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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9-06-01
 제목  삼별초(三別抄)
 주제어  [한국사] 삼별초의 난 삼별초 의거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삼별초는 고려 무신정권(武臣政權) 때의 특수군대를 말한다. 1270-1273년까지 강화도 중심의 삼별초군이 몽고에 대항해 일으킨 의거 삼별초는 좌, 우별초와 신의군을 합쳐 부름. 

 

삼별초의 성격에 대해서는 사병(私兵)으로 이해하는 견해와 공병(公兵)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사병으로 보는 견해는, 그것을 설치한 사람이 최우였다는 것과 〈고려사〉 병지(兵志)에 나오는 "권신이 집권하자 이들(삼별초)을 조아(爪牙)로 삼고 녹봉을 후하게 주며, 혹 사사로이 은혜를 베풀기도 하고…… 권신은 마음대로 부릴 수 있었고 이들은 앞을 다투어 힘을 다했다"라는 기사에 크게 의거한다. 이에 반해 삼별초는 국가 재정으로 양성되고 국고에서 녹봉을 지출했다는 사실과, 삼별초는 당시 무인집권자의 사병이었던 도방(都房)이나 마별초(馬別抄) 등과 엄격히 구분되었다는 사실에 의거하여 삼별초를 공병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삼별초가 정부군으로서 독립하지 못하고 권신의 수족이 되어 그 정치권력과 깊이 유착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송도 방범대인 야별초로 시작, 소속인원이 늘어나자 좌,우별초로 편성 신의군은 몽고군과의 전쟁 중에 포로가 되었다. 탈출한 이들로 조직 강화도로 옮긴 고려 조정에 대해 몽고가 항복을 종용  원종 임금과 문신들은 항복하고 1270. 5.27에 개경으로 감무신은 반대, 삼별초는 반대세력에 가담 무신과 삼별초는 6월 1일 몽고에 항쟁하기로 결의  지휘자인 배중손은 왕족인 승화후 온을 추대하여 진용을 갖추고 1,000여척의 배로 진도로 옮겨가 용장산성을 근거지로 항몽투쟁 벌임 고려와 몽고연합군이 진도를 점령하자 김통정이 잔여 세력 이끌고 제주도로 옮겨 항파두리 성 쌓고 항거 1273년 4월 28일 여몽연합군 1만여명이 제주도에 상륙하고 삼별초는 패배 김통정과 70여명만 남은 삼별초군은 한라산에 들어가 스스로 목매 죽었다.


고려시대 남경(현재 서울) 천도론을 주장했던 김위제(金謂 )은 남경 도읍지의 타당성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사족으로 붙여놓고 있다. 즉 신라말 고려초의 9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하나인 실상산문(實相山門)의 2대 교조요, 풍수지리학의 대가로 알려진 선승 도선(道詵)의 어록인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의 말을 빌려 “후대 현사(賢士, 어진 사람)가 사람의 수명을 판별하여 한강을 넘지 않으면, 만대(萬代)의 기세를 이을 것이요, 만약 강을 건너 제국(帝國)의 도읍을 세우면 한 자리가 분열되어 한강을 사이에 두고 나누어지리라”라는 기록을 고려사 열전에 남겨놓았다.
 우리는 여기서 말하는 한강 이남에 도읍하면 나라가 둘로 나누어진다는 말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오늘날의 행정수도 문제와 더불어 생각해보아야 할 역사의 기록인 것이다. 아울러 고려 숙종은 김위제의 주장을 받아들여 한강 이북 오늘날 경복궁 북쪽 면악(面岳,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여 연흥전 궁궐을 짓고 남경을 경영하였다. 따라서 남북 분열의 상황은 전개되지 않았다.
그런데 고려 중기 몽골의 침략으로 부마국으로 전락되는 상황에서 고려 군사들은 왕실이 개경으로 환도하는데 반대하여 일군의 군사정변을 통하여 그들 나름의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하고, 자주성을 바탕으로 몽골과 그 외세의존적인 고려왕실에 저항하고자 하였다. 이를 우리는 삼별초항쟁이라 하여 고려 무신들의 자주적인 저항정신을 교훈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세상의 인심과 대세의 흐름은 오랜 전쟁으로 지친 상황에서 개경환도를 통한 평온한 정착생활을 희구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에 편승해 새로이 형성된 몽골 황실의 사위로서의 고려왕실과 외세의존적인 문신이 세력을 얻게 되었다. 이때 삼별초의 지도자들은 이들 중앙 정부와 대등한 세력을 견주기 위해서는 한강 이남에 세력근거지를 만듦으로써 그들의 지위를 합리화하고자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즉 당시 정치이념으로 유교와 쌍벽을 이루고 있던 풍수지리 도참사상으로 도선의 이론을 빌려옴으로써 새로운 정권의 정당성을 얻고자 하였던 것이다.

 

삼별초의 성립과 구실
고려 삼별초는 1232년 최씨정권의 최우(崔瑀) 집권기에 정부를 이끌고 강화도로 천도한 뒤 대몽항전 전 시기를 걸쳐 가장 강력한 전투 병력이었다. 이들은 이미 나라 안에 도둑이 들끓자 용사를 모아 매일 밤에 순찰ㆍ단속하여 야별초(夜別抄)라 하였던 것이, 좌우로 확대 편성되었고 급기야 몽고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도망온 자로 편성된 신의군(神義軍)이 합쳐진 부대였다. 따라서 삼별초는 몽고에 대한 적대감이 팽배하였다.
그리고 삼별초는 대몽항쟁의 주력부대로 활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려 고종이 몽골의 사신을 만나기 위해 강화에서 본토의 승천부(昇天府)로 갈 때 호위를 하는 등 수고경비대ㆍ친위대ㆍ특공대ㆍ경찰대ㆍ전위대(前衛隊)ㆍ편의대(便衣隊)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즉 삼별초는 강화도를 수비하는 방어 뿐만 아니라, 자주 섬을 나와 본토에서 몽고군과 싸워 큰 전과를 올렸다.
한편 고려사 병지에는 “권신들이 정권을 잡으면 삼별초를 자기들을 보호하는 핵심부대로 삼아, 그들에게 녹봉을 후하게 주었다. 또 간혹 사사로이 은혜를 베풀며, 죄인의 재물을 빼앗아 그들에게 줌으로써 권신들이 그들을 마음대로 부리게 되어 김준은 최의를 죽이고, 임연은 김준을 죽였으며, 송송례는 임유무를 죽였으니, 이는 모두 삼별초의 힘에 의한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강화도에서의 최씨정권 붕괴와 김(인)준정권 수립, 임연ㆍ임유무정권 성립 등 정변이 있을 때마다 삼별초의 군사력은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즉 고려 무신정권의 마지막 집정무신들의 성립은 모두 삼별초의 협력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즉 삼별초는 사병(私兵)이면서도 공병(公兵)의 성격을 지녀, 군사동원이 용이하였던 것이다.

 

삼별초의 대몽항쟁
고종의 뒤를 이은 원종이 친몽정책으로 태도를 바꾸어 몽골에 굴복하자, 정권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무인들은 삼별초의 군사를 배경으로 개성으로 출륙환도(出陸還都)하는 것을 거부하고, 결전을 생각하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1270년 임유무가 살해되고 무신정권이 완전히 제거되자 원종은 몽골의 지시에 따라 개성으로 돌아와 왕정이 복고되었다. 그리고 몽골은 배후에서 왕실을 조정해 반몽골세력을 배제하고자 하였다. 이때 고려정부는 삼별초의 저항을 선무하는 동시에 김지저를 강화도에 보내어 강압적으로 삼별초 해산을 명하고 삼별초의 명부를 압수하였다.
이렇게 되자 삼별초 군사는 극도로 불안해하였는데, 더욱이 고려정부가 삼별초 명부를 몽골에 넘겨주면 삼별초 군사는 모두 죽을 수밖에 없다는 유언비어가 난무하여 더욱 크게 동요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삼별초는 1270년 6월 장군 배중손과 야별초 노영희를 지휘관으로 삼아 원종을 폐하고 승화후(承化侯, 고려 현종의 8대손) 온(溫)을 새 왕으로 옹립하고 각부 관원을 임명하였다. 즉 “앞으로 몽골군이 강화도로 쳐들어와 백성을 살육하려 하니 무릇 나라를 돕고자하는 자는 모두 구정으로 모여라. … 우리를 따라야 생명을 보존하리라”고 외치면서 강화도 백성의 민심이탈을 통제하면서 개경정부에 맞선 강화도의 새 정부 출발을 알렸다.
그러나 개경정부와 몽골연합군의 강화도 침공이 임박하자 민심이 동요되었다. 이에 배중손 일행은 새 정부를 수립한 3일 뒤 재물을 접수하고 강화도에 남아있는 귀족과 고관들의 가족을 인질로 삼아 삼별초군을 중심으로 하여 진도로 근거지를 옮겼다. 즉 강화 서북쪽 해안에 1천여 척의 배를 대고 군수품과 백성을 싣고 강화를 텅 빈 채로 남겨놓고 가을날에 진도에 닻을 내렸다.
삼별초군은 진도에 용장성(龍藏城)을 새로 쌓고 방위태세를 갖춘 다음 궁궐을 크게 조성하여 도성의 면모를 갖추었다. 나아가 인근의 남해ㆍ창선ㆍ거제 등 해안도서지방은 물론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의 내륙지방까지 세력권에 넣고 세수를 거두어들였다. 따라서 개경정부는 조운이 막혀 재정에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삼별초의 저항에 고려정부는 김방경을 전라도추토사로 삼아 토벌을 명하였고. 몽골 원수 아해(阿海)가 이끄는 몽골군과 여몽연합군을 형성하여 삼별초군을 치게 하였다. 개전 초기에는 삼별초군의 기동력으로 연합군이 참패를 당하였다. 그러나 다음해 고려인으로 몽골군의 앞잡이가 되어 나타난 홍다구와 흔도( 都), 그리고 개경정부군 김방경의 연합군대에게 참패함으로써 1년만에 진도는 여몽연합군에게 넘어갔다. 이 전쟁에서 삼별초 정부의 왕이었던 승화후 온과 배중손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군들이 거의 죽음을 당하였다. 연합군은 삼별초군을 쫓아 남녀 1만명과 전함 수백 척을 빼앗고, 진도에 있던 4천석의 양곡과 재물들을 약탈하여 개경으로 보냈다.
그러나 살아남은 삼별초군사는 김통정 장군을 중심으로 진도 남도석성을 떠나 탐라(제주)로 들어가 항파두리성을 쌓고 끝까지 항전을 계속하였다. 이들은 본토를 자주 공격하여 경기 부천지역에 이르고, 남도의 세공을 약탈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원나라 세조가 일본정벌을 위한 기지로 탐라를 중요시하여 공략하기에 이르렀다. 1273년 연합군은 병선 160척과 1만의 병력으로 탐라에 상륙하여 총공격을 하니, 김통정을 비롯한 삼별초군은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한라산 깊은 곳에 들어가 최후를 마쳤다. 이렇게 삼별초의 대몽항쟁은 3년 만에 막을 내렸다.
삼별초의 대몽항쟁은 백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외세의존적인 정부와 몽골 연합세력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 민중의 동조를 바탕으로 한 고려무인들의 자주적인 기상을 보여준 역사의 귀감인 것이다. 정부는 민심을 얻지 못하였더라도 이 땅의 민생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끝까지 저항했던 것이며, 그 힘이 오늘날 우리가 존재하는 저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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