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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10-02-10
 제목  알렉산드르 푸슈킨(Aleksandr Sergeevich Pushkin, 1799. 6. 6~1837. 2.10)
 주제어  프시킨 [러시아] [시인]
 자료출처  이현우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강사  성경본문  
 내용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슈킨은 (구력) 1799년 5월 26일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오랜 귀족가문의 세르게이 리보비치였고, 어머니는 나제주다 오시포프나 한니발이다. 그의 어머니는 아프리카 아비시니아(현재의 이디오피아) 태생으로 표트르 대제 시대의 총신 한니발의 후손이었으며 푸슈킨의 곱슬머리와 다소 검은 피부는 이 외가쪽 혈통에 기인한다.

 

표트르대제의 총신 한니발

 


두 부부의 둘째 아이 태어난 푸슈킨은 상대적으로 부모의 무관심하에 성장했으며 그의 교육은 전부 유모와 가정교사들에게 맡겨졌다. 어린시절에 그가 가정에서 보고 들은 언어는 당시 러시아 상류사회의 공용어였던 프랑스어였으며 그의 러시어어는 전래의 민담 등을 구수하게 들려주던 유모 아리나 로지오노브나로부터 습득한 것이다(시인은 이에 대해서 <예브게니 오네긴>의 한 장면을 통해 감사를 표한 바 있다). 비록 부모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지만 어린 푸슈킨은 아버지 세르게이의 서재에서 많은 책들을 탐독할 수 있었고, 집안을 방문한 여러 귀족 문인들로부터 문화적 교양을 체득할 수 있었다. 소년 푸슈킨의 삶에 있어서 결정적인 전환은 1811년 그가 당시 황제였던 알렉산드르 1세가 세운 차르스코예 셀로(=황제촌)의 리체이(귀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이루어진다. 푸슈킨은 10월 19일에 성대하게 치러진 개교식 이후에 6년간을 이 학교에서 기숙하며 수학하게 된다. 리체이는 3년간의 하급반과 3년간의 상급반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우수한 교사들에 의해 다양한 과목에 걸쳐서 유럽식 교양과 자유주의 사상이 학생들에게 교육되었다.

                                                                    차르스코예 셀로의 현재의 모습

 

예카테리나 여제의 궁전이 자리하고 있던 차르스코예 셀로는 훌륭한 정원과 산책로, 호수 등 빼어난 자연경관을 갖추고 있었고 여러 전승탑과 기념비 등이 세워져 있었다. 소년 푸슈킨은 이곳에서 아름다운 자연을 호흡하며 시적 영감을 불태웠고, 동시에 강한 애국적 정열도 키워나갔다. 그가 1815년 상급반 진급을 위한 시험에서 낭송한 시 <차르스코예 셀로의 회상>에는 푸슈킨의 이러한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19세기의 대화가 일리야 레핀의 그림으로 남아 있는 이 시낭송 발표에는 당대 러시아 최고의 시인이었던 제르자빈도 참석했었는데, 이 노시인은 푸슈킨의 재능을 격찬하고 축복해줌으로써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의 대시인이 될 푸슈킨의 앞날을 예견케 했다.  

 

리체이 시절과 졸업 직후에 쓴 여러 시풍의 시들에서 푸슈킨은 다양한 문학적 주제들을 섭렵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런 가운데에서 특히 ‘정치적 자유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일련의 ‘정치시’들은 시인의 장래에 큰 전환을 가져오게 된다. 푸슈킨은 이로 말미암아 1820년 5월 러시아 남부의 예카테리노슬라프로 추방되는데, 이후에 1826년 모스크바와 수도로 돌아오는 것이 공식적으로 허용되기까지의 기간이 소위 그의 ‘남방 유배’ 시기이다.

 

푸슈킨의 정치시들은 1812년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전역에 널리 전파된 자유주의 혁명사상에 심취하여 러시아 전제정부의 혁신, 혹은 전복을 꾀하던 당시 젊은 귀족들과 장교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비밀 정치결사를 조직하여 마침내 1825년 12월 알렉산드르 1세의 뒤를 이은 새 황제 니콜라이 1세의 즉위식을 맞이하여 원로원 광장에서 봉기를 일으키게 되는데, 이것이 ‘12월당 봉기’를 뜻하는 ‘제카브리스트 봉기’이다.

 


푸슈킨은 당대 절세의 미녀였던 나탈리아 곤차로바(1812-1863)에게 구혼하여 1831년 2월 18일에 결혼했고, 슬하에 네 자녀를 두었다.

 

기념비(1836)

 


나는 손으로 만들지 않은 자신의 기념비를 세웠노라,

그리로 가는 민중의 오솔길에는 잡초가 자랄 틈이 없고,

기념비는 알렉산드르의 기념탑보다도 더 높이

머리를 치켜들고 솟아올라 있다.

 

아니다, 나는 아주 죽지 않으리라 - 영혼은 신성한 리라 속에서

나의 유골보다도 더 오래 살아남아 썩지 않으리라 –

그리고 나는 영광을 얻으리라, 이 지상에

단 한명의 시인이라도 살아남아 있는 한.


나의 명성은 위대한 러시아 전역에 퍼져 가리라,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민족이 그들의 언어로 나를 부르리라,

자랑스러운 슬라브족의 자손과 핀족, 지금은 야만적인

퉁구스족, 그리고 초원의 친구인 칼미크족까지.


그리고 오랫동안 나는 민중의 사랑을 받으리라,

내가 리라로 선량한 감정을 일깨우고,

이 가혹한 시대에 자유를 찬양하고,

쓰러진 자들에게 자비를 호소했으므로.


오 뮤즈여, 신의 뜻에 따르라,

모욕을 두려워하지 말고, 왕관을 바라지 말 것이며,

칭찬과 비방을 무심하게 받아들이고,

어리석은 자들과는 다투지 말지어다.

 


푸슈킨의 죽음은 당시 전 러시아의 국가적인 이슈가 되었는바, 기록에 따르면 그의 결투 소식이 전해진 직후 1837년 1월 28-29일에 그의 집 주변에는 대략 2-5만 명의 문상객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좁은 거리와 넓지 않은 마당을 보건대, 얼마나 대단한 인파였을지 짐작해볼 수 있다. 푸슈킨의 천재성을 인정하면서도 요주의 인물로 간주했던 당시의 황제 니콜라이 1세는 문상 인파에 놀라서 장례식 장소조차 비밀리에 변경하고 그의 6만의 군대로 하여금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했었다. 한편으로 그는 황제의 주치의를 푸슈킨에게 보냈고, 당시에 불법이었던 결투에 대해서 사면하며 마지막으로 러시아 정교식의 죽음을 맞을 것을 시인에게 당부하는 전보를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가족을 보살펴주겠다고 약속했다. 황제는 시인의 아내 곤차로바를 은근히 좋아했었다. 곤차로바는 푸슈킨이 사망한 후 1844년 란스키 장군과 재혼했으며, 황제 니콜라이 1세는 결혼식에 참석하여 곤차로바에게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선물로 하사했다고 한다.


푸슈킨에 대한 사후 평가는 몇 차례 굴곡과 반전을 겪게 되지만 1880년 6월 모스크바에 세워진 최초의 그의 동상 제막과 함께 절정에 이른다. 푸슈킨 주간으로 선포된 3일간의 기념행사 마지막 날에 행해진 도스토예프스키의 연설에서 푸슈킨은 다시 예언자적 시인으로 호명되고, 위대한 천재로서 셰익스피어, 괴테, 세르반테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아니 전 세계적인 공명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시인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그들을 능가하는 시인으로 간주되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라.

조용히 고통의 날을 견디면

즐거운 날이 찾아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스쳐가는 슬픔은 다하게 마련.

모든 것은 순식간에 날아가고

그러면 기쁨이 내일 돌아오느니

 

 

>> 목차고리 : 세계 > CIS(구 소련지역) > 러시아

>> 연결고리 : 러시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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