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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8-07-29
 제목  파리외방전교회(파리外邦傳敎會, Société des Missions Étrangères de Paris)
 주제어  1658 [프랑스] [천주교] 가톨릭 선교단체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파리 외방 전교회1658년 창설된 프랑스 선교단체. 한국 천주교회초창기 발전에 힘썼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종교상 우위권을 꺾기 위하여 당시 로마교황청의 포교성성(布敎聖省)이 설립, 1659년 두 신부를 주교로 임명하여 타이(당시 샴)로 파견하였다. 1664년에는 신학교를 세워 성직자를 양성하여 아시아로 파견하였다. 이 신학교의 설립 목적은 파견된 포교지역에서 교회를 조직하고 현지인 성직자를 양성해 그들에 의해 교회가 운영되도록 하는 데 있었다. 한국에는 1831년 B. 브뤼기에르 주교가 초대 조선대목(朝鮮代牧)으로 임명되었으며, 1837년 2대 조선대목인 L.M.J. 앵베르주교와 J.H. 샤스탕 신부가 입국하였다. 그들의 힘으로 1845년에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대건(金大建) 신부를 배출시켰다. 옛글로 쓰여진 기도문그러나 이에 앞서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을 거치면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24명이 순교하였다. 1886년 한·불조약이 체결되자 선교사들은 전보다 자유스러운 포교활동을 펼쳐 1962년 한국인에 의한 정식 교계제도가 수립될 수 있도록 하였다. 아울러 활발한 간행사업으로 《성교요리문답(聖敎要理問答, 1864)》 《한불자전(韓佛字典, 1880)》 《한어문전(韓語文典, 1881)》 등을 펴냈으며, 특히 《한국천주교회사(1874)》는 프랑스어로 간행, 한국 천주교회 역사뿐만 아니라 한국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데 이바지하였다.
1658년 7월 29일 창설되고,
1831년 9월 한국에 처음 진출하여 한국천주교회의 초창기 발전 은 물론 교회를 통하여 한국 민족과 고락을 같이 한 선교단체이다.
 
1. 창립과 창립정신:
17세기에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전세계를 통하여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 였고, 아울려 종교적으로 로마와의 계약, 이른바 포교상의 `보호권'에 의하여 복음전파활동에 잇 어서도 상당한 우위권을 갖고 있었다.
당시 교황청의 포교성성(布敎聖省)은 이러한 종교상의 우위권을 분쇄하기 위하여 프랑스 선교사들의 포교열(布敎熱)을 이용하여 1658년 손교단체의 설립은 문론, 1659년 팔뤼(F. Pallu)와 모트(P.L. la Motte) 두 신부를 주교[大牧]로 임명한 뒤 그들을 샴(오늘의 태국)으로 파견하였다.
 
1664년에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 는 교구사제뿐만 아니라 선교사제 희망자를 모든 교구로부터 모집하여 성직자로 양성한 후 아시아로 파견하였다. 이 신학교의 설립은 포교사(布敎史)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선교사들이 이 곳저곳을 여행하면서 포교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포교지역에 종신토록 머무르면서 그곳의 언어와 풍습을 배워 포교활동을 하 게 된 것이다.
 
즉 그들은 통역하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 않고 각 지역에 회장(會長)을 임명하여 포교활동을 하고, 회 장들 중 성직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방인성직자(邦人聖職者)를 양성하게 된다. 결국 파리 외방전교회는 파견된 고교지 역에서 교회를 조직하고, 현지인(現地人)성직자를 양성하여 그들에 의해 교회가 운영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창립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시아에 4,000여명의 선교사들이 파견되었는데 그 중 170명여 명이 한국에 파견되었다. 한편 본회는 약 2,000여명의 현지인 성직자들을 양성하였는데 그 중 한국인은 100여명에 이르고 있다.
 
한국화로 표현된 초기 선교사들의 모습 오랜 역사 동안 파리외방전교회는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 그 민족들과 함께 그 나라 역사에 참여를 했으며 선교사 170명이 살해되었는데 그 중 24명의 선교사가 한국에서 살해되었다.
최근 50년 동안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중국 과 만주에서 추방되었고)1949∼1953), 1970년대에는 월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에서 철수해야만 되었다. (1975∼1976)
 
2. 한국진출:
1825년 사제를 요청하는 한국인 교우들의 편지를 접하게 된 교황은
1827 년 9월 1일 파리외방전교회에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시 한국 내에서는 외 국인의 입국을 금지하였고, 파리 외방전교회 역시 프랑스혁명 때문에 회원이 10여명밖에 없었고 돈도 없었기 때문에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망콕의 보좌주교이던 브뤼기에(Brugui re, )주교는 한국 선교사를 자원하였다.
그는 1831년 9월9일 교황 그레고 리오16세에 의해 초대 조선대목(朝鮮大牧)으로 임명되자 즉시 입국하기 위하여 여행을 떠나 3년이 지난 뒤 만주에 도착하였지만 한국 입국의 많은 어려움 때문에 1835년 10월 한국을 바라보면서 만주의 교우촌 마가자(馬架子)에서 사망하였다.
 
그러나 1836 년 모방(Maubant, 羅) 신부, 1837년에 2대 조선대목인 앵베르(Imbert, 范)주교와 샤스탕(Chastan, 鄭)신부가 입국하였다. 그들은 곧 파리 외방전교회의 본래 목적에 따라 3명의 소년을 선발하여 마카오에 보내 교육을 받고 사제서품을 받을 수 있게 함으로써 1845 년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대건(金大建)신부가 배출되었다.
이에 앞서 1839년 1월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시작되면서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고 1839 년 9월에는 마침내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3명도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그 후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한국의 입국을 시도하여 1845년 10월 3 대 조선대목 페레올(Ferr ol, 高) 주교, 다블뤼(Daveluy, 安) 신부가 김대건 신부와 함께 충 청도 강경(江景)에 도착하였다
 
1846년 병오(丙午)박해를 치른 뒤 1866년 병인(丙寅)박해가 일어날때까지 베르뇌 (Berneux, 張敬一) 주교를 비롯하여 메스트르(Maistre, 李), 프티니콜라(Petitmicolaas, 朴), 푸르티에(Pourthe , 申), 페롱(F ron, 權), 블르트니에르(Breteni res, 白), 볼리외(Beaulieu, 徐), 도리(Dorie, 金), 위앵(Huin, 閔) 신부 등이 계속 입국하였다.
하지만 1866년 병인년 대박해가 일어나자 모두 순교하고 살아남은 3명 선교사도 중국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고, 10년이 지난 1877년이 되어서야 다시 한국에 입국할 수가 있었다.
 
1887년 한불조약(韓佛條約)이 체결되자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의 생명은 보장되었고, 포교활동에 있어서도 그 전보다는 훨씬 자유스럽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더욱 활발한 포교활동을 전개하여 1911년에는 대구대목구(大邱代牧區)를 분할 선정하여 파리 외방전교회의 드망즈(Demange, 安) 신부가 초대 대목으로 취임하였다.
 
 이밖에 한국 천주교회의 교계제도가 정착할 수 있도록 원산(元山)대목구, 평양·연길·의란·전주·광주지목구(知牧區) 등을 분할 설정하여 1962년 한국인에 의한 정식 교계제도가 수립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도 주력하여 1910년 61명의 성직자 중 15명이 한국인이었는데 1920년에는 총 71명 중 30명이 한국인이었다.
1961년에는 총 516명 중 275명이 한국인이었다.
 
3. 한국 내에서의 주요 활동 :
1836년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가 처음 한국에 입국한 뒤 제일 먼저 한국인 성직자 배출을 위하여 3명의 신학생을 선발하여 유학보낸 후 1853년 충청도 배론[舟論]에 신학교를 설립하여 성직 자 양성사업에 착수하였다.
 
이는 오래되지 않아 폐쇄되었지만 1885년 10월 강원도 원주땅 부흥골에 다시 신학교를 설 립한 후 1887년 서울 용산(龍山)에 예수성심신학교(聖心神學校)를 개설하였다. 즉 오늘날 서울 혜화동(惠化洞)에 소재한 가톨릭 대학 신학부의 모체가 된 것이다.
 
4. 현황 :
박해와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 파리 외방전교회는 한국 천주교회를 위하여 활동 하다가 1942년 서울대목을 한국인 노기남(盧基南) 주교에서 인계하고, 1944년부터는 사목활동의 책무를 점차 방인 성직자들 에게 인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6.25전쟁 당시에는 12명의 회원들이 희생당하였지만 1953년부터 다시 선교사들이 파견되어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경상북도 안동(安東)을 중심으로 한 일부지역이 1959년 파리 외방전교회의 지목구로 설정 되었다가 1969년 안동지목구가 대구 대교구로부터 분리되어 안동교구로 승격하였다.
 
현재 한국에서는 23명의 회원들이 서울·대전·안동·인천·대구·광주(대건 신학대학) 등 6개 교구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자체적인 주요 사업은 계획하고 있지 않고 한국 천주교회의 중요 사업계획에 협조하면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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