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site   게시판   메일   M1000선교사홈   Mission Magazine
 

 

  사전등록   히,헬 폰트받기
 현재위치 : HOME > 문서보기


 작성자  관리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10-04-22
 제목  신사참배 강요와 한국교회의 수난
 주제어  [신사참배] [일제강점기] [한국교회사]
 자료출처  남영환 편저  성경본문  
 내용

韓國敎會와 敎團
-高神敎團史를 中心으로-
(총 594 페이지) 남영환 편저


제17장: 신사참배 강요와 한국교회의 수난

북장로교 선교사이며 연희전문학교 교장이던 원한경은 "신사참배 문제는 개인의 신앙양심에 맡겨야 하며 학교는 당국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고 하여 신사참배를 주장하면서 연희전문 학교의 경우 신사참배를 하면서도 학교는 계속해야 한다고 보았다. 캐나다 선교사(연합교회로 자유주의)들의 경우도 마찬가지. 신사참배 문제에 있어서 시종 강경한 태도를 견지한 선교부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였다.(이 선교부 소속 학교, 모두 호남에 위치한, 는 모두 폐교함)

로마교는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일본에 대해 1932년 5월 26일자로 이미 신사는 국가의식으로, 충성과 애국심의 표명이므로 참배해도 좋다는 통첩이 보내졌다.

 

신사참배에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교파는 장로교회였다. 1938년 가을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가결시 봉천노회 소속 한부선(Bruce F. Hunt) 등 선교사는 그 부당성을 항의하다 예배당 밖으로 끌려나가기도 했다. 부회장 김길창 목사(해방후 1946년 경남노회장)의 인솔로 전국 노회장 23명이 총회를 대표하여 평양신사에 참배하였다.

필자는 해방 후에 주남선 목사가 구국 기도회나 구국 기도단을 만든 목사들을 상종하기조차 꺼려하는 것을 보았다. "기독신자가 죄는 버리지 않고 기도만 한다고 해서 그런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 주시겠는가"라고 반문하였다.


제18장: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저항

○ 조직적인 신사불참배 운동(명단 중 요약)

평북 중심인물: 이기선 목사(혁신복구파로 독노회조직, 1878- ?)

신의주: 김창인 목사(高神卒, 前 합동 총회장, 現 충현교회, 1917- )

강계: 고흥봉 목사(高神卒, 처음에는 재건교회, 1897- ?)

박천: 안이숙(후에 평양이거, 생존, LA, 現在 남침례교, 1907- )

평양: 이약신 목사(초대 高神 총노회장, 1897-1958)

이인재 전도사(생존, 보스톤, 高神卒, 1905- ), 함일톤, 마두원
선천: 김인희 전도사(재건교회, 1908-1950?)

경남 중심인물: 한상동 목사(高神 설립자, 1901-1976)

부산: 손명복 전도사(생존, 마산, 高神卒, 1973 高神 총회장, 1910- )

조수옥 여전도사(생존, 마산 인애원장, 高神, 1913- )

거창: 주남선 목사(高神 설립자, 1888-1951)

진주: 황철도 전도사(1959, 1964 高神 총회장, 1900- ?)

함안: 이현속 전도사(순교) 남해: 최상림 목사(순교)

마산, 통영: 최덕지 여전도사(재건교회, 1901-1956)

밀양: 박수민 장로(박장로는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아니했고 아들 박치덕<1990 高神 총회장>은 일본 해군에 입대했으나 신사불참배로 일본 해군 형무소에 있다가 2차대전이 끝나고 석방됐으니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만주 중심인물: 한부선(Bruce F. Hunt) 선교사(생존, 펜실베니아,
高神 개교 당시 교수, 1902- , 1992년 여름 소천)
전남 중심인물: 손양원 전도사(高神 초대총무, 사랑의 원자탄, 1902-1950)

 

1. 한상동 목사는 사람으로서 차마 견디기 어려운 고문을 다 받았다. 5년간의 옥중생활을 회고하면서 한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과거 5년간의 옥중생활을 회고해 볼 때 그 생활 전부가 나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은 추호도 없다. 진실로 주님은 살아 계셔서 나의 생활 전부를 주관하시고 예수는 능력의 주님이심을 나는 확실히 체험했다."

 

2. 이인재 전도사(1906-현재): 필자가 87년 미국 콜로라도 덴버(Denver Colorado)에서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의 과거를 못내 괴로워 했다. 자신이 예배당 소송문제에 대하여 한상동 목사의 고충을 좀더 이해를 했더라면 박윤선 목사도 고려신학교를 떠나지 않았어도 됐을 터인데 하고 눈시울을 적시었다. 한상동 목사는 예수를 믿으면서 부모(양부모)에게 쫒겨나와야 했고 신사참배에 대한 투쟁과 고려신학교 관계로 평생을 싸움으로 끝맺었으니 이 점도 이해는 해야 할 것이다. 이인재 전도사의 동생 이명재도(현 시카고, 高神졸)도 신사참배 문제로 학교를 다니지 않고 가정에서 공부했다.(이인재 목사는 미주의 예장(합동) 초대 총회장 역임)

 

3. 최덕지 전도사(1901- 1956): 1935년 평양 여자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설교한 것 때문에 체포된 것은 김을도 형사와 의형제를 맺고 있는 목사의 고발에 의한 것이었다.(이 목사는 현재 서울에서도 유수한 큰 교회에서 목사로 재임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2차 투옥이었다. 이때의 당한 고문은 최덕지 전도사의 전 감옥생활에서 가장 혹독한 것이었다고 한다.

1945년 8월 17일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5년 혹은 6년간 투옥되었던 주의 신실한 종들이 각 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 꼭 하루 전이었다. 하나님의 손길은 이렇게 놀라운 것이었다.


제19장: 해방과 교회재건운동

서울은 일본기독교 조선교단 세력의 지도자였고 신사참배 반대투쟁으로 투옥 혹은 출옥했던 지도적 인물이 없었던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였다. 1946년 남부총회는 재야 무임 교역자 배은희, 함태영을 정,부회장(둘다 능수능란한 정치가)으로 선출하고 이전 조선교단 때의 지도자가 계속 주도권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여기 교권과 정치적 야욕이 동원..." "친일의 불명예가 혹시 이 교단의 존속을 통해 상쇄되리라는 굴절된 정신의 표현..."라고 표현한 사람도 있다. 여기서 남부 총회가 법대로 안되었기 때문에 경남노회 대표는 주남선 목사를 비롯하여 퇴장하고 말았다.(감리교는 자리안배(?)로 끝남)


제20장: 경남지방에서의 교회재건운동

1. 경남노회 재건운동

경남은 남한에서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중심지였고, 신사참배 반대에 앞장섰던 주기철, 주남선, 한상동, 손양원 목사 등이 경남노회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영향하에 전국적으로 재건운동의 선봉에 섰던 것이다.

경남의 신앙부흥운동 준비위원회는 대표 최재화(1892-1962, 1949년 예장 총회장), 심문태 두 사람의 이름으로 1945년 9월 교회건설과 노회복구에 대한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 선언에서 저들은 종교개혁의 후예자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사실상 교단시대의 인물로서 신사참배에 앞장섰던 인물들인데,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체포, 구금되어 고문을 당하고 영어 몸이 되었던 이들이 임지로 나오기도 전에 교회 개혁운동의 기치를 실행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해방 당시 평신도들의 항거정신 곧 비진리를 대항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센 교회 재건의지를 의식하고, 저들의 신변확보와 교권을 유지하려는 기만적인 책략이었지 진실한 의미에서의 영적 재건운동은 아니었다. 이들의 교권유지를 위한 계략은 그 이후의 역사에서 잘 드러난다. 이 안은 최재화 목사를 중심으로 강주선, 김상순, 윤용술 목사 등에 의해 제안된 것이며, 이때는 한상동 목사나 주남선 목사등 출옥성도가 남하하기 전이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적어도 경남노회 지역에서의 자숙안은 출옥성도들에 의해 처음으로 제안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들이 즐겨 말하는 "출옥성도"라는 어떠한 교만과 독선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10여명의 목사들은 "신사참배는 우리가 양심적으로 이미 해결한 것인데 해방이 되었다 하여 죄로 운운함은 비양심적이다"라고 하였다. 출옥성도들이 남하하기 전에 이미 수습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김길창, 배성근 목사 등 일부 교권주의자들은 자기들을 회개시키기 위함이라고 하여 이 집회에 참여치 않았다. 집회 후 주남선 목사는 노회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수락을 거부하고 노회적인 회개운동 몇가지 실행조건을 제시하였다. 여기에 대해 찬반 양론으로 논쟁이 있었으나 결국 통과되었다. 그리고 결정만 되고 실시되지 않았던 현 교역자들의 자숙을 철저히 시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부 교권주의자들은 노회의 결의를 순응치 않고 여전히 교권장악 운동에 몰두하였다. 자숙안에 반대하는 교권주의자들의 주도권 장악운동은 그 후 경남노회를 혼란으로 이끌어 갔다. 이러한 일부 교권주의자들의 작전이 주효하여 다수가 자기변호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 목차고리 : 신학교회사 > 한국교회사 > 신사참배

>> 연결고리 : 일본신사참배  

 



   


A-Z




  인기검색어
kcm  381750
설교  193052
교회  141349
아시아  113955
선교  101902
세계  91829
예수  88315
선교회  80386
사랑  76418
바울  75888


[배너등록]
 

 


홈페이지 | 메일 | 디렉토리페이지 | 인기검색어 | 추천사이트 | 인기사이트 | KCM 위젯모음 | 등록 및 조회

KCM 찾아오시는 길 M1000선교사홈 미션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