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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8-04-09
 제목  본회퍼의 교회론
 주제어  [본회퍼] [교회론]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본회퍼는 1930년대 독일에서 히틀러 치하의 전제주의 국가라는 정치적 상황과 나찌의 지재 이데올로기에 편승하여 참된 하나님의 교회, 신앙인이기를 거부한 많은 '독일적 크리스챤'들의 배교 행의가 만연하는 종교적 상황, 종교적 하나님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상황에서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신학적이며, 그리고 매우 실천적인 과제를 부여안은 채, 신학자이며 목회자, 동시에 나찌에 저항하는 운동가로서 살았던 사람이었다. 이러한 본회퍼의 교회론을 그의 시대별로 정리하여 내용을 파악해 보고자 한다. 먼저 그의 신학이론 형성기라고 할 수 있는 1926-32년에 쓰여진 "성도의 교제", "행위와 존재", "그리스도론"을 중심으로 교회의 참된 본성, 즉 교회의 자기 정체성을 살펴보고, 그 다음에는 교회투쟁기라고 할 수 있는 1933-39년에  "나를 따르라"와 "신도의 공동생활"을 중심으로 나찌즘과 독일적 그리스도인이라는 거짓 교회의 타락한 국가 권력에 항거하여 교회 투쟁을 벌였던 본회퍼의 삶을 중심으로 투쟁하는 교회의 모습을 다루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정치투쟁기며 옥중서신기라고 할 수 있는 1940-45년 사이의 작품인 "윤리"와 "옥중서간"을 중심으로 성숙한 세계에서의 교회, 성숙한 세계를 항한 교회의 과제를 다루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교회론을 정리하며 오늘날 한국교회의 제반 상황과 모습 속에서 본회퍼의 교회론이 들려주는 메시지는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1. 교회의 본질 - "성도의 교제", "행동과 존재", "그리스도론"을 중심으로.

 

❶그리스도의 인격 개념/ "성도의 교제"의 중심사상은 교회론이다.  여기서 본회퍼는 사회학적 방법으로 교회의 본질을 추구하고 있는데 교회론을 곧바로 전개하지 않고 인격 개념에서 먼저 출발한다. 본회퍼가 말하고 있는 기독교 인격 개념의 핵심은 '나와 너의 관계'이다.  그에 의하면 '나'에게 어떤 제약이 주어질 때, 타인의 심각한 요구를 받고 타인에게 책임을 져야 할 때 비로소 인격은 생겨나고 사회적 영역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즉 개인은 타인, 구체적인 '너'를 통해서만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관계는 그 자체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매개될 때 비로소 성립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들 사이의 '나와 너'의 관계는 '하나님과 너'의 관계를 반사시킨다고 할 수 있다.  본회퍼는 그리스도교외 인격 개념을 설명하면서 인격 형성에서의 하나님과 절대적인 관계의 필요성, 타인 즉 구체적인 '너'라는 인격의 사회성을 강조함으로써 거기에 따르는 타인의 책임과 대리 역할을 극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❷본래적 공동체와 경험적 공동체/ 인격과 공동체라는 사회학적 개념을 토대로 본회퍼는 교회 공동체를 '본래의 상태, 아담의 타락, 그리스도의 대리행위'의 구원사적인 맥락에서 논한다. 본회퍼는 본래적 공동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는 신학적인 면으로 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참된  교제와 연관되어 있다.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타난 바와 같은 본래적 인간의 상태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자유로운 정신적 존재로서 하나님께 봉사하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공동체 안에 있는 존재이다. 이 공동체는 사랑과 봉사의 관계로 이루어진 참된 공동체이다. 둘째로, 사회철학적인 면에서는 개인인격과 집단, 공동체의 상호관계성을 강조한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공 집단 인격을 향하여 말씀을 주신 것이지 고립된 어떤 한 개인을 향하여 부르신 것이 아니다.  공동체, 집단 인격과 개인은 하나님 앞에서 같은 순간에 현재한다. 셋째로 사회적인 면에서 본래적인 공동체는 바로 '의지의 공동체'이다. 인간의 공동체는 보방, 복종, 배고픔과 성적 충동 등 동물들의 공통적인 요소를 넘어서서 의지를 가진 자의식적 존재들의 공동체이다. 의지의 공동체는 당연히 의식적이요, 나아가 목적 지향적이다. 서로 '같이'만이 경험적 하회구조를 이룬다. 공동체(Gemeinschaft)와 사회(Gesellschaft)가 서로 섞여 있다. 이 두 의지가 만날 때 구조가 형성되는데 이것을 공동체의 구체적인 전체성, 또는 '객관적 정신'이라고 부른다. 인격적 공동체에서는 객관적 정신에 인격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이 가능하나 사회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객관적 정신은 그 자체의 생명력을 지닌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공동체는 앞에서 제기한 '본래의 공동체'가 아니라, 타락된 공동체요, 죄 아래 있는 이기주의의 공동체이다. 아담의 타락으로 '홀로 슬퍼하는 죄인'과 '죄인들과 사귀고 있다는 체험'이 서로 밀접하게 관계되어 인간에게 의식되어진다고 본다. 죄의 주격은 개인이며, 때문에 인류 전체라는 것은 죄의 보편성이라고 말함으로 죄를 개인적이며 동시에 전 인류에게 적용되어지는 것으로 본다. 이것이 곧 본회퍼가 죄의 해석에서 도입한 '윤리적 총체'라는 개념이다. 공동체적 참회와 믿음은 구체적 개인들에게 일어나지만 그 개인들 안에서 참회하고 믿는 것은 개인들이 아니고 '총체'이다. 이스라엘 백경과 개인의 관계가 인류라는 집단 인격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본다.  공동체와 개인을 형성시키며 하나님의 주권과 자기 헌신, 하나님의 통치와 겸양, 수난에 의한 하나님의 통치를 결합시킨다.

 

 ❸그리스도와 교회/ 본회퍼에게 있어서 교회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교회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비로소 교회를 창조했다. 이와 같이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기초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적 죽음'을 본다.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에서 두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관계는 교회가 기독교 안에서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로 교회는 시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초석으로 하여 세워져야 한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수립되는 교회의  세 가지 기본적인 사회학적 양상을 첫째, 그리스도의 죽음은 개인들을 고립시키고 양심을 갖게 한다.  둘째, 십자가의 교회는 부활의 빛에 비추어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 되고 성화된다. 셋째, 새 인간의 초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고 한다. 교회를 총체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또 그리스도는 공동체를 존재하는 그리스도로 복,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존재 형식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인 교회는 모이는 교회, 예배하는 교회, 설교와 성례전이 집합되는 교회를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전까지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본질이며 교회는 자기의 주, 생의 원리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았다고 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과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 안에 살았고, 교회가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로 소유하게 되었다. 교회가 생기는 것은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존재하게 된다고 본다.  교회의 사회학적 구조는 다섯 가지 요소로 이해된다. 첫째 교회는 성령의 활동의 장소이다. 둘째, 기독교 공동체에서 개인은 특수하다. 셋째,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이다. 넷째, 성도의 사귐은 사랑의 사귀이다. 다섯째, 통일 속에 있는 공동체로서의 교회이다. 이와 같이 본회퍼는 교회를 성령의 활동의 장으로 이해라고 있으며 슐라이에르마흐가 종교의 일반적 개념으로부터 교회의 개념에 도달하는 것과는 달리 구체적인 종교의 형태, 교회의 기독교적 개념에서 출발하고 있고, 교회의 본질을 교회 밖으로부터가 아니라, 교회에서 탐구해야 할 것으로 보면서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현재에서 파악함과 동시에 교회의 삶 속에서 참여함으로써 성령의 이끄심으로 일정한 교제와 사랑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이해하고 있다.


2. 제자공동체로서의 교회 - "나를 따르라"와 "신도의 공동생활"을 중심으로.

 

 ❶제자직의 교회/ 본회퍼의 제자됨에 있어서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는 자는 예수 자신이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계명의 전부이며 목적이다. 예수의 부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결합을 뜻하며 동시에 이전에 알았던 모든 일반 법칙과의 단절을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는 반드시 순종이 있을 수 없는 그리스도교가 되고 말 것이며 순종이 없는 그리스도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라 하겠다. 제자됨을 위해 선행되어야 할 자기 부정은 그리스도만을 알리는 것이며 앞에 서서 가는 그리스도를 꼭 붙들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우선 그리스도의 부름을 듣고 생각하고 고려하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에 그리스도를 따를 나서는 것, 즉 어린 아이 같은 문자적인 순종이라고 한다. 이것이 제자 됨에 대해서 쓰려고 한 전부다.  또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같이 나누는 것이며, 셋째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세상적 삶과의 직접적 관계로부터의 완전한 격별을 요구한다. 본회퍼가 강조하는 제자 됨의 특징, 또는 세상과 구별된 제자직으로의 교회는 먼저 '비범성'에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가난한 자, 세상을 위해서 세상의 죄를 위해서, 그 운명을 위해 슬퍼하는 자이다. 제자직은 그리스도의 고난에의 참여가 요구되기도 하며 결구 원수를 사랑하는 데까지 이른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제자로서의 삶은 '숨은 것'이라는 특성을 또한 소유한다. 비범성에 대한 이러한 역설은 비범성과 은밀성을 동시에 갖고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통일될 수가 있으며 또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따라가는 제자의 길이라는 개념에서 해결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신앙의 비밀훈련'을 제자직의 특성으로 강조한다. 그것은 규칙적인 날마다의 기도, 말씀의 명상과 모든 종류의 몸의 훈련과 금욕주의를 포함한다. 이상과 같은 본회퍼의 교회 이해는 그가 속해 있었던 당시 상황과 연관시켜 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즉 산상설교 풀이에서 보여진 제자직으로서의 교회 모습은 그 당시 독일 국가교회의 대표들과 설교자들과 얼마나 다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참교회의 모습을 제자들 내지는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찾음으로써 당시 독일 국가교회가 세상적인 것(나찌즘의 이데올로기)에서 교회의 모습을 찾으려는 시도에 대항하였던 것이다. 결국 본회퍼가 "나를 따르라"에서 중점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참된 교회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제자됨으로서의 교회이다.  예수의 '나를 따르라'는 부름에 즉시 순종하여 사는 제자들의 삶은 '고난에 참여하는 삶'이다. 이것이 제자들의 삶에서 또는 오늘의 교회의 삶에서 예수의 십자가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이다.  그래서 본회퍼는 교회를 '고난의 덩어리'라고 한다.

 

 ❷제자됨과 신도의 공동생활/ 본회퍼는 핑겐발데 신학교 안에서 형제의 집을 세워서 공동생활을 시작했고, 엄격한 영적훈련을 시작했으며, 모든 것을 나누고, 같이 살고 같이 기도하고 서로 죄를 고백하며 용서했다. 이러한 핑겐발데에서의 삶을 토대로 하여 "신도의 공동생활"이 집필되었다. "신도의 공동생활"에서 제시하고 있는 훈련의 내용을 보면 첫째, 기도생활이다. 우리가 남과 가까워지는데 가장 빠른 길은 언제나 그리스도께 기도하는 것이라고 했다. 기도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꺾이지 않고 꾸준히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자기의 것을 만들고 자기의 마음에 인을 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누가 뭐라고 해도 어떻게 반대하든 간에 제자가 하나님의 말씀 아래서 함께 살려고 하면 그들은 함께 자기의 말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스도인의 사귐은 그 지체들이 서로서로 위해서 기도하는 것으로 하는 것으로 사는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무너져 버린다고 했다. 둘째, 날마다 성서를 명상하는 생활이다. 명상의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어야 한다. 성서의 본문이 우리 자신들에게 아주 개인적으로 무엇을 말하느냐는 것을 묻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본문 해석이나 설교준비에 관련된 성서 연구를 하자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에게 들려올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자는 것이다.  본회퍼의 삶에 있어서 성서는 항상 그의 사고와 삶의 지표였다. 셋째, 찬양하는 생활이다. 본회퍼는 무엇보다도 마음을 모으고 훈련을 거쳐서 즐겁게 찬양을 부르게 되면, 그것이 공동생활에 많은 유익을 준다고 한다. 함께 찬양할 때 울려나오는 것은 교회의 소리이다.  내가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찬양하는 것이다. 나는 교회의 일원으로 찬양에 동참할 따름이다. 넷째, 섬김으로 사는 생활이다. 본회퍼에게 있어서 제자는 섬김으로 사는 사람이다. 섬김은 혀에 굴레를 씌우는 것이며, 헌신적으로 남을 돕는 것이며, 서로의 짐을 져주는 것이며 말씀으로 섬기는 것이다. 진정으로 제자의 영적인 권위는 듣는 섬김, 돕는 섬김, 남의 짐을 지는 섬김, 그리고, 선교하는 섬김이 이루어지는데 있을 뿐이다. 다섯째, 사귐 속에서 사는 생활이다. 제자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이에 두고 사귀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귀는 것을 말한다.  제자의 사귐은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구원의 소식을 전시하는 자로서 서로 만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온 교회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어 용납된 것이다. 그래서 서로 서로 영원히 예수에게 속해 있는 것이며 사귀면서 사는 우리는 언젠가는 그와의 영원한 사귐 속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사귐은 성찬의 사귐까지 이르러야 한다. 거룩한 성찬의 사귐이 그리스도인의 사귐을 다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의 모임에 속한 사람들은 주의 식탁에서 몸과 피로 하나가 되듯 영원히 그들은 나누이지 않고 함께 있는 것이다. 말씀 아래서 함께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례전으로 완성된다. 이런 훈련은 독일 국가교회와 대립하여 있던 제자 공동체로서의 교회에서 필요했던 것인데 결국 이것은 '무종교의 세계', '성숙된 세계'에서의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중요하다는 것이 본회퍼의 주장이다.


3. 성숙한 세계에서의 타자를 위한 교회 - "윤리"와 "옥중서간"을 중심으로 

 

 ❶정치참여와 새로운 세상의 이해/ 1939년 6월 미국으로 이주하였던 본회퍼는 1939년 독일로 다시 돌아와 계속적으로 '집단 목회 훈련'의 지도자로 고백 교회 운동을 지속하여 갔으나 나찌의 교회 탄압이 더 심해지자 지금까지의 나치와 독일적 크리스쳔들에 대한 투쟁 방법인 교회 투쟁에서 나찌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직접적 정치투쟁으로 변신을 시도하게 되었다. 이제 그는 "교회는 다만 차바퀴 아래 있는 희생자들에게 붕대를 감아 주는 것만 아니라 미친 사람이 몰고 있는 자동차의 바퀴를 멈추게 해야 한다."는 그의 말을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이렇게 본회퍼의 정치적 투쟁을 가능케 했던 그의 신학적 전제는 세상에 대한 새로운 그의 이해였다. 이전까지는 세상과 교회와는 구별되어지는 것으로 보았고 그의 관심은 '세상'보다는 '교회'의 내적 문제, 즉 신학적 문제에 더 치중되어 있었다. 그는 "옥중서간"에서 '세상'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입장을 취한다. 그는 옥중에서 생활하면서 히틀러의 탄압 속에서의 삶은 '하나님 부재', '하나님 경험의 상실'임을 경험하였고 옥중에서 경험하는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하나님 없이도 잘 살아가는 무종교의 사람들, 또한 히틀러와 나찌 도당들을 경험하면서 그는 이러한 시대, 세상을 '성숙한 시대, 성숙한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하나님이 필요 없는 자율적 인간, 세계를 의미한다.  그는 이러한 교회와 세상, 교회와 인간의 변증법적 통일에 관심이 있었으며 그 통일의 원리, 기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는 이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신의 현실성과 세계의 현실성을 통합시키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현실의 인간에 대한 심판지의 냉혹한 긍정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괴로움을 함께 나누는 자로서 자비로우신 긍정임을 강조하였고, 바로 이 긍정 안에 이 세계의 생명과 희망 전체가 내포되어 있다고 본다. 이러한 새로운 세상적 개념은 이 세상의죄와 악의 현실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의 긍정은 오직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가 그 출발점이다. 

 

 ❷교회와 세상의 변증법적 통일

 

   (1)세상에 대한 교회의 네 가지 위임 - 그는 성서와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통하여 '거룩'과 '세속'의 도 영역을 갈라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 보면서 '하나님의 현실'을 강조한다.  즉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는 세상은 공허한 것이며, 추상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세상과 그리스도와의 관계, 교회와의 변증법적 통일을 하나님의 '위임들'로서 설명하고 있다. 본회퍼는 하나님의 위임들을 '노동', '결혼', '정부 혹은 문화', '교회'의 네 가지 위임임을 성서를 통하여 발견하고 이 위임명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체적인 계명이라고 보았다.  그는 '위임'이란 말을 하나님의 위탁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공인과 위임장이라 보았고, 하나님의 계명에 의한 세상에의 일정한 통치권의 요구, 점령, 형성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위임을 맡은 자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대리자로 행동한다고 보고 있다. 본회퍼는 창세기 2장 15절에 근거하여 노동의 위임을 말한다. 이 노동은 타락이후에도 하나님의 훈련과 은혜를 위한 위탁 명령으로 남아 있었다고 하며 인간은 땀 흘려 노동해야 하는데 농업, 경제, 학문, 예술 등 각 부분의 모든 인간생활에서 해야만 한다. 이러한 인간의 노동을 통하여 인간의 세계와 가치의세계가 창조되는데 이것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그를 섬겨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동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 위에 새로운 사물들을 만들어내는 행위로서 인간은 노동의 위탁명령을 수행함으로써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계획하고, 그리스도를 항하여 개방되고, 섬기며, 영화롭게 해야 한다. '결혼'은 단지 아이를 낳는 일만이 아니라, 부모로서 자녀들을 하나님에게 복종케 하는 교육을 위임담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남녀의 결혼으로 이해했다. 노동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든 결혼을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한 새 생명들을 창조한다. 정부의 위탁명령은 노동과 결혼을 전제로 하며 의존한다.  정부는 창조된 것을 보존할 뿐이며 하나님이 부과하신 과제를 통하여 부여받은 질서 속에서 법과 칼을 사용하여 창조된 것을 유지하는 것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동의 위임이나 결혼의 위임이 국가권력, 정부의 위임 안에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그는 보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에 주어진 하나님의 위임은 위의 세 가지와 다르다.  교회의 위탁 명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성을 교회의 설교와 조직,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하여 실현시킨다고 보았다.  앞의 세 위임과 교회의 위임은 인간에게 있어서 동시적으로 성취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스도인들은 동시에 노동자이며 가정의 상대자이며 정부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2) 대리와 책임 - 본회퍼는 '성숙한 시대와 세상', '무신의 세계'속에서 관심을 갖고 교회와 기독교인의 세상에서의 삶의 스타일은 바로 '책임적 삶'이어야 나며, 세상의 죄와 고난을 대신 져 주는 '대리직'으로서의 삶을 강조하고 있다. 책임적인 삶의 형태는 두 가지 요소에 의해 조건 지어 진다고 인정한다. 즉 하나는 삶은 인간과 하나님께 책임이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자신의 삶은 자유하다는 것이다. 책임을 지는 것, 즉 대리 역할을 하는 것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는 이러한 대리 역할의 모범적인 모델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행동을 말하고 있다. 예수는 결코 스스로가 완전성에 도달하려 한 단독자가 아니다.  단지 자신에 의해서 모든 인간의 '나'를 받아들이고 감당하신 분으로 사신 것이다. 그의 생활, 행위, 노력의 전제는 대리이다. 그는 인간이 자기의 삶을 다른 사람을 위해 완전히 희생하는 데에서만 대리와 책임이 성립된다고 보며, 대리적인 생활과 행위로서의 책임은 본질적으로 인간과 인간에 대한 관계라고 보고 있다.  또한 책임과 복종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하면서 책임 안에서 복종이 행해진다고 보고 있다. 본회퍼는 책임적인 삶이 실현되는 장소로서 '소명'을 논한다.  그는 신약성서적인 면에서 소명이란 세상적인 제반 질서의 성화가 아니며 그것들에 대한 긍정은 동시에 항상 강한 부정, 즉 세상에 대한 예리한 항거를 내포한다고 보았으며, 루터가 수도원으로부터 세상, 즉 소명에로 귀환한 것은 위시 기독교 이래로 이 세계에 대하여 취해진 가장 격렬한 공격이요 타격으로 보았다.  그는 소명에 있어서 책임이란 오직 그리스도의 부름에 따르는 깃이라고 보면서 한 개인의 책임의 한정, 확장은 하나의 원칙에 근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면서 그 근거는 오직 예수의 구체적인 부름이라고 말한다.

 

   (3)궁극적인 것과 궁극 이전의 것 - 그는 교회와 세상의 적극적인 관계를 말하기 위해 궁극적인 것과 궁극이전의 것에 대하여 논한다. 죄인된 인간이 의롭게 되는 사건은 궁극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가능하다. 이러한 궁극적인 말씀은 단 한 번 결정적으로 모든 인간의 궁극 이전의 것을 배제해 버린다.  그것은 바로 용서의 말씀이고 다만 용서만으로 의롭게 되는 말씀이기 때문에 이것은 가능하다고한다. 인간은 궁극적인 길의 전 과정을 횡단해야 하며, 이 과정 속에서 개개인은 무거운 짐을 지고 어려움을 겪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궁극적인 것을 위하여 궁극 이전의 것이 말해지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속에서 '궁극적인 것'과 '궁극이전의 것' 사이의 관계문제는 두 개의 극단적인 해결의 형태가 주어질 수 있다고 한다.  첫째는 단지 궁극적인 것만을 고려함으로써 궁극이전의 것은 완전히 무시하는 배타적인 것이다.  즉 그리스도는 모든 궁극이전의 것의 파괴자요, 원수가 되며, 궁극 이전의 것은 그리스도에게 대적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말씀은 궁극적인 말씀에 대항하는 모든 저항을 분쇄하는 냉혹한 율법이 된다. 다른 방법은 '타협'이다.  궁극이전의 것은 그 자체의 자리를 유지하며, 궁극적인 것에 의해 위협을 받지 않는다.  세계는 여전히 존석하고 종말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고 궁극이전의 것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에 대한 책임 때문에 행해야 할 것들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이 둘을 극단적이라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하나님의 현실과 인간, 세상의 현실을 강조한다. 그는 궁극적인 것은 십자가에서 모든 궁극이정의 것에 대한 심판으로서 그러나 동세에 궁극적인 것의 심판에 굴복하는 궁극이전의 것을 위한 은총으로서 현실적인 것이 된다고 본 것이다. 이와 같이 본회퍼는 당시의 암울하고 타락한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열려있는 긍정적인 자리를 가지고 있으며 교회와 세상의 변증법적 통일의 가능성을 예수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으려고 한다.


4. 타자를 위한 교회

  본회퍼가 말하고 있는 성숙한 세계에서의 그리스도의 교회는 어떤 교회이고,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어떤 것인가? 본회퍼는 "옥중서간"의 끝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성숙한 세계 속에서의 교회는 '남들을 위한 교회'이어야 한다는 것을 특징적으로 강조한다. 이 '남들을 위한 교회'는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모범으로서 보여져야 할 교회를 말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연관되어 있다. 예수는 오직 남들을 위해서 존재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곧 예수는 오직 남들을 위해서 존재했다는 경험 안에서 인간 존재의 완전한 전환이 일어난다. 본회퍼는 기존 교회(고백교회를 포합해서)를 가리켜 자기 보존만을 위해 싸우는 데 급급한 교회라고 비판한다. 일반적으로 기존 교회는 그리스도교의 근원을 찾는 방법과 학문, 교회의 이익을 옹호할 수 있는 일에만 관심한다. 기존교회에서는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인격적 신앙은 거의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교회는 성숙한 교회에서 무력하고 침묵할 수밖에 없다. 본회퍼는 지난 1900년데 서구 그리스도교의 선교와 신학은 인간의 종교적 선험성 위에 있었으며, 기독교는 항상 종교의 한 형태였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 종교의 시대는 지나갔으며 성숙한 세계가 된 것이다. 본회퍼는 성숙한 세계에서 교회가 종교적인 하나님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인간의 한계, 죄와 죽음, 약함에 집착하는 것을 거부한다. 오히려 삶의 한복판에서 생명과 선에서 하나님을 말하려 한다.  즉 성숙한 세계 속에서의 교회는 모법을 통해서 보여지는 교회여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적인 인간은 어려울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전능한 하나님을 요구한다. 그들은 인간의 모든 능력이 쓸데없게 될 때 신에 대해 말한다. 그러한 신은 작업가설의 신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자신을 낮추심으로 인간을 도우셨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도우시는 것은 그의 전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연약함과 고난에 의해서이다.


정 리

  이때까지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본회퍼의 신학적 형성기라 할 수 있는 1926-32년 동안에 본회퍼는 '교회'공동체의 존재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로 보면서 구체적으로 보이는 교회를 강조하였고, 그 속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와 사랑이 경험되어지는 곳으로서의 공동체를 주장하였다. 둘째, 그의 교회투쟁기라 할 수 있는 1933-39년 사이에 그는 초기의 교회의 신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나찌즘과 독일적 크리스찬들이라는 참된 교회의 적들을 대항하여 고백교회 운동을 펼쳐 나가면서 그의 교회론을 한창 더 발전, 심화시켜나갔다. 이 시기에 그가 이해한 교회는 '제자직'으로서 세상 안에 존재하는 교회임과 동시에 세상과 구별되어지는 교회였다. 이것은 교회는 세상이 갖지 못하는 비범성과 거룩함을 내적으로 다지며, 타락되어진 세상과 투쟁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1940년대에 들어오면서 본회퍼의 신학과 삶은 큰 전환을 가져왔다. 그것은 바로 그가 정치투쟁에 직접 가담하면서부터 일어난 전환의 사건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교회와 세상을 대립되거나 모순된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교회의 세상성'을 강조하면서 성숙한 세상을 향하여 교회는 나가야 하며, 그 구체적인 모습으로서 타인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교회가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볼 때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인간의 삶, 성서적 비종교적 해석과 신앙의 비밀 훈련, 성실한 기도와 책임적인 행동,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예배와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삶이라는 두 가지 신학적 기둥을 갖고 교회론을 전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의 교회론은 신학적 도그마로 혹은 단순히 인간화를 위한 효과적인 도구로서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그 존재 기반으로 하며, 성경의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해시키는 능력을 힘입어 교회는 악마로서의 세상과는 구별되어지면서도 세상을 향하여, 타인을 위하여 고난까지도 담당해 나가는 교회임을 밝히고 있다. 그의 교회론이 갖고 있는 문제점은 그가 당시에 처해 있던 시대적 상황이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음에 철저한 제자직으로서의 교회 강조, 전투의 교회, 희생의 교회, 즉 십자가의 교회를 강조함은 이해할 수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오는 희망, 또한 성경의 내재하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확신과 기쁨의 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너무 약하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하지만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 주는 의미는 크다고 하겠다.  본회퍼가 강조하였던 교회의 존재근거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명제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자기 정체성, 존재 기반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삼음으로써 불필요한 분쟁이나 분열을 막고 참된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임에 틀림없다.  또한 그가 주장하였던 교회는 세상 안에서 존재하면서도 세상과 구별되어지는 존재라는 명제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사회의 급변하는 변화 속에서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면서도 결코 일반 사회의 이념, 가치관, 사상에 물들지 않고 세상을 향하여 복음의 메시지를 던져주는 참된 교회로 남아 있기 위하여 필수적으로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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