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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8-09-06
 제목  미 극동사령부 남한에 군정 선포
 주제어  [국내정치] 미군 남한군정선포 미군군정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1945년 해방 직후 서울로 들어와 이승만 대통령의 환영을 받는 미군정 하지 준장. 1945년 9월 7일 한국의 미군군정 선포. 미 제 6·7·40사단으로 구성된 제 24군단의 38도선 이남 점령임무 수행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일본 민간인의 본국 귀환, 법과 질서유지,미국의 정책 속에서 정부역할 수행이 당초의 주 임무였다. 미군정은 1945년 9월 12일 주한미군 본부 내에 독립된 사령부 성격을 띠고 「주한미군정」(USAMGOK)이라는 명칭으로 출범했다.

그러나 한국에 처음 진주한 제 24군단 병력 가운데는 군정을 수행할 요원은 하나도 없었다. 군정부대는 그로부터 40여일이 지난 10월 21일 인천에 내렸다. 그것도 한국점령에 대비한 것이 아니라 일본 주요지역 통치를 위해 훈련받은 요원들이었다. 그 병력은 4개 전술 보조부대와 캘리포니아 몬테리에서 민정훈련을 받은 20개 중대로 충원되었다. 그들은 먼 항해 끝에 도쿄에 도착하고 나서 한국으로 가는 사실을 인천상륙 1주일 전에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초기의 군정은 전술부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점령지역을 통치하는 과정에 혼란을 가중시킨 요인이 되었다. 지방이 특히 심했다. 서울에서는 인공 산하의 치안대 활동이 멈추었으나, 일부 지방에서는 술집에서 난동을 부린 미군들을 체포할 정도였다. 이 가운데는 행방불명이 된 미군도 있다. 전남의 경우 제 40사단과 교체한 제 6사단 20보병연대는 인민위원회를 반대하면서 치안대를 공공건물로부터 몰아 내는 등의 강공책을 썼다.

미군정의 군정장관으로 육군소장 A.V 아놀드가 임명되었다. 지난날 총독이 행사한 권한을 손에 쥔 군정장관은 전술부대에 소속하지 않은 모든 군정요원을 지휘했다. 군정장·차관 밑에 총독부 정무총감 위치와 비슷한 민정장관을 두었는데, 그 자리는 B B 프레스코 대령이 맡았다. 그리고 8개의 부와 9개의 국을 설치했다. 이들 기구는 1946년 5월 10일 확정한 새 편제에 따라 11개위 부, 4개의 처 , 86개의 국으로 개편되기까지 존속했다.

「주한미군정청」(USAMGIK)이라는 공식명칭은 1946년 1월 4일부터 사용되었다. 처음의 「주한미군정」의 약어 「USAMGOK」 의 끝자리 3자 GOK가 조롱하는 말 GOOK와 비슷하게 들린다고 해서 바꾸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든 미군정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까지 약 한 달이 모자라는 3년 동안 한국을 통치했다.

미군은 45년 9월 초 한국에 도착하자 미군정청을 설치했다. 한국상황데 대하여 예비지식을 갖지 못했던 미군은 군정정치를 선포 하고 건준위나 상해임시정부를 불문하고 어떠한 정치세력도 공식적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들은 과거 식민시대에 거대해 진 기존의 관료·경찰 조직을 그대로 접수하여 운영하는 길을 택하였다. 따라서 미군정은 일제 잔재의 청산과 그를 위한 어떠한 민족적인 노력에도 소극적일 수 밖에 없었고, 특히 광범위한 대중적 기반을 가지고 있던 좌익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철저히 적대적이었다.

미군정은 한때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하고 이 세력을 중심으로 하여 임시정부수립을 구상하기도 하였다.

46년 5월 8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됨에 따라 한국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전망이 흐려지고 각 정파의 견해가 분립되는 가운데 김규식·여운형 등은 미군정의 일정한 지원하에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다. 좌우합작운동의 「합작 7원칙」과 「입법의 원」은 그 결과였다. 그러나 찬·반탁을 둘러싼 대립이 첨예화되고 합작운동을 지지하는 정치세력의 입지기반이 취약해짐에 따라 미군정은 곤경에 빠지면서 단독정부로의 방향을 분명히 하게 된다. 46년 9월의 총파업이나 10월의 인민항쟁의 실패는 당시 미군 정정책의 취약성의 다른 한 표현이었다.

미군정은 일본인들의 총독부를 인수하면서 떠나는 일본인들로부터 개인 재산 뿐 아니라 중앙집권적인 은행체제, 공공시설과 막 대한 전매사업을 접수하게 되었다. 또 전국에 81개의 회사를 거느리면서 경제적 지원을 이용하여 한국 내의 정치적 경쟁의 강력 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더욱이 군정은 38선 이남의 군사력을 사실상 독점했으며, 한국에 온 미군 5천명은 약 5만명의 일본 투항병들을 무장해제시켰으 며 일본군은 급속히 한국을 떠났다. 일본경찰 대신 들어선 군정 경찰은 지방에서의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해 신속히 각지에 투입 되었다. 거대하지만 우둔한 미군정은 아무리 좋은 의미로 말하더라도, 여러 세기 동안 고도로 세련된 정치적 책략과 음모를 겪어오면서 정치적으로 가장 민감한 사회의 구성원들인 한국민의 눈에는 전혀 정치적 감각을 갖추지 못한 존재로 보였다. 남한에서 미군정 3 년은 제민족민주세력의 위축을 가져왔고, 다른 한 측면에서는 보수적 극우세력이 다시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한반도 현대사의 비극을 초래한 장본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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