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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8-04-03
 제목  중국 연변 조선족 자치주를 다녀와서
 주제어  [중국]
 자료출처  이정면 (유타대 지리학 교수)  성경본문  
 내용

이정면 (유타대 지리학 교수)

다음 글은 유타대학교 이정면 박사가 중국 연변에 있는 연변대학교 박문일 총장의 초청을 받고 지난 7월 연변대에 체류하면서 일제시대에 있어서 조선족의 만주이민, 특히 간도(間島)지방에 관한 이민자료를 수집한 것을 글로 옮겨 유타 한인사회에 소개한다.
그 내용은 (1)조선족의 만주로의 이민동기와 그들의 생활상 (2)백두산 등정기 (3)연변대학교 (4)연변자치주의 장래 순으로 4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이다.
참고로 본문의 연변자치주(延邊自治州)란 해방전의 간도지방을 말하며 오늘날 행정적으로 연길시, 용정시, 화룡시, 돈화시, 도문시, 훈춘시, 안도현 및 왕청현 등 6시 2현을 말한다. <편집자 주>

 

1. 조선족의 만주로의 이민동기와 그들의 생활상

 

조선사람이 만주(滿洲)로 건너간 시기는 일찍이 삼국시대,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1902년 이조 말기에 Hawaii로 이민 갔었던 것과 만주로의 이민과는 성격적으로 다른 것이다. 전자의 이민은 전근대적 이민이라 하겠고 이조시대의 이민상황은 이와 비슷한 모습을 지속하면서 차츰 근대화하는 경향을 찾아 볼 수 있었다.
이민의 발생이란 당대의 정치, 경제 그리고 사회적 여러 가지 여건에 따라 나타나는 것이다. 이조 전기(全期)를 통해서 이민이 그치지 않았던 것을 볼 때 일반 백성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압박이 얼마만큼 컸던가를 알 수 있다. 특히 이조 말기에 와서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의 이민사태는 청나라와 조선과의 국경 조정문제와 이들 이민자들의 보호를 위해서 국제적인 외교문제로 까지 전개되었다.
만주와 국경을 이루고 있는 두만강과 압록강 양쪽 대안(對岸)은 옛날부터 인삼이 재배되었고 또 넓고 비옥한 토지가 많았다. 이 지역을 청나라는 청조 왕실의 발생지로서 이곳을 봉금지대(封禁地帶)로 정하고 한족(漢族)과 몽고인, 그리고 조선족 등 이민족들의 접근과 침입을 방비함을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요소 요소에 초소를 두어 출입자의 단속을 엄격히 하였다. 특히 조선북방 지방에는 대상(帶狀)의 공간완충지대를 만들었다.
청나라의 이와 같은 방비책에도 불구하고 국경을 넘어 개간(開墾)하는 조선족이 적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 조선측에서도 월강(越江)하는데 대해서 강경한 방비책과 응징책을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월강(越江)을 했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단속을 위해서 여러가지 방법을 취하고 숙종11년에는 삼수(三水), 갑산(甲山), 강계(江界) 등에 변비사(邊備司)를 두어 경계를 엄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월강(越江)을 막는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조후기에는 중앙의 헌정(憲政)은 물론 이들 세도정치를 배경으로 지방관리들의 학정(虐政)이 극도에 달했으며 삼정(田賦,軍政,還穀)의 문란으로 백성에게 과세를 통해서 압력과 학정, 수탈등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한 민중반발로 순조때에 홍경래의 난(1811)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 난(亂)을 전후하여 천재(天災), 수재(水災)와 곁들어 疫病(콜레라) 및 대화재(大火災) 등의 발생은 정국을 매우 어지럽게 하여 나라 사정은 어렵기만 했다.
이때 조선을 에워싸고 있는 국제적, 정치적 환경은 만만치 않았으며 러시아, 일본 그리고 청나라간의 대립은 첨예화해 감으로서 국제적의 긴장은 심도를 더해가기만 했다. 그리고 동학란(東學亂,1894)을 계기로 일본과 청나라의 전쟁을 초래했었다. 한편 러시아의 숙원인 남진정책(南進政策)은 조선과 만주에서 일본과의 대립을 가져와 일로전쟁(日露戰爭)으로 전개되었다.
일본은 양차대전(兩次大戰) 승리로 인하여 조선에 대해서는 타국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자적 위치에서 점차 조선의 주권을 침식하게 이르렀으며 을사조약(1905)을 비롯한 정미조약(1907) 그리고 한일합방(1910)에 이르러 조선을 완전히 지배하게 되었다.
순조연간의 정치적인 혼란과 흉년, 역병, 민란(民亂) 등은 백성으로 하여금 더욱 많이 두만강 그리고 압록강을 넘어가게 하였고 그 수나 또는 월강(越江)상태는 더욱 대담하게 되어갔다. 아무튼 넓고 기름진 토지는 조선인들의 곤궁한 처지에 있었던 그들에게는 유일한 생명선이요 생활원천이요 또한 안식처이기도 했었다. 이리하여 조선족들은 마침내 청나라의 봉금지대(封禁地帶)로 되어있는 완충지대에 집을 짓고 토지를 일구게 되었다.
이와 같이 두만강과 압록강 대안(對岸)으로 넘어가는 이주자는 여러 곳으로 갔으나 두드러지게 조선인들이 집단 이주하여 개간을 하였던 곳은 간도지방, 오늘의 연변지방이었다. 왜 이곳으로 많이 갔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다. (1)지리적으로 가까웠고 (2)간도지방은 천연적으로 토지가 비옥했고 (3)간도조약으로 거주자유와 귀화자에 대한 토지소유권을 인정했고 (4)복잡다난한 조선을 피하여 비교적 안이한 생활을 할 수 있었고 (5)끝으로 한일합방으로 인한 식민지 정책에 대한 반대 불만에 가득찬 자들이 이곳 간도를 찾았던 것이다.
조선족들의 간도에의 이주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정확한 시기를 집어 낼 수도 없다. 다만 여러 가지 사실문헌을 종합하여 볼 때 간도에의 이주시기는 인조6년 이전(明末)에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이 시기에는 청나라의 금봉지대(封禁地帶)에 대한 단속이 엄격했으므로 대담하게 또는 눈에 띄게 이주가 행해지지는 못했으며 다만 일귀경작(日歸耕作) 즉 아침에 강을 건너가서 경작하고 저녁에 돌아오는 정도였다.
그러나 강을 건너 밭을 가꾸는 사간(私墾)이 활발해 진 것을 청나라 중기 이후(1845년, 헌종11년) 소위 성지에 대한 금입정책(禁入政策)이 이완된 시기 이후이며 또한 조선에서는 정치혼란이 극심했고 국내도처에서 민란이 속출되었던 험악한 시국 이후로 간주된다. 이때는 인접 대안(對岸)에서 몰래 경작하는 밀경(密耕)에만 그치지 않고 두만강과 압록강 건너편 깊숙이 들어가게 되고 또 경작방법도 춘경추귀(春耕秋歸) 즉 봄에 갈아 가을에 수확할 정도로 대담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월강사간(越江私墾)의 추세는-현규환著 [한국유이민사]에 의하면- 고종6년(1869)과 7년(1870), 양안(兩岸)에 걸친 조선 북방지방의 대흉년의 결과 많은 사람들이 월강(越江)하여 많은 수효의 증가를 보였으며 청나라의 금령(禁令)에도 구애없이 깊은 밤을 타서 남녀노소 가림없이 앞을 다투어 양강(兩江) 건너편의 비옥한 토지를 찾아 모여들었다.
앞에서 언급한 대흉년이 조선북방지방을 휩쓸었을 때 회령부사(會寧府使)로 홍남주(洪南周)가 부임했다. 그는 현지의 민중의 민생고가 극도에 달하여 있는 것을 보고 이들의 구제를 위해서 고심했었다. 때마침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조중응(趙重應)과 이야기를 주고받고 하든 끝에 두만강과 압록강 대안(對岸)에 있어서의 사간(私墾)에 관해서 의견이 서로 상통되어 홍남주는 민생고 해결과 국토확충을 위해서 지방 유지(有志)인 이인회(李寅會)들과 상의하여 월강개간(越江開墾)을 서둘렀다. 이리하여 민생고 해결을 위해 강을 넘어 개간하는 방법을 택하게되어 월강(越江)하여 개간하는 원서를 제출하여 개간할 수 있도록 하고 두만강 건너편을 간도(間島)라 부르기로 지시했었다.
이리하여 당시 면장(面長) 임병하(林秉河)도 많은 농민을 동원하여 "인수개간원서(引水開墾願書)"를 부사에게 제출하면 즉시로 허간향사(許墾向事)라는 허가가 내렸다. 목적지는 회령부 서쪽30리 지점인 마라동구(馬羅同口) 평야 1백여 정보(町步)로서 산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을 산밑으로 끌어내려 관개하면 두만강과 계곡간에 간도(間島)란 곳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어제까지 월강죄(越江罪)가 적용되던 지역을 건너가 개간할 수 있다고 하는 소식을 전해들은 농민들은 어리둥절하면서도 줄을 지어 개간에 착수한지 불과 수일간에 1백여 정보의 헐벗은 땅이 농토가 되었다. "인수(引水)"라는 문자는 명목뿐이었으며 이것을 간도지방에서는 "경진개척(庚辰開拓)"이라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홍남주 부사의 독단적인 조처에 대해서 당시 회령좌수(會寧座首) 이후섭(李厚燮)은 부사에게 국법으로 금한 지역을 조정과 이렇다한 문의도 없이 허가한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지적했었으나 홍부사는 이에 대하여 백성 수만이 곤궁의 극단에 헤매고 있는 처지에 이를 구할 수 있으면 임금이 죽음을 준들 무슨 한이 있으랴하여 강력히 이 월강개간(越江開墾)을 밀고 나갔다. 다음해 봄이 되자 인군(隣郡)도 동일보조를 취하여 수만의 농민이 월강개간(越江開墾)하니 길이 500리, 넓이 4.5리의 토지가 개간되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조선 조정에서는 양전관(量田官)을 간도로 파견하여 전정(田政)을 두고 토지대장과 野草(地稅銘記帳)를 작성하여 간도지방대장이라 했다.
그리고 당시의 함경도 관찰사인 이윤중(李允中)은 함경북도를 시찰했을 때 보고에 "강을 몰래 건너가는 죄인을 전부 죽일 수는 없다(越江罪人 不可盡殺)."라고 까지 하였으니 차후에는 형죄(刑罪)를 중지하고 오히려 토지소유권을 증명하는 지권(地券)을 발부하여 이것으로서 두만강을 건너가 법정시민이 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고종 20년(1883)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 러시아와 청나라 양국(兩國)이 조선농민의 놀라운 증가율과 그 기찬 활동력에 불안을 느끼게 되어 점차 경계와 제한을 서둘게 되었다. 청나라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간도 귀속문제가 이때부터 조선과 청나라 양국간의 계쟁(係爭)문제로 대두되었다.
특히 이조말기에 이르러 국내 지배자층의 학정으로 비롯된 이민의 동기와 더불어 일본의 식민지 정책, 특히 토지조사사업에 의한 국유지화로서 농민들은 토지수탈과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광포한 사업 등 일련의 식민지정책이 결실(結實)함에 따라 조선농민의 전락(轉落)을 가져왔었다. 그 밑바닥에는 수많은 사람이 굶주리고 있었으며 그러므로 인해서 많은 부유민(浮遊民)을 속출했었다.
이와 같이 굶주리고 헐벗은 군중은 일본의 나날이 심해가는 식민지정책 및 망국의 증후가 압박하여 짐에 따라 망명객과 항일투사와 더불어 고향과 조국을 떠나 만주에 도피 내지는 이민하는 경향이 더욱 심해졌다. 한일합방 당시의 입만(入滿)상황, 특히 조선족과 인연이 있었던 간도지방(연변)으로의 이민의 통계를 살펴보면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1889 (고종31년)

34,000명

1907 (융희원년)

71,000명

1908 (융희2년)

89,000명

1909 (융희3년)

98,000명

1910 (융희4년)

109,000명

1911

126,000명

 

위의 표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주권을 잃고 일본의 통감부 정치가 시행된 다음해 1907년부터 년간 1만명의 증가를 보이고 있었으며 한일합방 이후에는 약 2만명의 증가를 보였다. 그러나 1909년에 간도문제가 낙착되자 향약(鄕約)을 폐하고 중국지역에 있어서의 자치제도를 인정하게 되어 간도와 조선족과의 정치적 관계는 단절되었다.
특히 이조 말에 있어서 일본과 청나라 사이의 간도조약(間島條約)은 외면으로는 조선인이 자유로이 거주왕래 할 수 있는 것처럼 되어 있으나 중국측에서 볼 때는 조선인 이주자는 만주발전에 큰 장애가 되었으면 되었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기에 조선인의 이주는 사실상 많은 제한을 받게 되었다.
간도조약 후에는 중국으로 귀화하여 입적(入籍)한 자 이외에는 공공연이 토지를 소유할 수 없게 되었고 특히 한일합방 이후에는 조선 이주자에게 더욱 불리해 졌다. 그 이유는 조선인의 배후에는 일본세력이 숨어있다고 의심하고 또 조선인들은 침략주의자들의 주구(走狗)라고 오해를 갖게 되었다. 즉, 중국인들은 일본인을 꾸에이(鬼)라고 부르고 조선인을 얼꾸에이(二鬼)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아무튼 이와 같이 파란곡절 그리고 만고풍상 다 겪었던 연변의 조선족들은 이주이래 5대(五代)에 이르러 완전히 생활기반을 잡게 되었으며 특히 연변농촌은 물론 중국 동북부 지방(舊만주) 어느 농촌을 가도 미작(米作)개간으로 명성을 떨친 조선족은 그 나름대로 풍요한 농촌생활을 하고 있었다. 필자가 용정시 안도현의 답사(踏査)에 나갔을 때도 그 풍요한 농촌생활을 보고 느낀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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