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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12-11
 제목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
 주제어  [동학혁명]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에 일어난 대규모의 민중혁명으로서 대내적으로는 봉건적 수탈에서 벗어나 참다운 농민해방을 추구하고 대외적으로는 외국세력의 침략에 항거하여 민족의 자주성을 수호하려는 민족주의 운동으로서 근대 민족운동사의 본격적인 출발점이자 우리 근대사에 커다란 전환기를 이루었던 혁명이었다.

1894년(고종 31) 전라도 고부군에서 시작된 동학계(東學系) 농민의 혁명운동은 그 규모와 이념적인면에서 농민봉기로 보지 않고 정치개혁을 외친 하나의 혁명으로 간주하며, 또 농민들이 궐기하여 부정과 외세(外勢)에 항거하였으므로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은 그동안 봉건가치를 고수하고 있는 보수세력들과 일제 식민사관에 젖은 인사들에 의해 압제되거나 외면되어 결국 “동학란” 이라고 일컬어져 동학에 의하여 일어난 단순한 반란으로 규정하여 왔었다. 다행히 1960년대 이후 학계와 운동세력에 의해 새로운 평가를 받기 시작했으며 최근 이 분야의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어 농민을 주체로 하는 반봉건, 반침략의 민족운동이었다는 점을 강조하여 재평가 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을 보면 교조신원운동을 바탕으로 고부봉기를 일으켜 전주입성에 이르는 동학농민군의 전진적 승리의 단계인 제 1차 봉기과 전주화약을 통하여 동학농민군이 지방통치를 이루는 단계, 그리고
동학농민군이 재봉기하여 공주우금치전투를 거치는 단계인 제 2차 봉기으로 나눌 수 있다.
특히 제 2차 봉기는 국토를 강점하고 국권을 유린하려는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우리민족의 자주적인 역량으로 이를 극복하려는 민족의 자위를 위한 민중의 항전으로서 이는 우리역사상 최초의 민중운동인 동시에 우리 역사에 길이 빛날 민족사의 위대한 구국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에 일어난 민중의 무장 봉기를 가리키며, 크게 1894년 3월의 고부 봉기(제1차)와 9월의 전주·광주 궐기(제2차)로 나뉜다.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역사적 배경


최제우조선 왕조의 봉건적 질서가 해이(解弛)하기 시작한 18세기부터 비롯되었는데, 그것은 곧 농업, 산업, 수공업, 신분제도 등 하부구조에서의 봉건적 구성의 붕괴가 바로 사회의식에 반영되어 실학(實學)의 발생과 평민의식의 대두를 보게 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 단적인 실례로서 1811년(순조 11)에 있었던 홍경래의 난을 들 수 있으며, 그 후 1862년(철종 13) 진주(晉州)의 농민봉기를 시초로 삼남 각 지방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은 극도로 문란해진 삼정(三政)에 대한 반항으로, 이미 이때부터 혁명 발생의 역사적 배경은 조성되고 있었다.
혁명의 이념적 바탕이 된 동학은 교조 최제우(崔濟愚)가 풍수사상과 유(儒),불(佛),선(仙)의 교리를 토대로 서학(西學:기독교)에 대항하여 ‘인내천(人乃天): 천심즉인심(天心則人心)’을 내걸고, 새로운 세계는 내세(來世)가 아니라 현세에 있음을 갈파하여, 당시 재야에 있던 양반계급은 물론 학정과 가난에 시달리던 백성들에게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가 커다란 종교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최제우를 체포, 1864년 사형에 처하였다.
교도들은 교조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벌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궐기하여 혁명에 호소하자는 강경론이 대두되었고, 뒤에 그 동학군을 영도한 인물로 전봉준(全琫準)이 등장하였다.

제1차 농민운동


효수된 동학군1876년 개항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투를 감행하여 조선을 일본의 시장화하는 한편, 조선에서 쌀을 반출해 감으로써 물가를 자극하여 농민들의 생활을 이중으로 억압하였고, 일본인 어부들의 횡포는 조선 어민의 생활을 위협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 기선(汽船)이 조선 연안에서 무역에 종사함은 물론, 세미(歲米) 운송을 위한 기선의 도입으로 종래의 조군(漕軍)과 선상(船商)은 몰락하게 되었고, 그 위에 세미운송의 책임자인 전운사(轉運使)의 횡포 또한 막심하였다.
이러한 절박한 사정 속에서 탐관오리의 횡포는 갈수록 가중되어 백성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 무렵 고부군수로 조병갑(趙秉甲)이 부임하였다. 신임 군수는 농민들로부터 무리한 세미를 거두어 들이고, 백성들에게 무고한 죄명을 씌워 2만냥이 넘는 돈을 수탈하는가 하면 부친의 송덕비각(頌德碑閣)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1,000여 냥을 농민들로부터 강제로 징수하였다.
또한 시급하지도 않은 만석신보(萬石新洑)를 축조한다고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쌓게 하고, 가을에 수세(水稅)를 받아 700여 섬을 착복하는 등 온갖 탐학을 다하였다.
농민을 중심으로 한 고부군민은 학정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여 동학의 고부접주(古阜接主)로 있는 녹두장군(綠豆將軍) 전봉준을 선두로 마침내 울분을 터뜨렸다.
1894년 1월 10일 새벽, 1,000여 명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은 흰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몽둥이와 죽창을 들고, “전운사를 폐지하라, 균전사(均田使)를 없애라, 타국 상인의 미곡 매점과 밀수출을 막아라, 외국상인이 내륙 각지로 횡행(橫行)하는 것을 막아라, 각 포구의 어염선세(漁鹽船稅)를 혁파하라, 수세 기타 잡세를 없애라, 탐관오리를 제거하라, 각읍의 수령,이서(吏胥)들의 학정 협잡을 근절시키라” 는 등의 폐정개혁 조목을 내걸고 노도와 같은 형세로 고부관아에 밀어닥쳤다.
이들은 무기를 탈취하고 불법으로 징수한 세곡을 모두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편 전라감사(全羅監司)로부터 고부민란에 관한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군수 조병갑을 체포 압송하게 하는 한편, 용안현감(龍安縣監) 박원명(朴源明)을 후임으로 부임하게 하고, 이어 장흥부사(長興府使)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按?使)로 보냈다.
신임군수 박원명은 도내 형편을 잘 아는 광주사람으로,그의 적절한 조처에 의하여 군중은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후에 부임한 안핵사 이용태는 민란의 책임을 모두 동학교도와 농민에게 전가시켜 농민봉기의 주모자를 수색하는 한편 동학교도의 명단을 만들어 이들을 체포하고자 하였다.
전봉준은 피신하여 정세를 관망하다가 이 기회에 고질의 뿌리를 뽑아야 하겠다고 판단, 인근의 동학 접주들에게 통문을 돌려 보국안민(輔國安民)과 교조의 신원(伸寃)을 위하여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마침내 1894년 3월 하순, 태인(泰仁)˙무장(茂長)˙금구(金構)˙부안(扶安)˙고창(高敞)˙ 흥덕(興德) 등의 접주들이 각기 병력을 이끌고 전봉준이 먼저 점령한 백산(白山)으로 모여드니, 그 수가 1만 명에 가까웠다고 한다.

전봉준은 대오를 정비한 다음 거사의 대의를 선포하였다. 곧,
① 사람을 죽이지 말고 재물을 손상시키지 말 것,
② 충효를 다하여 제세안민(濟世安民)할 것,
③ 왜적을 몰아내고 성도(聖道)를 밝힐 것,
④ 병(兵)을 몰아 서울에 들어가 권귀(權貴)를 진멸(盡滅)시킬 것 등의 4대강령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관리들의 탐학에 시달리던 인근 각처의 동학군과 농민들은 새로운 희망을 품고 앞을 다투어 백산으로 모여들었다. 태인의 동학군은 3월 29일 자발적으로 관아를 습격하여 관속(官屬)들을 응징하고 무기를 탈취하니 혁명군의 기세는 한층 더 충천하였다.


급보에 접한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은 영장(營將) 이광양(李光陽)˙이재섭(李在燮) 등에게 명하여 영병(領兵) 250명과 보부상대(褓負商隊) 수천 명을 이끌고 동학군을 섬멸하라고 하였다.
4월 6일부터 7일 새벽까지 관군은 도교산(道橋山)에 진을 치고 있던 동학군과 황토현(黃土峴)에서 싸움을 벌였다.
관군은 철저히 참패하여 이광양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병이 전사하였다. 사기충천한 동학군은 불과 한 달 만에 호남 일대를 휩쓸면서 관아를 습격하고 옥문을 부수어 죄수를 방면하였으며, 무기와 탄약을 빼앗고 이서가(吏胥家)에 방화하였다.
이러한 소식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전라병사 홍계훈(洪啓薰)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에 임명하고 군사 800을 파견하여 난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전주성(全州城)에 입성한 초토사 홍계훈의 경군(京軍)과 동학군은 월평리(月平里)의 황룡촌(黃龍村)에서 첫 대전을 벌였다.
일대 격전의 결과 경군은 대패하였고 동학군은 정읍 방면으로 북상, 4월 27일에는 초토사가 출진한 뒤 방비가 허술한 전주성을 쉽게 함락시켰다.
한편 홍계훈의 경군은 28일에야 전주성밖에 이르러 완산(完山)에 포진하고 포격을 가하였다. 동학군은 여러 차례 반격을 가하였으나 소총과 죽창만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차차 수세에 몰려 500명의 전사자를 내는 참패를 당하고 전의를 상실하게 되었다.
홍계훈은 이 때를 이용하여 선무공작(宣撫工作)을 시작하였으니, 즉 정부는 고부군수, 전라감사, 안핵사 등을 이미 징계하였고, 앞으로도 탐관오리는 계속 처벌할 것과 폐정(弊政)의 시정을 약속하였다.
때마침 앞서 요청하였던 청(淸)나라의 원군이 아산만에 도착하였고, 일본은 일본대로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6월 7일에 출병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렇게 되자 동학군은 우세한 장비를 갖춘 정부군과 지구전(持久戰)을 벌이는 것은 불리할 뿐더러 청,일 양군이 출동하여 국가의 안전이 염려되는 시기에 정부군과 싸운다는 것은 대의(大義)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여 폐정개혁 12개조를 요구하고 정부군의 선무공작에 순응하여 전주성에서 철병하였다.
강화(講和)가 성립된 뒤 대부분의 농민은 철수하고 동학군은 폐정개혁의 실시와 교세확장을 위하여 전라도 53주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요청으로 청군은 이미 상륙하였고, 일본도 톈진조약[天津條約]을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제2차 농민운동
전라도 각읍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개혁정치의 실현을 꾀하던 전봉준은 일병(日兵)이 궁궐을 침범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대원군을 섭정으로 하고, 청,일 양국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자, 폐정개혁을 논할 때가 아니라 항일투쟁을 벌일 때가 왔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신곡(新穀)이 여무는 시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가 9월에 접어들자 전봉준은 전주에서, 손화중(孫華中)은 광주에서 궐기하였으며, 호남,호서의 동학교도와 농민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전봉준은 전주 삼례(參禮)를 동학군의 근거지로 삼고 대군을 인솔, 일단 논산에 집결한 뒤 3방향으로 나누어 공주(公州)로 향하였다.
또한 각지의 수령들도 수원,옥천 등 요지를 점거하여 동학군을 원호하였다.
한편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관군과 일본군은 급히 증원부대를 요청, 동학군이 공주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미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10월 21일 전봉준의 10만 호남군과 손병희의 10만 호서군은 관군과 일본 연합군을 공격, 혈전을 거듭하였으나 상대방의 막강한 근대적 무기와 화력으로 인해 우금치(于金峙)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하여 논산,금구,태인 등으로 퇴각하였다.
전봉준은 순창(淳昌)에서 재기를 꾀하던 중, 11월 배반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1895년 3월 서울에서 처형되었다.
이로써 미증유(未曾有)의 광범한 민중의 무장봉기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1년 동안에 걸쳐 30∼40만의 희생자를 낸 채 끝났고, 이들의 개혁의지는 이후의 정치에 큰 영향을 끼쳐 위정자의 반성과 각성을 촉구하여 갑오개혁(甲午改革)의 정치적 혁신을 가져왔다.

 

 

>> 바깥고리 :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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