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site   게시판   메일   M1000선교사홈   Mission Magazine
 

 

  사전등록   히,헬 폰트받기
 현재위치 : HOME > 문서보기


 작성자  관리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10-03-26
 제목  김길수(1905.?~1949.?) 목사
 주제어  [한국인 목사] [대한민국] [목사] [순교자] [한국전쟁]
 자료출처  한국교회순교자기념사업회  성경본문  
 내용

1905년 평남 용강에서 출생했으며,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하고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해방 후 평양 신암교회를 시무 하였으며 북한 5도 연합노회 서기로 활동하다가 1947년 4월 10일 정치보위부로 연행된 후 행방불명되었다.

 

소학교 졸업. 이본 와세다대학 중학부 졸업.
1942년 3월 평양신학교 졸업(37회)
비석리교회 남무밖교회 신암교회

 

일본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부친의 별세로 구국하여 고향에 도아와 "배워야 산다 아는 것이 힘이다"를 모토로 남동학교를 개교하여 민족운동에 몸바치는 청년들을 육성했다.
 "당시 기독교의 교세는 눈에 띄게 크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무엇이가를 해내는 힘이있었다. 김길수는 아무도 그에게 전도한 일이 없지만 당시 믿는 기독자 믿는 사람들의 의로운 행동을 통해 스스로 교회를 선택한 사람이다.
김길수는 그의 나이 25세에 기독교에 입문해 처음에는 민족운동전개의 수단으로 기독교를 이용하려고 했으나 신앙이 깊어지면서 민족운동 못지 않게 중요한 거이 복음전파임을 깨닫게 되었다.
일제는 1941년 선교사들을 강제 출국시키고 조선기독교 통리직을 만들었다. 교단의 특수성을 없이하고 하나의 교회를 표방 한것은 그길이 빠르고 안전하게 통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목회 초년부터 평양신학교에 출강하여 가르칠자가 태부족한 시기에 중요한 인재로 쓰임받았다. 이같이 뜻있는 목회자들이 교단통합정책에 협조할 리가 없었다. 친일파라고 해도 마지못해 참여했지 즐겁게 헌신하지는 못했다. 결국 김목사는 십자가를 진것이다.


1945년 해방후 교회는 세가지 양상이 나타났다.

1. 공산정권과 싸워서 시앙의 자유를 확보하자는 파.

2. 월남을 서두르는 파.

3. 보수신앙에 입각해서 수수하게 신앙을 파수하며 강단을 지키자는 파였다.
김길수 목사는 극단적인 첫째 부류에 속했다. 그는 1945년 12월 초 이북5도 연합노회 조직을 위하여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발기총회를 열고 회장 김진수목사 서기 김길수목사 간사 김철훈목사와 이유택목사가 피선되었고 6개항목의 안건을 통과 발표함으로서 김일성 공산정권과 대립의 선포를 하게 되었다.
해방후 처음 맞는 3.1절에 강양욱은 평양역전에서 가지기로 주도했지만 5도연합노회측은 장대현 교회에서 3.1절 기념예배를 갖기로 정하자 인민위원회는 정치보위부와 내무서원을 동원하여 주동자를 검거하겠다고 위협하였으나 5도연합은 그대로 모인가운데 황은균목사의 신탁통치 반대 욪의 설교로 끝냈다.
1946년 11월 3일주일에  인민위원 총서거하는 일에 반대하는5개항의  결의서를 도연합의 이름으로 2천여 교회와 30만 성도들의 신앙수호를 위한 결의문을 작성하여 김일성에게 전달하며 주일선거를 거부할 거을 강력통보하고 서거를 거부하는데 서과가 있었다.


1946년 그는 이윤영목사가 동행 월남할 것을 거절하고 공산당들의 요구를 거절하다가 1948년 9월에 정치보위부에 연행되어 도앙지 못하는 길을 간 것이다
현재 평양신학 신학연구원 학장 김만용목사가 부친의 뒤를 이어가고 있다.
결의문 5개항은 순교신서3권 순교열전 제(2) 60-61쪽에 있다.

 

<장남 김만용목사>
김길수목사는 부인 김화연권사(85년 소천)와의 사이에 2남을 두었다.장남 김만용목사(76·평양신학원학장)와 차남 김완용집사(73·영락교회)는 모친과 남하해 순교자 유족으
로서 풍성한 믿음의 열매를 맺고 있다.특히 김만용목사는 부친과 비슷한 길을 걷고 있어 부전자전(父傳子傳)이란 이야기를 듣는다.
일본중앙대학에서 수학,평양에서 교사생활을 했던 김만용목사는 남하해 1951년부터 학교법인 숭의학원 설립의 산파역을 맡아 교육일선에 일생을 헌신해 왔다.53년에 교회장
로가 된 그는 지난 92년 부친의 유업을 잇기 위해 숭의학원장직을 떠나 뒤늦게 목사가 되었다.그리고 부친이 제자를 가르치던 신학교육의 맥을 이어 현재 서울 홍익동에 있는평양신학원 학장을 맡고 있다.
“목회자 가정은 누구나 들여다 보기에 유리와 같은 것이라며 항상 언행에 조심할 것을 당부하시던 부친의 모습이 생생합니다.어려울 때마다 아버님의 말씀이 삶의 큰 지침이 되었습니다.
부친은강양욱과 절친한 사이였으나 정권과 타협치 않으셨고 이윤영목사님이 월남할 때 동행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이것도 거절하셨습니다”김만용목사가 부친을 마지막으로 뵌 것은 49년,26세 교사시절이었다.
“지방의 연합집회인도를 위해 집을 나선 뒤 이후의 소식을 아는분이 아무도 없습니다.
당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교회의 진리를 사수하신 부친의 신앙을 유산처럼 생각하며 지금까지 지내오고 있습니다 ”
김목사는 교육자로 이제 목회자로 무탈한 삶을 살았고 1남4녀의 모든 자녀들이 신앙안에서 훌륭하게 성장해 제몫을 다해주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긴다며 남을 후진양성에 더욱 매진할 것을 다짐했다.

 

 

>> 목차고리 : 세계 > 아시아 > 동아시아 > 대한민국 > 순교자

>> 연결고리 : 대한민국, 한국전쟁목사, 순교자

 



   


A-Z




  인기검색어
kcm  334345
설교  170492
교회  123904
아시아  98537
선교  94779
세계  85027
예수  82220
선교회  72978
사랑  69455
바울  68487


[배너등록]
 

 


홈페이지 | 메일 | 디렉토리페이지 | 인기검색어 | 추천사이트 | 인기사이트 | KCM 위젯모음 | 등록 및 조회

KCM 찾아오시는 길 M1000선교사홈 미션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