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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8-04-10
 제목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교단사
 주제어  [대한예수교장로회] [교단] [고신]
 자료출처  남영환 편저  성경본문  
 내용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교단사

韓國敎會 眞理運動史

(다음은 아래 책을 요약한 것인데 진리운동을 하는 목자들과 양떼들에게 도움과 위로가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말많은 이민교회에도 도움이..., 1991년 요약자)
"A source of spiritual strength to continue to fight the good fight until the day of His Second Coming"

* 편저자인 남영환 목사(高神 1회졸)는 일제 말 봉천 신학원에 재학 중 신사참배 거부로 학교에서 퇴학당한바 있었고 한국교회 진리운동사의 가운데에 있었던 분 중 한 분이다. 1983년도 高神 총회장.

* 괄호 안에 들은 것은 *표로 시작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요약자가 잘 모르는 평신도들을 위하여 설명으로 첨가한 것.



韓國敎會와 敎團
-高神敎團史를 中心으로-
(총 594 페이지) 남영환 편저

기독교는 역사적인 종교다. 많은 수가 순교하고, 적으나마 살아남은 이들의 가슴 속에는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과 생활의 경건을 지키고자 했으니, 기회주의자, 교권주의자와 신신학자에게는 눈의 가시같은 존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출발한 고려신학교가 평화롭기를 꿈꾸는 것이 오히려 오산이 아닐까. 박형룡박사의 교장취임과 이탈, 박윤선목사의 교장추대와 미스바운동, 법정소송으로 번진 고신과 총신의 싸움, 박윤선목사의 교단탈퇴 선언, 승동과 연동이 나뉘어지는 숱한 어려움을 겪어오면서 사공없는 배처럼 표류하기도 했었다. 또한 학교인가 파동과 재단 이사회 파동으로 얼룩진 역사를 가졌으면서도 고려신학교의 설립이념과 특수성이 개혁주의 정신을 변함없이 이어가고 있음을 생각할 때 오직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인 줄 알고 감사드린다.

교단이 걸어온 역사가 그동안 단편적으로 나오기는 했으나 사실상 전반적인 교단역사가 나오지는 못한 형편이다.
1988. 8. 엮은이 남영환


제 16장: 자유주의 신학(自由主義神學)의 태동과 형성

김재준(나중 한신학장)은 신학지남 1934년 1월호에 쓴 글에서 이사야가 예언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을 "젊은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해석을 덧붙였다. 그리고 거기서 `표적`을 꼭 `이적`으로 볼 것은 없다고 덧붙여 지적함으로 성경에 있는 초자연적인 성격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제17장: 신사참배 강요와 한국교회의 수난

북장로교 선교사이며 연희전문학교 교장이던 원한경은 "신사참배 문제는 개인의 신앙양심에 맡겨야 하며 학교는 당국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고 하여 신사참배를 주장하면서 연희전문 학교의 경우 신사참배를 하면서도 학교는 계속해야 한다고 보았다. 캐나다 선교사(연합교회로 자유주의)들의 경우도 마찬가지. 신사참배 문제에 있어서 시종 강경한 태도를 견지한 선교부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였다.(이 선교부 소속 학교, 모두 호남에 위치한, 는 모두 폐교함)

로마교는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일본에 대해 1932년 5월 26일자로 이미 신사는 국가의식으로, 충성과 애국심의 표명이므로 참배해도 좋다는 통첩이 보내졌다.

신사참배에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교파는 장로교회였다.
1938년 가을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가결시 봉천노회 소속 한부선(Bruce F. Hunt) 등 선교사는 그 부당성을 항의하다 예배당 밖으로 끌려나가기도 했다. 부회장 김길창 목사(해방후 1946년 경남노회장)의 인솔로 전국 노회장 23명이 총회를 대표하여 평양신사에 참배하였다.
필자는 해방 후에 주남선 목사가 구국 기도회나 구국 기도단을 만든 목사들을 상종하기조차 꺼려하는 것을 보았다. "기독신자가 죄는 버리지 않고 기도만 한다고 해서 그런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 주시겠는가"라고 반문하였다.


제18장: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저항

* 조직적인 신사불참배 운동(명단중 요약)

평북 중심인물: 이기선 목사(혁신복구파로 독노회조직, 1878- ?)
신의주: 김창인 목사(高神卒, 前 합동 총회장, 現 충현교회, 1917- )
강계: 고흥봉 목사(高神卒, 처음에는 재건교회, 1897- ?)
박천: 안이숙(후에 평양이거, 생존, LA, 現在 남침례교, 1907- )
평양: 이약신 목사(초대 高神 총노회장, 1897-1958)
이인재 전도사(생존, 보스톤, 高神卒, 1905- ), 함일톤, 마두원
선천: 김인희 전도사(재건교회, 1908-1950?)

경남 중심인물: 한상동 목사(高神 설립자, 1901-1976)
부산: 손명복 전도사(생존, 마산, 高神卒, 1973 高神 총회장, 1910- )
조수옥 여전도사(생존, 마산 인애원장, 高神, 1913- )
거창: 주남선 목사(高神 설립자, 1888-1951)
진주: 황철도 전도사(1959, 1964 高神 총회장, 1900- ?)
함안: 이현속 전도사(순교) 남해: 최상림 목사(순교)
마산, 통영: 최덕지 여전도사(재건교회, 1901-1956)
밀양: 박수민 장로(박장로는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아니했고 아들 박치덕<1990 高神 총회장>은 일본 해군에 입대했으나 신사불참배로 일본 해군 형무소에 있다가 2차대전이 끝나고 석방됐으니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만주 중심인물: 한부선(Bruce F. Hunt) 선교사(생존, 펜실베니아,
高神 개교 당시 교수, 1902- , 1992년 여름 소천)
전남 중심인물: 손양원 전도사(高神 초대총무, 사랑의 원자탄, 1902-1950)

1. 한상동 목사는 사람으로서 차마 견디기 어려운 고문을 다 받았다. 5년간의 옥중생활을 회고하면서 한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과거 5년간의 옥중생활을 회고해 볼 때 그 생활 전부가 나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은 추호도 없다. 진실로 주님은 살아 계셔서 나의 생활 전부를 주관하시고 예수는 능력의 주님이심을 나는 확실히 체험했다."

2. 이인재 전도사(1906-현재): 필자가 87년 미국 콜로라도 덴버(Denver Colorado)에서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의 과거를 못내 괴로워 했다. 자신이 예배당 소송문제에 대하여 한상동 목사의 고충을 좀더 이해를 했더라면 박윤선 목사도 고려신학교를 떠나지 않았어도 됐을 터인데 하고 눈시울을 적시었다. 한상동 목사는 예수를 믿으면서 부모(양부모)에게 쫒겨나와야 했고 신사참배에 대한 투쟁과 고려신학교 관계로 평생을 싸움으로 끝맺었으니 이 점도 이해는 해야 할 것이다. 이인재 전도사의 동생 이명재도(현 시카고, 高神졸)도 신사참배 문제로 학교를 다니지 않고 가정에서 공부했다.(이인재 목사는 미주의 예장(합동) 초대 총회장 역임)

3. 최덕지 전도사(1901- 1956): 1935년 평양 여자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설교한 것 때문에 체포된 것은 김을도 형사와 의형제를 맺고 있는 목사의 고발에 의한 것이었다(이 목사는 현재 서울에서도 유수한 큰 교회에서 목사로 재임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2차 투옥이었다. 이때의 당한 고문은 최덕지 전도사의 전 감옥생활에서 가장 혹독한 것이었다고 한다.
1945년 8월 17일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5년 혹은 6년간 투옥되었던 주의 신실한 종들이 각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 꼭 하루 전이었다. 하나님의 손길은 이렇게 놀라운 것이었다.


제19장: 해방과 교회재건운동

서울은 일본기독교 조선교단 세력의 지도자였고 신사참배 반대투쟁으로 투옥 혹은 출옥했던 지도적 인물이 없었던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였다. 1946년 남부총회는 재야 무임 교역자 배은희, 함태영을 정,부회장(둘다 능수능란한 정치가)으로 선출하고 이전 조선교단 때의 지도자가 계속 주도권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여기 교권과 정치적 야욕이 동원..." "친일의 불명예가 혹시 이 교단의 존속을 통해 상쇄되리라는 굴절된 정신의 표현..."라고 표현한 사람도 있다. 여기서 남부 총회가 법대로 안되었기 때문에 경남노회 대표는 주남선 목사를 비롯하여 퇴장하고 말았다.(감리교는 자리안배(?)로 끝남)


제20장: 경남지방에서의 교회재건운동

1. 경남노회 재건운동

경남은 남한에서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중심지였고, 신사참배 반대에 앞장섰던 주기철, 주남선, 한상동, 손양원 목사 등이 경남노회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영향하에 전국적으로 재건운동의 선봉에 섰던 것이다.
경남의 신앙부흥운동 준비위원회는 대표 최재화(1892-1962, 1949년 예장 총회장), 심문태 두 사람의 이름으로 1945년 9월 교회건설과 노회복구에 대한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 선언에서 저들은 종교개혁의 후예자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사실상 교단시대의 인물로서 신사참배에 앞장섰던 인물들인데,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체포, 구금되어 고문을 당하고 영어 몸이 되었던 이들이 임지로 나오기도 전에 교회 개혁운동의 기치를 실행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해방 당시 평신도들의 항거정신 곧 비진리를 대항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센 교회 재건의지를 의식하고, 저들의 신변확보와 교권을 유지하려는 기만적인 책략이었지 진실한 의미에서의 영적 재건운동은 아니었다. 이들의 교권유지를 위한 계략은 그 이후의 역사에서 잘 드러난다. 이 안은 최재화 목사를 중심으로 강주선, 김상순, 윤용술 목사 등에 의해 제안된 것이며, 이때는 한상동 목사나 주남선 목사등 출옥성도가 남하하기 전이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적어도 경남노회 지역에서의 자숙안은 출옥성도들에 의해 처음으로 제안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들이 즐겨 말하는 "출옥성도"라는 어떠한 교만과 독선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10여명의 목사들은 "신사참배는 우리가 양심적으로 이미 해결한 것인데 해방이 되었다 하여 죄로 운운함은 비양심적이다"라고 하였다. 출옥성도들이 남하하기 전에 이미 수습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김길창, 배성근 목사 등 일부 교권주의자들은 자기들을 회개시키기 위함이라고 하여 이 집회에 참여치 않았다. 집회 후 주남선 목사는 노회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수락을 거부하고 노회적인 회개운동 몇가지 실행조건을 제시하였다. 여기에 대해 찬반 양론으로 논쟁이 있었으나 결국 통과되었다. 그리고 결정만 되고 실시되지 않았던 현 교역자들의 자숙을 철저히 시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부 교권주의자들은 노회의 결의를 순응치 않고 여전히 교권장악 운동에 몰두하였다. 자숙안에 반대하는 교권주의자들의 주도권 장악운동은 그 후 경남노회를 혼란으로 이끌어 갔다. 이러한 일부 교권주의자들의 작전이 주효하여 다수가 자기변호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2. 고려 신학교의 설립과 개혁신학 확립운동

고려신학 학제는 본과 3년, 예과 2년, 별과 3년, 여교역자 양성과 3년 등이었다. 자주 이전하여 세칭 "보따리 신학교"라고 불리워지기도 했다. 1947년 4월에는 송상석 목사(당시 50세)가 자원하여 박형룡 박사를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모시기 위하여 인천에서 작은 동력선을 전세내어 봉천서 떨어진 영구에 입항, 봉천으로 들어가 그를 모시고 9월 20일 무사히 귀국했다.
박형룡 박사(숭실대, 남경 금능대, 프린스톤, 루이빌 남침례교 신학교)는 평신교수였는데 당시에는 만주 봉천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었다. 박형룡은 그 해 10월 14일 부산 중앙 교회당(당시 노진현 목사 시무)에서 교장 취임식을 가졌다. 이때는 조선 신학교 학생 34명(정규오, 김준곤, 차남진, 박창환 등)이 부산으로 내려와 이미 고려신학교에 편입하고 있었다. 그때는 2학기 초로서 박형룡 박사가 귀국하여 교장으로 취임할 것을 알고 편입했던 것이다. 필자가 신사참배 거부로 학교에서 퇴학을 당할 때 만주 봉천신학원 정상인 교장은 교장실로 불러 두 목사를 돌보는데도(신사참배 거부 양해) 힘에 겨운데 학생까지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3. 경남노회와 신사참배 문제

1946년 12월 3일 진주 봉래동 교회에서 경남노회 제 48회 정기노회가 열렸다. 이때 교권주의자들은 사전 선거운동으로 교단시대 경남교구장이었던 김길창 목사를 노회장으로 선출하고 노회 주도권을 잡았다. 이때로부터 신사참배 문제 및 교회재건에 관한 노회 분위기는 급선회하였다. 한상동 목사는 이 당시를 회고하기를 "그때는 누구나 부인할 수 없이 신사참배는 죄가 아니다 라는 공기로 화하였다"고 하였다. 이때 모 회원이 노회장으로 하여금 신사참배가 죄가 아니냐를 표명하라고 할 때 도리어 신사참배에 대하여는 더 이상 거론하지 못하도록 가결하고 말았다.

한상동 목사는 "불손한 태도를 고침이 없이 그대로 나아가는 경남노회가 바로 설 때까지 탈퇴한다"고 선언하고 퇴장해 버렸다. 그의 탈퇴는 "바로 설 때까지"라는 탈퇴였으므로 경고의 의미가 더 많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 목사의 탈퇴선언은 교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일부에서는 이 부패한 노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 투쟁하기로 하고 1947년 1월 3일자로 경화동, 초량, 문창, 부산진, 거창읍, 영도, 남해읍교회 등이 연합하여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부산노회 소속 67개 교회는 제 48회 노회의 결의에 항거하고 한상동 목사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고, 또 면려청년회가 주동이 되어 초량교회에서는 신도대회를 열어 주상수 장로(후에 재건파 목사가 됨)를 회장으로 선출하여 회개운동을 수습하기 위해 1947년 3월 10일 구포교회에서 임시노회를 소집하였다. 교권주의자들은 인신공격과 신사참배를 범죄로 몰아 이에 대하여 성명서를 발표한 사람들을 노회에서 처분하겠다고 위협하였다가 대세가 불리해지자 노회장 김길창 목사 이하 전 임원은 총 사직하고 비로서 신사참배는 죄란 말을 하고 일본기독교 조선교단 시대의 범죄사실에 대해 교리적으로 잘못된 점을 인정했다. 그리고는 한상동 목사에게 탈퇴성명서를 취소하라는 성명서를 내라고 종용했다. 이때 한상동 목사는 신사참배는 죄라고 표명한 것이 회개하는 신앙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경남노회 소속 대부분의 교회가 탈퇴성명에 가담하게 되므로 저들의 입장이 난처하게 된 것을 모면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알고 저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사실 노회 임원의 총 사퇴는 단지 평신도들의 항거대세에 못이겨 취했던 잠정적인 후퇴였지 결단코 자숙하는 의미는 아니었다. 구포 임시노회 소식이 퍼지자 그 해 3월 24일 마산 문창교회 등 68개 교회 평신도 대표 200여명이 모여 황철도 전도사를 회장으로 추대하고 경남노회의 부패성과 그 교권주의자들의 비양심적인 태도를 규탄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해방 후의 진리운동은 평신도들의 항거정신이 가져온 결정체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때 별개 노회를 조직했더라면 경남노회는 거의 단결된 상태로 수습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이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는 고신을 그야말로 독선주의자요, 이탈자라는 낙인을 떨치지 못하게 하였을 것이다. 교인들의 거센 항거에 눌려 고신에 가담한 사람들도 도리어 후일에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인물들 이었다는 점이다.

최덕지씨(女)를 중심한 과격파는 한상동 목사를 타협주의자로 몰아세우면서 마침내 재건파라는 단체를 만드는 구실을 삼고 하나의 단체를 형성했다. 이들이 인용하는 성경은 요2서 10, 고전 5:11, 살후 3:6인데 이 귀절의 본뜻은 성도로서의 교제를 단절하라는 것이지 사회적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재건교회는 2만신도를 가진 현존교단으로 교회사적 가치가 있다)


4. 박형룡 교장의 고신 이탈의 원인

박형룡 박사는 주한 4장로교 선교부와의 관계와 합작을 희망했다. 그러나 한목사는 자유주의적인 선교부의 원조를 거절했다. 박박사는 "(시행도 안되는) 권징보다는 복음 전파자 양성에 주력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1948년 4월 고려신학교 교장직 취임 꼭 7개월 만에 서울로 올라가고 말았다.
박박사에게 사랑을 많이 입었고 필자의 가족을 만주에서 귀국시켜준 은사에게 누가 되는 말이기는 하나 후일의 결과를 보아 보수신학자의 분열에 결정적인 결과를 남긴 사실만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 된 셈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근본적인 이유는 서울에서 편입한 학생들의 집요한 설득과 노진현 목사를 위시한 기회주의자들의 강력한 회유와 전국교회 전체라는 대세주의와 4대 선교부에 대한 집착이 빚은 결과라 하겠다. 한상동 목사는 십수년이 흘러간 후에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다. 박형룡 박사야말로 고신운동을 함께해야 할 친구였다. 박형룡 자신도 연동과 승동측이 갈리면서 몹시 후회했다. 그러나 박형룡 박사의 고신 이탈로 조선신학교가 잘되기에 앞서 고신운동을 총회밖으로 몰아내는데 전 총회가 힘을 합하였으니, 이는 마치 전술은 만들어 주었으나 전쟁할 용사는 처단해 버린 결과를 낳게 했다. 그때부터 박형룡 박사는 전사(戰士) 없는 전술자(戰術者)로 수는 많았으나 전력이 약화된 보수주의의 외로운 걸음을 걸어야 했다.
이 사건은 실로 큰 충격이었다. 학생과 교회가 동요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조선신학교에서 박형룡 박사를 따라 편입해 온 대부분의 학생들, 당시 고려신학교 학생 반 수 이상이 그를 따라 가버렸다. 한상동 목사가 받은 충격도 큰 것이었다. 그는 이일로 일주일간 입원하기까지 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박형룡 박사가 고려신학교를 떠남으로해서 일시 머리를 숙였던 일부 교권주의자들이 다시 일어나 교권쟁탈전을 맹렬히 전개하였고, 고려신학교를 중심한 인사들의 교회 갱신운동과 교회 재건운동의 이념을 흐리게 하였고 장로교회 분열운동에 한 계기를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떠남은 그 이후의 한국교회사와 장로교 분열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신학자라는 인정을 받은 박박사를 수용하지 못하는 독선적인 소수라는 비난의 근거를 제공한 셈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또 이런 말까지 주고 받았다. 당시 장로교를 범으로 비유하면서 "범을 잡기 위해서는 범의 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에 한상동 목사는 "범을 잡기 위해 범의 굴에 들어가는 것까지는 좋으나 범을 잡기 전에 먹히면 어떻게 되겠읍니까" 라고 대답했다. 이처럼 간격을 좁힐 수 없었으나 후일에 이 일을 회상하면서 박형룡 박사도 눈물을 흘렸다.
그 첫화살은 1948년 7월 "고려신학교와 소위 신성파(所謂神聖派)"에 대하여 라는 성명서를 통해 나타났다.
후에 그렇게 염원하던 네 장로회 선교부에 의해 박형룡 박사도 단절되고말았다.(미북장로교<프린스톤 등>는 이미 1929년에 자유화 되었던 것) 1948년 9월 경남노회는 44대 21로 고려신학교 인정취소를 결정하고 말았다. 또 신사참배에 대하여 양심 운운 한것은 신학박사라야 해결할 문제라는 발언도 나왔다. 한상동 목사는 이 노회에 참석하여 구약을 부인한 사실과 신사참배 동방요배 "미소기 바라이" 등 이런 일을 한 사람들을 믿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때 회원석과 방청성에서 회개운동이 일어났다. 어떤 사람은 천조대신의 이름으로 부산 송도 앞바다에서 "미소기 바라이"까지 했다면서 통곡으로 참회했다. 이때에 김길창 목사는 "미소기 바라이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서 이것은 처음 듣는 말이라고 했다. 사실 김길창 목사는 일제 시대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의 연성국장이었고 경남 교구장이었다. 그는 휘하의 교직자에게 송도 앞바다에서 일본의 신(神) 천조대신의 이름으로 "미소기 바라이(물세례)"를 강행시킨 장본인이었다. 이때 한목사는 그를 제명처분하자고 했으나 이 제안은 6개월 후에 표결하여 결정하기로 하고 폐회했다.
이때로부터 경남노회는 고려신학교와 출옥성도를 지지하는 일파와 고려신학교를 적극 반대하는 교권주의자를 지지하는 분파, 중간파 이 3파로 분열되었다. 이런 일은 총회가 원만히 살폈다면 그때에 김길창 일파를 잘라냈어야 할 것인데 후일에 김길창(1891-1977)을 세번이나 제명해야 하는 과오를 범했던 것이다. 보수로 자처하던 사람들이 오히려 고신을 잘라내기 위해서 열을 올렸던 것이다.


제21장: 고신교단(高神敎團)의 형성

요즈음 고려파란 이름이 어디서 유래했느냐는 질문이 더러 있다. 그러나 고려파란 예나 지금이나 공식 명칭은 아니다. 고신을 향하여 좋지 않게 부르는 이름이 지금은 거슬리게 들리지는 않는다.


1. 총회의 경남노회 처리문제와 평신도들의 항거

1948년 제 34회 총회에 전남노회로부터 고려신학교에 학생을 추천해도 좋으냐는 문의가 제출되었으므로 총회 역시 저들이 즐겨쓰는 상투적인 술어 `독선적` 태도를 옳게 여기지 않을 뿐더러 총회와는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치부장 김관식 목사는(일본기독교단 조선교단 3대 통리) "고려신학교는 우리총회와 아무 관계가 없으니 노회가 추천을 해 줄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1949년 대구에서 모인 35회총회는 고신 관계자와의 강단교류까지 금지시킨 것이다. 박형룡 박사를 중심한 기회주의자들과 소수의 교권주의자들과 조선신학교를 둘러싼 비평주의자들이 합작하여 일으킨 합동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와같은 총회 전권위원의 불법적인 처사에 대한 평신도들의 항거는 대단한 것이었다. 1949년 8월 28-29 양일간 마산 문창교회에서는 경남 신도대회를 열고 이에 참가 하였던 1천여 명은 선서문을 발표하여 경남노회 문제에 대한 총회의 부당한 처사를 항의했고, 같은 날 기독청년 면려회 경상대회원 일동도 이와 유사한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실로 경남노회를 비롯한 진리운동에 있어서 평신도들의 열망은 대단한 것이었다.


2. 제36회 총회의 경남법통노회(高神) 단절

1950년 대구 제일교회당에서 열린 제 36회 총회는 전국교회의 관심이 집중되었기에 개회 몇시간 전부터 방청인이 빈틈 없이 모여들었는데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결국 경찰이 동원되는 등 한국교회 70년 사상 처음보는 대치욕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이 총회를 방청한 500여명의 신도들은 다음날 신도대회를 개최하고 교계 지도자들의 반성을 요구하였고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 해 성탄축하 예배 때는 이곳에서 불상사가 생겨 50여명의 주일학교 아동이 압사를 당하는 비참한 사고가 일어났던 것도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이때 178여 교회중 경남 법통 노회가 133여개 교회의 지지를 받았고 3분 노회를 지지하는 교회는 26개 교회 정도였고, 19개 교회는 중립적인 입장이었다.
한편 1952년 대구 서문교회당에서 열린 제 37회 장로교 총회에 경남법통노회 총대가 다시 참석하여 총회와의 관계정상화를 힘썼으나 동 총회는 경남법통노회가 파송한 12명의 총대를 제명처단하고 "고려신학교와 그 관계단체와 총회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재언명으로 경남노회 문제는 총회 밖으로 추방당했다. 김양선 목사(敎會史家)는 "한국교회 70년 사상에 있어서 이때처럼 교권이 행세된 때는 없었다"고 했다.
교회사가인 김양선 목사(총회측)의 해방 10년사를 다음과 같이 첨부한다. 1946년, 1948년에 이어 1954년 제 38회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를 재삼 취소하고 자숙안을 택했다. 이것은 도리어 총회가 신사참배의 범과를 통절히 뉘우치지 못하였다는 증거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일부의 교권주의자의 자기명예를 위한 형식에 불과한 것이었다. 신사참배의 죄과는 하나님과 직접 해결될 문제라던 종래의 입장과는 달리 자숙안을 결의한 것은 자기모순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당시 초량교회의 약 500여교인 중에서 양성봉 장로, 구영기 장로 가족 모두 23명이 한목사의 나가는 것을 총회편에서 지지했고, 그외의 모든 교인은 한목사와 경남법통 노회를 지지했지만, 한목사는 빈손으로 초량교회를 나와서 1951년 10월 14일 주영문 장로 집뜰에, 이날은 비가 왔으나, 입추의 여지없이 교인들이 모여들어 예배를 드렸다.
(No canvass over head... -- a drive-in church a la Korean, so to speak. The rain drops were falling but... An umbrella in one  hand, a Bible and a hymn book in the other, Rev. Han opened the service with prayer. 한상동 목사님 전기 "세상 끝날까지"의 영문판 "Till the End of the Age"에서 발췌) 경남노회는 총회지시라는 명목으로 전혀 사전연락도 없이 1951년 9월 18일(주일) 10시 40분에 예배당 접수위원 노진현(현 부산중앙교회 원로목사, 합동신학원 이사장, 1957년 예장 총회장), 강주선, 양성봉장로 등 9명이 예배당에 들어가 강단을 점령했고, 사복 경찰관이 떼를 지어 점령했다. 이광경을 본 한목사는 졸지에 당한 일이라 매우 당황했고, 먼저 온 교인들도 영문을 모르는채 분위기가 살벌했다. 주기도문을 외우는데 통곡이 터져나왔다. 주기도문이 끝나고 돌아섰다가 "저녘예배에 다시 나오십시요"라고 하자 불과 20여명이 남고 다 나가버렸다. 강단을 점령했던 목사들도 설마하니 아연했던 모양이다. 그날 저녘에도 위원들은 일찍왔다. 저녘에도 같은 방법(찬송만)으로 예배는 끝이났다. 이 광경을 본 강주선 목사는 "목사가 무슨 할 일이 없어..." 하면서 통회기도를 드릴 정도였던 것이다.
("Since a suitable location for worship is not immediately available, please allow me a month to find one ." But the opponents vigorously refused the request, "you don`t need a month to get out. You might as well get out now.", `Till the End of the Age` 에서)
한목사는 이들과 만나 예배당은 조용히 비워줄테니 교인들을 자극시키지 말라고 당부하고 이들도 한목사의 제의를 받아들여 다시는 오지 아니했다. 한목사는 예배당을 비워주는 것은 이미 마음에 굳게 정했으나 교인들이 쉽게 따라 주지 아니했다. 우리가 지은 예배당을 1/20 밖에 안되는 그들에게 우리는 갈곳도 없이 내어줄 수는 없다는 것이 상당수의 주장이었다. 다음 예배당 소송문제이다. 다시 말하겠지만 한상동 목사가 예배당을 내어주는 것이 성경적이거나 신학적이거나 교리적이라기 보다는 덕 문제에 중점을 둔 것이었고 양떼에게 피차 상처를 남기지 않겠다는 것이며 또 하나님의 영광에 손해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믿음의 실천이었다는 점을 부언한다. 그 후 삼일교회는 고신운동의 중추적인 교회로 성장해 갔다. 동시에 고신교단의 산실이었다.
1951년 8월 19일 주일 대구 서문교회에서는 고려신학교 신앙노선을 따르는 김주오 장로, 박복달 집사 등 6명을 제명처분했다. 이것이야말로 재판도 없이 강압적인 방법으로 교인을 제명한 첫사건이었다. 경주에서는 윤봉기 전도사를 중심으로 경주교회가 설립됐고 대구와 경북지방 곳곳에 진리운동의 횃불이 붙어갔다. 1951년 10월 15일자 청년면려지에 따르면 281개 교회의 173명의 교역자가 고신운동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1952년 총노회가 정식으로 조직될 때는 이미 300여 이상의 교회로 성장했음이 분명하다.
36회 총회에서 실제적으로 절연을 당한 경남(법통) 노회는 1년이 지나도록 총회의 태도가 변함이 없자 1952년 9월 11일 진주 성남교회에서 모인 57회 경남(법통) 노회에서 총노회 조직을 결의하고 그날 밤 11시 20분에 목사 50명, 장로 37명의 총대가 참석한 가운데 임시회장 이약신 목사의 사회로, 찬송 46장(신편)을 제창하고 회장이 계 2:8-12을 봉독하고 "죽도록 충성하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후 찬송 87장을 제창함으로 예배를 폐하고 역사적인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노회를 조직하였다. 회장 이약신 목사, 부회장 한상동 목사, 서기 홍순탁 목사, 회록서기 오병세 목사(전 고신대학장), 부서기 윤봉기 목사, 회계 주영문 장로, 부회계 김인식 장로 제씨가 피선되었다.
송상석 목사는 총회의 불법적인 처사를 몇가지만 지적한다고 전제하고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8가지로 조목조목 교회법에 따라 지적하였는데 생략, 요약자)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노회 발회식 선포문
... 참 회개가 없는 자에게 참 믿음이 있을 수 없고... 전술한 신학 사상과 궤변으로 인한 신앙노선의 곡로(曲路)가 대한 예수교 장로회 헌법 정신을 떠나 이교파적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수수 방관하고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은...
이 선포문 속에 "개혁주의"란 말이 세번이나 언급된 것은 고신운동의 신학적 성격을 잘 반영해 준다고 하겠다. 고신운동은 단순히 신사참배를 반대한 교회정화 운동일뿐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적 흐름에 반대한 개혁주의 신학확립 운동이었던 것이다.
1953년 5월 경북노회가 조직되고 1956년까지 6개 노회가 조직되고 동년 9월 20일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역사적으로 조직되었던 것이다.


제22장 진리운동의 계승과 확산

1. 박윤선 교장 취임과 손양원 목사 총무취임

1948년 5월 박윤선 교수는 제 2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손양원 목사(일명 "사랑의 원자탄")는 이때부터 고려신학교 총무로 봉사하였다. 박윤선 교장은 미국 웨스트민스트 신학교에서 수학하였고 거의 대부분의 신학분야를 교수하였다. 심지어 헌법까지 교수하였는데 자신은 정치를 못하면서도 교수는 불붙는 명교수였다. 한국의 현역 목회자들 중에도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장로교 목사는 거의 없으며 그의 신구약 주석은 아직까지도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진 주석이다.
손양원 목사는 고려신학교 총무로 많은 봉사를 하였는데 1950년 9월 28일 여수에서 인접한 미평에서 아들 손동인, 손동신의 뒤를 이어 공산당에 의해 순교하고 말았다. 손양원 목사가 남장로 교회가 경영하는 여수 애양원 교회에서 시무하면서 순천노회와 선교사의 유혹과 압력을 받으면서도 고신운동에 앞장선 것은 자신의 힘도 있었지만 애양원 교회가 손목사의 신앙에 절대 순종했던 데도 가능했다. 애양원 원장도 이들을 갈라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덕환 목사의 일행이 손목사를 붙들고 당신은 동인형제 사건도 있고 하니 피란을 해야 한다고 강권했을 때 손목사는 본래 유모어가 풍부한 사람이었다. 태평성대처럼 웃으며 "목사님들은 복이 있읍니다. 양떼가 강건하니 양떼를 몰고 피난을 갈 수 있읍니다마는 나는 모든 양떼가 병들어 있읍니다. 이들을 버리고 어떻게 나만 홀로 피난을 갈 수야 없지 않겠읍니까?" 하고 완강히 거절하였다. 신기하게도 손목사가 총살당하는 바로 그 시간에 손목사의 부인이 동길이란 어린 유복자를 낳았고 그는 현재 목사로 교회를 섬기고 있다.(경기도 성남시 산돌교회<예장 대신>, 산돌<山乭>은 손양원 목사 호)


2. 고려신학교 송도이전

제1영도 교회를 시무하던 한명동 목사(1908- , 1968 高神총회장, 부산 남교회 원로목사)가 교회개척과 함께 신학교 강사겸 학교 사감으로 지키면서 고생하였다.(1910년 이전 출생으로는 유일한 형제 목사로 합하면 성역 90년)
이런중에서도 박윤선 목사는 처음으로 공관복음 주석을 출판했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한상동, 박윤선, 이약신, 박손혁 목사를 초청했고 박봉화 장로는 ICCC에서 초청했다.
현 송도에 있는 암남동 산 34번지 신학교 건축 때에는 국내외(CRC 등) 여러 교회의 정성어린 헌금과 특히 이인재 목사(出獄聖徒)가 들여놓은 사재 등 전국교회 성도들이 양식을 싸가지고 와서 학생들과 함께 노력봉사를 하여 이루어진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고신에 불하하도록 지시한 땅은 중앙대학의 설립자 임영신씨와 재판이 붙어 이 안건을 당시 대법원 판사 사광욱(史光郁, 당시 중앙교회 장로)씨에게 배정이 된 것을 같은 교단이고 해서 승소를 해도 오해받을 여지가 있어 임영신 여사와 가까운 방 모 대법관에게 배정을 했는데 여기서 승소 했다. 결국 고신이 승소는 했으면서도 땅은 다른데로 넘어갔으니 실로 웃지 못할 일 가운데 하나였다.


3. 파수군의 창간과 문서운동

고신의 문서 파수군(把守軍)은 특히 모든 교역자에게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비단 고신운동에 참여한 교역자 만이 아니라 거의 전국적인 환영을 받은 것은 그 이유가 개혁주의적인 혹은 보수주의 입장에서 칼바르트나 부르너의 현대주의를 비판한 것이나 예배당 소송문제 등, 박윤선 목사와 송상석 목사와의 논쟁은 당시로서는 보기드문 문서로 전개한 논쟁이라든지 또한 당시 보수적인 서적들이 흔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교역자들과 평신도들의 신학정립과 신앙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승동측과의 합동과 환원의 과정에서 승동측 기관지로 넘어가고 말았다. 파수군지는 그 뒤 합동측의 기관지 기독신보로 발전되어 우리 교단과는 상관없는 문서가 되고 말았다.(현재는 `월간 고신`인데 2만부로 신앙월간지로서 2위의 발행부수)


4. 학생신앙 운동과 청소년신앙 운동

"학생신앙 운동(Student for Christ, SFC)" 이 제1영도교회 한명동 목사 사택에서 몇몇사람이 자리를 같이하여 시작하였다. 1950년 3월과 5월 사이에는 부산시 전역에서 축호전도를 실시하였는데 요한복음 10만부를 배포하기도 하였다. 학생 신앙운동의 강령의 기초자는 박윤선 교장이었다.
주남선 목사는 1950년 거창 성경학교를 설립하였다. 오종덕 목사(1891-1976)는 부산에 고려 고등성경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시무하면서 또 부민교회를 개척하였다. 오종덕 목사가 많은 후배양성과 개척교회 설립으로 큰 기여를 하였음은 그의 제자들의 국내외 활약으로 알 수 있다.


5. 사회참여와 복음병원

복음병원은 1951년 6월 김일성대학 의과대학 외과과장을 지낸 장기려 박사(이광수의 소설 `사랑`의 모델로 널리 알려짐, 요약자)가 취임하였다. 장기려 박사는 한상동 목사가 출옥하면서 평양 산정현 교회를 담임할 당시 같이 장로로 있었다. 그래서 한목사의 신앙을 평생으로 흠모하고 있었다. 그는 이로부터 1976년 6월까지 25년간 병원장으로 봉사하였다. 환자는 하루 150명에서 200여명 정도였으나 처음 3년간 치료비는 전혀 받지 않았다. 복음병원은 고신교단에 속해 있었으나 법적으로는 독립되다시피 했던 것이나 1965년 9월 고신 총회 유지재단에 편입하여 명실공히 오늘의 고신의료원으로 거보를 내딛게 되었던 것이다. 곧이어 당시는 의료보험이란 꿈도 못꾸던 때인 1966년 4월 청십자(靑十字) 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에 장기려 박사가 취임하였다. 국내적으로도 최신시설을 갖춘 종합병원으로 성장하여, 현재 레지던트와 인턴을 포함하여 의사가 154명이 있고 각종 기사, 약사, 간호원, 행정부 직원 등 526명 합계 680명이 병원에서 봉사하고 있다.


6. 교단의 발전과 치리회의 정비

고신운동은 부산, 경남을 모체로 출범하였다. 이 당시 경남(법통) 노회, 곧 총노회를 지지한 교회 수는 312개 교회로서 지역적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현재 제9영도교회까지 있다.)
부산(37개 교회): 삼일, 남, 제1,2,3,4 영도, 부민, 경찰병원 등
동래(12), 울산(12), 밀양(16), 김해(21), 창원(29)
마산(4): 문창, 제이문창, 신마산, 산호,
창녕(10), 통영(26), 고성(6), 진주(4), 진양(20), 의령(11), 사천(8), 남해(8), 하동(11), 산청(5), 거창(23) 함양(14), 합천(1)
그 후 타지역의 교회들도 고신의 진리운동에 동조하여 교단에 가입해 옴으로써 지역적 관할을 위하여 대구지방회, 경주지방회, 전라지방회를 두었다.
1956년 총회조직 당시의 교단의 교회 수는 568개였고 목사는 111명, 전도사 252명, 장로 157명, 세례교인 수는 15,350명으로 나타나 있다.
노회 계 경남노회 경기노회 전라노회 경북노회
교회수 565 387 42 24 112
% 100 70 7 3 20


7. 선교사업

(1) 김영진 선교사 파송과 선교운동

1956년 제 5회 총회에서는 선교지를 대만으로하여 김영진 목사를 선교사로 정식 파송키로 결의하였다. 1957년 9월 부산 남교회당에 모여 제 7회 총회 회기중에 파송식을 거행하였다. 이날 파송식은 선교부장 이인재 목사(현 보스톤)의 사회와 남영환 목사의 "보내시는 성령님(행11:19-26, 13:1-5)"이란 제목의 설교로 진행되었다. 다음해인 1958년 5월 김영진 목사는 미상선 에베레스트(M/V Everest)호를 타고 부인 임옥희 여사와 딸 난나 등 세가족이 함께 임지인 대만으로 떠났다. 대만에 파송된 김영진 선교사는 신죽을 선교지로 선교사역을 전개하였고 신죽, 화원 등 산족을 위시하여 전국 각지에 개척교회를 설립하는 등 활발한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이후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대만 선교활동)

(2) 선교사 파송과 해외교포 관리

계속해서 동부산 노회에서는 유환준 목사를 대만에 파송, 등촌교회에서는 이병길 목사를, 인도네시아에는 서울 중앙교회에서 김종국 선교사를 파송, 전국 여전도 연합회에서는 이헌철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일본에는 조병철 목사를 파송하였고, 변재창 선교사, 김소익 목사, 류영기 목사, 이정길 목사 등이 많은 활약을 하고 있다.
아프리카에는 이신철 목사(이근삼 교수 아들)와 박은생 목사가 있고 남미에는 브라질에 정길수 목사, 아르헨티나에는 이종철 목사를 파송했으나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세상을 떠난후 브라질에는 손창호 목사가 활동하였다.(현재는 배성학 목사)
북미에는 카나다 토론토에서 박상순 목사가 크게 활동한 후 김용출 목사를 초빙후 세상을 떠났고 고신출신 가운데 정도령 목사와 오타와에는 문성출 목사가 크게 활동하고 있다.
미국에는 필라델피아 한인 장로교회를 시무하는 김만우 목사가 해외선교에 까지 손을 펴고 있고 서부에는 산호세에 마산 동광교회가 신현국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하였고 85년에는 미주 총노회를 조직하여 박재영 목사가 초대 총회장으로, 86년에는 신현국 목사가 총회장으로, 87년에는 전재린 목사가 총회장으로 활약하고 있다.(4대 총회장 김만우 목사, 5대 총회장 정필흠 목사, 6대 총회장 김용출 목사) 샌프란시스코의 상항제일교회에 김정곤 목사(현 부산 동래구 온천교회)가 부임하였고 장희선 목사는 상항 장로교회를 설립하여 교회가 성장해 가고 있다.
미주 총노회는 뉴저지 제일한인교회에서 시무하는 박재영 목사가 크게 활약하고 있는데 박재영 목사는 고신교단 초창기 이전에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투쟁하던 밀양 마산교회 고 박수민 장로의 손자요 박손혁 목사(高神 교장 역임)의 큰아들이다. 또 총노회의 주역인 김만우 목사는 고신교단을 위해 충성한 김희도 목사(1971년 高神총회장)의 큰아들이며, 산호세교회 신현국 목사(高神 총회서기 7년)는 삼일교회 부목사로 한상동 목사 밑에서 신앙훈련을 받은 골수로 처음부터 미주에 고신운동을 전개한 사람이다. 이 세사람은 미주총회의 솟발이기도 하다. 로스앤젤레스 오렌지 카운티에 있는 정필흠 목사는 미주총회를 열심으로 봉사하고 있으며 워싱톤에는 윤정태 목사가 크게 활약하고 있다. 전재린 목사는 피닉스에 두교회를 세워 후임자에게 맡기고 1987년 오레곤에 한인교회를 개척하였다. 미주교회의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해 교회적으로 노회에 가입한 교회는 덴버에 우영종 목사교회 휴스턴에 있는 조봉환 목사교회, 캔사스에 있는 송진섭 목사교회, 시카고에 있는 하청조 목사가 시무하는 고려 장로교회와 필라델피아 초대교회 임종수 목사가 개척한 교회가 있고 그외에도 많은 교회가 가입하고 있는 줄로 안다.(4년 후 현재, 교회와 담임 등 변화가 있다, 요약자) 덴버에 있는 이인재 목사는 고신과 법적 관계는 없으나 87년도에 필자가 만났을 때 미주에 개혁주의 운동(고신)을 적극 협력하고 있음을 보고 무척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근일에 이성옥 목사(1952 교단 창설 멤버)의 소천소식을 들었을 때 비감한 마음도 있었으나 LA에서 외롭게 고신운동을 위해 일하다가 하나님 앞에 간 줄로 안다. 미국에 시애틀에는 구자경 목사, 유타에는 명병현 목사, 켄사스에는 송진섭 목사, 필라델피아에는 김진섭 목사, LA에 조성 목사, 변의남 목사, 신용규 목사, 한기원 목사, 배명환 목사, 박수홍 목사, 박대근 목사, 이재근 목사, 전진생 목사 등은 총회회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필리핀에는 남수후 선교사와 김형규 선교사, 김자선 선교사가 활동하고 있다. 홍콩에는 이 선 선교사와 방종창 선교사가 활동하고 있다. 싱가폴에는 이상룡 선교사가 활동하고 있다. 호주에는, 본래 홍관표 목사가 교포교회를 위하여 호주 연합교회 초청으로 갔었으나 신앙의 부조화로 독립하여 교포교회를 섬기면서 중공선교와 모국교회를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고 김성진 목사가 호주에서 일을 하고 있다.
유럽은 포르투칼에 강병호 선교사가 활동하고 있고 스페인에는 김대영 선교사와 김학우 선교사, 도만기 선교사, 황상호 선교사(현 모스크바), 강화식 선교사, 지영범 선교사 등이 가장 활발하게 일을 하고 있다. 서독에는 부산지방 여전도회에서 파송한 김은수 목사와 최한주 목사와 박의석 목사가 착실히 일을 하고 있고 화란에는 장희종 목사가 일을 하고 있다.


8. 칼빈학원의 설립과 인문교육

당시 교수에 참여한 분으로는 교장이었던 한명동 목사 이외에도 장석인 목사(교단 창설 멤버, 고 장준하 선생 부친), 김진홍 목사 등과 김진경(연변조선족기술대학교 설립학장, 55세), 차영배(1993년 총신학장), 김성환, 김성린, 조영석A, 조영석B(두분이 동명이인이어서 A, B로 구별되었다), 이호기선생 등이 있었다. 다른 교단들은 그 배경이 외국 선교부의 원조가 컸었음에도 불구하고 중학교(당시 5년) 졸업생을 받아 3년만 교육시켰으나 고려신학교는 예과 2년을 가르치고 신학 3년을 가르치는 학제를 채택했으니 그 어려움은 이루 형용할 수가 없었다. 다시 용기를 얻어 1955년에는 과감히 4년제 대학 졸업생을 받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그 후 차차로 다른 신학교도(장로회 신학교와 총회신학교) 학제를 고려신학교와 같이 했던 것이다. 앞으로 신학 대학원은 서울지역으로 이전할 것을 계획하고 있다.


9. 박윤선 교장의 사임이 몰고온 파문

1960년대 혼란과 위기 가운데서도 소위 세박사로 불리웠던 홍반식(71), 오병세(67), 이근삼(69) 등 3인(1946년 고신 1회 입학, 5회 졸업)이 귀국하였다. 1960년 7월 미국 정통장로교 소속의 스푸너 선교사가 안식년을 맞아서 배편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다음에 설명이 나오지만 이미 송별을 한 후였는데, 배의 출발이 늦어졌던 것이다. 여기 사실과는 거리가 먼 두가지 문제가 있다.

(1) 자가용의 고장으로 유료택시를 탔다는 것이다. 당시로서는 그것도 전혀 문제가 안 된 것은 아니다.
(2) 유료택시 문제보다도 중요시 되었던 것은 대예배에 불참했다는 것이다.

이 문제가 말이 많았으나 이 문제도 손명복 목사의 중재로 한상동 목사와 이사들이 동의하여 "미안하게 되었다"라는 사과로 일단락을 지었다. 그런데도 결국은 떠나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합동은 급속도로 진전되었던 것이다.


제23장 난기류에 봉착한 교단

아직 고신교단이 형성되기도 전에 고려신학교와 관계를 같이하는 교회는 예배당을 명도하라는 것이다. 당시 유지재단 이사장은 김길창 목사였다. 초량, 영도, 문창 등 대표적 큰 교회 5곳을 골라서 명도를 요청한 것이다.
그런데 고려신학교를 따르는 교회와 노회를 잘라내면서 재산명도(財産明渡를 요구한 배경에는 몇가지 복선이 깔려 있으니
1) 사람은 여간 신앙이 있다해도 자기가 바친 헌금과 땀흘려 쌓아올린 예배당에 마음의 애착이 따르게 마련이니 교인들의 마음을 최대한으로 흔들어놓자는 속셈이고
2) 원고보다 피고가 항상 어려움에 시달리는 약점을 최대한 노린 것이고3) 출옥성도(出獄聖徒)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붙여 주면서 거룩한 사람들이 왜 재산을 가지려는 속화된 사람으로 떨어지려느냐는 약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1. 법정에 명도 소청

초량교회는 신청하기 전에 내어주었다. 초량교회 예배당을 명도받음으로 그들은 모든 것이 그들의 승리로 연결될 것으로 착각했다. 여기서 소송을 제기한 것은 고려신학교 측이 아니라 당시 총회파라고 자처하던 총회가 한 것이다.
(철면피(鐵面皮)같은 예배당 탈취를 만류하는 자(목사, 교수)가 총회측에 한사람도 없었단 말인가?, 요약자)
고려신학교 측은 교회당이 총회나 노회 재산이 아니라고 주장 응소한 것이다. 영도교회당도 접수하려고 위원을 선정했으나 내부에 틈이 없어서 실행치 못했다.
2) 초량교회는 그 교회 장로인 양성봉씨(당시 경남 도지사요 이승만 대통령의 총애를 받은 막강한 실력자)가 접수위원이었고 거기 따른 수십명의 교인이 합세했으나 한목사가 내어주지 않았으면 그들이 아무리 관권을 동원했다 할지라도 상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중추적인 초량교회를 한상동 목사가 순순히 내어준 것에 대하여 송상석 목사의 불만은 대단했다. 진주교회 황철도 목사(신사참배항거로 옥고)나 영도교회 박손혁 목사(신사참배항거로 옥고)도 예배당을 내어줄 수 없다는 점에서는 일치했던 것이다.


2. 고신 파란의 불씨

문창교회는 주기철 목사와 한상동 목사가 시무했던 곳이고 또 조수옥 집사(출옥성도, 생존), 주경순 집사(주남선 목사 따님, 생존) 등 많은 수가 한상동 목사와 주남선 목사를 존경하는 사람들이었다. 이인재 목사, 박윤선 목사 심지어 한부선 선교사까지도 송상석 목사의 예배당 쟁탈전에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서 황철도 목사나 박손혁 목사는 송상석 목사의 의견에 동조하면서도 싸움의 방법을 찬성하지 않았고 또 싸움의 방법을 찬성한다 해서 별다른 도움을 줄 수도 없었던 것이다. 신앙의 동지는 떠나고 예배당 쟁탈전과는 무관하나 조수옥 집사와 주경순 집사를 비롯 상당히 많은 교인들이 제2 문창교회를 설립하여 떠났다. 심지어 실제는 아니지만 문창교회 당회장은 한상동 목사라고할 정도였으니 송상석 목사의 피곤한 심정도 이해할 만하다.

1) 고신 반대세력을 위한 총회측 김석찬 목사 파송

행정과 재판은 송상석 목사가 놀라운 역량을 가졌으나 목회에 있어서는 김석찬 목사와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더러는 감리교로 떠나고 혹은 신마산교회로 가고 송상석목사의 목회에 못견딘 많은 교인이 오동동(현 동광) 교회를 설립하여 나가게 되었으니 고신측 교세는 점점 약화되고 소위 총신측 교세는 상대적으로 커지면서 법정투쟁에서도 송상석 목사가 고전하게된 것이다. 그 이유는 판결이 이미 내려진 것이기 때문이다. 판결의 주문은 교회재산은 총회소유가 아닌 "교인의 총유"라고 내려진 것이다. 교회의 행정관례는 다수결인데 중대한 재산처리는 공동의회에서 2/3 이상이라야 한다는 것을 재판부가 받아들였던 것이다. 소송 초기에는 송상석 목사 교회의 교인이 절대다수였으니 승소한 셈이었다. 만일 2/3가 못되면 교인수에 비례하여 분배하라는 것이다. 그러는 중에 교회별관은 송상석 목사가 차지하게 되었고 예배당과 사택은 김석찬 목사가 차지하게 되었으니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한 구내에 있었으니 피차 어려운 문제였던 것이다. 송상석목사가 별관으로 나오게 된 것도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2) 총회문제로 비화

이보다 앞서 예배당 소송문제는 오직 고신교단에 한해서 신학적 문제로 비화했고 급기야는 총회문제로 발전했다. 오랜 논란과 시비 끝에 총회에서는 "덕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교회의 형편에 따라 처리함이 옳다"라고 결의했다. 반대로 소위 총회측은 적극적으로 김석찬 목사를 밀어 주었다. 행정상으로는 일단락 된 것으로 나타났으나 박윤선 목사가 요구했던 "문창교회로 인한 부덕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만족스럽게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3) 한상동, 박윤선, 송상석 목사 의견의 차이

1>한상동 목사의 입장은, ...과연 후일에 양성봉 장로(1960-1963, 부산시장, 농림장관)가 여러 사람 앞에서 회개했고 임종시에 한목사를 불러다 기도를 받았던 사실도 바로 이 점을 증명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접수위원이었던 또 다른 한사람 구영기장로<현 목사>는 목회와 신학 1991년 4월호에 "... 한상동 목사가 교만이 생기었다..." 하는가 하면 또 "...부패했다, 썩었다 그라니껜 고신파를 만들어 나갔어..."하고 사실과 다르게 진술하고 있다. 고려파는 축출 그리고 이어 제명처분 당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 구장로는 "그이가 인자 옥에서 나와 가지고 참 모든 성도들에게 천사와 같이 대접을 받는데 성도들이 그이 말이면 다 그만 따라가는 기라. 그라니껜 목사하고 반대가 되는 내게 대해서는 그 성도들이 어찌하겠노 말이다. 참 멸시를 당하는 기지. 그때 고통이야 말할 수 없다. 어찌나 속이 상했던지 뱃속까지 아팟다 아이가." 하였다.)

2>송상석 목사의 입장은, 예배당은 성도들이 정성으로 하나님께 드린 것으로 물질과 땀과 정성으로 지은 것이요 법치국가에서 법적으로 자기 재산을 보호받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도 떳떳한 일이라는 것이다. 누구도 그렇지 않다고 할 사람은 없었다.

3>박윤선 목사의 입장은, 재산문제로 신자(특히 목사)끼리 법정에서 불신자들 앞에서 판결을 받는 것보다 불의를 당하는 편이 낫지 않으냐, 동시에 현실이 부덕됨을 보는 바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결코 성경에 위반된다거나 신학적인 문제로 다루지는 않았다. 그러나 항의서에 보면 비성경적이라는 말도 나온다.

4) 송상석 목사의 공과(功過)

1>송상석 목사의 공이란 법의 판례를 남김으로 송상석 목사의 소신 "교회는 교인의 총유"라는 사실이 곧 법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통합측과의 기장측과의 싸움이나 통합측과 합동측 싸움에서도 이것이 적용되어 오늘도 합동측이 여러갈래로 분열되고 있지만 거의가 교회재산은 교인의 소유로 따라 다니게 되었으니 문창교회 예배당 싸움은 모든 분쟁을 대신 맡아 싸워준 의미에서 큰 기여를 한 셈이다.(나중 송목사는 기독교인과 소송에 대하여 저서도 남긴바 있다.)

2>과라고 하면, 다른 교단이나 역사적으로는 어차피 한번은 겪고 넘어가야할 과정을 홀로 고전분투 했으나 자신과 고신운동에는 많은 상처를 남긴 것만은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9) 박윤선 목사(1905-1988)의 탈퇴선언

소송문제가 박윤선 목사를 떠나게한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라 해도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1>박윤선 목사는 많은 고민을 했다. 수차례 교장직 사표를 낸 일도 있었다.
2>경기노회는 이 문제를 가지고 다음과 같이 행정을 보류하기에 이른 것이다. 총대가 노회에 총회진상과 다르게 보고하기도 하고 불법한 노회를 따라갈 수 없다고 반대하는 교회가 8,9개처 보였다.(이하 항의서, 답변서 모두 생략)


제24장 박윤선 목사는 왜 고려신학교를 떠나야 했나?

한상동 목사의 신앙과 박윤선 목사의 신학, 이 두분의 경건한 생활은 개혁주의 신앙의 향기로 넘치고 있다. 그위에 일찌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주남선 목사와 손양원 목사의 순교적 신앙은 한국교회 보수주의의 상징이라 할 수있다. 교단 밖에서도 관심의 초점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의 로마서 주석을 읽어보아도 자유주의 신학을 대항하여 싸운 수훈은 박형룡 박사와는 근본적으로 그 차원이 달라서 전혀 타협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와 같은 신앙인격이 왜 고려신학을 떠나야 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1. 박윤선 목사의 1신(약 1/8로 요약) 1957년도 3월호(61호)
우리의 걸어갈길 박윤선
우리가 어떠한 길을 가든지 방향과 목표가 분명하지 못하면 전진력이 없고 교착상태에 빠집니다.
1. 지금 우리 단체는 타파 신자들에게 대하여 싸우는 것보다 건덕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10년 전에 신사참배 회개문제를 명확히 해결하노라고, 갈리는데 이르기까지 반대파와 대항하여 선한 싸움을 싸웠든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갈려졌읍니다. 우리가 이 점에 있어서 진리는 파수하였으니 다행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할 것은 선한 싸움을 싸우다가, 대외적으로 사랑과 덕을 잃지 않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2. 현하 우리 단체에 유감스러운 일은 지도자들 중에 의견이 다른점입니다. 아무리 교리가 좋은 교파라도, 그 교리들을 파수하여 선포하는데 관계된 중대한 행정이 바르지 못하면 그 교리를 파수하여 선포하는데 관계된 중대한 행정이 바르지 못하면 그 교리를 세상에 발휘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교리와 살뜰게 관련된 행정문제는 일종의 교리문제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읍니다. 예배당 건물을 안내어 주겠다고 소송에까지 가담하시니 그것은, 남들 앞에서 신덕을 잃으며 성경 말씀 고전 6:1-7를 어긴 것이라고 불초한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 단체가 예배당 쟁탈전에 가담함이 적은 문제인줄 알면 안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방향과 진로에 관한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어떤 분들은 말합니다. "지금 소송이 대법원에 걸렸으니 조금만 참아 보자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입니다. 즉시 소송을 그만두고 대외적으로 성명해야 됩니다.

3. 예배당 건물 쟁탈전에 가담함이 가져오는 해독
집필자인 나로서 예배당을 파수하려는 이들의 그 당하는 고통과 억울함을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목석이 아닌데야 어찌 그것을 모르겠읍니까! 그러나 나의 고충은, 우리 진리운동에 있어서 신덕을 손상시키는 정도의 예배당 파수 행위는 해롭다는 것을 확신하기 대문에 이 말씀을 합니다. 타교파와 및 반대파 사람들 앞에서 영권을 잃었을까 두렵습니다. 우리단체는 교인 수효로 보아 작은 단체입니다. 그러나 운동 초기에 그 옳게 살려는 노력과 영권(靈權)으로 반대파들보다 앞섰던 것입니다. 또 어느 나라에서든지 교파끼리 예배당 건물 때문에 소송에 가담할 때 생각되는 것이 또 하나 있읍니다. 곧, 그 소송에서 누가 정통인 것이 드러나므로 승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무지 옳지 않은 이론입니다.(아래는 남영환 목사의 견해)
그러나 예배당을 두고 양측의 물리적 행동이 뒤따르리라는 것이 분명할 때는 부득이 세상법의 보호를 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세상법 역시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라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상대방에게 내어주어 감화하고자 하는 이상은 우리 모두가 원하는 바이기는 하나 현실에서 볼 때 어려운 일이 아닐까?


2. 박윤선 목사의 2신(약 1/10으로 요약) 1957년 3월호 파수군 61호
우리진영으로서 그것을 교정하지 않으면 전진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영력이 쇠퇴할 것이라고 우견엔 생각되었읍니다.
그것은 나의 지도이론이 서지 않는 교계에서 "진리운동의 지도자 중 하나"라는 이름을 가지기가 너무 두려워서 그리한 것이었읍니다. 나는 고려신학교에서 손을 떼었읍니다. 나는 이 단체에 속한 목사입니다. 나는 이제부터 주석집필에 주력하면서 우리 단체를 봉사하겠읍니다. 세간에는 무근지설이 많이 돌아다닙니다. 무슨 말이든지 본인에게 직접 문의하시기 전에 믿어주지 말으시기를 바랍니다.


3. 박윤선 목사의 사면과 충격

끝내 교수직까지 사면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에 따른 한상동 목사의 충격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박형룡 박사가 떠났을 때보다 그 충격이 결코 적지 않았다. 예배당 소송문제로 말하자면 문창교회 송상석 목사의 방법은 소송을 지지하는 편조차도 모두가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나 자기의 재산을 법정이 소송을 송상석 목사 개인이나 개교회 문제로 보지 않고 이런 일을 방관하는 총회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피차 풀릴 수 없는 막다른 길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그 당시 박윤선 목사의 입장을 취하였던 사람들이 이인재 목사를 비롯하여 김창인 목사 등이다.
필자가 87년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에 있는 이인재 목사를 만났을 때 자신만 한상동 목사의 고충을 이해 했던들 박윤선 목사를 떠나지 않게 했을 터인데 지금 회고하면 실수를 한 것이라고 아쉬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초량교회를 내어주면서 예배당을 내어주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같이 행동한 것은 비록 부덕한 일이 있었다 해도 역사 세계 안에서는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임을 승동측과 연동측이 나뉘어진 후에야 비로서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다.
한상동 목사는 박윤선 교장의 사면으로 교계에 일고 있는 오해와 추측과 오전 심지어 지방관념(남북)까지 동원된 것을 극히 슬퍼하였다. 한상동 목사는 당시 이런 말을 했다. 학자되지 못한 서러움이 이토록 큰 줄은 몰랐다고. 당시만 해도 보수신학자로 박형룡 박사, 박윤선 목사를 제쳐 놓고는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한상동 목사가 삼일교회 예배당을 내어주지 아니했던들 고신교단은 수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한상동 목사는 양편에서 공격을 당했다. 송상석 목사는 공석상에 앉을 때마다 소송문제 말만 나오면 한상동은 성자가 되고 송상석은 죽을 죄인으로 몰린다고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공공연히 한상동 목사가 송상석 목사를 잡고 박윤선 목사를 쫓아낸다고 했던 것이다.

4. 한상동 목사의 나의 태도 파수군 1957년 4,5월호 제62호

타파의 비소와 조롱과 동시에 우리의 부끄러운 사정을 생각할 때에 우리 형제의 목을 안고 싫건 울어 보고도 싶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우리 성도가 땅위에서 당하는 좋은 시련도 될 것이다.

5. 교회 소송문제에 대한 송상석 목사의 제1논문(약 1/6만 발췌)

이 적은 글월을 쓰게 된 필자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몰라도 교회 소송문제에는 본의 아닌 대표자가 되어서 비난과 공격의 활촉을 받는 관혁판이 된 지 6,7년이 지나매 호미난방격이 되어버려서 그 동안에 남모르는 딱한 사정에 기막히게 업대여 울다가 그대로 잠들어 날을 밝혀 본적이 여러번 있었읍니다 그러는 동안에 파수군 61호에 박윤선 목사님의 글인 "우리의 걸어갈 길"이라는 글과 "나의 걸어가는 길"이라는 글이 세간에 발표되자 장신칙에서는 "고려파의 난맥과 파동이 분열의 조종(弔鍾)을 울려 놓았다"는 보도를 하게 되며 교계는 더욱 긴장하여서 교회 소송관계자들을 신앙세계에서 여지없이 매장시키고 싶게 되고 말었던 것입니다. 필자에게 있어서 크게 고민이 되어진 일의 한가지는 개인적으로 매장 당하였다는 문제보다도 파수군에 발표된 내용이 신학자로서는 넘어도 독단적인 점입니다.
그러나 필자가 입을 막고 붓을 경계한 것은 필자도 처음에는 소송을 반대하는 사람중의 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예배당 포기를 주장하던 사람이었다는 점이요... 기독공보에 같은 글의 광고가 나게되니 이로써 고신파의 본의가 아닌 허구랑설이 연재됨에는 아조 실망하였읍니다. 그래서 외람되이 붓을 들게 되었으니 관용하시기를 바랍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불초교제와 평양신학 동기동창이며 해방 후 월남할 때에도 우연히 만나 38선을 같이 넘어왔읍니다. 서울 용산 육군관사에서 나란히 살다가... 정실관계가 깊은 친구입니다. 따라서 진리투쟁 전선에서 같이 싸우고 지내온 전우이었읍니다.(이하 장로회법과 노회록으로 조목조목 따짐)
기독교라는 종교는 신비주의를 경계하고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도덕적 종교도 아닌 까닭에 실정을 몰각(沒覺)한 신앙의 호화판(毫華版)을 걸고 사람의 체면을 닦는 도덕이나 근시안적인 편의주의(便宜主義)에서 자기의 마음만을 편안히 하는 무사주의(無事主義)를 취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6. 고려신학교 교수 성명

교수들의 성명은 예배당 소송문제가 몰고 온 여파가 천파만파(千波萬波)로 신학교를 비롯하여 교계는 말할 것도 없고 교계의 언론들이 일제히 대서특필을 하고 나서게 되었고 일반교계만이 아니라 당시의 일간지를 비롯하여 사회에 미친 파문 또한 적지 아니했던 것이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박윤선목사의 사면이 몰고 온 고신의 타격도 결코 만만치 아니했고 송상석 목사 역시 그 충격이 컷던 것은 이해가 충분히 가는 일이다. 한상동 목사 개인적인 입장으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예배당을 내어주는 것으로는 원칙을 고수했으나 박윤선 교장의 입장을 지지할 수 만도 없었던 것이 교계 형편으로도 그렇지만 동시에 신앙양심상으로도 송상석 목사나 예배당을 정당한 법정보호로 지키겠다는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는 잔인한 정죄는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교수들의 성명에 나타난 것이 바로 한상동 목사의 입장인 동시에 고신교단의 입장이기도 한 것이다.

7. 교회 소송문제에 대한 송상석 목사의 제 2논문(1957년 파수군 7월호
64호)
교회소송문제 재검토(2) 송상석(머리말)
교회 소송문제가 시작된 유래와 동기 2회분을 합하여 한번에 연재하게 되니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있어서 좀 지루한 감이 있을듯 합니다. 그러나 여름철 무더위라도 시원한 나무 그늘 밑에 앉아서 심심푸리로 읽어주시면 고맙겠읍니다.(요약자가 약 1/6 정도의 중요문장만 발췌함)
고신 당국자의 선서문
우리는 고려신학교를 중심하여 결코 이 교파 수립을 계도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런 야심은 전혀 없음. 이하.......(후략)
1949년 9월
(당시) 고신책임자 주남선, 한상동, 박윤선, 한명동, 손양원, 송상석
장신칙 주장이 대한 예수교 장로회 간판 안에 있는 교회재산은 다 장신칙 교회의 소유인즉 장신칙 장로회 총회를 이탈한 고신파 교회는 재산권이 없다고 주장함은 마치 대동아 공영권을 주장하다가 패전한 일본이 아직도 한국 재산권을 말하고 있음과 "구보다"의 망언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본래의 장로회 종파의 생명이 되는 장로회 신경과 기본교리는 일본 기독교단에 예속하였던 장신파 단체가 간수하였던 것이 않이고 진리를 파수하다가 투옥되었다가 해방과 함께 출옥된 진리의 종들의 가슴속에 간수하였다가 내여놓은 것입니다.
그런고로 고신파가 장신칙 총회에서 이탈된 것이 않이라 저들이 불법과 폭력으로 우리를 그 자리에서 밀어내고 저들이 그 자리에 서 있으려는.......
강도는 남의 것을 폭력으로 빼았는 것인즉 예배당을 빼앗으려는 것도 이런 류의 사람들의 행하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오육월 장닭(鷄)이 얼마나 답답하야 집웅에 올라가리요"한 말은 교회소송 문제를 설명해 주는 것 같읍니다.
한 장소에서 예배를 갈라보고 시간제로 예배를 따로보는 것을 비난하려고만 생각지 말고 왕상 18:18-40절까지를 읽어보기를 바라마지 않읍니다. 가멜산 한 장소에서 엘리야의 제단과 바알신 제사장이 제단이 따로 있어 늘 시간제로 대결한 사실도 있었거든... 생각하건데 진리운동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할 줄 압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이런 일들이 없었더라면 참 좋을뻔 하였읍니다. 그러나 역사는 말하고 있지 않읍니까. 개혁은 일시적인 혼란의 과정을 밟지 않고는 정상화 되어지지 않는 것이 상예로 되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배당을 쟁탈하려는 상대방칙의 불법과 폭력을 배제키 위한 응소가 죄가 되며 비성경적이며 교리위반을 말하며 부덕과 비은(非恩)을 말함은 그 이면에 잠재하고 있는 실정을 파악지 못한 분들이 일종의 근시안적인 편의주의에서 나온 굴욕적인 무사주의에 불과한 줄 압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노예근성을 탈피치 못한 자주권이 없는 미신의 종교는 않입니다. 이 대통령이 일본의 재산권 포기와 "구보다"망언 취소와 평화선 확보를 목표한 외교 냉전은 한국 장래를 보아서는 무익한 일은 않일 것입니다.(구보다가 일본의 통치는 한국에 유익했다고 망언한 것)
국법에 의거하여 약자의 생명재산의 보호를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부여하신 특권인즉 제것을 빼앗기지 않겠다고 응소하는 것이 죄라고 하면 고려파 교인들의 재산권을 다 포기해야 할 것이며 자기의 옳은 주장이 부덕한 일이라면 고려파의 진리운동도 허사가 될 뿐만 아니라 자기를 내세울려는 일조의 허영에서 나온 그룹운동에 불과한 것이 되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악과 불법을 용인 방임하는 것은 불의를 감행하는 기회를 증대시켜서 인간사회에 불안과 공포를 주장하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안될 것입니다. 오늘날 진리투쟁을 한다는 고신파에서 자기 소유를 빼앗기지 않겠다고 응소하는 것이 무슨 죄가 된다고 하겠읍니까?
눅 12:11-12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잡은 이와 권세있는 자 앞에 끌고가거든 어떻게 무엇을 대답하여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맛당이 할말을 성령이 곧 그때에 너희에게 가라치시리라"고 함을 본즉 성신(聖神)도 소송과 재판을 인정하였을 뿐만이 않이라 때로는 소송을 돕고 있는 줄을 알 수 있읍니다. 불신자앞에서 재판을 받지 말라고 "고린도 전서 6:1-8절"을 기록한 바울 선생이 "사도행전 22:1, 25절과 동 25:19절 동 26:32절"에 가이사에게 상소한 사실을 볼 수 있으며 에스더 3,4,8 각 장을 정독하면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자기 동족 이스라엘이 "하만"의 참소로 진멸을 당하게 되었을 때에 굵은 베옷을 입고 통회자복하며 금식기도 한 후에 죽음을 각오하고 이방 불신 황제 "아하스에로" 왕에게 호소하여 자기 백성을 구원하였을 뿐 아니라 대적을 크게 증벌하게 된 일을 잘못한 일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피고소송에 걸여서 재판을 받었거든 어찌 감히 피고소송도 죄라고 정죄할 것입니까? 말과 글에 삼가 조심하기를 바래서 마지 않읍니다.
문창교회 예를 들어 본다면 장신파로 넘어간 분들이 예배시간에 예배당 문을 막아서 우리 교우들을 못들어가게 하는 일과 도지사의 권세가 움직이여 경찰의 억압과 고소를 당하고 입입 금지(立入禁止)의 가처분 수속에 걸리는 등의 난처한 일들의 고충을 해제하는 유일한 방법은 응소뿐이었는데 이를 정죄할 수 있을는지요.
약 4:12절에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니"라고 하였읍니다.
기독교인과 교회는 국법의 보호를 받는 것이 잘못된 처사가 되고 또한 죄가 된다고 하면 바울 선생이 유대인과 율법주의에 순복하지 아니하고 로마 `가이사`에게 호소한 것과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아하스에로` 왕에게 호소하지 아니 하였다면 바울로서 바울 사명을 다하기 전에 무참히 죽었을 것이고 이스라엘 족속은 전멸되었을 것입니다. 바울과 에스더는 왜 왕에게 호소하였을까요. 잠 16장 10절이 바울과 에스더를 보장한 것 같읍니다. "일넛스데 하나님의 말씀이 왕의 입설에 있은즉 재판할 대에 그 입이 그릇하지 않으리라"고 하였던 것을 믿은 것 같읍니다.
내 것을 빼앗는 자를 용납하고 폭력에 굴종하는 것만이 기독교 도덕으로 알 것이 아니라 불법하게 빼앗는 자를 물리치며 폭력자를 배격하는 것도 기독교 도덕인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발에 몬지를 털어버리고 떠나라" 하시던 주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고파는 자를 노끈으로 채찍을 하여 쫓아 낸 일은(요 2장 13-17절)결코 모순된 일이 아니며 성경해석에 충돌되지 않는 것입니다.
전도서 3장 1-8절에 의하면 "천하의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을 일울 때가 있나니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로울 때가 있나니라"고 하셨읍니다.
그런고로 교회가 초량교회 예배당을 내어준 일과 문창교회가 예배당을 안빼앗길려는 것은 결코 충돌되거나 반대되는 일은 아닙니다. 삼일교회는 삼일교회로서 잘하였고 문창교회는 문창교회로서 당연한 일인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초량교회는 내어줄 것을 너무도 과대 평가하고 문창교회 안빼앗길려고 하는 것은 너무도 과소평가 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다시 말하면 되여진 일 자체보다 그 일을 주관한 사람을 보는데 치중한 까닭입니다.
순종이 지나치면 비겁이 되기 쉽고 겸손이 지나치면 겁이 되기 쉽습니다.
전쟁에 이기고도 이익을 본 나라는 없다. 뿐만이 않이라 오히려 국가의 많은 재산과 많은 생명을 희생시키는 것인데 왜 전쟁을 하는지? 그 이유는 자국의 주권을 옹호하며 침략을 배제(排除)코자 함에 있는 것입니다.
남의 것을 가지고 제인심 쓸려고 하는 사람들은 별문제이나 제것을 갖이고 남에게 빼앗기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특권이며 또한 소유권 확보는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일종의 교리화 되어져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읍니다.
만일에 이 재산권 문제에 대하여 확인을 남겨두지 않으면 고신파는 장신파의 예배당과 재산을 빼앗아 가지고 있다고 말할 것이며 우리진영 교우들은 항상 남의 셋방살이를 하고 있는 감이 없지 않을줄 알 것입니다.
예배당을 건축하는 일로 각 지방으로 연보 청하여 다니는 일로 도시 교회들이 적지 않은 난색이 있읍니다. 이일을 거듭하게 되고 보니 같은 진리진영 형제들 사이에도 사랑과 의를 상할만한 처지였다는 것을 왜 일부러 잊어버리려고 하시는지요. 필자는 그런 분들의 심정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잘 이해가 되지를 않읍니다.
소송을 피하고 예배당을 무조건으로 내여주는 원칙을 세웠다면 금일의 고신측 교회들이 안재하였을른지요. 여기에 항변이 있을줄 압니다. 몇몇 교회가 예배당을 내여주고 새 예배당을 짓고 은혜롭게 지낸다고 자랑하는 분도 없지 않을줄 압니다. 한번 더 깊이 생각해 보시기를 원합니다.
그 예배당을 짓고 평안한 것은 다른 예배당들을 다 빼앗기지 아니한 덕분이며 또한 안빼앗긴 교회들과 교회분규와 소송문제가 연달아 일어나지 아니한 것은 교회분규와 교회 소송문제에 불행하게도 제일착에 걸린 교회들이 퇴굴하지 않고 필사적인 희생의 댓가를 지불하고 있는 것이 교회 재산문제에 대한 현상을 유지하고 있음을 부정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상의 말한 이유들이 소송에 응소하게 된 동기가 됐던 것입니다.

당시의 교단분위기 사정 때문인지 몰라도 언급이 없다. 이는 박윤선 교장의 고독한 투쟁을 엿보이게도 한다. 한상동 목사 또한 당시의 위치로 보아 그 고충이 여하했음도 이해를 함직도 하다.

송상석 목사의 제 2논문에 대한 박윤선 목사의 대답
교장직을 사면한다거나 교단을 떠난다는 데는 전혀 입장을 달리했다. 박윤선 교장의 신앙양심은 인정하나 소송문제를 정치적 문제 이상으로 다루기는 원치 아니했던 것이다. 그래서는 끝까지 사면을 만류하였던 것이다.

8. 박윤선 목사의 3신(원문의 약 1/20로 요약) 1957년 8월호 제 65호
(파수군 제 63호, 64호)에 대한 해답 박윤선
장로교는 개교회 자유주의가 아니고 상회의 다스림을 받는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지교회들의 사건이 교파 전체에 영향을 주는 때에 우리는 언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남을 걸어 소송하면서 어떻게 그들을 회개시킬 수 있읍니까! 우리는 잊지 맙시다! 우리의 하는 일은 교파 운동이 아니고 아직껏 총회파와 같은 이름을 가지고 회개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간판으로 진리운동을 하려면 상대방 보다 우수한 신덕(神德)을 가져야 회개운동을 할 수 있읍니다. 현재 우리 노선으로는 회개운동을 하고 있는데 상대방을 걸어 소송하면서 회개를 외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 단체는 수난성도의 신앙노선으로서 회개를 외치는 직분을 가지고 있읍니다. 이 사명을 가지고 생각할 때에 어찌 건물을 가지고 6,7년 동안 투쟁하여 세월 보낼 수 있읍니까? 수난 성도들 중에 위대한 이들이 그 누가 이런 투쟁을 하였읍니까? 고 손양원 목사(高神 초대총무, 1902-1950)는 아들 둘 죽인 이를 양자로 삼으셨읍니다. 이런 분이 외치면 총회라도 녹습니다. 그러나 예배당 건물 소송을 걸고는 상대방더러 회개하라는 말도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 단체는 신앙과 덕과 주의 영광을 위하여는, 그 어떠한 재산이라도 필요하면 포기하는 정신을 가져야 됩니다.
예배당소송은 고전 61:-7을 거스릴 위험성을 띠고 있읍니다.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하여 교리화 못한다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으나, 필자 자신의 신앙으로는 현하 소송이 이 귀절을 거스린다고 봅니다.
내가 탈퇴될뻔한 그 소리 때문에 고려파의 명예가 손상되었다는 이들도 있는 모양입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은 된 것없이 출옥성도들을 빙자하여 타파 신자들을 무시하는 일이 있다면 그런 허영과 교만은 깨어져야 합니다. 위의 나의 말은 나 자신을 변호한 느낌이 있읍니다. 용서하십시요!

9. 소송문제에 대한 송상석 목사의 제 3논문 1957년 9월호 파수군 66호
교회소송문제 재검토(3) 송상석
자기주장을 세우기 위하여 성경을 한부분이나 한구절을 내여놓고 자기 주장을 고집하는 일들이 심히 많읍니다.
1>안식교인들이 출 20장 8절에 기록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직히라"고 한 성구를 내여놓고 안식일(토요일)을 지키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말할 때에 우리는 그 성경절이 잘못된 것이라고 반대하지 못할 것이며
2>감리교인들이 자유설을 주장하야 "천국은 힘쓰는 자가 빼앗나니라"고 한 성경구절(마 11장 12구역)을 내여 놓을 때에 그 성구가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고로 속담과 같이 "장부는 맞으나 현금은 틀렸다"는 말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틀림이 없으나 성경 해석과 인용이 잘못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까닭에 성경은 창세기 1장 1절부터 요한계시록 22장 11절까지를 통관대조하야 성경과 해석이 호상충돌이 없는 조화점을 발견하는 데서 정당한 해석이 나올 줄 압니다.
막바로 불의한자 앞에서 송사하는 일(총회측)은 벌써 완연한 허물이 있는 자들의 하는 일인즉 불의를 행하는 일이 되고 속이는 일이 된다는 말씀이다.
1> 그런데 현 장신칙교회 교인과 고신칙교회 교인들이 동일한 치리기관 아래 있는 교인들인지요?
2> 여기 말한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라고 한 이 말씀이 한 교회에 속한 형제로 보지 않고 "믿는 형제"라는 통칭으로 본다면 고신칙교회 교인이 장신칙교회에 가서 치리를 받을 수 있으며 장신칙 교회 교인이 고신칙 교회에 와서 치리를 받으면 문제는 간단하게 낙착이 될 줄 아는데 그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지요?
3> 만일에 여기말한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라고 한 이 형제가 치리기관을 초월한 일반적인 믿는 형제로 해석한다면 고려파 형제들이 엡 4장 2-6절에 말한 교리와 믿는 형제가 하나 되는 진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딴 치리기관을 세우게 되었는지요?
4> 마 18장 15-17절에 "...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한것을 본다면 한 치리안에 있는 교우에 대해서도 이런 처사를 지시하였거든 하물며 치리기관이 다른 장신칙 대 고신측 관계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5> 눅 18장 1-8절에 "항상 기도하고 낙심치 말아야 할 것"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불의한 재판관일지라도 간절히 거듭하여 호소하는 과부의 신원을 풀어준 불의한 재판관의 처사를 인용한 것을 예수님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는 일인 동시에 또한 예수님께서 재판을 절대로 부정하지 아니한 것이 명확한즉 우리가 억울함을 당한 사실을 법정에 호소함이 잘못일까요?

위에서 본대로 예배당 소송문제는 그 결과가 엉뚱하게도 송상석 목사와 박윤선 목사와의 싸움으로 번지고 말았다. 이때에 박윤선 교장은 화란 개혁교회 신학교로 연구차 떠남으로 당분간 예배당 소송문제 논쟁은 잠잠해 졌으나 약 1년후 귀국, 박윤선 교장도 새로운 자세로 다시 학교교장직에 취임하여 봉사하게 된 것이다. 또한 송목사 자신이나 총회에서도 예배당 소송문제는 빨리 종결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의외로 쉽게 끝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교회재산은 교인의 총유라는 판결과 동시에 단서로 교인이 2/3가 이상되면 자동적으로 소수는 포기하고 물러나야 하고 2/3가 못될 때는 교인의 수에 따라 분배한다는 것이다. 교인 수가 문제되어 다시 재판은 재개되었으나 문창교회의 경우 아무도 2/3가 이상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금 같으면 쉬운일이지만 전부가 부동산이기 때문에 더욱 어려웠던 것이다. 박윤선 교장도 전같지는 않았으나 여전히 소송문제의 부당성을 주장했고, 문창교회의 경우 보는 사람마다 덕스럽지 못하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이리하여 박윤선 교장에게 이런 문제들이 제기되어 왔고 박교장 또한 강의시간이나 설교시간에 직접 간접으로 문제 삼기도 하였다.
이러한 박윤선 교장과 소송문제는 송상석 목사와의 싸움의 연장이었다. 때마침 미국인 선교사 슈프너 목사가 미국으로 들어가는데 요즈음 같이 항공편이 쉽지 않고 배편으로 떠나게 되었다. 1960년 7월 모일 금요일 출발예정이어서 목요일 저녘에 송별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배가 금요일에 출발 하지 못하고 주일날 출발하게 된 것이다. 이를 안 박윤선 목사는 정을 못잊어 잠간 들러 송별인사를 하고 간다는 것이 배가 늦게 떠나는 바람에 송별을 마치고 나니 이미 예배시간이 끝난 뒤였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 사실이 이사회에까지 알려졌는지 이 말이 퍼져 교계에까지 물의가 일게 되었다. 또 그때보다 앞서 남영환 목사가 부산서 구제품을 싣고 금요일에 떠났으나 차가 고장이 나서 마산에서 바뀌는 바람에 짐을 다시 바꾸어 싣고 토요일 새벽에 떠났는데도 토요일 밤 권병재(* 합천을 지나 묘산가는 고개)에서 밤을 새우고 그 다음날 주일 1시 반에 거창에 도착했으니 주일을 범한 결과가 되었다. 그래서 남영환 목사가 경남노회에 조처를 자원했고 경남노회도 임시노회를 열어 6개월 근신을 하도록 했고, 구제품을 차에 실어 놓을 수가 없어 짐을 내리는데 협조한 집사 6명을 6개월 근신처분을 하였다. 남영환 목사에게는 부득이한 사건으로 인정되나 대예배를 중시하지 않았다는 것을 들었던 것이다.(이점은 요사이의 닳고 닳은 평신도<더구나 타교단이나 타교파의>에게는 생소하게 비치리라고 본다, 요약자)
그런 의미에서 목사를 양성하는 신학교 책임자인 박윤선 교장이 대예배를 중시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떤 사정으로도 도의적인 책임문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우기 예배당 소송문제가 죄라면 어찌 이 문제가 적은 것이냐고 들고 일어선 것이다. 손명복 목사(出獄聖徒, 生存)의 주선과 한상동 목사와 이사들의 동의로 미안하게 되었다는 사과를 함으로서 이사회에서 일단락을 지었으나 박윤선 교장을 둘러싼 주위와 소송문제를 둘러싼 주위의 사정은 박윤선 교장을 떠나게 만든 것인데 이것을 항간에서는 박윤선 교장이 주일문제로 떠났다고도 했다.
이런 와중에 처한 고신교단은 실로 어려운 난관에 봉착했던 것이다. 이때가 바로 1960년이었다. 마침 장로회 총회가 대전에서 비상 정회를 하고 서울에서 승동측과 연동측으로 나뉘었고 승동측은 교회수습이 측에서 통합<연동>측을 용공으로 맹렬히 몰아부쳤다. 실은 WCC라면 고려파에서 1951년 일치감치 정죄한거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요약자) 1960년 8월 서울에서 박형룡 박사를 중심한 승동측 목사들이 고신측 목사들과 만나자고 제의해 와서 만나 그 자리에서 박형룡 박사가 눈물을 흘리면서 48년도에 한목사와 헤어진 것은 자신이 크게 잘못 생각하였던 것이라며 우리와 같이 개혁주의 보수신학을 위해 새로이 출발하자고 간곡히 제의해 왔던 것이다. 고신교단의 박윤선 목사의 사임은 합동에 불을 붙인 셈이나 고신교단도 궁지에 몰린 나머지 성급히 합동한 것은 실로 큰 실책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훨씬 뒷날의 얘기다.

제25장 승동측과의 합동과 환원

(3천만환 증발(?)사건, WCC 문제, 경기노회 총대권 문제는 책에 자세히 나와 있고 다른 여러문제도 재미있게 다루어져 있으니 꼭 이 "한국교회와 교단" 책을 구입하여 읽어보시기를 바란다. 십계명중 1,2,3계명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신사참배의 공적 불경건 문제도 해결하고 WCC 문제도 다루어야지, 더구나 고려파가 축출당하기 전에 이미 정죄한 WCC를 들먹거려, 새삼스럽게 승동측과 연동측이 싸웠으니 진리운동사적 측면에서 별로 논의될 가치가 없다는게 요약자의 생각이라 이부분은 대부분 생략.)

박형룡 박사를 비롯한 여타 지도자들이 과거를 회상하면서 눈물로 호소하는 것을 보고 나와서 따로 앉았던 고신측 8명의 목사도 이때는 한사람도 이의가 없었다. 만일 우리가 이런 제의를 거절한다고 하면 그야말로 교만하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일치하였던 것이다.

NAE 측인 승동측은 매우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고신측과의 합동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합동하고자 하는 승동측 내부를 고신측이 너무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6노회 총투표수 188표 중 가표 178표, 부표 8표, 기권 2표로써 제 2차 속회에서 승동측과의 합동을 정식 가결하였다. 합동총회는 1960년 12월 13일 오후 5시 30분 서울 승동교회에서 개최되었다. 양측 총대와 방청객으로 초만원을 이룬 가운데 고신측 총회장 송상석 목사의 사회로 시작되어 송목사의 축도로 1부 예배를 폐하였다. 오후 6시 45분 예장 승동측 총회장 고성모 목사(1887-1972)의 사회로 회무가 진행되었다. 고신측 총대 131명, 승동측 총대 233명, 총 364명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합동총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한가지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고신측은 이 문제를 각 노회에 수의하여 노회의 동의를 얻어 하고자 제안했으나 승동측은 난색을 표하면서 총회가 먼저 합동을 한 후에 노회는 설득과 함께 밀어 부치자는 것이었다. 고신측도 이에 동의하여 주고 고신측만은 노회의 수의를 거쳐 시행한 것이 후일에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알 수 있음은, 환원 당시에 합동에 대한 불만을 말하면서도 합동자체를 반대한 노회는 없었기에 그래도 수습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총회장에는 고신측의 한상동 목사가 당선되었다. 미국 정통장로교 선교부를 대표하여 한부선 목사가, 미국 성경장로교 독립선교부 대표 마두원 선교사가 각각 축사를 하였다. 한부선 선교사나 마두원 선교사들을 메첸파로 몰아 이단시하던 그들 앞에 두 선교사가 인사를 했다는 것은 10년전의 일이 새삼스럽다. 이렇게 되어 1960년을 마무리하면서 고신측과 승동측은 하나의 총회로 합동되었으나 적지 않은 문제들이 잠재해 있었다는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양 교단의 합동은 앞에서 말한대로 너무 성급하게 추진되었다. 합동의 필요성과 일체감이 전교회적으로 확인되지 않은채 지도적 인사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루어져갔고 합동을 지속할 만한 확고한 토대를 갖지 못했다. 또 고신으로는 합동으로 야기될 수 있는 여러측면에 대한 주의깊은 배려가 결여되었다. 한상동 목사가 승동측과의 합동을 성급하게 추진한 것은 박윤선 교장의 고려신학교 사임 이후 야기된 문제들에 대한 일종의 처방이었으나 그것이 지나치게 성급한 조치였다는 사실을 뼈져리게 느꼈을 때는 이미 엎지러진 물이었던 것이다.

1960년 9월 현재 고신교단에 속한 교회수 590개 교회에 달하여 거의 600여 교회를 지닌 대교단으로 성장했고 목사수는 126명 장로 213명, 그리고 전체교인은 66,784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당시로 보아서는 영남에 치우쳐 있다는 것이 흠이기는 하나 결코 적은 교단이 아니었다.

1961년 9월 21일 부산 남교회당에서 모인 제 46회 합동총회는 한상동 목사를 총회장으로 다시 선출하였으나 당시 이 신학교 문제는 합동측과 고신측과의 갈등을 야기시키에 충분했다. 1961년 12월 28일 신학교 이사회는 신학교를 단일화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고려신학교의 연차적인 폐쇄방침을 취하였다. 이뿐만이 아니라 승동측은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교권을 행사하였고 합동원칙을 준수하지 않았다. 근본문제는 다수의 횡포가 고신을 더이상 머물수 없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고려신학교가 폐쇄될 위기에 처해있을 때인 1962년 10월 17일 한상동 목사는 총회신학교 부산분교(즉 고려신학교) 경건회를 마친 직후 "고려신학교 복교선언"을 하였다. 이것은 고려신학교의 복교인 동시에 승동측으로부터 고신측의 환원을 의미하는 첫신호였다. 이때 고려신학교의 복교를 막아보려는 많은 모임이 있었고 이와 관련하여 많은 문서가 나왔다. 고려신학교 학우회는 이 해 10월 31일 성명서를 발표하고 한상동 목사의 복교선언은 신학교의 합동원칙에 준한 귀정으로 알고 적극 지지한다고 선언하고 5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12월 18일에는 교단합동으로 서울 총회신학교에서 수업을 받던 졸업반 학생 5명이 부산에 내려와 수업을 받게 되었고 이들이 고려신학교 제 17회 졸업생이 되었다. 환원복교한 학생의 명단은 남영희, 이지영, 진학일, 최만술, 최진교 등이다.(이금조 목사는 이 때 복교하지 않고 총신을 졸업한 후 고신교단에 가입하였고 나중 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홍반식, 이근삼, 오병세 등 3박사는 고려신학교를 위해 동사(同事)하기로 하고 1963년 2월 25일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복음병원을 위시하여 교단재산이 법인체로 미등기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이때 신학교 복교와 동시에 모든 재산이 구 이사명의로 법원에 등기를 접수시키고 나서 승동측 이사 백남조 장로가 법원 등기서류를 갖추어 같은 재산을 등기하려 들어오다가 마주친 것을 보면 불과 30분을 앞당기지 못하였다면 고신측 재산은 모조리 승동측으로 넘어갈 찰라였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양교가 행동을 개시하면서 고려신학교 운영기금이 승동측 총회신학교 회계로 넘어갔고 고려신학교는 총회신학교로부터 타다가 써야 했던 것이다. 교수들은 고려신학교로 부임했으나 2월부터 교수들의 생활비 지급이 아득했다. 몇교회에서 도움을 약속하여 교수 5명의 생활비가 확보되므로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었고, 한상동 목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이때처럼 실감한 적이 없었다고 술회했다.

이같은 형편에서 1963년 6월 합동총회 고시부에서는 고려신학교 17회 졸업생들인 남영희, 이지영, 진학일(재미, 나중 총회 서기), 최만술(나중 고신총회장), 최진교 등 5명에게 강도사 고시자격을 허락치 않음으로 문제는 심각하게 되었다.("당시 5명이 대전의 시험장에 갔었는데 시험장에 입장을 거절하여 그냥 돌아오게 되었다." 1991년 유타주 진학일 목사 증언) 사실 이점이 고신측의 환원운동에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으니 물론 일부에서는 환원을 반대하여 끝까지 승동측에 남아있는 사람들도 상당수였고 환원을 따라오면서도 당시에는 억지로 따라온 사람도 많았으나 거의 대다수가 환원을 열망하던 때였던 만큼 총회도 모이기 전에 고려신학교 졸업생에게 강도사 고시 자격을 안주겠다는 것은 10여년 전에 총회가 고려신학교를 단절하던 것과 꼭같은 양상이었다. 그러나 그때 보다는 현 고신상태가 상당한 틀이 잡혔으니 두려울 것이 없었고, 또 한가지는 박윤선 목사의 떠남으로 실의에 처했던 때와는 달리 세박사가 학교에서 교수를 맡게 되었으니 그런대로 안정을 찾은 편이었으며, 비겁하게 총회에서 싸움판을 벌이기 보다는 조용히 환원하자는 쪽이 오히려 우세하여 먼저 각 노회로부터 환원하는 절차를 밟은 것이다.

이렇게 되자 부산노회내의 고신측 출신 교역자들은 1963년 7월 29일 환원 발기회를 조직하고 고신측 환원을 시도하였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승동측 교회가... 과거에 고신측에 대한 자신들의 잘못된 결의를 취소함으로써 양 교단은 정통보수와 교회정화의 숭고한 이념아래 1960년 12월 13일에 합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합동측 총회는 여지없이 합동서약을 위반하여 합동정신과 이념을 무참하게 짓밟고 있으며, 만일 이대로 지속한다면 우리의 장래는 심히 암담하고 비참할 것은 명약관화의 사실입니다. 이제와서는 우리의 합동이념 달성은 절망적이요, 해방 후 우리들이 가져오던 신앙노선은 여지없이 유린당하고 있으니 우리 교회를 이 암흑으로부터 구출해 내고 한국교회의 정통신학 교육과 경건생활의 재건설을 위해서 합동전으로 돌아가서 진용을 재정비하고 진정한 칼빈주의 교회건설을 위하여 추진코저 하는 바입니다."

이에대해 부산노회내 구 고신측 교역자들인 이상근 목사(현 LA, 고신창설 당시 교수, 합동측에 잔류, 신약주석을 쓴 대구의 이상근 목사와 동명이인) 등 29명은 8월 5일, 안용준("사랑의 원자탄" 저자), 이인재목사 등 구 고신목사 49명은 고신측의 환원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963년 9월 17일에서 20일까지 부산 남교회당에서 목사 36명, 장로 36명 합계 72명이 참석하여 대한예수교 장로회(고신) 제 13회 환원총회를 조직하였다. 승동측과 합동하여 세칭 "합동파"로 불린지 34개월 만의 일이었다. 이날 총회에서는 송상석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하였고 승동측과의 합동추진 위원이었던 한상동, 황철도, 송상석 목사는 총회 앞에서 합동하게 된 것이 하나님 앞과 교회 앞에서 잘못된 것임을 사과하였고, 합동에 대해 잘못되게 지도한일을 심각하게 느껴 주 앞에서 깊이 회개하는 마음으로 목사와 장로는 1963년 9월 29일까지 자숙하기로 가결하였다.

이 당시 환원한 교회는 445개 교회였다. 부산노회의 경우 131개 교회중 69개 교회가, 경남노회는 175개 교회중 163개 교회가 환원하여 90% 이상 환원했다.(여기에는 송상석 목사의 행정력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경기노회도 23개 처에서 11교회가 환원했으니 절반에도 못미쳤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돌이켜 볼 때에 이 손실이 오늘을 위해 필요한 한 과정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이유는 만일 그대로 환원하지 않고 있었다면 한국의 개혁주의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우려와, 작금의 현실을 볼 때에는 놀랍기만 하다.


제26장 교단재정비

이해 9월 22일까지 부산 삼일교회당에서 개최된 교단 제 14회 총회시에 고려신학교 이사장 한상동 목사가 신학교의 재산 일체를 총회에 헌납함으로써 교단직영 신학교로 가결하였다.

"신학없는 교회"는 무속화(巫俗化)되고 신비화 되기 쉽고, 교회없는 신학은 사변화(思辯化)되거나 극단의 자유주의화 되기 쉽기 때문에 신학적 기초없는 교회나 교회가 안중에 없는 신학, 이 양자는 그 어느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간 사립으로 운영되어 온 것은 하나의 과도기적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설립자 한상동 목사의 늘 하는 말이 총회가 직영할 때 이사선출 문제가 언제나 정치적인 영향을 받아 실제 신학교를 돕는 사람보다도 정치적 수작을 부리는 사람이 이사가 되거나 또한 총회가 부당한 간섭을 하게 됨으로...

이시기에 소위 "高神의 세 博士" 불린 홍반식, 이근삼, 오병세 등 세교수는 고려신학교의 정비와 학문적 성숙에 크게 기여하였다.(고신은 처음부터 5년교육을 시켰으므로 1회 입학생은 1951년에 졸업하여 교단 창설 멤버가 되었다) 고려신학교의 제 5회 졸업생(1-4회는 30명 정도인데 출옥성도<전도사> 등이 별과로 졸업하였다)인 이 세사람은 한상동, 박윤선, 한부선 등에 이어 고려신학교 제 2세대 지도자로서 1960년대 이후의 고려신학교의 신학적, 정신적(이념적), 정치적 문제에 직접적인 역할과 기여와 책임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신학교 대학인가 문제는 1950년에 거슬러 올라가 삼일교회에 출석하던 허증수씨가 문교부 차관으로 승진되었고 고려신학교를 대학으로 인가청원을 하면 되도록 해주겠다고 한상동 목사에게 말한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한상동 목사나 한부선 선교사는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인가를 얻어 놓으면 여러가지로 간섭을 한다면서 한마디로 거절, 좋은 기회를 놓쳤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국내외 여건과 학생들의 요구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게 만들었는데 당시 이사장이던 송상석 목사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말았던 것이다.
1970년 12월 30일에는 문교부 장관으로부터 고려신학교 대학설립인가를 받아 학위를 인정 받는 정규대학으로 승격하게 되었고 설립자인 한상동 목사는 초대학장에 취임하였다. 1975년 8월 15일에는 신축교사가 준공되었다. 시공한지 1년만에 준공된 교사는 화란 자유개혁파(31조파)의 지원과 국내교회의 정성어린 헌금으로 지하 일층 지상 3층의 연건평 1700평의 현대식 건물로서 고려신학대학의 외적 발전을 보여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화란 자유개혁파교회(31조파)의 원조는 놀라운 일이다. 한상동 목사가 초청을 받아 화란에 간 것은 두번째로, 그곳에서 어찌나 한상동 목사를 예우했던지 캄펜신학교 교사를 신축하기 위하여 그 교단산하 교회가 모아 두었던 것을 자기들은 덜 급하니 다음으로 미루고 고려신학교를 위해 보내기로 한 것이었다.

새찬송가는 1983년까지 합동측이 저희 소유로 하였으나 편찬은 고신교단이 단독으로 한 것이다. 1984년 한국교회가 초교파적으로 합동한 찬송가가 출판되면서 찬송가공회의 여러가지 횡포와 부조리로 말썽을 빚으므로 고신교단이 단독으로 찬송가위원회에 위임하여 1984년 7월 10일자로 찬송가를 출판하여 공의회의 횡포를 견제하였고, 이어 어린이찬송가도 출판하기에 이르렀다.

"사조이사단" 사건 문제로 심한 격론이 벌어졌고 여러번 이사회로 모여서 다음 성명서와 같이 문제를 확대시킨 이사장 송상석 목사의 사면문제가 대두되었다. 송상석 목사도 신학교를 생명같이 여기는 한목사의 사면은 뜻밖이라며 자신도 사면서를 내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요인은 대학부 교수들이 모인 자리에서 "부덕스러운 음료를 마셨다"는 것이 또한 크게 문제되었다. 이 사건에 관해 오병세 박사는 그럴 수 있느냐고 그 부실을 추궁하며 강의시간에 나오지 않자 신학부 학생들이 오박사의 견해를 지지, 수강을 거부하게 된 것이다. 고려신학교 이사회와 학교실무자간에 반목은 마침내 교수단에서는 이사장 불신임안과 퇴임 요구서를 내놓는 반면에 이사회에서는 경남노회가 중심이 되어 교수단의 처사를 상식이하의 것으로 단정, 이사회 징계위원회로 하여금 사실유무를 심리 규명하도록 요구하고 노회 자체에서도 특별조사위원들을 선임하여 그 진상을조사, 보고케하였다. "음주사건"과 "정관문제"등으로 이사회와 교수들 사이에 오랫동안 끌어오던 고신분규 문제는 교수의 진퇴문제를 놓고 이사회 징계위원회의 교수징계, 이에 맞선 교수의 사퇴서 제출 등으로 긴장상태에까지 도달했던 분규사건은 이사회에 의해서 "음주사건"에 연관된 전(全) 대학부 교수를 포함한 대학부 교수들의 해임과 아울러 지난 1969년 3월 27일 고려신학교 설립자 한상동 박사가 교장취임을 승인함으로 신학교 분규사건은 수습되었다.

한편, 고신측 경기노회가 1969년 4월 8일부터 2일간, 서울 동일교회(김상철 목사 시무)에서 노회장 최영구 목사 사회로 거행되었다. 이 노회에서는 경남노회장(고신측) 손명복 목사가 발송한 윤봉기 목사에 대한 소원장 처리에 있어서는 고려신학교 분규에 있어서 그 당시(1967년) 정관 변경 기초위원이며, 재단 이사장인 윤봉기 목사가 책임을 지기로 하고 사과를 신문에 발표하기로 한 임사부안이 가결되었다. 특히 고려신학교 사건에 관련된 윤봉기 목사는 정관변경 결의에 대해 자신이 실언한 것을 교수회 측에서 인용, 유인물에 발표하므로 송상석 목사의 명예를 훼손시킨 것을 사과하는 한편 책임을 지는 입장에서 재단이사직 사임서를 4월 9일 이사회에 제출하였다.


제27장 재단문제와 분열과 그후

또 다시 거센 태풍은 몰려왔다. 시행세칙은 이사회가 만들어 총회의 인준을 받은 것이고, 정관은 시행세칙과 차이가 있으나 문교부 법이 문제였다.
한명동 목사가 이사장으로 피선되어 총회에 보고되었다. 이때에 느닷없이 민법 777조에 의거, 형제간에 학장이 되고 이사장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법이 안된다면 총회가 승인해도 소용 없으니 반려하여 다시 이사장을 선출하도록 하였으나 송상석 목사의 강력한 항의로 이사 전원이 인책 사면하고 새로 선출해 오도록 하였다. 민법을 모르는 소경은 그대로 놀아난 셈이다. 후에 알고보니 그러한 민법조항이 없었다는 것이다.

전 이사장 송상석 목사(1896-1980, 경남마산)는 사무인계를 거부하고 이사회가 모인 일이 없었는데도 이사회가 모인 것처럼 서류를 꾸며 문공부에다 송상석 이사장을 재등록하고 말았다. 여러차례 사무인계를 교섭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이사회가 모인 것으로 된 이사중에 지득룡 장로가 법정에서 이사회에 참석한 일이 없음을 증언하여 사문서 죄로 송목사는 형사 입건되고 문서를 작성한 재단간사 이현중씨가 구속되는 등 형사문제로 비화되었으니 실로 어처구니 없는 불상사였다. 1심과 2심에서 송상석 목사가 패소하여 이사장 직무가 정지되었으나 송상석 이사장은 그때도 사무인계를 거부하고 직무대리로 이 모 목사에게 직인을 넘겨주었다. 이러는 동안 2년이 흘렀다. 송상석 목사가 구속이 안되었던 것은 나이가 70이 넘었기 때문이다. 이경석 목사가 이모 목사를 찿아가서 직인도 돌려받아 재단법인은 완전히 수습이 되었으나 후유증은 엄청났다.

송상석 목사를 중심한 상당수가 소송을 반대하는 입장을 선포하고 다른 교단(반고소 고려)을 다시 만들었고 1983년 9월 22-27일까지 대구 서문로 교회에서 모인 33회 총회에서 행정을 달리하던 형제들을 환영하여 맞아들였으나송상석 목사와 권성문 목사는 복귀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떠난뒤였으니,그 아픔을 짐작할 것이다. 이런 문제를 믿는 형제가 어찌하여 교회의 행정적으로 처리하지 못했는가는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었다.(현 예장(고려)는 반고소측인데 이때 복귀하지 않은 석원태<1934- >,김태윤 목사이다. 나중의 고신졸업생이며 고신의 원래 주역은 아니다. 예장(고신)은 고소측으로 부산 고신대학 2만 신도, 예장(고려)는 서울 고려신학교<교장 석원태, 학감 김태윤> 2만신도)

그러던 것이 제3공화국 박정희 정권이 정권연장의 수단으로 유신정책을 펴면서 종교교육의 의무화를 인정하지 않고 또 이제는 기독교 특성을 살려 입학생들로 하여금 종교 교육을 인정하는 학생을 받기로 하고 고신대학 의학부로 인가를 냈던 것이다. 그런데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은 오히려 더 강화시켜 종교교육을 근본적으로 의무규정을 삭제해 버렸고 이로인한 기독교 교육은 불가능해졌다. 한상동 목사가 걱정하던 `재단 운영에 정치적 냄새`가 사라질 때 고려신학교 정신의 향기를 풍기게 될 것이라고 믿는 바이다.

(1987년 9월 고신대학 신학과 학생전원 300명및 대학원 학생일부가 전원자퇴를 결의하고 6개항을 요구하였다.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신앙의 정절을 지켜온 신앙의 순교자들이 세운 고신대학을 종합대학화하여... 입학자격에 세례교인이라는 규정이 삭제되어 불신자의 영입이 이루어져 학교내... 영적분위기 와해... 전국 고신교단 목사들에게 유인물을 작성해 보내고... 요구사항이 이루어질 때까지 한사람도 낙오되지 않고 선한 싸움을 싸우겠다며 어떤 타협에도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나중 요구 수렴 보도)


부록

(요약자가 평신도들의 현재 상황파악용으로 1989年版에서 고름)

1. 기독교 초신자를 위한 "신앙상식" 325페이지, 지영근 목사著(총신 58회 졸업)
항목 86의 `교파를 선택함에 대하여`에서 "... 회개할 것을 회개하고 다시 사랑으로 하나 되어야 마땅하나 소금역할을 해야될 성도가 자기의 위치에서 정화운동을 하지 않고 따로 잘 믿겠다는 기치를 들고 갈린 교파가 1952년에 생긴 고신파였읍니다" 하는가 하면 이어서 "...고신파와 주류 본교단이 합치는 성사를 이루었는데 다시 2년만에 정치적인 이권을 타산하여 고신파 일부가 갈렸으니 이런 상황등에서도 명분있는 교파를 선택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기도 하였다.

(자기위치에서 정화운동을 했는데 회개는 커녕 독선주의자로 몰아 축출, 제명처분(除名處分) 하였을뿐 아니라 예배당까지 탈취하고... 합동전 약속한 합동의 제원칙을 기독신자로서 지키지 않았음을 모르는가? 한국 보수신학의 위기를 맞아 高神이 수혈을 하여 한숨을 돌릴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이후 합동이 오늘날 장로교 40교단이 되도록 수없이 분열했으나 그래도 통합측을 압도하는 대교단으로 성장한 것이다. 또한 오늘날 합동측의 대교회는 고신출신 교역자가 이루어 놓은 것이 많다. 요약자)


2. 개정판 "한국기독교회사" 著作賞 수상 前연세대학교 신과대학장 민경배 著
22장 해방된 교회에서 "... 인효론적 화살로 그 참회의 상징을 요구했다" 하는가 하면 "... 신사참배 회개의 문제는 각인이 하나님과의 직접 관계에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그의 말에는 반박 못할 정연한 논리와신학이 있었다" 하기도 하였다.
(신사참배는 총회가 가결하고 목사들이 참여한 공적불경건죄(公的不敬虔罪)이다. 주기철 목사등을 제명처분한 것이 오늘날에도 원상복구되지 않고 있다. 근래에 주기철 목사의 한 아들은 목사들도 이것을 모르더라고 한탄하였다.)


3. 2에 대한 참고로 한겨레신문에 실린 박승화 목사(워싱턴, 수도장로교회)의 글을 보자. 글쓴이는 KNCC, WCC를 찬성하여 "고신파"와는 신앙이 다른데

"해방이후에 고려파 장로교회가 분열된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는 바로 일제시 친일하며 민족을 반역하던 교회지도자들이 해방이 되자 교권을 주름 잡고서 신사참배 거부로 옥고를 당하고 출옥한 성도들에게 찬밥을 먹이면서 `회개는 하나님과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라면서 오리발을 내밀었기 때문이었읍니다. 이들 악질분자들은 지금까지 권력에 붙어서 기생하며 교계의 지도자 노릇을 하고 있는 갈멜산위의 450여 바알예언자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하였다.


4. 2에 대한 추가적인 참고로, 같은 보수신학자의 글을 예로 들면 편을 들었다고 할테니, 자유주의 신학자인 前 한신학장 김정준(1914-1917)의 김정준 전집 8에서 보자. 교회가 총회적으로 신사참배를 결정하고도 그것을 정당화시키는 말들은 오히려 죄를 더짓는 것밖에 안된다. 그래도 일본에서는 태평양 전쟁에 협력한 교회의 죄를 참회하자는 주장이 있어서 직함을 보여주었지만, 한국교회 일부 지도자들 마땅히 반민족적인 잘못을 저지른 죄는 물론 신앙적인 편의주의 내지 타협주의를 저지른 죄에 대하여 공식적인 교회적으로나 그 당사자들이 참회의식을 가지고 사과했어야 했다. 이런 의미에서 `고려파 장로교회`의 출발정신은 신앙적인 입장에서만이 아니라 민족정신에서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왜 내가 이런 말을 하는가? 내가 평소에 가지고 있는 `장로교파 연합` 정신을 위한 어떤 동정을 사고자 함은 아니다. 다만 지금 내가 이 글에서 주장하는 `愛國과 哀國`정신에서이다. 우리나라 교회 역사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정말 울고 슬퍼 한 우리나라 신도들이 일제의 탄압 아래 온갖 핍박을 받으면서, 순교자를 내면서까지 나라를 위해 울고 슬퍼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민족 앞에 증언하기 위함이다. 나라를 위해 애국(愛國)하는 것이 애국(哀國)이기 때문이다.(1979년)


5. 한국진리운동사를 공부(연구라기보다)하면서 일부 소위 목사들과 교수들의 비양심적인 학문하는 태도와 망발에 "그사람들이 하는 목회와 신학의 내용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한국교회 100년사에 최대의 비극은 1951년 6.25전쟁중 출옥성도와 그를 중심한 교회들을 장로교 총회에서 축출, 제명처분한 사건이다. 이점은 세상사건으로 비유하자면, 일정때 독립투사들을 투옥 고문하며 반민족행위에 앞장선 친일파들이 반민특위를 습격하는 등 해방후 반민족행위특조위가 실패로 끝나 그 이후의 한국역사에서 민족정기를 살리지 못한 점과 같다. 문제는 요사이 심지어 고등학생들이라도 해방후 정계를 친일파들이 주름잡았다는 것을 아는데 비하여(물론 모모하는 교육계의 최고 원로<거물>들이 친일파였다는 것은 모르지만) 기독교계에서 이런일이 있었다는 것은 평신도는 99.9% 말할 것도 없고 그위 직분 가진 분들 심지어 공부깨나 했다는 목사들도 깜깜히 모르고 있으니... 그래서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고 하면, 오늘날 요모양 요꼴로 부흥(?)은 되었으되 싸구려, 값싼 은혜(Cheap Grace)를 찿는 풍토로 변하였다. 그 원인은 前 총신학장 정성구 著 `한국교회설교사`에서도 찿을 수 있는바 "그런데 아무래도 흥미있는 사실은 그래도 일제에 굴하지 아니하고 신앙의 정조를 지켰던 분들의 설교에는 눈물과 회개가 강조되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회개의 설교는 찿아 볼 수 없는 묘한 상황을 볼 수 있는 것은 흥미롭다. 필자가 앞서 많이 인용했던 해방 이후의 한국교회의 30여명의 지도자를 쓴 설교집 `해방의 종교`에는 회개를 찿을 길이 없었다. 그러나, 출옥성도의 설교나 신앙의 정조를 지켰던 분들의 설교에서 강한 회개의 요구를 들을 수 있었다. 역사의 심판은 하나님께 맡겨두고라도 회개를 거부했던 사람은 설교에서 회개를 말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에서 찿을 수 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교회 교인들을 기독교 입문교리인 인간의 罪성을 부인하고 성선설(82.8%)을 믿는 그러면서도 구원의 확신(50%)이 있는 열렬한(?) 뜨거운(!) 신자들로 만든 것이다. `회개`와 `믿음`은 방패의 양면 같은 것으로서 회개 없는 믿음은 있을 수 없다.


6. 만주의 봉천신학교에 있었던 박형룡 박사를 모셔오려고 처음에는 남영환 전도사가 출발하였으나 백천까지 가서 미군에 제지당하여 되돌아와 당시 전국을 휩쓴 호열자 발생으로 누웠다. 그런데 고려신학교의 신학생 한명(장로님)이 영양 실조와 과로로 기숙사에서 죽었다. 이때 제일 영도 교회(담임 박손혁 목사) 여전도회에서 신학생들의 건강을 위하여 당시돈 14만원이라는 거액의 헌금이 있었다. 신학생들은 자신들의 몸들은 생각지 않고 영적 유익을 위하여 뜻을 모았다. 박형룡 박사를 모셔오기로 한것이다. 송상석 목사가 이돈으로 밀선을 띄워 모셔왔다. 서울에 온 박형룡 박사는 부산으로 오시지 않으려 하였다. 그것은 주변의 여러 목사들이 서울에서 신학교를 하자고 붙잡았기 때문이다. 다시 한상동 목사가 부산에서 서울로가 부산으로 모시고 갔다. 결과적으로 또 하나의 보수신학교(총회신학교)가 생긴 셈인데.. 이상은 심군식 목사(高神의 아동문학가로 저술활동에 큰 공로가 있음) 著 이경석 목사의 생애 `옥문밖의 사람`에 나오는 내용이다. 여기에 대하여 高神의 초창기 생존원로 한분은 "크게(!) 보아서 잘된일이다"고 하였다.


7.아래는 심군식 목사 著 한상동 목사의 전기인 "세상 끝날까지"의 영역본(한기태 교수<한상동 목사 의 조카> 역) "Till the End of the Age"에서.
"Dr. Park finally left for Seoul. His departure caused so deep pain to Rev. Han that he locked himself in his room and wept. His crushed heart sent him to the hospital, requiring medical treatment for more than a week. The present writer onc e visited Dr. Park and recounted many past events and asked him, "Dr. Park, did you know that Rev. Han was hospitalized after you left for Seoul at that time?" "Yes, I wouldn`t doubt it. I think I know what a shocking impact it must have had upon him." Dr. Park nodded and slowly closed his eyes as though burying himself in oblivion with memories of the past."

8. 로마 교황청이 신사참배나 조상숭배 의식은 종교적 의미가 없는 하나의 시민적인 행사라고 발표하게 되었다. 1939년 12월 18일 로마 교황 12세는 교서를 통해 현대에 와서는 과거의 전통적인 습관의 의미가 많이 바뀌었기 때문에 유교에서 조상숭배 하는 것은 하나의 시민적 의식일 뿐 종교적인 의식은 아니라고 선언했다. 그것은 조상에 대한 효의 표시로 간주해야 된다고 했다. 이것으로 지난 80여 년 동안 만여 명의 순교자는 헛 죽음한 것이 되어 버렸다. 이렇듯 교황이 한번 안된다고 하면 그것을 반대했고 또 교황이 괜찮다고 하면 진리처럼 받아들였다. 한국 가톨릭교는 1940년 신사참배는 말할 것도 없고 조상 숭배는 하나의 시민적 의식에 불과하다고 표명하였다.
1965년부터 열렸던 제 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도 이와 같은 전통적인 의식을 용납하는 태도를 취했다.
위는 신앙강좌시리즈 8 `한국교회와 제사문제`, 편집 이종윤, 도서출판 엠마오에서 발췌한 것이다. 여기에서 카토릭의 문제점을 극명하게 간파할 수 있다. 19세기에 들어 교리화한 `교황 무오설`은 우스꽝스런 것이다. 한국의 노기남 대주교도 여기에 근거하여 "민족적(?) 감정으로는 가책을 느꼇지만 신앙양심상으로는 아무 거리낌 없이 신사참배 하였다"고 한바 있다. 반면에 "신사참배는 오점이었다"고 한 신부도 있다.


9. 신사참배의 죄(罪)성을 규명함
교회의 범죄를 논함에 있어 머릿말로 쓰는 것은 죄에 대한 회개가 법식적으로 확실하기까지는 우리는 그 죄를 지적하고 가리우지 아니함이 성경적이다(렘 6:14). 이 심각한 문제에 대하여 박윤선 박사는 신학적인 견지에서 다음과 같이 규명하였다.(길고 철저히 파헤친건데 요약자가 요약한 것)

1) 신사참배는 죄이다. 조선교회의 신자들이 일본의 학정하에서 위정자의 강요를 못이겨 굴복 참배하였으니 그것이 자발적 우상숭배는 아니나 두려워 자의로 굴복하였으니 역시 의지행동(意志行動)이니 만큼 책임있는 죄과이다(마 26:69-75, 베드로가 세번씩이나 오리발 내미는 대목).

2) 부주의하고 굴복참배한 것. 이것은 우상숭배에 대한 외형적 오범(誤犯)에 겸하여 태만의 과실을 범한 것이다(마 25:26).

3) 신사참배는 국민의례로만 알고 교중을 끌고 신사에 참배케 한것. 이것은 자기만 오범의 과실을 지은것 뿐 아니라 남을 그런 과실에 빠지게 한 것이다(약 3:1).

4) 혹은 성경을 오해하고 신사참배의 과실에 빠진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은 말하되 신약의 경건은 의식을 중대시 하지 않는 만큼 의식적 또는 외형적으로 우상에게 굴신(屈身)한 것이 무슨 죄가 될 것이냐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약의 정신을 알지 못하는 말이다. 신약은 죄에 대한 외형적 타협도 엄금한다(살전 5:22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Abstain from every form of evil, 故 김활란 이화여자대학교 총장의 "신사참배는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하나님께 복을 주십사고 빌었지요"하는 말은 이 성구로써 설자리를 잃는다. 또한 요사이 잘못된 윤리학자들과 목사들이 `정신적순결`(精神的純潔) 운운 하는데 웃기는 얘기다. 카톨릭은 "육체적 순결을 포기하면 정신적 순결도 포기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점에 있어서는 카톨릭의 견해가 옳다.) 이는 성경이 말하는 죄관(罪觀)을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죄라고 하는 것은 의지행위(意志行爲)에 속하는데 황거요배한 자가 비록 강압에 두려워서 행하였을지라도(마 26:69-7 역시 자의지(自意志)의 행동인 한에 있어서는 죄됨을 면치 못한다. 뿐만아니라 그 요배하는 사람이 그것을 군신간의 인사로 알고 하였다 해도 그것은 그 경례의 대상이 국책으로 인하여 신화된 사실(행 14:18)의 내막을 모르고 동참함이니, 그의 요배는 적어도 오범적 과실이다(레 4-5).
기독신자가 그 가증한 묵도 시간에 그렇게 동참하는 체 하고 속으로는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죄가 될것이 무엇이냐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 가증한 일에 동참한 것임을 면치 못한다.


5) 상기의 제반 죄과를 경계하지 않으며, 치리하지 아니한 자들도 과실을 범한 것이다. 그것은 그 범죄를 죄시(罪視)하지 않은 과실일 수도 있다(겔 3:18-21).

6) 이상의 죄과들을 죄가 아니라고 선전한 것도 죄다. 그것들을 죄시하면서도 남에게 알려 주지 않은 것도 죄요(겔 3:18-21, 박윤선 목사는 바로 이점 때문에, 자신은 신사참배는 물론 어떤 비신앙적인 행사(行事)에도 참여(參與)하지는 아니했으나, 해방후(解放後)에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다가 감옥(監獄)에 들어가지 못한 죄책으로 한없이 통회하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오랜동안 볼 수 있었고, 그 분의 통회가 온 교회의 회개운동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자신이 순교자의 자리에 서지 못했던 것을 통회하면서 눈물로 강의하였고 경건회 시간에는 통회의 눈물이 강단을 적셨다.)
그런 죄를 범하는 상회에 무언 순종한 것도 죄이다(시 1:1).

7) 한편 박종칠 교수가 박형룡 박사가 귀국해서 한국교회의 현실을 대했을 때는 해방이 되고나서 2년이 지난 후라서 현실을 보는 시각의 차이가 이시간적인 차이 속에 내재해 있었음을 지적하고 이것을 대단히 타당성 있는 견해로 인용한 몇군데 글을 보았는데(요약자가) 즉, 박형룡 박사가 그간의 고려 신학교를 중심으로한 한상동 목사계의 영적 갱신 운동, 세속주의와 자유주의를 대항한 개혁주의의 신학적인 열망, 한국 교회 전체를 향한 그 피나는 투쟁의 긴박한 현실을 감득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았는데 제삼자인 요약자가 객관적인 상황증거로 보아서 타당성이 거의(?) 없는 견해이다. 왜냐? 박박사가, 해방당시 평양 산정현교회(당시 한상동 목사가 담임으로 이때 이미, 45년 9월 19일 해후가 이루어짐)에서는 출옥성도를 중심으로 교회 재건문제가 논의됐고, 그해 11월 14일부터 한 주간 평북 6노회 주최로 선천 월곡교회에서 이기선 목사와 박형룡 목사를 특별 강사로 모시고 집회를 열어 교회 재건 5개 조항을 발표하였으나, 신사참배에 가담했던 사람들중 많은 수가 반발하므로 재건계획은 벽에 부딪히고 박형룡은 쓸쓸히 만주로 돌아가게 된적이 있고, 1947년에도 전주에서 모였던 전국교역자 부흥회 때 박형룡 박사의 설교에 "일본 시대 죄과를 회개해야 된다"는 말에 청중은 분노하여 그 다음 시간부터는 박박사의 설교를 금하였다. 이런꼴을 당하고도 고려신학교를 떠난것은 명백한, 야합(野合)은 아닐지라도, 굴복타협내지는 묵시적 연합관계이다 .


8) 요사이까지도 당시 장신측에 있었던 목사 혹은 그 후예(?)들중 "피차 유감이었다"는 궤변을 하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제삼자인 요약자가 보아서, "행위자가 피행위자를 걸고 넘어지는 그런 망발을 해서는 안된다". 원 세상에 예배당을 탈취 당하지 않을려고 필사적인 항거를 하는 것이 죄가 된다면 탈취한 쪽은 더 큰죄를 지은 것이 아닌가? 그런 평을 하는 사람들이 어떤 내용의 목회와 신학을 할 것인가? 사람이 완전치는 못하고 혹 실수를 할지라도 말이나마 바로해야 할 것 아닌가? 고신측 책자에는 오히려 언급을 회피한게 많은데 장신측 책자에는 "누가 누가에게"라는 것도 밝히지도 않고 "출옥성도가 예배당 쟁탈전" 하고 매도한 내용이 많다. 당연한 것이지만 많은 위로와 동시에 환멸을 느낀다. 보응은 심판 때 받는다 할지라도... 이 엄청난 사실을 알고 "사실(?)이라면 총회O들 사람도 아니다!"라고 평하는 평신도 성경 교육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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