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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8-09-09
 제목  이란-이라크 분쟁
 주제어  1980년 [이란] [이라크] [전쟁사]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1980년 9월 9일 이란이라크간의 아랍권의 맹주권 및 영토 분쟁이 발생했다. 이 전쟁은 특히 양국의 국경지역인 샤트 알-아랍(Shatt al-Arab)수로에 관한 영유권 문제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전쟁 발발은 표면적으로는 샤트 알-아랍수로의 영유권 문제와 이란이 강제로 점령한 호르무즈 해협의 3개 도서의 반환 문제로 야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전쟁은 맹주권, 즉 이락의 후세인의 정치적 야망과, 혁명 수출을 위한 호메이니의 혁명관이 서로 상충하면서 일어난 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

먼저 샤트 알-아랍 수로의 경우, 걸프만과 연결되어 있어 경제적,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므로 양국간 분쟁의 원인이 되었으며, 이란과 이락의 관계에 있어 변수로서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32년 이락이 독립하면서 이란과 이락간에 국경조정 문제가 제기된 이래 이 수로는 1937년 이란·이락의 국경협정에서 임시로 그 경계선을 수로의 동안으로 결정함으로써 이락 소유가 되었다. 그러나 이란측은 국제법상의 관례를 들어 수로의 계곡선을 국경선으로 정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영국이 이락측을 지지하고 나섬으로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그 후에도 이란은 수로의 경계를 계곡선으로 하기 위하여 이락과의 협상을 수 차례 시도했으나, 이락의 경우 일단 자국 소유로 인정된 지역을 이란에 반환할 의사는 당연히 없었다. 그리하여 수로 문제는 계속적인 문제점으로 남아 있었고, 1960년대 말∼70년대 초, 이락이 국내의 쿠르드족의 반란 문제로 고심하고 있었을 때 이란은 쿠르드족을 지원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이락은 1975년 알제리에서 개최된 이슬람국가들의 정상회담에서 이란측이 쿠르드족의 반란군에게 일체의 원조를 중단하는 대신에, 수로의 양국경계로서 계곡선으로 하는 지정 문제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1979년 후세인이 이락의 대통령이 되면서 알제리 협정의 폐기를 선언하였다. 그는 샤트 알-아랍수로의 이락 영유권을 선언하고, 1971년 팔레비 정권이 걸프만 안보의 보장이라는 명목으로 점령한 아부 무사, 톰브 등의 도서에서의 이란군 철수를 요구하였다. 이와 같은 양국간의 국경 문제에 대한 충돌이 결국 이란-이락전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라크는 전쟁 초기계획으로 이란의 유전, 정유시설, 운반 루트의 파괴와 이러한 산업지역을 테헤란 정부와 단절시킴으로써 혼란에 빠뜨리는 결과를 예상하였다. 이락은 바그다드와 가까운 중부 접경지대로 진격하고 다음 목표인 샤트 알-아랍수로를 넘어 후제스탄의 주요 도시인 호람샤흐르와 아바단을 점령하였다.
이라크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양국간의 전쟁은 점차 이란의 반격으로 상호공방이 교차되면서 장기전으로 돌입하게 된다. 이란의 경우 호메이니가 주도한 이슬람혁명은 팔레비 정권을 붕괴시키는데는 성공했지만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혁명 이전부터 계속된 시위와 파업은 다국적기업의 철수, 석유 수입의 감소 등으로 이란의 경제는 1982년 초 최하수준을 기록하였다. 또 산업생산 능력이 40%를 밑돌았고 실업률이 40%를 육박했으며, 전 분야에서 고질적인 부족 현상은 부품과 원자재, 섬유류에서 매우 극심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쿠르드족과 발루치족 그리고 후제스탄 아랍인에 의한 소수민족의 소요와 자치 요구 및 1980년 사전 발각된 쿠데타 등으로 정치적 불안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란 내의 정치적, 경제적 불안과 이락의 침공은 이란에게 유리한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란은 위기를 이용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즉 적의 조직적 근절과 성직자에 보다 의존하는 국가 건설을 추진하는 방향으로 위기를 이용하였다. 대중의 관심 대상을 국외에서 찾음으로써 국내적 불만이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려 하였다. 또한 이 전쟁은 혁명에 대한 개인적 의지에 관계없이 모든 이란인을 전쟁에 참여시키는 민족적 동원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이란 혁명정권은 혁명임무가 완수되어졌다고 국내 정세를 평가할 때까지 이락과의 전쟁을 대가 없이 종결지으려 하지 않았다.

장기전으로 약 8년간 교전했던 이라크와 이란은 1987년 UN의 종전권고 결의안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1988년 8월에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란혁명,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란-이락전쟁은 걸프지역 국가들과 중동지역의 석유에 의존하는 서방세계에 대단한 충격을 주고 그 대책을 강구케 하였다.

1980년 미국의 카터는 걸프에서 미국의 이익이 외부 도발에 도전 받을 경우 군사력을 통해서라도 방어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카터 독트린''). 이러한 경고는 이란의 혁명(친서방적 팔레비 정권 붕괴),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걸프 연안국들이 안보에 위협을 느낀 후에 취해진 조처이다. 이란-이락전쟁 발발 후 아랍국가들에게 나타난 현상 중 하나는 심화된 양극화 현상이었다. 이란을 지원했던 아랍국가들은 시리아, 리비아, 남예멘(사회주의)과 같이 친소련 국가들이었으며, 이락을 지원했던 국가들은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및 걸프 연안국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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