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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전문정보 ()  작성일  2007-05-24
 제목  교회론(ecclesiology)
 주제어키워드  조직신학 교회
 자료출처  김강호 목사  성경본문  
 조회수  4840  추천수  29

구약 때는 모세를 통해서 체결 하셨으면 신약 때는 친히 자기 자신이 오셨다. 구약 같은 중보자는 이제는 없다. 구약 때는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 하셨는데 신약 때는 친히 그분이 열두 제자를 자기 상에 부르시고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구약 때같이 그런 간격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메세야 시대 신령한 교제는 그의 백성의 위에 높은 조직은 둔 그런 조직을 가지고 있지를 안해요.
 교회를 봉사하는 은혜의 직무가 있어도 그 직무가 분명히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되어도 그것까지라도 교회의 선출을 통해서 항상 부르심을 받는다. 왜 교회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완성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기독론적인 의미로 해석을 해라 그 말이다. 


 여러분에게서는 정신적이고 육체적이고 그렇게 이분화 시키면 안된다. 요한 복음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 그 말은 그전에는 여기 저기서 경배하던 것을 이제는 아무데서나 예배하라 그런 말이 아니다. 이것은 메시야 시대 예배라 그런 말이다. 메시야가 오시면 이 예배를 알려 줄 것인데 내가 그로라 그렇게 말하고 있다. 메시야 시대는 모세 제도적인 이산 저산에서 예배하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안에서 예배하는 새로운 시대가 왔다 그런 말이다.
 그러니까 교회를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중심해서 교회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모세 시대 교회는 누구를 통해서 해석이 되어야 합니까 구약 교회는 모세를 통해서 해석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종의 교회고 신약 교회는 그런 교회가 아니다. 메시야의 교회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교회다. 그렇게 했을 때 교회의 의미를 바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약 교회의 본질은 무엇이냐?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새 인류가 교회다. 구약 개념을 거의 도입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또한 단절을 말해야 된다. 구약 교회라는 것은 그냥 교통하는 문제보다도 하나님이 그들중에 거하시기 때문에 거룩한 성회고 곧 하나님의 나라다. 그것이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한 성취로 영광의 보좌에 함께 앉은 영광의 질서로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신약 교회는 단순히 성도들의 외면적인 교제 문제가 아니라 영광의 보좌에 계신 그분과 함께하는 새 인류다. 그것이 교회다.
 그 교회 본질로부터 교회의 조직이나 모든 문제들이 해석되고 비쳐져야 되지 우리 현상적인 문제를 가지고 교회를 해석할려고 하면 안된다. 그러니까 구속역사 곧 기독록적인 해석을 해라 그 말이다.

 창조목표로서 교회를 말하기 때문에 구원 역사에서 나타난 여러 교회에 대해서 물었다. 이런 교회에 대한 개념을 알면 신약 교회의 의미를 그냥 정의 할것이다. 교회는 탁월하다. 그렇게 했을 때 교회의 정의나 본질을 쉽게 정의 할 수 있기 때문에 구원역사에서 나타난 교회의 정의를 어떻게 했는가 그렇게 물었던 것이다.
 물론 여러개 말할 수 있지만 성경에서 구체적인 교회의 언어를 쓰는 것은 노아 교회가 있다 .그리고 모세에게 속한 교회가 있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교회가 있고 언어적으로 정의되면 그렇게 될것이다.
 그러나 그런 언어적인 정의가 없다고 할지라도 항상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심은 교회 개념이다. 역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왜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생명의 교제로 함께하심이 인류의 생명이기 때문에 전부다 그런 의미로 교회적인 의미다. 교회라는 단어가 붙었던지 말았던지 교회적인 의미다.
 그러면 시대마다 나타난 교회의 양상들이 다르다. 물론 구약에서 여러 양상들을 이야기 한다 해도 하나로 묶으면 구약 언어는 항상 모세 언어로 해석을 해야 한다.
 언지든지 역사가 완결 된 시점에 그 이전의 역사의 의미가 밝혀지고 밝혀지기 때문에 해석되는 역사다. 그래야 그것이 완전한 성취로 누려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역사는 그런 의미로 항상 완성점에서 뒤를 돌아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구약 시대 하나님 나라의 출발은 아브라함부터 시작해도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약속의 성취는 드디어 모세 때 완성되고 시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항상 모세젝인 언어로 구약을 읽어야 한다.
 우리가 기독록적인 해석을 한다고 하는 것은, 구약에서는 모세를 읽어라 그 말이이다. 그 의미를 이해를 하기 바란다. 구약에서 모세가 그런 위치에 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신약에서 완성된 빛가운데서 성경을 해석한다는 말은 그래도 많이 받아 들이는데 창세기 같은 것은 모세 언어로 읽으라고 하면 이해가 잘 안됐던 것이다.
왜냐하면 창11장 까지는 항상 고대 역사철학 개념을 가지고 있다. 옛 날 이야기구나. 그러나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부르신 이 의미가 이전 역사에서는 어떠 했는가. 모세가 그것을 밝혀 주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포괄하고 있는 역사가 아무리 넓어도 애굽왕과 바벨론이다. 그 이상을 안넘어간다. 그러면 아브라함 이전의 고대 세계에서 하나님 나라의 범위는 어디 까지냐. 창세기 처음에도 강이 흐르는데 바벨론하고 구스와 애굽까지다. 그 영역이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로는 아담을 에덴 동편으로 쫒아 낸는데 제일 처음 입국한 사람이 아브라함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 성소로 설립하시는 것이지 장소를 옮기는 법은 없다. 장소를 옮긴다는 개념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들이 바벨론 지역이니 에덴이니 고대 역사 발전이니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나안 땅이 에덴이다. 그런 유형적인 구조를 항상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에덴에 흐르던 강이 구스까지 흘렀고 그 다음에 티그리스로 흐르고 있잖아요? 그런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부르는데도 애굽에서 부른다. 바벨론에서 불렀고 애굽에 내려갔다가 다시 오게 했고 이스라엘 백성이 돌아온 장소는 항상 양쪽이다. 그렇다.
 항상 구약 구조가 그렇게 되어있다. 그러니까 그 조상들안에 그 후손들은 부름을 받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러냐면 모세 언어로 이해를 하면 창세기 2장의 에덴의 구조를 그냥 해석이 된다. 성소 구조로 그러나 모세 언어를 빼버리고 읽으려고 그러면 이제 성소 고고학을 해서 바벨론을 인류 문화의 유입을 찾아야 되고 가나안 땅의 의미는 없고 하도 더러우니까 더 깨끗한데로 왜 본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그렇게 옮긴 것처럼 해석을 한다. 아브라함이 범죄한 옛 세계에서 제일 처음 구조다. 에덴에서 하나님 발자국 소리가 들렸던 이래로 하나님을 대면하고 소리를 듣고 하나님을 예배하던 자가 아브라함 뿐이다.
 그런데 그 분이 오시도록 까지 과도기적으로 시행된 것이 범법함을 인해서 더한 것이 모세 시대다. 죄에도 불구하고 그 경륜이 집행 된 것이다.


 그러니까 기독론적인 해석을 한다는 의미를 우리가 잘 이해를 해야한다. 모세 언어로 오경을 해석하고 다윗까지 해석을 해라. 왜 모세 때 그 경륜이 집행이 됐으니까. 지금 우리가 예수의 종말 까지라도 예수이 부활로 해석을 해야 한다. 그분의 부활을 떠나서 종말을 해석하면 절대로 안된다. 그러니까 아무리 다윗 시대가 탁월해도 모세 경륜 아래 있다. 그러니까 모세 언어로 다윗 왕국까지 다 해석을 해야한다. 그런데 우리들이 그 개념을 잘 안가진다.
 옛날 은혜 받은 것이 많아서 일괄적으로 해석을 하지 못한다. 제일 안타까운 문제가 법정적인 문제다. 왜냐하면 성경이 정죄한 것이라 그냥 알 수가 있는데 그것을 모른다. 그것은 성경에서 정죄한 이야기다. 하나님을 우리가 인격적으로 누려야 되지 사변화 되어서 그렇게 이론적으로 하면 안되거든.
 하나님은 몇가지 훈계로 우리에게 오지를 않고 하나님 앞에 함께 살고 누리고 나타내도록 온 분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관계적인 의 문제를 많이 강조를 했어도 성경의 근본 틀을 바꾸지를 못했다. 신앙관 때문에 그렇다. 항상 거기다 강조를 두면서도 하나님이 거의 사변화 되었다. 하나님을 실제로 대면하고 두려워 하고 그런 것인데 나중에 어느날 보니까 서박사 성령론이 있더라고요. 율법을 다 지킨 공로로 성령이 오셨다고 그런다. 어째서 그전에는 그것이 안 보였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진짜 완전히 틀린 이야기다. 나중에 보니까 신앙고백서의 틀이 전부 그렇게 되어있었다. 처음부터 완전히 틀려 있다. 그런데도 눈에 안 띄었다. 그러고 보니까 그전 신앙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성경 자체가 관계적인 문제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성취지 법정적인 의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밖아 죽였으니 그 사람들 개념이다.


 당신이 하나님께로 왔으면 율법을 지켜야 될 것이 아니냐. 안 지키면 가짜라 그런데 우리는 조금 좋아졌다. 유대인들은 가짜로 지키면서 진짜 지키는 분을 몰라 봤는데 우리는 진짜로 지킨 양반을 안다. 그러니까 개념은 똑 같다. 율법을 지켜라. 전부 그런 개념이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말하는것은 누구든지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면 저주 아래 있느니라. 그러면 어떻게 해석을 했냐. 아무도 율법을 지키지 못 지키냐 못 지키니까 저주밖에 못 받지 만일에 그것을 지킬 수만 있으면 될 것이 아니냐. 오직 예수 한분이 이겼으니까 이렇게 돌아서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율법을 잘 지켜도 저주 아래 있다. 왜 반복되는 피흘림으로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까지라도 벗어 날 수 없다. 그 말이다.
 이것만 열리면 성경은 전혀 다르게 열리고 그럴 것이다. 우리를 보면 정상 참작을 하고 기다려야 할것이다. 직관적인 정죄는 못하겠지? 복음이 틀렸다는 정죄는 가능하다. 고치기 전까지는 나는 그전에 그랬으니까 당신도 그만하면 괜찮다고 그런 말을 하면 안된다. 단지 우리가 그랬기 때문에 형제를 애정으로 대한다 뿐이지 나도 그때 진짜였는데 그랬다고 지금 그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 해석은 해석이지 내 수준에 맞추어서 당신도 괜찮다고 그런 말 하면 안된다. 그틀을 벗어나기 전까지는 교제하기 어렵다. 직관적인 정죄는 우리가 할 수 없다.그러나 말씀을 따른 판단을 우리가 하는 것이다. 그런 애정을 가지고 기디려야 한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관계적인 의는 알겠는데 그래도 원수된 관계를 화해 시킬려면 무엇인가 예수님이 일을 해야 할것이 아니냐. 그 일이 무엇이냐? 피해자는 하나님이 아니냐 피해 보상을 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언약 파괴는 보상이 아니라 죽음밖에 없다. 달리 회복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법적인 관계로 보상하냐 마냐 하나님하고 계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은 없다. 처음부터 창조주의 생명의 역사다. 그 생명의 역사가 완결점에 도달했다. 이 하나님께로 돌아와라 하는 초대이다.
 그런 문제들이 어려울 것이다. 구원 역사에 나타난 여러 교회들은 그런 의미로 다 임마누엘적인 의미다. 그 의미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완결되었다. 여호와의 교회는 가리우고 모세를 대표로 해서 함께 했는데 이제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가 친히 자기 백성을 영광의 보좌에서 대면하고 함께 계신다. 그것이 신약 교회다.
 그러니 구원 역사의 경륜을 따르면 두 개로 나눌 수가 있겠지요? 그런데 노아의 교회를 들자면 노아에게 속한 교회지요? 모세의 교회는 모세에게 속한 교회다. 그리스도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교회다. 그분이 교회의 머리이신데 곧 하나님이시다.


 그것이 신약 교회에서 설명하는 하나님이시다. 구약 교회의 머리는 하나님은 아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일이 대표자에게 이루어졌어도 하나님은 아니다. 신약에서 그분이 친히 오셨고 이제는 가리움이 없다. 그런 의미로 신약 교회가 설명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교회라고 말을 하면서도 더 탁월 하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그런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세와 같은 종이 아니라 모세의 하나님이시다. 모세 교회는 장막에서 가리우고 함께 했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영광의 보좌에 함께 앉고 우리의 생명이 예수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인바 되었다. 감추어져 있다 그 말은 세상에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뿐이지 비밀이다 그런 말이 아니다. 아직 세상에서는 예수께서 영광중에 나타나지 않했다. 그런 의미로 감추어져 있다.
 특별히 율법 시대의 교회는 교회라는 말을 같이 썼다. 교회는 모세에게 속한 교회다. 복음 시대의 교회는 예수께 속한 교회다. 모세는 종이다. 예수는 집 맡은 아들이다. 모세 교회는 가리운 가운데 임마누엘로 계셨고 신약 교회는 가리움이 없이 하늘 보좌의 영광으로 함께 계신다. 교회는 함께 하심이 강조다.
 그러니까 교회에 대한 용어도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전, 구약 언어를 쓰고 있다.
 에베소서에는 비밀이다고 말한다. 몸으로 이야기 한다. 물론 딤전에 가면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런 용어는 어떨 때 그런 용어를 써야 되겠는가? 지금 디모데는 이단과 싸우고 잇다. 그런데 그 용어를 쓸때도 그 책에 목표에 맞춰지게 조절된 표상들이다. 에베소 같으면 하나님의 전, 그리스의 몸 머리와 몸의 관계, 그런 관계로 써야 한다.
 디모데서에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그렇게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진리의 기둥과 터는 단순한 교리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새 인류의 터가 사도들이 서 있고 그것이 교회다. 교회를 떠나서는 하늘에 속한 진리를 모른다. 그래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런 것도 구약의 성소 개념이다. 구약이 성소 개념을 그대로 가지고 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에 대한 그런 언어들도 보면 거의 다 구약 언어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연합 개념, 함께 동거한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교회의 여러가지 성격해가지고 전투적 교회, 승리적 교회를 구분한다. 유형교히 무형교회, 유기적으로서의 교회 조직체로서 교회 그 다음에 교회 정의가 있다.


교회 정의를 보면 따로 따로 나누어서 정의를 해 났다.

 무형교회: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부름을 받은 피택자의 단체 혹은 신자의 단체.
 유형교회: 믿는자의 단체.
여기 보면 더 재미 있는 것이 있는데 이 두 정의는 전혀 같지 않다. 왜냐하면 무형교회의 흐름에 의하면 유형적 조직적 표현이 못하는 것에 있고 혹은 거기서 제거 되는 수도 있다. 그리고 유형교회에 속하는 사람들중에는 위선자가 있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지체를 형성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상학적으로 정의하고 있는 것이지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를 정의하는 개념이 아니다. 이런 개념을 가지니까 설교하면서 이중에 가짜도 있다고 설교하는 것이다. 하나님만 아신다고 그러면 교회가 아니다. 그렇게 하면 안되고 우리는 모른다. 그런 이야기를 할것도 없고 우리는 교회의 본질에 대한 정의만 하면 되고 거기만 봉사하면 된다.
 그러니까 이런 의미로 무형교회와 유형교회로서 무형교회는 피택자들의 총회, 유형교회는 신앙 고백자들의 총회, 그런데 무형교회는 피택자들의 총회이기 때문에 가짜는 있을 수 없고 진짜만 있고 유형교회는 고백자들의 총회이기 때문에 가짜 고백자들도 있다. 진짜도 안들어 온 사람이 있고 가짜도 들어온 사람이 있다. 그런 정의를 할려면 정의를 안해야 된다. 


 그런데 무형 교회와 유형교회를 그렇게 나누면 안되고 교회 무형적인 면과 유형적인 면이 있다. 무형적이고 유형적인 문제는 그냥 눈으로 보이냐 안보이냐 정신적이냐 하나님 아시는 내적인 고백 교회에서 입술로 고백하는 형식상 고백, 이런 구분으로 나누어서는 안되고 교회가 시간 질서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한꺼번에 나타나지를 안는다.

 그런 면으로 소위 무형 교회 했을 때 포괄적인 의미를 가져야 되고 유형교회는 그 무형교회가 시간과 공간의 질서에서 구체적인 양태로 나타났을 때 그것을 유형교회 그렇게 정의를 내려야 한다.
그러지 정신적인 문제 외적인 문제, 정신적인 것은 진짜고 외적인 것은 가짜도 있을 수 있고 이런 정의는 전혀 옳은 정의가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의는 유형교회는 그런 의미로 안보이는 신령한 면 또 유형교회는 구체적인 조직으로 조직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그런면 그렇게 구분을 해 놨다.
 이것은 소위 목회적인 구분이다. 우리는 고백된 것은 진리라고 받기 때문에 세례를 주는 것이지 이 사람이 말로는 해도 가짜일 것이다.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진짜 목회도 못하고 이런 일을 가지고 자기는 조그만 안되면 저 사람은 고백은 했어도 유형교회에 속했구나 이렇게 하는 것이고 그리고 어떤 사람이 신앙고백도 하지 않고 병석에 그냥 아슬 아슬하게 예수 믿냐고 물으니까 고개를 끄떡 끄떡하고 죽었다.
그러면 이제 교회는 그런 장례식 용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봉사하는 새 인류의 단위로서 교회 그것에 대한 문제지 아슬 아슬하게 그 사람이 죽었을 때 구원 받냐 안받냐 이 문제를 위해서 성경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봉사했던 것처럼 하나님과 생명의 교제를 하고 구체적인 삶에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동행하고 이런 문제지 지엽적인 문제 그런 문제를 두고 설명을 하면 안된다. 그래서 그런 문제까지 포함을 해야만 교회의 정의가 된것처럼 하면 안되고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그러니까 결국 개인 구원론으로 교회론을 개진하니까그런 말이 나온다. 구원 역사의 발전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성취 되었는가 기독론적인 방식에서 해석을 해야하지 우리는 모든 개인에 대한 문제를 설명하려고 하고 있다.
 만약에 백성이 죽으면 어떻게 할까요 이런 것을 다 구원론적으로 설명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을 포괄할 수 있는 개념을 끌어 들여야 한다. 개념이라는 것을 예외 없이 포괄 시켜야 참된 개념이지 포괄시킬 수 없는 것이면 참된 개념이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교회 정의를 바로 할 수 없다.
 심지어 지금 죽은자들에 대한 의미가 밝혀 진 곳은 신약 시대다. 신약 교회에서 밝혀지고 있지 구약 교회에서는 죽은자의 미래가 어떻게 되느냐 나타나지를 안해요. 왜냐하면 지금은 죽음이 정복됐기 때문에 구약 때는 음침한 스올로 묘사되지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묘사가 안된다.
왜 지금은 죽음이 정복된 새 시대에 있기 때문에 죽은자에 대한 문제를 열어 보이고 있는 것이다. 구원 역사에서 나타난 문제지 모든 개인들을 포괄하는 그런 문제는 아니다.
 구원론적으로 접근하니까 그렇다. 그러니까 교회에 대한 정의는 여기서 보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 개념은 조직교회 신앙 고백함으로 들어온다. 신앙을 고백하는 자에게 세례를 준다. 거기다 초점을 두고 정의를 하고 거기는 가짜들도 있을 수 있다는 그런 말이 아니고 고백하는 사람은 진짜다. 우리는 모르는 일이다. 가짜는 들어 날 때 가짜지 우리는 모른다. 교회에도 가짜가 있느니라 그렇게 책망할 수 없다.
 예수님의 제자들중에도 가짜가 있었는데 어떻게 보면 우리는 더 낫다. 24명중에 두사람만 가짜 아니면 되잖아. 그런 이야기를 하면 안된다.


 교회에 그런 가짜 있을 수 있는데 우리는 그런 판결자가 아니고 고백된데로 정직성만 확인되면 그것은 교회라.
유형교회는 고백으로 이루어지는데 고백은 가짜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신자들의 입술의 증거로 고백되어진다. 그러니까 교회에 대한 정의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의 공동체가 교회인데 그것이 지상에서 유형적인 방식으로 나타나면 하나님의 복음을 믿는 믿음의 고백으로 들어온다.
 구약 교회도 그런 고백으로 교회에 들어온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그러니까 유형 무형을 그런 정신적이냐 나타난 것이냐 그렇게 나누어서는 안된다.
 그런 의미로 교회의 구분을 보면 전투적인 교회와 승리교회, 무형교회, 유형교회,유기체로서 교회, 조직체로서 교회 여러 관점에 나누고 있다.
 그런데 나누어지는 것은 어떤 대립 개념으로 나누지를 말아라 그 말이다. 대립되는 범주로 대비 시키면 안되고 나누어도 교회의 여러 다양한 면을 포괄하는 개념 정립이 한가지로 어려우니까 여러면으로 나타내줘야 되지 대립 개념으로 나누지 말라. 그러면 지금은 싸우는 교회인가? 승리한 교회는 우리는 아닌가? 분명히 성경은 주님이 이겼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이제 싸움을 끝내고 그 안식에 참여한 사람들이야 그런 싸움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지금 신약 시대에 드디어 말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정의하면 승리한 교회를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러나 구약 교회는 그런 승리에 대한 문제는 말을 안하고 신약 교회에서 말을 한다.
 그러니까 싸우는 면 승리하는 면을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승리에 대한 문제 까지라도 구원 역사 때문에 승리한 교회로 설명할 수가 있는 것이다. 무슨 이야기냐면 지금 우리 승리한 교회가 죽음이 그들을 잠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의 영광을 뵈는 방식으로 승리하고 열어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구약 교회는 지상에서도 싸우지만 그들이 죽었을 때 그 죽음이 죽음을 정복할 자유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구약 방식은 여전히 무덤이 가리고 있는 방식이다. 천주교 적인 언어 개념이 아니다. 천주교적인 개념은 개인 영혼이 어디 가냐 그것을 자꾸 푸니까 그러고 성경은 그런 목표로 있는 것이 아니다. 신약 교회에서 까지라도 죽음 후 시대를 열어 보이고 있는 중간기 시대를 열어 보이고 있는 것은 신약 교회의 특성일 뿐 아니라 싸우는 교회를 위해서 열어 보이고 있는 것이 그냥 미래를 밝혀서 흠이 진진하게 하려고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구약 같은 것은 아무리 조상들이 죽어도 조상들의 묘지를 위한 약속으로 있지 다른 문제를 열어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면 그 때도 위로하기 위해서 너희 조상들도 죽었어도 살았느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하나님은 산자의 하나님이시지 죽은자의 하나님은 아니시니라. 그렇게 열어 보였으면 그들이 얼마큼 좋겠냐 하는데 그것은 신약 때 그 승리를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죽음을 정복하셨거든요. 그러지 구약 조상들이 죽음이 의미있는 죽음이 아니다. 실은 드디어 신약 때 열어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냥 지금 우리는 싸움만 하고 승리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신약 교회의 두 면을 펼쳐보이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싸움은 진행되고 있어도 신약 교회는 승리한 교회다.


1b
지금은 그냥 싸우고 죽고 난 뒤로는 평안한 것이다 그런 대립 개념으로 설명하지 말고 여전히 싸움은 진행 되는데도 신약 교회의 특성은 승리한 교회다. 그 승리의 완성은 오히려 죽은자들의 승리에게 완벽하게 들어나고 있다. 왜 죽음이 그들을 지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로 설명을 해야지 그냥 대립된 개념으로 설명하지 말아라.
 그런데 사람들이 죽은 뒤로나 승리하지 지금은 다 끌려 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세상을 예수께서 이겼다. 너희가 염려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준 평안은 세상이 빼앗지 못한다.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그것이 요한복음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승리도 개인이 그냥 살았는가 죽었냐 두 관계로 하지 말고 신약교회의 특성이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는 승리한 교회지 지금 천당가서 싸움이 없다는 의미로 승리 교회 그런 말은 아니다. 예수의 부활때문에 승리한 교회지 그 승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교회는 여전히 싸움의 질서 안에 있다. 그래서 신약 교회는 구약처럼 그렇게 사망의 권세 아래 갇힌 교회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안에서 승리한 교회다. 그러기 때문에 신자들이 죽었을 때까지라도 죽음이 신자들을 어두운 무덤에 가두어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스러운 얼굴을 직접 뵈는 방식으로 열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개인 영혼들이 가는 곳이 어디냐 거기다 강조해서 풀지 않고 인류가 어떤 삶의 질서에 있는가 거기다가 강조를 두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어디에 있는가. 아담은 어디가 있느냐. 그것을 성경이 대답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에서 베푸시는 구원 역사에서 베푸시는 생명의 능력 함께하심 이 문제다. 드디어 예수가 계신 영광스런 거처가 이제는 가리움이 없다. 구약 때는 가리움이 있어도 지금은 가리움이 없다.
 왜 그러는가 산자와 죽은자의 주로서 주님께서 영광의 보좌에 계시기 때문에 그렇다. 이제는 죽음의 질서까지라도 어떻게 성도를 가두지 못한가를 다 고백해야 한다. 그전에는 죽음이 왕이나 된 것처럼 권세를 시행했는데 지금은 그렇지를 않는다.


 그러니까 개인이 죽었냐 살았냐. 이렇게 풀지를 말아라. 만일에 그리스도의 교회만 해석한다 할지라도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교회를 바르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신약 교회의 특성은 승리한 교회가 되지 않는다. 승리한 교회는 지금 개인에게 믿음의 투쟁이 계속되냐 안돼냐 그런 문제가 아니라 근본에 있어서 신약 교회는 어둠의 권세아래 있지 않다.
 그러니까 여기 있는 정의들이 구원 역사에서 교회가 무엇이냐 보다도 개인이 죽었냐 살았냐 개인에 대해서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교회를 말하는 것은 그런 문제가 아니다. 역사에서 자기 백성과 함께하는 교회 생명의 질 , 생명의 역사가 무엇이냐. 여기다가 초점을 두고 있다.
 신약 교회가 이렇게 분리를 하니까 지금 승리가 무엇인지 모르고 끙끙앓고 지는 것이 정상인 줄 알고 있다. 싸우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승리한 교회다. 우리가 바울의 고백을 보면 승리가 무엇인지 알것이다. 그는 자기 일생이 사러 잡힌 것은 부활의 영광을 누림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죽음까지라도 그를 가둘 수가 없다. 드디어 사도 시대에서 영광의 거처가 열린 것이다. 구약 때는 아무리 승리해도 그렇게는 안된다.
 구원 역사에 대한 문제를 천주교는 개인 영혼에 대한 문제로 하니까 구약 때는 림보에만 가있었지 천당에는 못들어갔다.
 그러니까 이런 구분들에 대해서 범주론적인 구분 그것도 신약 교회 신약의 새 인류의 삶에 질 새 인류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심 생명의 능력 이것이 무엇인가를 해석하지 않고 개인이 어떤 상황에 있는가로 교회를 정의 해서는 안된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정의가 추상적인 정의 같지만 그렇게 정의해야 교회가 새 시대를 살고 이런 식으로 하면 천당가기 전까지는 싸워야 되고 천당가면 쉬느니라 하면 이런 의미는 신앙 생활을 못한다. 이 싸움이라는 의미도 이해가 잘 안되다.
 그 다음 유형교회와 무형교회로 교회의 유형적인 면과 무형적인 면으로 설명을 해야 되지 정신적인 것 하나님만 아시는 선택 그 다음 조직적으로 나타나는 헛점이 많은 구체적인 교회 그런 식으로 구분되면 안된다.
 교회가 아무리 타락한 증거를 가지고 있어도 교회에 대한 본질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맞게 해석을 해야 되지 그런 골라 내라는 정의를 해서는 안된다.


여기 보면 얼마나 엉터리인 줄 알 수 있다. 교회가 무형적으로 불리워지는 것은 본질적으로 영적이어서 주관으로는 실제적으로 식별될 수 없기 때문에 그러면 육안으로 식별안되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러니까 정신적인 것은 안보이지. 그러니까 얼마큼 헬라 철학구조를 가졌는지 알겠지요. 우리는 하나님을 보았다니까요. 제자들과 우리들도 보지요. 그런 하나님이 아니고는 우리의 하나님이 아니다. 그러니 이것이 영적이라는 말은 메사야적이다. 어떤 의미로 소위 안보이냐 안보인다는 말은 영광의 보좌에 계신 관계로 함께하시고 세상에 그 승리가 완전하게 안나타났지요. 여전히 죽음이 왕이나 된 것처럼 지배하고 있지요. 그런 의미로 아직 안보인다 가리웠다 하는 것이지 믿는 신자는 그분을 보고 살고 교회에는 가리워 진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무형적 그런 말로는 안되고 메시야적인 시대에 그런 의미가 영적인 의미다. 메시야 시대에 속한다는 영적이고 모세 시대에 속한 것은 성경 언어로 육적이다. 그것이 성경에서 육을 정의하는 구원 역사적인 문맥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무형, 유형을 하나님만 아시고 정신적이고 육안을 안보이고 그런 말로 설명을 하는 것 보다는 교회가 그리스도교회가 시간 질서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함께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러면으로 유형적으로 소위 역사에서 아직 나타나 있지 않는 그런 관계에서 무형적인 요소가 있다.
그러나 정신적이냐 육체적이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본래 무형적이다 하면 차라리 하늘보좌에 속했다는 의미로 무형적이고 유형적이라 그러면 구체적으로 땅에서 시간 질서에서 오셨다는 의미로 유형적이지 그냥 정신적이냐 육체적이냐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개념들을 자꾸 범주론적으로 풀지 안해야 한다. 이런 개념으로 출발을 하니까 그리스도의 몸으로 새 시대 죽고 사는것은 상관이 없다. 죽었든지 살았든지 새 시대의 생명의 질이 무엇인지 그 문제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 말이다.
 구약 신자는 죽었어도 생명의 승리로 밝혀 있지를 안해요. 신약 시대의 신자는 그것이 밝혀져 있다. 왜 예수께서 산자와 죽은자의 주로서 영광의 보좌에 앉아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역사적인 정의를 안하면 그냥 사변화 되어 버리고 철학적인 의미로 해석을 해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실은 보이지 않는 세상을 살고 세상은 우리를 봐도 알지 못한다.
 왜 우리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예수께서 영광의 보좌에 계신 생명의 질서로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를 모른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가 세상 사람처럼 살면 바울처럼 새 시대를 못산다. 신학자들의 말이 바울이 예수 재림의 날을 잘못 짚었냐. 안 그러면 그 열정 때문에 가까이 온다고 했을 것이다. 그런 주관적인 이야기를 한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시간 개념이 아니라 시대 개념 삶의 질의 개념 시간으로 언제냐 그런 측정을 하지 않는다. 그런 측정을 한다 할지라도 그 시대안에서 측정되지 지금은 아니고 한참 뒤에 오겠구나. 그런 방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바울이 종말론적인 삶을 산다. 하는 말은 예수 내일 올줄 알고 달달 떨고 살아라 그 말이 아니라 그 영광의 빛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마7장에서 하는 말이다. 바울의 삶이 그렇게 되어있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신약 시대의 종말론이다.


 그러니까 이런 정의들은 소위 우리 옛 사고 방식에는 구별하기가 아주 좋다. 아 죽었구나. 살았구나. 이렇게 구분하면 아주 좋은 것 같은데 이것은 주님의 교회를 깨뜨리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유형, 무형 모르고 우리는 보이는 이 교회밖에 모른다.
 그리고 이 교회가 주님의 몸이고 이 교회가 신령하다. 그것밖에 모른다. 그리스도에게 속했기 때문에 신령하다. 이것을 자꾸 정신적이냐 하면서 도덕적으로 따지니까 그렇다.
오순절은 교회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것은 복음 시대 교회를 설명하면 될 것이다. 요한복음을 잘못 해석해서 그런다. 누가복음은 예수님 사역의 제사장 사역을 말한다. 그렇게 해서 새 인류의 머리로 그가 고난 받으심으로 새 인류를 지으셨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새로운 인류를 지으심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연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복음 제일 끝에는 제자들이 성전에서 기도하기를 그치지 안했다로 되어 있다. 그 성전에서 봉사했던 사람이 눅가복음 처음에 보면 샤갸라가 있다.그렇게 되어있다. 그것은 모세 제도에 속한 것이다. 고난을 받고 온전케 되었다. 어떻게 율법을 온전케 하는 대제사장이다. 모세 제도의 고난을 통해서 고난을 완성시키는 분이다.그렇게 하면 그가 온전한 첫 인류로 올라갈 뿐만 아니라 그가 올라가셔서 성령을 부으시면 이제는 피없는 제사를 드리게 된다.


 인류를 새롭게 지으신 분은 그분이다. 그가 새 인류의 머리로 둘째 아담으로 올라 가셨다. 요한복음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함께 계셨던 분이 부활의 영광으로 함께 계시면서 새 인류를 지으신다. 하는 것은 요한복음이다.
 성령강림은 모세적인 제도로 출발을 하고 있다. 시내산의 장면하고 대립한다. 그런데 이제는 두려워 떨고 임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위에 임한다. 사도들이 분명히 토대로 서 있는데도 사도들만 먼저 받고 나머지는 나중에 따로 받고 그런 것이 아니다. 사도도 보궐 선거가 됐다. 사도는 보궐 선거하면 사도 아니어요. 조직신학적인 의미로 말하면 예수님이 친히 임명하신 자가 사도인데 그런데 사도행전에 보면은 그렇게 안되어 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이전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성령을 받으라 그들을 새 인류의 토대로 놓았다. 너희들이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리라.
 성육신적인 의미는 사도행전인데 사도를 보충한다. 우리 열둘중에 하나도 빠지면 안되겠다. 마치 성전에서 열두 아들들이 하나도 빠지면 안된다고 전전긍긍하면서 갔다. 죽어서도 안되고 빠져서도 안된다. 나중에 이스라엘이 회개할 때 그문제를 회개 했다. 우리는 한 족속이 끊어질 뻔 했지않냐. 이스라엘의 열둘에 대한 그 문제다.
 그러니까 사도시대 때는 조직신학적으로는 맛디아는 사도가 아닌데 사도행전적인 의미로는 맛디아가 진짜 사도다.
왜냐하면 성령이 친히 함께 하는 새인류의 틀이기 때문에 그들이 틀로 선출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조직신학적인 정의가 좋지 않는줄을 알겠지요? 그리고 사도들과 함께 모였을 때 성령이 임했다. 그래서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꿈이나 환상으로 보았던 예수의 일을 각 나라 말로 들었다. 그것이 신약 교회의 출현이다. 그러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함께 하시고 마치 시내산에 강림하사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던 것처럼 이제 급한 바람으로 불꽃으로 함께 하시고 이제 영원히 함께 하신 방식으로 함께 하셨다.
 그러면 구약 때는 함께 하지 않으셨냐? 함께 하셨는데 신약 때는 부활자의 영께서 함께 하신다. 부활자의 영으로 함께하신다. 그것이 오순절이다.


 교회의 본질을 설명했고 교회의 속성 여기 보면 교회 속성은 무형교회에 속한 것이다. 유형교회는 이것이 해당이 안되는데 로마 천주교는 유형 교회의 통일을 통해서 조직을 실제화 시켰다. 그런 말이다.
그들은 세계적인 정치조직을 두고 교회 통일을 설명한다. 그런데 개신교는 그렇게 하지를 않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 통일을 말한다. 어느 정도까지는 신앙 고백과 행위에서 공중 예배에서 교회의 외 형적 조직에서 그 자체를 말해야 되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그런 유형적인 것에 있지 않고 무형적인 면에 있다. 그렇게 통일성을 말을 한다.
 그러나 그런 형상학 적으로 교회의 분열을 이야기 하면 안되고 교회의 통일성을 예배의 일사분란한 통일이나 조직에 통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고백의 통일이 있고 성령의 통일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은혜의 본질이 그러면 거기서 통일성을 찾아야지 조직이 어떻게 있냐 예배형식이 일정하냐 그런데 말로는 로마 천주교를 대항하는데 로마 천주교는 세계적인 정치조직 일사 분란한 예배질서 여기다 생각을 했거든 그래 놓고는 통일성은 유형적인 몸으로서 유형적인면 몸으로서 통일성은 있어도 구체적인 나타난 면들은 통일성이 희박하게 나타나고 무엇이 나타난다고 말하면서 무엇이 나타나냐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만일에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리고 참으로 그리스도의 피와 살에 참여한 바른 성례가 아니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그것만 확실하면 그것은 여러 차이점을 두어도 그것은 몸의 통일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교파적인 분열이나 예배의 이런 저런 차이점은 성경 이해에 대한 약하고 강한 차이점이지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우리의 이해력을 보충하는 다양한 것이다.
 그러니까 조직적인 일치 거기다가 분열을 이해하니까 안된다는 그 말이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을 바르게 고백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표가 바르게만 이해되면 거기서는 정치적인 면이 다르다 할지라도 그것이 교회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 교회는 강한자도 있고 약한자도 있다. 동일한 이해를 못한다. 사랑의 인내고 오히려 어떤 면을 강조하면 그것이 다른 형제의 부족을 채울 수 있는 은혜의 부요함이 된다. 그러니까 우리하고 다른 상황에 있는 교회에 대해서 그 잘못을 공격함으로 만족한는 그런 것을 버리고 오히려 겸손해야 한다. 오히려 그런 잘못 된 판단들을 할 때 어떤 면에서 파편적인 진리가 있거든. 그것을 우리가 바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그중에 한가지가 틀렸다고 그것으로 논리를 전개해가지고 다 무너뜨리지 말고 있는 것을 바르게 들을 수 있도록 해야한다. 단지 이제 우리가 개인 교인들을 받는데는 쉽게 할 수가 있는데 교회 사역자를 뽑을 때는 소위 교단 교류 할 때는 사역자에 대한 문제거든. 서로 가르치는자로 교제할 때는 그 문제다. 그렇게 했을 때는 어럽다. 왜냐하면 서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교제한 것은 그 본질적인 문제만 일치되면 쉽게 이해 할 수 있어도 가르치는 사역자는 교회를 가르쳐야 되기 때문에 약한자라고 교회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를 가르치게 하는 사역자는 더 이해가 깊어야 되고 일치가 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다른 교단에서 오면 이 교단의 합당한 정치제도나 본질적인 것이 이해 된 뒤로 그 다음 가르치도록 해야 한다. 가짜여서가 아니라 가르치는 자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 면에서 교단 교류를 이해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넓게 포함하면 기독교 장로교까지도 신앙 토대가 그러니까 할 수 없지만 실제적으로 그 사람들도 예수 믿는다. 사도신경을 교인들은 문자 그대로 믿지 그 신학체계로 안 믿는다. 그렇게 하면 되는데 이제 그 사람들을 설교에 세우고 그럴 수 있겠는가. 그랬을 때 임시적으로 특수할 때 부활 주일 때는 가능하고 정규적으로는 안되느니라. 그런 말은 좀 논리에 안 맞다. 그 사람들은 우리 교단에 쫒아 낸 사람들이다. 그런데 부활절 때는 같이 모인다. 왜 우리가 본래는 한 형제 아니냐. 교리적인 싸움을 했는데 교리적인 고백이 끝나기 전에 합칠 수가 있는가. 차라리 정치적으로 싸웠다 그 말은 복음 자체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같이 한다는 것이 가능하다. 교리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힘들다.
 그런데 광주 개혁측도 이스라엘 비슷하다. 부활절만 되면 한 식구들이더라고. 아무리 싸워도 아버지 생일 때는 친하게 지내야지. 모여 놓고 보니까 전부 교회여 그러면 다른 교단 공격할 것이 없지. 그들은 완전히 신학 체계가 완전히 진화론이다. 그것은 실은 천주교보다 못한 체계가. 그래 가지고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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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통일성은 소위 무형에만 해당되고 유형에는 안된다.그런 정의는 맞지 않고 교회의 통일성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의 본질에 속한 문제다.
 무형, 유형 하는 것은 단지 시간 질서안에 나타나고 또 공간적인 개념이 있기 때문에 여기저기 나타나고 교회는 나눌 수 없고 인간 이해력들의 차이 때문에 이런 저런 특성은 가지고 있어도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받고 그의 몸의 교제에 참여한 것이다. 그것이 교회의 본질이다.
 교회 본질은 그런 의미로 신앙 고백에서 나타난다. 신앙 고백은 예배 형식에서 나타나겠지요? 고백까지라도 가장 본질적인 차이일 것이고 교단적인 연합을 가지고 그것이 통일성이 있냐 거기로 출발하면 안된다.
 그러면 우리 교인들하고는 어떻게 연합할까? 가르치는 사람하고 배우는 사람의 차이가 있는데 그러나 그것은 교리 때문에는 요구 조건이 다르다. 교회의 가르치는 자는 강한자여야 하니까. 그런면에 있어서 교단 분리는 어떤 의미로 필연적일 수 밖에 없고 그것은 어떻게 보면 은혜의 부요함이 될 수 있다. 오히려 우리의 약함이 풍성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통일성이 깨뜨려 짐으로 보지 말고 통일성은 교회의 본질적인 문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리고 그의 몸에 교제에 연합하는 것이다.
 거룩성은 천주교는 여러 의식과 도덕성에서 찾지만 개혁 교회는 거룩의 개념을 의식에 두지 않고 회원들에게 적용하는데 거룩은 무엇이냐 객관적으로는 그리스도안에서 거룩을 보고 주관적으로는 원리에서 거룩함을 본다. 그것은 새 생활을 소유하며 완전한 성결을 가지도록 결정되기 때문이다. 성결은 하나님께 바치는 생활의 관유로 바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천주교는 외적인 외식에서 거룩을 찾는데 우리 개혁 교회는 교인들의 성내면적인 성결과 그 표현들의 인격적인 특성들에서 찾는데 객관적으로는 예수께서 온전히 법정적인 문제를 설명하니까 그런 것이다. 온전히 율법을 다 지켰다. 그래서 거룩하고 왜 죄가 없다고 선언했으니까. 죄가 없는 것이고 주관적으로는 원리에서 거룩한 것이다고 한다. 어떤 원리에서 거룩하냐 이제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법정적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의미로는 거룩하다. 객관적으로는 예수 안에서 거룩하고 주관적으로는 내가 믿음으로 예수의 객관적인 의를 믿음으로 내가 받으니까 원리상 무죄다. 말하자면 빚을 갚아버린 영수증을 가지고 고개를 끄덕 끄덕 하니까 원리상 무죄다. 그러나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다. 그런데 원리상 무죄는 무엇이냐 이제 성령이 오셨기 때문에 결국에는 거룩하게 완성될 것이다. 그런 의미로 거룩이다 이런 설명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소위 여기서 구원론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구원 역사적으로 교회를 거룩하다 했을 때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그리스도께 속한자가 거룩하다. 그것은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것을 다 포함한 이야기다.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다. 어떤 의미로 거룩인가? 어떤 의미로 구약 교회와 신약교회의 거룩을 말해야지 범죄했는가 안했는가 이렇게 거룩을 따지면 안된다.성경은 어떻게 구원 역사를 완결 시켰는가를 설명하지 이스라엘을 빼놓고 이방인과 우리 이렇게 대비 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면 구약 때는 어떤 의미로 거룩하고 거룩하지 못하는가. 분명히 거룩하다. 왜냐하면 그들도 하나님께 속해 있거든요,. 그러나 물 뿌림으로 하나님께 속했고 가리움으로 하나님께 속했다. 그것은 육체의 예법 뿐이라고 히브리서는 말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거룩을 드러내는 것도 죄와 사망의 권세 가운데서 그 거룩을 드러낸다. 왜 모세 제도는 그들의 완악함에 조절된 거룩이다. 그들은 백프로 하나님을 순종해도 완악함에 조절된 방식의 순종이다. 그 이상의 순종은 못한다. 어린 아이는 어린 아이의 어리석음에 조절된 방식으로 아버지를 따르지 더 이상 따르지 못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구약에서 죄의 권세다.
 이스라엘이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해도 그들이 하나님과 함께하고 누리고 드러내는 것은 모세의 율법 제도다. 개인적인 정서적인 문제가 아니다. 질서 틀 그 시대의 삶의 질서가 그런다 그 말이다. 그것이 그들의 거룩이다.
신약 시대 거룩은 그냥 저 안 믿는 세계로부터 거룩하다 이런 문제가 아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교회를 완결시키는 문제다. 생명의 역사를 완결시키고 하는 것이지 항상 이방인과 대비해서 너희는 누구냐. 그런 비교함으로 뽑아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어떻게 새 인류를 완성시켰는가?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음 선언이다. 그랬을 때 구약 교회와 신약 교회의 거룩은 다르다. 구약 교회는 어떤 의미로 여호와께 속했다. 그것은 가리우고 계셔서 아무도 볼 수 없다. 신약 교회는 예수께 속한 교회다. 이제는 가리움이 없는 하늘에 속한 교제의 생명으로 교회가 지어졌다. 거기는 가리움이 없고 어둠이 없다. 그것은 실제적인 거룩이다. 그냥 너희 아버지가 빚 갚았으니까 그렇게 알아라 실제는 아주 가난하제 실제는 아주 가난한데 저당 통보를 받았던지 영수증을 받았던지 가겠구나 이제 빚 쟁이가 와도 겂나지 않겠구나 그런 중립적인 상태가 아니다. 일단계는 갠관적으로 이단계는 원리적 뿐이지 부자는 아니다. 그 다음 아버지가 돈을 조금 주시든지 빚쟁이가 이자를 안 뺏어가든지 조금씩 모아지는 것이지 실제로 부자가 되고 그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완에서 새로운 피조물도 지어졌고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의 보좌에 앉았고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주님의 몸으로 그의 영으로 우리안에 계신다.
 새로운 생명의 관계에서 산다. 이것은 실질적인 거룩이지 그냥 법정적이고 원리적이고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데 법정적인 관계로 우리의 구원을 설명하면 이것은 원리적인 문제지 실제적인 의는 주어질 수가 없다. 실제적인 의는 나중에 성령이 오셔서 조금씩 조금씩 개선해 나가는 것밖에 안된다. 그러면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실제적으로 교회가 죄를 짓고 있거든요 지금 예를 들면 그것을 가지고 설명을 할려고 하니까 교회의 본질을 설명을 못해 버린 것이다. 교회의 본질로 우리를 설명을 해야지 우리의 어둠과 죄가 드러나지 아 이 어둠을 정상적인 것으로 해석을 하니까 실제적인 의는 아니고 원리적인 문제고 나중에 구원이 조금식 벌어 질것이다. 이런 설명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법정적인 의는 아주 기독교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거룩은 안 믿는 사람과 우리 믿기 전의 상태와 지금의 나 내 개인의 변화 그런 것이 아니라 새 인류가 됐기 때문에 나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이지 내 개인의 변화를 따라서 교회가 설명되어 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새로운 인류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관계로 들어가고 새로운 생명의 빛을 받는 것이지 내가 아무리 많이 울어도 구약 때는 그런 것을 못 받는다. 구약 때는 가짜로 울어서 못 받는 다는 말이 아니고 모세도 울어도 그 영광을 못 본다. 모세도 하나님의 등을 봤다. 세례 요한처럼 예수를 모세는 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구원 역사적인 의미로 개진을 해야되지 개인의 변화의 과정으로 설명해서는 안된다. 역사가 생명의 질서다. 우리는 개인의 변화가 실제인 줄 아는데 그것이 아니라 역사가 생명의 질서가 10월달에 개나리가 핀들 그것은 며칠 있으면 시들어 질것이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했을 때 도덕적으로 완전했는가 그 말이 아니다. 새 인류의 아버지로서 하나님과 믿음으로 동행한 것이지 그가 도덕적으로 완전했는가 그런 얘기는 전혀 아니다.
그러니까 이런 거룩성 까지라도 기독론적인 설명을 해야 교회 거룩을 이야기 하는 것이고 그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선물된 것이다. 이것을 누리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것이고 못 누리는 것이 죄지 그것이 정상적인 것이 아니다.
 결혼하고 약혼은 사는 질이 다르다. 아무리 약혼하고 친히도 결혼 관계로 살면 안된다. 그것은 아주 비정상적인 것이다. 그러나 부부 싸움을 아무리 해도 한 이불 속에서 잠잔다. 생명의 질이 그렇게 되어 있다. 신약 시대는 그런 의미로 어른이고 구약 시대는 그런 의미로 약혼도 아니다.
 그러니까 만일에 어른이면 그 결혼관계만 지키면 말하자면 그 부부 싸움도 쉽게 해결될 수가 있고 능력을 발휘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역사만 생명이다. 아브라함이 얼마큼 하나님을 사랑했어요. 모세가 얼마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얼만큼 울었어요. 그래도 그것은 육체의 예법일 뿐 마음을 정결케 하지는 못했다.
 죄가 여전히 승리하고 있고 다윗 왕조가 무너지고 있지요. 그러나 무너지지 않는 왕조는 예수의 부활에 드디어 온 것이다. 그러니까 구원 역사적인 개진을 하지 않으면 사변적인 이야기고 종교 철학적인 이야기 밖에 안된다. 그러니까 여기서 조금 거룩이 진행 된 사람 나는 너보다 몇년은 앞섰다. 결국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새 시대에 살고 있었을 때는 앞서니 뒷 서니 그런 말을 못한다. 믿음으로 살면 그가 승리이고 앞서거니 뒷 서거니하는 것은 성경 이해력을 가지고 이야기 할 수 있어도 하나님과 사는 교제 질서에 있어서는 앞서고 뒷 서고 하는 것은 없다. 우리는 모세보다도 앞서도 신약 교회 신자가 너는 나보다 늦게 믿었으니까 그쯤 도덕적으로 살라 그런 이야기는 해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이런 설명들이 가령 교회의 속성이 무엇이냐? 했을때 거룩성, 통일성 몸으로서 통일 또 거룩성 하는 것은 법정적으로 하니까 원리상 거룩 이런 문제가 아니라 새 시대에 속하기 때문에 거룩이고 그리스도에게 속하기 때문에 거룩하다. 이제 모세 제도에서 물의 뿌림의 거룩이 아니라 영으로 사는 거룩이고 새 시대에 사는 거룩이다.
 이제 새 시대의 의미가 무엇인줄 알겠지요. 그러니까 이런 책들을 읽어보면 이론상은 그럴듯해요. 그러나 이런 것은 성경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신약 교회의 생명의 능력을 선물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종교 등급을 매기고 있는 거시고 그리고 현대적인 상황을 성경을 설명해 드러가고 있는 것이다.
 성경으로 해석해서 이 상황의 어둠을 벗겨 버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인 상황으로 성경을 해석해 드러가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의 해석법도 아니고 교회의 자유를 누리지를 못한다. 이런 교회는 천날을 말해도 교회의 등급을 말하는 것밖에 안된다.
그러니까 말로는 천주교를 대항한다고 하면서도 결국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보편성?
 
이제 보편성이란 문제는 아까 말한 것처럼 통일성에서 할 문제니까 이 항목을 여럿으로 나눈다고 신령한 것도 아니고 그 항목은 서로 배타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1번 2번 이렇게 나눠서 설명을 하는데 4번 까지 못 썻다고 고민하고 그럴 것 없다. 만일에 내용이 4번까지 인데 3번 까지 내용이 다 써져 있으면 맞는 것이다. 그러니까 거기다 관심을 둘 것은 아니다.
로마 교회는 왜 보편성이라고 그러는가? 저희만 수가 많고 전체적으로 틀리니까 그런 것인가. 그런데 신약 교회는 무형 교회만 보편 교회라고 설명을 한다. 왜냐하면 모든 시대의 모든 신자들을 다 포함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것은 교회의 보편 성 까지라도 그냥 아까도 말했지만 유형교회를 포함해서 말해야 한다. 그냥 교회는 역사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그냥 모든 택한 자들의 총회, 앞으로 미래에 태어날 거기다만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된다. 교회는 어디서 정의해야 하느냐. 새 시대의 교회 그냥 앞으로 태어날 것이니까 안보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새 시대의 교회상이 무엇이냐 새 시대의 인류가 무엇이냐 거기다 초점을 둬야지 보이냐 안보이냐 거기다 초점을 두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교회의 보편성도 몸의 개념으로 설명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나뉠 수 없다. 그런 의미로 보편성이다. 그리고 로마 카톨릭 교회는 여기다 더 붙여서 사도성을 말하는데 로마교회는 그 기원을 사도들에게 두고 교황과 감독들을 법적 계승자로 삼고 베드로가 로마 교회에 감독이었다고 그런 저런 족보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을 교회사적으로도 의미가 없다. 교회사적으로 로마 교회가 이런 권세를 행한 것은 아니다. 로마에서도 동방 교회와 로마 교회는 대등한 관계에 있었고 다른 안디옥 교회나 큰 교회들도 그렇게 되어 있었지 그렇게 로마 교회가 권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교회사적으로도 거짓말이다. 중세 시대에 들어와서 권세를 행했지 동로마 제국 멸망 후로 하고 있는 권세지 그런 것은 법도 아니다.
 지금도 자기들이 큰집이라고 그런는데 그런 말이 아니다. 그런데 교회의 보편성은 그리스도의 몸때문에 이 사도성도 보편성에 대한 이야기다. 사도성만 교회성을 보존한다. 교회는 사도들의 터위에 서 있으니까 그러니까 교회는 사도적 교훈으로 분별할 것이지 다른 전통으로 구분할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다 우상 섬겼는데도 여기가 나의 모교였지 그러니까 이중에 다 가짜인가 나는 진짜인데 그러니까 나 여기 있어야 되겠다. 그런 해석은 객관적인 해석이 아니다. 그러면 하나도 없는 가짜만 교회가 아니고 그런 것이 아니거든. 그 교회가 조직해서 객관적으로 그런 일을 했는가 그러면 그 죄를 회개 안하면 그 교회를 떠나냐 되는 것이지 그래도 여기가 다 가짜겠냐. 주님의 교회고 하는 행위도 엇 비슷한데 여기기 내 모교회가 아닌가. 무엇이 모교회인가? 그렇게 하면 안된다. 우리 나라 교회는 거의 그렇게 되어가지고 예배당 이것을 교회라고 그런다. 그래가지고 그대로 그냥 우상 교회를 따라 사니까 지금도 우상 섬김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추도식도 앞장 서서 하는 것이고 우상 종교 비슷하다.
 현 교회가 신사 참배하고 진실로 회개 한적이 없다. 그런데 재건 교회는 복음으로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상 숭배를 세울려니까 이것만 전공이 됐다. 거기는 어느 것으로 봐도 이것은 잘 보인다. 그것이 교회를 세우는 것인가. 그러니까 기성 교회 없으면 재건 교회는 할일도 없다. 설교할 제목도 없고 요새 교인들이 잘못을 안하면 설교할 맛이 없네 할것이 없다. 온전한데 그래도 채망할 것이 있어야 주여 하고 때릴 것인데 그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그것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의 위험성이 종교 개혁사를 보아도 천주교를 대항하는 것에 있어서 얼마큼 헛점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수 있다. 그러니까 항상 성경으로 돌아가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면 어둠은 물러 간다.
 그런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특별한 죄가가 들어오면 그 때 그 죄하고 싸우는 것이다. 그래서 그 죄와 싸우는 것을 교회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 굳어져 버리면 위험하다. 그러니까 선한 싸움에도 안되는 것이다. 재건 교회는 우상 이야기 하면 박사들인데 복음을 이야기 하면 별 감동이 없다. 그것이 큰일이다. 복음을 선언하면 맥이 쭉 빠져있다. 그러면 재견 교회는 자꾸 싸우면 큰 교회로 부흥이 될란가.
교회를 현상적으로 해석하지 말아라. 바울은 그런식으로 교회를 해석하지 안했다. 그런데 그런 정치가 많다.
 그러니까 지금도 우리들이 다른 교회하고 얼마나 다르냐 우리가 수는 적어도 거기다가 은근한 자부심을 가지면 안되고 또 다른 사람보다 성경을 좀더 해석을 잘한다고 거기다 자부심을 가져도 안되고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지 자랑할 것도 없고 우리가 학자라서 연구를 많이 해서 안것도 아니잖아요. 그렇게 하면 안되고 그러니까 우리는 더욱 주님을 알고 복음을 선언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것만 하나님앞에 인정을 받는 유일한 길이다. 그 외에는 없다. 그리스도를 아는데 이 만큼하면 됐구나 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진리의 확신이 부족하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한 그 진리 때문에 우리가 평생을 사모해도 부족할 것이다. 이것만 사랑으로 인도를 받는 유일한 길이고 그 외에는 없다.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교회를 바르게 봉사할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심방하는 것이 좀 등한히 되더라도 더 배우고 그리고 다른 시간에 심방하고 배우는 것이 유익하다. 그런데 문제는 아는 사람은 더 사모하고 모르는 사람은 그쯤 됐노라 이것이다. 그러니까 아는 사람은 가르치기가 더 쉽고 모르는 사람은 더 어렵다. 성경을 깨달은 자에게 가르치는 것은 더 쉽고 아니면 더 어려워져 버린다.
 그러니 그것이 문제다.
모르면 모른 것 가지고 교회를 가르치니까 심한 말로 하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이라.
 그러니까 이런 문제들이 전부 기독록적인 설명을 안하면 전부 종교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될것이고 성경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론적인 설명을 하면 지금 우리에게 나타나 있는 현상들이 다 어둠에 불구하고 교회를 사랑할수 있고 교회를 권세로 세울수 있고 권면할 수가 있다. 왜 교회는 그런 능력의 새 인류로 지어졌으니까. 권면할 수있다. 그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다. 대충 사랑하다가 결혼한 사람도 자기 남편이라고 불르고 다닌다. 그와 같은 것이다. 복음안에서는 결혼이거든. 그런데 그것을 누리라고 설명하면 추상적이고 구체적인 것이 안되고 구체적으로 몇가지를 고치라고 하면 아 구체적이네요. 그것은 진짜 구체적이 아니다. 인격적인 관계가 구체적이다. 그런 지협적인 문제로 교회를 타락 시키면 안된다. 그리스도아 함께 하는 생명의 공동체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새 인류로 그렇게 권면을 해야 한다. 누구든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줄 믿는자마다 세상을 이긴다. 하는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 보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새 인류인 교회를 지으실려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론을 개진한데도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전혀 서러명됨이 없이 나타난다.
 보이냐 안 보이냐 낳았냐. 살았냐. 이런 이야기들이다. 이것이 무슨 교회론을 설명하는 것이여. 알겠지요.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지. 이런 사고를 자세히 외워서 시험을 쳐도 설교 못하고 교회가 이런 것이라고 설명을 하면 그럴듯 해도 그것은 종교적인 교육은 시킬란가 몰라도 전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은 아니다.
2b
 다른 교단은 교리가 없다. 장로교가 교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알미니안 계통은 신학이 없다. 장로교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통일된 체계를 가지고 있고 다른 신학은 신학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니까 장로교만 이제 까지 분쟁이 있어왔지 다른 교파의 분쟁은 교권적인 분쟁이었고 신학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는데 장로교는 그렇지 안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경건주의 방식으로 누린다는 그런 알미니안 계통보다도 더 신앙이 약하다. 논쟁성은 이해 할란가 몰라도 생활에서 하나님을 찾는 그런 것은 더 약하다. 그러나 구원역사적으로 개진을 하면 이것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책을 보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를 개진 하는데도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개진이 된다. 그러니까 교회 현상으로 개진을 하지 말고 기독론적으로 교회를 개진해야 한다. 그럴 때만 우리가 교회를 존귀하게 여길 수 있고 교회를 세울수 있다. 왜 주께서 그렇게 세우셨으니까.
 그러니까 보이냐 안보이냐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다. 신령한 것도 그리스도안에서 신령이다. 하늘에 속한 질서가 신령한 것이다. 모세 제도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영광의 주를 뵙는 방식으로 신령하다. 그것이 영에 대한 의미다. 그것은 완전한 빛이요 어둠이 없다. 우리가 교회에서 고백하는 것은 완전한 씻음이지 구약적으로 반복된 죄의 종이 되는 그런 비참함이 없다. 그러니 죄를 고백하고 이겨라. 그것이 요한 1서에서 말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교회의 보편성은 지금 조직에서 보다도 그리스도의 몸과 그 사도성으로 말해야 한다. 사도적 교훈으로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지 조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적 교훈이 교회를 교회로 세우는 것이다.
 교회의 표지는 셋으로 분리하는데 하나로 표현 될 수 있는가? 교훈과 실천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표준에 신실하게 행하는 것이다. 말씀에 맞는 것이 하나고 세분하면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말씀의 참된 전파에 있다.
 두번째는 성례의 정당한 집행에 있다.
 세번째는 권징의 신실한 시행에 있다. 교회가 하나님나라로서 자기 증거를 하는 것인데 말씀의 참된 전파와 성례에 대한 정당한 집행과 권징에 대한 신실한 시행이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로서 정당한 표현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말씀의 참된 전파 신약 교회에 주신 은혜의 방편으로서 말씀.
 성례의 정당한 집행, 성례를 말씀과 분리해서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미신적인 집행을 하지 말라는 말이다. 천주교 집행과 대비 된 것이다. 천주교에서는 떡고 포도주에 신령한 은사가 공급된다 함으로 미신적인 의식을 집행하고 있는데 말씀과 성례를 분리 시켜서는 안된다고 한다.
 여기서 성례 집행을 천주교의 미신적인 것과 대비된 방식으로 설명을 한다. 성례는 구원과 직접 관련되기 때문에 아무나도 누가 죽게 되면 세례를 베풀고 간호원도 환자가 죽게 되면 세례를 주고 하는 것이다.
 성례가 언제 정당하게 집행이 되냐 하면 만일에 교회가 성경에서 항상 생명은 생명의 선물에서 나타난다. 만일에 신약 교회가 어떤 것을 먹고 어떤 것은 안먹고 그런 식으로 나타나 있으면 그것은 구약 백성이다. 만일에 우리들이 무엇을 먹을 때 감사하지 않고 먹으면 부정한 자로 먹는 것이다. 이방인처럼 먹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므로 말씀과 기도로 깨끗해지느니라. 믿음으로 먹으면 모든 것이 정하고 깨끗하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생명의 약속을 우리가 받고 있는 것이다.
 성례란 것은 말씀의 유형적인 선포다. 말씀은 듣는 것이고 성찬은 시각적인으로 훨신 더 강화시킨다. 그런 말이다. 말씀과 성례는 이분화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복음의 말씀은 거룩한 생명의 교제의 말씀이거든. 그러니까 그런 의미로 이분화 되어서는 안된다.
 교회가 모였을 때는 생명의 친교로 모였지 그냥 설교 듣고 그런 방식이 아니다. 지금 우리들이 구약 예배는 말하자면 먹고 마심이 없이 모인 적이 없다. 반드시 단에 드리면 먹을 것은 준다.
 그리고 신약 교회가 모였을 때는 반드시 성찬과 함께 모였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설명을 하냐면 여기 보면 말씀은 아무데서나 전파할 수 있는데 성찬은 상 없는데서는 못하잖아요. 말씀은 아무나도 전할 수가 있는데 성찬은 목사 없이 못하고 이렇게 해가지고 성찬은 믿음을 강화 시키고 하는 그것은 전혀 형식논리고 아무 의미가 없고 성찬의 본질이 무엇인가?
 신약교회는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그의 몸의 관계로 모여 있다. 이것이 교회 모임의 본질이다. 그것이 복음의 근본적인 요소다. 그러니까 복음과 성찬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고 교회는 이 생명의 교제로 모였고 그것이 복음의 선포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분리되지 않는 것이지 이것이 무슨 유형적인 전파이고 시각적인 효과를 거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가령 우리들이 먹을 때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할 때는 반드시 시각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주로부터 왔다는 신령한 고백이고 우리의 구체적인 삶이 그것을 먹음으로 집행되거든요? 그것처럼 떡과 포도주를 주님의 살과 피라고 했을 때 그것은 새 시대에 속한 양식으로 거룩한 양식이다. 이것으로 교회가 모일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지금 신약 교회가 성찬식을 일년에 몇번을 한다고 했을 때 그 사고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단지 천주교가 그것을 우상식으로 해석을 해서 그것은 상징일 뿐이고 상징이란 말은 유형적인 전파라는 말이다. 말씀의 유형적인 전파라 그렇게만 해석할 수 밖에 없다. 구약 교회의 예배를 우리가 보면 분명히 먹고 마시는 생명의 교제로 모인다.

 그러니 성례는 단순히 말씀의 유형적인 전파다 하는 문제보다도 복음의 말씀이 바르게 전파되어야 하고 그리고 주님과 함께 하는 생명의 친교가 구체적인 삶으로 바르게 집행되어야 된다. 그리고 권징의 신실한 시행을 해야한다. 그것이 교회의 표다. 이것이 교회의 통일성을 가져와야 한다.
 교회가 무엇이냐 했을 때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안에 있는 구원의 도리가 바르게 전파되고 그리고 예수의 몸에 참여하는 생명의 교제가 정당하게 이루어 지고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 질서가 나타나면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다.
 성찬에 대한 문제는 유형적인 말씀이냐 하는 것은 말은 틀린 말은 아닌데 온전한 의미는 아니다.
교회 윤리를 말할 때도 구약 적인 표상들을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 했을 때 까지라도 에베소서를 보면 처음부터 한 몸으로 지었다고 한다. 그런 연합관계를 말한다.
 은혜의 방편이 무엇이냐? 말씀과 성례다.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은혜아래서 교회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생명의 교제로 사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 어떻게 자기 교회에 은혜를 공급하는가 했을 때 증거 된 말씀과 성례의 시행이다.
 은혜의 방편인 잔과 떡에 참여함이 무엇이냐? 저 뒤에 성찬식을 읽어보면 떡을 떼는 적극적으로 시행할 수 있는 자가 먹어라. 그러니까 몸으로 봉사하는 능력을 가진자가 먹어라 그런 말이다. 어른들은 참여하고 어린아아는 참여하지 말라고 되어있어요? 우리 장로교가 아이들을 전부 제외시켰다. 은혜의 방편이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복음에로의 초대는 생명의 교제에로 초대다. 그러지 용서 받았으니까 기도해라 그런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먹고 마심의 삶을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하늘에 속한 교제에로 부르심이다. 그런 의미로 교회론적인 은혜다.
 나중에 성찬에 보면 화체설, 공제설 기념설, 공제설 같으면 인성의 편재를 말하니까. 주로 어떤 의미로 영적인 임재냐? 지금 우리가 영 하는 것은 메시야 시대의 영이다. 그것은 보좌에 함께하는 교제의 생명으로 교제다. 그런 의미로 영적이다. 구약의 지성소가 휘장으로 가리워져 있어도 거기가 구약 최고의 자리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것이 아니라 영광의 보좌에 계신 분의 상 앞에서 먹고 마시는 그런 교제다. 그런 문제다.
 그렇게 하면 공제설이니 마니 그런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리고 왜 이것이 내 살이고 내 피라고 말하냐 화체설 처럼 영적인 의미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시는 관계가 주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먹고 마심이다. 구약 때는 휘장으로 가리우고 함께 계셨지요. 지금은 그렇지 않고 먹는다. 아들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산 것처럼 너희는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런 완전한 생명의 교제가운데 먹는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지금 구체적으로 먹고 마시는이 생이 그런 생명의 관계로 되어있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애찬하는 문제도 실은 성찬이 교회의 식사다. 교회가 먹는 것은 그냥 땅의 것을 먹는 것이 아니라 휘장으로 가리우고 먹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먹고마시는 이 삶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의 교제로 사는 것이다. 그래야 부정한 자로 먹지 않고 새 시대에 사는 자로 먹는 것이다. 그런 문제를 여기서 말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런 구체적인 말은 하지 않고 답만 이야기 한다. 믿음으로 영으로 어떻게 무협 소설을 이야기 하는 것처럼 하니까 그것이 잘 안된다.
 복음을 이해하면 진짜로 먹는 것이다.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먹으면 마음은 찡하지만 딴것은 상관이 없다. 그러니까 복음의 전파가 생명에로 부르심이다. 그런데 그런 것을 상황적으로 설명을 하니까 말씀은 아무데나 가서 전파해도 성찬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말씀은 은혜를 일으켜도 성찬은 받은 은혜만 강화하고 이런 설명을 할려는 것이다.
 먹고 마시는 모든 생이 주님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그 생의 공동체로 항상 움직여 줘야 하는데 집에서 먹는 것은 다르고 성찬만 거룩하다 그런 설명을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의 상에 모였다는 개념이 안선다.
 복음을 빼버리고 설명을 하려고 하니까 아무리 설명을 잘해도 그렇게 잘 안되는 것이다. 복음에 의해 감동받을 요소가 없다. 복음 외에 신령하게 먹을 방법이 없다. 신약 교회는 보좌 우편에 함께 하는 생명의 교제로 부르심이다. 그렇게 먹고 마시는 것이다. 그랬을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질서가 거룩하게 먹고 마시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전히 먹고 있어도 죽고 있어도 믿음으로 사는 것은 그렇게 사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씀과 성례는 이분화 된것이 아니고 말씀은 은혜를 일으키고 그리고 성찬은 가끔 강화 시켜주고 그런 개념이 아니다.
 초대교회는 거룩한 성찬 없이 모이는 법이 없었다. 우리 말로도 한 솥밥 먹고 산다고 한다. 그런 것이다.
 창세기 처음부터 먹거리 이야기다. 우리는 먹는 것에 대해서는 딤전의 증거대로 감사함으로 먹지 아니하면 부정한 자로 먹는 것이다. 말씀과 기도로 깨끗해 지느니라. 어떤 의미로 예수께서 교회의 주가 되셨으니 모든 것이 생명이니라. 이렇게 해야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 먹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먹으면 모세에게 속한자로 먹는 것이다.
 그러니까 특별히 교회가 모였을 때 우리가 먹고 마시는 일상의 양식이 그 사람들은 한잔씩 하는 것이다. 특별히 잔치집이 아니더라도 그리고 포도주도 안에 앉은 것이 안식이다. 그래서 너무너무 많이 먹어서 눈이 빨개지고 우유를 너무 많이 먹어서 이기 하얗게 됐고 그렇게 하면 풍성한 생명이다. 그것이 어떤 양식이냐 구약에서는 가리우고 먹는 양식이다. 그리고 하루만 먹는다. 썩을 양식이라 그런데 예수님은 아니라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셔라.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산 것처럼 너희는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것이 우리 신약 교회가 먹고 마시는 삶의 질서다. 그것이 특별히 교회안에서 나타난 질서고 우리의 모든 생활에 나타난 질서다. 왜 완성된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구약 때는 아직 완성되지 않는 시대에 완성을 준 것이다. 날마다 주시는데 제 7일에 두배를 주셨지요. 주셨는 것을 완성하러 오셨다. 지금은 완성된 새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도 그 완전한 완성은 시간 질서 후에 있지요.
그래서 교회가 7일주기로 모인다. 안식 후 첫날에 그래도 아직 안주어진 것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주신 것을 누린 것이다. 먹고 마심의 삶의 질서가 지금 함께하는 새 생명의 교제로 먹고 마셔야만 복음에 있어서 부정하지 않는 자로 먹는 것이다.
 복음에 합당한 생명의 씻음이 성례다. 세례로 복음의 합당한 씻음이 성례다. 모세 제도의 세례는 모세 율법이 합당한 교제에로 부르심이고 복음의 세례는 복음의 합당한 씻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약 때 먹고 마심은 휘장가운데 가리우고 먹고 마셨고 신약 때는 가리움이 없는 영광의 빛가운데서 먹고 마시는 교제다. 그렇게 먹어야 복음에 있어서 부정하지 않는다.
 말로는 천주교를 안따라도 어떻게 했냐. 그 예식의 거룩함을 말하려고 하니까 신앙 고백가들이 그 자리에서만 효과가 있느니라 다른데 가져가면 효과가 없느니라 그런 말은 한다. 천주교는 그것은 아껴두었다가 그것이 공급한다고 그러니까 그것은 완전히 미신인데 그런데 우리들도 여전히 그것을 파악할려고 하니까 성찬과 애찬이 이원화 되어버렸다.
그 시간에서만 효과가 있고 시간이 지나면 뮤효다. 그것은 먹어봐야 똑같은 떡이다 이런 이야기다. 그러니까 그것은 괜히 천주교를 막으려고 거룩하고 거룩하지 않는 것이 어디있어, 신약 교회에. 신약 교회는 그런 간격이 없다. 천주교를 대항 할려고 묘한 이야기를 했다니까요. 그러니까 그런 예식이 아니더라도 집에서 먹을 때까지라도 주께서 참 생명으로 이것을 주셨으니 먹고 마시는 그런 삶에서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그런 교제로 살아야 한다. 그의 얼굴을 대면하고 그랬을 때만 그것이 신약 교회의 삶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냐 그것을 시행하시 전에 그것을 성별하는 기도를 한다. 주께서 이것을 표로 삼으셨거든. 그리고 나서 주께서 떼어주면 드디어 그 예식이 우리에게 공급된다. 이런 식이다.
 그런데 구약 레위기는 그런 설명이 아니다. 그들이 먹고 마시는 것을 가지고 오는데 지금은 죽음을 통해서 드리지 않는다. 그냥 드리지 그전에는 반드시 죽여서 드려야 되고 불을 통과 해야되고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 상에 또 불려들어간다. 요리할 때 불로 태워드리고 그렇게 하면 그것이 정화가 되고 하나님 앞에 향내하는 제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향내나는 것이 다시 선물된다. 그것이 대제상의 양식이다. 화목제물은 드리는 임자에게 까지 주어서 먹게 한다.
 그래서 그들은 가나안 땅의 산물을 먹는 정도가 아니라 가나안 땅의 생명이 죽음이 제거된 죽음으로 가나안 땅의 죄의 세력이 제거 된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불로 정화해서 하나님의 상으로 부터 다시 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 앞에 가리운 제물이다. 그것이 그냥 가나안 땅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성화된 새 양식으로 받는다. 그것이 그들이 하나님의 상에서 먹는 것이다. 우리들도 여전히 땅에서 난 것을 드린다. 몸을 주신 주님이 주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는 피흘림으로 드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의 부활에서 끝났으니까 그러니까 그냥 우리가 먹는 것이 아니다. 그냥 먹으면 부정한자다.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이것이 내 살이요 피요 새 생명의 약속안에서 우리가 받은 것이다. 받을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형제를 구제해야 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구약 때처럼 반복된 피흘림은 아니어도 먹는 방식은 구약 때 먹는 방식을 이해를 해야한다. 구약 때 향내하는 제물로 이스라앨 백성이 성화된 양식으로 먹었다.여전히 머고 나면 뒤로 나오고 썩는다. 그래도 이것이 내 살이고 피니라 하는 생명의 교제 가운데서 먹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생명이 부정한 것이다. 항상 하나님 상에서 먹는 방식으로 먹어야 하고 살아야 한다. 그것이 성찬이 지시하는 바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도 천주교를 빼놓는듯 해도 여전히 이원화 되고 그런다. 그런 말을 하니까 말씀은 은혜를 일으키는데 성찬은 가끔 강화 시키는 그런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우리의 먹고 마시는 일반적인 삶에서 우리를 위해서 몸을 주신 분이 이것을 주셨구나. 이것이 우리의 감사의 기도다. 이제 주님하고 먹는 것은 가리우고 먹는 것이 아니다. 그를 대면하고 먹고 마시는 삶이다.
 그래서 그것이 교회에서 집행하는 성찬하고 별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객관적인 삶이. 그런데 구약 때는 그것이 반복된 죽음으로 말미암아 완성되지 않는 시대에서 완성됨으로 받아 누리고 있다. 우리는 이제 반복된 죽음이 없다. 모든 삶에 있어서 주님과 교제하는 생명으로 산다. 그래야 그것이 성찬이고 우리는 교회에서만 집행한다는 의미로 성찬 또 가끔씩 하니까 거룩하고 그런 식이다. 주님이 제정했으니까 교회안에서 목사만 집행하고 이것을 그런데 복음에 부르심으로 모였으니까 그래서 목사가 집행 한것이고 또 제가 한 해석은 만일에 전도사가 교회를 봉사하면 당회 허락안에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 그대신 교회 입회하고 출회하는 치리기관은 그것은 주님이 세우신 정치 기관이다. 거기는 판단을 해야 되겠지마. 성례하니까 목사들이 못하고 설교는 전도사들이 한다. 그러니까 이것이 구분되면은 안된다 하면서도 그렇게 구분되어 있다.
 그러니까 성찬으로 모이지 않으면 모이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당회가 심사해서 합격 됐으면 특별한 사항이 있어서 주의 몸으로부터 배제되는 수찬정지 전에는 그것을 시행하는 것이 장해되는 것처럼 물론 이것을 교회의 정상적인 것은 아니겠지. 교회가 정상적으로 하려면 목사가 있어야 되니까. 그런데 실제로 그렇지 않는 경우들이 있다. 그러니까 겨우 이것이 천주교의 성례식으로 그렇게 됐다. 그런데 이단들은 그렇지 않는다. 목사 없이 자기들 끼리 모여도 성례한다 그 말이다. 그러면 가짜로 모이냐 아니제. 그러면 우리가 조직교회인데 목사 없이 이것을 하는구나 이런 식이다. 그러면 입교하고 출회한다는 의미로는 정치기관이 하는 것인데 그것이 확정됐을 경우는 그렇지 않다. 그런데 설교는 전도사한테 시킨다. 그러니까 실은 목사가 자동 하는 것이 아니라 장로가 없으면 성찬식도 못한다. 왜냐하면 몸으로 받아 들였다는 확증가운데 하고 있기 때문에 장로 없이는 치리도 못한다. 그런 의미로 장로 없는데는 떡상을 들어 줄 사람이 없어서 못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치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못한다 이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냐. 노회에서 임명한 당회장으로 하는 것이지 목사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다. 당회장으로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당회가 시행하는 것이지 목사 개인의 권위로 하는 것이 아니다. 세례 문답도 장로 없으면 노회에서 파송된 노회에서 당회장으로 하는 것이지 이제 목사니까 누구 오라고 마음대로 세례주고 그런 것이 아니다. 교회 조직으로 봐서는 목사가 교회로부터 말씀을 담당하도록 위탁 받아서 한다. 그렇게 회로부터 위탁받은 자만 가르칠 합법한 권한이 있고 그 외에는 합법한 권한을 가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법하다 그런 말이 아니라 자젹이 없다 그 말이다. 가짜다 그런 말이 아니라 정당한 집행적인 권한이 없다 그런 말을 합법이라 그런 말이다. 그러니까 목사 없으면 허위 교회라고 그런다. 그리면 목사 없으면 교회가 없냐 그런 것은 아니거든. 목사는 교회를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지 목사가 전파해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3a 축도도 그것이 정당한 기도문이면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못할 것이 뭐여. 그것이 신약 교회의 특권인데 신약 성도의 인사할 유일한 권위는 삼위 하나님의 축복이다. 그것 없으면 우리는 인사를 못한다. 그러니까 그런 문제들은 우리가 연구를 해봐야할 것이다.
주님께서 너희들이 먹고 마시는 것이 내 살이요 피라는 복음의 약속에 있지 포도주를 많이 마시면 피를 많이 마시고 안 마시면 피를 안마시는 것이고 안 마시면 피를 안 마시고 안 마시면 안 마셨다는 말하고 똑 같은 말이다. 생명의 교제에 참여했는가 하는 문제지 무엇을 받았냐 안 받았냐 하는 문제가 아닌데 천주교가 포도주는 안주었거든. 비싸기도 하고 예수님 피 흘리면 안된다 해가지고 전부 수준이 아이들이다. 신부가 손으로 주면 입벌리고 있고 그것도 씹으면 불경해 그냥 녹여야 되지 그러니 전부 아이들이지 뭐. 그런 식으로 되어 가지고 완전히 미신적이 되어버렸다. 그것이 거의 우리 장로교회에서도 교리적인 권위는 배제했는가 몰라도 영적인 문제라는 것이 개인에다 두면 그것은 똑 같은 일이다.
그래서 은혜의 방편은 분리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분리되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일년에 두번 하거든. 말로 하는 것은 아무라고 할 수 있지 않냐 그것이여.교회가 회로 모였을 때 복음 전파한다는 의미를 이해를 못하고 복음은 아무데서나 말해도 되지만 그런 설명은 안 맞는 이야기다. 복음은 곧 생명의 교제에로 초대이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먹고 마시는 교제 안에서 생명의 확증을 받고 그리고 한 몸으로 교제하는 것이다.
 자녀가 참여하는 이유는 알겠지요? 이것은 나중에 설명을 보면 알겠습니다만 우리의 신앙고백이나 벌곱프의 조직신학을 보면 어떻게 되었냐면 세례는 그것을 받을 당시에만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도 발휘하느리라. 유아들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침례교는 그것을 반대한다. 그래도 성경 약속이 있으니까 아이들도 받아야 되겠거든요. 그런데 중생 안된 사람에게 세례를 준다는 것은 이해가 안된다고 이것은 중생에 대한 개념 문제다. 마음이 죄 지었냐 여기다 두고 있거든요. 이해가 안된다. 그러면 어떻게 하냐 그 때만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따라 적당하게 나중에 효과를 발휘하느리라. 그래가지고 깨달아 봐라 내가 어려서 유아 세례를 받았구나.그 때 드디어 마음에 감동이 왔다. 난 모태 신앙 하나님이 택했구나. 나중에 깨달았는데 효과를 발휘하는 구나. 이것은 진짜 천주교 성례 주의보다도 더 한다. 한번 유아세례를 주었는데 몇십년 뒤에 효과가 나타난다. 천주교는 그때나 직접 효과가 나타나니까 성례주기나 하는데 그러니까 결국 구속사적인 개념을 이해를 못하니까 그것을 벗어날 방법이 없다. 아이들한테 세례를 줄 확증이 뭐냐 중생했다는 있어야 되겠는데 아이들이 말을 못하네 그러니까 가상적 중생 중생했다고 믿고 주느니라. 이런 이야기들. 그러니까 이것은 개인의 출발을 하니까 개인의 변화로 해석을 출발을 하니까 그 해석을 벗어날 방법이 없다.
 그리고 소위 중생과 성례를 일치시킬려고 하니까 천주교처럼 먼저 물뿌리면 중생하고 우리는 성령으로 중생한자가 나중에 물 세례를 받던지 순서가 어떻게 됐던지 그것을 붙일려니까 그렇지 않으면 교회가 가짜가 되어버리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성례식을 개인이 변화되었냐 아니냐에 강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새 시대에 속한 생명의 교제에로 부르심이다. 그런면 어린 아이들은 부모 아래서 생명의 교제안에 산다. 개인이 변화되었냐 안했냐가 문제가 아니다. 그 개인이 변화되었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개인이 인격적인 독립성을 가졌을 때 심사할 것이다. 크기전에 그믿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와 함께 주의 상에서 함께 먹고 마시는 그 교제의 상에서 산다. 그러면 그것이 신령하니까 신령하게 마음이 변했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신령하다는 말은 새 질서에 산다는 그 말이고 그는 부모안에서 그 새 질서에 살고 있는 것이다. 개인이 변화되었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새 질서에 포함 되었다는 의미로 세례를 주는 것이지 중생이 그 개인이 새 질서에 들어왔냐 하는 문제지 개인이 변화되었냐 거기다 강조를 두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물론 새 질서는 가리움이 없는 완전한 생명의 질서다.
 그런데 구약 백성들이 할례를 받았으면 그들은 바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함께 하는 교제 질서에 산다는 표현이지 그 개인이 효자나 아니냐 진짜가 가짜냐 그것을 확증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 개인이 진정으로 변화를 하면 그 제도에 합당한 것을 누리고 살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 제도가 그들의 심판이 될 것이다. 그래서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개인의 변화에 대한 문제 보다도 아까도 말했지만 새 시대에 사냐 안사냐 문제는 분명히 개인의 변화를 포함하는 문제지만 그러나 이 모든 은헤의 표식은 새 시대의, 예수의 부활의 질서에 포함된다. 그 언약에 산다 하는 언약의 표식이지 개인이 변화되었냐 아니냐를 확증하는 것이 아니다. 특별히 아이들한테는, 아이들은 아이가 커서 자기 인격으로 고백했을 때 드디어 드러나게 될 것이고 만일에 그가 그 언약 질서에 살지를 못하면 그 언약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벌을 주므로 정죄 될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부모의 권한에 있기 때문에 스스로 독립한 나이가 되어서 배교적인 것으로 드러나기 전에는 그 언약에 포함시켜야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구원얻은 귀족을 뽑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족 공동체, 생명 공동체를 출생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구약에서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 했을 때 가나안 땅에서 특별히 부모가 하나님의 대리자거든요. 광야에서는 그런 역활을 안한다. 모세가 항상 앞에 있으니까 부모가 그런 역활을 안한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왕과 부모가 그런 역활을 한다. 그냥 성육신적인 의미는 완성적인 의미이니까 그 때는 모세가 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도 죽고 없고 부모가 그 일을 한다. 그러니까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준 땅에서 장수하리라 하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단순히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신학적인 접근 방식이 아니라 언약의 땅에서 장수를 말하면서 그 아비를 지적하고 있는 것은 이제는 하나님께서 함께했던 그 언약의 질서가 가나안 땅에서 그들의 일상적인 삶으로 구현 될 것이다. 그랬을 때 마치 즉위의 왕이 솔로몬인 것처럼 아비가 하나님을 대신하는 그런 완전한 교제 질서로 진행이 되어야 완성이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두려워서 자꾸 모세 얼굴만 비쳐가지고는 안되는 것이다.
 그것은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다. 고전 10장에 있는 말이다. 부모중에 한명만 믿어도 자녀는 거룩하니라 하는 문제가 그런 말이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포함되기 때문에 그들도 그들의 의지하고는 상관없이 그런 의미를 부모가 누리를 교제의 생명으로 살고 그가 인격적인 자기 고백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만일에 그가 그 은혜의 약속을 따라 살지 못하면 배제 될 것이다.
주의 약속에 참여하지 못하면 정죄되는 것이다. 그냥 너는 괜찮으니까 저만큼 있다가 나중에 받아라 그 말이 아니라 정죄 되는 것이다. 그러면 가상적인 세례니 변화됐니 하는 말은 상관없는 말이다. 부모는 인격적으로 사니까 인격적인 변화를 주어야 한다. 어린 아이들은 부모의 공급과 가르침을 따라 그 안에 포함되어있다. 그들이 부모에게 순종하면 그 안에서 그 약속을 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거절하면 배제 될것이다. 그러니까 가상적인 중생이니 하는 것을 따질 것이 없다. 주의 성찬과 세례를 한꺼번에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무엇이냐?

아담이 에덴에서의 사명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사역에 참여하는 것이 아담의 사명이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다스리고 주관하라. 그러면 그것은 아담에게서 우리 모두에게 주어졌다고 자꾸 우리가 반복하는데 특별히 아담에게 주신 사명이다.
 그러면 모세에게 주신 사명은 무엇인가? 당시 제사장 민족으로 그들이 하나님을 따라 삶으로 천하만민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증거하려는 것이 사명이다.
 그러면 신약 교회의 사명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안에서 완성된 구원에로 막 만민을 모으는 일에 하나님의 동행자로 구원이다. 하나님의 역사에 인간이 참여하는 것이 생명이고 구원이다. 하나님의 형상이고.
 이방인에 대한 바울의 사명은 이방인을 포함한 구원이 왔기 때문에 바울을 그렇게 세운 것이지 만일에 그렇게 안했으면 그런 사명자가 없다. 그러니까 심지어 예수께서도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왔다고 그러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약 교회는 바로 죽음의 권세로부터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일에 동행자로 부르시는 것이다.

 교회 정치

정치는 여기 보니까 국가 교회, 에라스티안파의 제도지요. 감독파, 천주교도 보이고 회중파 교회는 소위 대중 회중 정치고 국가 교회는 루터파 교회가 가지고 있는 교회 개념이다.
천주교 개념은 단독교회하고 교회 개념이 또 다르다. 천주교회는 국가 위에 교회다. 그것은 중세 때 가졌던 교회관인데 왜냐하면 신성 로마제국의 국가를 천주교 교황이 정하잖아요. 그래서 세상 국가는 만왕의 왕의 통치를 받지 아니하고 교회의 통치를 받는다 이정도 있는 것이 천주교 정치지 그냥 단독 정치하고 똑 같은 형태는 아니다. 구조는 비슷하게 있어도 그들의 높이는 감독 교회는 교회조직에 있어서 감독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권세를 위임 하셨다는 그런 개념이고 천주교는 그보다 더한 개념이다. 그들은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대리 기관으로서 교회에서 국가 위에 있다. 천주교 정치는 국가까지 포함하는 정치개념이다. 그러니까 지금도 세계적인 정부를 가지고 있다.
지금 요즘 교회는 어떤 것이 유익할까! 회중파 교회가 유익할까. 그들은 좀 깨었다고 할까. 교단에서 떠난다는 식은 회중파 교회인데 단독교회의 왕이다. 그러나 김일성 왕 같아서 민주국가가 될 수록 권해서 내려 앉히기라도 하는데 이것은 힘들다.
 그러면 장로교회의 정치는 어떤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고 모든 권위의 원천이고 그리고 직분자들에게 주신 권위는 봉사적인 권위지 기원적인 권위가 아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는 의미는 두가지 의미로 머리인데 유비적인 의미와 통치적인 의미가 있다.
 유비적인 머리는 생존의 연합 문제로 머리이고 통치적인 머리는 권세로서 머리다. 정치는 권세로서 머리에 대한 것을 시행하는 것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여서 그가 친히 통치하신다. 교회 직원들을 통해서 통치하신다. 그것은 성경에도 나와 있다.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고 단지 다수결의 정치는 아니지요. 이 권위는 직원들이 가지고 있는 권위는 말씀을 봉사함으로 가지지 스스로 가지고 있는 기원적인 권위는 아니다. 그런데 이 권위는 파괴하는 권세가 아니고 세우는 권세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여기보면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모든 권위의 원천은 그리스도시다.

그리스도는 말씀을 수단으로 하여 그 권위를 행사하신다.

여기서 말씀을 수단으로 한다 했는데 구약 교회의 개념하고 대비를 시켜야 되지 이것을 세상 정치제도하고 대비 시켜서 예수는 만왕의 왕이신데 세상 통치를 위해서는 왕을 세웠고 교회 통치를 위해서는 교회의 직분자를 세우셨다. 이제 두 왕국 개념으로 정립을 하면 옳지 않고 구약에서 하나님의 통치의 권세가 신약에서 어떤 방식으로 집행되는가. 그런 교회 완성 그런 관점에서 개진이 되어야 옳다.
 구약 때는 모세 제도안에서는 치리권자들이 있고 그리고 잘못하면 당장 죽인다. 구약 직분 자체가 어떤 의미로 파괴하는 직책이다. 왜 고린도서에서 말하기를 죽이는 직책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안에서 신령한 직책은 살리는 직책이라고 말하고 있다. 모세 제도가 죽이는 직책이고 정죄하는 직책이라고 그런다.
우리는 바울이 너희들을 파하지 않고 세우려는 이 권세를 따라 했을 때 내가 가면 그냥 너희들을 매질해야 되겠는데 매질하지 않고 오래 참았다가 살릴려고 그런다.이제 그런 개념이 아니라 자기 직무에 탁월함을 이야기 했을 때, 파할려는 권세가 아니라 세우려 하는 권세다 했을 때 하는 말은 모세 제도하고 대비된 의미로 이야기 한다.
참 쉽고도 어려운 말인데 왜 모세의 권세가 죽이는 권세고 죽이는 직분이고 정죄하는 직분인가? 왜 그리스도의 그리스도의 직분은 영의 직분이고 살리는 직분인가. 그것이 모세 제도와 복음과 대비되어야 설명 될 문제다. 그랬을 때 바울이 하는 말은 내가 지금 화나서 안가고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신령한 직분, 새 시대의 영의 직분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화날 때 가면 너희를 한번 봐줄것인데 내가 참고 있다 그 정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바울이 화나서 가도 그것은 살리를 영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구약과 대비된 방식이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말씀을 수단으로 해서 그 권위를 행사한다 했을 때 까지라도 그것이 그냥 국가는 칼을 가지고 있는데 교회는 칼을 가지고 있지 않고 그것은 어떤 으미로 봐서는 당연한 이야기다. 왜냐하면 교회는 섬기는 직분일 뿐만 아니라 큰 자는 작은 자를 섬기라 그랬고 이것은 가족 공동체이기 때문에 분명히 물리적인 힘을 가지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해야 될 것은 구약과 대비된 완성의 방식을 말하는 방식으로 설명이 되어야 성경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국가냐 교회냐 이것을 대립해서 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새 인류로서 교회를 설명하는 것이지 소위 국가론 교회론 그건 구조론이 아니다. 어떤 의미로 모세의 직분이 정죄의 직분이고 신약의 직분은 영의 직분이고 살리는 직분인가. 고린도후서 4장에 있는 말이다. 모세 제도 자체가 또 다른데서는 사람의 교리라그런다. 또 복음서에는 사람 앞에서 행하지 말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앞에 행하라. 그렇게 6장에 말을 하고 있다. 그런 말을 우리는 외식하지 말라 이것으로만 보고 있다. 요셉 같은 사람도 내가 어찌하여 하나님앞에 내가 큰죄를 지으리요 했거든. 그러면 괜찮은가? 그러니까 마태복음에서도 가짜가 되지 말고 진짜가 되라는 그 말이 아니라 새 시대의 의를 지금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사람 앞에 행하고 하는 것은 모세 제도의 의다. 왜냐하면 모세 제도라는 것을 사람이 세운 중보적인 직임의 감독을 받아야 된다. 그 앞에서 판정을 받아야 되고 그런 것인데다가 그것은 정죄의 직분인 것이 그 직분을 제대로 다 시행해도 온전한 생명을 주지를 안해요. 제대로 다해도 오히려 죄와 사망가운데 갇히는 것이다. 그것이 모세 제도가 말하는 묘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분명히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안에서 산 직분에 대비해서 설명했을 때는 여전히 죽음에 갇힌 것이다. 그 직분을 제대로 잘 시행하면 제대로 죄 아래 갇히게 된다. 그것이 정죄의 직분이고 자유가 없다. 이길 수가 없다.
그러나 바울의 직분을 영의 직분이고 새 생명의 직분이고 살리는 직분이다. 그리스도의 직분이기 때문에. 그것은 영원히 죽음을 정복한 자의 직분이기 때문에 그것은 그리스도아 함께하는 교제 가운데서는 부활의 생명의 영의 생명, 새 생명으로 살지 모세 제도의 생명의 방식으로 죽음에 갇히지 않는다. 그것은 죽음을 영원히 이기신 자유하는 인격을 말한다. 그러니까 고린도교회가 가짜라고 스스로 쫒아 내버린 것이다.
 구약 교회 같으면 그렇게 못한다. 감독자를 쫒아내야 되고 그곳을 불질러야 되고 그렇게 해도 여전히 그 제도 아래 갇힌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가짜를 분별하고 이겨 낼 수 있는 성숙한 방식으로 임하지 않는다.
고린도 교회는 거짓 선생이 완전히 진을 쳐버렸거든. 그래 가지고 바울은 멀리서 왜 확신한가 주님의 영광을 보는 직무다. 완전한 빛이 임했거든요. 그러니까 어둠을 이긴 직분이다. 그러니까 그가 그 직무를 수행해서 그리스도를 증거했을 때 이것은 영원한 생명으로 나타나고 어둠은 벗어버린다. 그것이 고린도후서에서 하는 말이다.
그래서 그동안 너희들이 했냐 어떻게 빛과 어둠이 함께 할 수 있느냐. 묘하구나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모든 것이 개인의 어떤 이해력 바울이 화나도 조금 참고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다. 그 직분이 무엇인지 그것으로 해석이 안됐다. 바울이 아무리 오래 참았어도 그것이 모세 제도의 의면 그들에게 완전한 생명을 주는 직분이 아니다. 여전히 고쳐 놓고도 여전의 죄의 어리석음에 가두어 놓는 식이다. 그것은 못 벗어나는 것이다. 왜 휘장으로 가리우고 있는 직분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가 없다. 그것은 자유와 빛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면 이것은 휘장은 벗겨지고 자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살리는 직분이고 교회가 우둠을 이겨낸다. 그런 이야기다.
 모세가 제 아무리 직분을 잘 감당해도 정결케 못한다. 무슨 말인가 알겠지요. 그러니까 구원 역사적인 생명의 질, 제도 아래 있는 것이지 개인이 얼마큼 변화되었냐 거기다 강조할 것은 아니다. 아이가 제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아이다. 벗어날 방법이 없다. 그렇게 했을 때만 단순히 바울이 얼마큼 참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부활의 영 그리스도의 생명의 권세가 무엇인가. 바울이 비록 멸시와 천시를 받고 쫒겨나 있고 그 교회에 가보도 못하고 편지를 쓰로 있고 제자들에게 챙피를 톡톡히 당했다. 이런 상황인데 그런데도 바울이 능히 승리한 이유가 있다. 이것은 모세 시대에 가리운 직분이 아니라 명명 백백하게 우리가 볼 수가 있다. 그것이 우리가 목회하는 희망이고 능력이다.
 우리가 누구길래 사람을 가르치겠는가? 그러니까 여기서 말씀으로 수단으로 한다 했을 때 그것은 세상 정치 칼과 대비 된 식으로 설명할 것이 아니고 구약 교회가 어떻게 봉사했는가. 그것과 대비된 방식으로 말씀을 이야기 해야한다. 그랬을 때 그 말씀은 복음의 말씀이 되어야 할 것이고 그냥 설득하고 기달리고 그런 말이 아니다. 구약 때는 교회가 그런 식으로 정치를 안했다. 모세 제도안에서 정치하셨다. 거기는 칼은 든 왕도 있고 부정하다고 쫒아낼 제사장도 있고 그렇게 되어있다. 그러나 거기서는 자유하는 직분이 아니고 오히려 가두는 직분이었다. 그들이 따라 살면 살 수록 제대로 모세 제도안에 갇힌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복음의 말씀으로 통치하신다. 그려면서도 자유다. 그런데 이것은 칼은 두고 설득하고 있다는 이런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설득해봤자 안된다. 복음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자유를 주고 생명을 주고 교회를 치료해 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소리 지르는가 안지르는가 이것 밖에 안된다.
여기는 어떻게 됐냐면 그리스도안에서 교회를 무력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이제 이런 말하지 말고 어린 아이 교회를 다스렸을 때와 장성한 교회를 다스렸던 정치를 이야기 해야 구원 역사에서 정치를 이야기 하는 것이지 세상 제도와 교회 정치를 대비 시키면 그것은 옳은 방식이 아니다. 그런데 구약 때는 힘의 원리가 분명히 지배했다. 왕이 있고 백부장 천부장이 있고 재판하고 죽이고 쫒아내고 그런 정치가 아니라 이제 그 역사가 완결 됐기 때문에 그 영으로 말씀으로 다스린다 했을 때 권위의 표준이지만 교리적인 이야기제! 복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교리에 대한 이야기다. 성경은 일점 일획도 어기면 안된다고 했으니까 들으라. 왜 헌법대로 시행하는 법관 이니까 들어라 이 말 밖에 안된다. 그 말이 아니라 복음 때문에 사역자가 권위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의 말씀으로 통치한다. 이 말은 영으로 통치한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그런 말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구원 역사적으로 개진해야 신약 교회의 승리가 나타나고 그냥 무력이냐 화평이냐 이렇게 하면 소위 방법론 이야기지 복음하고는 무관한 설명이 되어버린다. 교회는 무력적인 단체가 아니다. 이런 이야기 밖에 못한다. 물론 그것이 필연적으로 포함이 되지만 그것은 복음이 성숙 때문에 포함 되지 국가와 대비된 방식으로 설명된 것이 아니다. 그러면 구약 때 교회는 무엇이냐 아 그것은 국가가 교회이기 때문에 그런다. 물론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구약 때는 중보자가 칼든 왕이다. 지금은 죽음의 궈세를 이기신 왕이다. 구약 때는 칼의 권세가 악을 제재하고 적군을 이긴다. 지금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분이 그 일을 하신다. 그런 이야기지 국가냐 교회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구약적인 중보제도는 구원 역사적인 중보제도지 국가는 무엇이냐로 자꾸 생각한다. 교회와 국가가 일치 왜냐하면 분명히 이스라엘이 국가 였거든. 그것을 일치 시키라는 개념 설명이 아니다. 중보직임자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니까 이제까지 교회를 어디다가 대배해서 설명을 했냐면 국가에 대비해서 설명을 했다. 그러나 모세 제도 어린 아이교회와 대비된 교회 설명이 되어야만 진정한 생명의 능력의 통치지 국가와 대비된 교회 통치로 한 것은 그것은 구원 역사적인 설명이 아니다. 단지 구약에서는 우리가 구분하는 식으로 하면 교회와 국가가 일치된 것은 주님께서 만왕의 왕이고 재림하시면 만국의 권세가 그 앞에 복종하게 될 것이다.
조직신학적으로 말하면 권세적인 왕국가 은혜의 왕국이 구분이 없다. 그 때는 하나가 되겠지요. 물론 그런 의미로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때는 국가냐 교회냐 문제보다도 국가가 모세 제도에 포함되는 국가 개념이지 그냥 국가와 교회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그래서 구약의 중보자는 칼로 자기 백성을 보호하고 적군을 이기고 여호와의 사자도 칼을 들고 여호수아 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신약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심으로 그 왕권이 완성됐지 칼 들고 하는 문제는 아니다. 그러니까 구약 통치와 신약 통치를 대비 시켜야 신약 교회의 정치 문제가 드러나지 국가와 대비 시켜가지고는 안된다. 국가와 교회는 전혀 다른 질서다. 그것을 대비시켜 가지고는 설명이 안되는 것이다.
교회안에서 다스리는 자는 누구나 다 그리스도로 다 옷입혀 졌으며 그래서 교회가 지배를 받는다. 복음의 권세 때문데 교회가 어둠의 권세를 이기고 복종한다.
3b
성령은 부활자의 영이거든. 죽음을 이기신 분으로 영의 통치다. 그렇게 되어있다. 왕이 그리스도안에서 교회안에 권세를 주셨다. 교회 권세는 기원적인 권세가 아니고 봉사적인 권세다.
 그리고 4번을 보면 이 권세는 기본적으로 지교회에 있다. 하는 것은 개념이 좀 잘못 되어있다. 이 권세는 기본적으로 지교회의 치리회에 있다. 여기서 지방교회와 대회로 확대되는 것이다. 모든 지교회가 자치권을 소유하나 자연히 다른 지교회가 관계 때문에 자기 권한을 제한하고 그런 설명이다.
 이것이 우리 정치에서도 설명하는 방식이다. 똑같은 권리를 가지는데 서로 확대하면 서로 사랑하고 양보하고 일치될 것이 아니냐 서로 확대되기 때문에 자기 권한이 제한 되는 것이다. 사랑이 원리이니까 이런 해석을 했다. 그런데 그것은 다른 설명이다.
우리가 장로교 하는데도 노회 이름을 붙인다. 교회가 보편교회고 지교회는 그 가지교회다. 그러니까 모든 치리회는 노회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천주교하고 맞아 들어가는 것같지요. 노회는 목사와 장로로 구성되어 있거든. 천주교가 교역자가 구성된 것만 교회고 나머지는 배우는 교회라고 그러거든. 그런데 장로교는 그것하고는 다르다.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노회가 마치 천주교하고 비슷한 것 같지만 교회는 치리하는 정치기구는 직원한테 주었지 교회에게 준것이 아니다. 성경에 보면 장로를 세우서 하도록 했거든요. 그런데 천주교는 그 장로가 주교가 교인 총회의 투표로 되지를 않는다. 그런데 장로교는 교인의 투표를 받아야 대표가 될 수 있다. 그래도 그 특권은 직원들에게 있다. 어떻게 보면 친히 할일도 장로교 정치에서 한다. 이것은 단순한 대리 정치 개념이 아니다.
그러니까 지교회는 어떨 때 독립적인 성격을 갖느냐 하면 노회의 구성을 가졌을 때 독립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것이 완전한 당회다. 두 명 이상의 장로와 노회에서 파송된 노회장 목사 담임 목사가 아니라 노회에서 파송한 당회장이다. 노회가 항상 교회를 살핀다. 그러니까 내가 담임 목사를 해도 노회가 다른 사람을 당회장으로 보낼 수가 있다. 담임 목사하고 교회가 문제가 있다고 판단이 되면 그러면 설교는 하고 다해도 치리는 못한다. 그냥 치리권은 당회장이 갖는 것이지 담임 목사가 갖는 것이 아니다. 당회권은 노회가 교회를 짐임에로 목사를 위임한 권한이다. 당회와 함께 그 때 치리권을 행사할 것이다. 장로 없이는 치리 못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권세는 독립적으로 지교회가 갖고 확대의 의미와 노회와 대회를 설명해 가지고는 안된다. 본래 교회 개념은 노회 개념이고 그리고 교회 보편적으로 모일 수 없기 때문에 지교회가 있는 것이다.
 그래도 교회안에 문제가 있었을 때는 그냥 확대 회의로 모인 것이 아니라 사도적 교훈의 통일성을 위해서 사도행전 15장에 모인다. 서로 교파가 같아서 모인 것이 아니라 이것이 사도적 교훈이냐 그것으로 모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바울이 말한 것처럼 너희는 예루살렘 교회가 아니면 어디서 교훈을 받았냐 너희는 어디서 왔길래 예루살렘 교회와 같이 다른 교회도 여자가 사납다고 그러냐.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초대교회를 보면 보편 교회 개념을 가지고 있다. 사도가 세운 보편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고 그런 교회가 여기 저기 지역적인 특성을 따라 모이고 있는 것 뿐이지 지교회가 특수하거나 하는그런 설명은 옳은 설명이 아니다. 그런데도 지교회가 노회적인 성격을 가지면 그것도 독립적으로 노회적인 기능을 발휘한 것이다. 목사와 장로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회에 장로 없으면 안수 집사 못 세운다. 치리자가 없으면 치리를 받는 자를 세울 수 없다. 목사도 위임을 못한다. 소위 거기서 계속 일을 못한다. 일년마다 신임을 받아줘야 한다. 그리고 노회에 항상 보고해서 처리해야 하고 노회에서 일년마다 인정해줘야 되지 장로가 없으면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교회가 인격화 되어있다. 그 교회가 자기 치리자를 선정 할 수 있으면 그 때는 교회가 독립적인 기능을 발휘 할 수 있다. 그리고 장로로 두명 이상 이어야 회적인 기능을 가지지요. 장로가 둘 이상이 되어야 완전 당회가 된다. 아무리 똑똑해도 한명이면 회적인 성격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니까 다스리는 권세는 기본적으로 지교회에 있다 하는 말은 맞지 않고 교회는 노회적인 성격이다. 지교회는 노회적인 구조를 가졌을 때 드디어 기능 발휘를 한다.

교회의 창설직과 항존직
창설직은 그때 한번만 있는 직이고 항존직은 주님 오시도록 있어야 할 은혜의 직분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도 선지자 예언자 당시 교사도 있다. 전도자도 있고 빌립 같은 사람. 사도들은 교회의 설립 시기이고 사도적은 은사가 교회 시대에 그대로 온것이 아닙니다. 항상 그것을 설립하는 시대는 새 창조적인 시대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시대는 그것을 보편적으로 누리는 시대다. 보편적으로 누린다 그 말은 계속 그 직분이 나타난다 그 말이 아니라 그것을 출발시킨 은혜가 계속 누려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도를 통해서 교회 토대는 영원히 놓아졌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온전하게 설명되어서 주어졌다. 더 이상 사도는 없다. 사도 시대는 그런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예언자들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복음의 은혜들을 예언하면 거기 분별하는 자들이 있어서 그것이 하나님께로 온것인지 분별하고 그렇게 하고 있다.
그리고 예언자들은 사도행전에 보면 개인이나 교회의 미래를 말하기 때문에 단순한 개인 이야기가 아니라 바울의 미래를 말했다. 그것은 어떻게 이방인에게까지 주의 은혜의 복음이 유대인으로부터 배척되겠는가. 하는 그런 이야기지 단순히 당신 미래가 이러니까 조심하시요. 그런 수준에 알아 맞춤이 아니다.
 신약 시대의 능력은 사랑의 능력 앞에 죽음이 있어도 우리가 능히 걸어갈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이지 미래를 알아 맞추고 모든 것을 다 아는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는 가져도 미래가 어떻게 될것인가 하는 그런 지혜는 가지고 있지 않다. 물론 죽음을 넘어선 영광의 미래를 보고 있지만 내일 일이 어떻게 될것인가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다. 구약 성경에서 그런 자는 신명기에서 죽이라고 그랬다.
그러니까 개인 미래를 알아 맞추고 하는 것은 자기 생각들이다. 또 그렇게 알아 맞춘다고 해도 성령의 역사는 아니다. 이들은 자기의 미래가 불안하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앞에 죽음이 있어도 미래가 불안하지 아니하다. 그것은 신약 시대의 지혜이고 능력이다.
 그러니까 자기 미래를 알아 맞출려고 그러지를 말아라. 그러니까 예언자란 말은 예언의 영이 예언이다. 그리스도를 대언한 대언의 영이지 그냥 개인의 일을 알아 맞추는 일이 예언이 아니다.
예언자 선지자 하는것은 대신해서 말한다는 개념이지 미래를 말하는 그런 말이 아니다. 대신해서 말한다는 것이 근본적인 의미이고 미래를 말해도 때가 되면 나타날 그의 고난과 영광을 위한 미래지 개인의 미래를 알아 맞추는 것이 아니다.
 구약 성경에도 보면 아간의 미래도 알아 맞추기도 하고 그렇다. 그것은 단순히 미래를 알아 맞추는 이야기냐 그것은 사람의 선언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지 미래를 점치고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을 대항해서 망할 것인가. 심지의 바벨론의 멸망과 국가적인 멸망까지 아마 그런 점쟁이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단순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하나님의 판결에 대한 문제지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부 개인의 미래에 대한 문제다.그러면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문제를 알아 맞추는 문제는 지금 완결된 것이다. 지금 승리가 나타남으로 구약이 다 완결 된것이다.
망하고 흥하고 하는 모든 문제는 죽음을 이기신 신약의 교회에서 완결된 문제다. 그러므로 그런 의미로 대언의 영으로서 예언이지 단순히 개인이나 국가의 미래를 알아 맞추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초대교회 때 창설직원이 그런 직원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복음이 완결된 뒤로는 그런 사도도 없다. 사도가 없는데 예언자는 있겠어요? 없지요. 지금은 목사와 장로와 집사를 세웠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은혜의 직분에 나타난다. 그래서 예수의 선지자 직은 하나님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은혜의 일들을 말씀의 선포인 목사직에서 나타나고 그리고 교회가 하나님께 복종하도록 하는 왕적인 기능은 치리 장로직에서 나타나고 그리고 교회가 몸의 교회로서 서로를 봉사하는 제사장 직무, 긍휼의 사역은 집사직에서 나타난다.
이것은 사람과 관계 된것이 아니라 공동회로부터 다 자기 직무에 독립적으로 위탁을 받은 것이다.
장로 없으면 목사 혼자 내가 삼중직 겸직이니까 그렇게 못한다. 직무상 이야기를 한다. 공동회로부터 독특한 자기 영역에로 위임됐으니까 그러면 왜 목사가 이런 저런 일에 끼어드냐? 봉사한다는 의미로는 다 같다. 그러나 집사직을 시행하는 것은 목사가 못한다. 그것은 집사회가 하지 목사가 끼어들지 못한다.언제 목사가 끼어드냐 말씀의 통치를 받았다는 의미로 목사가 가르치는 장로를 배나 존경하라고 그래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지 제일 높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회장은 지시하는 직분이 아니라 회의를 인도한다. 회를 대표하고 그런 것이지 그냥 당회장이 항상 왜 회장이냐? 당회원은 똑 같은 회원이니까. 투표해서 장로를 뽑아버리면 되지 그런 개념보다도 항상 노회가 교회를 관할한다. 그래서 노회로부터 파송된 당회장이 항상 당회의 사회를 한다. 그러니까 다른 회의 개념하고 다르다. 혹시 노회는 장로가 회장 할 수가 있다. 교회가 파송한 동일한 회원이니까. 그러나 당회장을 파송했으면은 그것은 노회적인 권위로 가는 것이지 우리 당회원이 똑 같으니까 여기서 회장을 뽑자고 그런 말은 안 맞다 그 말이다.
그래서 항존직은 목사 장로 집사인데 늙어 죽도록 그 직무에 있으니까 직분에 항존이지 직무자에 항존이냐 해가지고 어떻게 합니까 은퇴 연령을 정하자 그렇게 한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한것이 아니라 은혜의 직무에 불렀으면 하나님이 그 은사를 거두기 전까지는 교회가 그 은사가 끝났다고 판정하기 전까지는 봉사하는 것이 맞다. 이것은 취직하고 다른 것이고 그러니 교회가 판단을 해야 하지 서로 체면상 못한다. 장로는 3년마다 시무 투표를 하는 것이 가하다. 해도 좋고 안해도 좋고 하는 말이 아니라 하라 그 말이다. 한자 말이 그런다. 가하다 하는 말은 하라 그 말이지 보니까 장로들이 위험하거든. 장로는 목사도 장로 아니냐. 그것은 치리 장로를 법적으로 하는 말이거든요. 교회 헌법에도 치리 장로는 목사를 하고 있는 말이 아니다. 목사는 따로 칭호를 두고 있으니까. 봐라 법적인 용어를 성경 용어로 바꾸어 가지고 목사도 장로라고 했는데 그냥 같이 시무 투표를 하자 그래야 목사가 훨신 인기가 없거든. 왜냐하면 교인들 중에 목사는 바꿔도 좋은데 장로는 물주로 있어 줘야 한다. 든든한 장로 기둥같은 장로가 그런데 공평하게 안한 것도 공평하게 한다. 이혼하면 처벌하는 것도 공평하지만 처벌 하는 것도 공평하게 한다. 법은 공평하면 되는 것이니까. 요새는 둘이 처벌 안하는 것이 공평하다고 그러든가...
그것은 죄는 아니다. 결혼 질서만 지켜라. 둘이 좋다고 살면 교회가 벌을 안주겠고 일남 일녀로만 살아라. 수급 계획만 조절할려고 하는 것이다.
정년은 의미적으로만 해났다. 몇세부터는 정년 퇴직으로 인정하는데 해도 좋고 안해도 좋고 그 말이다. 그러나 50살 때 퇴직해놓고 나는 정년 퇴직이요. 그렇다고 교회가 그 사람에 대해서 노후 대책을 세우고 할것이요. 그것은 안하지. 몇 살부터는 정년으로 인정한다. 이렇게 한계를 정해 놓는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가 정할 문제지 몇살 되니까 자동 퇴임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 나이가 되면 자기도 내가 벌써 그 나이가 된는가 계산을 해봐야되고 교회도 은사를 분별해봐야 되고 그런데도 힘이 있어서 더 잘할 수 있으면 더 해야되지. 젊은 후임자를 위해서 앞 사람은 물러나십시오.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런데 그 정신을 살려서 그렇게 해났다.
그런데 교회 정치는 현재 있는 것과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 세칙을 정한다. 그렇게 해났거든요. 그래서 국가적인 정년퇴임을 끌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의 정치 원리하고는 맞지 않다. 획일화 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일찍 퇴임 했으면 글을 쓰면 될것이 아니냐. 강연하고 다니고 그것도 교회 봉사 아니냐. 그런데 본래 교회 봉사한다 그 말은 손으로 봉사하는 것이지 어디 나가서 글쓰고 강연하고 그것을 성경은 교회 봉사하고 하지 않는다. 교회 봉사는 그의 직책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지 어디가서 설교 쓰고 있으면 교회 봉사고 은퇴해서 그것이 효과는 더 있을 란가 모른다. 그러나 그가 은혜의 직분 하나님이 친히 직분을 맡기셨거든. 그러니까 그런 사변적인 이야기를 끌어 들어오면 안된다.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가 분별할 수 있도록 나이를 지시했어도 강제규범은 아니고 교회와 사역자가 하나님 앞에서 판단해서 결정할 일이다. 은사가 사라졌는데 봉사한 것처럼 괴로운 일이 없다. 자기가 교회에 이야기 하고 물러서야지. 노후 대책 때문에 그러겠지. 그렇지 않으면 가르칠려는 재미 때문에 그러든지. 늙어지면 힘이 전부 입으로 온다고 했다.
그러니까 삼중직이 목사에게 있네 하는 것은 맞지 않다. 이것은 견제의 원리도 아니고 견제 원리는 세상 청치 원리지 교회의 원리는 아니고 주의 은혜의 직무에 대한 일이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터위에 세워진 교회 했을 때 선지자는 구약 선지자가 아니고 신약에 사도들과 같이 있었던 선지자들이다. 왜 교회는 바로 사도들의 터위에 서있지 구약 선지자들의 터위에 선것이 아니다. 분명히 구약에서 그 역사가 진행 됐어도 주께서 새로 불러 세우신 사도들 열두 족장들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새로 불러 세우신 사도들 그리고 사도적 은사로 함께 봉사했던 선지자들 그런 자들의 터위에 세워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터위에 세웠다 하지 않고 사도들의 터위에 세웠다고 합니까? 예수는 모퉁이 돌이다고 했는데 사도들이 세웠다고 그러는가. 사도 교회라고 그러지요. 왜 그러는가. 주님께서 부활하셔 영광의 보좌에서 그 의의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 사도들을 통해서 하신 일이다. 주님께서 세웠다 하지 않고 사도들을 세워서 하셨다는 말이 그런 말이다.
그러니까 바울의 사도직은 새 시대에 주어진 은혜의 직무다. 예수께서 세우셨다고 하지 않고 사도의 교훈으로 세워진 것이 오히려 예수께서 땅에서 교회를 세우신 것이 아니라 부활자로서 그의 사도들을 통해서 세우신 것이 그것이 교회의 질서다.
사도의 권세는 그런 의미로 그리스도를 대행하는 권세가 있지요. 어떤 권세로 대행입니까? 부활자로 권세를 시행하는 분이 그 의다. 그랬을 때 그것은 어떤 의미인가? 부활자가 사도들을 통해서 그 은혜의 일을 나타낸 것이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들이 기도하면 그들이 원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줄 수도 있지요.
사도행전에 그렇게 되어있다. 그들이 기도하면 죽은자도 살지요. 왜 그러는가. 그것이 부활하신 주님께서 종들을 세우셨기 때문에 그렇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도들을 통해서 그 역사를 계속하시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부활하신 분의 중보직은 사도직에서 나타난다.
왜 교회가 권세가 있는가? 이제는 성령이 주의 백성안에 친히 거하시기 때문에 그렇다. 구약 처럼 어떤 중보적인 직임자들을 하나님이 특별히 불러 세우고 사람들은 그 직임하는 통해서 하나님을 배우고 또 하나님을 봉사하고 예배도 그들을 통해서 한다. 그런 것이 아니고 이제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을 불러서 하나님 앞에 경배와 찬양을 드린다. 그리고 교회가 하나님의 은사들은 분별한다. 누구 목사해라 음성이 들리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하나님의 은혜의 일들을 분별하고 찬양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직분자들은 그 은혜를 주님으로부터 받는 것이고 교회는 주님의 은사를 분별하는 것이지 교회가 누구에게 기원적으로 은혜를 선물해서 누구를 세우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영이 선물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보좌에 함께 앉은 그런 교제질서로 산다. 그래서 교회가 그런 권세가 있다.
 물론 이 권세는 여러면으로 설명이 될 수 있다. 봉사권, 교리권,또 치리권. 결국 항존직에 대한 문제겠지요. 그런 권세가 있다. 그런데도 그 권세는 어디로서 오고 누가 시행을 하느냐. 교회가 뽑는다. 교회가 다수결로 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가 그 은사들을 분별하고 뽑는다. 만일에 교회가 그들을 뽑아 주지 않으면 그 권세를 시행하지 못한다. 더구나 교회에 장로가 없으면 시행을 못한다. 그래서 그 치리권은 교리적인 치리권, 도덕적인 치리권 그렇게 설명을 한다.
그래서 질서를 잡는 치리권이 있고 또 도덕적인 문제를 분별하는 성결에 대힌 치리권이 있다. 그런 것은 여러분이 읽어보면 알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가지고 있는 것은 어떤 권세가 있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고 믿음의 항목들을 정리하고 신앙하고 고백하는 것을 교회가 한다.
그러면 구약 교회 같으면 그 일을 하면 안된다. 하나님이 불러준대로 모세의 토대위에서 선지자들만 하고 있는 것이지 교회가 회로 모여서 이것이 정경이며 정경으로 확립하고 이것이 성경을 바르게 해석한 것이며 어떻게 봐서는 자술서 낸 식이다.그것이 소위 교회가 가지고 있는 교리권이다. 구약 같으면 하나님이 문둥병을 들게 하던지 그런 방식으로 하시는데 교회는 그런 방식이 아니다. 그러면 그것만 아니라 형제를 위해서 사랑의 수고를 감당하는 것도 권세다.
그러니까 항존직에 대한 문제들이다. 왜 교회가 그 일을 하느냐 주님께서 친히 교회 임하셔서 함께 하시는 그런 영광의 질서에 있기 때문에 그런다. 그렇지 않으면 중보직임을 통해서 다시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못한다.
그런데 교회가 지금 성경의 정경을 확립했다. 교회가 조직신학의 부차적인 출처가 되는 이유도 그런다 말이다. 교회가 교회로 설립된 것은 초대교회가 모여서 기독론 고백을 했지요. 그 고백대로 성경을 해석을 하지 않으면 그것은 교회 아니다 그 말이다. 성경에 교회가 따로 있지요. 그런데 그 고백을 성경에 메이는 데도 그 고백대로 성경을 해석하지 않으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이다. 예수를 참 하나님이시요 온전한 사람이시요 두 본성에 두 의지 그렇게 설명하면 아니라 그 말이다.
그러니 소위 에큐메니칼 회의도 교회를 교회되게 그리스도를 확증한 것이다. 기독론 논증을 확증한 것이다. 교회 책임 때문에 그렇다. 구약 때는 그렇게 못한다.

 성령의 은사 문제는 무엇이냐? 사도 교회의 은사의 특징은 무엇이냐?
성령의 은사는 사도 시대 은사보다는 범위가 넓은 개념이다. 왜냐하면 지금도 성령의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넓은 개념이다. 그러면 구약 성경에서 항상 말하고 있는 성령의 선물을 준다고 그랬지요. 어느 때는 성령으로 우리를 정결케 하고 마음을 깨끗게 한다. 그러면 그것이 오순절하고 어떤 관계가 있느냐? 우리는 성령을 항상 신약에만 국한 시킨다. 그것은 구원 역사에서만 신약에 국한 시켜야 한다. 그러나 존재론적인 의미로 말하면 성령은 그렇게 국한 시켜서는 안된다. 또 부활자의 영으로 교회안에 오셨다는 의미로는 오순절로 국한 시키지만 자기 백성과 함께 하셨다는 의미로는 오순절에만 국한 시키면 안되고 구약 때도 그리스도가 통치하면 항상 그의 영의 통치다. 그런 의미로 신령한 통치이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모른다. 이제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소위 신약 시대의 구원으로 성령이 역사하는 것이다. 부활자의 영의 증거이기 때문에 또 구약 때는 그렇게 고백할 수 없다. 구약 때는 모세 제도의 영이다. 그러니까 고백할 수 없다. 그들은 모세 제도에서 하나님을 알고 교제하지 부활하신 분과 함께 하는 교제는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항상 영의 개념도 기독론적으로 해석을 해야 한다. 그랬을 때만 신약 시대의 영을 부활자의 영,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아들의 영으로서 성령이시다. 그것이 신약 교회의 구원이고 그것이 새 생명의 선물이다. 바로 이런 생명의 교제 때문에 모든 은사들도 그런 특성들이 있다. 그 특성은 보좌 우편에 취임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교제의 특성을 드러낸다. 그것이 은사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석하는 특징이고 사도 시대에는 특별히 그 토대를 놓고 있는 것이다. 사도 후 시대는 그것을 보편적으로 누리는 것이다. 누린다 그 말은 그 제도가 계속 진행된다는 그 말이 아니라 거기서 토대를 놓은 것이 교회 안에서 항상 누려지는 것이다. 시내산제도는 항상 모세 안에서 반복된 것이 아니지요. 시내산에 한번 오심으로 영원한 토대를 놓은 것이고 그런데도 그것은 휘장안에 계신 분으로 계속해서 누리는 것이다. 다시 시내산의 반복이 없다.
그런데 사도 시대 때는 과도기 시대이다. 과도 시대적인 의미로 탁월 한것이지 그 다음 사도 후 시대는 사도적 은사는 사라진 시대다. 사도적 은사를 통해서 교회는 터가 든든히 놓아졌다. 그 교회는 천사도 함께 경배하는 그런 영광스런 교회다. 왜 에베소서에서 말하고 있지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한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제가 볼 때는 알아 듣지 못한 방언을 천사적인 언어인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우주적인 예배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면 그것이 신약 교회도 반복되어야 한다 그런 말인가 그런 말이 아니다. 토대를 놓으므로 창조적인 새 시대를 출범 시키는 그 다음에는 그 은혜가 확정된 것을 누리고 있는 것이지 구원 역사는 반복해서 집행 된것이 아니다.
대학도 한번 시험 치르면 되고 계속 시험 치는 것 아니다. 한 번 시험 치면 되고 그 때는 처음 출발인데 나머지는 그 출발점에서 그대로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항상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새로운 단계를 가져오면 그것은 새 창조적인 새로운 출발을 가져오는데 그런 것으로 토대를 놓으면 다시 반복 되지 않는다.
4a
사도는 너희들이 이 제도에 살지 않으면 내가 당하고 하는 그런 권능을 가진 자다. 바울이 바 예수가 누구냐 하고 그를 눈을 멀게 했지요. 베드로가 너 죽으라 하면 죽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것이 없다. 그러니까 사도가 누군가를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 오셔서 교회 열둘로 사도가 누군가 생각하지를 않고 교회만 생각하니까 신약에 나타난 은사를 그대로 반복할려고 하는 것이다. 그랬을 때 그런 은사들은 다시 분별을 해야한다.
그러니까 사도시대 때는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의미로 치유의 집행됐다. 예수도 새 생명을 준다는 분으로 치유를 하셨고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하셨지요. 그런 의미로 성령의 임재다. 그런 의미로 두 대표자를 통해서 똑 같이 살리고 있다. 다른 사도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울과 베드로를 통해서 죽은 자를 살리고 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 하는 것도 맞으면서도 그것은 부활하신 분께서 영원히 교회에 함께하신 다는 말이다. 주님은 사도를 통해서 교회를 출발 시켰고 확증시켰다.
그러니까 사도시대의 은사들의 특징을 분별해야 되고 그리고 교회 시대의 은사가 무엇 인가를 분별해야 한다.
그러면 고린도교회 은사의 직분은 사도 다 그렇게 주고 있잖아요. 사도도 빼고 몇명은 빼면서 그 다음 병 고치는 자 방언하는 자 그런 것은 다 집어 넣을려고 그러는가. 그러면 방언이 성경에서 어떤 의미로 사도 시대 때 은사 인가를 분별해야 한다. 지금은 다시 그런 은사가 필요한 시대가 아니다. 복음이 해석되면 된다. 오히려 사랑의 은사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사랑은 영원하다. 그리고 다시 오순절의 반복이 필요 없다. 성경을 번역하면 된다.
 그것은 그냥 하나님의 사변적으로 주신 은사가 아니라 이제는 성육신적인 은혜이기 때문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사랑의 수고로 그 복음을 형제에게 전한다. 그것이 지금 사도로 말미암아 출생된 교회다. 단지 언어적인 은사를 많이 주시겠지요. 그래도 그것은 초 자연적으로 주신 은사가 아니라 말로 다 할 수 없는 사랑의 노력과 수고로 그렇게 주신다.
 어머니가 아이들의 말을 제일 잘 알아 듣는다. 다른 사람은 건성으로 들으니까 잘 몰라도, 아무리 늙은 할아버지도 손자 이름은 잘 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기억력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랑의 수고로 형제의 짐을 짊어지고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 그것이 오순절의 은혜의 확장이고 그것이 오순절의 은혜가 우리 교회 안에서 해석되고 누려지는 것이다. 그렇게 분별하라 그 말이다.
기도하면 누구의 발이 딱 붙어버리고 그것은 성경에도 없는 말이다. 그런 항목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새 시대에서는 그것은 의미가 없다. 새 시대는 죽음을 이기신 은혜의 증인 주님께서 주님이시다 그런 것이 드러나야 되지 믿는 신자들을 목사가 기도하니까 딱 드러 누워버리고 발이 붙어버리고 아 우리 목사 능력이 있구나 그런 것은 마귀나 하는 일이다.그런 것은 자기의 권세를 나타내는 능력이 아니다. 바울이 내가 말하는 능력은 사도적인 능력이다. 거룩한 선생으로 판단하겠다 그 말이거든.
사도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사도의 위임장이다. 바울이 말하기는 내가 성령이 나를 통해서 권세와 이적을 증거했다고 그런다. 사도가 지금 거짓 선생들은 분별하는 그런 이야기다. 그러니까 그런 은혜들을 모르고 이야기를 하면 안된다.
지금은 병을 고치고 하는 것도 많은 사랑의 기도가 필요하다. 그때는 주님의 옷 자락 만지면 낫는 식이다.지금은 그런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랑으로 기도하고 그런 것이다. 사랑의 능력 그것이 지금 신약 시대의 성육신적인 은혜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능력이다. 신유의 은사는 긍휼의 은사다.
바울도 그런 의미로 말하고 있다. 내가 많은 근심을 들었느니라. 하나님이 에바브로 디도를 붙여주셨다. 너희들로 이 건겅한 모습을 보고 즐거워 해라. 너희들이 지금까지 병들었다고 소식만 들었는데 보냈잖아요.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울의 후행적을 보아도 표적이 이제 로마에 입성하기 전에는 한번 독사한테 물린 표적이 나타나지요. 그러기 전에는 바울의 편지를 봐서는 그런 표적이 안 나타난다. 항상 누가가 주치의로 따라 다니고 그리고 자기도 병이 있을 뿐만 아니라 디모데도 항상 병이 있었다.
에바브로디도는 안올데를 왔는가 바울한테서 병들어 버렸다. 요새 교회 같으면 안올 때를 온것이지. 그래서 그렇게 됐다. 그런데 자기의 생사를 불구하고 왔다. 그것이 우리가 형제를 보는 관점이다. 믿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지 오히려 나의 약함 가운데서 주님의 강함을 증거하고 부활의 능력을 증거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책을 읽어보면 다른 이야기들이 나와 있는데 확대 회의의 의미를 보면 확대 회의는 그냥 정치적인 의미에다만 설명이 되어있다. 더 좋은 정치를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보편교회의 권리를 위해서 그런다.보편교회의 특성이 항상 확대적으로 나타나니까. 형제로 모여야 되고 더 넓은 조직을 가져야 되고 그런다. 그러니까 지금 이것을 교회의 규정된 정치 개념으로 설명해 들어가지를 말고 교회의 특성이 무엇인가로 설명해 들어가면 교회가 그런 정치 단위로 구분되어 버리지를 않는다.

교회의 권세도 영적 권세다.목회적 권세다. 도덕적이고 영적인 방법으로 행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통치이기 때문에 그런다. 모세 통치 같으면 칼 들고 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통치이기 때문에 그런다. 그러니까 여기서 영적 통치하는 것은 새 시대의 권세 그렇게 이해를 하면 다 포함되는 개념이다.

은혜의 수단으로서 성례에 대한 이야기는 했지요? 그런데 여기 보면 율법과 복음의 차이는 웃기게 설명이 되어있다. 읽어보면 말이 왔다 갔다 한다. 지금도 율법이 몽학선생 기능을 한다.
그러니까 복음과 율법을 구원 역사에다가 배정을 하지 않고 윤리적인 요구냐 구원의 약속이냐 그런 도식으로 풀어 버린 것이다. 그것은 대립된 개념이 아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약속은 윤리적인 시행에로 부르심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자유이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대립시켜서는 안된다.
이것은 모세 시대냐 예수 시대냐 구원역사에다가 대비를 시켜야 한다. 이것이 설명이 잘못 되었으니까 읽어보시오.

그리고 은혜의 방편으로서 세례와 성찬에 대해서 말을 했다. 이것도 구원역사적인 개념으로 세례와 성찬을 설명을 해야 되는데 교회 예식 방식으로 설명을 했다. 세례는 한번만 하는 것이며 성찬은 반복해서 하는 것이고 그러니까 세례는 출생에 필요한 것이며 성찬은 양육에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설명을 했다. 그러면 성경에서는 그런 개념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세례와 성찬을 그렇게 영역으로 구분해서 설명한 개념이 아니라 성찬은 세례적인 의미다. 세례의 약속들이 누려지고 있는 것이다. 왜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옮겨 심어진것, 그의 부활의 새 시대로 옮겨 심어진 것 그의 부활의 사역의 결과에로 참여하는 것 그것이 곧 새 생명의 교제에로 참여하는 것이거든요. 그렇게 해야 하는데 한번 하냐 여러번 하냐 처음 하냐 나중에 하냐 이런 대비 설명은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의 방편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시행되는 예식의 방식데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번 하는 것은 출생이니까 중요하고 몬타나스주의를 반대할려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재 세례를 반대하느라고. 이것은 반복하지 않으니라 그러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가짜로 세례를 받았으면 반복해야지. 가령 내가 세례 받았는데 내가 예수 안 믿을란다 취소하면 끝이다. 그러면 교회로부터 배제하고 나중에 그가 믿은다 할 때 그전에 한것이 지금 효과가 발생했다고 그러면 안되고 그것은 다 의미 없는 것이다. 천주교는 의식에다 강조를 둔다. 그것도 복음적인 해석을 한다. 한번 출생한자가 죽을 수가 있냐. 말하자면 소위 성례적인 방식으로 한번 세례주면 죽을 수가 있느냐 이렇게 해석을 한다.
구원약속은 취소되는 법이 없지요. 그것을 가지고 예식에다 강조를 둔다. 그것은 구약 때는 반복되는 씻음이지요. 신약 때는 단번 씻음이다. 그러나 그가 그 은혜를 거역 했는데도 한 번 했으니까 유효하다 그 말은 안 맞다. 그러니까 재 세례파들을 반대할려고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세례를 다시 주어야 한다. 이 말하면 이단이다고 야단할 것이다. 이것도 성례적이다. 세례는 출생 시키는 것이니까 한번만 출생하지 두번 출생하는 법이 없으니까 그렇게 하고 있는데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구원역사적인 문제로 예수의 세례는 다시 반복될 수 없는 완전한 씻음이고 그리고 예수안에 있는 교회는 구약 교회처럼 망하지 않는다. 왜 이제는 모세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부활자가께서 함께 하시니 망하지 않을 것이다. 이 은혜의 빛가운서 넘어진 자는 다시는 회개케 하는 제사가 없다. 그 교회를 주님으로부터 빼앗을 자가 없다. 그런데도 자기가 반복적으로 죄의 종으로 살면서도 한번 구원 얻은 자는 완전하니까 그런 보장은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확실한 배교다.
그런데 이것을 알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를 대비 시켜서 설명하면 안맞고 성경이 말하는 구원 약속을 이야기 해야한다. 그러면 된다. 그러니까 여기 설명이 그런 대비다. 한번이냐 여러번이냐 처음이냐 나중이냐. 출생은 한번 병든것은 여러번 고칠 수 있잖아. 그래도 죽은 것은 아니잖아. 이것이 말로는 성례주의가 아니라고 그러거든. 그런데 내가 볼 때는 성례주의보다 더한다. 성례주의는 그 때나 효과를 보지만 이것은 두고 두고 보약이다. 언제 효력을 보더라도 한번에 효력을 볼것이다. 왜 하나님의 약속은 불변하니까. 이렇게 되어있다고. 새로운 성례로 설정을 해야 한다.
저쪽 교단에 있을 때 그런 논쟁을 했다. 가령 목사가 사직을 당하면 목사 아니거든. 그럼 만일 안수식을 통해서 목사를 안수하면 다시 안수해야 하느리라. 신학교는 다시 안나와도 된다. 그러나 교리적인 문제로 사직했으면 시험을 다시 쳐야 한다. 그 문제에 대해서 확답을 받아야 되고 만약에 윤리적인 문제로 그랬으면 시험은 안쳐도 된다. 신학의 과정을 마쳤으니까. 그래도 사직하면 목사 아니고 평신도다.
그런데 그전에 안수 했다고 안한다. 그러니까 자꾸 안수에다 강조를 둔다. 안수는 어떤 직분에 취임한다는 뜻이기 때문에 그 직무로부터 떠나면 안수 집사로 장로는 장로로 그것은 그 직무에로 취임하는 것이다. 그런데 청치문답 조례에는 다시 임직 할지니라 그렇게 해놨다. 임직한다 그 말은 안수를 말한 것이다. 그런데 똑 같은 말도 우리가 해석할 때는 다시 안수는 하지 말지니라. 그래놨다. 그러나 임직이니까 다시 안수해야 한다. 목사 임직을 안수 없이 서약으로만 임직 했으면 그래도 되지만 안수로 임직을 했으면 절차를 다시 밟는 것이 옳다. 왜 형식적으로 다시 하는 것이니까. 단지 신학은 졸업 했으니까 다시 안하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다.
세례에서만 그런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임직에서까지 안수란 개념에다 대단한 강조를 둔다. 성례주의하고 다를바가 하나도 없다.
사도들이 안수하고 했을 때는 사도들이 직분을 세웠을 때 직분에 합당한 은사지 예식을 통해서 한것이 아니다. 사도들은 권능자들이거든. 그런데 신약 교회는 그런 것이 아니고 그 직임에로 하나님의 성별하심이다. 그러니 안수 없이 임직해도 상관이 없다. 그것은 예식이니까, 서약 문제다. 상관 없는 문제다. 그리고 서약도 진실은 보증한다는의미로 서약이 아니다. 그런 의미로 맹세하지 말라고 그랬다. 직분에 취임하니까 직분의 의미를 맹세하고 하고 서약 하는 것이다.
가령 결혼하면 결혼의 진실을 보장할려고 서약 하면 됩니까? 결혼의 의미를 서약 하는 것이다. 그래야 결혼이 확증된 것이 아닙니까. 의미를 서약해야 그러지 거기다 진실을 서약하면 신자아니여. 신자는 서약을 하던지 안하던지 진실해야 한다. 그러나 결혼을 확증할려면 결혼하다는 의미로 서약을 해야만 결혼이 확정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러 맹세 의식이 구약에 있다. 그러면서도 신약에 맹세하지 말아라 하는 말은 모든 것이 맹세적인 삶이다. 모든 것이 서원적인 삶이 되어야 한다. 모든 것이 나실인 적인 삶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마태복음 그런 것은 구원 역사적인 관점으로 해석을 못하면 단순히 진실하게 살라는 말밖에 안된다.
그러면 구약 때도 진실하면 그 만이지. 그리고 예수님은 모세 보다 눈이 조금 예리한 분이지 규칙을 세밀하게 주셨고 새 시대적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런 문제들도 구원 역사적인 토대를 안놓으면 단순히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너희들은 진실해라 그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낳은 의다 그 설명 밖에 안된다.
성찬식이 중요한 것은 내가 설명한 구절들만 읽어보면 잘 알 수 있다. 어떻게 소위 교회안에 있는 예식만 봐도 거꾸로 설명해 들어간다.
세례란 말은 새로운 출생 죽었다가 다시 낳았다는 그런 개념보다도 새로운 영에게로 옭겨 심어짐 그것이 구약에서 항상 세례의 의미다. 그리고 옮겨 심어졌으면 그것은 성찬식에 참여하는 관계에로 옮겨 심어짐이다. 그러니까 할례와 유월절이 같은 개념이다. 그러니까 할례 받은자가 유월절에 참여하는데 일단 출생해야 그 다음 떡을 먹지 이렇게 해석을 하니까, 발전의 개념으로 설명을 하니까 할례는 출생 유월절은 해 마다 반복하니까 이런 개념으로 설명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할례적인 의미가 유월절 교제에서 반복되고 확증되고 그런 것이다. 그것은 새 생명의 교제에로 출생인 것이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출발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은 개인이 새로 출발했는가 하는 문제보다도 새 생명의 영역으로 옮겨 졌다는 개념이다. 그 영에게 산다는 것이 결국 성찬에 대한 문제다. 개념 정립을 하겠지요.

피 있는 있는 성례, 피 없는 성례 해가지고 이렇게 하거든, 그런데 구약에는 피 보다도 죽음에 대한 문제다. 피흘림은 죽음에 대한 언어 개념이다. 피 뿌림은 죽음 보다도 오히려 생명이 나아 갔다는 헌신적인 개념이다. 피를 뿌린 곳 까지는 새 생명이 나아간 곳이고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느니라 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문제다.
그러니까 레위기도 피는 다 죽음만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피가 어디 나아갔냐 하는 것은 생명이 어디 나아갔냐 하는 문제다. 그것은 새로운 생명이고 새로운 교제다.
그런데 여기보면 그런 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왜 예수님을 구약 언어로 자꾸 이야기를 한지 모르겠다. 부활로 설명을 해야 되지 구약 때는 할례가 일단은 죽음의 이미다. 죽음으로부터 새롭게 출생되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에서 신령한 출생, 죽음이 영원히 제거된 새 시대가 왔다. 그런 설명을 해야 되는 것이지 피가 있냐 없냐 해가지고는 설명이 제대로 된 것이 아니다. 구약을 신약의 새 빛으로 해석을 해야 된다 그 말이다. 알겠지요.
성찬에서 영적인 임재 하는 것도 복잡하게 설명하지 말아라.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영적인 임재를 말해도 개인 경건성 밖에 주장을 안하고 안된다. 구약 성소 개념을 알면 그냥 교제의 떡이 무엇인지 알아 버릴 것을 가지고 그러니까 영이라는 말을 새 시대의 임한 생명의 질서로 설명을 하지 않고 정신적이냐 아니냐 한다거나 묘한 이야기를 한다.
항상 구속사다. 구속사는 기독론적으로 푼다 그 말이다. 그리스도의 완결된 빛가운데서 성경을 보는 것이다. -교회론 끝-


 말씀과 성례와의 관계가 무엇이냐?

 하나님의 말씀은 성례 없이도 존재할 수 있고 또 은혜의 수단으로서 완성적인 것이지만 성례는 말씀 없이는 존재 할 수 없으며 완성적일 수도 없다. 이와 같은 견해는 성례가 죄인을 구원한데 필요한 것을 포함한다고 말하는 로마 캐톨릭교회에 대항해서 계속 주장하는 교회가 있다. 성례는 인간에게 특별한 도움을 준다. 그것은 생각보다 더 예민한 시각에 호소하므로 인상을 짙게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말씀과 성례는 다 같이 하나님이 그것들의 창시자요 그리스도는 그것이 중심적 내용이요 그것은 믿음으로 가 된다고 하는데 믿음을 갖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들은 약간의 중요한 점에서 암시하는 바가 있다. 말씀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나 성례 그렇지 않다. 말씀은 신앙을 일으키나 성례는 그것들을 강화할 수 있을 뿐이다.
세번 째 말씀은 온 세계에 증거하나 성례는 언약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시행한다. 이것은 천주교의 미신적인 성례관에 대항하기 위해서 설명한 것이고 복음은 천주교를 교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복음 자체를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 보면 성찬에 대한 설명이 무엇이냐면 말씀은 완성적이라 독립적으로 은혜의 방편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성례는 말씀 설명 없으면 이것은 의미가 없다는 이런 설명이다. 왜냐하면 천주교는 성례를 시행하므로 구원이 공급된다고 이해를 한다. 물을 뿌리면 죄가 깨끗하게 되고 성찬을 행하면 주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고 이해를 한다. 그래서 그것을 대항하기 위해서 말씀은 독립적으로 은혜의 방편이지만 성례는 말씀에 부착되어야 되지 독립적으로 시행하면 안된다 이런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 말씀은 신앙을 일으키지만 성례는 이미 믿는자가 그것을 받음으로 신앙이 강화 된 것 뿐이지 신앙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또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는 은혜의 방편이지만 성례는 언약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만 시행된다. 이런 설명이다.
이 해석의 설명하는 틀에 있어서 잘 못되면 아까도 말했지만 천주교에 대항하는 설명을 할려는 것이다. 그러면 성례가 성경에서 세례와 성찬의 의미가 무엇인가. 또 성경에서 복음의 말씀과 이 거룩한 은혜의 예식이 무엇인가 하는 의미를 설명을 해야되지 그것을 빼놓고 하나는 청각으로 주었냐 하나는 시각으로 주었냐 또 하나는 말씀으로 은혜를 일으키고 하나는 강화시킨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 역사에서 성례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행의 방식을 가지고 청각적이냐 시각적이냐 이런 말이다.
그러면 구약이 시각적으로 효과가 더 있다. 아주 무시무시한 시각으로 되어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말하자면 심리적인 설명이든지 그런 인간 인식론을 가지고 설명을 하는 것이고 성례 자체를 설명하는 이야기도 아니고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그래서 우리는 성찬을 들리는 말씀 이렇게만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성찬 자체를 구원 역사적으로 하나님과 관계에서 이 은혜의 제도가 무엇인지 설명을 하지 않고 교회에서 시행되는 양식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해 들어가고 설교는 귀로만 듣는데 이것은 시각 효과가 있는 것이라 이런 이야기다.
은혜의 방편은 교회에 주신 은혜의 방편을 말하지 설교를 이방인에게도 널리 전할 수가 있는데 은혜의 방편은 교회 안에서만 시행된다 하는 설명은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이런 설명들은 아주 사변적인 설명이고 성경 자체에서 이 성례가 가지고 있는 은혜의 방편으로 이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의미로 설명이 안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접근을 해서도 안된다.
요즘 식으로 교회를 개혁해야 겠다는 것으로 그 사람들이 하면 우리는 안한다는 방식으로 개혁을 해서는 안되고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만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시니까 그것이 권세요 능력이지 다른 것을 안한다고 거룩해 지거나 능력이 아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하고 비교해서 교회를 봉사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나는 너보다 낫도다 하는 의식이 들어온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되다.
그러니까 여기있는 설명은 이 출발점으로 설명을 하면 아무리 설명을 해도 시각이냐 청각이냐 이런 이야기다. 세상에서 설교는 아무나 할 수 있는데 성찬식은 목사 외에는 못하거든 이런 것이냐 또 하나는 말씀은 구원을 일으키고 그리고 이것은 강화만 해주는 것이냐 이런 이야기다.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나타난 현상적인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해 들어간 것이고 성경을 가지고 설명해 나온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이런 설명은 천날 아무리 조직해도 복음을 선언할 수가 없고 교회를 길러 낼 수가 없다. 이런 생각은 아예 버려야 된다. 이런 것을 볼 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우리의 삶의 구조를 하나님과 관계에서 해석을 해 나가야 되지 현상적인 것을 가지고 이것을 해결할려면 어떻게 해야하냐 물어보는 구조로 와서는 바른 인도를 못받는다. 항상 큰것으로 작은 것을 해석해야 되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작은 것들을 봐야 된다. 그럴 때만 형제들도 표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생각의 구조를 바꿔야 된다.
신앙적인 문제인데 말로만 성경 의존적인 사색 계시 의존적 사색 그런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면 그리스도안에서 나를 통해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안에서 어떻게 세상을 대하시는지 그 관점에서 우리가 세상을 볼 때만 하나님과 동행자로 우리가 믿음으로 선다. 그러니까 전 사고 구조를 그렇게 바꿔야 한다. 여기 있는 설명은 의미 없는 설명이다. 이런 것을 비판하다 보면 한참 길어지는데 그것은 필요 없는 이야기다.

그러면 성례라는 말의 기원과 의미는 무엇이냐?
주로 단어 풀이를 하고 있는데 별로 필요 없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의미를 가지고 단어가 의미를 새로 부여 받은 것이지 그 단어의 의미를 가지고 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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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아무리 히브리어가 계시적인 언어라 할지라도 계시적인 사건에서 단어의 의미를 갇는 것이지 그 단어의 의미에 맞는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니까 항상 하나님은 창조하시고 말씀하시고 일하시고 말씀하시고 항상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먼저 일하신다. 그러니까 이런 언어를 분석해서 들어가도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이것 가지고 교인들 앞에서 조금 유식한척 하자 말라, 한자 풀이 한것이나 이것가지고 그런 것이나 무엇이 달라. 그러니까 똑 같은 이야기다. 그러니까 이런 단어는 읽어만 보고 그런가보다 하고 잊어 버려요. 항상 구원역사에서 의미에 있어서 단어의 폭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3절 성례의 구성부분
성례는 세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외면적이로 유형적인 표와 그리고 내면적이고 영적인 은혜의 의미와 그리고 그 표와 의미를 표시하는 사물과의 연합이 있다.
읽고 합시다. 성례는 각각 외며적인 요소 세례에는 물을 성찬에는 떠과 포도주를 사용한다. 이러한 요소들이 제공되고 적용되는 곳에서 우리는 전 외면적인 사고를 보게 되는 것이다. 하여튼 재료가 있다. 물과 떠과 포도즙이 있다 하는 이야기다.
두번 째 내면적 영적은혜의 의미가 있다. 표호는 필연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은 성례의 내면적 삶을 구성한다. 이것은 성경에서 여러가지고 표현되었다. 은혜 언약 믿음의 의 사죄,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 그런 것을 표시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거룩한 예식이 있으면 그 예식에 사용되는 외적인 물직적인 요소가 있고 이것이 표현하는 바가 있다. 어떤 의미로 상징 법이다.
세번 째는 이 물질적인 요소가 지시하는 바와 어떻게 연합되는가 이 세가지 면이 성례를 구성한다. 그렇게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면 외면적인 요소는 떡과 포도즙이고 이것이 의미하는 것 거의 상징적인 개념을 쓰고 있다.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리스도아 연합 사죄 이런 문제고 이것은 하나님의 새 언약이니 했으니 하나님의 은혜 언약 이런 식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표화 의미를 표시하는 사물과 연합 그러면 물질적인 요소가 의미하는 것과 어떻게 연합될 것인가 그 말이다. 표호 이것은 말하자면 물질이다. 표호와 의미를 표시하는 사물과의 연합만이 참으로 성례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다고 해야 한다.
이것은 외면적 사물이 내면적 사물을 필연적으로 포함한다는 그런 물리적인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천주교 화체설을 두고 하는 이야기다. 또한 이 둘이 동일 공간에 존재한다고 하는 장소적인 의미로 해서도 안된다. 이것도 공제설을 대항하는 이야기다.
이것은 영적인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성례가 믿음으로 받아 들이는 곳에 하나님의 은사가 임하는 것이다 이런 설명이지요.
 설명하면 성례는 외적인 물질적인 요소 개념이고 두 번 째 이 물질이 지시하고 표시하는 소위 영적인 것 세번 째는 우리가 물질을 사용하는데 그 물질이 지시하는 소위 영적인 요소를 물질을 취함으로 받을 수가 있냐 그 연합 관계가 있다. 이것이 성례의 구성 요소이다. 그 말이다. 그러면 물질을 가지고 그것을 지시하는 것을 어떻게 가르치냐 했을 때 물질이 그것이 지시하는 영적인 것을 실체적으로 일치되어서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그 물질 위에 옆에 아래 곁에 같이 있어서 가지는 것도 아니고 영적으로 생각하고 영적으로 받는다 그런 설명이다. 무슨 말인가 알겠지요.
이런 설명들은 별로 합당한 방식은 아니다. 물론 외면적인 요소는 좋다. 또 그것이 지시하는 바도 좋다. 그러니 이것이 어떻게 연합되느냐 하는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니라 설명을 하면 잘드으십시요.
가령 세례를 베푸는데 왜 물로 씻는데 죄가 씻어 진다고 그러는가? 그래서 여기 말은 그것은 믿음으로 주님께서 이 세례를 통해서 교회에 가입할 수 있거든. 믿음으로 받으면 그것이 가능하다. 물이 씻는다는 진정한 죄 씻음이 내게서 일어난다.
성찬은 이것이 내 피요 살이라 하고 주었을 때 실은 떡과 포도즙인데 그것을 먹으면 어떻게 주의 살과 피가 되느냐 그러니까 그것을 믿음으로 주님께서 나다 한데 어떻게 살과 피를 말하는지는 모른다. 그리고 영적으로 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영적으로 우리가 받는다 이런 말이다 믿음으로 받는다. 이것은 주관적인 설명이지 구원역사의 객관적인 설명은 전혀 안되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이론적으로 화체설이나 공제설은 구체적으로 준다. 그런데 영적으로 받는다 믿음으로 받는다 했을 때 이것은 그냥 상징법으로 마음으로 영접한 것 뿐이지 실제적으로 공급되는 것은 없다. 그렇게 되어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항상 구약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이 연합은 정신적으로 마음으로 그래서 영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으로 받는다. 어떻게 구체적으로 받냐. 화체설이고 공제설이고 그런 것이 아니고 구약 개념을 이해하면 된다. 가령 구약 레위기 제사는 하나님앞에 가나안 땅의 식물을 가져다 드리면 가나안 땅에 식물을 그들에게 주신 구체적인 생명의 선물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안 먹으면 그들은 못산다. 그들은 그것의 먹고 마심에서 생명의 주님을 의뢰 하라고 신명기를 보면 그랬다. 너희들이 먹고 마심으로 풍성했을 때 이 제물을 의뢰하지 말고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의뢰해라 그것이 그들이 믿음으로 먹는 것이다.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먹는 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셨다는 그런 생명의 교제 가운데 먹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정신적이니 마니 그런 말이 아니라 구체적인 그들의 삶의 질서인데 하나님과 관계에서 그것을 먹는다. 그런데도 그것은 하나님과 속한자 깨끗한자로 먹는다고 그랬다. 부정한 자로 먹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자로 먹는다고 말한다. 하나님께 속한 자로 먹는다.
그 은혜의 제도가 확대 되었을 때 신명기에서는 이방인도 십일조를 먹어라 그렇게 되어있지요. 매 삼년마다 각 성에서 가져다가 우거하는 백성에게 주어라 이방인이지 그렇게 하면 천하만민을 복이 그들에게 나타난 식이 되겠지요. 구체적인 먹는 것이고 그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안 먹으면 죽는다. 영적으로 먹으니까 산 것도 없고 영적으로 먹는다 그 말은 물질과는 상관 없이 먹는다 그런 말은 상관이 없는 말이다. 구약에서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니 하면 그 신령하다는 말은 정신적이냐 그런 말이아니라 바로 그 하나님과 관계 아래 사니까 신령한 것이다. 그를 따르는 그리스도로부터 마셨다 그것이 신령한 복이다. 하나님과 친히 그들과 동행하시면서 그들을 살리셨다. 그런 관계로 먹었다 그 말이지 정신적으로 먹었다 그런 말은 아니다.
그래서 구약 레위기를 보면 가나안 땅에 산물을 하나님의 상으로 가져오면 그것이 죽음을 통해서 또 물과 불을 통과하면 또 하나님의 단에서 불로 정화된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앞에 향내나는 예물이 되고 하나님의 향내하는 예물중에 구별해도 제사장과 임자에게 주면 가나안 땅에 생명이 이제는 죽음을 통하고 하나님이 정결케하는 불을 통하는 성화된 양식으로 하나님의 식탁에서 하나님이 흠향하시는 그런 새로운 양식으로 그 제사장과 임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가나안 땅의 예배고 구약 예배고 구약의 성례다. 성례라는 것은 그냥 거룩한 예식 하는 단어 풀이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명의 교제로 그 제도에서 인쳐지고 공급되는 것이다. 그래야 그것이 그들의 생명이다. 구약 예배가 그렇지요.
그들이 물을 뿌리면 마음으로 아멘 하니까 씻어지고 개인의 감정에 대한 문제 개인이 변화 된다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 개인이 변화되고 말고 상관 없이 그들이 물을 뿌리면 모세에게 속해서 살 수가 있다. 그들이 모세에게 따라 나와서 모세에게 속하면 홍해를 통과해서 바로의 종이 되지 않고 모세에게 속한자로 살 수가 있다. 또 시내산에서 삼일전에 모세가 씻으면 그들은 그 제도에서 정결함을 받고 시내산 앞에 선다. 하나님을 대면하고 살 수가 있다. 그것은 개인의 마음이 얼마큼 믿음으로 변화됐냐 안됐냐 하는 그런 변화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구원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 그의 인류를 어떤 관계로 세우셨냐 하는 문제다. 그것이 홍해 세례가 되겠지요. 그러면 구약 때 할례는 무엇인가? 그들이 할례를 받으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새롭게 출생된다. 마음이 변화 됐냐 안됐냐 믿음으로 할례를 받으면 되는데 믿음으로 안 받았으면 안되고 그런 개인 문제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할례 받으면 아브라함에게 속한자로 하나님께 속한자로 새롭게 출생한다. 이방인도 종으로 살 때 할례를 시키면 그들이 나도 할례 받을라요 원해서가 아니라 주인에게 속했기 때문에 창세기는 그렇게 되어있지요. 아브라함이 그에게 속한 모든 자에게 할례 시키고 그에게 속한 자를 할례 시키면 그의 가족으로 먹고 마시고 할례 받지 않으면 그 축복에 참여를 못한다. 마음이 진실하냐 안하냐 그 문제하고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개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속한 인류를 어떻게 대면하고 어떤 생명의 관계로 불렀는가 하는 문제다.
그러니까 역사적인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구원자로부터 개인의 변화 세례라는 것도 개인의 변화 여기다 두고 있다. 그러니까 설명이 잘 안되는 것이다. 세례 받아도 가짜가 많거든. 그러니까 세례 안하고 성찬식을 해버리면 될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물을 바가지로 부은다고 변화 될 것이 무엇이여. 그러니까 마음으로 변화되면 그만이지 그러니 세례라는 것을 개인이 변화됐냐 아니냐 이렇게 하니까 그러는 것이다.
구약 때 이스라엘백성이 하나님의 자녀로 계산되는 것을 할례고 또 이스라엘백성을 새롭게 지으신 것은 유월절 사건이다. 그 때부터 날을 새롭게 계산하고 안식을 약속하고 새로운 양식을 주고 마치 창세기 처음을 본 것처럼 그렇게 되어있다. 새로운 출생이 유월절이다. 그래서 할례 받은자만 먹도록 했다. 그러니까 할례는 출생이면 출생이면 그전에 아브라함 때 출생 했구만 그러면 믿음의 강화는 400년이나 지난뒤에 강화하고 있는가? 그러니까 그런 시행의 횟수를 가지고 한번이냐 여러번이냐 이렇게 하니까 세례는 출생을 시키는 것이니까 한번만 하는 것이고 성찬은 계속적인 반복으로 강화 시키고 그런 이야기를 할려는 것이다. 실은 유월절이 할례의 완성이어서 유월절에 이스라엘 백성은 새롭게 출생되고 할례 받으면 아브라함의 가문이 되는데 여기 보니까 유월절 양고기를 먹는 생명의 교제에로 출생됐지요.
그러니까 할례나 유월절을 또는 세례나 성찬은 시행되는 양식을 따라서 한번이냐 여러번이냐 처음이냐 그 다음 반복되느냐 그런 구조가 아니고 완성적인 문제다. 할례의 완성이 구약에서 유월절이어서 할례 받으면 하나님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출생 된 것이다. 그 특권에로 할례 받은 것이다. 성례적으로 말하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상에서 먹고 마시지 못하면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다. 알겠지요.
그러니까 어떤 것이 먼저고 뒤에냐 또는 한번이냐 여러번이냐 하는 교리적인 설명이 아니라 구원 역사에서 하나님이 제사에서 새기신 은혜의 일 하나님이 그 제도안에서 어떻게 그들을 자기 소유로 삼으시고 사망이 온 예루살렘을 둘러 싸고 있어도 생명의 친교에로 그들을 부르셨는가 하는 구원 역사의 경륜에서 그 의미를 파악을 해야한다. 그러니까 세례 받는자는 가끔 배고프니까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성찬에로 세례 된 것이다. 이제는 모세 제도에서 먹는 방식이 아니라 부활자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생명의 교제에로 세례 됐고 옮겨졌다. 그것이 근본적인 세례의 의미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말이암은 역사적인 세례 그 의미다. 그러니까 개인에 대한 문제 또는 시행 방식에 대한 문제로 성례를 해석하면 안되고 구원역사에서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신데 이 생명의 관계를 어떤 제도 또 어떤 방식으로 자기 백성에게 자기 생명을 선물하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면전에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생명의 교제에로 부르셨는가. 그것이 그들의 구체적인 삶이고 생명이다. 단순한 예식이 아니라 그들은 그 제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먹고 마시고 즐거워한다. 홍해에서 세례 받지 않으면 바로의 종이고 그리고 모세가 물로 씻었다. 시내산 앞에서 그렇게 안하면 그는 하나님을 대면할 수가 없다. 그들이 먹고 마시는 근본적인 생명은 가나안 땅의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상에서 성화된 새 생명이다. 그것이 구약 백성의 먹음에서 소망하는 생명이다.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레위기의 양식이고 제사장의 양식이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왜 성례를 가끔하냐 조금 먹거든. 그리고 밥 먹는 것은 거룩한 예식이 아니다. 그러니까 성찬식은 이 예식 시간에만 효과가 있으며 예식 시간과 그 장소를 떠나면 무효니라. 천주교처럼 그것 가지고 먹는다고 무엇이 공급된 것이 아니냐 천주를 대항하는 의식으로 하면 분명히 맞다. 그러나 성경적인 의미로는 아주 잘못 된것이다. 이 성찬의 의미가 교회의 새 생명의 교제가 안되면 이스라엘백성이 하나님의 상에서먹는 것이 가나안 땅의 삶의 목표가 되어있는 것처럼 지금 완성된 질서에서 우리들이 부활하신 주님의 상에서 생명의 질서로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정결한 자로 사는 것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를 위해서 몸을 주신 분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으니 그것으로 형제를 공급하는 것이 그 은혜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라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바울이 먹고 마시는데 헌금하는 것은 주님의 부활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생명의 교제하고 분리된 것이 아니다. 그 몸의 교제를 확대하고 나타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성례라는 말을 가끔 한다. 이런 식으로만 생각을 하니까 우리 일상적인 생활에는 주님의 상에서 먹고 마신다는 개념이 없다. 기도할 때는 아멘 하는데 실제로 그렇지 않다.
나를 위해서 몸을 주신 주님이 이제는 그냥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먹고 마시고 그리고 가나안 땅에 죽었던 그런 것이 아니라 부활자와 함께 하는 생명이다. 이미 죽음을 이긴 존재로 주의 상에서 앉아서 먹게 하시고 생명의 완성을 나타내도록 먹게 하신다. 우리의 생명의 질이 이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질서가 아니면 우리는 새 생명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날은 속된 날 집에서 먹는 날 주일날은 거룩한 날 교회에서 먹는 날 이스라엘보다 더 나쁘게 먹을려고 그런다. 이스라엘은 속되고 거룩하게 먹어야 한다. 주셨는데 그것은 완성적으로 주신다는 것이 거룩이지 그냥 속되고 거룩하고 그런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속되다 하는 말은 아직도 죄가 제거되지 않았다는 의미로 속되다 그 말이고 우리는 완성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니까 그런 설명들은 옳지 않다. 그러니까 여기서 연합은 성례전적인 연합이라는 말은 물질과 그것을 표현하는 정신을 믿으므로 연합 시킨다는 그런 개념이 아니고 실제적으로 성례전적이라는 말은 바로 이 예식에서 집행되는 것이 언약 백성의 생명의 질서다. 그러니까 왜 이것이 해석이 안되냐 하면 지금 우리 교회가 시행하고 있는 소위 간소하된 부페식이지. 이 개혁 때문에 이것이 생명의 질이다 그런다. 초대교회 같으면 더구나 오순절에 보면 교회가 공동 식사로 되어있고 그것이 그들이 떡을 뗀다는 의미다. 만일에 그들이 가난한자를 배고프게 하면 그런의미로 모여서는 안된다. 그것은 교회 모임도 안된다.
그러니까 초대 교회가 떡을 떼러 모였다 했을 때는 지금 처럼 성찬식을 간소화 해서 모인다는 그런 의미로 성례가 아니라 이제는 새로운 몸으로 서로 교회 그들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의 필요를 공급해서 부족함이 없게 했는데 그 생명의 교제는 새 생명의 교제다. 주님의 살과 피에 참여하는 새 생명의 교제다.
그러면 주님의 살과 피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구약 언어다. 구약 모세 언어다. 그런데 모세 언어를 무엇과 연결을 시켰습니까? 마치 가나안 땅의 양식과 연결을 시킨 것처럼 떡과 포도즙을 연결 시켰지요. 그것이 풍성한 것이 가나안 땅의 양식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의 양식이 하나님의 제단에 피흘린 제도 아래서 먹는 것인데 그것은 소제도 있다. 그렇게 진행이 되어서 이제는 가나안 땅의 생명을 성소에서 성화된 방식으로 받았던 것이다. 그것이 가나안 땅에 살면서 소망하는 목표다.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떡과 포도즙이 일상적인 양식이 내 살이요 피니라 하는 방식으로 연결 되어있다. 구약에서는 어느 누구도 먹지 못하는 피로 연결이 되어있다. 그리고 이제 구약적인 제물이 아니라 자신의 몸의 제물의 완성을 말하고 있지요. 그리고 이제는 대제사장이나 먹고 임자나 먹는 것이 아니라 온 백성이 함께 먹는다. 예수이 열두 제자 새로운 토대가 먹고 있다. 거기 베드로만 먹는다는 것이 아니다. 온 교회가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구약 때는 여호와는 휘장으로 가리우고 계시고 제사장은 휘장 밖에서 그것도 안식일에는 열두 덩어리 떡을 진설하고 먹었다. 생명의 완성을 소망하고 먹는 것이다. 지금은 그것이 아니다. 이제는 가리움이 없다. 부활하신 분이 모세 제도처럼 땅에 속한 제도가 아니라 부활하신 분이 앉아 있는 하늘에 속한 질서로 그 보좌 앞에서 먹는다. 왜 우리가 예수와 함께 하나님안에 있고 예수와 함께 보좌 우편에 앉은 권세있는 인류가 됐으니까. 그것이 신령하게 먹는다는 말이다.
모세 제도의 방식으로 먹지 않고 메시야 적으로 먹는 다는 말이 신령하다는 말이고 그런 의미로 영적인 의미다. 왜 주님은 영으로 우리안에 계시니까. 그렇지요. 그것이 우리가 믿음으로 받는 다는 말이다. 믿음을 그것을 시인하고 믿음으로 먹는 것이지 마음에 준비 마음에 연합의식 그런 주관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믿음만 생명이고 믿음만 능력인 이유는 우리가 모였을 때도 부활하신 주님의 상 앞에 모였고 이제는 우리의 일상적인 양식이 구약 언어 개념입니다. 주님의 살과 피 그것은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산 것처럼 나를 먹는 자는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런 생명의 교제로 산다. 거기는 가리움이 없다.
구약 때는 피는 제외 됐는데 이제는 인자의 피가 주어졌다. 그 피는 부활하신 인자의 피다. 그것이 교회가 기념하는 것이다. 기념한다 그 말은 옛 날에 죽었는데 눈물이 찡하고 기념한 것이 아니라 그가 하신 일이 우리 몸에서 나타나게 하는 것이 기념이고 그것이 생명이다. 기념한다는 말은 그런 말이다.
그러니까 성찬과 구제는 필연적으로 연결이 된다. 내가 너에게 준 안식으로 네 종들에게 안식을 주어라 바울은 말하기를 주님께서 몸을 주신 생명의 수고로 형제들의 부양자가 되어라 그것이 그리스도의 은혜이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초대교회는 모여서 성찬식과 함께 가난한 자를 구제했다. 부족함이 없도록 했다.
성찬이란 말은 단순히 정신적으로 상징한다는 그런 말이 아니라 그것이 구체적인 교회의 생명의 질서다. 그들은 그 질서안에서 생명을 누린다. 그런데 우리들은 하도 약소하게 먹으니까 이해가 안되는 것이다. 구약의 장자는 레위인이고 그 보다더 높은 자는 제사장이다.성소가 자기의 집이다. 자기 양식은 전부 제단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것이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 된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교회일을 함께 하고 있어도 그것은 완성된 새 질서를 사는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삶에 있어서 그 관계로 먹어야 된다. 그 관계로 형제를 봉사해야 한다.
성례전적이라는 그 말은 그런 말이다. 단순한 예식적인 의미가 아니다. 새 생명의 질서 삶의 교제 문제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이 아니다. 그러니까 왜 이런 해석이 어렵냐 하면 교회가 시행하는 의식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해 들어가니까 도저히 안된다 그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약에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신 것을 이제 부활하신 분안에서 완성적으로 이제는 하늘에 계신 질서로 함께 하시잖아요. 그러면 구약을 토대로 하고 있으면 그냥 해석이 되는데 그렇게 이해를 하지 않고 사변적으로 이해를 한것이다. 종교 심리로 이해를 할려고 하니까 그런 것은 믿음도 아니다. 개인의 확신이지 믿음도 아니다. 믿음이란 것을 하나님이 하신 일을 누리는 것이다. 그것은 억지로 나에게 맞추는 것이 믿음이 아니다.
우리가 해가 뜨면 우리가 해를 우리에 맞춥니까. 그런 사람이 없고 그냥 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삶의 질서이기 때문이고 그것이 우리의 역사다. 그러니까 구원역사가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면 새롭게 사는 교제 질서가 주어진다. 그것이 성례다 그 말이다. 그 성례가 우리의 모든 삶을 해석하는 빛이다. 왜 그 질서안에 우리가 살고 있으니까. 그 개념을 활실히 바꿔 주라.
그러니까 성찬과 애찬은 당연히 연결되어야 한다. 성찬은 교회의 식사적인 의미로 더 풍성히 주어야 한다. 참으로 성찬에서 남을 것을 가난한 사람이 가져가면 그것은 정말 은혜스런 일이다. 밖으로 나가면 효과가 없느니라 그 말이 아니라 그것이 아니라 주의 상에서 함께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고 주님께서 몸으로 주신 생명의 일을 부요한 자들이 생명의 선물을 가져다가 주님 상앞에 진설하고 이것이 너희를 위해 준 생명의 떡이 아니냐 그러니 너희들도 한 몸으로 그렇게 살아라 하는 양식으로 형제의 가정 까지 공급되면 그것은 진짜 은혜스런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방인들은 잔치할 때 떡을 주는데 떡을 여러 집에 돌리고 즐거워하고 야단이다. 그런데 우리는 헌금 얼마 이것만 세고 있다.
믿음이란 것은 전 삶의 질서를 포함하는 새 질서에 대한 문제지 이 예식이 뭐냐 이것이 영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 이런 것이 아니다. 무슨 말인가 알겠지요.

식사할 때 부활의 주님께서 이것을 우리에게 생명으로 주셨으니 이제는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하는 그 빛가운데 사는 생명의 교제를 이루시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예식으로 하니까 주님의 살을 뗐습니다. 떼는 것까지 의식이다. 살을 찢어야 되니까. 주님 살도 여러 조각으로 찢어져버리구만 언제 찢었어 찔렀지 그러니까 전부 그런 유형에다 맞추어서 먹는다. 구원 역사적인 의미 성경에서 말하는 교제의 의미를 알지를 못한다.
그런데 유월절 양은 어떤 의미로 살도 찢으면 안된다. 뼈를 꺽지 말고 한 몸으로 먹어야 하니까. 그러니까 그런 유형에다만 맞추니까 잔도 한잔에다 해야하고 떡도 길게 해놓고 성도들이 돌아가면서 잘라 먹을 것이다. 한 떡이니까. 그런 문제하고는 무관한 이야기다. 서양에는 우리처럼 칼로 잘라 먹는 것이 아니고 떡을 찢어서 먹는다. 빵을 그렇게 먹는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 풍속을 모르고 살 찢어서 아프겠구나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누룩을 섞냐 안 섞냐로 이조 논쟁을 하고 있다. 제대로 하자면 섞어야 좋다. 구약 때도 화목제물을 섞은다. 풍성한 안식으로 묘사하니까. 도망 쳤을 때는 무교병이다. 그러나 수확을 마쳤던 맥추절에는 누륵 섞은 두 덩어리를 떡을 드린다. 지금 우리는 도망 치던 그런 시대가 아니다. 풍성한 안식이 주어졌다. 오히려 부풀리고 맛있게 먹는 것이 좋다.
그러니까 왜 이렇게 변했냐면 우리가 마치 천주교가 종교의식으로 성경을 해석해 버렸던 것처럼 우리들도 이 의식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니까 해석이 안된다. 이것은 구약의 완성으로 성례거든. 구약 때 준 것을 지금은 어떻게 주는가로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 개념도 구약 모세에게 주신 나라가 예수안에서 어떻게 그 나라가 완성됐는가로 보아야지 국가와 교회를 대비하면 안된다. 성경은 그런 말은 하지 않은 이야기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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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들을 고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은 결과적으로 영혼의 파멸을 가져오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대해서 완강하게 불순종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얼만큼 틀리는가 알겠지요. 단지 하나님이 명령해서 하는 것이지 그것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명령이니까 절대적으로 한다 그런 말이다. 그러니까 소위 신앙주의 식이다.
만일에 하나님의 우리에게 명령했으면 우리에게 필요하니까 명령하지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는 않하는데 명령이니까 한다 그러니까 안해도 말 안듣는 것밖에 아니지 생명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말 안들어서 매 맞은 정도지 그런 이야기를 한다. 그러니 이것이 세례나 성찬을 설명하는 방식이 되냐 그 말이다. 그러니까 세례 받지 않아도 성찬식에 참여할 수 있고 마음으로 믿으면 되니까,우리가 그런 식으로 하니까 말하자면 세례를 안 받아도 헌금 자유가 있는 것이다. 믿음으로 하니까 자기 마음으로 믿어 세례기간이 아직 안돌아 왔어 일년에 한 두번 하니까. 합격을 해놓고도 아직 증서를 못 받은 것이다. 그러니까 세례 받지 않고도 교회의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그러니까 이것은 꼭 필요한 것은 아니고 하나님이 언제 세례 받으라고 명령한 적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나중에라도 한번 받으면 되고 매는 안 맞을 것이다. 이런 구조론이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로는 천주교가 더 맞다. 무슨 말이냐하면 세례도 구원 역사적으로 알아야 한다고 했다.
 세례도 여러 세례가 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는 족장들은 안 받았지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구원 역사에서 세례를 보지 않고 천당 갔냐 안 갔냐로 구원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천국이 열린 것은 구원 역사의 종점에서 열린 것이지 구약 시대에 열린 것은 아니다. 그런 역사적인 생명을 말하는 것이지 천당 가나 안가냐 시대마다 귀족을 뽑은 것이다.
세대론자들은 시험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시대마다 천당가는 귀족을 뽑았는데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자만 천당간다. 나머지는 예비 처소에 있었던 것이다. 이런 설명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완전히 틀린 것이고 구원역사적으로 말하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자에게 천국문이 열려 있다. 그것은 우리가 메시야 시대에 누리는 생명의 관계이기 때문에 그렇다. 구약 때는 그런 것이 땅에 있는 성소적인 관계로 주어졌다. 영원히 존재론 적으로 어디 가냐 하는 그런 구원론이 아니다. 하나님과 관계에서 어떻게 사람을 대우하는가 하는 문제다.
새 시대에서 천국이 열린 것이지 구약 시대에는 무덤에 갇힌 식으로 열려 있지를 안해요.
그러니까 종말론에 있어서도 개인 종말론 하는 것도 그냥 시대를 초월해서 설명을 하면 안맞아 들어간다. 죽은 뒤로 영혼이 영광스럽게 되며 하는 것은 신약 시대에 열려 있는 것이다. 구약 시대에는 죽은 자들이 어디에 있는가 그들의 조상의 묘실에 있으며 구약 언어는 그렇게 되어있다. 조상들의 묘실에서 쉬며 그렇게 되어있다. 드디어 신약 시대에 죽음이 우리 영혼을 잠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가리웠던 제도를 벗겨 버리고 완전한 영광을 보게 하는 것이라 승리의 찬송은 메시야 시대에 노래 불러 지도록 한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시간은 초월한 방식으로 인간 존재론적으로 죽으면 무덤에 가고 영혼은, 영혼과 육체가 어디 갔냐. 하는 이런 존재론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실은 신약에서 보이는 것은 그런 문제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 시대의 승리를 선언하는데 더 강조점이 있다. 이 메시야가 죽음을 영원히 정복하셨거든요. 그랬을 때 이 은혜는 무엇이냐? 이 분이 역사의 처음부터 오셨던 것인데 그렇지요. 이분은 역사의 처음부터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신 것이다. 그 다음 해석이 될 문제다. 영혼과 육체의 구조론 육체는 죽을 요소며 영혼은 죽지 않을 요소며 이런 구조론이나 대립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여기 성례에서는 어떻게 봐서는 설명이 잘못 되어 있지만 천주교가 더 맞는 식이다. 이 성례는 구원 얻은 백성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왜 거룩한 교제에로 부르심이 구원이기 때문에 그렇다. 세례 받지 않고 주의 몸에 참여 할 수가 없다. 할례 받지 않고 아브라함의 백성으로 사는 법이 없고 그것을 안 받아도 살고 나중에라도 한번 받아주면 되고 그런 법은 없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관계가 아니면 가나안 땅도 하나님의 성소가 아니다. 먹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소가 불타지면 이방 백성의 종으로 먹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로 먹지를 못한다. 먹어도 좋고 안먹어도 좋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안 먹으면 죽는 것이다. 제사장이 먹는 것이다.그러니까 속죄제물 까지라도 제사장이 먹는다. 일종의 화목제물이다. 제사장이 먹는 것은 대표로 먹는 것이다.화목제는 임자도 먹는다. 마치 안식일에 만나를 먹는 것처럼. 그렇게 먹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것이 단순한 의식이다. 명령이니가 받고 마음으로 영적으로 받아들인 것 뿐이지 영적이라는 것은 메시야 시대에 속한 생명의 질서 메시야 시대는 메시야 인으로 세례를 안 받으면 메세야의 교회에 가입할 수도 없고 메시야 시대에 가입하지 않고는 그 생명의 상에 앉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으로부터 배제 된자는 주의 몸으로부터 분리된 자다. 그것이 바울이 고린도서에서 하고 있는 말이다.
그런니까 우리가 한 것은 교리적인 믿음이지 천주교가 이론은 시인한 믿음이지 우리들의 삶의 질서를 메시야의 상 앞에서 먹고 마시는 삶은 아니라 그 말이다. 알겠지요.
구원 역사적인 세례의 의미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변화됐냐 안됐냐 변화된 뒤로 나중에 세례를 받을 것이다. 마음으로 믿었어도 한 일년 쯤 여유를 가졌다가 나중에 받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급한 것이 아니다. 천주교처럼 세례를 받아야 천당간다 미신적으로 그런 말도 아니다 이것은.
그러니까 아직 세례 안 받았어도 성찬식에는 참여 못하는데 헌금은 해 또 청년이 똑똑하면 가끔 기도도 시켜 훈련 시킨다고 이럴 수가 있냐고.
개인의 변화 과정으로 세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는 분명히 개인에게 시행되어도 이제는 새로운 세례다. 이제 삼위 하나님에게로 세례되는 새로운 시대가 왔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영광의 보좌에 나아가셨기 때문에 만일에 그가 그 영광의 자리에 나가지 못하시면 제자들이 세례해서 그들이 다 예수를 따랐지요. 세례 요한의 제자가 다 이쪽으로 왔지요 그런 세례를 제자들에게 베풀었다. 왜 세례 요한의 직무는 예수께로 인도하는 직무다.
그러니까 구원 역사에서 세례 사건이 여러번 있다. 그 시대마다 구원 역사에서 한 쪽으로 옮긴 획기적인 역할이 있다. 홍해의 세례는 바로의 권세에서 이제는 모세안에 속한 새로운 영역으로 옮기고 노아 세례는 그때 네피림의 권세에서 노아의 지배를 받는 새 시대로 옮긴 것이다. 노아가 의의 후사이니까.
이제는 예수께 속한자가 왜 속하는가. 영광의 자리에 올라가셨기 때문에 삼위 하나님의 이름올 세례하는 것이다. 그런 말이다. 그에게 속한자로 그와 함께 하는 자로 노아와 모세와 함께 한 것처럼 영과의 보좌에 함께 앉은 나라로 세례 한 것이다. 그것은 부활 사건에서만 가능한 이야기다.
그것도 마태 복음에서 가능한 이야기다. 왜 마태 복음은 이전의 할례를 통해서 아브라함의 백성을 지으신 분이 이 세례를 통해서 천하만민을 자기 나라로 세우시니까. 그는 하늘에 있는 다윗 왕이다. 망해 버린 다윗 왕조가 아니다. 그러니까 그 생명을 선언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복음서는 그런 목표로 기록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다른 복음서는 부활자를 그런 식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요한복음은 가신분이 아니라 제자들을 찾아왔다. 제자들의 이름을 자세히 부르고 있는 것이 디베랴 바닷가다. 그 흩어진 양, 연약해서 배고파 있는 양, 밤새껏 고기를 잡았어도 한 마리로 잡지 못한 자들이다. 제자들의 이야기가 자세히 기록이 되어있다. 너희에게 먹을 것이 있느냐 다 구어 놨으니 와서 먹어라. 영원히 함께 계신다. 그러므로 베드로도 죽음을 무릅쓰고 그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다. 왜 그분이 죽음을 이기신 목자장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시라. 자기 백성을 영원히 지키는 하나님이시다. 땅에서만 지켰을 뿐만 아니라 부활자로서도 지키실 것이다. 하나도 멀어지게 아니하실 것이다.
복음서마다 그런 특징들이 있다. 그 특징에 따라서 해석을 해줘야 한다. 그러니까 이런 것은 천주교가 해석만 제대로 하면 더 맞는 것이 많다. 이것은 완전히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개념이라 물질이 충만해서 넘친 것이거든. 다 범신론이다. 그러니까 다른 일반 양식하고 다르다. 주님이 말했으니까 신부는 포도주를 홀짝 홀짝 마시니까 훨신 거룩하지, 교인들은 안주고. 그러니까 그것을 다 주었냐 안주었냐를 우리 고백서들은 성례를 정당하게 시행하되 그런 이야기를 한다. 우리가 설명했던 것은 이런 방식이 아니고 천주교처럼 포도주를 주면 정당한 시행 안주면 정당한 시행이 아니다. 결국 고백들이 그 정도 이야기 밖에 못한다. 그래서 교회의 표지가 무엇이냐 성례의 정당한 시행인데 그 사람들의 개념은 포도즙을 주었냐 안주었냐 그 말이고 세례를 사역자가 주었냐 다른 사람이 주었냐 이런 이야기 정도다.
그런데 우리 식으로 해석하면 진짜 맞는 말이다. 성례가 정당히 시행되어야 교회고 생명이 있다.
우리 종교 개혁자들의 선배들의 말로 하자면 천주교를 대항하는 그런 말밖에 아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고 읽어야 한다.
이번에 주일에 대한 문제도 고백서나 헌법이나 표준 문서들을 보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런 짓을 안한다. 그러니까 설명들을 보면 완전히 새로운 율법들이다. 그렇게 하면 없애 버려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마음대로 사냐 율법이 성취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새 생명의 영광 가운데 살고 있다. 새 생명을 누리고 그것을 공급하는 능력으로 살고 있으니까 표준 문서들이 한 것보다 우리들이 더한다. 그런데 좋기는 좋은데 만일에 복음의 설명이 바르게 안되고 그렇게 묘하게 되면 그것은 교회를 더욱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사도행전에 너희가 아무도 메지 못할 멍에를 너희가 메게 하느냐 그렇게 하고 있지요. 가령 이것 저것을 해라 하니까 우리 조상들도 메지 못한 멍에를 매개 하느뇨 우리는 이 요긴한 것외에 달리 할말이 없다 했을 때 율법을 못 지킨다는 의미로 지지 못할 멍에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우리는 그런 본문을 그렇게 해석을 하니까 율법은 아무도 못 지키고 못 지키면 저주하는데 진짜 지키는 양반이 왔다. 이 설명을 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메봤자 자유를 주지 못한다. 그런 의미로 그것이 무거운 멍에고 사망의 멍에지 아무도 못 지켜서 벌받은다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율법하면 모세 언어를 이해를 해야한다. 그것은 모세가 져도 지는 멍에가 안된다. 그것은 완악함에 조절된 멍에이기 때문에 그런 방식은 아무도 못 지킨다는 말로 해석하지 말라 그 말이다. 바울은 말하지요 나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 아리마대 요셉도 율법으로 하면 의로운 자요. 의롭다는 말은 율법의 판정에서 정당하다 그 말이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정신 나간 이야기 했게. 노아도 의인이고 의인이 많다. 그러니까 그런 말들은 모세 언어를 가지고 읽어 들어가야 되지 아무도 못 지킨 것을 괜히 또 내게 규칙으로 주었구나. 그러면 목메어 죽인 것은 안 먹고 피는 안 먹는다. 피를 먹지 말라고 하면 피가 한 방울이라도 있는가 없는가 검사 한가. 그런 말은 아니다. 그러면 소고기가 하얗게 되도록 씻어 버러야지.
그것 몇가지를 못 지켜 개고기 안먹으면 못 살아. 피 안먹고 못살고 그런 말이 아니다.
우리가 구약 언어 개념을 이해를 하지 않고 막 읽어 들어가니가 해석을 못해버린다. 그러니까 이 성례도 반드시 구약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구약의 생명의 교제가 신약에서는 어떻게 교회에 공급되는가? 세례에서 주의 몸으로 접붙이고 그의 상에 앉아서 먹고 마시겠는가. 같은 의미다. 하나는 출발 하나는 강화가 아니라 그것은 개인의 발전 단계로 보니까 그렇다. 하나님의 약속의 방식으로 해석을 해야한다. 이것은 같은 이야기다.
그런데 이것을 개인의 출생으로 보니까 세례는 한번하지 두번 하냐 세례는 한번 이상 베풀면 안되고 성찬식은 반복하지 않냐 그 말이다. 만일에 출교한 자가 들어오면 물을 것이다. 그가 그전에 예수를 믿었는데도 사악한 범죄를 했으면 다시 할것이 없다. 그런데 실은 그전에는 내가 안 믿었었다고 이제야 내가 예수 알았다고 하면 그래도 그전에 세례 받았으니까 그 세례가 드디어 효과를 발휘하네요. 성례는 그 순간에만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니라. 그러니까 한 번 받았는데 또 받을 것이냐고 간첩이 가지고 있는 것도 주민등록 아니여. 다시 받을 것이여. 비유에 속지 말라. 그런 식으로 해가지고는 말하자면 천주교 성례주의 보다 더한 성례주의다. 천주교는 성례를 시행하면 즉각 은혜가 공급 되거든. 우리는 보약이다. 그전에 했던 것도 나중에 드디어 효과를 본다. 왜냐하면 시행 양식으로 해석을 하니까 그렇다. 한번 이냐 여러번이냐. 또 개인의 변화에다 보니까 출생이냐 나누기냐. 이렇게 하니까 그렇다. 실은 그리스도를 믿고 들어온적이 없었는데 교회가 잘못 알고 세례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요.
그전에 몬타누스나 그런 사람들이 배교 시대에 재세례를 말했던 것은 모든 배교자들은 다시 세례 받아라 그렇게 했기 때문에 이단으로 정죄됐던 것이다. 그러나 잘못된 세례를 나중에 그 사람이 믿으니까 그전에 세례 받은 것이 효과 있는 것이라고 그런 말을 하면 안만다.
그런것을 재 세례라고 말하면 안된다. 그런데 그전 목사가 가짜인데 세례가 찜찜하다고 다시 주라고 하면 한다. 그것은 정당히 믿고 받았던 것이고 목사가 한번만 목사였으면 그것은 정당한 이야기다. 더구나 결혼식 때 조심하라고 내 맘에 맞는 목사로 주례를 세울라요. 그래야 은혜가 되니까. 그런 식으로 마음에 맞는 은혜는 아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약속을 누리는 은혜지 그러니까 자기 당회장으로 하도록 해야한다. 설교 못하더라도 결혼은 결혼 서약에 은혜가 있는 것이지 그 때 감동 되는 설교를 했다고 은혜 되는 것은 아니다.
법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는 자로 주례하게 해야한다. 다른 목사도 할 수 있지만 일단은 결혼하라 말라는 것은 당회가 하는 것이다. 결혼의 하자가 없는지 살펴서 해야한다. 그리고 허락이 되면 하겠지요.
신부쪽이든 신랑 쪽이든 누가 해도 상관은 없는 이야기다. 여자쪽이 먼저인데 나한테 먼저 말안하고 신랑 측에서 먼저 정했다고 그런 일에 열낼 것 없다. 단지 신부의 편의상 그렇게 하는 것이다.
성례는 반드시 교회에서 시행되어야 한다. 성례가 구원이니까. 우리가 성례주의자는 아니다. 성례주의자들은 성례 안한다. 그러나 성례 없이 주의 백성되고 먹고 마시는 방법이 없다. 주의 상으로부터 배제되는 것은 주의 몸으로부터 배제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가끔 시행하니까 이런 이야기를 한다. 교회로 모일 때마다 이 예식으로 모이면 그 이야기를 못한다.
구약 성례와 신약 성례도 천주교를 보지 말고 구약을 보라 그 말이다. 구약에 있었던 생명의 교제가 메시야 시대는 어떻게 하늘에 질서로 주어졌는가? 그것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교회 주신 생명의 질서다. 우리는 그 질서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산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을 해석하는 질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움직이지 내 개인 자격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내 개인 의견에는 이런데요 그런 식으로 교제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어떠하시는가 바울처럼 충성된 종으로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떻게 할까 그렇게 봉사해야 되지 성경은 그러는데 내 개인적으로는 이러내요 그런 식으로 살 수 없고 항상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산다. 그가 말한 것처럼 말하고 그 손의 힘의 공급하신 것처럼 해야한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구원 역사에 봉사한다.
목사로서는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는데 내가 인간적으로는 이해가 가요. 좋은 이야기다. 목사도 나를 알아는 주는구가 자기 직무상 할 수 없이 저 말을 하는 것이지 순경이 어쩌겠소 이해는 가도 할 수 없이 자기 동생도 잡아가야 되지 그런 이야기라고 그러니까 성경에 안 맞는 마음을 품고도 목사도 내 처지를 이해하는데 그런 것이 거짓 선지자들이다.
하나님보다 더 자비하고 이해력이 높아.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거워서 괴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자유다. 그 외에 해결 방법이 없다. 우리도 그 외에 다른 능력이 없다.
그러니 성례가 메시야 시대의 교회의 삶의 질서다. 먹고마시는 모든 질서에서 몸을 주신 주신 주님의 생명의 교제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먹고 부활의 생명으로 먹고 죽음을 이기신 새 시대의 질서로 먹고 그리고 그 몸의 질서로 형제를 공급해라. 그냥 돈 있으면 몇푼 그런 정도가 아니다. 그렇게 해서 형제를 보양하는 자가 되라. 그것이 헌금의 내용이다. 그것이 의의 열매다. 신약 시대의 의의 열매는 메시야 시대의 구원역사에 봉사한 것이 의다.
성례의 필요성도 오히려 제대로만 해석되면 천주교가 더 맞는 식인데 이 해석은 아주 안맞는 말이다.
우리 개혁파에서 한것은 말도 안 맞게 되어있다. 이것은 구원에 꼭 필요한 것도 아니며 왜 영적으로 구원 받으니까. 마음에 믿음으로 구원 받으니까. 주님은 교회를 짓기 위한 부활이다. 그런데 자기는 교회 가입하지 않고도 구원 받았어요. 그런 개인 경험으로 설명하면 안된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요즘 교회 개척하는 사람들이 우리교회 하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 교회는 구체적으로 여기 더 나타나 있지요? 그러니까 요즘 개척한 사람들이 자기 교회 부흥 시킬려고 나도 교회를 이야기 한다고 에이 오해 되니까 이야기 하지 말자 하지 말고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 이야기고 우리는 성경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염려하지 말고 알아듣는 사람은 알아 들으니까 염려하지 말고 교회가 무엇인가를 이야기 해야 한다.
구원은 교회에로 구원이고 한 성령을 마시게 하는 구원이고 몸의 지체로 접붙이는 구원이지 개인들을 구원해 놓고 모아라 하는 그런 교회 개념이 아니다. 처음부터 열둘을 부르셨고 그들이 새 인류의 토대다. 그런데 우리들은 교회를 교회의 조직법으로 이해를 하니까 몇몇 믿는 사람들이 점점 모아들면 나중에 몇명 이상 교회 이렇게 되거든. 이렇게 교회를 해석하니까 문제다.
그런데 이것도 문자적인 해석을 한다. 두 세명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내가 함께 하리라 하니까 두 세명이 모인다고 교회 아니겠소? 꼭 조직 교회만 교회요. 하도 조직 교회가 타락하니까...
그런데 교회는 목사와 장로와 교사를 주셨고 은사의 직분이 있고 치리자가 분명히 있다. 사도들은 다른 사람들하고 지위가 분명히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만인 평준화 신자라 그렇게 한다. 거기서 두세 명은 교회 설립 조건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화평을 이야기 한다. 화평이 교회의 본질이거든. 서로 용서해라. 그것 아닙니까? 그리스도의 용서가 나타나지 않는 곳은 새 몸의 연합이 아니다. 그런 말을 하고 있는 문맥인데 헌법은 열 다섯명 했는데 이런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면 둘이면 둘이고 셋이면 셋이지 두세명 그래.
그러니까 천주교를 대항하려고 하는 것이 어떻게 사변화 되었는지 이것을 보아야 한다. 이런 설명도 구원 역사적인 설명이 아니면 실은 다 종교 철학이지 성경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반드시 구약 교회에 주었던 생명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생명의 주님이시니까. 그것이 어떻게 신약에서 그리스도안에서 부활의 질서 하늘에 속한 새 질서로 완결 됐는지 그것을 봐야 한다. 그렇게 설명을 하면 이것은 사변화 되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생명이다. 우리의 삶의 전 빛의 질서고 그 질서를 떠난 삶의 질서는 신약 백성에게는 없다. 성례주의를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 성례와 신약 성례의 비교.
 이런 것도 보면 여간 재미진다. 비교 해놓고도 비교가 안되니까. 시행되는 양식을 가지고 비교한다. 피가 있냐 없냐 복잡하냐 단순하냐 구약이 훨신 돈이 비싸 양한 마리에 돈이 얼마여. 우리는 진짜 싸지. 지금은 정신적으로 마음만 먹고 하니까 얼마큼 싸 그것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 줄로 알고 있다. 마음으로 한다는 말을 그러니까 신령과 진정으로라는 말의 의미를 모른다. 거기서 신령과 진정은 같은 개념이다. 그 진리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메시야 시대의 진리다. 그것이 모세 제도의 육과 대비된 신령이다.
바울이 내가 혈과 육과 의논하지 아니했다 했을 때 지금 유대주의에 대해서 이단 시비가 붙고 있다. 그렇게 했을 때 그가 출생했던 제도는 모세 제도의 출생이다. 거기서 의논해서 할일이 아니다. 문제가 지금. 지금 바울이 소명 받은 위치가 그렇다. 더 확대 시키면 구약 선지자에게 물어 볼것이 아니고 신약 사도에게 물은 것도 아니고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았다는 그런 개념이다. 확대를 해보자면 그렇다 그 말이다. 그리고 육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 했을 때 로마서 6장 까지라도 그냥 출생으로는 그런 말보다도 육의 질서로는 우리 조직신학으로는 땅에서 그런 중보자면 그는 옛 질서에서는 다윗의 후손에서 오신 왕이요 그는 성결의 영으로는 부활하셔서 영의 질서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취임하신 왕이다. 두 통치 질서를 이야기 한다. 물론 문법적으로는 그 이야기가 가능하다. 그냥 직접 죄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니까. 왜냐하면 예수는 율법 아래 나셨거든. 그는 다윗의 왕으로 오셨는데 율법 아래 나셨다. 그런데 그는 영광의 보좌에 오르심으로 영의 통치를 가져오신 분이다. 새로운 통치를 가져오신 분이다. 그것이 복음을 기독록 적으로 개진하는 것이다.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의 비교
로마 카톨릭 교회는 구약의 성례와 신약의 성례 차이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구약의 성례는 단순히 예표적이어서 영적 조건을 갖추지 못하고 다만 받는 자의 법적 위치만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성례의 역사는 그것을 받아 들이는 사람의 믿음에 좌우했다.
 그리고 신약의 성례들은 단순히 비적적 행위를 위해 받는자의 마음속에 영적 은혜를 일으켜 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실상 구약의 성례와 신약의 성례는 본질적인 차이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여기에는 차이점도 있다. 구약의 성례는 영적 의미 이외에 국가적 국면을 지니고 있었다. 구약 성례들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앞을 바라보며 장차 효과가 나타날 은혜의 있는 호에서는 신약의 성례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완성 된 제사를 회부하는 것이다.
3번 구약 시대의 전체로 보아 구약의 성례들은 신약의 성례들이 하는바와 같이 풍부한 영적 은혜의 양을 받는자에게 전하지 못하였다. 우리식으로 해석하면 맞고 이 사람들 이야기대로 하면 한참 먼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이 구조 자체가 잘못이다. 구약 성경 자체를 해석함으로 신약 성경을 해석하면 좋은데 천주교는 이런데 우리는 이렇다. 하는 시작부터가 제대로 초점을 못 잡고 있다. 그러니까 어떻게 봐서는 천주교로부터 출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는 해석이 안된다. 그것은 우리가 조심을 해야한다.
천주교는 어떻게 이야기를 했냐면 당시 예표적이다. 하는 말은 어떤 의미로 상징적이다는 말밖에는 안된다. 이 사람들의 예표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말하는 조직신학에서 예표적이다 했을 때는 그런 말이 아니다.
천주교는 단순히 예표적이고 영적인 조건을 갖추지 못했고 단순히 이 사람의 법적인 자격 이겼다. 앞으로 받을 것이다. 아직 교장 선생님 나오지 안했으니까 시장대 앞에 가면 안된다. 그런 의미로 법적인 자격만 받는 것이지 아직 상은 못 받았고 약속만 받고 있는 것이지 현금은 없다. 그런 이야기다. 그러니까 대기소는 어디냐. 조상들의 림보다 그런다. 그 림보는 천당과 지옥이 선명하게 선이 그어지면 좋은데 상하 림보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옆에서 좀 덜 좋다. 나쁜 장면도 보고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자다 지옥도 보이는데 지옥이 별것 있겠어. 말하자면 그렇다.
그리고 어린 아이들은 어린 아이들의 처소가 있다. 또 어린 아이들은 죄 없이 죽었거든. 그러니까 지옥 가기는 억울하고 조상들의 림보에 있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구약 때는 믿음으로 받았지 그 성례는 효과를 보지 못했다. 효과를 받지 못했다는 의미로 영적이 아니다 그 말이다. 그러나 지금 교회가 베푸는 세례와 성찬은 믿음과 상관 없이 그것을 받는 자들에게 영적 효과를 공급한다. 먹음은 예수의 피를 먹는 것이고 물 뿌림을 받으면 마음이 깨끗해 지는 것이다. 자기 믿고 말고 상관이 없다. 능력이 있고 영적이니까. 이것이 천주교 성례주의자들 이야기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의미로는 맞다고 그랬다. 왜냐하면 구약 때는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수가 없었다. 그전에 중보자는 모세지 예수에게 속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종으로 속했지 직접 하나님께 속할 수가 없었다. 그런 의미로 그들은 가리우고 하나님을 예배했지 영광의 보좌에 앉은 분을 대면하고 예배하지 못한다. 그런 의미로 대비가 되는 것이지 천주교식으로 대비는 말도 아닌 이야기다.
 구체적으로 먹어야 사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냐 영원 법정에서 어느날 완성 할것이다. 구약 때는 그런 식으로 먹었다니까 천주교보다 낫지 단순한 표가 아니라 법적 지위가 아니라 먹었으니까 그래도 예표라는 설명을 알아가지고 그쪽으로 설명하면 낫지만 영광의 영역이고 땅의 영역이고 그렇게 구분하면 안된다.
그것은 어느날 완성할 분안에서 선불로 받은 것이 아니라 어느 날 완성 할 분이 구약 때는 자기 백성을 그런 교제로 먹이시면서 살아오셨다.하나님이 천막에서 잡수셨다고,광야에서 천막에서 사시고 잡수셨다. 다윗 집에서는 금집에서 잡수셨지만 그런데 지금은 상은 헌상 같아도 지금은 부활자가 앉아 계신다. 그렇게 된다. 항상 구약 개념을 이해하라 그 말이다. 이것은 역사지 단순한 상징이 아니다. 어린 아이는 어린 아이의 생명을 누리지 어른의 생명을 연습하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생명의 삶이다. 그래야 진리에 대한 그림자고 표상이고 그런 것이다. 그냥 영적인 것을 구체적으로 표현다는 의미로 표상이 아니다. 그런 것은 상징 법일 뿐이다. 이것은 구원의 실제를 누리게 하는 상징이다.
그러니까 천주교 성례가 얼만큼 틀리는가 알겠지요. 단 한가지 말은 구약에서 주지 못한 것을 신약에서는 준다. 하는 말은 좋은 말인데 그들의 체제로 봐서 전부 틀린 말이니까 가져다 쓰지 말라고. 교인들 앞에서 천주교가 나은 점이 있다고 하지 말라.
이것은 우리나 알고 있을 것이고 복음만 열심히 이야기를 하면 된다.
지금 우리 예배 분위기는 천주교보다 훨신 못하다. 말씀 중심 해가지고 난장판이다. 천주교는 옛날 식으로 하면 한복이나 입고 얌전하게 앉아 있는데 우리는 아무것도 없네. 그래도 그 사람은 집에 들어갈려면 발 씻고 들어가지 구약 성도들이 손을 씻으니까. 미신도 대단한 미신이다. 그것도 그리스도를 대신한 미신이라 굉장히 권세있는 귀신이다. 세계를 잡고 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은 권세적이다. 단순한 지식이 아니고 의식이 아니고 권세적이다.
그러니까 천주교의 성례주의가 얼마큼 미신인가 알겠지요. 구약 때는 단지 표고 실체는 없고 법적인 위치만 받는 것이고 그것도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구체적인 실체는 공급이 안된다. 그러니 받는다는 말도 안맞는 말이다. 어떻게 받아. 그런데 신약 때는 믿음은 상관이 없다. 교회가 공급하면 받는 것이다. 교회는 주는 교회니까 물이 흘러 넘치면 아랫 집에서 항거하면 안된다. 이것은 주는 교회니까. 그래가지고 믿음은 무엇이냐 천주교 교리에 동의만 하면 된다. 마음으로 믿고 아무 상관이 없다. 그리고 천주교가 하는 예식만 참여하면 그것은 천주교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세례 못받으면 구원이 없고 그런 것이다.
그런데 신약의 성례들은 어떻게 하냐 우리 개혁교회에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냐? 여기서 사실상 구약 성례와 신약 성례는 차이가 없다. 개혁교회가 하는 말이다. 롬4:11 또 어떤 차이점도 있다.
1,구약의 성례는 영적의미 외에 국가적 국면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이 해석에 잘못을 가져온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교회는 영적이고,그러니까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서 권세적인 왕국과 은혜의 왕국은 구약 때는 그것이 합쳐졌는데 신약 때는 그것이 분리됐다 이런 개념을 가져 올려는 것이다. 구약 때는 분명히 이스라엘 국가가 교회 아닙니까? 하나님의 이스라엘 이니까. 그때는 국가와 교회가 일치되어 있었는데 신약 때 와서는 이제는 천하만민으로 구성된 교회 일 뿐만 아니라 국가적인 틀에 그런 양육을 받는 그런 교회가 아니라 신령한 조직으로 독립되어 있고 그리고 권세적인 왕국은 국가에만 있다. 나중에 예수 재림하시면 이 권세의 왕국과 은혜의 왕국이 합쳐질 것이다. 이런 이야기 토대에 이것을 설명하려고 하니까 그런다.
그런데 구약은 국가냐 교회냐 이것은 말하려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구약에서는 만왕의 왕을 설명하려는 것이 국가적인 양식으로 있는 교회 형태다. 그는 완성된 나라에서는 우주적인 왕이다. 그의 권세를 벗어날 나라가 없다. 세력이 없고. 그것이 다윗 왕국에서 완벽하게 들어났다. 다윗 왕국은 국가와 교회가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윗의 왕권에 복종하는 우주적인 왕국에 대한 문제다. 예수님은 진정한 다윗의 후손으로 다윗의 장막을 회복하신 분으로 보좌에 앉으신 왕이다. 그런 구원 역사에 대한 문제지 국가냐 교회냐 그전에는 교회안에서 국가가 양육을 받았는데 이제는 독립한 신령한 단체며 천하만민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제는 따로 따로 있느니라. 그런 말이 아니다.
 오히려 바울의 국가론에 있어서는 이제는 모든 권세들에게 복종해라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면 구약 같으면 그런 말은 못한다. 모든 이방의 권세와 싸워야 한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안되어 있다. 복종하라고 했다. 왜 예수가 만왕의 왕이 되셨지요.
가령 12장에서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내라.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하노니 그 말은 이 만한 구원을 받았으면 명령안하고 부드러운 말로 할 때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내라 그런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이 이제 나타났기 때문에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면하는 것이고 그 모든 자비하심은 구약처럼 부분적인 예배가 아니라 전체로 헌신하는 예배에로 부르심이다. 그것이 모든 자비하심의 나타남이고 완결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권면이 가능한 것이다. 아이에게 어른처럼 살라고 할 수 없잖아요. 어른의 시대에 도달했기 때문에, 그 자비하심이 이제 나타났기 때문에 그 자비하심으로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내라는 윤리의 요구에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그러니까 바울이 국가론과 교회론을 정립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제 주님께서 우주적인 왕이 되셨기 때문에 하늘의 보좌에 앉아 계신 아들이 되셨지요? 롬1장에 그러기 때문에 모든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는 말이 가능하다. 그가 왕이 시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냐 칼을 쓰는 것은 육체적인 것 신령하지 못한 것 그리고 우리가 말씀으로 하는 것은 신령하고 온유한 것 이런 양식을 따라 구분한다. 그런데 신령하다는 것은 메시야 시대 왕국을 신령하다고 하지 그냥 칼을 안쓰니까 신령하고 데모를 안하니까 신령하고 그런 정도가 아니다. 물론 그것은 포함 되지만 그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세 시대의 통치가 아니라 메시야 시대의 통치이기 때문에 신령한 왕국이다. 하늘에 속한 왕국이다.
그러나 구약 때는 모세 시대 왕국은 모세는 칼든 중보자다. 칼은 국가에게 교회에는 말씀의 열쇠를 한 쪽에는 칼 한 쪽에는 말씀 이런 이야기가 아니고 모세는 칼든 중보자다. 모세의 손에 칼이 있었는가 없었는가를 모르지만 다 죽여라 그러지요? 왜 만일에 그의 눈에 거치면 어느 성곽도 불살라 버리고 모세 제도가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때 싸움은 계속해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그런 싸움이 아니라 원수의 본진을 파괴하는 그런 싸움이 아니라 그 대리왕을 통해서 대항하는 권세와 싸우는 그런 심판이었다.
그러니까 그 구원 역사가 예수안에서 완결 된 것이지 국가냐 교회냐 칼을 쓰냐 온유하게 말씀만 하고 기도만 하냐 말씀만 하고 기도하니까 영적이고 칼을 들고 매를 때리니까 육적이고 그런 말이 아니다.
그런데 왜 교회는 칼을 안쓰냐? 예수께서 말씀하셨지요. 네가 지금은 모른다. 후에는 알이라. 내가 너를 씻었으니 씻어라. 그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 날의 큰자가 누구냐. 그렇게 설명을 하고 있다. 이제는 모세와 같은 나라가 아니다. 그렇게 되어있다. 그러니까 교회는 그냥 교리적인 말씀 그런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말씀으로 권하고 그냥 교리적으로 신 구약 아무데나 택해서 여기 있지 않소 그런 교리적으로 들어라 하는 마치 우리 나라 대통령 법 잘 지키니까 들은 것처럼 그런 개념이 아니라 복음의 통치를 받는 시대의 의미로 말씀이다.
그러면 구약까지라도 부활하신 주님의 해석된 말씀이 있지요. 어떤 말로 모세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로 말씀의 통치요 그런 의미로 영의 통치다. 왜 신약에 증거하는 말씀은 보좌에 오르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거든. 그 복음을 증거하고 있거든. 그런 의미로 신령한 말씀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구약 어디 있는 것이 성경에 맞으니까 우리 성경 그대로 합시다. 그러니까 권위가 있어서 듣고 이런 법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 말이다. 통치는 능력있는 통치지 규칙에 맞으니까 들어라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 능력을 베푸는 통치인데 천구교 처럼 성례를 공급하니까 된 다는 말이 아니라 성례에서 천주교처럼 그런 공급은 아니다. 성례에서 바로 그 복음의 말씀과 함께하는 생명의 약속이 이루어진다. 복음의 말씀이 성례에서 구체적인 삶으로 나타나고 있지요? 그런 것이다.
그런 의미로 복음의 말씀이 권위가 있는 것이다. 새 시대의 권세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위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부활자의 말씀으로 권세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교회가 통치를 받고 있는 것이다.
 모세 제도의 말씀은 이런 권세를 가져올 수 없었다. 똑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그 말이 아니다. 모세 제도는 먹어도 그 다음 하루가 지나면 썩을 양식이다. 그 이상은 먹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니 썩지 않는 영원한 기업을 얻었다. 우리도 반복해서 먹지만 약속은 영원한 생명의 약속이다. 그것은 신약이 아니고는 먹여주지 못한다.
그러니까 구원 역사를 잘 생각해야 한다. 그런 의미로 신약의 성례는 구약 성례하고 차이가 있는데 국가적인 국면이 있고 영적인가? 국가는 영적이 아니다 그 말인가 그런 말이 아니다. 영적이다 하는 것은 항상 메시야 시대다. 소위 성경 말씀만 하고 목사는 때려도 가만히 있고 그러면 안됩니다 하니까 아 ! 신령하고 영적이구나 그러고 이제 국가는 이제 그렇지 않거든. 아무리 힘이 없어도 깡패도 잡아버리고 그런다. 아 이것은 힘의 권세구나. 이런 이야기가 아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지금은 모른다. 나중에 말씀하셨지요. 내 양을 치라 이제는 생사를 무릎쓰고 해야한다. 주님께서 가신 것처럼 걸어 나가야 한다. 그것이 교회가 신령한 왕국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해라. 이것이 새 계명이고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런 말씀이다. 사랑의 왕국 한 몸의 왕국이 나타난다. 그것은 삼위 일체적인 왕국이다. 그렇게 되어있다.
구약 때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 모세 제도적인 양식으로 다윗 왕국의 방식으로 교회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 국가와 우리와 그런 개념이 아니라 이제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고 친히 그가 종의 형상이 되신 자기 백성의 죄를 담당하신 그런 왕국으로 완성이 되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모세 제도적인 감독적인 그런 나라가 아니라 친히 주님의 면전에서 그것이 성경으로 산다는 말이다. 그냥 마음에 성령이 오셨네 이런 말을 하지 말고 기독론적인 말을 해야한다. 그가 보좌에 앉아 계신는데 교회가 그와 함께 하신 방식으로 구약 개념으로 하면 성소에서 거닐음 그것이 제사장이 사는 거처다. 그렇게 살고 있다. 그런 의미로 지금 국가 개념이 아니다. 모세 제도와 대비된 국가 개념으로 하면 맞는 말이고 지금 있는 국가와 우리를 대비하면 안맞는 말이고 그런다. 그렇게 이해를 해라.
그리고 구약 성경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앞을 바라보며 장차 효과가 나타날 은혜의 위로였으나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안에서 완성되어 회복한 것이다. 이것도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것이다. 구약 성경은 그 자체로 능력이다. 그들은 그 당시 생명을 분명히 누린다. 그런데도 이것은 그리스도안에서 완성 될 은혜의 진행이다. 그것이 구약이 증거했다는 것이다. 증거했는데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주지 못했다는 말은 가짜로 주었다는 말이 아니라 완성된 방식으로 주지 못한 시대다.
그러나 신약 시대 때는 예수 안에서 하늘에 속한 은혜의 빛이 왔고 생명의 교제가 왔다. 그러면 신약 교회는 단순히 회상한가? 구약 때는 미래만 보고 우리는 단순히 돌아만 보는가? 그렇지 않다. 구약 때도 돌아보는 것이 항상 먼저다. 돌아보기 때문에 미래를 바라보는 시행이 가능한 것이다. 돌아 본다 그 말은 출발점에 있었다 그 말이다. 모리아 산의 이삭의 제사 그것이다. 그리고 애굽에서 유월절 제사가 있잖아요. 그것이 없으면 이스라엘의 출생이 안된다. 시작이 없는 것이라고. 그것이 모세 제도안에서 반복되면서 그 완성을 바라보도록 한 것이지 그냥 앞으로 될 것 이렇게만 한 것이 아니다.
 그러면 신약 시대에는 어떤가? 분명히 회상하는데 6.25기념식처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 때도 모리아 산의 제사에서 새 인류가 출생한 것이지요. 유월절도 새로운 생명의 교제로 출생된 것이지요. 그것이 모세 제도에서 더 반복된 방식으로 그러면서도 죄에 대한 것은 더 강력히 나타냈다. 왜 죄의 질서가운데서 시행되는 범법함을 인해서 더한 가운데서 시행되는 규례이기 때문에 그렇게 됐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한 것처럼 죄를 해결하는 은혜의 빛도 강력하다. 그렇게 되어있다. 하나님의 집에서 쫒겨나는 법이 없다. 휘장은 가리워져 있는데도 쫒겨나는 법은 없다. 그렇게 되어있다.
신약 시대에는 어떻게 되어있는가? 이스라엘이 출발점이 있는 것처럼 신약 시대 때도 예수의 부활이 있다. 그것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그것을 누리고 반영함으로 기념이다.그래야 몸이다. 그런데 회상이라고 하니까 종교 심리적으로 하니까 우리는 분명히 복음을 묵상함으로 누리거든 분명히 가만히 있어도 콩 심은데 콩나는 식으로 누리지를 안해요.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인격적으로 해석되고 인격적으로 의식함으로 누린다. 가만히 있어도 옛날에도 깨끗해졌으니까 자동 깨끗해지고 이런 방식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회상한다는 말을 항상 정신적으로 회상한데가 두고 있다. 그런 말이 아니라 회상한다는 것은 그것이 우리안에서 삶의 질서로 나타난 것만 영광이고 빛이고 회상이지 가만히 있는데 이론적으로 가져오니까 옛날에 감동이 새로와지고 이런 회상정도로 회상이 아니다.
항상 주님을 인격적으로 의지 하지 안했으면 그 동안 소위 회상 않고 있는 것은 죄다. 우리가 종교 심리적으로 설명해버리니까 회상이 설명이 안 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회상은 출생이 모세 제도에서 풍성하게 주어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구 체적으로 누리는 회상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누린 것도 예수의 완성은 구약 시대 때는 그 완성은 참 완성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하늘에 질서로 완성 된 이제는 하나님상 앞에서 먹고 마시는 생명의 교제를 누리면서도 회상이면서도 여전히 주님 말씀하시기를 아버지 나라에서 새것으로 먹을 때까지는 다시는 먹지 않겠다. 그렇게 했다. 주님 나타날 그 나라를 바라보고 먹는다. 그것은 저 미래의 일이 아니라 새 시대 지금 왔다. 같은 능력이다.
그것이 바울이 말하는 때에 맞는 삶 때가 가까운 삶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몇시쯤 되겠는가 깨었다는 그런 시간 개념이 아니라 믿음으로 깨어있다는 말은 새 시대의 빛으로 깨어있다는 것이 믿음으로 깨어있다는 말이지 내일 올 것인가 모래 올 것인가 긴장한 것이 깨어있는 것이 아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다섯 처녀의 비유도 그런 것이다. 그 믿음으로 깨어있는 것이 새 시대에 사는 것이지 야! 내일 올까 모래 올까 이것이 깨어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이다. 깨어있다 그말은 믿음으로 사는 것을 깨어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는데도 몸으로는 따로 이렇게 살고 있다. 고전5장에서 바울이 하고 있는 말이다. 주님과 함께 하는데 몸으로는 따로 살고 있고 소망이 무엇인가? 내가 주님을 얼굴로 뵙는 것이다. 그 때 내가 몸으로 행한바를 따라서 내가 받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분명히 따로 있다. 그러나 분명히 같이 있지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 시대다. 우리가 완성된 새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구약 때는 아직 주어지는 완성을 향해서 진행이 되었는데 이제는 주어진 시대 완전히 나타난 시대에 소망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차이점이다. 그러니까 이런 설명들은 그런 틀들은 어느정도 인정하는데 그 사람들 해석 가지고는 안된다.
 그러니까 이러한 책들을 읽으면서도 해석은 구원 역사적으로 다시 설명을 해야한다. 그러면 복음도 더 잘 이해가 되고 사변신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교리적으로 틀은 맞출 수 있으면서도 생명은 죽여 버리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개혁주의 스콜라주의다. 말로는 복음인데 어떻게 철학적인 언어로 죽여버리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철학적인 것은 철학적인 단어만 써서 철학적이 아니다. 그것을 잘 이해를 해야한다.

그 다음에 구약 시대에는 전체로 보아 성례들은 신약 성례들의 하는것 풍부한 영적 생명의 양을 받는 자에게 전했다. 양이 아니라 질이다. 성경대로 하면 예수와 모세의 대비이고 죽음과 부활의 대비다. 같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가리우고 계신 것이 아니라 영광의 보좌에 계신 분이 함께하신 것이다. 가리우고 있었을 때는 히브리서 말대로 하면 아직은 아니라는 말이다.
땅에 속한 아담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아담 새 인류다. 그런 의미로 하늘이다. 두 세계관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의 의미에서 하늘이다. 예수께서 영광의 보좌에 계신 것이 하늘이다. 우리는 지금 하늘에 속한 자들이다. 그러니까 세상은 우리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천사도 안다. 우리가 동 봉투보고 예언하는 그런 것은 없으니까 개인들의 사건은 모른다.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는지 아닌지 그것은 안다.

성례의 수
구약 시대에는 할례와 유월절 이것이 모든 생명의 의식을 대표한다는 의미로 수지 실은 구약의 모든 제사는 그런 의미로 다 성례다. 그런데 그 출발이 할례하면 하나님의 백성의 출생되고 유월절이 이스라엘 백성이 새 백성으로 출생되었을 때 양식이다. 그리고 모든 절기가 유월절로부터 출발된다. 첫달이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로 모든 절기는 안식일의 의미고 유월절의 의미다. 모든 제물은 화목제물의 의미다. 먹는 것이니까 그래서 이렇게 되어있는 것이다.

신약 시대의 성례는 어떤가?
뭐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을 상징하고 예표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상징하고 예표는 실은 등치 개념이다. 결국 이 사람들은 예표라는 말을 상징과 거의 대차없이 써버리고 있다. 만일에 예표라는 말은 상징에서 다소 진행되는 언어로 쓰면 맞기는 맞는데 이것은 단순한 상징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생명이다. 우리는 먹는 것을 상징으로 안다. 먹는 것이 생명이다. 사람은 먹지 않고 사는 방식이 없다. 예수는 부활하신 뒤로 뭐라고 하셨냐. 영은 먹지 않는데 사람은 먹느니라. 가져와라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들은 이것을 먹는 것은 저위에 영적인 교제 우리의 선물을 영적으로 보고 그러는데 성경은 말하기를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의 영광이어서 우리들은 만물에서 생명의 하나님을 본다. 우리는 하나님을 본다니까 어떤 사람 보듯이 그런 것만 자꾸 염두해 둔다. 물론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셨지. 분명히 그런데도 우리는 모든 만물에서 생명이신 분을 본다. 대면해서 왜 만물이 하나님의 생명의 영광이니까. 그러니까 우리들은 이런 상징 개념으로 이해를 하면 안된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상징의 대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의 세계를 하나님이 이 방식이에 생명을 나타내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더 큰 생명이니까 이것보고 상징적으로만 알아라 그 말이 아니라 모세 시대 때는 모세 시대의 방식으로 생명을 나타내셨고 지금 우리 시대는 부활하신 주님안에서 생명으로 나타내셨다.
그러니까 성례가 생명의 질서 문제지 상징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영적인 것은 구체적으로 안보이는 것을 보이는 질서로 그런 범주 개념으로 설명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방법외에 사는 방법이 없다.
구약 백성들은 그 제사 제도가 제사장들의 생명의 구조다. 아니며 못산다. 그런데 우리가 얼만큼 이렇게 된 것인가 알겠지요. 성례는 따로 시행은 따로가 아니다. 오히려 희생제사에서 성례의 의미가 더 여러면으로 확대되고 전 삶의 방식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신약 시대 때는 무혈 성례다. 희생으로 완성 되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유혈이 필요가 없다. 로마교회는 전혀 부당한 방법으로 여러 성례들을 말하는데 이것은 아니다. 유혈 성례, 무혈 성례 유혈성례보다 더 하지 이것은 내 피라 했으니까. 단지 우리가 피를 흘려 드리지 않는다 뿐이다. 그러니까 유혈 무혈 그것은 분명히 맞는 말이다. 이 사람들은 성례가 집행되는 의식을 가지고 이야기를 한다. 이제 짐승의 피도 아니고 내 피를 마시라 했으니까 야만인이여. 그러니까 구약의 의미가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봐야 한다. 그것을 생각을 안하니까 그런다. 분명히 유혈 성례라는 말은 교리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오히려 가나안 땅의 양식과 성소의 생명이 일치되는 것처럼 이제는 가나안 땅과 성소의 구별이 없겠지요.
 구약 때는 분명히 가나안 땅의 양식은 성소에 들어 갈려면 죽어야 했지요. 그리고 그 피가 나가는 곳 까지가 제사장이 나가고 생명이 나간다. 피는 그런 의미로 생명이다. 흘린 피는 죽음을 이야기 해도 뿌린 피는어디까지 뿌려지면 거기까지가 생명의 거룩이다. 거기까지가 제사장의 임재의 처소다. 그렇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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