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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11-08-30
 제목  하멜(Hendrick Hamel)
 주제어  [네덜란드] [하멜] [한국역사]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효종(孝宗) 4년(서기 1653) 8월 15일 밤에 화란의 동인도 회사(선조 35년, 서기 1602창립)의 상선 “스파르웨르”(Sperwer, Sparwehr)호가 제주도 근해에서 파선되어 그 배의 서기 하멜(Hendrick Hamel)이하 36명이 제주도에 표착되었다.

 

그들은 그해 1월에 네덜란드를 떠나 빠타비아(Batavia)와 타이완(臺灣)을 거쳐 일본의 장기(長崎)로 가던 도중에 이같이 제주도 근해에서 파선을 당하였다. 하멜 일행은 전부 64명이었는데 파선으로 28명이 죽고 36명이 살아남아서 제주도에 표착한 것이었다.

 

제주도 관원에게 잡히어 다음해(서기 1654) 5월 그믐께 서울로 보내어 오게 되었다. (李丙燾博士 번역 “하멜 漂流記” 원본 1668, 번역본 4287, 백낙준 박사의 전기 신교사 참조) 그들은 14년동안 우리나라에 머물러 살았다. 효종 7년(서기 1656) 3월에 다시 전라도로 귀양보내어 작천(鵲川) 병영에 감금하였다가(거기서 14명이 죽고 22명이 남음) 현종 4년(서기 1663) 2월에는 다시 여수(麗水) 좌수영에 12명, 순천(順天)에 5명, 남원(南原)에 5명씩 나누어 두게 되었다.

 

1666년(현종 7) 9월 생존자 16명 중 8명이 배를 구해 일본으로 탈출했으며, 2년 뒤 네덜란드의 요청으로 남은 일행도 일본으로 송환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조선에서 겪은 일들을 <하멜 표류기>(1668)로 엮어 암스테르담에서 출판했다. 하멜 일행은 서양세계를 조선의 민간에 소개하는 창구 역할을 했으며, <하멜 표류기>는 한국을 서방에 소개한 최초의 책으로 유럽 각국어로 번역되었다.

 

하멜은 이 사실을 그의 “화란 배의 제주도 해변 파선기”란 저서로 발표하였다. 그 뒤에 “조선왕국”이란 제목으로 우리 나라의 지리, 풍토, 산물, 정치, 군사, 법속, 종교, 교육, 무역, 기타에 대하여 14년 동안 친히 겪고 보고 들은 바를 적어 소개하였다. 이는 한국에 왔던 서양 사람으로서 가장 처음 한국을 서양에 자세히 소개한 것이다. 그들의 화란 나라는 신교(新敎)의 나라인만치 14년동안 그들이 접촉한 한국사람에게 그리스도 교리를 소개하였으리라고 믿는다. 또 그때 직접 신자가 생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하멜의 저서가 불란서 말, 독일 말, 영어들로 번역 출판되고 판을 거듭하여 서양사람의 한국에 대한 새 지식을 넣어 주었으므로 선교사들이 많이 와서 전도하게 한 원인이 되었으리라고 믿는다.

 


하멜 이야기


헨드릭 하멜은 1630년 호르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Dirck Hamel과 G. Verhaer였으며, 부친은 요즘에는 보기 드물게 세 번 결혼했었다. 1650년 11월 6일, 그는 Texel(네덜란드 북부에 있는섬)의 Landdiep에서 Vogel Struijs (타조란 뜻)호에 승선하여 인도로 향했다. 1651년 7월 4일 그는 바타비아 항에 도착했다
Vogel Struijs 호 승선 명부에 하멜은 사격수를 뜻하는 Bosschieter 로 등록되어 있었다. 분명하게도 그와 같이 언급되어 있는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보면, 후에 장관인 Wiese도 인도로 가는 항해 명부상에 보통선원을 뜻하는 hooploper 로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Wiese는 당시 장관이었던 Van der Parre의 조카였다.
인도에서 하멜은 빠르게 승진했다. 그는 서기에 이어 보좌관이 되고 1653년에는 장부 계원이 되었다. 장부 계원의 업무는 선박의 항해 유지와 재무 관리는 물론 재정을 맡아 보는 것이었다. 서열상으로는 키잡이와 동등했다.
7월 18일 하멜은 이런 임무를 띄고 대만으로 가는 도중에 Sperwer 호에 승선해 Batavia 를 떠났다. 배는 무사히 아무런 사고없이 1653년 7월 16일 대만에 도착했다. 배는 Batavia 를 다소 늦게 떠났는데, 그것은 대만에 근무할 네덜란드 에서 오기로 해 야 했던 많은 군인들을 기다렸기 때문이었다. 네덜란드에서 도착하기로 한 군인들을 헛되이 기다린 후에 Sperwer호는 군인들없이 대만으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동안 순항은 거의 끝날 때까지 계속 되었다.

 

바타비아에서 대만으로 가는 항로에서 날씨는 아직까지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 날씨는 화창했고 항해는 순조로웠다. 표류기 에는 대만에서 나가사끼로 가는 두번째 항해 때 약간 순탄치 못했다고 알려져 있다. 후에 우리가 결론내린 바로는 하멜과 그의 일행들이 겪게되는 일들은 바타비아에서 늦게 출발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Sperwer호의 실종사실이 공식화 되자 총독인 Joan Maetsuyker는 중국과 일본해 사이에서 그날 이후 발생할지 모르는 폭풍과 관련해 7월 1일 이후로 대만 북부해협으로 배를 보내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하멜과 그의 일행이 대만을 출발해 무슨 일들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은 표류기 에 광범하게 묘사되어 있다. 표류기의 저자가 헨드릭 하멜인지 아닌지 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럴듯한 것이 그러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은 바로 장부 계원의 일이라는 것이다.

 

하멜은 표류기에서 자신을 제삼자로서 말하고 있는데 그 당시로서는 흔한 일이었다. 또한 하멜은 표류기에 서명을 하지 않았는데 그 당시엔 흔한 일이었다. 보고서는 글쓴 사람에 의해 서명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 당시의 거의 모든 기록들은 하멜을 저자로 간주하고 있다. 거기에도 의심할 여지가 거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점은 그가 언제 표류기를 썼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데시마에 강제로 머물러 있던 기간동안 일어난 일들로 알 수 있다. 하멜과 그의 일행들이 조선에서 운좋게 탈출한 뒤 이미 그들은 1666년 10월 23일 Esperance 호로 바타비아로 떠나길 희망했다. 그러나 그들은 허가를 받지 못했고 데시마에서 일년을 더 지내야 했다.

2년후인 10월 25일 심문이 있었다. 이 심문은 하멜과 그의 일행이 조선인 어부의 배로 나가사끼에 도착한 날인 1666년 9월 14일로 되어 있었다. 그러면 심문이 이미 행해졌음이 분명하다. 통역관은 포르투칼어를 할 수 있는 네덜란드인과 일본인 두 명이었다. 그로 인해 심문은 그 날의 가장 큰 행사였고 하멜과 그의 일행은 그날 저녁, 데시마섬으로 이어진 다리를 건넜고 상관과 VOC의 직원들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일본인들의 그 ' precisiteyt ' (꼼꼼함)으로 유명했던 심문과 답변은 일본에서 복사되어 10월 25일 또다시 두명의 통역관의 도움으로 하멜과 그의 일행에게 큰소리로 읽혀졌다. 그러던 우연한 기회에 9월 14일, 10월 25일, 하멜은 심문내용을 복사하거나 기록할 기회가 있었다. 좀더 명확한 가능성으로는 VOC 통역관이 기록했었을 수도 있다.

 

1666년 10월 18일짜 상관장의 보고서에는 Volger씨가 정박을 하고 이미 Esperance 호에 승선했을 때 Sperwer 호에서 난파된 이들의 일들이 기록되었어야 한다고 총독에게 썼다. 하멜은 출발전에 보고서 작성의 의무를 띄고 있었던 듯 하다. 하멜이 표류기 를 작성하는 동안 자신의 임의대로 기록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는 수많은 장소와 날짜를 언급하고 있어서 사람들은 그가 조선에서 일기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반면, 그가 일기에 의해 표류기 를 썼을 경우 기입했을 정확한 날짜를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만약 그가 임의대로 기록을 했다면 매우 간결했을 것이다. 하멜은 표류기 를 쓰는동안 자신이나 동료들의 기억에 의존했음에 틀림없다. 다음해인 10월 22일 떠나도 된다는 허가를 받았을 때 하멜은 오랫동안 썼던 표류기 를 끝마쳐야 했을 것이다. 그날 헨드릭 하멜과 그의 일행은 출항준비를 마친 Spreeuw 호에 승선했다. Batavia 로 돌아가는 항해는 Formosa 를 경유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이 섬이 1662년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해 Zeelandia 요새는 Ming왕조의 후손들에 의해 정복당했다. Spreeuw 호는 10월 23일 심해를 택하고 11월 28일 Batavia 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Joan Maetsuyker의 일일 보고서에 따르면, Journael 이 Joan Maetsuyker에게 전해졌다고 했다.
하멜의 일행은 Batavia 에 도착했던 것과 같은 배를 이용해서 조국으로 항해했다. 그리고 1668년 7월 20일 조국에 도착했다. 그러나 하멜은 인도에 남아 있었다.

 

그것은 그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아서 네덜란드 에 대한 항수가 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Hague 주 문서국에 있는 그 원고는 면밀히 검토한 바에 의해 하멜이 기록한 원문으로 생각되어지고 있다. 원문은 Batavia 문서국용으로 필사본이 만들어지고 난 후에 총독에 의해 네덜란드로 보내졌으나, 사본은 소실되었다.

표류기 에서 두드러진 점은 하멜이 그와 그의 동료들이 언제 바타비아로 떠났는지 그 날짜가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지만, Spreeuw 호가 언제 Batavia 에 도착했는지는 빠져있다. 하멜은 난파선에서 살아남아 구조된 두 번째 생존자들과 함께 1669년 Holland 로 돌아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배는 다시 수리되지 않았다. 1670년 8월 하멜은 두 번째 생존자들 중 2명과 함께 Heeren 17세 앞에서 조선에 감금되어 있는 기간동안 받지못한 임금에 대한 지불을 요구한다.

동일한 요구를 첫 번째 생존자들도 했었다. Heeren 17세 는 이들의 요구를 거절했고 1670년에도 거절했다. VOC의 직원들은 VOC의 배에 승선하고 있었을 때나 공장에서 일했을 때 임금을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Heeren 17세가 만든 이 규정은 피해갈 수 없는 힘겹고 엄격한 규칙이었다. 그러나 인간적인 면을 고려해서 그들은 Sperwer호에서 살아남은 모든 직원들에게 일정한 액수의 돈을 주기로 결정했다. 이 액수는 그들이 조선에서 13년간 머물러 있는 동안 받아야할 전체 분량에 미치지 못했다. VOC는 자선단체가 아니라 무역회사였던 것은 분명했다.

그 이후 하멜의 생활은 조선에서 머물기 전 만큼이나 알려지지 않았다. 1734년경 호르컴에 보관되어 있는 손으로 쓴 문서에는 하멜이 1670년 호르컴에 정착했다고 씌여있다. 수년후에 하멜이 정확히 언제 인도로 다시 떠났는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인도체류에 대한 어떤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1690년이나 그보다 더 일찍 하멜은 호르컴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692년 2월 12일 "vrijer zijnde " ( 여전히 미혼인 상태 )로 사망했는데, 그의 나이 62세였다.



하멜표류기 이야기

 

하멜(Hendrick Hamel)이하 36명을 발견한 제주목사 이원진은 이들과의 대화를 시도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이 사실을 한양의 중앙 조정에 알리고 조정에서는 이들과의 통역을 담당할 한사람을 제주도로 내려 보내게 된다.

얼마뒤 통역을 만나게 된 하멜일행은 깜짝 놀라게된다.
의복만 조선의 것이지 생김새는 틀림없는 자기네 나라 사람인 것이다. 사정은 이렇다. 하멜일행이 제주도로 표류해 오기 22년전 그도 역시 네델란드를 출발해 일본의 동인도 회사로 향하던 도중 그들과 마찬가지로 폭풍우를 만나 제주도로 표류해 왔다는 것이다. 그는 결국 조국 네델란드로 돌아가지 못하고 조선에 남아 조선인으로 귀하해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그가 바로 박 연(벨테브레) 이란 사람으로 조선의 군사 훈련 기관인 훈련도감에서 군사훈련을 담당하고 있었다.

하멜일행은 박 연에게 조선의 왕에게 말해 자기들을 본국으로 돌려줄것을 요구하지만 연은 이 나라(조선)에서 벗어나기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런 사실을 가지고 조정으로 돌아온 박연은 왕(효종)에게 사실을 말하고 효종은 이내
이들을 조정으로 불러들인다. 이제 하멜일행은 한양으로의 긴 여행길에 오르게되는데 여기서 하멜은 표류기에 한양
까지 가면서 거치게 되는 여수,순천등 지명을 비교적 정확한 네델란드식 음가로 적고있다.
드디어 한양에 도착한 이들은 효종 앞에서 무릎을 꿇고 박 연의 통역으로 심문을 시작 하는데 효종은 이들이 조선보다 작은 나라에서 왔으며 수 많척의 상선이 있다는 말을 듣게되는데 병자호란이후 꾸준히 북벌정책을 추진해온 효종에게 이들은 단순히 이방인이 아니었다.


표류자들이 지닌 신 무기 제조기술을 활용 청나라 정벌의 꿈을 키워나가기 위함이었다. 효종은 이들에게 식량과 벼슬을 주고 군사 훈련에 참가시켰다.또한 조선식 이름도 지어 주었는데 남북산,남이안 등이었다. 그러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잊지못한 남북산과 남이안이 청사신의 행렬로 뛰어드는 바람에 조선에 외국인을 두고 있음을 안 청 사신은 이를 본국에 알릴려고 하지만 조선 조정의 뇌물로 유야무야되고 만다.그러나 입장이 난처해진 효종은 결국 이들을
전라도로 유배시킨다.지금의 기록으로는 오히려 이들이 유배지에서 결혼도 하고 비교적 행복한 생활을 한 것으로 드러나 있으나 하멜은 표류기에 이부분에 대해서 언급이 전혀없다.이는 본국으로 돌아가 자신이 쓴 일지를 토대로 보상금을 더 많이 받아 내려고 한 것으로보인다.
그러나 갑자기 탈출을 감행하는 하멜일행. 그들에게 어떤일이 일어나고 그들의 탈출은 어떤 파장을 일으킬 것인가?

 

여수출발 6일후 탈출자들은 조선해안을 완전히 벗어나는데 성공했다.그러나 그들은 완전히 항로를 잃고 있었다.
조선에 표착한지 13년 36명의 표류자들중 살아남은자는 16명.그들중 탈출에 가담한 자들은 8명 이었다.하멜일행이 제주도에 표류한지 13년째 되던해인 1666년 5월. 조선호 한척이 나가사끼에 인접한 보또섬에 도착했다.
그때 상황을 동인도 회사 데지마상관은 이렇게 보고했다.


"지난 3일동안 이상한 차림의 유럽인8명이 낯선배를 타고 보또섬에 상륙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즉시 파견된 일본수군들에 의해 그들의 신병이 인수됐다고 한다.
현재 그들은 수군에 인도되어 나가사끼로 오고있는 중이라고 한다.
마침내 우리는 오늘 아침 그 사람들을 실은 배가 어쨋밤 나가사끼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미 실종처리된 선원 8명이 나가사끼의 동인도 회사 데지마 상관에 나타나 사실을 데지마 상관자은 대담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출현은 그 후 조선과 일본의 역사를 바꿔놓는 중대한 사건으로 비화된다.

9월 14일 아침 탈출자8명은 전원 나가사끼에 상륙했다. 그들은 상관장과 직원들의 환영을받고 화란옷(네델란드 옷)도 제공받았다. 바로 그날 정오경 그들은 일본 나가사끼 부교에 끌려가 심문을 받았다.


---"우리는 코리아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했습니다."
"너희들이 조선을 떠날때 몇명이 남아있었느냐?"
---"16명중 저희 8명만 탈출했습니다. 남원과 순천에는 아직 8명이 남아있습니다."
"너희들이 탈출한 곳은 조선의 어느 지방이냐?"
---"전라도 라고하는 지방입니다."
"그런데 왜 탈출했느냐?"
---"그곳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었습니다"
"이유가 뭐냐? 무슨 큰 죄라도 지었느냐?"
---"아닙니다.아닙니다"

 

전라도! 하멜일행이 조선억류의 대부분의 기간인 10년 세월을 살았던곳.그곳에서 그들은 결혼도 하고 주위 사람들과의 교류도 넓히고 조선의 풍습을 익혀나갔다. 안정된 생활을 모색하는 듯했다.그러나...

 

1659년 4월 효종이 승하했다.효종은 북벌의 상징이었다. 북벌을 주장하던 강력한 카리스마가 역사 저편으로 사라지자 북벌체계는 급속히 와해됐다. 뒤이어 현종이 즉위하니만 어린 나이로 북벌체계를 유지해나갈만한 임이 없었다.
이후 조정은 서인과 남인의 권력투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정옥자 교수(서울대 국사학과)
"효종이 1649년 왕위에 올라서 59년에 승하합니다.10년 왕위에 오른거죠. 그런데 효종이 죽고나서 바로 곧 이어서 남명정권도 끝납니다.그러나 청나라는 책임계승을 해버리는 거죠.그러니까 이제 청나라를 칠려기 보다는
적극적인 방어태세로 갑니다."

 

효종의 승하 게다가 현종즉의 1년 부터 3년간 혹심한 가뭄이 계속됐다. 도처에서 산불과 식량부족 사태가 일어났고 떼강도가 극성을 부렸다. 전염병까지 나돌아 수천명의 사람들이 죽어갔다. 하멜도 이때 상황을 자세히 적고있다.
(장폴 바이어-
하멜 표류기 영역본
中)


"국왕은 길에서 죽은 사람들을 묻도록하고 매일 발생하는 살인과 강도를 막기 위해 길목마다 감시를 강화하는 엄한 명령을 내렸습니다.국민들은 목숨을 부지하기위해 도토리를 줍고 소나무 껍질을 벗겨야했고 심지어 잡풀까지 뜯어 먹어야 했습니다."

 

대 가뭄과 전염병을 이겨낸 하멜일행은 33명중 22명에 불과했다. 11명이 죽어나간 것이다.턱없이 부족한 식량난 때문에 22명도 병영성에서 수용할 수 없었다.결국 하멜일행은 식량 사정이 그런데로 괜찮은 남원과 여수,순천으로 분산 배치됐다.
하멜은 전라좌수영이 있던 여수로 배치됐다.하멜이 배치된 여수는 왜구의 배가 빈번히 출몰하던 지역이었다. 전라 좌수영은 바로 이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위해 특별히 설치된 수군 사령부였다.그 사령관인 수군 절도사는 병권 뿐만아니라 그 지역 전체를 통괄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효종의 죽음과 혹심한 대 기근으로 하멜은 전라 좌수사의 전적인 통제에 된다. 이 시기부터 표류기에는 잔인한 사령관,좋은 사령관 이란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지방관리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그들에 대한 대우가 현격히 악화 돼곤 했던 것이다.하멜은 여수에서의 고생을 표류기에 자세히 기록하고있다.

여수에 온 이후 어떤 사령관은 아무 하는일 없이 우리를 아침일찍 부터 밤 늦게까지 마다에 세우게 했습니다. 또 어떤 사령관은 자기가 쏜 화살을 하루종일 줍게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항의하자 사령관은 더 힘든 일을 시키겠다고 혐박 했습니다. 말 그대로 고역이었습니다. 결국 그 고생을 참지못하고 동료 부르트는 죽고 말았습니다. 이 때부터 우리는 모험으로 끝나더라도 더이상 우리의 운명을 방치해 놓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습니다."

 

이 때 이들은 탈출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큰 배가 있어야 했다.배를 마련하기위해 장사를해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동안의 교훈을 이용해 일본으로 가는 항로를 알아놓기도 했다.

문종인(여수 문화관장)의 말
"그들(하멜일행)은 당시 기밀한 계획을 세웠는데 조그마한 배가 그들에게도 있어지만 탈출하기위해 더 큰배가 필요했던거죠. 이제 면이나 솜을 사가지고 와서 팔면 이익금의 반을 주마.해서 하멜일행도 선박살 돈은 없고 하니까 그래서 돈을 모아 큰배를 샀죠. 그리고 솜을 팔면서 여행(탈출)중에 필요한 것을 사가지고와서 9월4일 여수를 출발했는데 떠나기 전날까지도 여수 부락주민들과 술 마시고 놀다가 해가 질 무렵에야 좌수영을 뚫고 나갔죠."

 

하멜일행은 좌수영 수군의 삼엄한 경비를 피해 여수해안을 벗어나는데 성공했다. 그들은 조선 어부들에게서 들은데로 섬을 왼편으로 끼고 멀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일본으로 가는 항로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12일만에 그들은 나가사끼항에 도착했다.곧 그들은 나가가끼 부교의 심문을 받았다.


"너희는 기독교인이냐?다른 사람을 태웠느냐?"
---"회사 선원들 밖에 없었습니다".
"조선은 전쟁을 하고 있었느냐?또는 어느나라에 곡물을 바치고 있었느냐?"
---"전쟁은 하고있지 않습니다.타르타르인이 일년에 두 세번씩 곡물을 받으러옵니다."

 

나가사끼 부교가 실시한 조사는 매우 구체적이고 치밀했다.

주요내용은

첫째-스페르웨르호의 규모,항해목적,난파경위에 관한 질문11개항.

둘째-조선에서의 생활을 묻는내용 7개항.
셋째-조선의 군사정보,경제,풍습,종교에관한 7개항.
넷째-조선의 대외 관계에 관한 6개항.
다섯째-탈출경위와 조선의 입장에대한 내용 13개항등 모두54개항에 이르렀다.

 

당시에 부교는 일본에 표류해온 외국인 모두 나가사끼부교의 심문을 받기로했다.심문 내용은 즉시 막부에 보고됐다.그것이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대한 막부의 조처였다. 조선과 비교해볼때 나가사끼 부교는 놀랄만큼 체계적인 심문을 하고있다. 단 한번의 심문으로 조선에대한 정보를 모두 알아내고 있는것이다.모든심문을 마쳤다. 하멜일행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란 기대에 부풀었다.그러나...

 

에도막부는 1년더 이들을 데지마에 억류시킨다는 결과를 통보해왔다.하멜은 이때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있다.


"우리가 나가사끼에 도착한지 한달이 지난 1666년10월1일 고호르카크는 7척의 배를 거느리고
데지마를 출발 바타비아로 향했습니다. 결국 우리는 그배를 탈수 없었습니다.영문도 모른채
우리는 그배들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봐야 했습니다."

 

그런데 왜 에도막부는 데지마에 하멜일행을 1년더 억류시키기로 결정했을까? 동인도 회사는 교역만 않된다는 막부측의 약속을 충실히 지켰다.그때보터 일본은 유럽국가들중 유일하게 네델란드와 우호적인 통상관계를 유지해 왔다.그 동안 탈출자들에 대한 자세한 심문도 끝이 났다. 억류 이유에 해대 표류기에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런데 하멜일행이 탈출한 1666년 에도막부는 조선예조 총통에게 한통의 외교문서를 보냈다. 막부의 외교문서집인 '통항일람'(일본 국회도서관 소장)에 남아있는 그 문서에 따르면 막부는 탈출자들이 기독교인지 아닌지,조선 조정에 정중히 문의하고 있는것으로만 되어있다. 그러나 한국측 자료에는 이와 다른 기록이 남아있다. 현종7년과 8년의 실록(서울대 규장각)에는 하멜일행이 억류사실을 놓고 막부측이 10달간이나 집요하게 조선 조정에게 공격해온 사실이 기록돼 있다.막부측은 하멜일행을 억류시켜 놓은채 이 사실을 조-일간의 외교분쟁으로 비화시켰던 것이다.

 

(도찌바나)-"소위 아란타는 오래전부터 일본에 곡물을 바쳐온 속국이요.근데 그들을 일본으로  보내주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요?"
(김석주-조선측 즉의관)-"아란타가 일본의 속국이라 말씀하시오만 그들의 생김새와 차림새는 일본국과 조금도 닮은데가 없으니 어찌 그것을 알겠소?"
도-"그들이 가진 물건까지 빼앗고 억류시킨 귀국의 처사는 오랑캐가 아닌 다음에야 어찌 그럴수 있겠습니까?"
김-"물건은 그들이 스스로 알아서 처분한 것이고 그들이 조선으로 온 이후로 모두 모여서 살았소이다.게다가 조선에서는 그들이 굶어 죽지않도록 보살펴 주었는데 무슨억지 소리요?"
도-"지난 을미년 약조에서 표류한 배는 서로 통보키로 했는데 지금 통보도없이 13년 동안이나 억류시켰으니 어찌 성실한 도리라 하겠소?"
김-"그들과는 의사 소통이 되지않으니 목적지가 조선인지 일본인지 어찌 알도리가 있었겠소?"
도-"조선에는 박연이란 자가 있지않소? 그런데 어찌 그들으니 행선지가 일본이라 몰랐다 하시오?박연을 통해 분명히 알았을게 아니요?"

막부측의 강도높은 공격에 조선측은 난감해졌다. 그런데 그 공격은 하멜일행에 대한 치밀한 심문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그러자 일본은 속셈을 드러냈다.

아라노아스노리 교수(리쿄대 문학부)
"당시 쓰시마번(에도막부)가 관철 짓기로했던 요구는 두가지 입니다.하나 항존하던 문제로 무역량 증가 문제였고 또하나 그 당시 한정된 문제로서 왜관이전 요구였습니다."

 

192년 임진왜란-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일본과의 교역에 엄격한 조건을 달았다.왜관 한곳에서만 무역활동을 허용한 것과 연간 무역선의 양을 21척으로 제한한 것이다. 막부는 이 두가지 사항에 해해 완화를 요구했다.왜 막부는 이런 요구를 한 것일까?
당시 에도 막부는 중국 비단의 국내판매와 그에 대한 조세 수입으로 재저을 충당하고 있었다. 중국비단은 막부의 재정 수입원이었던 것이다.그렇다면 막부가 그 엄청난 비단대금으로 지불한 것은 무엇일까?

 

야마구찌현 오타시기원 이곳은 17c 일본 최대의 은광지였다. 당시 이마미원의 최고 은 산출량은 만관에 달했으며 전성기에 채굴 인부는 4만명이나 됐다. 이곳에서 산출되는 막대한 은이 바로 비단대금으로 지불됐던 것이다.
17c 초반 일본은 세계 은 산출량의 1/3을 차지할 만큼 중요한 은 산출국이었다.이렇게 산출된 일본 은은 당시 국제무역선 결제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그런데 17c 중엽이후 일본은 은 부족상태에 빠지게된다.왜 최대의 은 산출국이던 일본이 은 부족사태를 겪게됐을까? 당시 중국은 남구 해안을 괴롭히는 왜구 문제로 일본과의 교역을 단절 한 상태였다. 이런 상태에서 일본은 그 대부분이 조선의 왜관과 대마도를 통해 막부로 공급됐다.
중국의 밀매입선이나 네델란드 상선을 통해서도 중국비단이 들어갔지만 그 양은 미미했다. 그렇게되자 막대한 양의 은이 조선과 중국으로 유출됐다.이것이 일본 은 부족상태의 중요한 이유였다.


이케다 시게루 교수[다이토 문화대-하멜 교류기]
"지금 생각해보면 일본은 현금을 수출하고 상품을 수입하는 것이어서 대단한 국제수자 적자국 이었습니다.그러나 일본 국내에서는 이렇게 수입된 상품 즉,비단이 높은 가격으로 판매되어 막부측 조세수입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이렇게 많은 은의 반출에다 17c말 은 산출의 급격한 감소로 일본은 매우 어려운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막부는 은의 유출을 막아야했다. 그런데 동인도회사나 데지마로 들여온 물품은 조선과의 교역에 은을 대신한 지불수단이 될 수 있었다. 따라서 막부는 조선과의 교역확대를 절실히 원했다.

 

강준식(하멜 표류기연구 집필자) "하멜의 보고서에는 일본이 조선과의 교역에서 지불했던 것들이 바로 자기네가 일본에 팔았던 물건이었던 겁니다.예를들면 백담향 이라든지,목두,설탕 같은거 였는데 그것이 이제 자기네
한테 사가지고 조선에 파는데 그 이익이 수십 배 수백 배가 되는것을알고...."

 

마침이때 조선에서 네델란드인 8명이 도주해왔던 것이다.막부는 이들을 이용해 조선과의 무역량을 늘리고자 했다.그러나 조선은 이미 막부의 속셈을 꽤 뚫어 보고있었다.

김석주-"도리라 하였소?"
도-"그렇소 우리 일본은 귀국에게 도리를 다하였소."
김-"귀국은 이 남만인들을 귀국에 인도하지 않았다하여 우리를 질책하고 있으나 어찌 전날의 박연 사건은 잊고 있으시오? 박연이 표류해 왔을때 우리는 그들을 동래의 왜관에 인계 하려했소이다.그러나 귀군은 인수를 거부하지 않았소? 어째서 똑같은 사안에 대해서 귀국의 태도는 이렇게 다르단 말이오?"

 

아라노 야스노리 교수(리쿄대 문학부)
"1627년 네델란드인 박연이 동료 3명과 조선에 표착했고 조선은 관례대로 이들을 왜관에 보냈지만 쓰시마측이 신병인수를 거부했습니다. 이런 전례에 비추어 조선은 일본의 태도를 의심하게 됩니다.막부측 입장은 네델란드가 일본에 조공을 받치는 속국이므로 조공국인 네델란드를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으나 박연의 말때문에 조선은 막부측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조선측에서 박연을 들고 나오자 막부측은 더이상 협상을 끌고나갈 명분을 잃어버렸다. 조선은 종결을 통보하고 이사안을 마무리 지었다.
"우리는 1년동안이나 데제마섬에 갇혀있어야 했습니다. 슬픔속에서 나는 스페르웨르호의 난파후 부터 13년간 우리가 겪었던일을 정리해서 보고서를 만들었습니다. 동인도회사 서기로서 나는 그 동안 기록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그것은 조국 네델란드가 나에게 부여한 의무이기도 했습니다."

 

조선과의 외교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은 하렐일행을 더이상 억류시켜 놓을수가 없었다. 그들이 일본에 억류된지 1년만이었다. 그제서야 하멜일행에게 출항허락이 떨어졌다. 드디어 하멜일행은 고국으로 돌아왔다.제주도에서 난파했던 스페르웨르호가 네델란드를 떠난것은 1648년. 떠날때 모두 20대 청년이었던 그들은 이제 40대의 장년이 되어 고국에 돌아온 것이다.(1668년)
이때 돌아온 일행중 한명인 베네딕투스 클레르크는 제주도에 도착했을때 14살이었다. 청년기를 조선에서 보내야 했던 그는 네델란드 글을 배우지 못했다.그때문에 동인도 회사에서 억류생활에 대한 보상금을 지급하면서 서명을 요구했을때 그는 X로 서명해야 했다.
네델란드로 돌아온 하멜일행은 조선에서의 억류생활중 밀린임금을 지급 받고자했다.그들은 그 근거로 하멜이 작성한 보고서를 회사에 제출했다. 동인도 회사측은 다른이유로 이 보고서를 매우 신중하게 검토했다.그것은 이보고서가
담고있는 코레아에 대한 상세한 내용 때문이었다.

"코레아 왕국으로 항해하기 위해서는 중국 황해쪽에서 접근해야 합니다.코레아의 위치는 북위 34.5~44.5도 사이며 8개도와 306개의....조선과 교역을 하는 유일한 외국인은 대마도의 일본인 입니다. 일본인은 우리에게 수입한 후추,항목,백반,사전 같은것을 조선으로 수출합니다.그리고 코레아에서는 인삼,비단같은 물품을 수입합니다"

하멜은 어떤 목적으로 이렇게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하게 된것일까?

 

[장폴 바이스-하멜 표류기 영역 중]
"하멜에대한 이야기는 꾸며내거나 기묘한 사건에 대한 책이 아닙니다.첫 페이지를 보면 이것은 마차이케르-당시 인도네시아 총독에게 제출한 보고서라는 것을 알수있습니다. 동인도회사 직원으로서 그는 회사에 제출할 보고서를 준비해야만 했습니다.하멜의 표류기는 이야기가 아니라 정식 보고서로 쓰여진 것입니다."

 

17c 유럽 국가들은 무역선에 반드시 석유를 탑승시켰다.당시 유럽의 무역선은 탐험선이기도 했다. 지리상 발견이 진행되고 있던시기 새로운 항로는 물론 항해종류,해로의 흐름등 항해에 필요한 모든 것을 기록해야했다. 이렇게 관찰해서 기록한 내용은 다음 항해사에게 유용한 길잡이가 됐을 뿐아니라 분석이 되어 무역정책에 반영되기도 했다.바로 이런 역할을 수행하는것이 석유였다.석유는 당시 세계로 팽창하던 유럽이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존재였다.

 

[장폴 바이스-하멜 표류기 영역 중]
"하멜은 서기로서 무역거래를 모두 기록해야 했습니다. 스레르웨르호는 자카르타에서 대만으로 갔는데 짐내리고 실은 것들을 다 기록해야 했습니다.그리고 항해중 음식,맥주등 일상용품까지 기록해야 했습니다."

 

하멜의 고향 후르쿤市! 하멜은 그가 20살이었던 1650년 이도시를 떠났다.그러나 17c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이도시의 문서 보관소에는 아직 Hendric Hamel의 가계와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었다.

 

후르쿤市 [문서 기록 보관서]-르네판 다이크 소장
"이 페이지에 딕 페르데릭 하멜과 마르릿 헨드리슨 사이에 태어난 헨드릭이란 아들이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증인도 있습니다.1630년 8월 22일 입니다.헨드릭이 세레를 받았을때 후르쿤시장이 증인이 되었던 걸 보면 중요한 위치의 집안 이었던것 같습니다.그의 아버지 직업을 알고 싶으면 여기 1626년의 기록에 그의 아버지가 750
길드짜리 집을 샀는데 당시 이돈은 꾀 큰돈 이었습니다.특히 그는 건축 전문가 였습니다."

 

남아있는 기록에 따르면 하멜은 부유한 집안에서 높은교육을 받았던 것으로 기록된다.
당시 많은 네델란드 청년들은 황금과 모험을 찾아 동인도 회사의 선원이됐다. 그들중 하나였던 하멜도 처음에는 하급신분으로 동인도 회사에 입사했다.그러나 하멜은 입사한지 1년만에 장교신분인 서기로 승진할 수 있었다.그것은 하멜이 고급교육을 받은자로서 항해에 필요한 고급지식을 빨리 습득할 수 있었다는 표시다.바로 이런 사람에
의해 하멜 표류기가 쓰여졌던 것이다.


동인도 회사에 제출된 하멜의 보고서가 시중으로 유출되어 소책자로 출간됐다. 그 당시 파장은 엄청난 것이었다.미지의 세계에해한 호기심이 고조되어있던 유럽에서 이 소책자는 선풍적인 인기를 일으켰다.불어판,독어판,영역판이 경쟁적으로 출간됐다.
그때까지 동방의 조그만 나라 코레아는 유럽인들에게 겨우 그 이름만 알려져있을 정도였다.바로 이때 출간된 하멜의 표류기는 미지의 나라 코레아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처음으로 유럽인들에게 소개한 책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네델란드도 조선과의 직교역을 신중히 검토하기 시작했다.


조선과의 직교역 검토!-1668년 네델란드 식민지 문서 제255호에는 이때 동인도 회사가 조선과의 직교역을 검토했던 기록이 남아있다. 1년 후인 1669년 동인도 회사는 새로만든 상선의 이름을 코레아호라 명명했다. 코레아와의 직교역을 위해 만들어진 배였다. 코레아호는 천톤급의 대형 상선이었다. 그런데 동인도 회사에서는 왜 조선과의 직교역을 시도했을까?그것은... -직교역으로 무역이익 극대화/-중국진출의 교두보 확보가 그것이다.

 

네델란드 동인도 회사입장에서 조선은 중국 진출을 위한 전략적 교두보로 인식됐다. 이 전략적 요충지를 지신들의 무역권안에 포함시키기위해 동인도 회사는 조선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게된다. 직교역 추진에 앞서 동인도 회사는 조선 잔류자 8명에 대한 소환문제를 먼저 해결하려했다.동인도 회사는 이 문제를 바타비아 본부에 지시했다.
그러나 아직 조선과 외교관계가 없었던 바타비아 본부는 에도막부의 중재를 요청했다. 에도막부는 잔류자 소환무제를 해결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오자 적극적으로 나섰다. 왜 에도막부는 이 문제에 적극 나섰을까?

 

강준식[하멜 표류기 연구서 집필]
"일본의 속셈은 이런 중재를 통해서 조선과 일본의 무역을 증대시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조선에 대해서는 화란(네델란드)이 지기네 속국이다 라는것을 과시할려는 면과 화란에 대해서는 이런 요청을 들어줌으로써 조선과 직교역 할려는 움직임을 사전에 막고자 하는 의도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일본과는 달리 조선은 이 문제를 조속히 매듭짓는다는 입장이었다.조정에서는 효종 승하로 야기된 사상논쟁이 계속되고 있었고 그 결과 서인과 남인 사이에는 복잡한 권력 투쟁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따라서 조정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10년간 남만인 문제로 골치가 아파왔는데 이번 기회에 그 짐을 홀가분하게 벗어버리려는 것이었다.
비변사 등록에는 일본측 요청에 대한 조선측 입장이 간단히 기록돼있다. 1670년 2월 마침내 잔류자 8명도 고국 네델란드로 귀향했다.귀향자는 하멜의 보고서를 근거로 14년간의 급여를 지급받았다. 잔류자 송환 문제를 해결한 동인도 회사는 조선과의 직교역 추진을 위해 코레아호를 동양 무역본부인 바타비아로 출항시켰다.동인도 회사 출항일지에는 네델란드를 출발한 코레아호가 1670년 4월2일 바타비아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네델란드 17인 위원회는 바타비아 상관장에게 조선과의 직교역을 추진하라는 명령도 함께 내렸다. 그런데 뜻밖의 문제가 발생한다.

 

"일본을 제치고 우리가 직접 코레아와 교역을 한다면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을것이다.
조선과의 직교역을 추진하라!"
[네델란드 17인 위원회]
"우리는 조선과의 무역에서 우란타국의 개입을 원하지 않는다.만일 우란타국이 조선과의
직교역에 나선다면 우리는 데지마 상관을 페쇄시킬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스나-에도막부 4대장군]
"일본에 상관을 두고있는 이상 우리는 일본과의 무역에 불씨를 일으키는 일을 삼가해야
합니다.코레아와 직교역을 해보려는 생각은 버려야 할 것입니다."

[요한 마차이케르-동인도 회사 동양본부장]

 

동인도 회사의 최종결정은 조선과의 직교역을 포기한다는 것이었다.동인도 회사가 조선과의 직교역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을 눈치챈 에도막부가 이를 적극저지하고 나섰던 것이다.결국 동인도 회사가 의욕적으로 명명했던 코레아호는 조선으로 단한번도 항해하지 못하는 운명이되고 말았다.

 

이케다 시게루 교수[다이테 문화대-하멜 표류기 일역]
"네델란드 동인도 회사로서는 일본 무역이 매우 중요했습니다.중요하다기 보다는 사활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동인도 회사는 막부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으려 했습니다.막부측도 동인도 회사의 직교역 개설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강준식[하멜 표류기-집필]
"17c는 동서양의 무역에 분수령과 같은 시기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서양의 과학이 부각되는 중대한 분기점인데 그 시기에 화란에서 코리아호를 진수해서 조선까지 오는 그런중대한 계기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다가왔던 변화의 물줄기를 타지 못하게 됩니다.그것은 외적으로 일본의 방해가 있었고 내적으로 우리자신이 준비가 안 돼있었고..

 

반면 일본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유럽이 출범시킨 세계 경제체제가 출범하고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아시아의 질서체계가 와해 되고있던 17세기. 유럽문명과 조선의 만남! 그물꼬를 막았던 일본은 데지마를 통해 유럽문명과의 교류를 독점했다.데지마에는 네델란드와의 교역 사무를 보던 일본인 통사들이 있었다.
그 업무를 원활하게 수행하기위해 그들은 자식들에게 네델란드 말을 배우게 했다. 8대 장군 요시무네는 네델란드와의 교역을 위해 네델란드말 교습소를 개설하는 한편 서양서적 수입도 허가했다.요시무네의 해금 조치로 수입된 서적중 하나가 의학서 해체신서다.해체신서에 따라 사형수의 몸을 해부해본 일본은 그 정확함에 놀랐다. 일본은 사전도 없이 이 책을 번역했다.이것을 계기로 네델란드 학문을 익히고 배우자는 난학이 태동했다.이 때부터 유학생들이 나가사키로 모여들기 시작했다.전국에서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난학을 배우기위해 몰려들었던 것이다.

 

난학을 배우기 위해서는 네델란드말을 배워야 했다.1796년 마침내 일본인들의 손으로 일-란 사전이 완성됐다.그리고 그 대상도 네델란드 학문 뿐만아니라 모든 서양 학문으로 확대됐다.난학은 일본 전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오사카에서 오마다광이 설립한 비끼주꾸는 난학의 확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곳에서 배출된 사람들은 난학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기 시작했다.
한편,막부도 산하에 난학 연구소를 설립했다.이후 난학 연구소에서는 일본의 근대화를 이룬 많은 인재들이 배출됐다. 동경대의 전시 바로 이때 설치된 난학 연구소이다. 1868년 메이지유신- 그 저력은 난학이었다.파라입소-아시아를 벗어난 서양 선진대열 합류를 주장했던 난학자 도쿠가와 이유쿠치. 그러나 그의 학문은 서양학문의 망종이 맹종이 아니었다.도쿠자와 함께 일본 근대화의 양대 기둥이었던 오무라 마쓰찌꾸. 그 동상이 난학자들의 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칼로 상징되는 주체와 망원경으로 상징되는 개방의 조화가 바로 그것이다."

 

마토카 가나이[일란 학회 상무이사]
"문학 개화에 공헌한 난학과 양학의 역할은 컸습니다.그러나 일반시민,농민에게는 오히려 에도시기에 주입된 생활습관 사고 방식이 지배 했습니다.이사상을 기본으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 사상이 동시에 유입되었는데,그 시기에 일본은 근대국가에 필요한 요소를 선택적으로 수용했습니다."

 

17c 조선은 개방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켰던 힘의 실체를 직접 체험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효종은 하멜을 북벌과 연계 시킴으로서 당시 세계를 변화시켰던 힘의 실체를 수용하고자 했다.그러나 청의 견제로 그 기회는 무산됐다.
코레아호가 조선으로 항해 했을때 또 하나의 기회였다. 이때는 일본의 방해로 무산됐다.그로부터 100년 뒤인 18c 이때 등장한 실학파는 조선내부에서 성장한 기회였다.그러나 실학자의 대부분이 유배 당하거나 재야에 남아 있어야했다. 그들의 새로운 실험은 정책에 반영되지 못하고 배척당해 버린 것이다.
다시 1세기 후인 19세기,조선은 200년전 조선의 개방을 가로막았던 일본에 의해 강제 개항을 당하고 말았다. 역사의 갈림길은 17세기 한 사건에서 이미 잉태됐던 것이다.

 

강재원 교수[교토 화원대 문학부]
"하멜일행이 제주도에 1663년에 36명이 표류해 왔는데 제가 보기에는 그 사람들이 하나의 서학집단 입니다.천문학,역학,의학 그리고 항해술,조총과대포술 탄약..이런서학집단인데, 아쉬운것은 그 당시 청나라를 치자는 북벌론이 왕성했는데 말로만 왕성했지 서양집단이 지닌 좋은 서학을 가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억류기간동안 밀렸던 임금을 지급 받았습니다. 이때문에 우리의 삶은 안정 될수 있었습니다.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고통스러웠던 코레아에서의 생활이 그리움으로 채색되어 갔습니다.
코레아호가 출항했을때 그들중 몇은 이 항해를 자원했습니다.그러나 결국 그들은 코레아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만약 이때 코레아호가 코레아까지 항해 했더라면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요?
그리고 코리아의 운명또한 어떻게 됐을까요?


하멜표류기연표
  •   
  •   1653년 1월 10일 네덜란드 텍셀 출발
  •         6월  1일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총독이 주재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도착.
  •         6월 14일 대만으로 출발
  •         7월 16일 대만 도착, 짐을 풀고 싣고
  •         7월 30일 일본향해서 대만 출발,
  •         8월 16일 태풍으로 난파 - 승무원 64명중 36명만 제주도에 생존상륙
  •         8월 17일 조선군들에게 발견
  •         8월 22일 제주로 가서 제주목사의 심문을 받음
  •        10월 29일 서울서 온 네덜란드인 박연을 만남
  • 1654년 5월 1차 탈출 기도 실패
  •         6월 서울로 출발
  •         8월 청나라 사신이 와서 9월에 갈 때까지 남한산성에 억류
  • 1655년4월21일 그중 2명이 몰래 두 번째 온 청나라 사신을 만나 본국에 송환을 요청,
  •               후에 투옥돼 사망  6월 제주난파선 관계로 3명을 통역사로 보냄
  • 1656년3월 전라병영으로 이송, 위 3명도 합류 (합33명)
  • 1660년∼1662년 3년간 큰 가뭄으로 기근이 심하여 약탈행위가 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음
  • 1663년3월 식량부족으로 좌수영(여수)12명, 남원5명, 순천5명 당시생존자 22명 분산수용 
  •               (병영에 있는 7년동안 11명 사망)
  • 1666년9월4일  좌수영에 거주한 하멜 일행 8명이 일본으로 탈출
  •          9월14일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
  • 1667년7월 1명 잔류희망자 (얀 클래스탠)제외한 7명, 일본 정부 요청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가 먼저 탈출자와  합류하다.
  • 1667년10월 일본에서 출발(15명)
  • 1668년7월20일 본국 암스테르담에 도착하여, 하멜표류기-조선왕국견문록(소속된 회사에 그동안의 보고서)가   일반인들에게 발표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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