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site   게시판   메일   M1000선교사홈   Mission Magazine
 

 

  사전등록   히,헬 폰트받기
 현재위치 : HOME > 문서보기


 작성자  관리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10-04-21
 제목  가가와 도요히꼬(賀川豊彦 1888. 7.10~1960. 4.30)
 주제어  [일본] [사회운동가] [목사]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일본 장로교 목사이며 빈민운동가이다. 고베시에서 첩의 아들로 태어났다. 메이지 학원 신학부(1907), 코오베신학교(1910)졸업, 신학교 재학 중 결핵을 앓으며 투병기 《사선을 넘어》를 썼다. 투병생활 후 빈민 선교에 관심을 두어 코오베 니이가와 빈민촌에서 전도하였다. 14년 미국에 건너가 프린스턴대학 및 신학교에서 수학했고 17년 귀국한 후 계속해서 코오베에서 빈민 · 노동자를 상대로 사회 선교활동을 전개했다.

 

예수단 우애구제소, 공익사, 예수의 친구회 등을 조직했으며 21년에는 코오베 가와사키조선소 노동쟁의를 지도하기도 했다. 23년 토오쿄오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전국적인 구제 사업을 벌였고 30년부터 ‘신국(神國)운동’을 벌였다. 40년 반전(反戰)사상 때문에 체포되기도 했으며, 2차 대전후 사회당 결성을 도왔고, ‘신일본건설 그리스도운동’을 벌였다. 그의 저술을 묶은 《賀川豊彦全集》과《빈민 심리학 연구》 등이 있다.

 

일본이 세계 앞에 내놓을 수 있는 두 사람으로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와 가가와 도요히꼬(賀川豊彦)을 뽑는다. 우찌무라 간조는 탁월한 사상가와 선생으로써 도요히꼬는 성자같은 삶으로 인해 많은 사람의 추앙을 받았다.

 

가가와 도요히꼬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그가 기독교를 접하게 된 것과 한 사람의 이름없는 목사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가가와는 고위공직자와 기생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네 살 때 아버지가 죽고 다섯 살에 어머니가 돌림병으로 죽었다. 그래서 첩의 자식이 아버지 없는 본부인의 집에 들어가 의붓 형제들 사이에 얹혀살게 되었다. 그가 받은 구박을 상상해 볼 수 있다.
 
12세 되던 해 외로운 그는 담장 밑에 쪼그리고 앉아서 따스한 햇볕을 쪼이고 있었다. 그 앞을 북을치며 나팔을 불고 지나가는 전도행렬이 있었다. “예수를 믿으면 당신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는 몇 만 볼트에 전압에 감전된 것 같았다. 그는 달려가서 물었다. “나 같은 기생의 자식도, 첩의 아들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습니까?” 그때부터 누군가 자기의 이름을 물으면 “내 이름은 가가와 도요히꼬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나는 이제 기생의 자식도 아니고, 첩의 아들도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랍니다."
 
그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고베 신학교에 들어갔다. 신학교 2학년 19살의 가가와는 폐결핵에 걸렸다. 당시 폐결핵은 고칠 수 없는 병이었고 전염병이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경원시되었다. 가가와 도요히꼬가 가장 괴로웠던 것은 병든 자신을 교회와 신학교 조차도 외면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죽을 날을 기다리며 남자답게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려고 결심을 하며 길을 정처 없이 걷게 되었다.
 
그는 가나사와라는 오지에서 거의 천막과 다름없는 교회를 발견하고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 곳에서 기도라도 해보고 죽자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한편, 2차 대전시기에 일본에서 '나가노'라는 젊은 목사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자신은 사람이 없는 곳에서 교회를 세우겠다는 뜻을 가지고 일본의 북부 '가나사와' 지방에서 교회를 시작했다. 그는 부인과 아이 둘을 데리고 목회를 시작했는데 5년이 되도록 한 명의 교인도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 땅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땅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 곳을 떠나지 않았다. 5년 만에 한사람의 청년이 수요일 저녁에 교회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는 너무나 반가워서 이 청년 가가와 도요히꼬를 집으로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했다. 식사를 하던 중에 가가와는 각혈을 해서 식탁위에 엄청난 양의 피를 쏟아내었다. 나가노 목사는 잠시 분노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이 청년이 이런 병이 있으면서 우리 가족을 위협에 빠뜨리면 어쩌려고 이러나.’ 그러나 나가노 목사는 그 피를 손으로 닦아내고 다시 새로운 음식을 내어와 함께 식사를 마쳤다. 바로 이 모습에서 가가와 도요히꼬는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나가노 목사의 집에서 얼마 동안을 머물며 기적적으로 폐결핵을 치료했다.
 
그는 신학교를 마치고 고베의 빈민굴로 들어갔다. 인생의 막장을 사는 사람들 속에서 그는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리고 결심했다. 그곳의 사람들은 먹지 못해서 자주 변비가 걸렸다. 가가와 도요히꼬는 손으로 그들의 변비를 끄집어 내었고, 그것도 여의치 않은 경우에는 항문을 입으로 녹이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하루는 기자가 찾아와서 “사람에게는 존엄성이 있는데 선생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하고 질문했다. 그는 대답했다. "나의 선생님은 나의 죽음의 핏덩이를 손으로 치우기까지 하셨습니다. 나는 배운 대로 할 뿐입니다.“
 
가가와 도요히꼬는 중국의 빈민굴에 들어가서도 동일하게 빈민들을 섬겼다. 장개석 총통의 부인 송미령 여사는 가가와 도요히꼬를 만나 큰 감동을 받았다.
 
일본이 패망하고 쫓겨 갈 때 여러 나라에서 수많은 일본인들이 테러를 당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테러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도요히꼬 목사를 존경한 장개석 총통이 종전 포고령 1호를 내렸는데 "귀국하는 일본인에게 보복하는 사람은 중죄에 처한다"는 내용이었다.
 
가가와 도요히꼬를 성자로 만든 것은 두 가지였다. 자신은 차별받아야 하는 첩의 자식이 아니라 존귀함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긍심이었다. 둘째, 명성과 명예를 쫒지 않고 평생을 사람 없는 교회를 지켰던 나가노 목사의 헌신적 사랑을 만났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귀한 존재이며 인생은 값진 사명이 부여되어 있는 것이다.

 

 

>> 목차고리 : 세계 > 아시아 > 동아시아 > 일본

>> 연결고리 : 일본, 목사, 사회운동가  

 



   


A-Z




  인기검색어
kcm  239670
설교  142731
교회  100130
아시아  81522
선교  78125
예수  65854
세계  65016
선교회  56173
바울  52526
사랑  50866


[배너등록]
 

 


홈페이지 | 메일 | 디렉토리페이지 | 인기검색어 | 추천사이트 | 인기사이트 | KCM 위젯모음 | 등록 및 조회

KCM 찾아오시는 길 M1000선교사홈 미션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