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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단체  작성일  2008-10-04
 제목  장로회신학대학교(長老會神學大學校, Presbyterian College and Theological Seminary)
 주제어  장신대 [기독교학교] [신학대학교] [신학교]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자료출처  장로회신학대학교  성경본문  
 내용

본 대학교의 시작은 1885년 우리나라에 최초의 목사 선교사로서 내한한 호러스 언더우드(Horace G.Underwood)에게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는 한국에서 선교를 시작하면서, 장래 한국의 선교와 교역을 위한 교역자 양성의 필요성을 느껴 자기집 사랑방에서 고아들 몇을 모아 놓고 신학 교육반을 시작한 것이 본 대학의 효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신학교의 설립은, 미국 북장로회, 남장로회, 카나다 장로회, 호주 장로회 등 네 장로회 선교부가 공동으로 형성한 "장로회 공의회"가 신학교를 평양에 설립하기로 결의 한데서 시작되었다.


마펫(S.A.Moffett) 선교사북장로회 선교사 마펫(S.A.Moffett)은 평양에서 선교 활동을 하면서, 1901년부터 김종섭, 방기창 두 사람을 데리고 그의 사랑방에서 신학반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1903년 공의회는 이것을 "장로회신학교"로 하기로 결의하여 공식적으로 신학교육이 시작되었다.

초창기에는 각 장로회 선교부의 선교사들이 평양에 가서 가르쳤고, 학생들은 한 달 공부하고 석 달 목회하는 방법으로 일 년에 석 달 공부하여, 5년간 수업하는 제도로 운영되었다.

1907년 6월 길선주, 양전백, 서경조, 한석진, 송인서, 방기창, 이기풍 7인의 첫 졸업생이 나오게 되었고 그해 9월에 독(립)노회가  창설되어, 이분들이 한국 장로교회의 첫 목사들로서 안수되었다. 1912년에는 장로회 총회가 창립되었으며, 이를 기념하여 중국 산동성에 김영훈, 사병순, 박태로 세 명의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하여 해외 선교가 시작이 이루어졌다.

 

1919년 기미 독립운동에 일어났을 때에는 본교 출신 목사들 여러분도 민족대표 33인 으로 서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학교 학생들도 다수 이 운동의 선두에 나서 활동함으로써 여러 학생들이 체포되어 학교가 일시 휴교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일제의 갖은 억압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의연히 그 임무를 수행해 왔으나, 1938년 제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안이 총회장에 의해 불법적으로 선포되므로, 신학교는 이에 동참할 수 없다고 거절함으로써, 무기휴교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신학교가 문을 닫자, 목사 양성을 중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총회는 친일하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1940년 평양에 “장로회신학교”를 세우고, 채필근 목사가 교장에 취임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서울에서는 김대현 장로가 중심이 되어, 김재준 목사를 교수로 “조선신학교”가 설립되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북한에는 공산정권이 수립되어 자연히 신학교가 폐쇄되었고, 남한에서 총회가 기존해 있던 조선신학교를 총회 직영 신학교로 인준하여 교역자 양성을 하였다. 그러나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투옥되었던 목사와 평신도들, 소위 “출옥성도”들이 중심이 되어 부산에 “고려신학교”를 세워 따로 신학교육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1947년 조선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신학생 51명이 김재준 목사가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치므로, 더 이상 그에게서 공부할 수 없다고 하는 탄원서를 총회에 제출하였다. 총회는 "장로회신학교"를 인준하고 조선신학교에서 나온 학생들을 중심으로 교육을 하게 되므로, 총회 안에는 조선신학교·장로회신학교의 두 신학교가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1950년 4월 총회에서 경남노회의 출옥성도들 문제로 싸움을 하다가 한국전쟁이 터졌고, 결국 1951년 출옥성도들은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소위 “고려파”로 갈라져 나가고 말았다. 이것이 1885년 언더우드가 선교를 시작한 이래 하나로 내려오던 장로교회가 두 쪽이 나는 비극적 순간이었다. 총회는 조·신과 장·신을 통합하여 “총회신학교”를 세우기로 결의하고, 이를 실행하려 했는데, 장신은 총회의 결의에 순응했으나 조신은 이에 따르지 아니하고 독자적으로 신학교를 계속 운영하다가, 1953년 “기독교장로회”라는 간판을 걸고 분립해 갔다. 1953년 총회는 “총회신학교”를 대구에서 시작하여 후에 서울로 옮겨오게 되었다.

 

1952년 대한예수교장로회신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았고, 교사()를 서울로 옮겨 신축하는 과정에서 남산의 옛날 조선 신궁 자리에서 수업을 하였는데, 이 자리가 적산이었으므로, 정부로부터 불하를 받아, 교사를 짓자고 하는 과정에서 당시의 돈 3,000천만환을 사기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대한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에큐메니칼운동을 지지하는 측과 이를 반대하는 측으로 나뉘어 분쟁을 계속하다가 결과가 되었다. 이 싸움은 결국 1959년 대전에서 모인 제44차 총회에서 두 파가 나뉘어, 에큐메니칼 측은 서울 광진구 광장동 353번지 1만 9천평의 대지를 구입하여 교사를 짓고 “장로회신학대학”으로 새 출발을 하였고 N.A.E 측, 즉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하는 측은 사당동에 교사를 짓고, 옛 이름 그대로 “총회신학교(총신대학교)”로 출발하였다.


장로회신학대학교는 1960년 현재의 위치에 교사를 신축·이전하였으며, 1961년 대한예수교장로회신학대학으로 승격하였다. 1966년에는 대학원을 설립하였고 1973년 장로회신학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76년부터 미국 San Francisco 신학교와 목회학 박사과정을 공동으로 개설하였다. 1980년에는 신학대학원(M.Div.) 설립인가를 받았으며, 1992년에는 지금까지 San Francisco 신학교와 공동으로 실시하던 목회학 박사과정을 중지하고, Chicago에 있는 McCormick 신학교와 공동으로 이 과정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1993년부터는 본 대학이 종합대학인 “장로회신학대학교”로 그 명칭이 변경되었고, 1993년에는 교육부로부터 “세계선교대학원”이, 1995년 10월에는 교육부로부터 “교역대학원”과, “교육대학원”이, 1996년 11월에는 “교회음악대학원”이 설립인가를 받았다.

 

본 대학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산하에서 장로회신조와 헌법을 기본으로 하고 경건과 학문을 바탕으로 신학교육을 실시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들을 양성함을 그 목적으로 경건과 학문의 훈련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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