의 예는 전자와 똑같이 본문을 취급하면서도 진행 과정이 중간에 끊기지 않는다.  또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자연스럽게 이어질뿐만 아니라 박진감을 더해주고 있다.  어떻게 이런 자연스런 전개가 이뤄졌는가?  질문을 던짐으로 청중들에게 다음 단계를 들을 준비를 하게 했다.  결국 뒤로 갈수록 비중 높은 내용을 다루면서 청중들의 욕구를 채운 것이다.  A단계에서 설교자는 청중들이 영적 삶을 사는 유익이 자신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두 번째인 B단계에서 그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영적 생활의 유익 가운데 비중이 높은 부분을 뒤에서 다룸으로 청중들에게 더 깊은 자극을 준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러면 그 영적 생활을 어떻게 하는 것이냐?”란 질문을 던지면서 영적 생활의 방법에 대해서 언급했다.  사실 앞의 A단계와 B단계에서 영적 생활의 유익만을 강조하였을 때, 청중들은 영적 생활의 방법에 대해 알고 싶은 지적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그것을 마지막 단계에서 설명해줌으로써 그들의 갈증이 해소된 것이다.  결국 청중의 욕구 순서를 따라 진행되는 설교인 것이다.  결국 설교가 청중의 욕구에 접목되는 자연스런 전개가 이뤄진 것이다.

설교를 자연스럽게 만드는 방법들

1. 청중의 육구 순위(청중 심리)에 익숙해지라.        2. 그 욕구 순서(청중심리)를 따라 설교의 전개를 일치시키라.

3. 본문의 흐름이 청중심리의 흐름과 배치되면 청중심리의 흐름을 우선순위로 하여 설교를 진행하라.

4. 한 단락에서 다음 단락으로 넘어갈 때에는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답변을 취하는 형식을 택하라.


5. 긴장을 유지하라

설교에 왜 긴장이 필요한가?

  설교가 긴장감이 없거나 흥미롭게 진행되지 않으면 성도들은 곧 지루하게 된다.  졸기도 하고 딴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듣는 것 같아보여도 한 귀로 듣고 흘릴 뿐이다.  설교에 적당한 긴장이 조성되면 사람들은 흥미를 갖게 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긴장감이란 긍정적인 의미의 긴장감을 말한다.  설교에 유머와 재치가 포함되는 것도 좋다.  내가 유학하던 시절 유머에 관한 주제를 다룬 한 선배의 박사 학위논문을 보면서 유머의 절대적 필요성에 공감한 적이 있다.

  요즈음 TV의 코미디 프로 가운데 독특한 것이 있다.  코미디언이 청중을 실컷 웃기고 난 뒤에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나 용서받아야 할 잘못에 대해 ‘고백’을 하는 시간을 갖는다.  예를 들어, 어떤 출연자는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한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고백한다.  눈물까지 흘리면서 진지하게 말이다.  이 광경을 목격한 시청자들도 가슴이 찡해진다.  결국 그 코미디 프로그램은 시청자를 사로잡기 위한 고도의 전술을 나타내고 있다.  즉 웃기고 울리는 것이다.  울기전에 웃는 기회를 갖는 것, 그것은 울게 하는 데 극적인 효과를 일궈낸다.

  이런 면에서 유머는 절대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가 청중을 울리기전에, 즉 그들의 가슴을 찡하게 만들기 전에 한껏 웃게 만들 필요가 있다.  그러나 나는 청중들이 설교 속에서 적당한 긴장감을 가짐으로 해서 설교에 집중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또한 강조하는 것이다.  결국 좋은 설교는 청중을 사로잡는 긴장감을 갖게 만들어야 한다.


긴장을 유지하지 못한 설교의 예들

1. 본문 설명이 길어질 때 설교에 긴장이 생기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설교들이 성경 강해로만 끝을 내는지, 그리고 그것을 설교라고 말하는지 참으로 안타깝다.  최근 어떤 강해 설교자는 한 설교잡지에 실린 자신의 설교에서 수많은 지명과 인명, 그리고 그 본문의 역사적인 배경 등을 설명하면서 본문의 내용을 세세하게 분석하며 본문을 풀어나갔다.

  그런데 그 설명이 전체 설교 분량의 반 또는 삼분의 이 이상을 차지했다.  그 설교를 읽는 동안 독자들이 얼마나 지루했겠는가! 이런식으로 설교하면 청중은 곧바로 지루함을 느끼게 된다.  결국 긴장을 풀고 잠을 자거나 딴 생각을 하게 된다.  자기들의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긴 본문 설명은 청중의 관심을 끌지도, 긴장을 유지하지도 못한다.

  예를 들어보자.  가정의 불화로 인해 ‘이혼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 속에서 간신히 교회에 찾아나온 성도가 있다고 하자.  또 사업이 잘 안되어 문을 닫아야 하느냐 마느냐하는 고민 속에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들은 설교 시간에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아마도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할지 주님의 음성을 들려주옵소서.” 할 것이다.  그런데 그날도 설교자는 자신이 연구한 본문을 아래와 같이 설명해나갔다.  본문에 충실해야 한다는 미명 아래 말이다.

  청중들은 ‘오늘도 나와 전혀 상관없는 또 그런 얘기군’ 하며 마음문을 닫는다.  그리고 아무런 하나님의 응답도 듣지 못한 채 씁쓸하게 집으로 돌아서야 한다. 

  청중은 본문의 내용을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즉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가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그 본문이 격동적인 삶을 살고 있는 ‘나’에 대해서 혹은 ‘나’의 삶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며 ‘나’의 삶의 문제에 대해 어떤 해결책을 보여주는지를 듣고 싶어한다.  그런데도 얼마나 많은 설교자들이 본문에만 얽매여서 설명하다가 끝을 맺는가?  엘리어트 (T.S. Eliot)는 “분해하고 분석하는 연구는 단지 암탉이 알을 품는 것에 불과하다.”(T.S. Eliot, 「On Poetry and Poets」, London : Faber, 1957, p.27.)라고 말했다. 즉 본문에 대해 요약해서 설명으로 끝나기만 하는 설교는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설교가 아니다.  미완성의 설교인 것이다.

  찰스 스펄전은 “진정한 설교는 적용이 시작될 때 시작한다.”고 못박았다.  본문 설명이 끝나고 적용을 시작할 때부터 청중들은 설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날카로운 적용이 없는 신학 강의식의 지식 전달은 청중들에게 지루한 감을 주고 곧 긴장을 풀어버리게 만든다.  마치 전장에서 무장을 풀고 전투에 포기한 군인과 같은 마음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특히 레위기나 요한계시록, 혹은 역사서나 예언서를 본문으로 설교할 때 본문을 설명하는 데 그치는 강해 차원의 설교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므로 강해 위주의 설명은 설교에서 금물이다.  즉 본문 위주의 설명은 가급적 줄이고 재빨리 청중의 삶에 관련된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해야 한다.  설교가 본문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삶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할 때 청중들은 귀를 기울이고 듣게 된다.

  그러므로 설교에 긴장감을 나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명해졌다.  본문 설명을 줄이고 청중의 삶에 대해서 말하라.


2. 적절한 자극이 담기지 않은 설교는 청중에게 긴장을 주지 못한다.

  적용을 하긴 하는데 밋밋한 적용, 즉 개인적이며 독특한 적용이라기보다는 일반적이고 객관적인 적용이 되면 그 자극의 강도가 약할 수밖에 없고, 약한 자극은 긴장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져 파장을 일으키듯 가라앉아 있는 청중의 마음에 믿음의 소용돌이를 일으킬 강력한 자극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긴장감을 느끼고 결국 설교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제 강력한 자극을 통해서 청중들이 긴장감을 갖게 하는 설교를 보자.

  오늘날 캠퍼스에 있는 젊은이들이 죄의 노예가 되어 죄 속에서 뒹굴고 있는 불행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들을 따라 저녁에 무슨 짓을 하고 다니나 찾아가 보십시오.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컴퓨터 프로그램에 빠져 있는지, 어떤 잡지를 보며 낄낄거리고 있는지 확인해보세요.  그리고 그들의 정신상태를 보십시오.  죄를 죄로 생각지 않습니다.  이제는 옳다, 나쁘다의 구분이 별로 없습니다.  나에게 좋으면 좋은 거예요.  나에게 나쁘면 나쁜 거예요.  그들에게 죄란 자신에게 나쁜 것을 말합니다. 선은 자신에게 좋은 것을 말합니다.  모든 기분이 자기 자신 중심입니다.  이게 상대주의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만연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무서운 사상입니다.  이 사상에 젊은이들이 오염되어 죄에 대한 분명한 시각이 없습니다.  죄의 기준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죄라고 하는 것을 죄러 여기지 않기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도 모르게 죄 속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옥한흠, 「빛과 소금」)

  위에 예로 든 옥한흠 목사의 설교는 청중들에게 문제 제기를 통해서 적절한 자극을 준다.  이 문제 제기는 청중에게 심각하리만치 자극적이다.  그러므로 청중들은 이런 심각한 문제 제기를 통해서 공감대를 형성할 뿐만 아니라 설교에 긴장감을 조성한다.  결국 청중이 긴장감을 가지고 설교에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3. 뻔히 아는 길로 설교가 전개되면 청중은 긴장감을 상실한다.

  첫째, 핵심 내용을 미리 노출시킴으로써 막상 결론에서 그것을 강조할 때는 맥이 빠져 버린다. 

  둘째, 개요를 먼저 밝히고 설명하는 것은 청중에게 기대감과 동시에 긴장감을 상실케 한다.  미리 핵심 아이디어를 밝히는 중복을 피했을 때 설교 전개에 박진감이 생긴다.

  얼마나 많은 설교자들이, 예를 들어, 서론에서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보여주는 진리는 하나님은 진실하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말하길 …” 하면서 설교를 시작하는가? 이런 접근은 청중으로 하여금 “목사님, 요점을 말하셨으니 다 이해했습니다.  다음으로 넘어갑시다.” 하는 반응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을 알면서도 굳이 이런 방법을 택할 필요가 없다.  나는 개요를 먼저 밝히고 그 개요를 설명해나가는 방법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 질문을 던지거나 방향 제시만을 한다.  예를 들어보자.

  …그러면 우리는 이 결단을 어떻게 열매로 맺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아브라함의 여정을 생각하며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4절에 보니 출발하여 사흘 길을 아들과 함께 갔다고 했습니다.  한 번 생각해봅시다.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에게 사흘 동안이나 걸어야 하는 먼 곳에 가서 희생 제단을 쌓으라고 하셨을까요?  한두 시간 정도 떨어진 가까운 동산으로 가서 즉시 그 일을 하라고 했다면 오히려 더 쉬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박영재 설교)

  여기서 보면 질문에 대한 답, 즉 핵심적인 내용을 결코 앞에서 노출시키지 않는다.  끝까지 간직했다가 마지막에 그 대답을 드러낸다.

  이제 설교에 긴장을 가져오게 하는 적극적인 원리와 그 경우들을 살펴보자.

  첫째, 상상력의 활용은 청중을 긴장하게 하고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워렌 위어스비는 설교에서 상상력 활용을 적극 주장한다(워렌 위어스비, 「상상이 담긴 설교」, pp.148-149. 위어스비가 소개한 내용에 내가 처음과 끝을 덧붙였다).  즉 상상력이 담긴 정교한 논리 전개는 청중으로 하여금 긴장감을 갖게 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이제 일을 막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일터에서 돌아오는 길에 당신은 가족들을 다시 만나 맛있게 저녁식사를 함께할 것을 기대합니다.  또 안락의자에 앉아서 신문을 읽고, 좋은 음악 듣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때 코너를 돌아서는 순간 사이렌 소리가 크게 울리며 한 경찰이 당신의 앞길을 막아섭니다.  그리고는 “죄송합니다, 선생님. 통과하실수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무슨 일입니까?” “집이 불타고 있습니다!” 그 소리에 깜짝 놀라 불난 집을 자세히 살펴봅니다.  그 집이 다름 아닌 바로 당신의 집이었다면 당신은 그 상황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물론 위기는 화재만이 아닙니다.  갑작스런 가족들의 죽음일 수도 있고, 직장에서 쫓겨나는 일일 수도 있고, 배우자가 에이즈에 걸렸다는 것일 수도 있고, 믿었던 자녀가 탈선의 현장에서 발견되거나, 당신이 암에 걸렸다는 의사의 진단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위기가 닥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러한 위기를 당했을 때 저와 여러분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다같이 본문 막4" target=_new>마가복음 4장 35절 이하를 봅시다.

  이 문장은 청중의 마음을 긴장으로 몰고 간다.  즉 청중이 관심을 집중하도록 만든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속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마치 실제인 것처럼 정교하게 진행시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개했다고 하자.

  우리가 살다보면 갑작스런 재난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고통을 겪으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게 됩니다.  저는 이 아침에 그런  위기를 갑자기 만나게 되면 어떻게 이겨나가야 할지를 본문을 통해 상고해보고자 합니다.

  자, 어느 것이 더 실감나며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가?  어느 것이 더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가? 전자가 아닌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전자는 상상력을 통해 청중을 강하게 자극한다.  치밀하고 정교한 상상이 청중을 설교에 집중시킨다.  그러나 후자는 청중을 자극하지 못한다.  이렇게 되면 청중에게 긴장감이 생기지 않는다.

  둘째, 뒤에서 할 말을 앞에서 미리 흘리지 않도록 하라. 

  청중들에게 긴장감과 흥미를 갖게 하려면 핵심 내용을 미리 밝히지 말라.  또 단어를 다양하게 사용하라.

  셋째, 대조나 비교를 통한 설명은 청중에게 긴장을 유지하게 하고 관심을 불러 일으킨다.  예를 들어, 빌2:5#빌2:5" target=_new>빌립보서2:5-11을 설교하게 되었다고 하자.  이 속에서 기쁨을 누리는 삶의 비결을 세 가지로 뽑아 내었는데, 그 중 하나를 “마음을 비우는 삶이 기쁨을 누리는 여유를 갖게 한다.”로 하고 다음과 같이 설교할 수 있다.

  … 본문 7절에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남을 위해 자신을 비우는 삶이 진정한 기쁨을 얻는 삶이요 성공하는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인간의 최종 목표인 가장 높은 자리, 가장 명예로운 자리, 가장 권세있는 자리에 있었던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땅에 오셨습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버린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삶이 진정으로 승리하는 삶이요 기쁨을 누리는 삶이라고 본문은 가르칩니다.        (모 목사)


  자, 위의 설명이 어떠한가? 깔끔하고 괜찮아 보인다.  그러나 나는 만족할 수 없다.  왜냐하면 본문을 설명해나가는 동안 성도들이 긴장감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보다 더 많은 긴장을 갖게 하려면 비교 설명, 특히 반대급부의 이야기를 끌어들여야 한다.  그래야 더 흥미롭고 긴장이 넘치게 된다.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아래의 설교를 예로 들어보자.


  … 본문 7절에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고 말합니다.

  저는 얼마전 ‘40대를 따라잡기 위해 20대가 기억해야 할 방법들’ 에 관한 책을 보았습니다.  이 책은 사람들이 성공하기 위해서, 그리고 기쁨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단숨에 선배들을 앞지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밝혀놓은 것입니다.  또 어떻게 하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상대를 이길 수 있을까에 대해 가르칩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데 최고의 가치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인간이 성공하고 기쁨을 얻는 것은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는 데 있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남을 위해 우리 자신을 비우는 삼이 진정한 기쁨을 얻는 삶이요 성공하는 인생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잘 아다시피, 주님은 우리를 위해 지극히 높은 보좌의 영광을 버리시고 낮고 천한 자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해 자신의 기득권을 버리신 것입니다.  마침내 생명까지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삶의 유익을 추구하는 데서 성공과 기쁨을 얻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되는 것에서 최고의 기쁨을 누리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삶이 진정으로 승리하는 삶이요 기쁨을 누리는 삶이 아닙니까?                        (박영재 설교)


  독자들은 두 가지 예의 차이점을 보았을 것이다.  후자가 더 흥미롭고 긴장감이 넘친다.  반대급부의 내용과 본문의 내용을 비교 설명함으로써 본문의 내용이 더 생생이 전달되게 하기 때문이다.


6. 청중의 수준을 뛰어 넘으라

  청중의 수준을 뛰어넘으라는 의미가 무엇인가?  구성이 엉성하고 전달력이 뒤떨어지는 설교는 표현이 유치한 탓만은 아니다.  여러 주제를 한꺼번에 좌충우돌식으로 전하거나 무엇을 전하려고 하는지 선명치 못하게 전개하기 때문만도 아니고, 청중을 압도할만한 영력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설교가 죽을 쑤는 경우 가운데 하나는 설교의 내용이 청중이 알고 있는 수준을 뛰어넘지 못할 때이다.

  청중들은 지적, 영적인 면에서 자신들에게 아무런 자극을 주지 못하면 그 설교를 ‘맹탕’인 설교로 이해하고 만다.  헌신예배에서 자신들에게 강력한 도전을 주는 설교를 기대했는데 전혀 도전을 주지 못하는 기대 이하의 설교를 듣게 되었다면, 그들은 그 설교를 ‘횡설수설 설교’로 이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설교를 하든지 간에 청중의 수준을 뛰어넘는 내용의 설교가 되게 해야 한다.  즉 청중의 요구 수준을 뛰어넘는 설교이어야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다른 각도에서 언급해보자.  예를 들어, 어제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내용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았는데, 오늘 또다시 그와 똑같은 내용을 듣는다고 하자.  은혜가 될까?  설교의 내용 자체는 은혜롭다 할지라도 청중에게는 은혜롭게 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나도 다 압니다.  지루합니다.  자나갑시다!” 하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제 들은 내용보다 더 강력한 메시지, 즉 그들이 알고 있는 수준보다 더 강력한 내용의 메시지가 선포되면 은혜로울 수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내가 전할 메시지가 청중이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보다 더 깊이 있는 내용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설교자는 설교 준비과정에서 먼저 자신이 은혜를 받아야 한다.  설교자 역시 자신을 평신도의 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자신이 준비한 설교에 먼저 은혜를 받아야 한다.  그러면 그 설교는 청중의 수준을 뛰어넘는 설교가 되며, 강단 위에서도 역시 은혜로운 설교를 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청중의 예상 수준을 뛰어넘지 못한 설교의 예들

  첫째, 진부한 표현들을 사용한 설교는 청중의 수준을 뛰어넘지 못하는 설교이다.

  둘째, 강조한 부분이 청중의 상식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면 이 또한 죽을 쑤는 경우가 된다.


청중의 예상을 뛰어넘은 전달되는 설교의 예들

  청중의 예상 수준을 뛰어넘기 위한 좀더 적극적인 방법을 생각해보자.  이를 위해서 ‘개구리 상징’의 개념을 활용해볼 필요가 있다.  즉, ‘밟고 올라서라’의 개념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이 개념은 개구리가 뛰어오르기 위해 움츠린 뒷다리를 힘차게 차면서 위로 치솟는 모양을 비유로 삼은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 A단계

  … 본문에서 우리는 참으로 가련한 여인을 봅니다.  이 여인은 혈루증을 치료하고자 수많은 의사를 찾아갔습니다만 병만 더 심해졌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12년동안의 치료비 때문에 가산을 모두 날려버렸습니다.  무일푼이 된 채 병만 더 심해졌을 뿐입니다.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 B단계

  사람이 이쯤되고 나면 정신도 병이 들기 쉽습니다.  치료 초기만 하더라도 “누군가 나를 낫게 해주겠지.” 하는 희망섞인 기대를 했습니다만, 지금은 “이젠 어느 누구도 날 낫게 할 수 없을 거야.” 하는 절망적인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 C단계

  그뿐만이 아닙니다.  저주받은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혈루증이 자신에게서 떠나지 않는 것을 보면서 “나는 정말로 저주받은 인생인가보다”하는 부정적인 생각이 점점 굳어지는 법입니다.  부정적 자기 이미지와 함께 살 소망조차 상실한 여인, 이쯤되고 보면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여인의 귀가 번쩍 뜨이게 만드는 일이 벌어집니다.…      (박영재 설교)

  A 단계는 본문에 나타나는 내용이다.  즉 성도들도 눈치챌 만큼 외형적으로 드러난 수준이다.  그러나  설교자는 성도들이 쉽게 눈치채지 못하는 더 깊은 내면의 세계를 찾아내야 하는데, 그것이 B단계이다.  A단계를 기초로 생각해볼 때 희망을 잃은 모습의 여인상을 찾아낼 수 있다.  게다가 설교자는 B단계보다 더 깊은 내용을 영적인 통찰력으로 찾아내고 있다.  바로 구약 사상에 관련된 C단계의 내용이다.  결국 A단계에서 B단계를 거쳐 C단계로 가기까지 계단을 밟고 올라가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힘이 느껴지는 것이다.

  ‘밟고 올라가는 개념’을 잘 사용하는 설교자 가운데 곽선희 목사를 들수 있다. 예를 들어본다.

■ A 단계

  다 경험해보신 바대로 세상에 어려운 일이 많다고들 하지만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것(self-control)입니다.


■ B 단계

  그런데 자기를 다스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겸손입니다.  겸손은 모든 축복을 받는 그릇이요 모든 은혜의 근본입니다.  그런 줄 알면서도 겸손하기가 이렇게 힘이 듭니다.  겸손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말대로 자존심 부러지는 소리가 뚝뚝 납니다.  특별히 교만한 사람 앞에서 겸손하기가 힘이 듭니다.  잘 났다고 하는 사람 앞에서 고개 숙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곽선희, 「희락의 복음」)

  곽 목사는 ‘겸손’의 어려움에 대한 주제로 들어가기 전에 A 단계에서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것’의 어려움에 대해서 언급했다.  A단계 자체로는 청중에게 아무런 도전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A단계를 일부러 언급했다.  그리고 A단계를 밟고 B단계로 나아갔다.  이러한 접근은 B단계를 설명하면서 청중들에게 겸손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더 절실히 느끼게 한다.

  결국 겸손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극대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럼에도 그런 어려운 일을 감당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A단계를 밟고 올라감으로써 B단계를 강조하여, 겸손한 삶의 고귀함을 선명히 드러내고 있다.

  자, 이번에는 예화와 더불어 진행되는 ‘밟고 올라서라’의 개념을 활용해보자.

■ A단계

  미국에서 목회할 때, 술을 많이 마신 탓으로 위장에 이상이 생겨서 입원을 하게 된 교인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평소 제가 그분을 뵐 때마다 “성도님, 술이 몸에 해롭습니다.  멀리하시지요.”라고 권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목사님, 끄덕없습니다.”하며, 언제나 저의 충고를 거절했습니다.  망가진 몸으로 누워있는 그분에게, “성도님, 이번 기회에 술을 끊으시지요.” 했더니, “목사님, 목사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젠 술을 끊겠습니다.” 하며 진지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 B단계

  사람은 언제 깨닫습니까?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 귀중성을 깨닫습니다.  몸을 버리고 나서 건강의 귀중성을 깨닫고 가족을 잃고 나서야 가족의 소중함을 압니다.  못마땅히 여기던 직장이지만 그만두고 난 뒤 그 직장이 생각납니다.  불만스러워 떠난 교회였지만 그 교회가 괜찮은 교회였다고 느껴집니다.  이처럼 당하고 나서야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안타깝지요.  그러나 당하고 나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더 안타까운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당하고 나서 깨닫는 사람이 아닙니다.  당하기 전에, 일을 그르치기 전에 미리미리 불행이나 아픔을 막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건강에 이상이 오기 전에 미리 방비하는 사람입니다.  가정에 위기가 닥치기 전에 위기의 싹을 자르는 사람이며, 직장 생활에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기 전에 그 일을 미리 막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성도는 교회생활에 불만이 더 커지기 전에 그 불만스런 마음을 감사로 바꾸려는 의지를 지닌 사람입니다.

■ C단계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귀중한 것을 잃지 않고 재난을 미리 막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그 지혜를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 (박영재 설교)



2장 진부함에 빠지게 하는 내적 요인들

7. 평범한 본문을 독특하게 만들라

왜 본문을 독특하게 만들어야 하는가?

  내가 고등부 시절 다니던 교회의 한 전도사의 설교는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 어떤 본문을 놓고 설교하든지 결론은 거의 같았다.  예를 들어, 결론은 늘 순종하라, 기도하라, 말씀으로 충만하라, 성령으로 충만하라, 헌신하라, 봉사하라, 영적 생활에 깊이를 더하라 등이었다.

  설교에서 몇 가지 주제만을 반복적으로 듣는 청중들은 곧 식상해한다.  뿐만 아니라 성경 속에 내포된 다양한 주제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편식을 하게 된다.  설교자 입장에서는 본문의 다양한 목소리를 축소기키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모든 본문마다 그 독특성과 매력을 최대한 살려서 설교해야 한다.  그래야 설교가 늘 신선하고 새로워진다.  또한 청중도 설교에 기대감을 갖고 영양을 골고루 취하게 된다.  결국 설교자는 평범해 보이는 분문들 속에서 다른 설교 주제와 차별화될 수 있는 독특성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본문을 독특하게 만들지 못한 설교의 예들

  자, 그러면 어떤 설교가 본문을 독특하게 만들지 못한 경우에 해당되는 것일까?  본문의 전후 문맥이 갖는 특별한 상황을 무시하고 평범하게 설교를 만들면 독특성을 상실하게 된다.

본문을 독특하게 만든 전달되는 설교의 예들

  둘째, ‘적용’을 독특하게 취급하지 않으면 이 또한 매력적이지 못한 설교가 된다.

  삼상15" target=_new>사무엘상 15장을 본문으로 설교하면서 본문을 청중의 삶에 독특하게 적용한 예를 살펴보자.

  오늘 본문에서 사울 왕은 아말렉을 친 후 그들의 소유를 다 진멸하라는 하나님의명령을 받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그 말씀에 따르지 않고 소유를 남겨둡니다.  하나님의 엄격한 명령이었지만 그 음성을 외면합니다.  한때는 겸손했던 사울 왕이 어떻게 불순종의 사람이 되었습니까?  자고한 마음 때문입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높운 위치는 스스로도 모르게 자신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모든 것을 명령하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는 자리에 있다 보면 자고해지기가 쉽습니다.  자기의 의견이 최고이고 자신의 뜻이 언제나 관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마음을 열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 방해가 됩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바로 이와 같은 모습들이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따르고 사회적인 위치가 점점 높아질 때 개척교회 목사의 전도 체험담이 귀에 들립니까?  잘 들리지 않습니다.  돈 버는 재미를 톡톡히 보고 있는데, 돈 버는 것 중단하고 “일주일에 한 번은 하나님을 섬기며 삽시다.”하면 그 말이 소중하게 받아들여집니까?  똑똑하고 능력 있고 인정받는데, “하나님 앞에서 겸손합시다.”하면 그 말에 공감하기가 쉽습니까? 신앙생활 안 해도 평안하고 세상 쾌락 다 즐기고 있는데, “교회 나와야 기쁨과 평안을 얻을 수 있다.”고 하면 그 말이 제대로 들립니까?  들리지 않습니다.  언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립니까?  언제 깨달아집니까?  마음을 낮은 곳에 둘 때입니다.  겸손한 마음을 지녀야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내게 선명하게 들리는 법이며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깨닫습니다.  물질이 늘어가고 지위가 높아진다 해도 마음을 낮추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박영재 설교)

  본문 설명을 독특하게 취급하면 적용도 독특하게 취급하게 됨을 기억하라.  우리의 설교가 항상 특별해야 하고 독특해야 함을 기억하라.  특히 청중들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려는 태도는 설교를 언제나 신선하게 만든다는 것을 기억하라.


8.  힘을 불어넣으라

  김빠진 음료수는 정말이지 맹물보다 맛이 없다.  톡톡 쏘는 자극적인 맛, 그것은 음료수의 매력이요 힘이다.  설교도 이처럼 자극을 주어야 청중들의 관심을 끈다.  자극적이지 못한 채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지기만 한다면 청중들은 곧 지루해 한다.  또 짧게 설교한다 하더라도 청중에게 아무런 도적을 주지 못하는 빈약한 내용의 설교 역시 ‘하나마나’한 설교이다.


왜 힘을 불어 넣어야 하는가?

  좋은 설교는 설교를 듣는 청중들의 마음속에 힘이 솟아오르게 만드는 설교이다.  현재의 영적 상태보다도 더 큰 기쁨과 희망, 감사, 그리고 더 큰 삶의 자신감이 설교를 듣는 가운데 솟아오르게 만드는 설교이어야 한다.

  성도들에게 허물이나 잘못을 깨닫게 하는 자극적인 내용이 언급될 수 있지만, 그 자극들은 청중들에게 더 큰 희망과 더 큰 감사, 더 큰 기쁨과 더 큰 은혜의 맛으 보게 하기 위한 부수적인 것이어야 한다.

  결국 설교를 듣고 난 뒤 청중들의 심적 상태가 깊이 감동되어 위로 끌어올려지는 듯한 감격을 갖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청중에게 샘솟는 듯한 감동을 자아내게 할 방법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그들의 낙심된 마음을 소망으로 끌어올리며, 의심과 불평과 슬픔에서 확신과 감사와 기쁨을 갖게 할 수 있겠는가?

힘을 불어넣은 전달되는 설교의 예들

  첫째, 긍정적인 사상을 호소할 때이다. 청중에게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긍정적인 면은 그들의 삶에 자신감을 갖게 한다.  결국 청중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찰스 스펄전의 설교는 언제나 이런 점이 선명히 엿보인다.  스펄전의 설교를 예로 들어보자.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하게 될 때, 그때는 온전한 교제를 나눌 것입니다.  그의 아름다움을 못 보도록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거나 그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유혹해 낼 죄는 전혀 없을 것입니다.  기쁘게도, 그곳에는 우리를 세상의 일터로 불러내는 월요일 아침도 없을 것이며, 우리의 거룩한 안식일이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의심과 타락과 영적인 냉기도 그때에는 영원히 사라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아3:3#아3:3" target=_new>아3:3) 라고 외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 대신 우리는 그리스도를 붙들고 결코 떠나가시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영혼이 잠들어버릴 리도 없으며, 그래서 영혼의 기쁨이 중단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끊임없는 교제를 통해 영혼은 참된 안식을 찾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항상 예수님과 교제를 하며 살 수가 있습니다.  가능합니다. 그러나, 오, 그 얼마나 적은 무리만이 이런 자리에 이르고 있는지요! 그러나 그곳에서는 우리들 가운데 가장 낮은 자라도 모두 그와 같은 자리에 이르게 될 것이며, 우리는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찰스 스펄전, 「스펄전 설교전집」, 대구 보문 출판사, p.62).

 

 스펄전은 믿음의 긍정적인 면을 상상력을 통해 밝힘으로써 청중의 마음을 힘껏 끌어올리고 있다.  주님과 함께 하는 현실과 미래의 삶에 나타나는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차 있다.  청중에게 자신감을 한껏 불어넣어주고 있는 것이다.

  청중의 심리를 잘 끌어올리는 설교자 가운데 한 사람이 이동원 목사라는 생각이 든다.  이 목사의 설교를 보자.

 … 에녹의 믿음은 증거가 있었습니다.  그 증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



청중의 심리를 잘 끌어올리는 설교자 가운데 한 사람이 이동원 목사라는 생각이 든다.  이 목사의 설교를 보자.

 … 에녹의 믿음은 증거가 있었습니다.  그 증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귀한 증거입니다.  과거의 우리 문화속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표창은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그는 효자로 표창됩니다.  남편을 기쁘게 한 자를 열녀라고 했습니다.  임금을 기쁘시게 한 자, 그는 충신입니다.  그러나 이런 표어가 따를 수 없는 영광스러운 성도의 행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

  오늘 당신의 삶을 주께서 보실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여!”라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까?  당신을 아는 이웃들이 “저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을 아는 자”라고 말해주고 있습니까?  우리의 묘비에 이런 글자가 쓰여지기에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까요? “여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잠들다.” (이동원, 「이렇게 믿으라」)

  이 목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고 싶도록 청중의 마음을 끌어올리고 있다.  즉 결론에 이를수록 마음이 벅차오르게 만든다.  또 다른 예를 보자.

  … 몇 년 전 세종문화회관에 와서 노래를 부른 킴 윅스 자매가 있습니다.  그녀는 장님으로 빌리그레함 전도협회의 일원입니다.  그녀가 간증을 하는데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소경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인도를 받습니다.  사람들은 십 미터 전방에 무엇이 있다고 일러주는 것이 아니라, 앞에 층계가 있으니 발을 옮겨놓으라 말하고, 앞에 흙탕물이 있으니 피하라고 말합니다. 저는 저를 인도하는 사람을 신뢰하고 한걸음 또 한 걸음 옮깁니다.  그러면 언제나 목적지에 도달합니다.” 그러면서 그녀가 말하기를 “저는 인생이 그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그와 꼭 같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나를 부르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을 신뢰하고 한 걸음 또 한 걸음을 옮기다보면 주께서 나를 위하여 예비하신 그 영광스런 목적지에 도착할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당신은 이 믿음의 발걸음을 내디딘 순간이 있었습니까?  아무도 이 세상에서 구별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믿음의 발걸음이 없이는 천국을 소망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 발걸음을 옮겨놓고 있습니까?                                  (이동원 , 「이렇게 믿으라」)


  이동원 목사는 청중의 가슴을 파고들면서 호소하고 있다.  예화 자체도 우리의 마음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지만 예화 뒤에 이어지는 적용, 특히 질문들이 성도들의 마음에 긍정적으로 자극을 주면서 감동의 샘을 열게 만들고 있다.  결국 그 가슴이 뜨거워지도록 만들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어떻게 해야 청중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 수 있을까?  그것은 긍정적인 설교 내용으로 청중의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다.

  감정에 호소하되 긍정적인 내용이어야만 결국 설교가 청중의 가슴을 뜨겁게 만든다.

  둘째, 청중을 끊임없이 깨닫게 하라.

  그것은 인간의 내면세계를 분석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사람의 심리를 분석해내는 동안은 언제나 설교에 힘이 실린다.  사람들의 내면세계는 변화무쌍하다.  그들의 생각은 천당과 지옥을 오르내릴 만큼 복잡미묘하다.  그 내면의 세계를 날카롭게 분석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복잡한 내면의 세계를 분석해 내는 작업이 설교 속에 나타날 때 청중들은 그 설교에 매력을 느끼며 귀를 기울이게 된다.


  곽선희 목사의 설교의 뛰어난 특색 가운데 하나는 인간의 심리를 날카롭게 분석하며 설명하는 데 있다. 어떤 설교자들은 인간의 심리에 대한 분석이 평범한 수준에 머물지만, 그는 우리가 표현하기조차 힘든 것들을 설교로 표현해낸다.  결국 그의 언어 표현은 설교를 항상 신선하게 만들고 청중을 설교에 빨려들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청중들의 심리를 분석해내고 있는데, 즉 자신들의 속마음을 밝혀내고 있는데, 어떻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를 들어보자.

  여러분들도 오늘 어떤 사람이 실패를 했다든가, 시험에 낙방했다든가, 아니면 병이 들었거나 어려운 일을 당했다고 하면 그를 찾아가 여러 가지로 위로의 말을 하게 될 터인데,  아마도 그런 일에는 다들 선생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고난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니 다 유익한 것이라.”는 등, 갖가지 좋은 말로 마음을 어루만져주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자신이 그 일을 당하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래서는 전혀 그런 이야기나 그런 진리를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해버린다는 말입니다.  고난의 맛은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는 그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문제로 부딪치게 될 때에는 다들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곽선희, 「흩어진 자의 행로」)

  남의 고통에는 쉽게 선생이 되어 훈계하는 사람도 막상 자신이 직접 고통을 겪게 되면 달라지게 된다는 논리를 설득력있게 피력하고 있다.  이 논리는 결국 사람의 심리를 분석하는 데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분석을 들으면 우리는 긴장을 늦출 수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심리 분석적 논리는 설교에 힘을 더해준다.

  셋째, 설교에 힘을 불어넣기 위해 설교자는 자신의 삶을 말해야 한다.  설교자의 올바른 신앙태도나 영웅적 신앙태도는 청중에게 설득력을 발휘한다.  바울의 복음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잘 먹혀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도 그가 자신의 변화된 삶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죄인 중의 괴수였던…”등의 내용을 서슴없이 밝히는 모습이 오히려 청중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아래의 예를 보자.


  나는 교회에서 수석 부목사나 수석 장로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대신 선임  부목사나 선임 장로라는 말을 씁니다.  수석이라는 말과 선임이라는 말은 비슷해보여도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수석이라는 말은 ‘위치’가 강조된 표현이고, 선임이라는 말은 ‘임무’가 강조된 표현입니다.

  내가 수석 부목사, 수석 장로라는 말을 쓰지 않고 선임 부목사, 선임 장로라는 말을 쓰려고 하는 이유는 여러 부목사님들의 앞에서 일을 하는 사람은 보다 많은 책임을 수행하는 사람이어야 하며, 여러 장로님들의 앞에서 일을 하는 사람은 다른 장로님들보다 많이, 그리고 보다 먼저 책임을 수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김동호, 「지혜로운 건축자」)

  이론을 말하기보다 자신의 삶을 말하고 있다.  청중이 못하는 것을 목회자 스스로가 행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때 청중들은 감동을 받는다.

  나는 전병욱 목사의 설교를 좋아한다.  많은 설교자들도 그의 설교를 좋아할 것이다.  그의 설교는 항상 살아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느낌은 어디서 오는가?  바로 그의 삶을 말하는 것에서 온다.

  삼일교회는 ‘은과 금’이 없는 교회이다.  세상의 시각으로 볼 때 내세울 것이 전혀 없는 교회이다.  그래서 삼일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 외에는 의지할 것이 없었다.  이것이 세상의 시각에서는 가난함이었으나, 영적 시각에서는 축복이었다.  우리에게 있어서 기도는 무기였다.  우리는 기도를 액세서리로 사용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았다.  매일매일의 영적 싸움에 있어서 기도가 없이는 단1" target=_new>단 1분도 살아 남을 수 없는 전투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기도의 전투를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우리의 모습을 보고 놀랐다.  마귀가 우리 교회만큼 두려워 떠는 존재가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의 기도가 닿는 곳마다 영혼들이 살아나는 일들이 벌어졌고, 우리가 기도하는 일마다 현실로 드러나게 되었다.  우리의 기도 사역이 있는 곳마다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의 모든 성도가 낙타무릎의 자리로 나아오기만 한다면, 우리의 교회는 다시금 부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전병욱, 「낙타 무릎」)

  전 목사의 이 글이 힘이 있는 것은 체험에 기초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래서 강력한 도전을 준다. 하나 더 보자.

  지도자가 목표를 세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그러나 문제는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느냐 하는 거시이다. … “목사가 강대상을 다 적실 각오를 하고 강대상에 올랐다.… 우선 방석 하나라도 다 적실 만큼 기도하자고 마음먹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부흥을 위한 기도를 시작한 것이 오후 2시였다. … 내가 일부러 눈물과 콧물을 닦지 않고 격렬하게 기도하니까 밤9시쯤 되어서 방석 하나가 다 젖었다. … 강대상에서 일어서는 그 순간 이번 전도집회는 대승리일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전병욱, 「낙타 무릎」)

  전 목사의 엄청난 기도의 노력, 그 노력 자체가 우리에게 충격적인 도전을 주고 있다.  삶으로 도전을 주고 있는 것이다.

  넷째, 치밀한 논리는 설교에 힘을 불어넣는다.  설교의 전개는 결국 논리의 전개이다.  논리가 결여된 설교는 청중을 맥빠지게 만든다.  바울 서신은 치밀한 논리 위에 기초된 말씀이었다.  헛점을 찾아 내기 힘들 만큼 논리 전개가 뛰어났다.  결국 말의 힘은 성령의 역사외에 논리의 치밀함에서도 나타난다.  치밀한 논리 위에 기초된 말씀이었다.  헛점을 찾아 내기 힘들 만큼 논리 전개가 뛰어났다.  결국 말의 힘은 성령의 역사외에 논리의 치밀함에서도 나타난다.  치밀한 논리와 논리 부재의 차이점이 어떤 결과를 빚는지 예를 들어보자.  수3" target=_new>여호수아 3장 1-6절을 설교할 때 설교자가 다음과 같이 전했다고 하자.


  3장 1-6절에 보니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서 싯딤을 떠나 요단강가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3일 동안 유숙했다고 했습니다.  3일 간을 쉬는 동안 그들은 기도했습니다.  요단강을 잘 건너게 해주시라고, 하나님께 역사해주시라고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단강 도하라는 거사를 앞두고 이스라엘이 기도했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도 큰 일을 만났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이 문제인가?  본문에는 이스라엘이 기도했다는 내용이 없다.  그러나 설교자는 그들이 기도했다고 임의로 단정했다.  이러면 논리에 헛점이 생긴다.  즉 청중들은 “그들이 기도했다는 내용이 어디에 나온단 말인가?” 하면서 반문하게 된다.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다.  그러므로 모순된 주장처럼 들린다.  만약 설교자의 생각에 그들이 3일 간 쉬는 동안 기도도 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들면 치밀한 논리로 청중을 설득하라.  다음과 같이 하면 어떨까?

  수3" target=_new>여호수아3장 1-6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 싯딤을 떠나 요단강가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3일 동안 유숙했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유숙하는 동안 무엇을 했을까요?  물론 짧지 않은 여행길에 피곤하여 가축들과 짐승들에게 물과 먹이를 주면서 지친 몸을 푹 쉬는 기회를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단지 쉬기만 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요단강 도하라는 일생일대의 대사를 앞두고 그들은 얼마나 두렵고 떨렸겠습니까?  그러나 한편으론 성공적인 요단강 도하를 위해 하나님이 친히 역사해주시라고 간절히 부르짖기도 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단강 도하라는 큰 일을 앞두고 이스라엘이 기도했던 것처럼, 여러분의 삶속에서 큰 일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박영재 설교)

  전자는 설교자의 임의대로 설교한 반면 후자는 설교자가 청중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도했을 것이라는 내용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고 있다.  결국 설득을 위한 논리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전자가 헐렁한 논리전개라고 한다면 후자는 치밀한 논리전개라고 볼 수 있다.


  다섯째, 절제된 언어 사용은 설교에 힘을 불어넣는다.  ’97년의 베스트셀러인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는 평범한 예화들의 모음집이다.  그러나 다른 책이나 설교들에 비해 표현에 있어서 한가지 뛰어난 점이 있다.  그것은 절제된 언어 사용이다.  불필요한 말이 많아지면 말에 힘이 약해진다.  내가 바울의 서신 중 하나인 갈라디어서를 연구하면서 깜짝 놀란 것 가운데 하나가 바울이 말을 상당히 아끼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많은 말을 하는 것 같으나 꼭 필요한 말, 또는 간혹 강조하기 위해서 고의로 반복하는 말 외에는 언어 사용을 상당히 절제하였다.  이런 절제가 오히려 그의 글에 힘을 더해준 셈이었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여러 번 말하면 귀한 줄을 모른다.  오히려 지겹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말을 절제하라.  절제하여 사용할 때 그 말이 더욱 귀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여섯째, 청중을 신앙의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자극하라.  사람들은 언제 도전을 받는가?  자신보다 나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을 보게 될 때, 그리고 그렇게 살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될 때 도전을 받는다.

  일곱째, 확신에 이르게 하라.  설교에 힘을 불어넣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청중들에게 확신을 주는 것이다.


9. 들리게 말하라

  들리게 만들어야 하는 이유

  설교의 주제가 단순화 될수록 성도들은 쉽게 듣는다.  그리고 설교를 오랫동안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면 주제는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그렇다고 수박 겉핥기식의 얄팍한 설교가 좋다는 것이 아니다.  얄팍한 설교는 청중들이 오래 기억하지 못한다.

  도날드 브로드벤트(Donald E. Broadbent)는 그의 저서 「인식과 의사전달」(Perception and Communication)에서 사람들은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의식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단지 한 번에 한 가지만 이해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Donald E. Broadbent, 「Perception and Communication」, London, Pergamon Press). 우리의 감각 기관과 의식 사이에는 정신적인 여과 과정이 이루어지는데, 이는 한 순간에 한정된 정보의 양만을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탐 내쉬, 「마음을 사로 잡는 커뮤니케이텨」, 독고 앤 옮김, 도서출판 디모데, p.86). 청중들의 기억력의 한계를 살펴보기 위해 탐 내쉬의 기억력에 대한 연구 결과를 보자.

  사람들이 무슨 일을 실행하도록 만들려면 먼저 계속해서 그들의 주의를 끌고,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또한 그들이 적용시킬 기회가 생길때까지 그 메시지를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메시지를 기억할 수 있을까? 노련한 대학 교수들에게 자신들의 전공 분야에 대해 10분 동안 이야기하도록 시도해본 연구가 있었다.  강의실의 학생들은 테스트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강의가 끝난 직후 학생들은 강의 내용의 59퍼센트만을 기억할 수 있었다.  두 주 후에는 25퍼센트만 기억하고 있었다.  10분 후에 테스트를 한다는 사실을 알고서 들은 학생들도 50퍼센트밖에 기억할 수 없다면, 전형적인 설교나 수업은 얼마나 기억할 수 있겠는가?(Ibid., pp. 303-4.)

  사람의 기억력이 이처럼 미약한데도, 우리의 설교는 여전히 비효과적으로 전달되고 있다.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설교가 쉽게 이해되고 오래 기억되게 할 수 있을까? 일단은 쉽게 쓰여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주제가 복잡하지 않고 단순해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를 오랫동안 기억케 하고 쉽게 이해시키려면 무엇보다 설교의 내용을 잘 구성해야 한다.  즉 주제가 쉽게 전개되고 단순하도록 구성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설교를 쉽게 이해하고 오랫동안 기억하게 만들 수 있을까?


여러 주제를 나타내 설교가 전달되지 않은 경우들

  다음과 같은 세 개 대지의 설교를 만들었다고 가정해보자.

  주제 :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

  개요 :  1.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신다.  2.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신다.

  이 세 개의 개요를 30분 정도로 설교하게 되었다고 하자.  서론과 결론을 빼고 난 뒤 위의 각 개요를 전달하는 데 소모되는 시간은 약7" target=_new>약 7-8분 정도 된다.  결국 개요 하나에 들이는 정성, 즉 한 주제에 관련된 언급은 수박 겉핥기식의 짧은 시간밖에 들이지 못한다.  나의 경우라면 위의 세 개의 개요가 본문에 근거하고 있다 할지라도 한 주제만을 택해 전할 것이다.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투자함으로써 깊은 설교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세 번째 개요인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만일 설교의 주제로 선정했다고 하자.

  1.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인간의 모습을 묘사한다.

  2. 인간에게 필요한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설명한다.

  3.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에게 어떻게 주어지는가를 설명한다.

  4.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인간의 반응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밝힌다.      (박영재 설교)

 자, 위의 개요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 가지 주제인 ‘하나님의 사랑’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닌가?  한 가지 주제만 다루면 결국 그 주제를 깊숙이 다루게 된다.  주제를 깊숙이 다루기 때문에 청중들에게 집중력도 생긴다.  뿐만 아니라 청중을 감동시킬 수 있는 ‘깊이 있는 설교’가 나오기 마련이다.

  본문에 나타난 문제점을 지적하며 리펄드 (Lidfeld)가 밝힌 개요를 살펴보자.

  롬5" target=_new>로마서 5장 1-11절을 본문으로 설교할 때 무엇이 문제인가를 보자.

  1. 평화(1)

  2. 소망

    1)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2)     2) 고통중에도 소망(3-4)

    3) 십자가의 사랑으로 인한 소망(5-10)

  3. 기쁨

  위와 같이 설교했다고 가정할 때 무엇이 문제인가?  너무 많은 주제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위의 것을 아래와 같이 고쳐보자.

  롬5:1#롬5:1" target=_new>로마서 5:1-11

  1. 참된 소망은 십자가의 사랑으로부터 온다 (5-10).

  2. 그 소망은 우리의 고통까지도 이기게 한다(3-4).

  3. 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소망이기 때문이다(2).

  4. 그러므로 소망의 사람은 고통중에도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다.        (박영재 설교)

  전자와 후자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전자는 평화, 소망, 기쁨이라는 세 가지 주제를 다룬다.  그러나 후자는 소망이라는 한 가지 주제만 다룬다.  ‘소망’과 상관이 없는 주제들은 나뭇가지를 치듯 다 쳐 내버린다.  본문을 연구한 결과가 아까워서 이것저것 다 설교하려다가 오히려 설교를 망치는 경우가 있다.  다 전하고 싶은 유혹을 떨쳐 버려야 한다.

  그런데 본문에서 세 가지 주제를 선명하게 말하고 있다면, 어쩔 수 없이 세 가지를 다 전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 가지를 다 전하더라도 들리도록 설교하기 위해 설교자는 개요의 통일성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또 독립성도 고려해야 한다.  쉽고도 깊은 설교를 만들기 위해서다.  우선 다음에 예로 든 개요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주제 : 하나님의 은총

  1.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신다.

  2.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신다.

  3. 하나님은 우리에게 유익을 주신다.

 자, 위의 세 개의 개요 가운데  무엇이 문제인가?  세 번째 개요가 아닌가?  세 번째는 첫 번째와 두 번째를 다 포함하는 개요이다.  즉 독립성과 통일성에 문제가 있다.  독립적이면서도 통일성이 유지되는 (diversity in unity) 개요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쉽고 조직적인 체계가 잡힌 설교가 된다.  그러나 위의 세 개의 개요가 세 개의 주제를 나타내기 때문에 결국 너무 많은 주제를 한꺼번에 설교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미 앞에서 한 가지 주제만을 전달하는 개요 작성에 대해 살펴본 것처럼 하나만을 선택해서 만들어보라.


10. 감정에 파도를 치게 하라

왜 감정에 파도를 치게 해야 하는가?

  설교자는 왜 청중의 감정을 건드려야 하는가?  생각해보자.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다.  감정이 자극된 상태에서 말씀을 들으면 반응이 달라진다.  몇 배의 효과를 가져온다.  감정은 놀라움, 갈등, 슬픔, 기쁨, 안도의 여유, 감격 등으로 나타난다.  감정을 일깨우지 않은 상태에서 설교가 지속되면 성도들에게 머리로만 받아들이게 하는 지적 자극만 줄 뿐이다.  평범하고 여유있는 삶을 사는 사람이나 별 걱정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자위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내면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불행의 그림자나 불안의 가능성을 건드리면 그들의 감정이 자극을 받는다.  즉 행복한 삶을 산다고 확신하는 사람에게도 불행의 그림자가 다가올 수 있음을 보여주면 그들의 감정은 움직인다.  걱정거리 없이 평안한 삶을 사는 사람도 걱정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것임을 인식하게 하면 걱정의 감정이 생긴다.

  설교자는 청중의 감정을 언제 건드려야 하는가? 서론과 결론 부분에서다.

  예를 들어, 서론에서 청중이 자신의 감정에 아무런 자극을 받지 못한 채 설교를 듣게 되면 청중은 설교 전체를 듣는 동안 무미건조해지거나 하나의 논문 발표를 듣는 것과 같은 상태가 된다.  지식을 습득하는 차원에서 설교를 듣게 될 뿐이다.  결국 아무런 도전도 받지 못한 채 말씀을 듣게 된다.

  그러므로 설교에서 현대 성도들의 감정을 건드리라.  그 감정이 자극받게 하라.  그러면 카타르시스(정화) 현상이 일어나 결국 결단하게 된다.  서론에서 특히 가라앉은 청중의 감정을 일깨워야 한다.


  감정을 일깨우는 서론의 경우를 보자.

  IMF 금융지원 이후 우리나라에 경제대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기업이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리지 못하고 은행이 은행을 믿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실직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사람들이 차를 팔아버립니다.  가족의 수입은 평균 50만 원 이상이 줄었지만, 물가상승 요인까지 더해지면 수입은 이보다 휠씬 적어지게 되었습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30대 기업을 포함해서 무려 237개의 기업이 쓰러졌습니다.  빚에 쪼들린 한 기업가가 어린 자녀들을 남긴 채 자살했습니다.  예금액 인축이 막힌 것을 안 한 여성이 은행 앞에서, “내가 평생 동안 어떻게 모은 돈인데…”하며 망연자실했습니다.  우리 한번 생각해봅시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습니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습니까?  오늘 하나님은 이 모든 원인이 다른 곳에 있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바로…      (박영재 설교)

  위의 서론은 정보전달(여러 경제적 상황)과 더불어 현실을 인식시키는 데 주력하고 있고, 현재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가도 깨닫게 하고 있다.  정신이 바짝 들게 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구체적인 수치를 언급하고 있으나 경제적 위험수위를 피부로 느끼게 만들어 감정에 자극을 주고 있다. 즉 “은행이 은행을 믿지 못하고,” “실직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기업이 무너지고”등은 경제위기의 심각성을 지성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작업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고 “한 기업가가 어린 자녀들만을 남긴채…” “한 여성의 망연자실” 등은 청중의 지성에 자극을 주려는 것이 아니다.  시국의 어려움을 피부로 느끼게 만드는 감정에 자극을 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청중의 감정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감정을 자극하기 위해서 억지로 어색한 표현을 끼워넣을 필요는 없겠지만 자연스럽게 감정 표현을 삽입하는 것은 청중의 감정을 자극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자, 이제 결론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보자.  결론에서 청중의 감정을 자극하여 결단하게 만들라.  이것은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로이드 존스의 설교의 장점은 뛰어난 논리 전개이다.  반면에 단점은 종종 논리 전개만으로 설교를 끝맺는 경우이다.  청중의 감정을 끌어올려서 결단케 해야 하는데 논리적인 귀결만을 맺을 뿐 감정에 자극하는 면이 많지 못하다.  로이드 존스 설교의 뛰어난 논리 전개를 배우라.  그러나 감정이입이 없는 메마른 결론을 조심하라.


감정을 움직이게 만드는 방법들

1. 사랑, 자비, 용서, 희생 등의 감정의 언어를 사용라라.  또한 그림언어를 사용하라

  (그림언어 사용에 대해서는 나의 저서 「설교자가 꼭 명심할 9가지 설득의 법칙」을 참조하라).

2. 감정이 듬뿍 담긴 예화를 사용하라.

3. 서론과 결론에서는 감정에 자극을 주기에 충분한 예들을 활용하라.

잠깐만!

1. 일반적으로 듣는 사람이 좋아하고 공감할 만한 내용을 먼저 이야기하라.

2. 가장 설득력 있는 내용을 처음이나 마지막에 두어 잘 기억할 수 있게 하라.

3. 짧은 메시지를 반복하라.  그러나 지루해질 정도로 반복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11. 귀납법적 접근을 하라

왜 귀납법적 접근이어야 하는가?

  귀납법적인 설교는 현대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포스트모더니즘, 종교다원주의, 뉴에이지 운동의 영향으로 현대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현대인들은 기독교를 유일한 종교가 아닌 여러 종교의 하나로 비하시킨다.  또한 인간을 초능력적 존재로 인식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거나 뚜렷한 자기 개성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사생활을 간섭하는 종교로 낙인찍는다.  이렇게 그들은 교회를 부정적 이미지를 지닌 단체로, 혹은 귀찮은 ‘예수쟁이’들의 모임으로 인식하고 있다.  갈수록 복음 전파가 어려워지고 있다.

  이런 그들에게 설교자가 “성경은 말하길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오직 예수를 믿는 길뿐이라고 합니다.”라고 말한다든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고 성경은 말합니다.”라고 말한다든지, “성령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한다든지,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돌보고 계십니다.” 하는 등의 설교를 한다면 어떻게 들릴까?

  성경과 우리가 믿는 신앙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이런 접근법은 매우 부적절하다.  그러나 접근법이 다르면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여,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얼마나 잘 자라는가?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키우시지 않는가?  당신의 문제에 대해서 걱정하지 말라.  이처럼 하나님이 당신도 돌보신다.”라고 하면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은가?  왜 그런가? 이 문구에서, 새나 꽃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자라고 있음을 이미 보여주었다.  이 말을 들은 순간 청중은 ‘그래 맞아, 하나님이 키우시지.’ 하며 동의하게 된다.  그때 설교자는 이런 말을 덧붙일 수 있다. “여러분, 염려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삶도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그러면 성도들은 자신들의 문제까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수긍하게 된다.  왜냐하면 꽃과 새를 통해 이미 하나님이 자연을 돌보신다는 데 대한 확신을 갖게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귀납법적 접근이다.

  즉 귀납법적 접근은 삶의 정황으로부터 시작하는 설교에 효과적이다.  현재와는 멀리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성경으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설교자가 억지로 청중을 이해시키려 하지 않는다.  마치 가랑비가 서서히 우리의 몸을 적시듯 진리가 청중에게 자연스럽게 다가오게 해서 설득되도록 한다. 결국 귀납법적인 설교는 설교자가 억지로 청중을 이해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청중 자신이 저절로 이해하도록 자연스러운 귀결을 유도한다.

  그러나 연역법은 이와 정반대이다.  연역법은 설명을 통해 설득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므로 귀납법적인 설교는 사람들의 삶의 정황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들의 일상 속의 느낌이나 경험 등에서 시작할 때 청중들은 관심을 갖고 설교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러면 귀납법적 설교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몇 가지 원리가 있다.


귀납법적 접근을 하지 못한 설교의 예들

  여러분, 우리는 자녀를 잘 키워야 합니다.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길 수 있도록 신앙을 키워주어야 합니다.  어려서부터 부모를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해주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여러분의 자녀가 탈선할 수 있습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키워야 합니다.…  (모 목사)

 자, 위의 설교는 무엇이 문제인가?  당위성을 강조하는 명령으로만 이어졌다.  이런 접근법을 연역법이라고 한다.  이론을 통해 설명하고 설명을 통해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청중들이 이러한 설교를 듣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우리의 설교는 청중에게 명령을 하기 전에 그들로 하여금 명령을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귀납법적 접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연역법적으로 접근하기 전에 귀납법적인 접근을 통해 마음문을 열어야 하는 것이다.


귀납법적 접근을 한 전달되는 설교의 예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귀납법적인 접근을 잘 성취할 수 있을까?

  첫째, 삶의 정황에서 설교를 시작하라.

  아래의 예를 보면서 비교해 보자.

  얼마전 저는 시골의 어떤 연로하신 할머니를 방문했습니다.  그분은 집 뒷산을 가리키며, “여기가 내가 어릴 적 놀던 곳이야. 그런데 내가 벌써 꼬부랑 할머니가 되었다니, 세월이 얼마나 빠르게 지나가는지 몰라!”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가, “인간은 들의 풀과 같고 안개와 같다!” 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쏜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갑니다.                                (박영재 설교)

  자, 이것은 인간의 삶의 정황을 먼저 이야기하면서 원론적인 설명으로 옮겨간 것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내용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고 하자.

  여러분, 인간은 금방 죽습니다.  나이든 사람도 젊은이도 방금 태어난 아기도 언젠가는 다 죽습니다.  금방 태어난 아기가 오래 살 것 같지만 금세 늙어버립니다.  성경에 인간은 들의 풀과 같고 안개와 같으며 나그네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참으로 짧습니다.  여러분, 인간은 금방 이 세상을 떠납니다.…

  자, 전자와 후자가 어떻게 다른가?  후자는 연역법이다.  설명으로 일관하는 이런 설교는 청중의 가슴에 별로 와닿지 않는다.  즉 인간의 짧은 삶과 죽음을 이론적, 개념적으로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전자는 인생이 짧다는 것을 삶의 정황으로부터 먼저 보여주었다.  그리고 설명했다.  결국 청중이 죽음에 대해 더 심각하게 체감하도록 만들었다.

  둘째, 질문을 던져라.  귀납법적 접근의 또 다른 예는 설교자가 미리 결정된 사항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던짐으로 설교의 목적을 향해 청중과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즉 절대로 결론을 내려 강요하지 않고 질문을 던져 결론을 유도해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질문은 청중을 설교에 참여시킴으로써 청중과 함께 설교를 만들어가게 해준다.  그러면 청중이 그 설교에 관심을 보이며 참여하는 태도를 갖게 된다.  결국 성도가 설교에 귀를 기울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설교자는 일방적으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질문을 통해서 청중과 함께 결론을 유도해가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청중을 존중하는 것이다.  결국 청중은 자신들을 존중하는 설교자의 태도에 호응하게 된다.

  또 설교의 방향을 결정하고자 할 때 도중에 질문을 던져라  이것은 문장이 평범해지는 것을 막고 동시에 청중들이 무관심해지는 것을 막아준다.  무엇보다 결론이나 답변을 주지 않고 청중들이 질문에 스스로 답변할 기회를 줌으로써 그들과 함께 설교의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삶의 정황을 설명하기 위해 대화, 유추, 질문, 비유, 확실한 경험 등을 이야기하고 이것을 성경적 결론으로 이끌어나간다. 결국 증거나 예화를 먼저 말한다.  결론이나 주장은 먼저 말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청중과 함께 만들어져 설교의 끝부분에 전해져야 하는 것이다.  결국 귀납법은 설명함으로써 권위를 얻어간다.  그러나 연역법은 이미 권위를 가진 상태에서 시작한다.  귀납법은 질문을 던지지만 연역법은 대답을 주장한다.  귀납법은 사실에서 원인을 찾고 확장시킨다.  그러나 연역법은 사실들을 분류한다.  귀납법은 이유를 분석하여 노출시키지만 연역법은 이유를 변호한다. 귀납법은 청중이 통찰력을 갖고 참여토록 유도한다.  그러나 연역법은 원리들을 부과한다.  또한 귀납법은 건설적이며 창조적이지만 연역법은 제한적이며 인식적이다.  귀납법은 쌓아올린다.  그러나 연역법은 주장한다.  귀납법은 유연한 반면 연역법은 확고하게 결정되어 있다.


12. 주입하려 하지 말고 설득하라

  지금까지 우리의 설교는 ‘선포’라는 개념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외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이후의 모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긴다는 심정이었다.  설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설교를 통해 영적 성장을 이루지도 못하는 성도들을 향해 “교만하다.”느니 “세속적인 신자”라고 비난하면서 모든 책임을 성도들에게 전가시킨다.  즉 설교에는 문제가 없는데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마음밭이 다양하고 악한 가운데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말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책임 소재를 분명히 가려보면 보다 많은 책임이 청중보다 설교자에게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의 설교를 분석해보면 강의처럼 지식 전달에만 그치는 주입식 설교인 경우,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성도들에게 설교자가 준비한 것만을 일방적으로 외치는 경우, 청중이 안 받아들인다며 기를 쓰고 강요하는 경우, 청중의 반응은 냉랭한데 그저 혼자 외치는 독백적인 경우 등이 있다.  이 모든 경우는 청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설득적인 선포가 아니다.  단지 청중의 마음문을 꼭꼭 닫아놓는 소득 없는 외침일 뿐이다.


왜 설교가 설득적이어야 하는가?

  워렌 위어스비는 마이클 레디 (Michael J. Reddy)의 ‘수도관 은유’(the conduit metaphor)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목회자들이 설교를 얼마나 잘못 전달하고 있는가를 설득적으로 밝히고 있다.  우리는 대개 말할 때, 자신은 상수도관과 같은 지식의 원천으로 여기면서도, 듣는 상대방은 텅빈 수도관처럼 우리가 전하고 있는 것을 마냥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입을 열어 말할 때, 자신과 상대방 사이에 보이지 않는 수도관 같은 것이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전달하려는 정보가 자동적으로 한 사람의 마음에서부터 다른 사람의 마음으로 공급되면서 의사소통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설득적이지 못해 설교가 전달되지 않은 경우들

  그러면 어떤 경우 우리의 설교가 설득적이지 못하게 될까?

  첫째, 설명 위주의 설교는 청중을 설득할 수 없다.

  둘째, 본문 위주의 설명은 청중을 설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설교가 청중의 삶과 관련성이 없는 경우 청중을 설교에 무관심해지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셋째, 동기부여가 없이 당위성만 강조하는 설교는 청중을 설득할 수 없다.


설득적인 설교로서 잘 전달된 경우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의 설교가 설득적일 수 있을까?

  첫째, 필요를 느끼게 하라.   

  둘째, 공감대를 만들라.

  셋째,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라.  그러면 설득적이 된다.  설명만 연속되면 청중들은 피상적으로 느낄 뿐이다.  피상적으로 받는 느낌은 청중 스스로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데는 역부족이다.  이론적인 설명만 담긴 설교는 청중에게 아무것도 남겨주지 못한다.  듣는 순간 그때뿐이다.  청중은 본 것을 오래 기억한다.  확실히 이해하게 되고 마음을 열고 감동을 받는다.  그때에 결국 공감하게 된다.  즉 “사랑을 베푸는 삶이 기쁨을 갖게 하는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한다.

  넷째, 청중에게 주어질 유익에 대해서 말하라.

  설교자의 요청에 순응할 때 주어질 유익을 가급적이면 확실하게 밝히라.  그러면 설득된다. 

  설교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이렇게 하시면 영적으로 유익한 점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둘째…, 셋째…” 하면, 성도들은 “아하! 저런 세 가지의 유익이 있구나!” 하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잠깐만!

설교자는 성도와의 대화에서도 설득의 법칙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1. “예” 혹은 “아니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하지 말라. 흑백논리로만 이뜰지 말라는 것이다.

2. 상대방을 이해하고 의견차이를 없애는 대화를 시도하라. ’97년 1월 3일자 중앙일보에 가장 멋있는 남자의 조건 세 가지가 기사로 실렸는데, 그 첫 번째가 자신의 마음을 활짝 열고 상대방을 깊숙이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 상대방이 나의 생각이나 느낌을 잘 이해해준다면,

나는 곧 그 사람에게 푹 빠지게 될 것이다.  목회자가 꼭 가져야 할 덕목이 아니겠는가?

3. 상대방을 진심으로 자주 칭찬하라.  상대방을 칭찬해줄 때는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장점을 찾아 칭찬하라.  또 일의 결과보다는 과정중에 있을 때 칭찬하라.

4.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어라.  이야기하는 사람의 입장에 서서 이해해주면 좋다.


3장 전달과 소통을 가로막는 방법상의 요인들


13. 예화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라.

 적절한 예화 사용의 필요성

  예화는 구체적으로 어디에 필요한가?  예화를 사용하려 하기 전에 설교자는 반드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져야 한다. 

  우선 요점(설명)이 예화 사용을 요구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설명 자체가 이야기식으로 전개되었으면 또 다른 이야기식의 예화는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예화란 앞부분의 설명이 피상적이고 관념적일 때 이를 구체화시키고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사용된다.  그러므로 예화가 꼭 필요한가를 먼저 생각해보고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화가 왜 필요한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예화는 개요 혹은 요점을 분명히 각인시키는데 필요하다.

2. 예화 자체가 곧 청중의 삶에 적용할 내용이 될 수 있다.

3. 결단에 이르도록 행동을 촉구한다. 4. 진리를 확인시킨다.

5. 진리를 오래 기억하도록 만든다. 6. 장식으로도 쓰인다.

7. 청중들의 주의를 끄는 데 사용된다. 8. 다양한 청중을 쉽게 흡수한다.


예화 사용의 원리들

1. 예화가 들어갈 위치를 잘 선정하라. 2. 예화 사용을 서둘지 말라.

3. 예화가 설교의 주제나 본문 설명의 내용과 정확히 연결되어야 한다.

4. 지나친 예화 사용은 청중을 식상하게 한다.                            5. 예화 내용에 충분히 익숙해지라.

6. 예화 속에 나오는 본래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말하라.

  예화 주인공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라.  그래야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다.

7. 예화 속에 들어가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8. 예화 내용이 설교의 요점을 기억하게 만들라.

9.  예화에 대해 흥분하라.  설교자가 흥분해서 말할 때 청중도 실감하게 된다.

10. 예화의 주인공과 청중 자신을 동일시하게 만들라.    11. 일반적인 설명을 하기보다는 구체적으로 설명하라.

12. 사물보다는 사람에 대한 예화를 사용하라.        13. 이미지보다는 이야기로 설명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14. 감정과 논리로 동시에 호소하라. 15. 말하기보다는 보여주라.

16. 예화 사용은 점진성을 띠어야 한다.


14. 예화를 정확히 사용하라

예화를 정확히 사용하지 못한 설교의 예들

1. 주제에 정확히 들어맞지 않는 예화는 설교의 효과를 떨어트린다.

2. 예화의 핵심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라.

3. 긴장이 담기지 않은 예화는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4. 병렬식 예화 열거는 설교의 깊이를 나타내지 못한다.

  즉 같은 예화를 두 번씩 사용하는 설교는 점진적인 접근의 효과를 이루지 못한다.  단지 시간만 낭비할 뿐이다.  만약 설교자가 아래와 같이 설교했다고 하자.  무엇이 문제인지 발견해 보라.

  술을 많이 마신 탓으로 위장에 이상이 생겨서 입원하게 된 성도를 방문했습니다.  평소 그분을 뵐 때마다 “성도님, 술이 몸에 해로우니 멀리 하시지요.” 하고 권했습니다만, 그분은 “목사님, 끄떡없습니다.” 하며 언제나 저의 충고를 거절했습니다.  망가진 몸으로 누워 있는 그분에게, “성도님, 이번 기회에 술을 끊으시지요.” 했더니, “목사님, 목사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젠 술을 끊겠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언제나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것의 귀중성을 깨닫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제가 잘 아는 사람 가운데 아내와의 관계가 별로 좋지 않던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내에 대해서 늘 못마땅해했습니다.  이혼하면 자유를 누리고 편안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끈질기게 이혼을 요구하여 마침내 아내와 이혼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이혼한 지 몇 개월이 지난 뒤에 그 남자는 “그래도 이혼하기 전에 좋았고 아내가 있을 때가 좋았다.  그때로 돌아갔으면…”하고 후회했습니다.

  사람들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서야 비로소 그것의 가치와 귀중함을 깨닫습니다.  ….

  위의 예에서 무엇이 문제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뒤 그것의 귀중성을 깨닫는다.”는 사실을 밝히는 설교인데, 안타깝게도 같은 의미의 예화를 두 번이나 사용하였다.  같은 내용을 두 번씩이나 설명하면 그것은 같은 사상을 병렬식으로 열거하는 것일 뿐이어서 청중에게 점진적인 자극을 주지 못한다.  단지 설교 시간만 낭비하며 청중을 지루하게 만들 뿐이다.

  그러므로 같은 내용의 예화를 두 개 이상 사용하지 말라. 단지 하나만 사용하라.  그리고 빠른 템포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성도들은 빠른 템포의 설교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위와 같이 중복된 예화를 사용하지 않고 하나만 사용하여 빠른 템포로 진행하는 설교를 어떻게 만드는가? ‘밟고 올라서라’의 개념에서 이미 활용되었던 예를 이제 ‘빠른 템포로’의 개념 속에서 살펴보자.

■ A 단계

  미국에서 목회할 때입니다.  술을 많이 마신 탓으로 위장에 이상이 생겨 입원하게 된 성도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평소 제가 그분을 뵐 때 마다 “성도님, 술이 몸에 해로우니 멀리하시지요.”라고 권하고 했습니다만, 그분은 “목사님, 끄떡없습니다.”하며 언제나 저의 충고를 거절했습니다.  망가진 몸으로 누워 있는 그분에게, “성도님, 이번 기회에 술을 끊으시지요.” 했더니, 하는 말이 “목사님, 목사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젠 술을 끊겠습니다.”하고 진지하게 대답했습니다.

■ B 단계

  사람은 언제 깨닫습니까?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 귀중성을 깨닫습니다.  건강을 잃고 나서 건강의 귀중성을 깨닫고 가족을 잃고 나서 가족의 소중함을 압니다.  못마땅히 여기던 직장이지만 떠나고 난 후 그래도 그 직장이 생각납니다.  불만스런 교회를 떠났지만 지나고 보면 그래도 그 교회가 좋은 교회였음을 깨닫습니다.  이처럼 당하고 나서야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안타깝지요.  그러나 당하고 나서도 여전히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당하고 나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당하고 나서 깨닫는 사람도 아닙니다.  당하기 전에, 일을 그르치기 전에 미리미리 불행의 원인을 막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건강에 이상이 오기 전에 미리 대비하는 사람이며 가정에 위기가 닥치기 전에 미리 손을 쓰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성도는 교회생활에서의 불만이 더 커지기 전에 감사로 바꾸려는 의지를 지닌 사람입니다.

■ C 단계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귀중한 것을 잃지 않고 재난을 미리 막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박영재 설교)

  위의 예는 빠른 템포로 느껴진다.  내용 전개가 제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화를 소개한 직후 일반적인 적용에서부터 행동을 요구하는 적용으로 빠르게 움직여가고 있기 때문에 성도들이 신선하게 느낀다.


예화를 건전하게 사용하기 위한 7가지 질문

(웨인 하비, 「설교 예화를 건전하게 유지하기 위한 7가지 질문」)

첫째, 다른 사람의 경험을 나의 경험이라고 거짓으로 소개하지 않는가?

둘째, 예화를 사용하는 중에 ‘전에 있던 교회의 성도’라는 표현을 사용하는가?

셋째, 이 예화가 과연 정확한지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넷째, 이 예화가 성도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는 않을까?

다섯째, 이 예화가 이 성도들에게 적절한 예화인가?

여섯째, 이 예화가 혹 지나치게 상세한 것은 아닌가?

일곱째, 나는 실화와 상상을 확실하게 구별하고 있는가?


15. 하나님을 경험하게 만들라.

  설교는 청중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얼마나 크고 감동적인지를 청중들이 설교 속에서 체험하도록 해야 한다.  인간의 허물과 죄성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깨닫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설교가 청중이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만끽하게 하는 하나님 중심 또는 예수님 중심의 설교이어야 한다.  특히 설교 속에서 청중들이 항상 하나님의 속성을 직접 경험케 해야 한다.


설교가 왜 하나님 중심이어야 하는가?

  성경은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물론 신앙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가 나오고 숱한 나라들과 영웅들의 이야기도 나온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다양한 문학 형태, 즉, 시, 서사문, 서신, 지혜서 등의 다양한 문학의 종류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성경 속에는 신앙에 관련된 주제가 다양하고 그 표현도 가지각색이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일관되게 흐르는 것이 있다.  그것은 성경이 끊임없이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서, 인간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서, 장차 다시 오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속성과 역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동시에 그러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세세히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설교는 오직 하나님을 드러내며 그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었던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밝혀 주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설교의 흐름을 구속사적 설교라고도 한다.


하나님 중심으로 전개하지 못한 설교의 예들

 

 나는 설교 초기 사역중에 여러 가지로 부족한 면이 적지 않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구속사적인 개념이 분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요셉이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을 제목으로 세 가지 주제를 설교했다.  첫째, 요셉은 겸손하였다.  둘째, 그는 진실하였다.  셋째, 그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가만히 살펴보면, 이 세 가지는 신앙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누구든지 지닐 수 있는 덕목이었다.  또한 이를 소개한 설교 역시 하나님의 존재를 부각시키지 않더라도 들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이 빠졌다.  하나님의 현현을 드러내는 일에 결정적인 결여가 생긴 것이다.  즉 요셉의 겸손과 진실함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어떠했는지를 밝히지 못한 채 요셉의 겸손과 진실함을 본받자고만 강조했다.  또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 속에서 그의 겸손과 진실함이 다듬어졌다는 사실과, 그 신앙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할을 드러내지 못했다.  게다가 그의 꿈은 자신의 노력이나 인내를 통해서 이뤄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 가운데 이뤄졌음을 밝히는데 미약했던 것이다.

  우리가 성경 본문의 주인공을 다룰 때는 항상 하나님의 역할과 계획, 그리고 속성을 균형있게 다뤄야 한다.  그렇게 해야 바람직한 설교가 된다.

  다윗의 경우를 더 살펴 보자.

  다윗은 그의 삶 가운데 정말 치욕적이고 씻기 어려운 큰 죄를 지었다.  그럼에도 그는 구약의 가장 위대한 인물로 우리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 있다.

  이 설교의 나머지 반은 인간 다윗이 죄를 저질렀을 때 하나님이 어떤 반응을 보이셨는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결국 죄인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날카로운 분노, 회개했을 때 받아주시는 한없는 용서와 자비를 적나라하게 나타내야 한다.  하나님 편과 인간 편을 동시에 드러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동시에 죄지은 현대인들에게 우리 주님은 어떤 은총과 용서를 베푸시는가에 대한 내용, 즉 십자가의 사건을 다뤄주는 것이다.  결국 다윗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지만, 성도들이 십자가의 사건에 감격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중심, 예수님 중심의 설교이다.

  결국 어떤 주제를 전하든지 간에 하나님(예수님) 중심의 설교가 되어야 한다.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신 은혜를 경험하게 하라.  동시에 우리 주 예수께서 성도들에게 베푸신 사랑과 희생, 그리고 그분의 인격을 직접 만날 수 있도록 하라.  성도들을 그분의 은혜 앞에 굴복하게 하라.  그 은혜를 체험하고서 결단을 내리게 하라.


16. 감각있는 설교를 위해 커뮤니케이션의 7대 원리를 적극 활용하라

상대를 향해 마음문을 활짝 열고 그를 깊이 이해하라

  ’97년 정초에 가장 매력적인 한국인의 남성상에 대해 소개한 기사가 모 일간지에 실린 적이 있는데, 나는 아직도 그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  그 기사는 가장 매력적인 남성을 ‘상대를 열린 마음으로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나는 이 사실에 퍽 깊이 감동했다. “그렇다. 목회자도 바로 이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자신을 스스로 비판해볼 때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상대를 이해하는 데 소극적인 모습도 있다.  마음 씀씀이의 폭이 넓지 못할 때도 종종 있다.  그런 나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그 문제만을 들고 주님께 무릎을 꿇는다.  설교자가 좁은 마음을 가지고 청중들에게 넓은 가슴을 가지라고 역설하는 설교를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상대를 향해 적극적으로 마음을 열라.  그리고 그 상대를 깊숙이 이해하려고 노력하라.  상대방에게 설교자의 모습이 매력적으로 비쳐질 것이다.


상대의 감정에서 느껴보라

  사람은 자기 중심의 삶을 산다.  무엇을 하든지 간에 자기를 우선시한다.  그러므로 상대의 감정에 대해서 무지하거나 무감각해지기 쉽다.  그러나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나의 입장 이전에 상대방은 어떻게 느끼는지를 먼저 생각해봐야 한다.  그러면 ‘그럴 수 있겠구나.’라고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꽤나 다른 차원, 즉 그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알게 되고 느끼게 된다.  동시에 이는 사람을 알아가는 데 혹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설교자는 바로 이런 폭넓은 감정이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상담이나 설교를 위한 청중 이해도 좀더 분명해지는 것이다.


객관적 입장에서 말하라

  객관적 입장은 항상 상대에게 신뢰감을 갖게 해준다.  주관적인 입장은 가치가 적고 사람들의 호응도도 낮다.  그러나 객관적인 입장에서 사물을 보고 평가하는 노력은 사람을 설득시키는 힘을 갖는다.  우리의 설교가 ‘예수쟁이의 설교’, 즉 기성교회 성도들만 알아 듣는 주관적 언어들의 모음이 되어서는 안된다.  불신자조차도 이해시키는 감동을 줄 수 있는 객관적 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특히 서론에서의 출발이 그러해야 한다.

  주관적인 관점의 표현은 상대를 이해시키기 어렵다.  사람들은 객관성에 기초한 내용에 더 신빙성을 두기 때문이다.  결국 설득의 힘이 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에서나 대화 속에서도 언제나 객관성을 띠려고 노력하라.


긍정적 표현의 위대성을 알고 행하라

  긍정적 표현은 사람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부정적 표현은 청중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다.  사회가 현대인들을 긍정적인 자세로 살아가도록 만들지 않는다.  목사는 사람들을 선한 길로 인도해야 할 위치에 있다.  이런 위치에 걸맞게 설교자는 사람을 대할 때 항상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모습으로 대해야 한다.

  부정 : 저는 제목설교를 싫어합니다.

  긍정 : 저는 제목설교보다 강해설교를 선호합니다.


  부정 : 하나님은 육신적 삶을 사는 성도를 싫어하십니다.

  긍정 : 하나님은 육신적 삶보다 영적인 삶을 사는 성도를 귀히 여기십니다.


자신감을 표현하라

  나는 아내나 자녀들에게 중요한 말을 하고자 할 때, 지나가는 말투로 하거나 아무 때나 말하지 않는다.  나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한 뒤 대화를 시도한다.  이러한 시도는 매우 효과가 크다.  전도할 때도 마찬가지다.  복음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살핀 후에 말을 건네는 것이 좋다.  그런데 문제는 대화를 위한 때와 장소도 중요하지만 대화를 시도하는 사람의 담대한 태도, 즉 자신감의 표현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매사에 자신감을 가짐으로써 상대방이 호감을 갖게 하라.  자신감의 표현은 상대방이 확신을 갖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자신감이 자만함으로 나타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설교에서는 더더욱 필요하다.

 

친밀함을 나타내라

  상대방에게 집중하면서 대화를 시도하라.  이는 전도나 상담하는 일에서 상대방에게 호감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친밀한 언어나 몸짓, 태도는 상대방의 마음을 금방 녹일 수 있다.  따스한 마음으로 친밀함을 나타내는 태도가 중요하다.


상호 작용을 조절하라

  대화에서 한 쪽만 너무 많은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상대방만이 너무 많은 말을 하거나 목회자만이 너무 많은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쌍방간에 균형을 이루도록 하라.  이런 관점에서 설교도 일방적으로 전달하려고 하지 말고 대화하듯 접근하는 것이 좋다.  결국 질문을 적절히 던짐으로써 상호작용을 조절하는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는 것이다.


17.  설교감각을 키우기 위해 5단계 기초 커뮤니케이션 이론에 익숙해지라


  첫째, 주의를 끄는 데 관심을 가지라.

  청중들의 삶에 변화를 주기 위한 최초의 작업은 청중의 주의를 집중시킴으로써 일어난다.  설교자는 청중의 주의를 사로잡아야 한다.  만약 설교자의 말에 청중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들에게는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한국 설교자들의 설교를 분석해보면, 상당수의 설교자들이 서론을 무시하고 있다.  즉 청중의 주의를 끌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청중에게 설교를 듣지 말라는 것과 같다.  TV 채널 선택을 놓고 머뭇거리는 데 사람들은 3초 이상을 소모하지 않는다.  재미없으면 즉각 다른 채널로 바꾼다.  손가락이 상당히 빠르게 움직인다.  이처럼 청중은 어떤 채널을 계속 볼 것인가를 처음 몇초 만에 결정내린다.  설교가 시작된 후 30초 안에 청중의 주의를 끌지 않으면 그들은 설교에 흥미를 잃는다.  그리고 딴 생각에 잠긴다.  결국 실패한 설교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 서론에서 청중의 주의를 끌려고 최선을 다하라.  하나님이 주신 창의력으로 청중의 주의를 끄는 방법을 창조하라.


둘째, 이해시키라.

  이해를 시켜야 할 쪽은 청중이 아니라 설교자이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설교자들이 청중에게 진리를 이해시키지 않고, 즉 ‘청중이 이해를 하든지 말든지 단지 나는 외칠 뿐이다.’ 하는 식으로 설교를 하고 있는가? 이런 태도로 설교하면 청중이 설교를 이해할 확률이 매우 희박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설교자의 말을 잘 이해시켜야 청중이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키려 시도해보지 않겠는가?

  청중을 존중하고 배려해주는 의식이 없고서는 설교를 잘 전달하여 이해시킬 수 없다.  청중을 이해시키려는 진지함이 있을 때 설교가 발전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좀더 알아듣기 쉽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설교자로부터 설교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청중의 관점과 수준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기억하라.

  셋째, 동의를 구하라.

  우리의 설교는 청중을 이해시키는 차원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이해의 차원을 넘어서 그들이 설교를 들으며 ‘그렇습니다. 하나님!’하고 동의하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설교에는 청중의 동의를 얻어내려는 분명한 목적이 세워져야 하며, 청중이 자신들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가 담긴 설교를 전해야 한다.  동의릉 얻지 못한 설교는 아무런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넷째, 기억에 오래 남게 하라.

  청중이 설교를 분명히 기억해야 그 기억한 말씀을 통해 영적으로 자라날 수 있기 때문이다.  받은 말씀을 기억해야 결단으로 이어질 수 있다.  받은 말씀이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면 설교의 효과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설교들이 그 내용을 금방 잊어버리게 만드는 설교인가?  핵심이 없는 설교 주제자 분명하지 않은 설교 여러 아이디어를 한꺼번에 주입시키려는 설교 등은 청중들이 교회를 나서기도 전에 잊혀지고 마는 설교이다.  또한 도전을 주지 못하는 얄팍한 설교도 청중들은 금방 잊어버리고 만다.  설교자 자신조차도 금방 잊고 만다.  강한 도전을 주면 그만큼 인상 깊은 설교, 잊지 못하는 설교가 된다.  그러므로 설교를 듣고 청중들이 오랫동안 기억하게 만드는 인상깊은 설교를 전하려고 노력하라.


다섯째, 행동으로 옮기게 하라.

  청중들이 진리를 이해하고 동의하며 또 선명히 기억하게 된다 해도 기억한 그 내용을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단계가 없이는 여전히 불완전하다.  설교의 목적이 태도나 행동에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데 있다면, 주의를 집중시켜 진리를 이해하고 동의하게 하며 동시에 잘 기억케 하여 마침내 결단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강력한 깨달음, 강력한 도전, 강력한 자극을 줄 수 있는 내용을 전해야 한다.  행동으로 옮기게 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결국 우리의 설교는 즉흥적인 결단만을 내리게 만드는 설교가 아니라 가슴속으로부터 감격이 우러나게 하는 도전적인 설교가 되어야 한다.  설교의 목표가 낮으면 청중이 결단하기 어렵다.  설교의 목표가 너무 앞서면 청중이 따라가기 힘들다.  그러므로 실천에 옮길만한 적당한 목표를 세우되 반드시 행동에 옮길 만한 자극이 깃들게 설교하라.



18.  무릎으로 설교의 힘을 키우라


  설교에 왜 무릎이 뒷받침되어야 하는가?

  지난 ’97년 10월에 개최된 연신 목회자 포럼의 주제는 ‘한국교회 설교 진단’이었다.  이 강의에서 김종렬 목사는 한국교회 설교의 총체적 위기를 강조하였다.  그 위기의 원인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설교자 자신에게서 비롯된 문제였다.  실로 충격적이고도 놀라운 사실이다. E.M. 바운즈도 「설교의 능력은 기도에 있다」(도서출판 하나)라는 그의 책에서 “설교의 가장 큰 장애 요인은 설교자에게 있다.”고 천명하였다. 아무리 열심히 설교해도 변화되지 않고 삶의 탐스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성도들을 바라보며 설교자들은 참담할 뿐이다.

  이처럼 우리의 설교가 권위를 잃고 허약해져가는 것은 설교의 기술이 부족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전달방식이 구식(old style)이거나 신학지식이 모자라기 때문만도 아니다.  다듬어지고 완성된 인격 속에서 흘러나오는 설교가 없기 때문이다.  거룩함과 신실함에 있어 위대하고, 사랑에 있어 위대하고, 믿음에 있어 청중을 감동시킬 만한 위대한 설교자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청중들은 “설교자 당신이나 나나 똑같은데 무얼 그리 열을 내면서 가르치느냐?” 란 태도로 설교를 대한다.  근본적인 설교자의 변화가 없는 한 청중들에게 감동을 줄 만한 설교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우리 설교의 총체적 위기는 기술이나 지식의 문제보다 설교자 자신의 문제에 있다.  이는 설교자 자신이 새롭고 더 나은 수준으로 발돋움하지 않으면 청중을 감동시킬 메신저로 쓰임받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전인격적 수준을 높이는 것이 급선무다.  이를 위해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가 바로 자기 자신을 향한 가장 강력하고도 날카로운 도전이 되게 해야 한다.  설교자가 가장 어렵고도 섬세하며, 힘겹고도 철저하게 벌여야 할 싸움은 바로 자기 자신을 상대로 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설교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사실(하나님께서 설교자를 통해서 하시지만)을 기억한다면, 자기 자신을 먼저 올바로 돌아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의 설교가 설교자인 나 자신을 향한 날카로운 설교가 되게 만들 수 있을까?  무엇이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한 차원 더 높게 끌어올려 줄까?  그것은 바로 기도이다.  결국 기도가 사람을 만들고 변화시키며, 설교자 자신을 향한 날카로운 도전이 되는 설교를 낳는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데 철저한 기도, 자신의 게으름을 날카롭게 발견하려는 기도가 있는 설교자가 인격이 새로워지고 설교도 인격이 담긴 내용을 만든다.

  나는 한동안 기도를 게을리했다.  그랬더니 학교 강의중에 종종 헛말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목회자 세미나에서 감동을 주고 도전을 줄 만한 내용이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나 자신도 모르게 영적인 사람에서 세속적인 사람으로, 다듬어진 인격에서 흐트러진 인격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다.  아찔했다.  아내와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상의했다.  깊은 기도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는 데 공감했다.  참으로 두려웠다.  깊은 기도가 없는 강의, 깊은 기도가 뒷받침되지 않는 설교, 무릎으로 하지 않는 목회를 쓰시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경고였다.  자신을 살피는 예리한 통찰력이 담긴 기도는 설교자 자신을 변화시키고 청중을 변화시키고 성도들을 변화시킨다.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가?

  어떤 기도가 이렇게 목회에서 신실하고 설교에서 감동적이며 인격을 성숙하게 만드는 기도인가?  깊은 기도뿐이다.  형식적이고 짧은 기도는 결코 이런 기도의 맛을 보게 할 수 없지만, 깊은 기도는 설교자 자신을 바꾸며 설교에 힘을 더하고 성도들과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제 한다.


  우리는 깊은 기도 속에서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  여기 우리 설교자 자신의 회개와 영적 회복을 위한 기도 제목들이 있다(아래의 질문들은 바운즈의 책 「설교의 능력은 기도에 있다」에 나오는 내용을 편집한 것이다).

  1. 칭찬과 높은 지위를 갈망하는 설교자가 스스로 아무 명예도 취하지 않으시고 종의 형상으로 오신 그분을 전할 수 있겠는가?

  2. 교만하고 허영심이 가득한 사람이 온유하고 낮아지신 예수님의 인격을 전할 수 있겠는가?

  3. 정욕적이고 이기적이며 세상적인 사람이 허영을 멀리하고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박힐 것을 명령하며, 오래 참음과 자기 부인, 부드러움으로 가득찬 믿음의 세계를 전할 수 있겠는가?

  4. 돈을 헤아리는 탐욕스런 사람이 자기 생명을 버릴 것을 요구한 주님의 명령을 전할 수 있을까?

  5. 학위에 매달리는 설교자들에게 그리스도와 바울의 정신을 가지고 요한 웨슬리처럼 “나는 내가 받은 세상의 인정을 배설물과 찌꺼기로 여긴다.  나는 그것을 거리의 진흙구덩이처럼 여긴다.  나는 그것을 갈망하지도, 추구하지도 않는다.” 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6. 풍족함을 추구하는 습관적인 목회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생명까지 주신 그리스도를 닮는 희생의 삶을 살자고 감히 외칠 수 있을까?

  위의 질문들은 결국 설교자가 지금 어느 자리에 있으며 어떻게 얼마나 달라져야 하는가에 대한 기준을 제시해준다.  자신의 세속적인 모습을 도려내고, 하늘로부터 신령한 것들을 채우기 위한 몸부림이 깊은 기도 속에서 이뤄지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쓰실 것이다.


기도해야 하는 내용들

1. 자신 속에 있는 세속적인 요소를 분리해내기 위해 기도하라.

2. 설교 전에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기 위해 기도하라.

3. 진지하게 말씀을 연구하기 전에 말씀을 깨닫고자 하는 간절함으로 기도하라.

4. 세상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넓히고자 기도하라.

5. 사건이나 사물을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분석할 수 있는 통찰력을 갖고자 기도하라.

6. 형식적이거나 짧은 기도가 아닌 정성이 담긴 깊은 기도를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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