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site   게시판   메일   M1000선교사홈   Mission Magazine
 

 

  사전등록   히,헬 폰트받기
 현재위치 : HOME > 문서보기


 작성자  관리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단체  작성일  2008-04-03
 제목  산정현교회(1906)
 주제어  평양 산정현교회 주기철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1906년 1월 26일 평양 산정현교회가 설립되었다. 평양의 모교회인 장대현교회로부터 분립된 것이다. 1893년 시작되어 1901년 출석교인 1100명을 넘어선 장대현교회는, 1903년 스왈른(W. L. Swallen, 蘇安論)을 담임으로 남문밖교회를 분립시킨 데 이어 1905년에는 블레어(W. N. Blair, 邦緯良)를 담임으로 사창골교회를, 그리고 다시 이번에는 번하이슬(C. F. Bernheisel, 片夏薛)을 중심으로 산정현교회를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설립 당시의 산정현교회 예배당은 널다리(板洞)의 장대현교회 옛 예배당을 사용하였고, 영수 계택선ㆍ이덕환, 집사 최정서ㆍ김용흥ㆍ정이도, 조사 한승곤 등이 시무하였다. 설립된 지 불과 1년 만에 교인수가 300여 명에 이르자 닭골(鷄洞) 산정현에 예배당을 건축하고 이전하였다.

 

1905년 평남 평양시 닭골에 설립되었고 장대현교회를 모교회로 하고 있는 산정현교회는 당시 평양성 제4교회라고 부르기도 했다. 예배당은 예날 마포삼열 선교사가 살던 판교동 집을 사용하였다. 1년 후에는 교인이 300 명으로 늘어나 평양 성내 닭골 산정현 위에 56평의 규모로 1,000여원의 공사비를 들여 새 예배당을 건축하고 산정현교회라 이름하였다. 산정현교회는 그 후 날로 부흥하여 당시 평양뿐만 아니라 조선 전국에서도 가장 큰 교회로 알려졌다.

1907년 1월의 평안남도 도사경회(都査經會) 기간에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저녁집회는 사경회 프로그램의 일환이기는 했지만, 평양지역 4개 교회(장대현, 남문밖, 사창골, 산정현) 성도들이 참석하는 영적부흥을 위한 연합집회였다. 번하이슬과 산정현교우들은 1월 14일과 15일 그 놀라운 대부흥의 역사를 직접 경험하였다.


1938년 2월 8일에는 대지 967평에 건평 414평 2층 벽돌의 웅장한 새 예배당이 완공되어 헌당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산정현교회에는 민족중의의 그룹이 있었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본부 역할을 다 했는데, 그 어려운시대의 핍박과 압박 속에서도 당회와 제직회가 순교정신으로 일치했으며, 환난 당한 성도들의 결속은 사랑으로 슨화된 일체감 그것이었다.
이해 9월 제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일제의 강압에 의해 신사참배안이 가결되자 주기철목사와 본 산정현교회 교인들은 본격적으로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나서 교회가 폐쇄되고 순교를 당하기까지 싸웠다.

 

1945년 8월 15일 신사참배를 결사 반대하다가 폐쇄되었던 본 산정현교회는 해방과 함께 교회의 문이 활짝 열리고 흩어졌던 교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동년 8월 17일에는 한국 기독교를 대표하여 우상숭배신사참배를 결사 반대하다가 평양 감옥에 투옥되었던 25명중 옥중 순교한 9명 외에 16명이 산 순교자(이들은 자신들을 진리를 지키려고 노력했던 자들이라고 하면서 산 순교자란 명칭을 겸손히 거절하고 守眞者라고 하였음)로 출옥하였다.
그들은 신사참배에 항거하다가 폐쇄되었던 산정현교회로 찾아와 그곳에서 2개월간 숙식을 같이 하면서 순수한 신앙의 고귀한 모습으로 기도 속에 한국기독교의 혁신 복구방안을 마련하였는데 그 정신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라는 회개 속의 일치였다.

1946년 5월에 조만식장로 평양에서 소련군정을 반대하다가 감금된 후 행방불명되었다.

1948.2.11 공산당의 내부조장과 신사참배자들과 이에 동조하는 극소수의 혁신복구자로 자처하는 이들에 의해 교회내분이 일어 났으며 이 내분이 격해지자 혁신복구측의 수진자들은 겸손하게 양재연장로의 목장으로 임시예배처를 옮겨 예배를 드리다가 그 후 송현 여학교를 매입하여 정식교회로 정하고 예배를 드렸다.

이런 속에서 방계성 목사, 유계준 장로, 양재영 장로, 김철훈 목사(1949년 북괴요원에게 체포됨), 조만식 장로, 백인숙 전도사, 김현석 장로, 정일선 목사께서 죽어서 영원히 사는 순교 반열의 길을 떠나실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신사참배를 했던 친일교역자들과 제휴하는 것을 끝까지 반대 했던 교인들은 해방 후 이기선 목사를 중심으로 모여 수개월의 진통을 겪은 후, 마침내 교회를 이탈하였고 신양리 양촌의 양재연 장로의 목장에 따로 모였으며, 그 후 1949년 5월 이기선 목사는 독노회 조직을 발표하기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독노회와는 별도로 평양노회에 다시 복귀했더누 평양산정현교회는 1.4후퇴 이후, 일부 월남한 평양산정현교회 교인들이 1956년 2월 첫주일에 서을산정현교회를 재건하기로 결절하고, 서울산정현교회를 헌당하였다.

 

1965년 산정현교회는 1907년에 장로교 최초의 조직인 노회조직과, 1912년에 총회로의 발전에 대한 기쁨의 역사적 맥락(脈絡)과, 1938년 일제 강압에 의한 제27차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한 것에 대한 不服과, 1943년에 한국기독교가 일본 기독교에로 강제 편입된 것에 대한 불참(不參)을 선언한 교회로의 교단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이 뿌리의 주역들은 한국기독교의 순수한 정신과 삶과 조직을 가슴과 행동에 품고 순교와 감옥과 고문을 감수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신앙적 정절을 지키고 한국기독교의 역사적 맥을 이어온 순교자들과 수진자들이다. 본 교회는 이들에 의해 1946년 5월 중순에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교단 복구를 한 후 1965년과 1977년 4월 19일까지 법적 절차를 거치면서 한국기독교의 신앙적 정신적 역사적 맥을 잇고 있는 유일무이한 정통성을 가진 교회이다. 산정현교회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 = The General Assembly of Korea Presbyterian Church (독노회=최초의 장로교 조직인 연합과 일치인 One Presbytery = We are one in Christ 임)"산하에 있는 교회이다.

 

 

>> 목차고리 : 단체교단 > 교회

 



   


A-Z




  인기검색어
kcm  353624
설교  177437
교회  129756
아시아  103247
선교  98372
세계  88602
예수  85310
선교회  75386
사랑  71161
바울  70572


[배너등록]
 

 


홈페이지 | 메일 | 디렉토리페이지 | 인기검색어 | 추천사이트 | 인기사이트 | KCM 위젯모음 | 등록 및 조회

KCM 찾아오시는 길 M1000선교사홈 미션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