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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6-12-05
 제목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 7. 1~1916.10.12)
 주제어  [내한 선교사] [미국] [선교사] [장로교] [한국 교회사] 원두우드
 자료출처  한국컴퓨터선교회  성경본문  
 내용

미국 선교사(Horace Grant Underwood), 한국 이름은 원두우(元杜尤).

 

런던 출생으로 1872년 미국으로 이주, 뉴욕대학·뉴브런스윅신학교 졸업, 1884년 한국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로 선정되어 1885년 4월 5일 감리교 선교사 H.G. 아펜젤러와 함께 제물포로 입국했다. 1887년 한국 최초의 교회인 서울 새문안교회를 세웠다.


1. 소년시절

언더우드는 1859년 7월 1일 영국 런던에서 아버지 죤(John Underwood)과 어머니 엘리자벧(Elisabeth Grant Marie) 사이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죤은 믿음이 두터웠을 뿐만 아니라, 화공학 방면에 재주가 있어 인쇄용 잉크를 발명하였고 타자기와 묵지(리본), 안전지등을 발명하여 영국 왕실 예술원으로부터 메달과 표창을 받은 바 있었다. 언더우드의 형 죤(John T.Underwood) 역시 과학적 두뇌와 기업가적 재질이 있어 그의 사촌 아더와 세계적인 대규모 회사 설립에 천분을 발휘한 사람이었다. 언더우드의 생모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적으나 온유하고 인자한 성격을 가진 이로 여러 남매를 기르면서도 짜증을 내거니 큰소리를 지른 일이 한 번도 없었다고 전한다. 1865년 언더우드가 5세 때 생모의 작고로 아버지 죤은 얼마 뒤 재혼을 하였다. 그러므로 언더우드를 포함한 형제들은 계모 밑에서 성장해야 했다.

언더우드의 아버지는 주일이면 여러 어린 자녀들을 거느리고 교회에 가서 어린이 키대로 만든 의자에 앉혀 예배에 참석하게 하였으며, 집에 돌아와서는 큰 아들에게 설교에 관한 것이나, 성경에 대하여 배운 바를 말해 보도록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을 믿고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 그리스도를 뵐 수 있기를 항상 바랬다. 언더우드는 형제들과의 정이 대단히 두터웠다. 이 형제들은 아버지의 지도 밑에서 일찍부터 성경 구절을 많이 외웠고, 어떤 때는 히브리어로 된 구절을 아버지 앞에 나가 외우기도 했다.

언더우드는 일에 몰두하면 다른 일들을 잊어버리는 버릇이 있었다. 집안이나 몹시 가난하여 돈이 귀할 때 언더우드는 어느날 5달러 짜리 지폐를 갖고 식료품 상점에 심부름을 가게 되었다. 상점에 다다랐을 때 돈이 없음을 보고 놀랐다. 5달러가 온데간데없고 자기 손에 못쓰게 된 돈의 한 귀퉁이만 남아 있었다. 그는 길을 걸으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신없이 그 돈을 잘강잘강 찢어 못 쓰게 만들었던 것이다.이와 같은 이야기는 하나의 예이지만 그만큼 그는 일에 정신을 쏟아 만사를 잊어버리는 성격이었다.

그가 10세 되던 해에 한살 위인 형 프레드릭과 프랑스의 기숙 학교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언더우드는 져어지 시에 있는 헤스브룩 소년 학원에 입학하였다. 언더우드는 대단한 열의를 갖고 공부하였던 것이므로 대학 입학에 필요한 희랍어 과정을 불과 여섯 달만에 마칠 수 있었다.


2. 선교사 지원

그 후 언더우드는 17세 때인 1877년 뉴욕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간지 2년뒤인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맞게 된다.

언더우드는 대학 4년간의 평균 성적이 89점이었으며 특히 희랍어와 웅변의 성적이 언제나 좋은 편이었다. 그리고 삼각법, 분석 기하학, 천문학, 화학 등의 성적이 훌륭하였다. 이것은 뒷날 한국에 입국해 제중원에서 자연과학 계통의 과목을 가르치는데 도움이 되었다.

1881년 언더우드는 뉴욕 대학을 졸업하며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그해 가을 뉴 브런즈윅(New Brunswick)시에 있는 화란 개혁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언더우드의 키는 별로 크지 않았다. 5피트 8-9인치(약173cm)정도였다. 어깨는 딱벌어지고, 짙은 밤색 곱슬머리로 뒤덮인 머리는 유난히 컸다. 얼굴은 잘 다듬어져 있으면서 강한 인상을 풍겼다. 코는 매부리처럼 굽어 있고 약간 크기는 했으나 눈에 뛸 정도는 아니었다. 입은 여자처럼 나약하지 않았고, 더욱 견고하고 강하였다. 눈은 맑고 흑갈색이었다. 이것은 성실함과 열정과 친절함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뉴 브런즈윅에서 3년간 체류하는 동안 언더우드는 학과목을 열심히 공부하는 한편으로 전도 사업에도 열을 올렸다. 신학교 교수들은 이에 대해 공부에 방해된다고 마땅치 않게 여겼으나, 언더우드는 이에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나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선교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네살때였다. 인도에서 돌아온 어떤 사람의 얘기를 듣고 어린 마음에도 큰 감동을 받아 신학교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동시에 신학교를 졸업하자 당분간 의학도 공부하였다. 외국의 오지에 있는 선교부에서 일을 하려면 주민들에게 의료의 혜택을 베풀어야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883년 여름과 다음해. 즉 신학교 마지막 해에 그는 뉴 저어지, 즉 폼턴(Pomton)에 있는 교회를 맡았다. 그는 교회에서 항상 행복한 편이었다. 가족처럼 대하였던 것이므로 늙은이나 젊은이 모두 그를 친구처럼 대했다. 월급을 배로 올려 줄 터이니 계속 목회를 맡아 달라고 요청이 있었으나 그는 거절하고 선교사로 외국에 나가기로 결심하였다.


3. 한국 지망

1882년 동경 명치 학원에 있던 올드만스(Albert Oltmans)에게 언더우드는 복음을 받지 못한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처음에 그는 인도에 소명이 있는 줄로 믿었기 때문에 그리로 갈 생각으로 몇 가지를 특별히 준비해 놓고 1년간 의학 공부를 하였다. 한국에 가겠다는 사람도 쉬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도 선뜻 나서는 사람이 아직 없었고, 어느 교회도 손댈 눈치가 보이지 않았으며 교회를 대표하여 외국 선교 사업에 종사하는 지도자들까지도 역시 한국에 들어가는 것은 시기상조란 기사를 쓰고 있었다. 이 때 언더우드는 한국 선교에 대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택하심을 깨닫고 한국으로 갈 것을 결심하였다. 언더우드가 미국에서 떠나기 직전 한국에서는 갑신정변이 일어나 사회가 몹시 불안하였다. 그러므로 언더우드는 당장 한국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런데 미국 장로교 선교부로부터 파송된 선교사 알렌이 이미 한국에 들어가 있었고, 갑신정변 때에도 활약한 바 있어 언더우드의 앞날은 열려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일본에 머물면서 한국인 기독신자 이수정을 만나 한국어를 배웠다. 이수정은 [마가복음]을 한국어로 번역한 인물로써 그에게 한국어를 배웠다는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4. 한국 부임

언더우드가 한국 제물포에 도착한 것은 1885년 4월 5일이었다. 이날은 부활주일이었다. 같은 배에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목사 부부가 타고 있었다. 그러나 부인은 임신으로 한국의 정세가 불안하므로 일본으로 되돌아가라는 충고를 받고 그들 부부는 나가사키로 돌아갔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불안을 무릅쓰고 상륙하여 4월 7일 서울로 들어왔다. 그는 독신이어서 행동하기가 편하였다.

언더우드가 서울에 들어온지 3일 뒤 '알렌'에 의해 병원이 설치되었다. 이 병원이 바로 광혜원(후에 제중원)이다. 언더우드는 약제사로 당장 병원에서 일을 시작하였다. 서울에는 외국인들이 즐길 수 있는 문화적 시설이 전혀 없었다. 좁은 골목에다 비만 오면 거리가 진흙수렁 길이 되고 티부스, 홍역, 천연두 등의 전염병이 쉽게 감염될 수 있었으며 무당, 판수 등에 의한 미신이 판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여름에는 무덥고 몹시나 추워 외국인에게는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더우드는 낙원이라 생각하고 이러한 나라에 자기를 보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언더우드는 이에 일본에서 갖고 온 이수정 번역의 '마가복음'을 일반인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아펜젤러 목사와 함께 다시 번역하기 시작했다. 또한 말을 배우게 되면서 [영한사전]과 [한영사전]을 편찬하였다.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은 여러 차례의 대립에 직면하게 된다.당시 선교사들의 나이가 모두 20대였고 이들 젊은 선교사들을 이끌어 나갈 인물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알렌과 헤론은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가는 전도 방식을 택했지만, 언더우드는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전도 방식을 택하여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 신자의 수가 급증하고 있었던 것이다.


5. 고아원 설립과 결혼

언더우드가 한국에 들어온 그해 말, 그는 고아원 설립을 추진하여 당시 고아원에 별 관심이 없던 한국인에게 쉽게 허가를 얻어내었다. 언더우드는 고아원으로 만족하지 않고 장차 그것을 대학이나 신학교로 발전시킬 생각이었다.

언더우드는 30세가 되도록 독신으로 지내다가 1889년 3월 '릴리아스 호튼'양과 결혼하였다. 사실 언더우드는 본시 다른 여자와 약혼을 하였지만 그녀는 선교 사업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고 또 그의 포부에 대해서도 별로 존경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와 파혼하고 말았다. 이런 일을 호튼양은 알고 있었다. 결혼할 때 그녀의 나이는 38세 따라서 언더우드보다 8세나 위였다. 그녀는 항상 성경을 읽고 기도를 올리고 빈민 구호 사업 같은 일에 정성을 바쳤을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기독교인답게 살았다. 시카고 여자 의과대학 수료 후 '에리 톰슨'병원에서 수련의로 근무하던 중 갑자기 북장로교 선교부로부터 한국에 가도록 요청을 받아 1888년 3월 23일 한국에 부임하게 되었다. 우선은 제중원 부인과 책임자가 되어 수많은 한국 여성 환자들을 치료하였다. 호튼양은 왕비의 시의까지 겸임하게 되어 자주 궁중을 출입하였다. 호튼양은 왕비와 가까워지게 되어 언더우드와 결혼할 때는 많은 선물을 받기도 했다. 결혼한 다음해에 아들 원한경을 낳았으나 병으로 몹시 고생하였다. 의사들이 기후가 좋은 곳에 요양할 것을 권고하자, 1891년 가을부터 마침 남편의 안식년에 해당되어 인도양을 거쳐서 제네바에 잠시 머물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요양하고 1893년 2월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 동안 언더우드는 주로 전도 여행을 하고 다녔다.
고아원 일은 밀러목사가 맡아 학교로서의 체제와 기구를 갖추고 이름을 '예수교학당' 혹은 '구세학당'이라고 고쳤다. 이 예수교 학당에서는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김규식, 도산 안창호 등이다. 그리고 여기 졸업생들이 중심이 되어 영신 학당을 세웠다가 뒤에 감리교와 연합으로 수창동에 협성학교를 세웠다. 1905년 봄에는 학교 이름을 경신(儆新-새로운 것을 깨우친다)으로 고쳤다.


6. 최초의 개종자와 새문안 교회의 설립

처음 얼마간 미국 선교사들의 전도 활동은 병원과 학교에서 개인간의 사사로운 대화를 통하여 조용히 진행되었다. 한국 정부에서 기독교를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 종교로 인해 외국인이 침투하고 한국인의 전통 사상을 동요시킬 것 같고, 또 이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외국 세력을 끌여들여 난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국 정부 관리들은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는 것이 당시의 실정이었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은 관리들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고 서서히 거리로 진출하였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12월 4일 선교사 알렌을 찾아온 이가 있었다. 노도사(노춘경)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중국 문헌에 나오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기록에 관하여 호기심을 갖게 되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한문 번역본을 빌려 갔다. 알렌은 통역을 통해 만일 그 책을 읽는 것이 발각되면 목이 달아날 것이라는 주의를 주었다.그 후 1885년 알렌을 다시 찾아와 어학 선생 노릇을 하였다. 뒤에는 좀더 배우고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게로 갔다. 그는 언더우드로부터 얻은 [성당수위], [심령의 구원], [야소교 교리이지]등의 책을 통해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언더우드는 노도사에게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언더우드는 서울에 돌아와 서서히, 그리고 착실히 활동을 전개하여 1887년 9월 27일 정동에 있는 자기집 사랑방에 14명의 한국인 신자들과 같이 예배를 드렸다.언더우드가 한국에 입국한지 2년만에 교회까지 세울 수 있게 되었으니 그로서는 대견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이를 정동(貞洞)교회라고 불렀으나, 1890년 그러니까 교회가 창립된지 3년 뒤에 이르러 새문안 제일 교회라고 불렀다. 조선 초에 성곽을 축조할 때 서울의 서쪽에 돈의문, 즉 서대문을 세웠으나 교통이 불편하여 뒤에 이르러 오늘의 경향 신문사 부근으로 옳겼다. 그러므로 그 문을 신문(新聞), 즉 새문이라고 하였고 교회는 새문안에 있었으므로 그렇게 불렀다.

이 교회에서는 한국 개신교 역사상 처음으로 그해(1887) 크리스마스날에 성찬식이 거행되었다. 물론 당시 교회는 언더우드 집에 있었으므로 그곳에서 거행되었다. 새문안 교회는 날로 번창하여 창립 1년뒤에는 교인의 수가 50명으로 늘어났고, 그 중 11명이 또 세례를 받았다.

한국 교회는 출발에서부터 전도에 힘쓰는 교회로 알려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곳에 지교회(支敎會)가 설립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지방에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다. 단지 '예배처소', 혹은 '전도소'등이 있었을 뿐이었다. 모두 걸어다니면서 전도하였다.

새문안 교회는 어머니 교회로서의 역할을 다하여 1910년대 7개소의 '예배 처소' 혹은 '전도소'를 갖고 있었다. 홍제동, 한강, 교북동, 김포, 행주, 동막, 파주등의 예배처가 그것이었다. 이런 것들은 뒤에 독립된 교회로 발전하였다.


7. 북한 전도 여행

한국에 온지 2년 뒤 언더우드는 한국의 실정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고 말도 약간 익히게 되자 북한 전도 순회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그것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선교사 '로스'등이 만주에서 번역하여 인쇄한 성서를 갖고 권서인이 되어 북항으로 들어온 한국인들이 기독교를 크게 전파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실상을 알아보려는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그때까지 어떤 선교사도 내륙지방에 전도 여행을 한 사람은 없었다. 한국인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어 위험이 따를 것이라 하여 누구나 감히 전도 여행을 할 생각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선교에 불타 있었고 견고한 신앙을 갖고 있던 언더우드는 어려움을 무릅쓰고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뜻밖에도 언더우드는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다. 어떤 때는 길을 잃고 망설이다가 한 농부집에 가서 물었다. 그 집의 농부는 매우 친절한 태도로 집에 들어와 무엇을 먹고 가라고 권함에 도리어 당황하기도 하였다. 언더우드는 한국 사람이 자기의 전도를 어떤 선입견 없이 잘 받아들인다는 확신을 얻었다. 언더우드의 북한 여행은 1887년부터 해마다 가게 되었다. 송도, 솔내, 평양, 강계, 그리고 배를 타고 압록강 강변 각 읍을 두루 방문하고 의주에 갔다가 서울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가장 유망한 선교 활동이 의주에서 나타났다. 이 도시의 주변에 있는 마을과 군에서 정식으로 기독교 신자가 되겠다고 청하는 사람이 100명이나 모인바 있었다. 그러므로 언더우드는 의주에 대해 각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은 물론이지만 믿는 사람중에도 불성실한 동기를 가진 사람도 많아 어떤 때는 행패를 부리기도 하였다. 가끔 범이 나다니는 산길을 밤중에 가야 될 때도 있었다. 또 기독교 선교사에게는 안전을 보장하여 주지 않겠다는 지방 관리를 만나기도 하였다. 2년뒤인 1891년 게일마펫목사가 북한과 만주지방 1400마일 전도 여행을 하면서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언더우드에 의해 씨가 뿌려졌기 때문이었다.


8. 선교 정책의 확립과 활동

언더우드는 선교 방법으로 '네비우스'방법을 채택하였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는 스스로 전도하고(self-propagation), 스스로 유지하고(self-support), 스스로 다스린다(self-government)이다. 한국 교회들은 전도회를 조직하고 개척 교회를 설립하였으며 사경회를 개최하고 병자를 심방하였다. 그리고 입교하기 위한 자격으로 적어도 새 신자 하나를 교회에 인도토록 하였다. 이 때문에 관서 지방에서 이룩한 선교 사업의 대부분은 한국인의 손으로 된 것이었다. 한국 교인들은 교회를 스스로 세우고 유지하였다. 한국인 신자들은 생활이 별로 넉넉치 못한 형편인데도 교회를 세웠다. 서양인의 눈에는 한국 교회가 보잘것없고 초라하게 보였을 지라도 한국의 고유한 건축양식으로 교회를 세웠으며 의식과 복식으로 교인들을 감동시키려 하지 않았다. 교역자 양성 문제 중 네비우스 방법에서 중요시한 것은 사경회였다. 그것은 성경에 대한 단순한 교육뿐만 아니라, 종교 생활을 심화하고 기독교적 봉사에 열중할 수 있도록 하는데 있었다. 언더우드도 사경회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1890년 초가을 자기집 사랑방에 '신학반'을 설치하였다. 교회의 최고 통치 기구는 한동안 선교부 연합 공의회가 담당하였다. 장로교회노회가 설치된 것은 1907년 9월이었다.


9. 그리스도 신문 간행과 기독교 청년회 설립

1896년 4월 서재필의 [독립신문] 간행은 한국 사회에 대단한 영향을 끼쳤다. 아펜젤러 목사가 1897년 2월 2일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라는 잡지를 창간하였다. 언더우드도 여기에 자극을 받아 그해 4월 1일 [그리스도 신문]을 창간하였다. 그러니까 전자는 감리교회에서 발간하는 신문이었고, 후자는 장로 교회에서 발행하는 신문이었다.신문은 일주일에 한번씩 간행하였다. 이 신문은 전체 8면으로 되어 있었고 기독교 교리를 소개하는데 큰 비중을 두고 있으면서도 농사와 관보 등에 대해서도 실었다. 또한 기독교 이외의 기사가 많아 정부에서 이 신문 467부를 구입하여 정부 10개 부처와 367군에 배포하였다고 한다. 이는 기독교에 대한 선의적인 태도라기보다 서양 문명을 일반 국민에게 알리려는 이른바 계몽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였다. 이 신문은 1905년 7월 1일부터 장로교 감리교 연합으로 [그리스도 신문]이란 이름으로 발간되어 1907년 9월 27일까지 간행되었다. 1년간 언더우드가 사장으로 있었다. 그러나 그가 신병 치료차 '스위스'로 떠남에 사직하고 1907년 11월 13일에 [예수교 신보]로 개창되었다가 1910년 다시 [예수교 회보]로 바뀌었다. 그리고 또 다시 1915년 감리교의 [그리스도 회보]와 함께 [기독신보]로 바뀌었다.

선교 사업이 크게 진전되었으나 기독교인의 대부분은 늙은이거나 부녀자들이었다. 젊은이들을 교회로 끌어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1900년 언더우드는 아펜젤러 목사와 의논하여 한국에도 기독교 청년회를 설립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국제 위원회에 제출하였다. 곧 국제 위원회에서는 '질레트'총무를 1901년 9월에 파송했다. 질레트는 외국어 학교 학생들과 군인들에게 접촉을 하였다. 당시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거의가 하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들 신분이 낮고 무식한 젊은이들을 데리고 Y.M.C.A. 운동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1903년 10월 28일 드디어 기독교 청년회가 정식으로 조직되고 헌장을 채택하게 되었다.언더우드는 1916년 사망할 때까지 이사로 있으면서 한국 Y.M.C.A. 운동에 크게 공헌하였다.


10. 일제의 탄압속에서

외국 선교사, 그 중에서도 특히 미국 선교사들은 1905년에 체결된 보호조약이나 1910년에 체결된 합방 조약까지 한국인들과는 달리 일본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다. 만약 한국이 청국이나 러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면 무지몽매해져 어떻게 구제할 방도가 없으나 일본은 명치유신 이후 문명 개화를 표방하고 있어 그 지배하에 들어가면 한국인들이 행복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보호조약이나 합방 조약을 체결할 때에도 불편 중립주의를 내세워 방관하였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일본의 정책을 적극 지지하는 이른바 친일파도 있었다.

그런데 선교사들의 중립적인 태도는 1910년 합방 뒤 점차로 바뀌었다. 특히, 일본이 '사내 총독 암살 음모 사건'이라는, 이른바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한국 기독교 지도자 100여명을 투옥하여 탄압하는 것을 보고 그 동안 지기들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닫게 되었다. 일본측의 압력은 날로 드세어, 1913년 6월 '질레트'총무가 중국으로 추방되어 떠나게 되고 이어 한국 Y.M.C.A.는 일본 Y.M.C.A.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언더우드는 건강이 악화되어 요양차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1911년 9월 '예수교 장로교 조선 총회'가 조직되고 총회장에 언더우드, 부회장에 길선주가 각각 선출되었다. 총회 창립을 기념하여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세 사람을 선교사로 중국 산동성 래양현에 파견하였다. 또한 1915년 언더우드 선교 30주년을 기념하여 충청도 영동에 초가집이나마 교회가 세워졌다.

선교사들에게 많은 제재가 가해졌지만 언더우드는 이에 개의치 않고 선교 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1915년 3월 5일 미국 북장로교, 감리교, 캐나다장로교 등 각 선교부와의 연합으로 서울 종로에 있는 기독교 청년회 회관에서 60여명의 학생으로 '경신학교 대학부'라는 이름의 대학을 세우게 되었다. 총독부에서는 신규칙을 공포하면서 성경을 가르치거나 기도회를 가져서는 안된다고 하였으나 언더우드는 이전의 방식대로 성경도 가르치고 기도회도 열었다. 개교 당시 언더우드는 교장에 취임하였으나 아직 총독부로부터 학교 설립 허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한국인이 고등교육을 받고 높은 지식을 갖는 것을 바라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는 대학령을 두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전문학교령에 의해 연희 전문학교가 되었다. 연희 대학교와 지금의 연세 대학교의 전신이 된다.

연희 전문학교는 1918년 4월 '차원관(한국동란때 없어짐)'이란 목조 2층 건물을 지어 Y.M.C.A.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11. 큰 별 땅에 떨어지다.

일본의 교육령에 의하면 교육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누구나 일본어를 익혀야 했다. 그런데 언더우드는 서울에 대학을 세우기는 했으나 일본어를 하지 못했던 것이므로 예순 가까이된 나이에도 불구하고 1916년 1월초 동경에 건너가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동시에 일본 기독교계 지도자들과도 교제를 넓혔다. 그러나 이런 강행군 속에서 그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었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한국을 등지고 미국으로 향했다. 슬프게도 한국을 보는 마지막 순간인지도 모르고 떠나야 했다. 미국에 돌아가자 한동안 건강이 회복되기도 하였으나 7,8월에 이르러 열이 나기 시작하면서 지탱하기 힘들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애틀랜틱 시로 옮겨 간호를 했으나 1916년 10월 12일 오후 3시가 조금 지나 한국에서 그렇게도 많은 일을 했던 큰 별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의 건강은 육체적인 병으로 크게 악화되었으나 고등교육 기관,즉 연희 전문학교 설치 문제로 동교 선교사들과의 의견 마찰로 몹시나 고민을 하였던, 이른바 정신적인 것도 크게 작용하였다. 그는 운명할 때까지 한국을 매우 사랑하였다. 병상곁에 서기를 앉히고 한국과의 연락을 지켜보았다. 그의 죽음은 [뉴욕타임즈] 9월 16일자와 [뉴욕헤랄드] 9월 18일자에 실렸다. 그의 유해는 아버지와 형이 묻혀있는 '그로브 교회'소속 묘지에 안장되었다. 1927년 그가 최초로 세운 새문안 교회에 기념비를 세우고 다음해 4월 24일 연희 전문학교 교정에는 언더우드의 동상이 세워졌다. 그러나 일제 말기 일본인들이 구리로 되어 있는 이 동상을 갖고 대포알을 만든다, 총알을 만든다 하고 앗아간 바 있어 다시 해방 이후 1948년 10월 16일 두번째로 동상을 세웠다. 그러나 이 동상도 한국 동란이 발발하자 곧 공산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한편 언더우드에게 내린 훈장을 살펴보면, 일찍이 1906년 고종 황제가 태극 훈장을 내려 그의 활동을 기린바 있고, 1963년 8월 15일 광복 18주년을 맞이하여 대한민국 정부에서 다시 대통령상을 내려 기렸다.


* 동상에 새긴 글

- 위당 정인보 선생 *

"쥬강생 천팔백 팔십오년 사월에 박사 이십오의 장년으로 걸음을 이땅에 옮겨 삼십삼년동안 선교의 공적이 널리 사방에 퍼지고 큰 학교론 연희 전문이 이루히니 그럴사 박사 늙으시도다. 신학문의 높은 학위는 박사 이를 빌어 무거움이 아니라 얼굴로 쫓아 얼른 살피기 어려우나 이렇듯이 연세보다 지나 쇠함을 볼때 누구든지 고심으로 조선민중의 믿음과 슬픔을 돕는 그의 평생을 생각할지로다. 베푼 바 날로 늘어감을 따라 우리의 사모-갈수록 깊으매 적은 힘을 모아 부은 구리로서 방물함을 찾으려 함이라. 뉘 박사의 일생을 오십칠세라 하더뇨 박사-의연히 여기 계시도다."


≪ 언더우드 연보 ≫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아버지 '죤'과 어머니'엘리자벧'사이의 6남매 중 넷째로 출생
1865년 생모 별세
1868년 에서 69년까지 프랑스에 유학
1872년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 져지 시 헤스브르크 학원에서 개인교수로부터 서양고전을 배움
1877년 9월 뉴욕 대학에 입학
1879년 아버지 별세
1881년 6월 위 대학졸업 9월 뉴저지 주 뉴브런즈윅 시에 있는 화란계 개혁 신학교에 입학
1884년 6월 위 신학교 졸업. 동시에 뉴욕대학에서 석사학위 취득. 목사로 안수받음
           7월 28일 미국 장로교 선교 본부에서 한국선교사로 임명받음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 일본을 거쳐 1885년 4월 5일 한국에 도착
1885년 4월 10일부터 제중원에서 근무. 뒤에 제중원 의학교에서 물리 화학을 강의.
1886년 2월 고아원 설립. 이 고아원은 뒤에 야소교학당, 경신학교로 발전함.
           7월 16일 노도사에게 세례를 줌
1887년 9월 정동교회 설립. 뒤에 새문안교회로 발전.
           11월 솔내, 평양, 의주 등지 순회전도. 성경번역위원회 조직.
1888년 조선선교서회 조직.
1889년 4월 [한국어문법][한영사전]간행
1890년 여름 네비우스방법 채택. 9월 아들 원한경 낳음
1891년 1년간 안식년으로 미국감. 6월 뉴욕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 받음.
1894년 찬송가 간행
1897년 4월 1일 [그리스도 신문]창간
1901년 5월 2차 안식년으로 유럽과 미국 방문
1903년 10월 횡성 기독교 청년회 조직
1904년 조선교육협회 회장
1905년 9월 재한 복음주의 선교부 통합 공의회 의장. 선교구역 확정.
1906년 7월 요양차 유럽과 미국 여행
1908년 [한국개신교 수용사] 간행
1909년 조선 장로교 노회 회장
1910년 [동아세아의 종교]간행. 1910년부터 2년간 경신학교 교장.
1911년 6월 교육조사국 창설
1912년 6월 뉴욕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 받음.
           9월 조선장로교 예수회 회장. 가을 피어슨 성경학원 설립.
1915년 4월 15일 서울 중앙 기독교 청년 회관에서 경신학교 대학부를 세움. 교장 취임.
                         이 대학부는 1917년 4월 7일에 연희 전문학교로 인가가 나오다.
1916년 4월 요양차 미국에 가다.
           10월 12일 뉴저지 주 애틀랜틱 시에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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