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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단체  작성일  2008-09-23
 제목  여의도순복음교회
 주제어  
 자료출처  여의도순복음교회  성경본문  
 내용

여의도순복음교회는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에 소속된 교회로 단일교회로는 세계최대교회이다.

1958년 3월 15일 신학교를 졸업한 조용기 전도사와 최자실전도사가 그해 5월 18일 서대문구(현 은평구) 대조동에 위치했던 최자실 전도사의 집 거실에서 가정예배의 형태로 창립예배를 드림으로서 시작되었다.

창립예배를 드리던 날 최자실 전도사는 이른 아침부터 사과상자에 보자기를 씌워 강대상을 만들고 온동네를 다니며 예배를 알렸으나, 결국 창립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은 조용기 전도사, 최자실 전도사, 그의 세 자녀들과 밭일을 하다가 비를 피하려고 온 할머니가 고작이었다.

 

교회가 시작되고 1개월 정도가 지난 어느 날, 조용기 전도사와 최자실 전도사는 7년 동안 중풍병을 앓고 있던 한 여인의 말을 듣게 되었다. 무성이 엄마라는 이 여인은 7년 전 아이를 출산한 이후 중풍병을 앓게 되었는데, 한번도 자기 발로 일어선 일이 없었다. 두 전도사가 처음 이 집에 들어갔을 때에는 악취로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였으며, 아이들은 더럽기가 한이 없었다. 그리하여 최자실 전도사는 아이들과 병자를 물로 씻긴 후 조용기 전도사와 함께 무성이 엄마의 머리에 손을 얹고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중풍병은 나을지어다." 조용기 전도사는 목청껏 호령했다. 그리고 몇 시간을 기도했을 때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무성이 엄마가 벽을 잡고 일어서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씩 걷기 시작했다. 무성이 엄마는 중풍병에서 완전히 고침을 받았고 건강한 몸으로 교회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처럼 조용기 전도사와 최자실 전도사의 피땀어린 기도와 헌신의 결실로 인해 성도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여 50여 명에 이르자 최 전도사의 집 거실이 좁아 예배를 드리는데 어려움이 따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듬해 봄 조용기 전도사와 최자실 전도사는 집 앞 마당에 천막을 치고 가마니를 바닥에 깔고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후 천막교회는 부흥하여 점점 더 많은 성도들이 모이게 되자 가난한 성도들이 드린 헌금을 모아 더 큰 천막을 구입하여 천막을 넓혀 가는 일을 계속하였다.

조용기 전도사가 탈장으로 인해 대수술을 받고 군에서 전역한 후, 교회는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군에서 전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61년 9월 1일, 서대문 로타리 서커스단이 자주 머물던 터에서 천막 대부흥성회가 열렸다. 이 부흥성회의 설교자는 샘 토트 목사였고 조 전도사가 통역을 맡았다.

이 부흥 성회는 거대한 구름떼 같은 사람들이 서울 전역으로부터 몰려들었다.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병자들이 성령으로부터 오는신유를 경험하였다. 부흥성회 기간 중, 조용기 전도사와 최자실 전도사는 서대문에 교회를 개척할 것을 결심하였다.

 

1961년 10월 15일 부흥회가 열린 장소에 교회가 세워졌고 예배가 드려지게 되었는데, 이곳이 순복음부흥회관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편 어려운 문제를 풀기위하여 서대문부흥회관은 황성수 변호사의 변호를 필요로 하였다. 그의 지혜롭고 열심있는 변호로 인하여 서대문 부흥회관의 건설은 그 다음 해에 완공되었다.

조용기 전도사는 1962년 4월 26일 목사 안수를 받게되었다. 그리고 그해 5월 13일 순복음부흥회관의 명칭이 순복음중앙교회로 바뀌게 되었으며, 이 무렵 교회 성도가 5백 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3년 후인 1964년 서대문 개척교회는 3천명에 이르게 되었다. 같은 해 조용기목사는 미국 하나님의 성회 교단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미국 하나님의 성회 본부초청으로 첫 해외여행을 떠났다. 그는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영어로 설교하고 또 한국을 멋지게 소개하면서 순회 선교여행을 했다.

서대문 교회는 나날이 폭발적으로 부흥을 거듭하였다. 성도수가 만 명을 초과함에 따라 서대문 교회는 더 이상 성도들을 수용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교회는 새 성전 건축을 위한 부지를 찾기 시작하였다. 여러 곳이 부지로 거론되었지만 많은 성도들이 모이기에 적합한 장소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때 여의도가 추천되었다. 그 당시 여의도는 단지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활주로로 이용되는 땅이었다. 그 당시 여의도는 황폐한 섬으로서, 육지와 연결되는 다리조차도 없었다. 교통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러나 조용기 목사는 하나님으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고 여의도에 건물을 세우겠다는 계획을 강하게 추진하였다. 마침내 교회는 여의도에 부지를 구입하게 되었다. 하지만 건축비가 너무 비싸므로 교회가 이 거대한 빚을 감당할 것 같지 않았으나, 하나님의 기적을 믿기에 조용기 목사는 그의 마음속에 불타오르는 소망을 가지고 추진하였다.

그러나 건축시작부터 여러 가지 문제들이 닥쳐오기 시작하였다. 건축이 시작되자마자 교회는 자금 문제에 봉착하였다. 중동 오일쇼크의 여파로 달러에 대한 원화의 가격이 하락하여 건축 자재의 가격이 상승하였고 교회 헌금도 감소하게 되었다.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중동 오일 쇼크 때문에 일자리를 잃게 되었고 은행이 교회에 신용한도를 줄임으로 인하여 부채의 압박은 더욱 가중되었다. 드디어 교회의 건축이 완전히 멈추게 되는 절망적인 상황이 찾아왔다. 이에 조용기 목사는 매일 밤, 공사 도중 멈춘 녹슨 철골을 움켜잡고 부르짖기 시작하였다: "주님! 차라리 이 녹슨 철근이 내 머리 위에 떨어져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비오는 날에도 불구하고, 그는 바닥에 깔린 쌀가마니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곤 하였다.

하나님의 계획을 믿는 성도들도 하나 둘씩 마루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성도들의 교회 살리기 운동은 가속화되었다. 그러다가 한 성도가 개인 패물을 팔아 가져오자, 다른 사람들이 집을 팔아 헌금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헌신과 희생의 결과 교회는 모든 빚을 갚을 수 있었고 성공리에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1973년 8월 19일 현재의 여의도에 있는 성전에서 최초의 예배가 드려졌다. 그리고 1973년 9월 18일부터 22일까지 5만명의 한국성도와 5천명의 외국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10차 세계오순절대회가 여의도순복음교회 본 성전과 효창운동장에서 열렸다. 9월23일에는 만 팔 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새롭게지어진 여의도성전의 헌당예배를 봉헌하였다. 이로서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되었던 것이다.

 

조용기 목사의 신학은 오중복음(중생의 복음, 성령충만의 복음, 신유의 복음, 축복의 복음, 재림의 복음)과 삼중축복이다.

 

2006년 11월 12일 여의도순복음교회 장로 1219명은 임시당회를 열어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차기 담임목회자로 미국 로스앤젤레스 나성순복음교회의 이영훈 목사를 선출했다. '담임목사 서리'로 2년간 수련 과정을 거친 뒤 2009년 교회의 침례교인들이 참여하는 공동의회를 통해 세계 최대 교회의 정식 담임 목회자로 최종임명될 예정이다.

2008년 5월 14일 조용기 목사가 원로목사 추대예배가 여의도순복음교회에 1만 5천여 명의 성도들이 모인 가운데 드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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