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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성경인명  작성일  2010-04-16
 제목  한필려(1906. 8. ?~1949. 4. 1) 사모
 주제어  [대한민국] [사모] [순교자] 기독교박물관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한필려 1906년 평양 선교리에서 고무신 공장을 경영하는 한상호씨의 1남 3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숭의여학교를 졸업하고 1931년 김양선 목사(한국기독교박물관설립자, 장로회 신학대학, 숭실대학교 교수)와 결혼하였다. 해방 후 서울에서의 기독교박물관 개설을 위해 38선을 넘나들며 소장품을 운반하던 중, 1947년 4월 해주 앞바다에서 공산군 총탄에 맞아 숨졌다.

 

여보, 글은 못남겼어도 피묻은 유물만은 나에게 남겨 주었구려.

김양선목사는 아내 한필려가 해주 앞바다에서 총을 맞고 쓰러지면서도 놓지 않고 전해준 피묻은 유물을 보면서 통곡을 뱉었다. 

 

한필려는 평양 숭의여자중학교를 졸업하고 정신유치원에서 어린 아이들을 돌보게 되었다. 그때 그녀는 김양선을 만났다. 김양선은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평양신학교에 재학하고 있었다. 어려운 신학생을 만나 생활을 꾸려나가려니 핍절했다. 거기에다 김양선은 史學者로서 기독교 사료만 보면 어떤 돈을 꾸어대든지 구입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김양선의 외조부는 최초 한국인 개신교 순교자 백홍준 장로로서 중국에서 존 로쓰판 성경을 최초로 번역한 사람이었다. 그는 외할아버지나 친할아버지, 부친의 소장 책들을 조심스럽게 다루다보니 사료가치를 직감하게 되었다. 최초의 한글 성경인 '예슈셩교젼셔', 최초의 찬송가인 ‘찬양가’ ‘찬성시’, 최초의 교회신문인 그리스도인 신문 등이 그가 신학교시절 수집한 것이었다.

 

그는 기독교 사료만 수집한 것은 아니다. 일반 희귀사료도 수집햇다. 병인양요때 대원군이 어용희 장군에게 보낸 전쟁지휘서 100통, 홍경래 난때 정부쪽 기록인 순무영등록(巡撫營謄錄)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는 선교사들과의 두터운 교분으로 구문사료까지 어렵게 수집했다. 1943년 김양선 목사는 섬기던 정주중앙교회에서 신사참배문제로 쫏겨났다. 교회에 못질을 해서 폐교를 한 것이다. 김양선 목사의 실망은 컸다. 그때 그의 아내 한필려는 많은 위로와 희망을 주었다. “여보, 힘을 내세요, 히브리서12장 8절에도 말했잖아요. 시련은 다 당하는 것인데 만약 너희에게 없다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라고요.” “그렇지” “그럼 당당하셔야지 왜 어깨를 늘어뜨리세요?” “내가 언제” “방금도 힘이 없으셨으면서.” “아니야, 임자. 잘못 봤다구. 보라구 이렇게 힘이 넘치잖아.” 내외는 소리내어 웃었다.


“여보, 이런 때는 차라리 깊숙한 산간 마을로 찾아갑시다.” “어디 말이요?” 신시(新市)가 어떨까 싶은네요.“ “신시? 할아버지 묘소가 있는 곳 말이요?”“여보 당신은 어차피 일제 치하에서는 빛을 못봐요. 그곳에 들어가 농사나 지으며 삽시다” 김목사는 정주중앙교히 당회장 자리에서만 축출된 것이 아니다. 목사의 생명인 강도권(講道權)도 박탈당했고 금족령까지 내려 10리 이상 나갈 때는 경찰서에 허가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일제가 김양선에 대하여 이렇듯 가혹했던 것은 전문학교 시절부터 ‘청주회’라는 서클을 만들어 抗日運動을 한 경력 때문이다. 김목사는 그로 인해 옥고까지 치뤘다.


신시는 평안북도 구성에 있다. 김목사가 신시까지 들어가 해방때까지 은둔생활을 한 것은 그 아내의 조언 때문이었다. 한 여인은 신시에 움막을 짓고 농사도 하고 외양간도 만들어 가축도 길렀다. 가축이라야 돼지치기, 양 방목같은 것이었다. 신시는 얼마나 산골짜기였던지 맹수가 출몰해 양들을 약탈해 갔다. 한필려는 밤잠도 자지 못하고 양떼를 지킬 때가 많았다. 목동이 된 사모님이다.
필려는 남편이 생명만큼이나 귀중히 여기는 사료들을 소중히 보관했다. 3.1운동때 스코필드 박사가 촬영한 사진 30매는 베개 속에 넣었고 안중근 의사의 옥중 육필과 태극기는 이불 속에 감추었다. 폐교당한 숭실 학교의 대리석 간판은 다리미판 같이 만들어 보관에 신경을 썼다.


그런데 김목사가 수집한 대개의 기독교사료들이 북한에 있었다. 한필례 여사가 자원 3.8선을 넘어가 귀중한 문헌들을 운반해 왔다. 두 번째도 월북해 자료를 가지고 무사히 넘어왔다. 그러나 1947년 들어서는 3.8선 경비가 강화도고 있었다. 그녀가 자료들을 머리에 이고 해주 앞바다에서 막 배에 발을 들어밀었을 때였다. 인민군 경비병이 나타나 따발총을 갈겨댔다. “어이쿠!” 여인은 관통상을 입고 쓸어졌다. 육지 같았으면 앰부런스를 타고 병원으로 급히 옮겨지면 생명을 구할 수 있을텐데 배는 달랐다. 그 배에는 의료시설 하나 없었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던 여인은 배안에서 숨을 거뒀다. 여인은 죽어가면서도 유물들을 꼬옥 껴안고 있어 그녀의 진한 피가 유물에스며들었다. 1948년 4월 1일이었다. 1948년 4월 20일 기독교박물관이 남산에서 개원되었다. 출품된 자료중 어떤 것은 심한 얼룩이 져 있었고 핏물도 배어 있었다. 박물관장 김양선 목사는 아내의 얼굴을 만지듯 피묻은 자료를 만지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더운 눈물이 맺혀 소리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기독교박물관은 한 여자의 어기찬 사랑으로 이룩되었다.

* 한국교회사가이며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을 창립하신 김양선목사의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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