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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6-12-05
 제목  손양원 목사 기념관
 주제어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여수 애양원에 가면 손양원 목사 기념관이 있습니다. 2층인데 상층에는 손양원 목사의 유품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특이하게 눈에 띤 것이 헌금 봉투 한 장입니다. 두 아들을 잃고 오히려 감사 헌금을 한 증거물입니다. 거기에는 순교자를 둘이나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글귀와 함께 '일만원야'라는 액수가 적혀 있습니다. 일만원을 헌금한다는 말입니다. 당시 손양원 목사의 월 사례금이 50원쯤이었다 하니 200개월 월급을 감사 헌금으로 낸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액수가 아니라 그의 마음일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세계에 자랑할 만한 경건한 신앙인. 손양원 목사. 그를 아는 것도 중요할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오늘날 이처럼 성장하고 성숙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신앙의 선배들 덕분이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다른 나라 신앙의 선배들 이상으로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았다. 그런 신앙의 선배들 가운데 한 사람이 손양원 목사이다.  다음 글은 손양원 목사 기념관에서 가져 온 글에 안용준 저, 사랑의 원자탄 (서울: 성광문화사, 1999), 손동희 저, 손양원 목사 옥중 목회 (서울: 보이스, 2001), 손동희 저,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서울: 아가페, 2002)를 참고하여 적은 것이다.

 

 주님께 부름 받기까지

 손양원 목사는 1902년 6월 3일,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653번지에서 손종일 장로와 김은주 집사 사이에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08년 7세 되던 해에 부친이 신앙을 갖게 되었고 그를 교회에 데리고 갔다. 이 때 부터 그는 부모를 따라 새벽 기도회 까지 참석해야 했다. 자연스럽게 기도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1914년 4월 1 일, 칠원 공립 보통 학교에 입학했으나 일본의 왕이 살고 있는 동쪽을 향하여 절을 할 것을 강요하는 동방 요배(東方遙拜) 문제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소년  손양원은 부친이 동방 요배가 십계명 중에서 제1 계명을 범하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궁성 요배를 하지 않다가 결국 3학년 때 퇴학을 당했다. 맹호은 선교사의 도움으로 복학을 했으나 주일에도 학교에 출석하라는 요구에 대해 주일은 하나님께 예배를 해야 한다는 이유에서 출석하지 않았다. 18세인 1919 년 칠원보통공립학교 졸업과 함께 서을 중동 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낮에는 학업에 임하고 밤에는 만두 장사를 하면서 고학했다. 이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안국동 교회를 다니며 주일 성수와 십일조 생활을 철저하게 했다.

  중학생 손양원이 서울에서 어렵게 공부를 하고 있을 때, 1920년 4월 3일 칠원 읍내에서 부친이 독립 운동을 주도했다. 결국 이 때문에 손양원은 중동중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70전을 출석하던 안국동 교회에 헌금으로 바치고 낙향했다. 1921년에는 일본에 건너가 동경의 스가모(巢鴨)중학교 야간부에 입학했다. 이번에는 아침과 낮에는 우유와 신문 배달 등을 하고, 밤에 공부를 했다. 그는 일본 동양 선교회의 노방 전도에 큰 감명을 받고, 동경의 판교(板橋)성결 교회 중전중치(中田重治) 목사의 설교에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1923년 졸업과 함께 귀국 했다. 1924년 1월, 손양원은 함안군 대산면 옥열리에서 자란 정양순 (19세)과 결혼하고, 그 해 3월 23일에 일본에 다시 건너가 학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는 학업에 임하는 도중 신앙의 새로운 도전과 확신에 찬 마음으로 중생하여 10월에 귀국했다. 귀국한 그 해 10월 23일에는 봉사하던 교회에서 집사로 피선되어 봉직하였다.

  1926년 3월, 경남 성경 학교에 입학 했고 부산 감만동 한센 병자 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이때 장남 손동인은 한 살이었다. 감만동 교회는 600여 명 교인 대부분이 한센 병자들이었다. 손양원의 첫 사역지가 이렇게 한센 병자 교회였던 것은 사랑의 순교자가 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손양원은 감만동 교회에 시무 중이던 1929년 3월 6일 경남 성경 학교를 졸업했다. 본디 감만동 교회는 1934년까지 매견시 선교사가 목회를 했으며 손양원은 외지 전도를 위해 청빙 되었다. 그리하여 경남 울진 방어진과 남창, 부산 서구 부민동에도 교회를 개척했다. 교회 개척에 전념을 했지만 시간이 나는 대로 감만동 교회에서 설교도 하고 환우들을 보살폈다.

  감만동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를 하던 중 1932년, 교회를 사임하게 되었다. 손양원 전도사에게 은혜를 받은 문신활이란 성도가 김교신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손 전도사가 감만동 교회를 사임하게 된 이유가 있다.  "1932년, 감만동 교회에서 손양원 전도사님은 성조지(聖朝誌)를 가지고 사경 공부처럼 일주일간 설교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로소 그 시로부터 부산 감만동 나병원의 배후에도 복음의 꽃송이들이 드문드문 피게 되었지요. 암흑에 잠겨 있던 감만동 교회는 광명을 맞이하게 되었지요. 곪아졌던 생명들은 생생하게 소리를 쳤더이다. 아! 모든 법과 의식에 결박되어 고통과 번민으로 예수를 뜻없이 믿는 소생은 날로 때로 생명적으로 자라는 참 진리로 해방을 받아 한없는 희열이 넘쳤나이다. 뭇 생명들이 그처럼 자비스럽게 해방을 받아 나가던 중도에 불행하게도 소위 목회자라고 하는 몇 사람의 시기로 인하여 손양원 전도사님도 감만동 교회 일을 못 보게 되었습니다."

 

 신학교에서  

 손양원은 1935년 4월 5일, 33세에 평양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평양 대동강변의 능라도 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 했다. 이 때는 한국 교회가 일본이 강요하는 신사 참배 문제로 온통 뒤흔들리던 시기였다. 그래서 손양원을 비롯한 신학생들은 시달림을 받았다. 손양원은 신사 참배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 신사 참배 문제는 신학교 교수들 사이에도 견해의 차이가 심했다. 평양 신학교 교장 나부열(R. L. Roberts) 목사는 끝까지 강경한 태도로 신사 참배를 반대했다. 그래서 결국 1938년 3월 제33회 졸업으로 이 신학교는 문이 닫혔다.

   손양원이 애양원 교회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평양 신학교 2학년 때 애양원 교회에 사경회 강사로 가게 된 것이다. 당시 애양원 교회는 외부 사람이 예배를 인도할 때나 방문했을 때는 하얀 가운을 입고 장갑을 끼고 들어가는 것이 상례였다. 한센 병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손 목사는 교회에 들어가면서 흰 가운을 입는 것조차 거절했다. 또한 그렇게 하는 사람들에게 호통을 쳤다고도 한다.  이 때 애양원 성도들은 손 강도사의 설교에 은혜를 받았지만 이러한 태도에 더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후에 애양원 성도들은 그를 담임 교역자로 청빙했다.  

 

 신사참배 반대와 옥고

 1938년 신학교를 졸업한 후 1년간 부산 지방 선교사 대리로 지방 순회 전도를 하면서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펼쳤고, 1939년 7월 14일에 여수 애양원 교회로 부임했다. 손 강도사는 신학교 시절부터 신사 참배를 반대했으며 그가 졸업하던 해에 신사 참배가 총회에서 가결되는 것을 직접 목격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는 신학교 졸업 후 1년간 부산 지방에서 신사 참배 반대를 외쳤고 이로 인해 경남 노회에서 순회 강도사 사역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손 강도사는 애양원 교회에 부임해서도 설교 때마다 신사 참배반대를 외쳤으며 가는 곳곳마다 신사 참배에 대한 부당성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지적하였다. 손 강도사의 이러한 외침은 가는 곳곳마다 회개의 눈물 바다를 이루는 역사를 낳았다고 한다. 그는 기회가 있을 해마다 주님의 뜻이 아닌 신사 참배를 강요하는 일본은 망하다고 주장했다. 일본 경찰에게 있어서 손양원은 눈에 깊이 박힌 가시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손 강도사가 시무하고 있는 교회가 한센 병자들의 교회라는 특수성 때문에 함부로 건드리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세월이 오래 계속될 수는 없었다. 1940년 9월 25일, 손 강도사는 수요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여수 경찰서에서 나온 형사 두 명에 의해서 연행되었다. 처음에는 1년 6개월 형을 받았으나 구속 기간까지 하여 거의 3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손양원의 죄는 신사 참배 거부와 백성 선동이었다.

  1943년 5월 17일, 만기 출옥할 날이 가까이 왔을 때 담당 검사는 손 목사를 불러 놓고 사상의 전환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담당 검사는 손 강도사에게 "덴꼬(轉向)" 해야 나간다는 위협을 하였다. 그러나 손 강도사는 그 검사에게 "당신은 덴꼬가 문제이지만 나에게는 신꼬(信仰)가 문제"라고 했다. 이 때문에 종신형을 선고받게 된다. 손 강도사는 끝내 그들의 신사 참배의 유혹과 핍박의 손길을 뿌리치고 광주 형무소에서 경성 구금소, 청주 구금소로 옮겨 다니면서 해방이 될 때까지 6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그는 옥중에서도 기도, 찬송, 성경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옥중에서도 사랑을 실천하여 옥중 성자로 그 이름이 높았으며 간수들까지 전도하였다. 그러나 손 강도사의 종신형으로 가족들은 뿔뿔히 흩어져 살 게 되었다. 청주에서 아버지를 면회하고 귀가하던 동인이 기차 안에서 일본 순사를 만나 자기 이야기를 한 것이 화근이 되어 징집 통지서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징집되어 군인이 되면 매일 동방요배를 할 수밖에 없으므로 차라리 기피를 하고 숨어 버렸던 것이다. 당시에는 기피자가 체포되면 사형을 당하는 상황이었다. 손 목사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서 끼니를 굶는 고초를 겪게 된다.

 

 한센 병자의 영원한 벗  

  애양원은 전남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에 위치한 한센 병자들의 마을이다. 미국 남장로 교회 선교회의 사업으로 1909년 광주 양림에서 시작되었고 1925년 이 곳으로 이전 확장되었다. 처음에는 9명이었으나 손양원 강도사 시절에는 1천 명 이상을 수용하는 마을이 되었다. 손양원은 36세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이 곳에 와서 순교할 때까지 목회를 했다. 그는 환우들과 함께 음식을 먹었으며 잠자리도 같이 했다.   당시 애양원 사람들 가운데는 병에서 완쾌된 사람들도 있었지만 심한 병마와 투병 과정에서 눈을 잃어버린 사람, 손이 꼬부라진 사람, 걸음걸이가 부자유한 사람, 얼굴이 알아볼 수 없을 형태로 일그러진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부모 형제가 없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들을 따스한 사랑으로 감싸주면서 인간다운 대접을 해 주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애양원에서 일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손양원은 그들에게 있어 신체적인 병을 치료해 주는 의사 못지 않은 희망이었다.  "당시 우리가 살고 있던 애양원에 딸린 병실로 쓴 가옥은 모두 17개였는데 1호실부터 10호실까지는 비교적 건강한 사람들이 지내고 있었고, 11호실부터 13호실은 경환자실, 14호실부터는 중환자실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 중환자실에 거주하는 몇 명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흥악한 모습으로 병마와 싸우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상처를 한 번 치료하려면 간호원 둘이 매달려도 두 세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온 방안에 진물과 핏자국, 땀들이 엉겨 붙어 도저히 그냥 들어갈 수 없으므로 상처를 보려면 방바닥에 신문지 세 장 정도를 깔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신문을 깔고 들어가려고 하면 그 환우들이 목침을 던지면서 같은 환자끼리 차별을 한다 하여 화를 내곤 했습니다. 이러한 방을 손 목사님은 서슴치 않고 들어가서 맨손으로 방바닥을 치우고 그 곳에 앉아서 그 흥한 환자의 목을 껴안고 이마를 대고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기도 후에 그 곳에서 음식을 나누어 먹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손양원을 누구나 할 것 없이 사랑하게 되었다. 따라서 모든 교인들이 손양원을 너무나 좋아하고 따르니까 그것을 시기해서 손 목사를 지독스럽게 미워하고 헐뜯는 부인이 한 명 생겼다. 그 부인은 폐병 환자였는데 손 목사는 새벽 기도를 드린 후, 자기를 가장 미워하는 그 부인의 집에 매일 들러서 그의 머리에 안수 기도를 해주었고, 좋은 음식이 생기면 그 집에 가지고 가서 그를 대접했다. 이러한 손양원의 모습을 교인들이 보고 "목사님을 그렇게도 미워하는데 무엇하러 가느냐?"고 묻자, 손양원은 "사랑으로 녹여 내야 합니다"라고 간단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는 8·15해방과 함께 감옥에서 나오자 애양원 교회를 다시 찾았고 그리하여 교우들의 신앙은 더욱 불타오르게 되었다.

  

  원수를 사랑한 목자

 1946년 3월 경남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나서는 더욱더 심혈을 기울여 한센 병자들과 생사를 같이하면서 그들을 위하여 일하고 있을 때 여순 반란 사건이 있었다. 1948년 10월 19일이었다. 당시 제주 폭동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서 여수에 집결했던 군인들 중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남로당 계열의 군인 일부가 반란을 일으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반란군이 된 것이다. 이 세력에 동조했던 반란군들은 불과 4시간만에 여수 시내의 경찰서와 각 파출소, 군청, 역 등 주요 기관을 장악할 정도로 기세가 등등했다. 순천까지도 반란군에 의해서 점령되면서 두 도시는 삽시간에 무법 천지가 되고 공산 폭도들의 세상이 되어 버렸다. 반란군들은 그 동안의 불만 세력과 좌익 추종 세력을 한데 묶어 인민 위원회를 만들어 자기들에게 동조하지 않는 사람이나 단체는 무조건 잡아죽이는 천인 공노할 민족 대학살의 광란극을 벌렸다. 어제까지의 친구가 원수가 되었고 이웃이 적이 되어 고발하고 보복하는 공포가 일어 났다.

  이 때에 손 목사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은 각각 순천 사범 학교와 순천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신앙과 민족 정신에 불타는 이 두 형제는 학교 안에서 기독교 복음을 전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산주의의 허구를 폭로하였다. 자연히 학교의 공산 프락치들은 그들을 색출하여 체포하였다. 그리하여 두 형제는 인민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때에 두 형제는 서로 대신하여 죽기를 자원하였다. 그러자 잔인한 폭도들은 형제를 한꺼번에 총살하고 말았다. 애양원 교회에 손 목사의 두 아들이 반란군에 의해서 순교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사고 후 나흘이 지난 10월 25일 이었다. 두 아들이 한꺼번에 변을 당했다는 급보를 전해들은 손목사 내외는 물론 애양원 식구들이 충격을 받았다.

  반란군이 어느 정도 진압된 26일에 애양원 성도들은 손 목사의 두 아들의 시신을 거두어 교회 앞에 시신을 안치한 후 다음날 27일, 애양원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장례식을 치른 후 지금의 애양원 동산에 묻히게 되었다. 손 목사의 두 아들이 순교될 때 애양원 교회에서는 이인재 전도사를 초청하여 부흥회를 열고 있을 때였다. 부흥회 도중에 이런 변을 당하게 되자 부흥 강사는 장례식의 주례까지 맡게되었다. 장례식은 간단했으나 이 땅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산 제사를 올리는 엄숙한 순간이었다. 그 날 손 목사가 장례식 끝 부분에 고백했던 마지막 인사는 또 한번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한 편의 복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여러분, 내 어찌 긴 말의 답사를 드리리요. 내가 아들들의 순교를 접하고 느낀 몇 가지 은혜로운 감사의 조건을 이야기함으로 대신할까 합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을 나오게 하였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께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 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감사합니다. 끝으로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이 일들이 옛날 내 아버지, 어머니가 새벽마다 부르짖던 수십 년간의 눈물로 이루어진 기도의 결정이요, 나의 사랑하는 한센 병자 형제 자매들이 23년간 나와 내 가족을 위해 기도해 준 그 성의의 열매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

  사랑하는 두 아들을 떠나 보내는 장례식장에서 그들을 총살한 원수를 찾아서 아들로 삼겠다는 그 뜨거운 의지는 가히 인간적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예수 사랑이었다. 이것은 당시 참석한 사람들의 마음은 물론 손양원이라는 이름을 듣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녹일 수 있는 것이었다. 후세인 우리의 마음까지... 여수, 순천 반란이 진압된 후 정세는 바뀌었고 동인, 동신을 죽인 자들 중의 하나인 '안재선'이라는 자도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손 목사는 계엄 사령관에게 찾아가서 "나의 죽은 아들들은 결코 자기들 때문에 친구가 죽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 애들은 친구의 죄 때문에 이미 죽었습니다. 만일 이 학생을 죽인다면 그것은 동인, 동신 형제의 죽음을 값없이 만드는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그 학생의 석방을 간청하였다. 손 목사의 장녀 손동희의 기억에 따르면 손 목사는 장녀를 통해 간접적으로 의사를 전한 것 같다. 아무튼 그의 간청은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손 목사는 그 학생을 손재선이라 하여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 손 목사는 재선이를 부산의 고려 성경 고등 학교에 수학하도록 하여 전도사로 키워내는 놀라운 사랑을 보여 주었다. 양아들로 삼았던 안재선 씨는 성경 학교 졸업 후 잠시 부산의 어느 교회 전도사로 있다가 말년에는 제주도에서 어물 도매 사업을 하다 1979년 12월 서울에서 죽었다. 안재선 씨는 손 목사의 용서를 받았지만 평생 사람을 죽인 죄책감에 사로 잡혀 불안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의 자녀들도 그런 삶을 살았다.

 

  순교자의 영광

 1950, 6·25동란이 이 땅 위에 있었다. 파죽지세로 38선을 넘어 서울로 쳐들어 온 북한군은 한강을 넘어 수원을 점령하고 대전을 빼앗고 대구로 진격하는 한편, 일부는 호남으로 진격하여 호남 일대도 점령하게 되었다. 이 때 교회도 문을 닫고 피난을 했다. 그러나 손 목사는 피난하지 않고 교회에 남아 계속 교회 종을 치게 했으며, 자신이 강사가 되어 교회에서 특별 집회를 했다. 집회의 주요 내용은 '잘 죽자'라는 것이었다. 이 때 애양원 교회의 교인들은 손 목사를 피난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했으나 허락을 하지 않자 결국은 교회의 제직들과 교역자들 모두 함께 떠나자고 간청을 하였다. 우선 몸부터 피하고 보자는 제직들의 간청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손 목사는 함께 송별 예배를 드리고 배에 올라가 마지막 찬송을 부른 후 갑자기 혼자만 배에서 가방을 들고 뛰어 내려오는 것이다. 교인들이 "목사님, 왜 피난을 가지 않고 다시 배에서 내려가시는 겁니까?"라고 묻자, 손 목사는 "나는 원래 피난을 가지 않는다고 했지 않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죽는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그리고 만일 내가 피신한다면 일천 명이나 되는 양떼들은 어떻게 합니까? 내가 만일 피신을 한다면 그들을 자살시 키는 것이나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하며 피신하기를 완강히 거부하고 제직들만 보냈다고 한다.

  그리하여 손 목사는 마침내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1950년 9월 28일 저녁11시 여수 근교 미평 과수원에서 총살을 당하여 순교했다. 손 목사의 나이 48세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양들을 보호하고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총의 개머리판으로 입을 맞아 얼굴이 피투성이 되었으며 마지막 죽음의 자리에서 두 손 모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다가 공산군이 쏜 총에 맞아 순교했다.

 

         손양원 목사의 순교

 

    1936년 일제에 항거한 순천노회의 원탁 사건으로 애양원교회를 비롯한 순천노회 대부분 목사와 장로들이 검속되었다. 그 당시 애양원교회를 담임하던 손양원목사도 구속되었다. 그는 원탁회 사건 이후에도 개인적으로 일제의 신사참배에 대한 강력한 반대운동을 벌이다가 광주형무소에서 줄곧 옥살이를 했다. 1948년 여순사건때 그의 아들 동인과 동신 형제가 좌익 학생들에 의해 학살되었다. 이 형제는 죽는 순간까지 찬송가를 부르며 복음으로 친구들을 권유했다고 한다. 손양원 목사는 두 아들을 직접 죽인 안재선이란 학생을 살려내어 양아들로 삼는 놀라운 신앙을 보여 주었다. 손양원목사는 1950년 6.25사변으로 인해 순교하였다. 공산군이 남침하고 있을 때 교회 장로들이 배를 준비하고 손 목사에게 피난을 권유하였으나 그는 교인들을 두고 혼자 떠날 수는 없다고 끝내 거절하였다. 이 거절의 이유를 우리는 아직도 분명히 알 수가 없다. 전기에 따르면 그는 많은 목사들이 교인들을 버려 두고 피난 길에 오른 것이 마음 아프다고 말했다고 한다. 두 아들이 순교한 후 삶에 대한 소망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 졌음직도 하다. 그는 공산군이 점령지를 철수하기 직전 많은 기독교인들 우익인사들과 함께 여수에서 가까운 미평 과수원에서 1950년 9월 28일 총살을 당했다. 교우들이 찾아 온 그의 시신은 입이 훼손되어 있었다고 한다. 목격자에 따르면 손 목사는 죽는 순간까지 학살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예수를 믿으라고 권유했다는 것이다.

 

 애양원과 기념관

    순천에서 여수로 가다가 여수 공항쪽으로 꺽어 들어 가면, 즉 좌회전을 하면, 공항 부지를 빙 돌아서 병원이 하나 나타나고 아담한 마을이 나타난다. 마을 초입부터 집들이 예사롭지 않으니 이것은 한센 씨 병 환자들이 주로 양계를 하며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을 애양원이라고도 한다. 손양원 목사는 1939년 7월 14일부터 1950년 순교할 때까지 시무했던 교회 예배당이다. 지금 애양원 교회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측 성산교회로 등록되어 있다. "애양원 예배당"이라는 현판이 적혀 있는 돌 문 안으로 들어가 보면 제법 넓직한 그러나 검소하게 단장되어 있는 예배실을 대할 수 있다. 교회 주변은 양계장에서 품어 나오는 견분 냄새가 특이한 느낌을 연출한다.

    교회와 마주 하는 잔디화단에는 손양원 목사 순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너른 마당은 요즘 장례식장으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 예배당에서 마을 가운데로 난 시멘트 포장 길을 따라 한 1킬로미터쯤 가면 조그만 언덕이 나타난다. 이곳에 손양원 목사의 가족이 안장되어 있는 이른 바 삼부자 묘가 있다. 이름은 삼부자 묘지만 손 목사의 묘에는 부인이 합장되어 있다. 그런데 묘지가 너무 크다는 느낌이 든다. 좀 작게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깔뱅은 비석에 이름도 제대로 남기지 않았는데... 기념을 하더라도 성숙한 자세가 요청된다 할 것이다. 묘지에서는 아래 개펄이 펼쳐 져 있고 여천 공단이 바라 보인다. 지금 애양원은 마치 도시 속의 성소같이 여겨 지기도 한다.

    여기서 조금 내려가면 순교자 기념관이 나온다. 이 기념관은 두 층으로 되어 있는데 입구는 상층으로 나있다. 상층에는 손양원 목사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다른 전시관과 달리 자료가 비교적 풍부한 편이어서 연구자들에게 고무적이다. 하층은 전시실과 함께 두 칸의 예배실이 있다. 전시실에는 난데없이 예루살렘 성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당혹감을 준다. 성지 사진들을 떼어 내고 손양원 목사와 관련한 자료들을 붙여야 할 것이다. 그 외에 순례객들의 숙소와 수련회 장소인 수양관이 있다. 이 건물은 본디 손양원 목사가 한센 씨 병 환자로서 목회를 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만든 신학교 건물이었다. 목회자 양성을 위해 신학교를 설립했던 것으로 잠시 한성신학교란 이름으로 운영되다가 폐교되었다. 1986년에 개축을 해서 수양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손양원 목사의 유업을 받들어 두가지 특징적인 일을 하고 있다. 방문한 자들은 새벽 4시에 시작하는 새벽예배에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한다. 이곳 성도들은 대부분 예배시간 30분 전에 출석해서 찬송과 기도로 예배를 준비한다고 한다. 또 하나는 정오 12시가 되면 종소리가 울리고 동시에 하던 일을 멈추고 3분 정도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 이 정오 기도는 손양원 목사가 시작한 것으로 첫째, 국가를 위해서 기도하고, 둘째는 가족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셋째는 교회를 위해서 기도한다.

 

         출처 : http://www.modenee.com/medicaf/seniors/sohn.htm#주님께%20부름%20받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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