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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9-04-28
 제목  뉴턴(Sir Isaac Newton, 1643. 1. 4~1727. 3. 31)
 주제어  아이작 뉴턴 [영국] [과학자] [물리학자] [수학자] [천문학자]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영국의 물리학자, 수학자, 천문학자, 자연철학자이자이다.

 

뉴턴의 어머니는 생후 2년 만에 재가해서 그의 곁을 떠났고, 그는 할머니의 손에 의해 길러졌다. 이리하여 뉴턴은 그의 의붓아버지가 죽어서 어머니가 다시 그에게 돌아올 때까지 9년 동안 어머니와 떨어져 지냈다. 어린 시절의 이런 모성 결핍이 그의 심리적 성장 과정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즉, 논문을 발표할 때마다 그가 보인 심리적 불안감과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가 보여주었던 지극히 비이성적이고 격렬한 반응 등은 어린 시절의 모성 결핍에서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1661년 뉴턴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는데, 이때를 즈음해서 그는 과학혁명 과정에서 근간이 되는 다양한 생각에 접하게 되었다. 우선 그는 데카르트의 기하학과 기계적 철학, 가상디의 원자론, 보일의 화학을 공부했으며,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 헨리 모어 (Henry More, 1614-1687)를 통해 연금술사와 마술사들이 주로 믿었던 신비주의 사상인 헤르메티시즘 도 접했다. 뉴턴이 평생 연금술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원격작용에 의한 힘인 보편중력을 생각해내게 된 데에는 신플라톤주의 와 헤르메티시즘 사상이 부분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1665년 흑사병으로 대학이 문을 닫게 되어 뉴턴은 그 뒤 2년 동안 고향에 내려가 있었는데, 이 기간 동안 미적분학, 색깔에 관한 이론, 역제곱 법칙 등 훗날 자신의 주요 업적을 이룩하는 데 기본 바탕이 되는 핵심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케임브리지대학에서의 최초의 강의도 광학(그 내용은 뉴턴 사후 《광학강의》로 1729년 출판되었다)이었으며, 초기 연구는 광학분야에서 두드러졌다. 광학에 대해서는 이미 울즈소프 시절부터 스스로 수집 ·정비한 실험기구를 이용해 빛의 분산현상을 관찰하였으며, 특히 굴절률과의 관계에 대하여 세밀히 조사하였다.

  한편 망원경 제작도 연구, 굴절광은 스펙트럼을 만들지만, 반사광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기초로, 반사식(反射式)이 수차(收差:色收差도 포함)와 효율면에서 한층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1668년 뉴턴식 반사망원경을 제작했다. 이 망원경은 천체관측 등에 크게 공헌하여 이 공적으로 1672년 왕립협회회원으로 추천되었다.

  그 해에 《빛과 색의 신이론(新理論)》이라는 연구서를 협회에 제출하였는데, 그 내용은 백색광이 7색의 복합이라는 사실, 단색(單色)이 존재한다는 사실, 생리적 색과 물리적 색의 구별, 색과 굴절률과의 관련 등을 논한 것이었다. 1675년 박막(薄膜)의 간섭현상인 ‘뉴턴의 원무늬’를 발견하였으며, 빛의 성질에 관한 연구로 광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고, 《광학》(1704)을 저술했다.

  수학에서는 1665년 이항정리(二項定理)의 연구를 시작으로, 무한급수(無限級數)로 진전하여 1666년 유분법(流分法), 즉 플럭션법을 발견하고, 이것을 구적(求積) 및 접선(接線) 문제에 응용하였다. 이것은 오늘날의 미적분법(微積分法)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성과를 1669년에 논문 로 발표하였다.

  유분법의 전개에 대해서는 에 수록되어 있다. 1676년 그와 동일한 미분법을 발견한 라이프니츠와 우선권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졌는데, 이 무렵부터 그의 사고방식도 실험적 방법에서 수학적 방법으로 그 중점이 옮겨져 스스로를 수학자라고 하였다.

  뉴턴의 최대 업적은 물론 역학(力學)에 있다. 일찍부터 역학 문제, 특히 중력(重力) 문제에 대해서는 광학과 함께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구의 중력이 달의 궤도에까지 미친다고 생각하여 이것과 행성(行星)의 운동(이것을 지배하는 케플러법칙)과의 관련을 고찰한 것은 울즈소프 체류 때 이루졌다고 한다. 1670년대 말로 접어들면서 당시 사람들도 행성의 운동중심과 관련된 힘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수학적 설명이 곤란해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는데, 뉴턴은 자신이 창시해낸 유율법(流率法)을 이용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확립하였다.

  1687년 이 성과를 포함한 대저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가 출판되었으며, 이로써 이론물리학의 기초가 쌓이고 뉴턴역학의 체계가 세워졌다. 3부로 된 이 라틴어 저서는 간단한 유율법의 설명에서 시작하여 역학의 원리, 인력의 법칙과 그 응용, 유체(流體)의 문제, 태양행성의 운동에서 조석(潮汐)의 이론 등에 이르기까지 계통적으로 논술되어 있다. 또 방정식론 등의 대수학(代數學) 분야의 여러 업적은 《Arithmetica universalis sive de compositione et resolutione arithmetica liber》(1707)로 간행되었다.

  1688년 명예혁명 때는 대학 대표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고, 1691년 조폐국(造幣局)의 감사(監事)가 되었으며, 1696년 런던으로 이주, 1699년 조폐국 장관에 임명되어 화폐 개주(改鑄)라는 어려운 일을 수행하였다. 1703년 왕립협회 회장으로 추천되고 1705년 나이트 칭호를 받았다.

  한편 신학(神學)에도 관심을 보여 성서의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고대사 해석을 검증하고, 천문학적 고찰을 첨가해 연대기를 작성하였다. 이 성서 연구를 통해 삼위일체설을 부정하는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평생을 독신으로 보냈으며, 런던 교외의 켄징턴에서 죽었다. 장례는 웨스트민스터사원에서 거행되고 그 곳에 묻혔다.

  근대과학 성립의 최고의 공로자이며, 그가 주장한 ‘자연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운동하는 복잡하고 거대한 기계’라고 하는 역학적 자연관은 18세기 계몽사상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뉴턴의 과학 방법론을 한마디로 표현하지면 수많은 현상들 속에서 힘을 설정하고, 이것으로부터 수학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그 현상을 다시 설명해내면, 그 힘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상들로부터 힘을 도출하는 과정은 다분히 가상적, 상상적, 사색적인 측면이 강한 것으로 수많은 임의성이 존재했다. 실제로 『광학』의 질문(Query) 31번을 보면 뉴턴이 빛의 굴절과 힘의 관계, 다양한 화학물질에서 나타나는 여러 힘을 도출하려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에서 뉴턴이 시도했던 것은 뉴턴의 사후에 나타날 18세기의 과학의 모습에 굉장히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조프루아 (Etienne-François Geoffroy, 1672-1731)가 집필한 『친화력 표』 (Affinity Table, 1718)에서 보여지는 화학적 친화력에 관한 논의는 뉴턴의 사색적 전통을 이어받아 전개한 것이었다. 무게가 없는 입자 를 가정한 칼로릭 이론이나 전기학, 자기학에서 역제곱 법칙을 도출하려고 노력했던 것도 모두 뉴턴의 영향을 받아 추진된 것이었다.

 

 

>> 목차고리 : 세계 > 유럽 > 영국

>> 연결고리 :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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