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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10-04-22
 제목  청일전쟁(淸日戰爭)
 주제어  [청일전쟁] [일본] [중국] [전쟁사]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1894년 7월 25일∼1895년 4월 사이에 청(淸)나라와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다툰 전쟁으로 이로 인하여 일본의 중국에 대한 본격적인 분할이 시작되었으며, 동아시아에 제국주의 시대의 막이 열렸다.

청일전쟁을 중국에서는 갑오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중일갑오전쟁(中日甲午战争 / 中日甲午戰爭), 일본에서는 일청전쟁(日清戦争), 서양에서는 제1차 중일전쟁(First Sino-Japanese War)이라고도 부른다.

 

일본은 1876년 조선과의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체결하여 조선이 자주국임을 인정하고 다음해 부산에 거류지(居留地)를 설정, 곡물의 매점과 무관세(無關稅) 특권으로 공산품을 수출하며 조선에 진출하였다. 82년 최초의 반일운동인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자 일본은 제물포조약을 체결하여 일본공사관 주둔병의 허용을 내용으로 하는 주병권(駐兵權)을 장악하고, 84년에는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 개화파를 후원,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오히려 청의 종주권이 강화되었다.

 

당시 일본은 1880년대 후반 값싼 노동력을 발판으로 급속히 발전한 일본자본주의는 1890년에 시작된 경제공황을 통해 그 모순을 드러냈다. 즉 값싼 노동력의 국내시장 발전제약과 섬유공업·군수공업 등에 대한 수년 간의 투자확장이 공황의 원인이었다. 1889년의 흉작으로 인한 쌀 생산의 감소도 공황을 더욱 촉진시켰다. 결국 1890년도의 일본경제는 심한 수입초과를 나타냈으며 일본은 무역불균형을 타개하기 위해 해외시장 침략을 꾀하게 되었다. 1890~94년 일본 의회에서 나타난 일본지배층 내부의 대립 격화와 농민·노동자들의 경제상태 악화 및 불만의 증대는 지배층의 침략기도를 부추겼다.

 

한편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영토분할을 주도하고 있던 영국은 당시 제정 러시아동아시아에서 가장 위험한 적수로 보고,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에 반대하는 동맹세력을 찾고 있었다. 영국은 일본을 장래의 동맹국으로 보고 청일전쟁 개시 2주일 전인 1894년 7월 16일 일본과의 불평등조약 개정에 동의했는데, 이는 일본의 침략전쟁 개시를 승인한 것을 의미했다. 미국도 러시아를 위험시하고 일본으로 하여금 러시아를 견제하게 했다. 반면 러시아는 일본의 조선침략 기도에 대해서는 경계하면서도, 일본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려는 정책은 취하지 않고 장차의 침략기회만 노리고 있는 단계였다.

 

그리하여 청의 식민지적 지배와 일본 상업자본의 진출, 조선왕조의 압제 등에 시달려온 농민들과 동학 교도들이 봉기(蜂起)하여, 1894년 5월에 전주(全州)를 점령하자 조선왕조는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6월 8~9일 청군 2,400여 명이 아산만(牙山灣)에 상륙하여 12일부터 군사행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텐진조약에 의하여 조선에서 청 ·일 양국의 세력균형을 요구하던 일본 정부는 6월 초에 출병을 결정하였다. 그들은 일본공사관과 거류민 보호라는 구실 아래 해군과 육군의 대부대를 파병했고, 이어 인천-서울 간의 정치적·군사적 요충을 장악했다.

 

일본군의 침입에 당황한 조선정부는 갑오농민전쟁이 이미 진정되었음을 이유로 청·일 양군의 동시철병을 요구했다. 일본의 오오토리[大鳥] 공사는 본국의 훈령에 따라 갑오농민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과 조선의 내정개혁(內政改革)을 구실로 철수를 거부했다. 일본의 내정개혁 요구는 겉으로는 '일본의 자위(自衛)를 위해 조선내정의 개혁을 촉구하여 변란의 근원을 단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내세우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러시아에 대처할 전략적 시설을 한반도 안에서 확보하고 불평등조약 체제를 더욱 강화하여 본원적 축적을 강행하려는 것이었고, 나아가 조선을 보호국화(保護國化)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조선정부는 일본이 철수한 후 비로소 내정개혁을 실시할 수 있다고 하여 일본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에 일본은 7월 23일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쿠데타를 통해 흥선대원군을 앞세운 친일정권을 수립했고, 7월 25일 선전포고도 없이 청군을 공격하여 청일전쟁을 도발했다.  이 당시 일본은 청국이 북양함대의 군사력이 증강이 미진한 사이, 자력으로 건조한 순양함, 철 갑함 다수를 포함하여 1894년 당시까지에 55척, 6만톤의 대해군을 건설하였다. 특히 북양 함대에는 1문도 없었던 최신의 속사포 155문을 갖추었다. 그 결과 1884년의 시점에 일본해 군은 북양함대에 비해 주력함의 평균시속이 1해리 빠르고 평균선령도 2년이 적었으며, 포 의 발사속도도 4-6배 우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7월 25일 풍도(豊島) 앞바다의 해전과 29일 성환(成歡) 육전에서 청국군을 격파하였고 7월 30일 아산을 점령하였다. 8월 1일의 개전 후 9월 15일에는 평양을 지키고 있던 청군 1만명을 패퇴시켰으며, 육전과 황해 해전에서 우세를 확보한 일본은 랴오둥[遼東]반도의 탈취 계략을 세우고, 10월에 청국 영토에 진격하여 뤼순[旅順]학살사건을 일으킨 후 봉천(奉天) 남부를 제압, 이어서 웨이하이웨이[威海衛] 군항에서 북양(北洋)함대를 격멸함과 동시에 타이완[臺灣] 점령을 위하여 펑후섬[澎湖島] 작전을 벌였다. 즉, 8월초에 일본군은 아산·공주(公州)·성환(成歡) 등지에 포진하고 있던 청군에 공격을 가하여 승리하고, 계속 북상하여 9월에는 평양에서 청군과 대결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청군은 9월 16일 밤 평양을 포기하고 압록강을 건너 후퇴했다.

 

평양전투의 승리를 전기로 하여 일본은 조선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했고, 갑오정권(甲午政權)의 개혁적 성격도 희석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군수물자만 자국에서 가지고 왔을 뿐, 8월 27일 체결된 ' 대조선대일본양국맹약'(對朝鮮對日本兩國盟約:朝日盟約)에 의해 식량·부식물·군수물자 수송의 노동력을 대부분 현지에서 조달했으므로 전쟁터가 된 조선의 민중은 큰 피해를 입었고 조선의 자주권은 유린되었다. 이에 농민군은 그해 10월 다시 전면적 봉기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11월에는 공주공격을 개시했다. 일본군은 급히 남하하여 조선정부군과 함께 농민군토벌에 나섰다. 결국 농민군은 12월 우금치전투에서 우수한 근대식 무기와 장비로 훈련된 일본군에게 패배했다. 한편 9월 17일 황해해전(黃海海戰)에서 청나라 북양함대(北洋艦隊)의 주력을 격파한 일본군은, 10월 24일 압록강을 건너 중국 본토로 진격하고 11월 6일 진저우 성[錦州城]을 점령했다. 부패한 청군 지도부의 무책임한 대처는 군대의 사기를 저하시켜, 11월 22일 뤄순[旅順]이 점령되었다. 일본군은 뤼순 시내에서 시민과 포로 약 6만 명을 학살하고 시가지를 불사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군에게 연전연패한 청국은 95년 3월 강화 전권대사 이홍장(李鴻章)을 파견하여 30일에 휴전, 4월 17일 시모노세키[下關]에서 강화조약에 조인하였다. 하지만 조약이 체결되는 과정에서도 일본의 야욕은 드러났다. 즉, 전쟁에 참패한 청나라정부는 강화를 시도하고 대표단을 일본에 파견했다. 청나라 대표단이 파견되기 직전, 일본에서는 조선의 독립승인(청의 종주권 파기), 랴오둥[遼東]·타이완[臺灣]·펑후[澎湖]의 할양, 배상금지불, 서구열강과 맺은 것과 같은 통상조약(불평등조약)을 일본과 체결할 것 등을 골자로 하는 강화초안을 작성했다. 그러나 1895년 1월 30일 청나라 대표단이 도착하자, 일본은 시간을 지연시켜 점령지를 확대함으로써 유리한 강화조건을 확보하려는 속셈에서, 대표단의 권한부족을 트집잡아 귀국시켰다. 그동안 일본 해군은 1월 20~23일 위해위(威海衛)를 봉쇄한 다음, 2월 12일 육군의 상륙작전으로 이를 함락시켰다. 사태의 급진전에 놀란 청나라 정부는 이홍장(李鴻章)을 강화전권대사로 하는 새로운 대표단을 시모노세키[下關]파견하고, 일본측이 제시하는 강화초안을 수용하여 4월 17일 조약에 조인했다.

 

일본은 ① 조선에서의 청국의 종주권 파기, ② 랴오둥반도와 타이완 ·펑후섬의 할양,쑤저우[蘇州] 등 4개 도시의 개항③ 배상금 2억 냥(3억 엔) 지불, ④ 열국과 동일 특권을 인정하는 통상조약의 체결 등을 얻었으나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3국 간섭 앞에 무릎을 꿇고 랴오둥반도는 반환되었다. 타이완 민중은 일본에의 할양을 거부하며 저항하였는데, 일본은 고전 끝에 11월에 이를 진압하였다.

 

청일전쟁은 이후 동아시아 3국의 진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청일전쟁으로 얻은 막대한 배상금, 과중한 세금수탈로 만들어진 군사비, 식민지 타이완으로부터 얻은 이윤, 전쟁으로 축재한 자본가의 이윤 등을 바탕으로 전쟁 후 일본자본주의는 급속한 발전을 이룩했다. 반면 조선은 갑오농민전쟁으로 표출되었던 변혁의지가 일본군에 의해 무력으로 압살당함으로써 자주적 개혁이 좌절되었고, 일본 및 제국주의 열강의 수탈대상으로 되어갔다. 또한 열강의 중국 분할이 본격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동아시아에 제국주의시대의 막이 열렸다.

 

 

참고자료 : 위키백과,  두산대백과사전, 브리태니커백과, 차석찬의 역사창고

 

 

>> 목차고리 : 세계 > 아시아 > 동아시아 > 일본 / 중국

>> 연결고리 : 중국, 일본, 전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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