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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관리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10-04-15
 제목  조만식(1883. 2. 1~1950.10.15?) 장로
 주제어  [대한민국] [장로] [순교자]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조만식 장로는 1883년 2월 1일 평남 강서군 진향리에서 출생하였다. 정주오산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3·1운동으로 2년 옥고를 치렀고 1921년 평양 산정현교회 장로가 되었다. 평양 YMCA총무가 한국의 간디가 된 것은-조선 물산장려회'를 조직하면서부터이다. 그는 금주, 금연, 폐창운동등 절제운동을 표방 국산품장려운동으로 민족자본 육성의 업적을 이룩했다.


이같은 운동들은 3.1운동 후 강력하게 대두된 사회주의 계열의 교회에 대한 비판에 대응할 수 있는 기독교 주도의 사회운동으로 정착 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었다.그는 자신이 작사작곡한 '물산장려가'를 전국으로 보급하여 물산장려운동을 진행시키는 한편 자신은 말총모자와 편리와 및 개량 한복을 입고 국산품 애용을 호소하여 민족자본 축적에 기여했다.

 

해방 후 평남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조선민주당을 창당하는 등 소련군정을 반대하다가 1946년 1월 감금된 이후 행방불명되었다.

 

1908년 숭실중학교 졸업. 도오꾜 세이소쿠 영어학교 졸업
1913년 메이지대학 법학부 졸업.
1913년 오산중학교 교사,교감, 교장. 숭인상업학교 교장. YMCA총무
1919년 3.1운동 참가

1921년 산정현교회 장로
1922년 조선물산장려회 회장
1923년 김성수등과 연정회 발기
1927년 신간회 결성에 참여
1932년 조선일보 사장
1945년 평남 건국위원회 인민정치위원장 .조선민주당 창당

부친은 당대의 선비였고 어려서부터 한학자 장정봉 문하에서 수학 15세에 사서삼경을 마치고 관직보다는 대상의 길을 가기 위하여 포목상을 경영하게 되었고 사업적 수완이 뛰어나 벌써 술 잘먹고 돈 잘 쓰는 사업가로 소문이 나 있었다.
22세시에 한학 동문 한정교의 권유로 예수를 믿게 되어 술담배를 하루아침에 끊는 결단을 보이기도 했다. 때는 1894년이었다.


다음해 고당은 사업을 정리하고 숭실중학교에 입학 재학하는 중 평양 태극서관의 주인 안태국과 민족주의자 도산 안창호의 연설과 활동에 깊은 감명을 받아 졸업과 동시에 도오꾜 세잇소쿠 영어학원에 입학 간디의 무저항주의와 민족주의 사상을 배워 평생 그의 사상을 실천하기로 하였다. 1911년 28세에 메이지대학 전문부 법학과에 진학 이 학교에서 송진우 김성수같은 동지를 만났다.


1909년 YMCA회관에서 도꾜한인교회 창립멤버로 초대영수로 활약 한 교파에 예속을 원치 않는 장.감 양파연합교회 전통을 만들어놓기도 하였다. 1913년에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도미유학을 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하자 이승훈의 요청으로 월급을 받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민족학교 오산중학교 교사로 부임 교감을 거쳐 1915년 교장에 승진했다.


1919년 3.1운동을 지도하기 위하여 교장직을 물러나기 까지 5년간 그는 교장이자 교사, 사감이자 급사로 봉사했다. 3.1운동으로 2년의 옥고를 치르고 다시 교장으로 부임했으나 일경의 불허로 평양 YMCA총무가 되고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함으로 항일 독립투쟁을 "힘이 없으면 죽는다. 힘을 키우자."는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시켰다.
1923년 김성수 손진우 등과 함께 민립대학 기성회를 조직하고 모금운동을 전개했으나 일제의 간섭으로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1926년 숭인상업학교 교장으로 몸담았으나 그해 융희황제의 국상을 당해 6.10만세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영영 교단에서 쫓겨나고 말았다.1927년 신간회를 조직하여 스스로 중앙위원겸 평양지회장으로 활동했으나 일제 탄압으로 해산되었다.
그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사회활동으로 방향을 바꾸어 관서 체육회장에 취임하여 스포츠를 통한 민족의 원기를 북돋았고 1932년에는 조선일보사장에 취임 언론계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백선행기념관과 인정도서관을 개설하여 시문들의 문화공간으로 활용하게 한것도 이때이고 한인 사회 소송사건을 맡아 한인 스스로 해결하는 사랑방 담합장을 마련한것도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으로 일거수 일투족 제약을 받고 거기에다 도산 안창호선생이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어 감방에서 병을 얻어 1938년 3월 10일 운명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학병에 지원한 것을 가지고 조장로가 학병지병을 격려하는 강연을 한다고 신문에 대대적인 선전을 했으나 그 날짜를 기해 평양 기흘병원에 입원을 해서 위기를 넘겼다.
창씨개명 반대. 학병지병 격려강연 강요 거부. 조선군사령관 이다가끼 대장 면담 거부 등 강서로 피신 숨막히는 생활을 하다가 8.15를 맞았다


그는 8월 17일을 기해 평남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북조선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 활동하기를 강요했으나 거절하고 그해 11월 3일 조선민주당을 결성했지만 1년도 전에 와해되고 신탁통치 지지 성명을 내라고 강요했지만 반대하자 고려호텔에 감금해버리고 말았다.


조선민주당 청년 당원들이 그를 구출하기 위해서 침입했을때 "북한 동포를 두고 나 혼자 어디로 가겠는가. 나는 북한 일천만 동포와 운명을 같이하련다."라고 했다.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간디의 무저항 불복종투쟁을 공산당을 향하여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6.25동란이 일어났을 때는 극심한 심적 고통으로 심장병이 악화돼 있었고 늑막염까지 겹쳐 병원에 이송돼 있었다. 북괴는 1950년 6월 조만식 선생을 간첩 이주하, 김삼룡 등과 교환하자는 제의를 했으나 이는 남침을 위한 위장 계략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공산당에게 학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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