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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9-05-06
 제목  슈베르트(독:Franz Peter Schubert, 1797. 1.31~1828.11.19)
 주제어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 [오스트리아] [음악가] [작곡가]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가곡의 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슈베르트는 샘솟는 듯한 아름다운 선율에 로맨틱하고도 풍부한 정서를 지닌 이채로운 작곡가였다. 19세기 독일 낭만파 음악의 창시자 중의 한 사람인 그는 국민 학교 교장의 4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11세때는 빈 궁정 예배당의 소년 합창단 단원으로서 음악 생활을 시작하였다.


13세에 작곡을 시작하였고, 15세에는 최초의 서곡을 썼다. 16세에 교향곡을 작곡한 이래 계속하여 교향곡 2,3번, 가곡 [실 잣는 그레첸][마왕(Erlkonig)][들장미] 등을 작곡하였는데, 18세 때까지는 모두 140곡이나 되는 아름다운 가곡을 썼다. 슈베르트는 성가대 훈련소 시절부터 음악 이론도 겸해서 배웠는데, 베토벤에 대하여는 그 당시부터 일생을 통해 흠모하고 존경하였다. 슈베르트는 1813년, 16세부터 그의 아버지를 도와 보조 교원으로 3년간 일한 외에는 아무런 공직도 없이 작곡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동료들과의 생활에서 보헤미안적인 일과를 거듭했다. 가난한 생활 속에서 31세의 짧은 생애였지만 600곡이 넘는 예술 가곡을 비롯하여 교향곡, 피아노곡, 실내악곡 등 많은 유산을 남겼다.
그의 음악은 자연스러우며, 베토벤과 같이 무겁거나 격하고 장중하지 않다. 그 교묘한 멜로디의 구사 방법은 모짜르트에 비할 만하며 조국의 향토색을 반영한 [렌틀러 Landler]에서는 무곡풍의 밝은 면을 보여 준다.
기악곡에 있어서는 성악곡과 같은 맛을 볼 수 있는데, 질서 정연한 형식미보다는 자유로움을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생채적인 화성 기법은 낭만주의 음악에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슈만, 브람스, 볼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도 슈베르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슈베르트의 생애

 

요제프 하이든, 모짜르트에 이어서 빈 고전악파의 세 번째 거장으로 마지막 거장이다. 당시의 성곽 밖이었던 〈천국의 문 Himmelpfortgrund〉 지역, 현재의 빈 9구 누스돌 파슈트라세 54번지의 〈붉은 가재〉라는 간판이 걸린 집에서 태어났다. 슈베르트의 아버지 프란츠 테오도르 Franz Theodor(1763~1830)는 1780년경 형을 따라 고향 모라비아의 노이돌프를 떠나 빈에서 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그리고 어머니 엘리자베스 피츠 Elisabeth Vietz는 뉼레지엔 출신즉 폴란드 출신이었다. 프란츠 슈베르트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전형적인 비독일 출신의 빈 사람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출신의 다양성이 그의 예술적 다양성과 변덕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1797년 1월 31일에 태어나 다음날 리히텐타르교구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프란츠는 12번째 아들이었다. 그러나 3명밖에 남지 않은 형제들 가운데 가장 연장자이며 아버지의 조수였던 이그나츠 Ignaz(1785~1844)가 어린 프란츠의 기초교육과 특히 음악교육을 도왔다. 아버지와 이그나츠는 어린 프란츠의 뛰어난 재능을 발견하였고 음악에 관하여 이미 가르칠 것이 없음을 깨달아, 프란츠를 8세 때부터 교구교회의 오르간 주자 미하엘 홀저 Michaël Holzer에게 맡겼다. 홀저는 먼저 프란츠에게 즉흥과 전개 등의 기초를 가르쳤다. 1808년 두 공석이 생겼기 때문에 프란츠는 소년합창대원을 양성하고 대학입학을 준비하는 학교인 슈타트콘빅트(수도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프란츠는 음성의 자질과 음악에 대한 놀랄 만한 진전을 보였지만 일반 교육과목은 그다지 공부를 하지 않았으며 특히 기숙사생활을 괴로워했기 때문에 이것이 성격적 일면인 독립심을 격화시켰다. 한편 이 공동생활에서 그는 자신에게 필요한 이익을 얻었고, 그것은 프란츠가 어른이 된 뒤에 확고한 지주가 되었으며 장래의 〈슈베르티아데 Schubertiades〉의 파트너가 되는 많은 학우들과 연결되는 끈이 되었다.


신학교에서 자유로

 

학우들 가운데에서 가장 연장자였던 미래의 법률가 요제프 폰 스파운 Josef von Spaun은 프란츠 초기의 작곡습작의 특권적 증인이었다. 그는 또 프란츠가 이미 숨어서 다량으로 사용한 오선지를 그에게 제공했다(왜냐하면 프란츠의 아버지는 그가 음악가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최초의 작품은 13세 때의 것인데, 그 이전에 프란츠가 남에게 주거나 또는 파기한 다른 수많은 작품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신학교시대의 작품은 환상곡 G조 D. 1에서 시작하여 교향곡 제1번 D. 82까지의 약 100곡에 이르며, 그 가운데에는 2곡의 4손을 위한 환상곡, 10곡의 현악4중주곡(아버지의 집에서 연주했다), 몇 곡의 트리오, 1곡의 관악8중주곡, 몇 곡의 서곡, 수많은 무곡, 오페라의 단편(거울의 기사), 몇 곡의 교회음악이 있고 리트는 상대적으로 매우 적었다(최초의 리트는 하가르의 슬픔 Hagars Klage D. 5). 슈베르트는 점차 고전시인들뿐만 아니라 같은 시대의 시인들도 발견하게 된다. 그 중에는 나폴레옹에 대한 해방전쟁을 노래하고 1813년에 전장에서 죽게 되는 젊은 테오도르 쾨르너 Theodor Körner도 포함된다. 작곡가로서의 이론적 형성에 대하여 말한다면 슈베르트는 살리에리의 밑에서 그것을 완성했다. 살리에리는 젊은 슈베르트에게 자신의 예술적인 기초에 대한 지식을 전수했으나 가장 진보된 동시대 음악의 문을 열어주지는 못했다. 슈베르트는 16세 때 변성기로 인해 콘빅트를 떠나게 된다(1813. 11). 그는 베토벤을 색다른, 그리고 성스러움과 익살을 혼동하는 사람으로 보았다. 그 반면, 그는 모짜르트를 숭배하였고 또 스파운의 덕택으로 글룩의 희곡을 알게 된다.

장학금을 포기한 슈베르트는 다음해에 겨우 잔크트 안나학교에서 교원자격을 얻어 1813년 가을에 아버지의 학교에 아버지의 조수로 들어갔다. 그는 거기서 어머니가 없는(1812년 사망) 슬픔을 맛보게 된다. 새어머니 안나 클라이엔뷔크 Anna Kleyenböck는 다른 5명의 형제들을 낳게 된다. 교구교회의 젊은 합창대원 테레제 글로프에 대한 정열에 불탄 슈베르트는 그녀를 위한 광대한 미사곡 F장조 D. 105를 작곡하였고 직접 그 곡을 지휘했다. 이 곡에서는 이후의 미사곡에서 똑같이 볼 수 있는 유명한 1절 〈마타유일의 성공, 사도전래의 교회를 Et unam sanctam, catholicam et apostolicam Ecclesiam〉의 고의적인 삭제가 있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 미사곡은 살리에리의 중개로 수주일후에 성 아우구스티누스 궁정교회에서 재공연되었다. 17세의 젊은 슈베르트는 오페라 악마의 별장 D. 843막의 야심작를 완성했고, 피델리오의 결정판의 초연에 미학적 충격을 받고 베토벤의 위대함을 인정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수도의 음악생활을 무난히 해냈다. 가정에서 연주하기 위하여 작곡한 새로운 현악4중주곡 이외에 1814년 10월 19일 후에 독일 리트의 출생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실잣는 그레첸을 작곡하였고, 이 작품에 이어서 1815년 모든 장르에 걸친 많은 작품 중 마왕이라는 뛰어난 걸작이 태어나게 된다. 괴테가 지나치게 혁신적인 이 작품을 좋아하지 않았던 사실은 유명하다. 그러나 신학교 교우들의 서클과 노궁정의 오르간 주자 루치카 Ruzicka조차도 이 작품을 열광적으로 환영했고 이것을 인쇄하기 위하여 협력했다.

 

슈베르트는 4년 동안이나 학교의 교원에 머물렀다. 그러나 곧 자유에 대한 유혹때문에 아들로서의 순종과 테레제 글로프와 연애중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1819년에 약혼을 취소하게 된다. 1816년에 이 젊은 작곡가는 칸타타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 D. 451을 작곡하여 100플로린(그의 1년수입의 두 배에 해당)을 받았다. 이 작품은 주제자체가 도발적이고 악보는 없어졌지만 당시에는 비공개로 연주했다. 이때부터 슈베르트는 정기적으로 의뢰받는 다량의 작품들을 완성시켰으며, 1817년 이후에는 학교를 그만두기로 작정하여 그 첫단계로서 아버지의 집을 나와 친구 쇼버 Franz von Schober의 집에서 살았다. 교원을 그만두는 데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1818년 봄, 슈베르트는 요한 칼 에스터하지백작의 요청으로 백작과 동행해서 영양 카롤린느와 마리의 음악교사로서 헝가리의 제리츠(현재의 제리에조프체, 슬로바키아)에 있는 백작의 여름별장으로 갔다. 그는 7월 초에 비엔나를 떠나 그곳에 11월 중순까지만 머물렀으나 다시 교원에 복귀하지 않았다. 그는 우선 1년 동안의 휴가를 청원했는데, 이것이 결정적으로 교원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슈베르트는 작곡(얼마간의 수업)만으로 생계를 도모하는 최초의 위대한 작곡가가 되었다. 모짜르트와 베토벤도 그보다 늦게 그런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들은 또한 연주자로서도 활약했다.

 

다작에서 활동정지로

 

슈베르트에게 놓인 상황은 당장에, 그리고 어떻게 보면 생애의 남은 나날을 통해 가장 불안정한 것이었다. 그때의 그에 대해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이 무일푼의 젊은 예술가는 1년에 몇 차례나 거처를 바꾸어야 했고, 어떤 때에는 형 페르디난트 Ferdinand의 집에, 또 어떤 때에는 아버지의 집에서도(두 차례에 걸쳐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여러 달 동안 살았다) 지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학우들의 집에서 거처를 구했고 종종 그들 중 한 사람 또는 두 사람과 한 방을 사용했다. 피아노도 구할 수가 없었고, 피아노를 위한 소품과 무곡, 기회음악적 성악앙상블, 그리고 먹기 위해 필요한 작품은 말할 것도 없이 매일 규칙적으로 리트를 여러 곡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훨씬 더 복잡했다.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슈베르트의 이름은 빈에서 또 점차 외국에서 확고한 위치를 잡아갔다. 1816년 그는 당시의 〈스타〉의 한 사람인 가수 미하엘 포글 Michal Vogl을 소개받았다. 포글은 곧 슈베르트의 가곡작품에 흥미를 갖게 된다. 〈새로운 활력〉을 되찾는 생각치도 못했던 기회였다. 어쨌든 포글은 오스트리아의 모든 무대에서 슈베르트의 가곡을 전파하였고, 슈베르트와 함께 장기적인 연주여행을 했으며, 대부분의 경우에는 슈베르트가 피아노를 연주했다. 피아노 연주 덕분으로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슈베르트는 독주자로서도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연주는 적어도 동시대인들에 의하여 그의 작품만큼이나 평가를 받았다. 또 피아노곡의 작곡에 7곡의 소나타를 작곡한 1817년이 가장 다산의 해였다고 특기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이 7곡의 소나타 가운데 3곡은 단편에 머물렀다. 이와 같은 시기에 롯시니 오페라의 대성공과 함께 이탈리아 음악의 유행이 빈을 엄습했다(10년 후, 파가니니와 함께 다시 같은 현상이 되풀이된다). 이탈리아의 대부분은 제국의 영토였고 그래서 이탈리아의 예술가들은 그들에게 적합한 빈에 있게 되었다. 슈베르트도 이 영향을 면하지 못했고 교향곡 제6번 D. 589의 매우 특수한 양식은 비슷한 두 곡의 서곡 D. 590과 D. 591과 마찬가지로 이 영향에서 유래한다. 이 두 곡의 서곡 중 하나가 틀림없이 1818년 5월 17일에 대중 앞에서 연주된 슈베르트 최초의 오케스트라작품일 것이다(그 이전까지 그의 교향곡은 신학교의 밤의 음악회에서만 연주되었었다. 교향곡 제5번 D. 485만은 자발적으로 단순화된 기악편성으로 도시에서 연주했으나 사적인 것이었다). 전해 겨울에 슈베르트는 또한 자신의 작품들 중 하나가 처음으로 인쇄되는 것을 경험했다. 이 작품이 리트 에어라프호 Erlafsee D. 586이고, 가사는 요한 마이야호퍼 Johann Mayrhofer의 시집의 유작으로서 빈 연감에 게제된 것이었다. 슈베르트는 연대순으로 말한다면 이때에 이미 600번째의 작곡을 했다.

그리고 이런 경험들을 앞에 놓고 불가피한 급변의 충격이 갑자기 엄습해온다. 1818년 한해 동안 슈베르트는 에스터하지백작의 젊은 딸들에게 레슨을 하기 위하여 몇 곡의 작품을 만들었을 뿐이다. 그 가운데에는 분명히 베토벤에게 헌정된 변주곡 D. 62와 주목할 만한 피아노 연탄곡소나타 D. 617이 있었다. 그러나 1822년까지의 수년간은 모든 장르에서 수많은 시도가 완성되지 못한 채 계속되었다. 교향곡(그 가운데의 1818년, 1820년21년, 1821년, 1822년의 네 곡은 미완성), 오페라 또는 징슈필, 4중주곡(1820년의 유명한현악4중주곡 D. 703은 제2악장이 단편이다), 리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1819년에 착수한 미사곡 제5번 A♭조 D. 678에 대하여 말한다면 이 작품은 미사곡 제1번이래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3년 후에야 겨우 완성했다. 또 슈베르트가 기획한 단 한편의 오라토리오 라자로의 소생 D. 689(1820)도 잊을 수 없다. 이 오라토리오는 제1부와 제2부의 서두밖에는 남아 있지 않다(그러나 그 계속이 없다는 증거는 없다). 이와 같이 〈활동이 정지한〉 원인은 단순히 이전부터의 과로와 보헤미안적 생활 속에 있을 뿐만이 아니라 더욱이 스쳐간 사랑에 의해서 생긴(제리츠에서? 또는 빈에서?) 매독의 초기증상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슈베르트를 움직였던 진보에 대한 강력한 요구에서, 아니 거기에서만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특히 이때부터 보다 넓고 이름없는 청중들에게 눈을 돌렸고 그 청중들로부터 보답을 기대했으며, 그 청중에게 뿌리를 박고 그 뿌리를 확고한 것으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혁신적 예술가로서의 야망과 이 청중들이 기뻐서 맞이하는 것 사이의 괴리가 그의 눈에도 분명하게 보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이 괴리가 그에게는 극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슈베르트는 그의 작품전체를 상호보완하는 두 개의 작품군으로 분리시키는 경향을 강화함으로써 이 괴리를 천천히 해결했다. 두 개의 작품군의 한쪽은 5중주곡 "숭어" D. 667 또는 8중주곡 F장조 D. 803(1824)이 곡은 베토벤의 7중주곡의 형식을 모방했다고는 하지만 극도로 독창적인 면에는 변함이 없는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등 슈베르트가 청중에게 바친(때로는 위로받은) 친숙하기 쉬운 작품군이다. 다른 한 군은 진보적인 형식과 표현의 내적 필연에 의해 많은 조응(照應)하는 음악으로, 후기 현악4중주곡특히 d단조의 현악4중주곡죽음과 처녀 D. 810(1824)와 현악4중주곡 G장조 D. 887(1826)과 후기의 교향곡, 대피아노 소나타 광대한 연작가곡, 특히 겨울 나그네 D. 911(1827) 등 속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성악(극작품)곡의 탐구

 

병이 그에게 최초의 타격을 준 1823년, 슈베르트는 긴 병원생활을 했고 고통스러운 치료를 받았기 때문에 머리카락이 많이 빠졌으며 점차 심해지는 두통은 결코 고쳐지지 않았다. 짖궂게도 대중의 지지를 확인해주는 표시인 최초의 영예가 그에게 찾아왔다. 예술가이자 문예애호가인 프뢸리히 Fro..hlich 자매가 슈베르트를 악우협회(창립 1813)에 소개한 것이다. 1825년 그는 협회의 보결회원이 되었고 2년 후에는 정회원이 되었다. 그리고 말년에는 슈베르트의 이름이 연주회의 프로그램에 롯시니에 이어서 두 번째의 빈도로 나타나게 된다. 그의 뒤에는 모짜르트, 그리고 베토벤의 순이었다. 1823년 봄에 슈틸리 음악협회의 회원으로 뽑힌 그는 감사의 정표로서 요제프 휘텐브렌너 Josef Httenbrenner의 중개를 통하여 교향곡 b단조의 처음 2악장을 보냈으며 스케르쪼의 미완성 제2페이지는 자신이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그의 성공에는 결정적인 요소가 아직 빠져 있었다. 그것은 가장 광범위한 대중의 평가를 그에게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었던 극작품에서의 성공으로 몇 해 전부터 그는 이것을 추구해왔으나 그때까지 얻지 못했던 것이다. 마지막의 가장 장대한 모험인 피엘라블라스 D. 796를 작곡한 해인 1823년까지 작곡한 112편이나 되는 오페라 또는 징슈필 가운데에서 쌍둥이형제 D. 647만이 1820년 6월 케른트나틀극장에서 6회 공연되었을 뿐이었다. 다음해 여름에는 장르를 혼합한 스텍터클 마법의 수금을 초연하게 되며 이 작품으로 인해서 슈베르트가 작곡한 음악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감탄할 만한 것으로 판단되었고 다른 사람들로부터는 시끄러울 뿐이라는 평을 들었다. 이 작품이 현재의 〈극장용 작품〉이라고 불리는 것의 원형이며 동시에 모짜르트의 거의 동명작품에 이어지는 통과의례적(通過儀禮的) 작품이다. 이 아름다운 서곡(D. 644)은 후에 슈베르트에 의해서 로자문데의 서곡으로 다시 사용되었고 1827년에 이 제목으로 출판된다.

1821년부터 1822년에 걸친 가을과 겨울동안은 후에 베버에게 성공을 가져다 주는 대본과 비슷한 수준인 쇼베의 대본을 토대로 한 알폰소와 에스트렐라를 작곡하는 데 소비하게 된다. 슈베르트는 또 같은 시기에 빈에서 본 마탄의 사수에 진심으로 경탄한다. 그러나 오일리안테에 대해서는 그다지 평가하지 않았고 작곡자 베버와는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다. 알폰소와 에스트렐라는 1854년 바이마르에서 리스트의 제의로 겨우 무대에 올려졌다. 리스트는 슈베르트 사후의 명성을 위해서 많은 공헌을 했다(리스트의 환상곡 "방랑자"의 오케스트레이션은 슈베르트가 실제로는 작곡하지 않았던 피아노협주곡판이라고 볼 수 있다). 알폰소 D. 732의 서곡은 종종 로자문데의 서곡으로도 사용되었고 1823년 12월 헬미나 폰 셰지 Helmina von Chézy의 이 희곡이 처음으로 몇 차례 공연되었을 때 이 서곡도 동시에 연주되었던 것 같다. 멋진 경음악 로자문데, 키프로스의 여왕(D. 797, 6곡의 오케스트라곡과 4곡의 성악곡으로 이루어진다)의 나머지 부분은 슈베르트가 지나치게 단시일내에 작곡했기 때문에 교향곡 제8번의 피날레에 사용하려고 준비했던 것을 똑같이 유용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소재는 로자문데의 b단조의 간주곡 제1번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의 실패는 슈베르트의 무대작품에 대한 조종을 울렸다. 죽기 1년 전에 슈베르트는 친구인 에두아르트 폰 바우에른펠트 Eduard von Bauernfeld가 그를 위해서 쓴 오페라대본 글라이헨백작에 대해서 다시 의욕을 보였다. 그는 초고의 형태이긴 하지만 이 작품의 대부분을 작곡하였고 죽을 때까지 그 생각에 골몰했었다. 이 작품은 틀림없이 천재적인 대담성을 가진 부분을 포함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작품이 출판되지 못했으므로(악보의 판독이 곤란하기 때문에 출판하지 못했다) 그것을 판단할 수는 없다.


대교향곡의 길

 

1824년 3월 14일 단조의 현악4중주곡(이 느린 악장은 로자문데의 아름다운 주제의 변주이다)이 슈판치히 현악4중주단의 연주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 달 말에 슈베르트는 레오폴트 쿠펠비저 Leopold Kupelwieser에게 보낸 유명한 편지에서 대교향곡의 길을 자신을 위해서 개척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기악곡을 작곡하지 않겠다고 표명했다. 이것은 슈베르트가 꿈꾸고 교향곡의 역사에는 결정적인 혁신을 가져오게 되는 이상적 형식에 도달시키려는 그의 집요함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중대한 발언이다. 봄이 되자 그는 다시 젤리츠에 초청되었고 5월 말에 교향곡을 작곡할 의도(모리츠 폰 슈빈트 Moritz von Schwind)를 가지고 헝가리로 떠났다. 10월 중반에 젤리츠에서 가지고 돌아온 작품에는 교향곡이 없었으나 그의 사후 대2중주곡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피아노연탄소나타 D. 812 속에서 이 계획의 구체화를 볼 수 있다는 데에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이 작품은 여러 명의 작곡가들에 의해서 기악곡으로 편곡되었으나 1855년 요제프 요아힘의 편곡이 대표적이다). 건강을 해친 슈베르트는 이때부터 자신의 생명이 길지 않겠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의 천재성은 그를 괴롭히는 형이상학적 고뇌를 초월하여 이것을 변모시킨다. 왜냐하면 그는 주관적인 신앙에서는 충분한 확신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슈베르트는 카롤리네 에스터하지에게 애정을 느끼기 시작하지만 병의 악화와 신분의 차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랑을 이루려고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상사상애(相思相愛)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영애는 이 음악가의 사후 오랫동안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슈베르트는 특히 1825년의 여름을 상당히 행복하게 보냈다. 이 해 여름 그는 포글과 함께 온천지 그문덴과 바트가스타인 등 두 곳에 체류하는 동안 오스트리아와 티롤지방으로 연주여행을 했다. 이 여행 중에 그의 대교향곡 C장조의 계획이 세워져 그 곡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이듬해에 완성되었고 슈베르트는 1826년 10월에 이 곡을 빈악우협회에 제출했다. 악우협회가 이 작품을 의뢰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작품의 원고가 제출되었다는 사실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고 〈장학금〉이라는 명목으로 작곡자에게 100플로린의 수수료가 건네졌다는 사실만이 기록되어 있다. 이 사실은 조지 글로브경의 잘못된 생각에 기인한다. 글로브경은 행방불명된 교향곡이 있다고 믿고 또 그것을 사람들에게 충분히 인정시켰기 때문에 당연하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그 작품을 1세기 동안 공연히 찾기만 했던 것이다. 영국인 존 리드 John Read가 실증적인 사실들을 회복시킨(1972) 후에 필적의 과학적 분석(빈터 R. Winter)과 1827년 초에 자료를 준비한 사보자들의 청구서의 발견등이 있었고 그의 주장은 하나씩 증명되었다. 그의 논문이 확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필 날짜(1828년 3월)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이 날짜는 잘못 읽었거나 혹은 이 날짜에 예정된 출판계획(물론 실현되지 못했다)에서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1839년 로베르트 슈만은 페르디난트 슈베르트가 소유한 이 작품의 복사본을 발견하였고 라이프찌히에서 펠릭스 멘델스존에게 이 작품을 초연시켰다. 이 작품의 신선함은 1세기가 지났어도 대중들의 음악의식 속에 특히 게르만세계 이외에서는 결정적으로 정착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현재에 와서야 겨우 이 신선함이 인정받게 되었다고 생각되며, 〈천국적인 길이〉(단수형이다!)라고 한 슈만의 표현은 여전히 오해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상과 같은 결론을 다시 문제로 삼지 않더라도 최근에 그 존재가 보고된 해리 골드슈미트 Harry Godschmidt(동베를린)의 E장조의 교향곡(제2번이라고 한다)도 182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 슈베르트의 초고를 원형으로 한 것이 아니냐는 가설이 배제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슈베르트는 그문덴에서 이 교향곡을 완성하려고 하였으나 장조의 교향곡을 위하여 이 곡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을까? 현재 완성된 이 작품(19세기 말에 무명의 작곡자에 의하여 보완했다고 추정된다. 1982년 초연)은 특히 방랑자와 8중주곡에서 인용한 것을 포함하여 이상할 정도로 많이 슈베르트의 작품에서 인용하였고 더욱이 스케르쪼가 두 번째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만일 이 배치가 진정한 슈베르트의 것이라고 한다면(조성관계는 그것을 증명하는 경향에 있는 것 같다) 이것이 그에게는 유일한 예외가 될 것이다. 이 우연한 초고에는 아무런 자필흔적도 없다. 그러나 골드슈미트가 그문덴을 향해서 출발하기 직전에 빈에서 슈베르트는 다녔던 교령술(交靈術)의 회합에도 언급하였고 그곳에서 방랑자의 테마가 환기되었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걸작의 연속

 

마찬가지로 1825년부터 1826년에 걸쳐서 피아노 소나타의 훌륭한 곡들이 탄생한다(1825년의 유작이라고 하는 미완성 소나타와 1826년의 피아노소나타 G장조 D. 894를 포함하는 3곡). 그리고 1827년에는 2곡의 유명한 즉흥곡집 D. 899와 D. 935가 이어지며 두 번째의 즉흥곡집은 곧 소나타의 형태를 취했다. 트레몰로의 〈전 브루크너〉적 사용에 의해서 미증유의 음향을 한 마지막의 가장 아름다운 현악4중주곡 G장조 D. 887이 1826년 6월의 몇 일 사이에 태어났다. 이 작품들 중에서 작곡자의 생존중에 연주된 곡은 단 하나뿐이었는데, 그것은 슈베르트의 작품을 모은 유일한 유명한 연주회(베토벤의 1주기를 기념하기 위해서 1828년 3월 26일에 개최되었다)의 서두에서 연주된 곡이다. 이 연주회의 프로그램에는 여러 곡의 리트와 합창곡 외에 그 직전에 완성하고 초연한 또 하나의 대작 피아노3중주곡 E♭장조 D. 929가 포함되어 있었다 (자매곡 피아노3중주곡 E♭장조 D. 897에 대하여 말한다면 이 작품은 오랫동안 1828년의 작품이라고 추정했었으나 존 리드가 밝힌 바와 같이 1825년 또는 1826년으로 추정된다). 슈베르트는 자신의 31세를 자축했고 이미 생명이 몇 개월밖에 남지 않았지만 1000번째의 작곡에 손을 댔다. 그러니 이때까지 축적된 걸작도 이 말년이 가져온 언어의 가장 강한 뜻으로 〈사람들이 아직 들어보지 못한〉 것 모두에는 여전히 뒤지게 되는 것이었다. 겨울 나그네의 제2부에 의해서 그 특징이 성취된 이 주요 작품들의 처음은 피아노 듀오에 관계되는 그룹으로서 환상곡 f단조(D. 940, 카롤리네 에스터하지에게 헌정했다. 그러나 나의 전작품이 그녀에게 헌정되지나 않았을까?라고 이 불행한 작곡가는 말했을 것이다)와 알레그로 인생의 폭풍우(D. 947, 제목은 진위가 의심스럽다), 그리고 론도 A장조 D. 951로 이루어진다. 이어서 6월과 7월에는 최후의 미사곡 제6번 E♭장조 D. 950이 쓰여진다. 이 미사곡은 가장 관대하고 크레도를 종결시키는 푸가를 포함하는 대위법적 서법이 일종의 복잡성에 도달하고 있어서 이것을 초월할 수 있는 사람은 브루크너뿐일 것이다. 이어서 늦여름에는(이 시기에는 슈베르트는 언제나와 같이 직접 연주회에서 얻은 수입을 낭비해 버렸기 때문에 오스트리아행을 단념해야만 했다) 피아노 솔로곡, 즉 최후의 가장 모험적인 3곡의 피아노 소나타단조(D. 958), A장조(D. 959, 완서악장을 중심에서 흔드는 무서운 폭발을 가진), 그리고B♭장조(D. 960, 대조적으로 가장 서정적이고 유일하게 유명한)를 작곡했다. 같은 시기에 백조의 노래에 들어가는 하이네의 시에 의한 리트와 이어서 2개의 첼로를 포함한 현악5중주곡 C장조 D. 956도 완성했다. 후자는 슈베르트 실내악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이고 최초의 악장이 트리오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또 교향곡에 대한 최후의 회귀가 교향곡 D장조의 매우 앞선 단계의 초고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것은 교향곡 제10번이 되는 것으로 그것을 포함하는 초고 전체의 존재는 이미 알려진 것이지만 1세기반이나 이 초고에 그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했었다.


마지막 반문과 죽음

 

이 작품들에 의해서 제기된 서법에 관한 문제는 작곡가에게 자기의 예술적 기초로 되돌아가서 자신의 테크닉의 형성을 다시 반문할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새로운 점에 있어서 다른 누구도 도달하지 못했을 만큼 높이 도달했던 슈베르트가 당시에 이미 명성을 얻고 있었던 대위법의 교수 지몬 제히터(1788~1867)의 문을 머리를 숙여 두드렸다. 제히터는 보헤미아 태생으로 30년 후에 브루크너의 스승이 된다. 슈베르트는 처음 레슨을 받기 전에 죽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사실 그는 레슨을 한차례 받았고 집에서 하는 연습문제를 받았었다(교향곡 제10번 안단테의 초고에 그 흔적이 있다). 그래서 슈베르트의 작품목록의 마지막은 대위법의 연습이라고 할 수 있다. 1828년 11월 초 갑자기 그의 병이 악화되었다. 당시에 형의 집에 있었던 슈베르트는 음식을 전혀 먹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들 티푸스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마지막날까지 열이 없었기 때문에 디터 케르너 Dieter Kerner 박사는 대음악가들의 병력에 대한 최근의 연구에서 말기에 이른 매독이 슈베르트의 사인이었고 뇌막이 상했다는 사실을 보여준 시체의 해부가 이것을 확인해 준다고 결론을 내렸다. 조금만 더 있었으면 후고 볼프와 니체처럼 마비와 광기를 일으킬 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프란츠 그릴파르처 Franz Grillparzer가 그의 묘에 쓴 〈큰 희망〉을 구체화하는 것이 언제일까 라고 상상하는 것은 덧없는 일일 것이다. 1828년 11월 19일, 슈베르트는 잠시 자신이 베토벤이라 착각하고 이 세상에 자신을 위한 장소가 아직 있는 지 몇차례 묻는 착란을 일으킨 지 하루만에 세상을 떠났다. 1888년 베링묘지에 우선 매장된 그의 시신은 큰형과 함께 빈 중앙묘지, 일명 〈예술가의 판테온〉으로 옮겨졌다.


작품과 운명

 

이상과 같이 개관해 보면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슈베르트가 동시대인들에 알려지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불행하고 불운한 예술가라는 이미지는 로망주의 작곡가들에게 늘 따라 다녔던 것으로 사람들은 진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진실이란, 말년의 슈베르트는 빈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예술가였고 사정을 알고 있는 예술애호가는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명성은 결코 그의 본질적인 작품 위에 쌓아올린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지금도 그랬다는 사실을 안타깝게 인정해야만 한다. 리스트가 이점에 관해서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즉 생전에 출판된 작품은 100곡 정도 밖에 되지 못했고(전작품의 10분의 1) 분명한 걸작도 그 속에 있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이 마이너한 장르에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1828년 2월에 슈베르트가 2인의 독일출판업자 프로브로스트 Probst와 쇼트 Schott 등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최신작품들〉에 대한 선택을 의탁했을 때 그는 우선적으로 실내악 또는 합창곡만을 제출했으며(가장 대담한 작품들과 현악4중주곡이 그들의 선택에서 빠졌다),예술의 가장 고도의 여러 형태를 추구하는 나의 야망을 귀하에게 알리기 위하여(중략) 보유(補遺)에 지정하는 것은 오페라3곡, 미사곡1곡, 교향곡1곡(대교향곡)뿐이었다. 저작권에 대한 법률이 당시에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슈베르트가 그의 수입을 옳게 관리할 줄 알았더라면 그의 수입은 생활을 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당연히 받을 만한 것을 요구하지 못했을(그는 여러 번 헐값으로 작품을 넘겨 주었다) 뿐만 아니라 씀씀이가 해퍼서 필요한 것을 자신을 위해서 모아 두지 못했고 전설이 된 끊임없는 야회의 사이사이에 친구들을 대접하기에 바빴다.

슈베르트의 영예는 처음에는 가곡에 뿌리박고 있었다(프랑스는 그의 가곡을 가수 아돌프 누리의 덕분으로 1830년 이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가곡작품들 가운데 한줌에 불과했고, 그의 가곡이 현대에 와서 말할 수 없는 보화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교향곡 b단조의 재발견과 전격적 성공만이 오해 속에 있기는 했지만 오케스트라 영역에 그의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초기의 교향곡은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비로소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동시기에는 슈베르트 초기의 전집판(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 라이프찌히)이 출판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악의 영역에서는 그의 이름이 다시 오랫동안 극히 한정된 곡(2곡의 현악4중주곡, 1곡의 3중주곡, 5중주곡 숭어, 대소나타 이외의 인기가 있었던 피아노곡 수곡) 밖에는 프로그램에 실리지 못했다. 이렇게 한정된 곡은 슈베르트의 작품의 중요성을 현실적으로 전혀 상상시키지 않았으며, 더욱이 그의 양식상 변천의 풍요성과 연속성 등을 전혀 상상할 수 없게 했다(한 사람뿐만 아니라 몇 사람의 전기작가가 그의 이런 변천을 부정한 것이 아니었는데에도 그러했다). 보다 총괄적이고 정확한 이해가 시작되기 위해서, 그리고 1978년의 기념 행사와 신슈베르트전집 Neue SchubertAusgabe(1965년부터 간행, 베렌라타, 카셀)의 준비덕분으로, 슈베르트의 음악사가 일찍이 없었던 활기를 얻기 위해서 근년의 〈백과전서적〉 녹음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이 부활은 몇 가지 야심적인 전공논문(브리지트 마산)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기존관념을 본질적인 반성으로 인도하는 여러 가지의 재발견과 복원 또는 문헌학적 연구에 의해서 이미 나타났다.

 

진정한 위대성

 

이상에서 슈베르트를 위대한 음악가들 가운데에서 같은 연령으로 비교한다면(이것은 바른 평가를 내릴 때 필요한 공준(公準)이다), 그는 확실히 가장 창작력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가장 혁신적인 음악가이다. 베토벤의 에피고넨, 즉 사람들이 그렇게 여기고 싶었던 베토벤의 〈여성적〉 분신이 아니라 슈베르트는 사실은 리트에서뿐만 아니라 중요한 어느 장르에서도 필적하는 존재가 없을 정도이다. 겨우 무대작품 또는 그가 거의 흥미를 보이지 않았던 협주곡에서만 남에게 뒤질 뿐이다(더욱이 그의 극에 대한 센스는 지나치게 낮게 평가되고 있다). 슈베르트는 명인기에 대한 선호와 경합성에 대한 선호도 없었고 오히려 파트너 사이의 상보성(相補性)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의 음악은 독주자를 참여시킬 때에도 감정이 풍부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그의 성공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소나타, 현악4중주곡, 심포니, 교회음악은 그로 하여금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무수한 본질적인 기여를 하게 했다. 어떤 때에는 〈혁명가〉라는 소리를 들었던 쇤베르크는 슈베르트와 비교한다면 한줌에 불과하다고 했다. 슈베르트의 완숙기의 모든 작품, 특히 마지막 2년의 작품은 이 계시에 가득한 아포리즘을 예시하였고 입증했다.

개략적으로 말해서 슈베르트의 작품은 1818년부터 1822년 또는 다음 1823년까지의 수중에 의해서 분리된 지극히 이질적인 중용성과 의미를 가지는 3단계-1818년까지, 1818년부터 1823년, 1823년 이후로 구분된다. 제1기(1810~18)는 반성과 형식의 연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싱싱하고 매우 자발적인 열의를 지닌 대범한 작품의 시기이다(이 젊은 작곡가의 관심이 가족과 친구들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몇 곡의 소나타와 현악4중주곡은 특별히 구별되어 있다(그러나 악장의 분실과 편집자에 의한 자의적인 결합 등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어떤 작곡가에서도 볼 수 없는 영감에 찬 디스쿠르의 풍요성은 종종 이 모험적인 시작(試作) 속에 이미 제시부에 의해서(교향곡 제2번에서는 카덴짜가 당시에 아직 알려지지 않았던 자율성을 얻고 있다), 또 그 이상으로 조성설계에 의해서 강력하게 표현되고 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대비가 聖하지 않은 영역에서 단번에 작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문적 지식이 없는 청중들에게조차 쉽게 인정받을 수 있는 이 특징만이 슈베르트의 독특한 색채를 낳고 있다.


심리적인 현실적인 성숙

 

1818년과 1823년 사이에서 우리는 심리적이고 현실적인 성숙이라는 2중의 뜻을 가진 현상과 마주치게 된다. 이 현상은 완성에 이르지 못한 시도의 많은 축적으로 나타났다고 말해져 왔다. 그래서 이 단편들은 각 장르에게 의의가 큰 것이고 이 음악가의 가장 감동적이고 가장 풍부한 성취 가운데 몇 가지를 포함한다. 그것은 현악4중주곡 c단조에서 시작하며 몇 곡의 소나타와 다른 3곡의 교향곡을 거쳐서 교향곡 b단조에 이른다. 또 가장 훌륭한 미사 솔렘니스 A♭장조가 완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미로는 곤란한 창조에 의해서 특징지워지는 작품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생각했다. 이 작품들 가운데 몇 곡은 특히 스케치가 그 재현부만을 잃었을 경우 또는 작품의 마지막까지 한결같은 경우에 복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후자의 경우의 가장 현저한 예가 교향곡 제7번 E장조 D. 729(1821.8)이다.

슈베르트는 이 시기에 새로운 청중들을 향하는 동시에 보다 체계적인 표현과 형식연구에 전념했다. 그래서 이 회의의 시기는 고전주의 시대의 빈음악(짧고, 고전주의음악만을 말할 수도 있다)에서 낭만주의 시대로의 진정한 이행도 상징한다. 이 시기가 하나의 돌파구, 더욱이 가장 중요한 〈돌파구 Durchbruch〉를 이루고 있다. 그 돌파구를 2개의 작품이 보다 상세하게 밝혀준다. 그 하나는 미완의 교향곡 E장조이고 또 하나는 훨씬 잘 알려져 있으나 항상 바르게 이해된다고는 할 수 없는 방랑자 환상곡 D. 760(1822. 11)이다. 슈베르트 자신이 방랑자 환상곡을 그 심오한 본질에 반한 빛나는 측면을 위하여 혐오한다고는 했지만 이 작품은 슈베르트가 즐겨 사용하는 방황의 테마와 형식상의 창의를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내는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형식상의 창의라는 것도 이 작품이 연속된 4악장으로 이루어지는 순환형식 소나타와 리스트적이라는 술어가 생기기 전의 리스트적 형식의 소나타였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이 작품은 앞서 만든 성악작품에서 차용한 모티브를 변화시켰다. 이 수법은 원숙기의 작품속에서 가끔 보게 된다. 이 환상곡과 전혀 다른 형식(서로 비슷한 3악장)을 가지며 단일 사상으로 이루어진 마찬가지로 뜻깊은 예인 〈피아노 소나타 a단조〉 D. 784(1823. 2)를 결부시킬 수 있다. 이것이 〈큰 작품〉의 최초가 되는 것이다.

이 몇몇 작품들과 그 후의 작품들은 슈베르트가 근대의 가장 강력한 형식혁명의 문자 그대로의 창출자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여기에서는 세포를 구성요소로 하는 순환구조가 왕위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이 모델의 특징은 한편으로는 리듬의, 다른 한편으로는 멜로디하모니의 각 소수의 기본 구조를 함께 하여 전악장의 주제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하이든과 모짜르트, 그리고 베토벤에 의해서 개척된 것이며 슈베르트에게는(그리고 이것은 브루크너에 의해서 계승된다) 이 모델이 그의 후기 걸작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 이상으로 감탄할 만한 것은 슈베르트와 브루크너에서도 극소구조가 그가 만들어낸 여러 가닥의 광대한 멜로디곡선 사이의 균형을 결코 손상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브루크너의 미래의(같은 조성의) 교향곡의 주제와 마찬가지로 23소절 위를 아름답게 흐르는 교향곡 제7번의 주제만으로 그것을 판단해 보는 것이 좋겠다.


대교향곡

 

교향곡 제8번 b단조와 로자문데의 간주곡 제1번은 동일한 인스피레이션에서 생겼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이 두곡의 극소구조에 의해서이다. 그래서 이 교향곡의 오케스트레이션의 포기는 이른바 인스피레이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 작품은 외적인 상황을 따랐을 뿐만 아니라 슈베르트가 의식적으로 차용하고 비난받기가 두려웠던 것으로 생각되는 베토벤으로부터의 약간의 차용(본의 거장이 작곡한 교향곡 제2번과 교향곡 제5번의 요소를 들 수 있다)에 의해서만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추시드 M. Chusid). 슈베르트는 그것이 밝혀지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또는 다분히 곧 이 조건 밑에) 그라츠에 쓴 부분을 보내어 작품을 〈공동화〉시켰는지도 모를 일이다. 주지한 바와 같이 이 교향곡이 발견되었고 1865년에 요한 헤르베크 Johann Herbeck에 의해서 초연되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빈번하게 연주되는 이 교향곡은 걸작으로서의 질이 떨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작품은 자발적인 리듬과 엄격하고 일관된 형식완전판만이 그 진가를 인정할 수 있다과 결부되어 있다.

오케스트레이션을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대2중주곡 D. 812는 구조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악장과 배치에 의해서, 또 1838년 출판사에 슈만이 이미 지적한 서법의 오케스트라적 성격에 의해서 1824년의 교향곡 계획으로 역시 구체화되었다. 1824년 이후 모든 작품에서 그가 만든 기법을 완전히 손에 넣기 위하여 슈베르트는 소나타의 방법에 의해서, 또 2중주곡(피아노연탄, 또는 바이올린과 피아노), 3중주곡, 4중주곡, 8중주곡에 의해서, 그리고 점차 교향곡에 의해서 지극히 큰 시도를 잘 완성했다. 여기에서 교향곡에 우월한 위치를 부여한 것에 놀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교향곡만이 이 작곡가가 분명하게 표현하는 야심적 이미지의 자체이고, 반밖에는 결정적인 형태에 이르지 못했지만 그는 15년 동안에 14곡 또는 15곡의 교향곡(평균 1년에 1곡)을 시도했다. 1825년과 1826년에 태어나게 되는 근본적인 작품인 교향곡 제9번 C장조과 별칭 대교향곡은 그 위치에 의하여 슈베르트의 전생애를 표상하고 엄격한 형식에서 베토벤의 교향곡과 같을 만큼 중요한 제1보를 상징하고 있다(그러나 베토벤은 이 형식을 깨게 된다). 내적통일의 완전한 예(6개 정도의 기본 모티브가 이 교향곡을 구석구석 지배하고 있다)로서 이 교향곡은 현대 오케스트라서법 전체의 초석이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은 또 슈베르트의 악기 편성자로서의 재능을 절정에 오르게 했다. 그가 실제로는 지휘를 거의 하지 않았음도 에불구하고 천재적인 직관에 의하여 오케스트라를 매우 맑고 균질한 색채와, 표현의 감탄할 만한 평형을 유지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등명성과 균질성이라는 2중의 특성은 브루크너에게서만 재발견할 수 있다. 또 이 모든 미점 위에 작품이 나타내고 있는 것은 그의 재능의 극치이고, 이 작품은 고뇌 가운데에서 창작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환희의 기적인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2년간 드라마는 점차 참지 못하는 것이 되었고 처음으로 절망과 만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형식연구가 추구되고 서법적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방해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문제가 죽음을 앞선 수주일 사이의 슈베르트로 하여금 다시 대위법 공부를 하게 했다. 몇 가지 다른 방법에 의하여(하리 할프라이히) 동시기에 기획된 교향곡 제10번 D장조의 스케치(1828년 가을. D. 936 A)는 진보와 대담한 결의에 찬 새 경지를 개척했고 그래서 이 스케치의 신발견(일찍이 같은 노트 속에 섞여 있었던 1818년 1820년부터 1821년의 스케치와 함께 1978년 팩시밀리가 출판되었다)은 획기적인 사건이 되었다. 3개의 악장 가운데에서 가장 예고적인 악장은 압도적으로 가슴을 에는 듯한 b단조의 중요한 안단테이고, 슈베르트는 후기의 말러까지 예상하면서 마침내 자신의 무덤에 들어가게 된다.

 

슈베르트와 성악곡

 

슈베르트의 기악작품이라는 광대한 문집의 주위에서 망각, 무지 또는 몰이해의 안개가 걷혀짐에 따라 그의 성악곡은 우위를 약간 잃어가면서 현실에 보다 가깝다고 여기지는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되었다. 그것은 생명의 흐름과 유기체의 나머지 전체를 자양하는 피라는 뜻이다. 1824년 3월 25일 슈베르트는 많지 않은 일지 가운데 하나에 이렇게 기록했다(현재는 없어졌지만 바우에른펠트에 의해서 출판되었고 발터 담스 Walter Dahms와 이어서 오토 에리히 도이취에 의해서 인용되었다). 사람에게는 평생을 통해서 단 하나의 미가 수반되어야 하지만(중략) 이 경이의 빛이 다른 모든 것을 비추어 주어야 한다.

〈대교향곡에의 길〉을 말한 유명한 편지보다 8일 앞선 이 문장은 그의 작품의 〈나머지 부분을 비춘다〉라고 슈베르트의 리트 역할을 정확하게 정의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기악곡이 직접적으로 리트(일반적으로는 실내악곡)에서 착상을 얻었다. 이미 언급된 가장 잘 알려진 예 이외에 시든 꽃 Trockne Blumen(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에 포함되는 리트)을 기본으로 한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변주곡 D. 802를 잊어서는 안 된다. 또 인사를 보내자 D. 741에 의한 변주를 가진 슬라비크 J. Slavik의 위촉에 의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 C장조 D. 934도 기억해 두어야 한다. 피아노3중주곡 E장조 D. 929(슈만은 이 곡을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의 제2악장에 대해서 말한다면 이 악장도 어떤 가곡에서 착상을 얻었으며 그것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다른 작곡가 스웨덴인 이사크 보르 Isaak Borg의 가곡이다. 후에 말러가 같은 방법을 취하게 되며 슈베르트가 자신의 작곡을 보다 정밀한 방법으로 변화시키는 데 반하여 말러는 교향곡의 요청에 따라 관현악용으로 편곡했고 증폭은 했지만 자신의 가곡을 거의 원본대로 사용했다.


슈베르트 리트의 생성

 

600곡 이상의 독창가곡과 약 130곡 이상의 성악앙상블, 즉 3중곡 또는 4중곡에서 독창자를 포함하는 대합창 또는 포함하지 않는 대합창이것이 슈베르트의 평생의 창작활동기 전체를 커버하는 지극히 대규모적인 성악작품이다. 사람들은 자연발생적으로 창작했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완전히 옳다고 하기는 어렵다. 선행자로서는 중세와 르네상스의 몇 사람의 위대한 이름 발터 폰 데어 포게르바이데, 볼플람 폰 에센바흐와 특히 놀랄만한 오스발트 폰 보르켄슈타인 등의 이름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슈베르트가 그들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사실 슈베르트에게 있어서 음악사는 2, 3세대 전까지 밖에 올라가지 않았으며 아직 바흐조차도 몰랐었다). 대신 그는 그의 바로 위의 선배들, 유명한 사람으로는 하이든, 모짜르트, 베토벤, 베버 등, 그리고 그들에 비해서 무명이지만 전문적인 성악작곡가(리트 작곡자) 들체르타, 라이히알트 부녀(매우 재능있는 딸 루이제 라이히알트 Luise R.는 이미 〈전슈베르트적〉 음향을 발견했다), 요한 아브라함 피터 슐츠 Johann Abraham Petter Schulz, 춤스테크(낭만적 발라드의 아버지) 등의 작품들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슈베르트는 그 이전에는 결국 이의적인 또는 마이너스적인 것이었던그 가운데에는 절대적이지만 고립된 베토벤의 멀리 있는 연인에게 이외의 걸작을 찾아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그래도 이것은 슈베르트 최초의 성공보다 뒤의 작품이다)이 장르에 새로운 풍요와 명성, 그리고 무게를 부여했다. 청년기 초기의 몇 가지 시행착오였던 op. 1, 2실잣는 그레첸 D. 118과 마왕 D. 328에서 슈베르트가 새로운 동시에 완성된 형식을 창작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주목할 것이다. 리트의 영역에서 슈베르트가 이룬 혁명은 바그너가 오페라에서 완수한 것과 비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창작에서 명석하고 계산된 추론의 관여가 어느 정도였었나를 알 수는 없다라고 사망한 영국의 음악학자 포터 E. G. Porter는 썼다(슈베르트의 가곡의 테크닉 Schubert's Song Technique[1961]). 그의 리트를 평가하고 증인이 되었던 슈베르트의 친구이자 그의 작품의 주요 연주가였던 가수 미하엘 포글에 따르면 슈베르트의 리트는 〈음악적 투시의〉 상태에서 태어난 〈신의 계시〉였다. 계시와 투시, 분명히 그렇다. 그러나 지극히 다양한 장르를 낳게 된 끊임없는 창의와 노력이기도 하다. 형식면에서 말한다면 ABC형식, 또한 세어 본다면 지나치게 길어지는 많은 형식 또는 〈durchkomponiert〉(잭 샤이에의 번역에 따르면 〈연속되는 콤포지션〉)의 유절 리트와 수정된 유절 리트가 있고, 내용면에서 본다면 서정적 리트(대부분을 차지한다), 서사시적 리트다소 발라드의 시형을 가진다모놀로그, 성서 또는 고대를 전거한 것, 가정적인 정경을 그린 타블로가 있다. 그리고 이 작품들의 총체를 장식하는 두 개의 큰 연작가곡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 D. 795와 겨울 나그네 D. 911이 있고 마지막으로 백조의 노래 D. 957이 추가된다. 다음에 드는 후기의 두 큰 가곡은 지극히 독창적으로 피아노에 관현악을 추가했다. 흐름 위에서 D. 943에는 호른이 추가되어 그 넓은 강을 여행하는 유의전변(有義戰變)을 그렸다. 또 바위 위의 양치기 D. 965에는 클라리넷을 사용했다.


합창곡과 성악 앙상블

 

이 영역에서도 슈베르트의 작품은 동시대의 대부분의 작곡가들의 작품들보다 풍부했다. 음악적으로는 그의 작품이 뛰어난 다양성과 강력한 창의력에 의해서 이채를 띤다. 즉 이 분야에서도 슈베르트는 모든 실험이 허용된 전인미답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멀리 마드리갈과 결부하고 성악이라는 형태하에 교향시를 성취하는 새로운 형태를 아무런 속박없이 창조한다. 가장 주목받고 가장 빈번하게 듣게 되는 작품 가운데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인용하겠다. 괴테의 시에 곡을 붙인 남성합창을 위한 물위의 요정의 노래 D. 714, 테너와 합창을 위한 새벽 D. 892, 합창과 4개의 호른을 위한 숲의 밤노래 D. 913, 합창과 피아노를 위한 곤돌라의 뱃사공 D. 809, 그릴팔차의 시에 의한 알토와 합창, 피아노를 위한 세레나데 D. 902, 여성합창과 피아노를 위한 시편 제23편 D. 706, 같은 편성의 코로나흐 D. 836, 남성합창과 관악기를 위한 성령에 대한 찬가 Hymnus an den heiligen Geist D. 964, 그리고 마지막으로 슈베르트의 사망 직후 그의 의지를 받들어 프란츠 라흐너에 의하여 오케스트레이션으로 만들어진 그릴파르처의 시에 의한 소프라노 독창과 혼성합창, 피아노를 위한 미리암의 승리의 노래 D. 942.

이 합창곡 또는 성악 앙상블의 중요성은 단순히 음악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중요하다. 19세기 초기 게르만 민족의 국가들에서는 특히 스위스의 음악가 네겔리의 요청에 따라 다양한 사회계층을 음악에 참여시키려는 욕구에 부합하는 작은 합창그룹 〈리더타펠(노래의 식탁) Liedertafeln〉이 형성되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이 리더타펠은 경찰의 압제에 대항한 레지스탕스의 거점이기도 했다. 슈베르트의 도래까지는 가치있는 레퍼토리가 빠져있으나 그의 작품이 슈베르트 등장 직전에 설립된 빈악우협회에서도 그 중심적인 레퍼토리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 독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에서도 점차 수를 늘려 회원을 늘려나간(200명의 가수를 거느리게 되었다) 리더타펠의 집단은 종종(〈슈베르트분트(슈베르트연맹) Schubertbund〉)라고 불리게 되었다.


슈베르트와 시

 

순전히 본능적이고 교양도 적고 다소간의 비평의식도 없는 슈베르트라는 신화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70편 이상의 괴테의 시, 70편의 실러의 시(합창곡을 포함하여), 22편의 횔티 Lndwig Heinrich Christops Ho..lty의 시, 21편의 슐레겔의 시, 거기에 더하여 성서와 아이스클로스(마이어호퍼에 의해서 번역), 셰익스피어, 오시앙 Ossian에서 월터 스코트 Walter Scott, 프리드리히 노발리스 Friedrich Novalis, 뤼케르트 Fnedrici Johann Michael Rücker, 케르너, 그릴파르처 등과 젊은 하이네에 이르는 광대한 시의 파노라마, 그것에 의해서 그의 시대와 다른 몇 시대의 시의 지극히 완전한 명시선집이 형성된다. 다른 어느 음악가가 가령 〈교양이 있는〉 음악가라 하더라도 이만큼의 수확을 거두지는 못할 것이다.

몇 편의 무시할 수 없는 시를 쓴 슈베르트 자신은 별도로 하더라도 〈마이너〉 시인들의 문제는 남아 있다. 우선 요한 마이어호퍼(47편의 시)와 빌헬름 뮐러 Wilhelm Müller(45편의 시)를 들 수 있다. 마이어호퍼는 포터 E. G. Porter에 의해서 웅변적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포터는 이 시인들 가운데 수많은 낭만파 작가, 그것도 영국의 낭만파 작가와 비교할 수 있는 조성을 찾아냈다. 어쨌든 슈베르트는 그의 가장 아름다운 시적 주제를 마이어호퍼에게서 얻었다(지옥으로 떠나는 길 D. 526, 쌍둥이좌에 보내는 뱃사공의 노래 D. 360, 밤의 소품 D. 672 등). 뮐러의 경우는 조금 다른데 뮐러는 마이어호퍼만큼 학식이 깊었다(그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가르쳤다). 그러나 그의 시는 민중주의적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그러했다. 그의 두 권의 시집의 총괄적인 타이틀은 상처입은 호른 주자의 유고에서의 시 Gedichte aus den hinterlassenen Papieren eines Waldhornisten이다. 이 〈호른 주자〉는 자신의 작품을 수년 앞서서 유명한 어린이의 마술 뿔피리 Des Knaben Wunderhorn의 항적(航跡) 속에 위치시켰다. 감동적인 일화가 있다. 뮐러는 슈베르트를 알지 못했으나 그 존재를 예감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점차 나의 언어 속에 숨어 있는 멜로디를 듣고 그 멜로디를 나에게 복원해 줄 것이다. 나의 영혼과 일치하는 또다른 한 영혼이 있을 지 모르겠다(담스 W. Dahms의 저서 슈베르트 Schubert[1913]에서 인용).

그러나 그 〈운을 맞춘 끝〉이 슈베르트의 가장 순수한 걸작들 중 두 곡, 서정적이고 황홀한 밤과 꿈 D. 827과 놀랄 만한 소인 D. 771에 영감을 준 마테우스 폰 콜린 Matthäus von Collin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마찬가지로 라페 K. Lappe(석양에 D. 799)와 라이트너 K. G. Leitner(겨울의 저녁 때 D. 938) 등에 대해서도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항상 새롭게 변화하는 이 슈베르트의 연금술 앞에서는 다만 경탄할 뿐이다. 몇몇은 그의 친구들이고 나머지는 베니스의 점잖고 호감을 주는 라디슬라우스 피르커 Ladislaus Pyrker 같이 지위가 높은 사람들로서 비판의 여지가 있던 시인들(향수 D. 851과 전능의 신 D. 852)이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작품활동에 특히 필요하긴 했지만, 그들로부터 영감을 받기 전에 슈베르트는 이미 명석한 두뇌를 소요하고 있었다. 편집자 쇼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작품 가운데에서 특히 피아노 반주의 독주곡, 실러, 괴테, 클롭슈토크, 그밖에 하인리히 자이델 Heinrich Seidel, 쇼버, 라이트너, 슐체 E. Schulze 등의 시에 의했다고 열거하고 분명하게 〈참〉시인과 그밖의 시인을 구별했다.


연작가곡과 가곡집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 겨울 나그네, 그리고 하슬링거에 의해 백조의 노래 D. 957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사후 출판된 가곡집에, 수금주자와 미뇽의 두면을 가진 일련의 빌헬름마이스터리트(도이취 목록에 산재해 있는)를 추가시키는 것은 당연하다. 이 2부구성은 큰 연작가곡에서도, 또 가곡집 백조의 노래에서도 볼 수 있다.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는 사랑에 대한 기대, 희망, 그리고 충적된 기쁨 속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제14곡에서 잔혹하고 곧 승리를 얻게 되는 사냥꾼이 나타나자 전도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과연 이 연작가곡의 나머지 부분은 시에서보다 음악 속에서 더욱 강하게 느껴지는 질투, 슬픔, 실망 속에서 전개된다.

1827년에 작곡한 겨울 나그네(제1곡에서 제12곡까지는 이 시 가운데 당시에 출판된 일부를 2월에 음악화시킨 것이고 계속되는 12곡은 10월에 작곡되었다)에서는 이 2부구성을 파악하기는 곤란하다. 이 2부구성은 잭 샤이에가 깊은 통찰력을 가졌던 연구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Le Voyage d'hiver de Schubert에서 분명히 했다. 그 열쇠가 되는 부분을 여기에서 인용한다. (제2부에서) 사랑에 빠진 쫓기는 사나이라는 평범한 이야기 대신에 겨울 나그네는 제9곡 〈귀화(鬼火) Trrlicht〉가 예감한 것처럼 무덤을 향해서 걸어가는 사나이의 순력이다. 그는 하늘을 향해서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질문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받지 못하고 마침내는 도그마의 환영을 포기하고 허무 속으로 달아난다(생략). 〈길안내 Der Wegweiser〉에서 볼 수 있는 것이 가장 명백한 예인 몇 가지의 세부는 이 음악가가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만든 프리메이슨 기원의 어떤 철학에 의해서 관통된다. 만일 이것이 마적의 주석자의 것이라면 이만큼 새로운 관점도 그렇게 놀랄 만한 것이 아닐는지 모른다. 그러나 샤이에는 24곡의 가곡을 하나하나 세밀한 분석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덧붙여 두겠다.

백조의 노래에 대해서 말한다면 이 작품을 두 개로 분할한 것은 우연이다. 렐스타프 L. Rellstab의 비인칭적인 시 7편에 기초한 곡집과 이 시대의 가장 독창적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 6편에 기초한 곡집의 분리된 두 개의 곡집이 가끔 하슬링거 T. Haslinger의 손에 넘어갔었다. 그래서 이 두 부분 사이에는 우연하게 균형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부재라는 주제의 변주곡인 〈렐슈타프 리트〉와 슈베르트의 음악에 의한 외적 세계와 4대 요소의 눈부실 만큼의 환기 후에 곧 〈자기〉의 심연 속으로 이 음악가는 하이네를 따라 깊이 들어갔으며 종종 그 자기를 초월하는브람스가 그의 피아노4중주곡 제2번에서 이 아르페지오를 차용하게 되는환상의 도시에 대한 환각(도시 Die Stadt)과 또하나, 그림자 Der Doppelgäuger의 환각이 나타난다. 이것은 유래가 매우 드문 공포가곡의 하나이고 무소르그스키의 죽음의 노래와 춤을 예고했다(이 가곡의 테마는 1821년에 교향곡 E장조의 서주에 이미 나타났으며 그것이 슈베르트를 계속 따라 다녀서 그의 미사곡 E♭장조의 아뉴스 데이 속에 다시 나타나게 된다). 슈베르트 최후의 가곡이고 하슬링거가 이 가곡집에 마음대로 추가시킨 비둘기 우편에 대해서 말한다면, 이 작품은 악몽 후에 행복감을 가져다 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그 리듬에 의해서 〈렐슈타프 리트〉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흐름과 결부된다. 그리고 그 열쇠가 되는 말은 Sehnsucht(동경)이다. 이것은 프란츠 슈베르트가 음악에 대한 몇 가지 미지의 세계의 대하여 가졌던 동경이며 그는 이 미지의 세계에 경탄한 탐구자였던 것이다.

 

작품 목록개요

D는 오토 엘리히 도이취의 작품목록 Schubert, Thematic Catalogue of All His Works in Chronological Order(뒤르 W. Drr와 파일 A. Feil에 의한 독일어 신판, 베렌라이터, 카셀, 1978)의 연대순서를 가리킨다. 그러나 마지막 4개의 교향곡에 부여된 관용의 번호는 이 작품목록에서 빼기로 했다. 슈베르트의 전작품은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사에서 출판(188497 라이프찌히)되었고 베렌라이터(신슈베르트 전집[1965부터, 카셀])에서 개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리즈의 어디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는 작품의 경우, 또는 사후의 화성붙임 또는 편곡된 경우에만 출판사를 기재하기로 했다.
 
출처 : 뮤직스쿨

 

>> 목차고리 : 세계 > 유럽중앙유럽, 서유럽 > 오스트리아

>> 연결고리 : 음악가, 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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