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site   게시판   메일   M1000선교사홈   Mission Magazine
 

 

  사전등록   히,헬 폰트받기
 현재위치 : HOME > 문서보기


 작성자  관리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10-04-08
 제목  송영길(1908. 9. ?~1949. 4.19) 목사
 주제어  [한국인 목사] [대한민국] [장로교] [목사] [순교자] [한국전쟁]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1907년 평남 용월면에서 출생했으며, 숭실전문학교를 거쳐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고 일제치하 신사참배 반대와 농우회 사건으로 9개월 간 투옥되었다. 해방 후 전남포 비석리교회를 시무하고 있을 때 공산당에게 연행되어 운산금광에서 복역중 총살되었다.

 

신의보통학교 졸업
숭실중학교 졸업
숭실전문학교 졸업
1936년 평양신학교 졸업(31회)
삼등교회. 산정현교회. 자북리교회. 비석리교회 담임

 

“목사님, 우리는 남한에서 올라온 청년당원들입니다. 또 성경구락부에서 목사님께 배운 제자이기도하구요. 목사님을 모셔가야 하겠기에 이렇게 왔습니다. 북한 공산당 밑에 있으면 목사님은 죽습니다.” 초롱 초롱한 청년의 눈에서는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송영길 목사도 청년을 똑바로 처다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들의 충성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나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는 목사라네 뿐만 아니라 한 가정의 장자로써 늙으신 부모를 봉양해야 하는데 첫째 양들이 이리들의 발톱 밑에서 고생을 하고 있는데 나 한 목숨 살겠다고 도망을 친다면 될 법이나 한 일인가? 둘째로 늙으신 부모를 두고 나만 간다면 자식된 도리가 아니지 않는가?” “목사님 생명은 그 어떤 것보다 귀한 것입니다. 죽을 것을 알면서 이곳에서 그대로 있다는 것은 자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지금 진남포 억낭기 앞바다에 구명 보트를 대 놓았으니 남한으로 가십시다” “나는 못가오 그것은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오.” 송영길목사는 끝내 남한에서 올라온 청년들을 되돌려 보내고 말았다.


송영길은 1908년 9월 평남 용강군 용월면에서 송용범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마펫(마포삼열)선교사가 세운 신의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숭실중학교, 숭실전문학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목사가 되기를 소망했다. 장로교초대목사 방기창은 사돈 어른이었고 장로교 주일학교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잡지 ‘아이생활’의 주필이었던 송관범, 송흥범장로는 5촌 당숙이었기에 그들의 신앙적인 영향을 많이 받아 목사가 되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그 후 기독교교육기관이었던 신의학교와 숭실중학교, 숭실전문학교를 통하여 기독교적 신앙을 충천하였고 때마침 일본 식민지 기독교 탄압정책이 혹독하여져서 그 수모와 억압에 눌리어 평양거리를 방황하는 빈곤한 어린이들을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도와줄 수 있을까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이 젊은 학생 송영길에게 길을 열어 주셨던 것이다. 


그랬던 그가 평양 숭실전문학교에 들어가 킨슬러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마침내 소원이었던 슬럼가에서 방황하는 불우소년들에게 기독교교육과 아울러 중등과정을 실시할 수 있는 성경구락부(Children's Bible Club)를 1929년 12월에 창시하게 되어 열정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송영길은 숭실학교 때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평양신학교에 진학해서도 꾸준히 학생 지도에 열정을 쏟았다. 1936년 평신을 제31회로 졸업한 후에는 강동군 삼등교회에서 잠시 시무하다가 평양 산정현교회 부목사로 부임해 주기철목사 밑에서 일사각오의 신앙을 본받아 신사참배 반대하다가 농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유재기. 주기철. 배민주.박학전. 이유택. 송영길. 김철훈 등이 의성경찰서에 연행 구금되어 9개월동안의 극심한 고문을 극복하고 일경의 묘한 계략에 의하여 강제로 일본 유학을 떠나 도꾜에 유폐당했다.
해방 후 귀국하여 일생을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40대초에 순교의 반열에 들어가는 파란곡절한 승리의 일생을 마쳤다.
광주학생사건에 연루되어 중학생으로서 사상범으로 낙인찍혔고 신사참배와 농우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루어야 했고 해방 후 공산당의 궤휼에 주구가 되지 않고 고귀한 순교의 피를 흘린 것이다.
1949년 4월 19일 새벽3시 33인 민족대표 중 한분이신 신석구목사와 함께 검속되어 8년의 형선고를 받고 돌아올 수 없는 영어의 몸이 되어 주의 영광을 빛내었다.


사모 김인숙은 맏딸인 미리암과 두 딸을 데리고 비석리 교회를 떠날 때 마지막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사모가 찬송가 542장을 독창하던 중 이절을 다 마치기도 전에 온 교인들은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 목차고리 : 세계 > 아시아 > 동아시아 > 대한민국 > 순교자

>> 연결고리 : 대한민국, 한국전쟁장로교, 목사, 순교자

 



   


A-Z




  인기검색어
kcm  349415
설교  175955
교회  128557
아시아  102175
선교  98032
세계  88160
예수  84865
선교회  75085
사랑  70973
바울  70294


[배너등록]
 

 


홈페이지 | 메일 | 디렉토리페이지 | 인기검색어 | 추천사이트 | 인기사이트 | KCM 위젯모음 | 등록 및 조회

KCM 찾아오시는 길 M1000선교사홈 미션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