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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단체  작성일  2008-11-26
 제목  강화교산교회(1893)
 주제어  [감리교]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인천시 강화군 양사면 교산리 504'에 위치한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으로 강화 최초의 교회이다.

강화 지역에 예수의 복음이 전래되고 교회가 선 것은 대한 감리교의 모교회 격인 인천 내리교회에 의해서였다.
1885년 아펜젤러 목사가 인천에 상륙하자 인천 내리교회가 세워졌고 1892년에 후임자 존스(G.H.Jones 조원시 趙元時 1988.5.9 서울도착) 목사가 부임했다.


존스 목사는 인접 도서인 강화지역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갔고 선교를 시작하여 많은 어려움 속에서 이승환 이라는 강화 서사(양사)출신으로 제물포에 가서 술집을 경영하면서 내리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이었다. 그리하다 보니 강화 고향에 있는 이승환의 어머니도 이들을 따라 예수를 믿게 되고, 믿음이 생기자 존스 목사에게 세례받기를 원하게 되었다. 존스 목사는 한복으로 변장하고 야음을 이용해 또 다시 강화에 와서 서사 뒤쪽에 배를 정박하고 사람을 동리로 보내 정탐케 했다. 그러나 동리에 들어와 세례식을 행한다면 그 집을 불사르고 큰 봉변을 당하리라는 제보였다. 소요를 원치 않았던 존스 목사는 이승환 성도에게 노모를 배로 안내하도록 하였고 아들은 어머니를 업고 상당한 거리의 개펄을 건너 존스 목사의 배에 올랐다. 마침 달밤이라 달빛을 이용해 예문을 읽어가면서 무사히 세례식을 치를 수 있었다. 이것이 유명한 선교초기의 선상 세례이다. 그 후 이승환 성도는 제물포의 술집을 정리하고, 고향 양사로 돌아와 보다 건전한 직업인 농사일을 하면서 전도에 힘썼다.
존스 목사는 가오하 양사를 당시 제물포교회와 함께 2대 선교 거점으로 보고 1893년 가을 이명숙 전도사를 강화 담당자로 파송하였다. 초기에는 교인 4-5명이 모여 이승환 자택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부흥하기 시작했다.

 

 1903년 본 교회는 김경일 씨가 서구역 전도사가 되어 1907까지 순행시무하게 되고, 김상임 전도사의 차남 김우제 씨는 읍구역 제 2대 전도사로 파송되어 갔다.

 1906년부터는 김상임 전도사의 장자인 김홍제 권사가 전담하여 교회를 처리해 갔고 전도사로는 방족신, 조내덕 양씨가 차례로 순회하였다. 이 때에 손승용씨가 읍구역 제 4대 전도사로 파송되면서 본 교회는 읍구역으로 편입되어졌다.
 이 때까지 부임해 온 감리사로는 시란돈(스크랜톤 1900년 한국 선교지방 감리사), 조원시(존스 1888년 5월 9일 서울도착, 1901년 한국 서지방 감리사), 기이부(奇怡富 케이블 able,Elmer M. 1899년 9월 29일 서울도착, 1905년 한국 서지방(인천, 부평, 강화, 교동, 남양, 황해 및 연안구역 등) 교역자는 모두 8명(목사 1)에 불과했다.

 1914년 한국인 최벙헌 목사(1902년 5월 18일 서울에서 모인 미감리교 선교연회에서 무어감독에게 집사목사의 안수례를 받음)가 서지방에 부임해 왔으나, 이 때는 일제의 핍박 속에 교회가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침체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1915년에 김홍제 전도사와 그의 부인 하덕신 씨가 깊은 영적 체험을 함으로서 오히려 교인수가 증가할 수 있었고, 제 2차 초가 8간의 예배당을 증축하여 교회의 면모를 새롭게 해 놓았다.

 1916년에 벙커목사(1886년 7월 4일 서울에 도착)와 김유순 목사가 본 지방순회 목사가 되고, 김봉일 전도사와 그 부인 허나오미 권사가 수시로 본 교회를 왕래하여 대 예배와 사경회를 인도하자 교회가 부흥해 교인수가 70여 명에 이르렀다.
 1917년 에는 읍내교회의 박봉래 목사가 본 교회 언혁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자료를 수집해 '기독교 대한감리교 교산교회 연혁'을 편집해 놓았다.
 그는 연혁 서두에서 "대개 기독교회가 서울에서 시작하여 인천에 설립되고 강화에 본 교회가 설립 된후 전도(全島)에 전파되니라"라고 전제하고, 그 당시까지의 교회 연혁을 개괄적으로 정리해 놓은 것이다.
 그 후 본 교회 담당자로 시무한 바 있는 신응균 목사가 1970년 2월에 이것을 재 편집해 놓고 다른 곳으로 이임해 감으로서 오늘날까지 귀한 교회사 자료로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1930년에는 남북 감리회가 통합됨에 따라 본 교회는 '기독교 대한 감리회 강화구역 교산교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1930년대 이후 교회가 소강상태에 있었으나, 1950년에 박승도 전도사가 연회로부터 파송되고, 구역이 또 다시 나뉘어 '중부연회 강화지방 양사구역 교산교회'로 개편되면서 새로운 활력을 얻었으나, 뜻밖에 6.25동란의 비극을 맞고 말았다.
 수복이후 다시 부흥을 가져와 신도수가 증가해 90명에 이르렀다.

 1956년 에는 안광남 전도사의 주선으로 교단 본부로부터 100만원의 건축보조금을 받아 건축 자재를 구입할 수 있었다.
 1958년 최창묵 목사가 부임한 후 김용기 권사가 교산리 산 201번지의 대지를 기증(1,320평중 1,000평은 52만원에 매입하고 320평은 기증받음)하자, 1959년 4월 김봉기 장로를 기성회장으로 정초식을 거행하였다. 온 교회가 2년간에 걸쳐 예배당 건축에 전력하던 중 교회가 거의 완공될 무렵 담임목사와 김봉기 장로 그리고 김정기 권사가 동시에 교회를 떠나게 되어 교인들은 아쉬운 작별을 하게 되었다.

 1961년 신응균 전도사가 부임하면서 예배당을 완성하고 봉헌식을 올렸다.

 1963년 덕하리에 기도처를 설치하고, 교인 일부가 분리하여 교회를 개척해 나갔다.

 1964년에 17평의 주택을 건립하고, 1968년에는 최윤영 권사를 기성회장으로해 37평 규모의 교육관을 1년에 걸쳐 완공해 놓았다.

 1970년에는 교회 옆의 밭 234평을 매입해놓았고, 동년 3월에 신응균 목사가 서울로 전임해 가면서 후임으로 임종락 목사가 부임해 왔다.

 1977년에 "또 다시 30평의 성전을 증축했고(기성회장:김용기 권사), 1979년에는 슬라브 양옥으로 목사관을 신축했다.

 1981년 구역회의 결의로 교산교회의 명칭을 '양사중앙교회'로 변경했다.

 1982년에는 '새마을 유아원'을 설립해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1991년까지 9회에 걸쳐 약 300명의 졸업생을 길러내고, 원아수의 격감으로 부득이 폐쇄시키고 말았다.

 1985년에는 담임자 임종락 목사의 성역 30주년 및 회갑기념 예배를 드렸고, 그 다음해에는 '교회요람'을 창간 배포하고, 아울러 일부 낡은 건물을 철거하면서, 24평 정도의 슬라브 양옥식당도 건축하였다.

 1994년 구역회에서 교회명칭을 '강화 교산교회'로 다시 변경하였다.

 

 

>> 목차고리 : 단체 > 교단(기독교대한감리회) >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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