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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10-26
 제목  이스라엘 역사
 주제어  [이스라엘]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이스라엘 역사

 

  이스라엘 역사는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하다. 그것은 곧 성경의 역사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성경은 또한 이스라엘 역사와 더불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소개된 많은 이스라엘역사는 외국인 저술의 번역물이 대부분이며, 그 역사 기술이 고대사에 집중되어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본 저술은 위에서 지적한 두 가지의 약점을 보완하려는 의도에서 시작하려 한다. 특히 역사 기술에 있어서 신학적 의도를 배제하고, 고대사 부분과 중세 및 현대사 부분의 균형을 맞추어 서술하게 될 것이다.

 

[목차] 제1장 이스라엘의 기원과 민족의 형성
                  1. 문명의 사이에 서 있는 이스라엘
                  2. 간추린 고대근동의 역사
                  3. 이스라엘의 족장들
                  4. 이집트 탈출 사건과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
                  5. 가나안 정복과 사사시대

           제2장 제1차 성전시대(1024 B.C.E -586 B.C.E.)
                  1. 왕정의 확립
                  2. 사울
                  3. 다윗과 솔로몬
                  4. 남북 분열의 원인과 그 의미
                  5. 남북 왕조의 역사
                  6. 분열 왕국의 남북관계

           제3장 제2차 성전시대(538 B.C.E.-70 C.E.)
                   1. 바빌로니아 포로시대
                   2. 페르시아 시대의 이스라엘
                   3. 알렉산더 대왕의 등장과 헬레니즘
                   4. 마카비전쟁
                    5. 헤스모니안 왕조
                   6. 로마의 통치와 헤롯대왕
                   7. 제1차 유대반란과 예루살렘의 멸망
                   8. 예수와 초기 기독교

           제4장 미쉬나,탈무드 시대(70-640 C.E)
                   1. 성전멸망 이후의 변화들
                   2. 산헤드린의 설치
                   3. 제2차 유대반란
                   4. 아모라(Amora)의 시대
                   5. 바빌로니아의 유대인
                   6. 미쉬나와 탈무드
                   7. 콘스탄틴 황제와 유대-기독교 논쟁
                   8. 산헤드린의 폐지와 아랍의 등장

           제5장 팔레스틴의 새주인들
                   1. 비잔틴(325-640 C.E.)
                   2. 모슬렘(640-1091 C.E.)
                   3. 십자군(1091-1299 C.E.)
                   4. 마멜룩(1299-1517 C.E.)
                   5. 터어키(1517-1917 C.E.)

           제6장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
                   1. 디아스포라의 유대사회와 문화
                   2. 중세 유럽의 유대인
                   3. 유럽의 변화와 유대인 공동체
                   4. 반유대주의(Anti-Semitism)

            제7장 현대 이스라엘의 건설과 중동의 평화
                   1. 시온주의의 태동과 그 이념
                   2. 헬쩨 이후의 변화들
                   3. 제1차 세계 대전과 시온주의 운동
                   4. 양차 대전 사이의 시온주의 운동
                   5. 나치 대학살(Holocaust)
                   6. 현대 이스라엘 독립과 그 과정
                   7. 이스라엘의 정책과 중동전쟁
                   8. 중동평화

 

제1장 이스라엘의 기원과 민족의 형성

1.문명의 사이에 서 있는 이스라엘

  한 국가의 흥망성쇠는 필연적으로 주변 국가의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맺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의 경우 약소 민족으로서 주변 강대국으로부터의 영향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누구이며, 그 사람들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이스라엘 민족은 어떤 과정에 의해 한 민족이 되었는가? 그들의 종교적 뿌리는 무엇인가? 그들의 하나님 야훼는 누구이며, 어떻게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는가? 이러한 질문들이야 말로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답하기에 앞서 이스라엘이 위치하며 살고있는 근동 지방의 다양한 역사와 변화를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중동의 한 작은 나라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세계 3대 대륙인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을 연결하는 교량적 위치에 놓여있다.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불가피하게 고대 근동의 여러 나라들과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관계를 맺어 왔다.
  상대적으로 약세에 처해있던 이스라엘은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많은 침략을 받아 왔으며, 그들로부터의 종교적 영향을 배제할 수 없었고, 인류 문명의 발생지 가운데 하나인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양대 문명과의 경제적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었다. 바빌로니아를 비롯한  앗시리아, 페르시아 제국들은 직접적으로 이스라엘의 역사에 영향을 끼쳤으며, 이집트 역시 직접 이스라엘을 지배했었다.
  뿐만 아니라 서쪽의 아나톨리아와 그리이스 및 로마 제국 역시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서방의 이 문명은 이스라엘을 지나 동방의 그것과 충돌하였다. 이러한 동서의 만남도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룩된 셈이다.
  한편, 이스라엘은 '기름진  초생달'(Fertile Crescent)의 서남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평야와 사막의  경계가 되기도 한다. 동쪽 메소포타미아의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줄기를 타고  초생달 모양을 이루며 북서쪽으로 발달한 기름진 평야는  이스라엘의 줄기를 타고 내려오면서 그 끝을 이루고 있으며, 이집트로부터 북쪽으로 이어지는 사막과 만나게 된다.
  이스라엘을 지나가는 중요한 고대 도로는 양대 문명을 연결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스라엘  안에서 발달된 도로는 이스라엘의 국제적 관계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며, 도로를  중심으로 발달된 도시들과 인구의 밀집상태, 군사적 행동등 많은 사건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고대의 역대 왕들의 매우 중요한 사업 가운데 도로공사는 필수적인 요소로 여겨왔으며, 이는 곧 정복의 한 과정으로 취급되어졌다(cf.사62:10; 40:3;  57:14;  49:11; 렘18:15). 동시에 국제 상업로(international transport routes)로서의 도로의 역할은 경제 교류에 크게 기여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을 통과하는 국제로(International  Highways)는 '해변의 길'(ViaMaris)과 '왕의 대로'(the King's Highway)로 크게 구별된다. 이 두 도로는 많은 군인, 사신, 상인, 여행자들이 지나 다니는 길로써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이스라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왔다.
  이사야 9장 1절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해변의 길'은 이집트 탈출 사건에서 언급되고 있는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the way to the land of Philistine, 출13:17)과 부분적으로 일치 한다. '바다의 길'(the way of the sea)로 불리우는 이 도로는 라틴말로 Via Maris라 칭한다. 이 도로를 중심으로 발달된 도시들로는 이집트로부터 시작하여 가자, 아스돗, 아벡(삼상4:1;29:1; 왕상20:26ff; 왕하13:17), 므깃도(왕상9:15-19, cf.계16:16), 하솔(왕하15:29), 다마스커스를 지나 메소포타미아에 이르게 된다.
한편,'왕의 대로'는 요단 동편 산지(Transjordanian highlands)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길게 뻗은 도로로써 민수기 20장 17절과 21장 22절에서 언급되고 있다. 이 도로는 세렛(Zeret,신2:13), 아르논(Arnon,신3:8), 얍복(Jabbok, 신2:37;3:16;민21:24,cf.창32:22), 그리고 야르묵(Yarmuk)등의 큰 와디(Wadi)가 가로 놓여 있어서 장애물이 되고 있다. 이집트 탈출의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 도로를 따라 모압산지 느보산에 이르러 가나안땅으로 들어오게 된다(신2-3장). 한편,창14장에서는 '왕의 대로'를 중심으로 형성된 많은 도시국가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다.

2. 간추린 고대근동의 역사

(1).메소포타미아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의 두 강이 흐르고 있는 메소포타미아는 3,000 B.C.E. 이미 청동기 문명을 가진 수메르인(Sumerian)들이 도시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종교, 언어, 군주를 가진 인류 최초의  고등 문명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나스르 시대(2,800-2,700 B.C.E.), 메질림 시대(2,600 B.C.E.), 그리고 우르 왕조(2,500- 2,350 B.C.E.)를 거쳐 오면서 그 세력을 확장해 왔다.
  그러다가 이들의 세력은 서북쪽에서 발흥한 셈족의 아카드인(Akkadian)들에 의해 멸망하면서 메소포타미아를 넘어 소아시아, 이란의 고원 지대를 포함한 거대한 아카드 제국(2,350-2,050년 B.C.E.)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중앙 집권적인 관료 국가를 이룩하였으며, 왕이 곧 신이었다. 국가 건설의 주역인 사르곤 대제(Sargon I)는 그야말로 '위대한 왕'이요, '신의 대리자'였다. 2,150년경 아카드왕조는 비셈족계의 산악인들의 침입으로 그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하면서 100여년을 보낸다. 1976년  에블라(Ebla)에서 발견된 약 16,000여개의 토판문서는 이 시대의 법률, 종교, 교역등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수메르 복고 시대(2,050-1,950 B.C.E.)를 거쳐 바빌로니아 왕조로 이어지는 메소포타미아에서는 함무라비왕(1,728-1,686 B.C.E)의 법전이 완성되기도 하였다. 바빌로니아의 발흥과 함께 마르둑(Marduk) 신은 만신전의 최고의 신으로서 당시 에테메난키(Etemenanki) 신전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 풍부한 문헌들-바빌로니아의 창조설화와 홍수 설화, 점성술과 제의 신탁등-은 고대 사회의 성왕한 문화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2) 이집트
  팔레스틴을 사이에 두고 발생한 또 다른 하나의 문명은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의 기록대로 "나일강의 선물"이라 일컫는 이집트 문명이었다.
  이집트는 가장 안정된 정치적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그 나라가 사막과 바다에 의해 고립된 사실에 기인한다. 고왕조(제1-6왕조,2,850-2,200 B.C.E.)의 시작은 메네스의 통일 국가로부터 이룩된다. 고전적 개화기를 맞은제3왕조에 들어서면서 불가사의라 일컬어 지는 피라밋(Pyramids) 건설은 이들문명의 대표적 표상이 되었다.
  중왕조 제1기(제7-10왕조, 2,200-2,052 B.C.E.)는 여러 지방 군주들의 반란과 폭동으로 인한 혼란기였으나, 제2기(제11-13왕조,2,052-1,790 B.C.E.)에는 다시 국가의 통일을 이루어 테베(Thebe)를 중심으로 그 문명의 자리가 바뀌었다. 제3기(제14-17왕조,1,710-1,570 B.C.E.)에 들어서는 아시아로부터 온  힉소스(Hyksos) 의 침략으로 통치권이 넘어가면서 이집트 내부에는 많은 구조적 변화를 맞게 된다.
이집트 왕조의 꽃이라 일컬어지는 신왕조(제18-24왕조,1,570-1,085 B.C.E.)는 아흐모스(Ahmose), 투트모스(Tuthmoses), 아메노피스(Amenophis), 투탄카문(Tutankhamun), 람세스(Ramses), 세티(Seti), 메르넵타(Mernepta)왕으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화려하게 발전하였다.
  이집트인들은 주기적인 나일강의 범람과 함께 농업이 크게 발달하였으며, 이러한 현상은 역사를 순환하는 것으로 보게함으로써 메소포타미아와는 달리 이집트인들에게 유동적인 사고의 특징을 가져다 주었다.

(3)소아시아
  고원 지대와 에게 해안의 저지대에 이르는 서부 아시아는 독자적인 소아시아의 문명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힛타이트 제국(Hittite, 1,800-1,460 B.C.E)으로써 성경에서는 이들을 헷족속으로 부르고 있다. 그들은 1,530년B.C.E. 바빌로니아를 침공하여 그를 정복하기도 하였으며,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사이의 세력 균형을 조정하고 중재하는데 그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하였다.

(4)고대 근동과 팔레스틴
  고대 근동 지역의 여러 왕국들은 각각 시대의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제국으로 발전하였으며, 그들은 관개 농업을 발전시키고, 국가간의 무역, 외교, 동맹 체결, 패권을 획득하기 위한 전쟁등을 통하여 발전해 왔다. 그들에게 있어서 종교는 기존의 사회적, 정치적 질서를 합법화시키는 이데올로기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그들은 제국들의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 관리들을 수반으로하는 행정구역을 만들었으며, 강력한 식민지 정책을 구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팔레스틴은 여러  민족의 이동과 이주와 함께 인구가 증가하고 도시 국가들이 세워지며, 여리고, 므깃도, 하솔, 게셀등의 도시들이 견고하게 요새화 되었다. 이 시기에 페니키아에서는 초기 가나안 언어인 알파벳 문자가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가나안 사람들의 이 언어는 고대 히브리어의 모체가되었다.
  고대근동의 이러한 정치사에 대한 관찰은 이스라엘의 기원을 확인하는데 있어 다소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은 어느정도 사실이나 우리가 이스라엘의 초기 삶이 보도되어 있는 성경 안으로 들어가 보면 고대 팔레스틴의 복잡하고 다양한 문화적, 사회적 특징을 만나게 된다. 다시말하면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는 보다 넓은 근동의 상황 속에서 이해되나 동시에 그들 고유한 상황과 특성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 이스라엘의 족장들

(1)족장 이전의 팔레스틴
  족장 이전의 팔레스틴의 환경에 관하여는 우리가 아는 사실이 극히 제한되어 있다. 왜냐하면 성경의 역사는 아브라함의 이주 이후의 역사로 부터 취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동안 고고학적 발굴의 결과로 인하여 족장 이전의 모습에 관하여 대강의 모습을 구성할 수 있는 정도이다.
  기원전 2,000년의 팔레스틴을 포함한 고대 근동의 역사는 인종적, 문화적,정치적 패턴의 대 변혁기였다. 이집트는 신왕조(New Kingdom Dynasty,18-24왕조,1570-1085년)의 시작과 함께 막강한 힘을 뻣어 나갔으며, 북쪽의 힛타이트제국 역시 엄청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팔레스틴은 이러한 강대국들의 틈에서 여러차례 지배를 받아 오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아모리인(Amorite) 의 이동과 함께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이들의 이주는 강대국들 사이에서 독자적인 문화와 종교의 발전을 이루며 살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 외에도 그 후 에돔, 모압, 암몬, 블레셋등의 세력들이 함께 팔레스틴에 머물며 살게 되면서, 가나안 문화는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형태를 이룩하게 된 것이다. 이들의 문화는 주로 도시국가(City-State) 형태를 갖춘 고등문화 수준이었다. 한 통치자(왕)를 중심으로 하여 귀족 계급을 두고 있으며, 때로는 도시국가 간의 동맹 체제를 이루면서 중앙 집권 형태의 구조를 가진 제국들과 맞서 나갔다.
  시리아-팔레스틴은 대략 1550-1225년 B.C.E.까지 이집트의 속국에 불과하였다. 최근 발견된 엘 아마르나(El-Amarna) 문서 는 이집트의 식민지의 상황을 알수 있는 매우 중요한 외교 문서로써 이 시대의 가나안의 환경을 이해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가나안의 도시 국가의 목록-세겜, 라기스, 아쉬켈론, 예루살렘, 가자등-과 군대 규모, 정복한 도시 통치자들을 다스리는 방법등에 관한 다양한 기록을 담고있다.

 (2) 아브라함의 이주와 이스라엘의 여명
  구약 성경이 말하고 있는 최초의 이스라엘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명령으로부터 시작된다:"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 아브라함의 순종은 이스라엘 문명사(history of civilization)의 전환점이 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팔레스틴의 원주민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처럼 다른 지역에서 살던 한 유목민의 이주로부터 시작되었다. 본래 아브라함의 고향은 메소포타미아의 한 도시 우르(Ur)였다. 당시 이 도시는 메소포타미아의 최고의 도시 국가였다. 그는 '기름진 초생달' 지역을 지나 가나안이라 일컬어지는 팔레스틴 땅으로 이주해 들어왔다. 그가 지나간 하란(Haran) 역시 매우 번창했던 도시였다.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를 떠나 가나안에 입주하던 시기를 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사 고고학자인  올브라이트(Albright), 그릭(Glueck), 드보(De Vaux)등은 이 시기를 2,000-1,500년 B.C.E., 즉, 중기 청동기시대(Middle Bronze Age)로 잡았으며, 이러한 주장은 유프라데스의 마리(Mari)에서 출토된 문서에서 뒷바침되고 있다. 그러나 코프만(Kaufmann), 고든(Gordon), 아이스펠트(Eissfeldt)등은 가나안 정복과 정착 시기와 비슷한 기원전 14세기로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의 성경적 근거로 창15:16을 들고 있다:
  "네 자손은 4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 오리니". 야곱 이후의 4대는 야곱-레위-고핫-아므람-모세이다.
그런데 대표적인 시대 착오적인 성경의 기록으로써 족장들의 기록에 '약대'가 등장한다는 사실이다(창12:16;24:10;  30:43; 31:17등). 인간이 낙타를 길들여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2세기였다. 이처럼 성경에서의 년대는 일반적인 년대나 족보와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다(cf.대상7:22-27).
  이처럼 이 시대의 년대를 정하는 일이 매우 까다롭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작업을 성경의 역사적 기록이나 자료, 또는 고고학의 증언을 통한 확증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 보다는 일반 정치적, 지리적 자료, 그 시대의 관습이나 법률, 사회 경제적 지위, 혹은 생산 및 자기 방어에 대한 관심을 균형있게 연구함으로써 보다 가까운 조상들의 시대의 상황을 그려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이 살던 시대의 삶의 상황과 형태는 반유목문화적(Semi-nomadic) 형태를  띄고 있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유리하는 아람인"(신26:5)으로써 여기 저기 이주하면서 살았다. 세겜(창12:6;33:18),  베델과 아이(창12:8), 헤브론 근처(창13:18; 35:27), 브엘세바(창26:25)등의 중앙산지가 그들의 중요한 거처들이었다. 이 곳은 잘 발달된 목초지로 목축에 가장 적합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또 족장 가운데  이삭은 부분적으로 농업을 하기도 하였다(창26:12). 이들은 분명히 사회, 경제적으로 반유목문화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유목문화의 특징으로는 1)계절에 따라 이주하는 생활, 2)가축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조직 사회의 구성-족장을 중심으로 한 씨족이나 부족 사회(각 부족의 특색), 3)지파간의 권리 보호를 위한 계약 제도 형성(규율), 4)계약 위반자에 대한 철저한 피의 복수법(명예), 5)손님에 대한 융숭한 대접과 친절한 행위(나그네 보호법), 6)상속법등을 들수 있다. 유목민들은 대체로 열려진 광야에서 살면서 종교적이거나 혹은 정치적인 것이거나 간에 그 어떤 속박도 용납하지 않는 자유를 가진 자들이었다.
  이러한 족장들의 삶의 형태는  최근 고고학적인 발굴 자료를 통하여 어느정도 확인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발굴을 통한 자료가 직접적으로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에 관한 자료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 시대의 문화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초기 히브리인들의 이름들은 대부분 근동지방의 고고학적 자료에서 나타나는 이름들과 유사한 셈어적 이름들-야곱, 아브람, 나홀, 데라등-이라는 사실에서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유사한 주민들이 살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를 요약해 보면 먼저 족장들은 한 곳에 머물러 살지 않았으며, 도시 문명지대의 영향권 밖에 머물면서 도시 문명을 건설하지 않았고, 천막을 치고 이주하던 생활 구조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몇몇 무덤(cf.창23;35:19-20)이 발견된 것을 제외하고는 고고학적인 증거를 거의 발견할 수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동시대의 특성이 족장들의 역사의 직접적인 '증거'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성경에 기록된 족장들의 시대 상황과 잘 들어맞는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다만 아브라함에 관한 유일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 구약 성경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관심은 아브라함 이후의 족장들(Partriarchs)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의 씨가 확산되는 근거가 되었다는 점과 그들이 살 땅을 유산으로 받았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12:2,7).

(3)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
  아브라함 이 후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소위 족장들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족장들은 단지 고독한 개인이 아니라 꽤 규모가 큰 씨족들의 추장들이었다.
  이 시기의 팔레스틴은 수없이 많은 유목민 씨족들로 뒤섞여 있었으며, 이스라엘의 족장들은 이들 가운데 한 집단들을 대표하고 있었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 그리고 야곱으로 이어지는 족장들의 역사와 삶은 대체로 고대 이스라엘의 문화를 잘 반영해 주고 있다. 특히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면서 [이스라엘](Israel)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데, '하나님과 씨름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야곱은 4명의 아내로부터 모두 12명의 아들을 두고 있는데, 그들은 이스라엘의 각 지파의 조상이 된다. 레아에게서 낳은 장자 르우벤을 비롯한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블론, 라헬에게서 낳은 요셉 과 베냐민, 빌하에게서 낳은 단과 납달리, 실바에게서 낳은 갓과 아셀이 그들이다(창35:22-26). 이스라엘의 역사는 12지파의 역사로 전개되어 가고 있으며, 각 지파간의 협력과 갈등의 역사이기도 하다.
  한편, 요셉의 생애는 그가 살던 시대의 배경을 무대로하여 문학적으로 잘 구성된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는 형들의 미움으로 이집트에 팔려 갔으며(창37장), 머슴살이를 시작으로 이집트의 총리 대신에 이르기까지 지혜롭게 살아간다(창38-41장). 훗날 가나안 땅에 큰 기근이 들어 야곱과 그의 형제들이 이집트로 내려와 살게  된다(창42-46장). 바로 여기서 요셉의 이야기는 족장들의 약속과 이집트 탈출 사이의 연결 고리를 이루고 있다.
  종합하면 주전 20-18세기 '기름진 초생달' 지역의 북부 문명 지대안으로 수많은 이주민들이 들어왔으며, 그들은 작거나 큰 조직 사회를 형성하였다. 팔레스틴에로의 이주가 제법 오랫동안 계속되어 오면서 이 지역의 문화를 결정해 나갔다. 특히 족장 중심의 성경 기록은 이 시대의 여러 민족들의 이주와 더불어 이해될 수 있으며, 이들은 각각 개별적인 민족 혹은 부족으로써 존재해 오던 것이 하나의 계보(부족집단)로 결합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대체로 반유목민의 생활 방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족장들은 각각 씨족의 수호신을 숭배하고 있었으며, 토착적인 종교 제의가 행해졌다.
  이러한 여러 각기 다른 전승들이 하나의 체계적인 전승으로 묶여 확장 혹은 손질을 보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전승은 조상들의 역사를 고증하기 위한 전승의 편집이라기 보다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영웅적인 조상들을 새로운 사회 종교적 질서(socioreligious order)의 창립자 또는 선각자로 찬양하기 위한 보도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초기 이스라엘의 족장들의 역사는 성경 이외의 이들에 관한 직접적인 자료 부족으로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이들이 살던 시대의 시대적 정황을 통하여 유추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족장들의 초기 유산은 이스라엘의 민족 의식과 신앙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끼쳐왔으며, 그런점에서 족장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역사와 신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을 자신의 '조상'이라 부르는 것은 역사상 타당한 이유가 없지 않은 것이다(창15:6;롬4:3;히11:8-10).

4. 이집트 탈출(Exodus) 사건과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

(1)민족의 이동과 '아삐루'
  성경 전승에 따르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족장들의 보도가 요셉의 이집트에로의 이주 기사(창37장 ff)를 깃점으로 팔레스틴의 족장 전승의 흐름이 이집트 이후의 모세 전승으로 옮겨가고 있다. 이러한 성경의 기록에서 이스라엘이 단일한 족보상의 발전 과정을 거쳐 출현하였다는 인상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으며, 성경도 이스라엘 민족이 대단히 복잡한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으며, 또 극히 잡다한 출신 배경을 가진 성원들을 포괄하였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
  이집트로 이주한 야곱의 혈속(nefesh,"person"(JPS);"generation"(RSV);씨족)은 모두 70인이었다(출1:5;cf.창46:8-27). 이집트 사람들은 그들을 '히브리'라 일렀다. 그런데 성경은 400년(창15:13) 혹은 430년(출12:40)간 종살이를 한 후 이집트를 탈출해 나온 사람들을 600,000명의 "이스라엘 자손"(bnei israel)과 중다한 잡족"(erev rav,"mixed multitude")들이었다(출12:37-38)고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더불어 탈출한 사람들을 "이스라엘 중에 섞여사는 무리"(ha-esafsaf,"riffraff in their midst"(JPS);"Rabble that is among them"(RSV),민11:4)라고도 불렀다.
  이 점에 비추어 볼 때 이집트로부터 가나안으로 이주한 이들은 이스라엘을 포함한 대규모 하류민 집단이었음이 확실하다. 조상들의 전승과 관련해서 볼 때 이집트 탈출의 무리들은 이스라엘의 자손들뿐 아니라 전쟁 포로 혹은 노예들이 포함되었다. 노예들의 반란과 탈출이라는 사건이 이스라엘 민족의 이주와 연합되어 이집트 탈출이라는 거대한 역사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사실 히브리인들의 정체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추론들이 있다. 특히 가장 유력시 되고 있는 학설가운데 하나는 아삐루(apiru)와의 관련설이다. 주전 14세기경의 엘 아마르나 문서(el-Amarna Letters)는 종종 하비루(hbr)라고 표기된 침입자들에게 대항하는 상황에서 팔레스틴의 도시 통치자들이 이집트 바로에게 원조를 요청하고 있는 글이 발견된다. 주전 1360년경 예루살렘의 도시 군주 압디-헤바(Abdi-cheba)는 이집트왕 아메노피스 IV(Amenophis)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사람들이 나의 주, 왕 앞에서 나를 비방하고 있읍니다...어찌하여 너희는  아삐루('Apiru)를 사랑하고 지역의 감독관은 미워하는가? ... 아삐루는 왕의 모든 나라를 약탈합니다..."
  비슷하게도 킬티(케글라,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도시)의 슈바르다타(Schuwardata)도 "나의 주 왕께서는 아삐루가 다..(무기?)를 가지고... "라는 문구가 발견되며, 또 이집트의 아메노피스 II의 한 비문(주전 1400년경)에서도 포로민인 '아삐루 3600명'이 언급되어 있으며, 라암세스 II(주전 13세기)때의 서신에도 "라암세스 미아문 돌들을 운반하는 ...,거대한 이집트 궁전과 사원의 문을 위하여 일하는 군인들과 아삐루들에게 군량미를 주어라"는 기록이 있다.
라암세스 IV의 원정에 참여했던 사람들 가운데는 "'nt 지파들의 800명의 아삐루"가 나온다.
  아삐루는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가나안 및 이집트등지에 흩어져 살던 뚜렷하지 않은 백성(inconspicuous people)임에 틀림없다. 이들 아삐루는 대체로 땅이나  소유가 없는 외국의 용병(mercenary  soldiers)이나 약탈자(guerilla bands), 또는 포로민들과 노예들(slave labor)로써, 사회의 가장자리에 뿌리없이 살아가는 "떠돌이"(wanderers) 혹은 "국외자"(outsiders) 였다. 그것은 종족적(racial or  ethnic)인 개념이 아니라 사회 계층적(social stratum)인 개념으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사람들은 아삐루('Apiru)를 이브리('ibri,"히브리인")와 동일시 하였다. 구약에서 이브리가 완전한 자유인이 아닌 종이나 남녀에게 사용되었던 것과 같이 (출21:2;신15:12), 그것은 "가족의 소속이 없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주로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권리가 없는 약한 외국인을 통칭하는 의미로도 사용되게 된 것이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조상이 된 "히브리 사람 아브람"을 최초로 말하고 있으며, 가나안에 머물고 있던 사람들 사이로 들어와 체류(거주,ger)하는 모습이 분명하다(창14:13).
  가나안에 머물던 히브리인들의 뿌리는 야곱이 이집트로 이주한 이 후 약화된다. 특히 이들의 이주는 이집트의 베니 하산(Beni-Hasan) 무덤 벽에서 발견된 벽화(19세기 B.C.E.)를 통하여 당시의 삶의 양태를 알 수 있다. 이 그림에는 수염 달린 사람들, 활 쏘는 사람(bowman), 음악가, 당나귀를 탄 여자와 어린이, 그리고 양과 염소 등이 어우러져 있다.

(2) 연대기와 이집트 탈출의 시기
  성경의 본문은 연대기적 골격을 제공해 주는 몇 개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먼저 솔로몬은 이집트를 탈출한지 480년 후에 성전 건축을 시작하였다고 한다(왕상6:1). 성전의 주추돌을 놓은 시기는 967-958년 B.C.E.가 확실하다. 역으로 계산하면 이집트를 출발한 시기는 15세기, 즉 1447-1438년 B.C.E.년경이 된다. 출12:40에서는 이집트에서의 체류기간을 총 430년이라고 진술하고 있는데(창15:13에서는 400년), 이에 의하면 야곱이 이집트로 내려간 것은 19세기, 즉1877-1868년경이 될 것이다. 이에 성경의 여러 연대표를 통하여 추정해 보면(창47:9;25:26;24:5;12:4) 아브라함이 고향 하란을 떠난 시기는 2092-2083 B.C.E.년경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의 연대기는 성경 밖의 여러 자료와 비교할 때 상치되는 점이 많다. 먼저 사마리아 오경(Samaritan Pentateuch)과 70인 역(Septuagint)에 제시된 수치가 히브리어 성경(MT)의 그것과 많이 다르다는 점과, 보다 중대한 문제는 15세기 이집트 탈출설을 가정하는 것은 성경에 묘사된 당시 이집트의 정치적 상황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며, 또 고고학적으로 이스라엘이 1400-1250년대에 가나안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집트 탈출의 년대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이집트의 증거 자료의 제시일 것이다. 이집트 탈출 년대를 기원전 15세기로 보는 입장은 이집트로부터 힉소스족을 몰아낸 제18왕조(Thutmosis III,1468-1436년 B.C.E.)는 추정컨대 아시아인을 무척 혐오하게 되면서 그들이 지배하고 있던 히브리 노예들을 가혹하게 억압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운다. 이는 성경의 요셉이 힉소스계의 바로에게 총애를 받은 것과 그 뒤의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출1:8)인 제18왕조가 아시아계인 히브리인들을 학대하는 것과 일치한다. 또,1425-1350년 B.C.E.동안에 가나안의 여러 도시국가들을 무너뜨리며 활동하던 아삐루(apiru)에 관한 엘 아마르나 문서의 언급은 성경의 기록에 나오는 가나안 정복을 위한 이스라엘인들의 활동과 일치하는 기록으로 설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주장은 성경에 나오는 여러 다른 기록과 정황에 관하여는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면 히브리 노예들이 노역에 시달렸다는 비돔(Pitom)과 라암셋(Ramses)(출1:11)은 텔타 지역의 아름다운 목초지의 도시로써 이집트의 수도인 테베(Thebe)와는 너무 거리가 멀다. 이러한 정황은 오히려 제19왕조의 라암세스 II(1290-1224 B.C.E.)의 그것과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즉 제19왕조는 텔타평원에 있던 힉소스의 수도인 아바리스(Avaris)에 도시를 재건하여 "라암셋의 집"(Raamses)이라 불렀으며, 그 외에 몇 개의 도시를 건설하고 가나안과 시리아 출정 기지로 삼고자 대규모의 건축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건축을 위해 아시아계의 노예들이 징집되었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은 것이다.
  나아가 기원전 13세기경에 가나안의 몇몇 도시들이 파괴된 고고학적인 증거와 함께 1220년경에 이스라엘을 패퇴시킨 것에 대해 말해 주고 있는 메르넵타(Merneptah)의 승전 비문은 이집트를 떠난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원전 1225-1200년까지는 이미 가나안 내에  머물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또 이집트 탈출의 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요단 동편의 민족인 에돔인, 모압인, 블레셋인, 가나안 거민들(출15:14-15)은 12세기에 이르러서 가나안에 공존했던 민족들이라는 점도 아울어 지적하고 있다.
  요약하면 고대 이집트의 배경에 의거하여 모세 전승을 역사 비평적으로 평가한 결과 이집트 탈출의 가능한 역사적 배경은 기원전 13세기경임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역시 하나의 가설로써 이집트 탈출 사건이 일어난 시기를 몇몇의 자료로만 결정하기에는 성경의 전승은 너무도 다양하고 복잡하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이러한 여러 전승을 충분히 고려한 년대를 확정할 만한 성경 밖의 증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다만 우리는 '만일' 모세의 전승이 어떤 역사적 사건과 결부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면,'그렇다면' 그것들은 '이 당시의' 이집트와 가나안 배경과 '이런 방식으로'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3) 지도자 모세의 전승과 역할
  모세는 자기 민족을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시킨 자로서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우뚝 솟은 지도자로 나타난다. 그는 이집트 노예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가 태어난 시대는 히브리 사람들이 아들을 낳으면 죽이도록 명령된 시대였다(출1:22). 석 달을 숨겨 키운 어머니는 그 아기를 갈대 상자(tebah)에 담아 나일강에 띄운다. 마침 나일강에 목욕을 하러 나왔던 이집트의 공주가 발견하여 궁중으로 데리고 간다. 궁중에서 왕실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그는 그 시대의 몇 몇 히브리 사람들(홉니, 비느하스, 므라리등)처럼  이집트식 이름을 가지게 된다. 모세'라는 이름은 투투-모세(Tut-Mose), 라-암세스(Ra-mses)등의 이름에서도 나타나듯이 '아들', 혹은 '태어난'을 의미하는 이름이다.
  모세는 성장하면서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자의식을 갖게 되고, 살인 사건을 경험한 후에 시나이 반도의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 그곳 제사장 이드로의 가문에 들어간다. 40년의 세월을 미디안에서 생활하던 모세는 마침내 호렙산 떨기나무불꽃 속에서 야훼(YHWH)를 만나는 체험을 한 후 이집트에 돌아가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시켜 광야로 탈출한다. 그는 그들과 광야에서 40년간 생활하면서 그에게 나타났던 야훼와 시내산 계약을 체결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종교의 창시자라 할 수 있다. 계약의 내용대로 그는 백성들을 가나안땅 입구까지 인도한 후 그곳에서 죽었다.
  모세에 대한 성경 밖의 확실한 기록이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그가 수립, 형성해 나간 수 많은 종교 사상이나 신앙이 어떤 곳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는가?에 관해서 말할 수 없다. 그는 이집트의 마술사들처럼 기적을 행하는 사람었고(출7-10장), 외교적 협상가였으며, 광야길을 인도한 안내자, 군사(병참) 전문가, 하나님과의 계약 중재자, 입법가, 행정가, 지휘관, 예언자였다. 그에게 제외된 기능은 왕으로서의 기능 한 가지 뿐이었다. 모세에게 부과된 역할들은 분명히 지나치게 과중하였던 것은 명백하다(민11:10-15). 새로운 사회조직을 과감히 시도해 나가는 과정에서 모세에 대한 끈질긴 반역과 내적인 분쟁은 계속되었다.

(4) 이집트 탈출의 여정(route)과 광야 생활
  이집트에서부터 가나안에 이르기까지의 행군 경로를 재구성하는 일은 어떠한 일보다 까다롭고 힘든일이 아닐 수 없다. 민수기 33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부터 가나안 접경 지대까지 이르는 동안의 완전한 여정을 제시해주고 있는데(P자료), 이 여정은 다른 자료에서 제공하고 있는 여정과 약간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불행하게도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이집트 탈출 여정의 도시 가운데 비돔, 라암셋, 카데스, 에시온 게벨, 그리고 모압 지역의 일부 도시를 제외하고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명은 거의 없다. 특히 "갈대바다"(yam suf,출14:21)의 위치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홍해')는 결코 받아질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시내산의 위치이다. 기원 5세기 기독교의 전승에 따르면 시내산/호렙산은 시나이 남부에 있는 제벨 무사(Jebel Musa,"모세의 산")라 일컬어 지는 곳이다. 그러나 이 곳 이외에도 더 많은 전승들이 남아 있어 그 산의 위치를 실증적으로 확인할 만한  독자적인 증거는 찾을 수 없다. 이 지역이 아라바의 미디안광야로 언급되는 것조차 시내산의 위치를 결정하는데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미디안족은 실제로 당시에 남부 요단 동편, 네겝, 시내 반도에 걸친 비교적 넓은 교역로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광야 40년의 생활가운데 38년간이나 머물렀던 카데스 바네아(신2:14)에 관한 전승은 광야 생활의 형태를 알 수 있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성경의 몇 몇 귀절들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곧장 카데스로 갔음을 시사하고 있다(출15:22;삿11:16). 카데스는 브엘세바 남서쪽 약 80Km 떨어진 아인 엘 쿠데랏(Einel-Qudeirat)과 동일한 지역인데, 그 곳은 풍부한 물이 있는 커다란 오아시스로써 농사가 가능한 곳이기도 하다. 카데스의 다른 이름이 성경의 여러 다른 곳에 남아있어(삿11:16;창14:7;출17:7;민20:1,13;겔47:19; 48:28) 이 시대의 전승이 얼마나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결과적으로 광야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모세 전승-계약 체결과 율법 수여를 포함하는-은 시내산 전승과는 전혀 독립적인 카데스 전승과 관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을 가능케 할 만큼 중요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성경의 증거는 역사적으로 너무나 단편적이고 간접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경 이외의 정보 자료들은 너무나 개괄적이어서 성경의 전승들을 다루지 않기 때문에, 이 시대의 역사 연구는 매우 불완전한 설명에 만족해야만 하고, 완전한 설명은 보다 많은 성경 이외의 자료의 증거가 나타나야만 가능해질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 광야 생활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경험으로 기록되고 있다. 특히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음으로써 이스라엘은 하나의 민족으로 형성되었으며, 율법과 언약을 중심으로 한 신앙이 바로 이 광야에서 기원 되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출애굽 사건]과 [시내산 사건]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결합되어 기록되어있다.
  광야를 일컫는 히브리어의 '미드바르'는 구약 성경에 약 270여회나 나오는데, "씨 뿌리지 못하는 땅"(렘2:2), "사막, 구덩이 땅, 간조하고 사망의 음침한 땅, 사람이 다니지 아니하고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렘2:6)등으로 정의 되어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40년의 긴 세월을 지내야만 하였다. 강력한 지도자 모세가 이끄는 공동체였다 하더라도 그들은 마실 물이 부족하고, 먹을 양식이 없음을 인하여 많은 불평과 반역을 행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들에게 바위를 쳐서 물을 나게 하시며, 하늘에서 만나(Manna)를 내려 그들을 먹이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야훼 자신만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라는 신앙을 갖도록 그들을 훈련시켰다. 그리고 반역자들은 가차없이 처벌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광야 생활은 하나님과의 밀월의 시대로 이해하고 있다(렘2:2).

(5)이집트 탈출 전승의 사회 종교적 평가
  앞서 언급한대로 이집트에서 탈출해 나온 사람들은 다양한 계층의 하류민들이었다. 이들을 인도해 낸 모세는 강력한 지도력으로 지휘하였으나 많은 어려움과 고통이 있었다(cf.민11:10-15).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출한 노예들을 결속시키고 그들을 한 공동체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이를 위한 가장 기본이 되고 있는 이념은 "이집트에서 압제를 당한 공통의 경험"과 "YHWH와의 계약"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족장들의 경험을 시작으로 가나안 정착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역사적 연속성의 끈은 바로 이들이 경험한 이집트에서의 공동의 체험이었다. 이들이 외부로부터 부과된 사회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은 이들간의 동등한 부족 공동체를 창출하기 위한 노력으로 발전되었다. 이스라엘과 잡족들을 묶어주고 새로운 공동체를 창출해 낼 수 있었던 사회적 요소를 우리는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나아가 이들을 묶어준 종교적 요소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시내산에서 맺은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인 야훼(YHWH,출3:6;6:3)와 "히브리 사람들의 하나님"(출3:18;5:3;7:16;9:1,13;10:3)인 야훼와의 계약을 통하여 '계약공동체'로 성립된 하나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한 하나님'의 '한 백성'(Chosen People)이라는 사상이다. 여기서 모세의 역할은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것이었다. 다시말하면 이스라엘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씨족적 경험으로서의 전역사를 가진 민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집트 탈출 이후의 고백은 야훼와의 계약을 내적 구속력의 바탕으로 삼는 '새로운 백성'(a new people)으로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비로서 이스라엘을 하나의 민족 공동체로 묶어주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로부터 진정한 의미의 이스라엘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이집트 탈출의 사건은 이스라엘 전역사를 통해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호11:1;암9:7;렘2:6;시78:12-13;81:6).

5. 가나안 정복과 사사시대

(1) 자료
  히브리인들의 가나안 진입은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그 정착 과정은 어떠하였는가? 또, 이들이 가나안 문화와의 접촉을 통하여 그들과 어떠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는가?하는 질문들에 관하여 많은 연구와 논쟁은 지금까지도 거듭되고 있다.
   기원전 1200-1000년경의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선진(선진) 세력으로 존재한 것에 관한 자료는 주로 여호수아서와 사사기(판관기)에 나와 있다. 여호수아서는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가나안 서쪽 구릉 지대의 상당 부분을 정복 할 때 이스라엘의 연합 부족들을 지휘한 방법과, 그 정복한 땅을 부족들에게 분배한 내용을 담고 있다. 사사기는 여호수아 이후부터 왕이 세워지기 이전에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던 사사들의 군사 공적과 통치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이 자료에는 풍부한 전승-시, 민담, 속담등이 복합적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이러한 구성은 일정한 역사관(신명기적 역사관)을 가지고 편집되어 있으나, 단일하고 일관성있는 기사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많은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

(2) 가나안의 도시 국가들과 가나안 정복
  가나안에 이주해 들어온 히브리인들의 초기 생활은 이미 그 이전부터 팔레스틴에 머물러 살던 원주민들의 문화에 비해 매우 뒤떨어진 상태에 머물고 있었다. 다시말하면 가나안의 원주민들은 도시 국가(the city states)를 건설하고 막강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또 고도의 문명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이들은 철기 문명(Iron Age)를 이루고 있어 철병거를 비롯한 최첨단의 무기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적어도 이러한 가나안의 상태에서 광야에서 이주해 들어 온 이스라엘이 어떻게 가나안을 점령하고 지배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지금까지의 대답은 크게 3가지로 분류된다.

① 정복설(The Conquest Model)
  이 이론은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집중적이고 통일된 군사적 정복을 통하여 점유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여호수아서 1-12장에 보도된 대로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이스라엘의 12부족 연합체가 가나안을 체계적으로 정복해 나갔다는 데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우리가 성경 본문을 있는 그대로 읽으면,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도시들을 하나 하나 압도적으로 정복해 가면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땅을 분할하고 정착한 것으로 이해된다.
  정복설을 뒷바침 하기 위해 고고학이 동원되었는데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갔다고 믿어지는 시기(1230-1175 B.C.E.)에 가나안 도시들- 하솔(Hazor), 므깃도(Meggido), 숙꼿(Succoth), 베델(Bethel), 벧세메스(Beth-shemesh), 아스돗(Ashdod), 라기스(Lachish)등-이 광범위하게 파괴되었다는 점과 파괴된 몇몇 도시들에서 보여지는 새롭고 일정한 점유 방식은 이스라엘인들과 논리적으로 가장 잘 부합된다는 점이다. 이처럼 정복설 지지자들은 성경의 기사에 대한 중요한 확증 자료를 여호수아에게 정복된 도시들과 그에게 점령되지 않은 도시들에 관한 고고학적 증거에서 찾는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전적으로 뒤바꿀만한 증거는 아니라 할지라도 이 시대에 나타난 고고학적 자료 중 일부는 다른 것들과 현저하게 불일치함을 보여주고 있다. 즉,첫째로 여호수아서 12:7-24에 나오는 31명의 정복된 왕들의 목록은 고고학적으로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며, 또 여리고(Jericho), 아이(Ai), 기브온 (Gibeon)등지의 고고학적 결과는 성경의 기록과 전혀 상치하고 있다. 나아가 13-12세기에 파괴된 흔적을 가지고 있는 도시라 할지라도 그 도시가 이스라엘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블레셋이나 다른 가나안의 도시들에 의한 것인지?를 밝혀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성경의 기록을 이스라엘이 반드시 이 도시를 점령하고 파괴하였다는 기록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시의 목록이 정리된 것은 이스라엘의 승리를 원형적(archetypal)인 여호수아에게 돌리기 위해 확대된 것이 아닌가하고 의심케 된다.
  둘째로 이 이론이 대답해 주지 못하고 있는 한가지 사실은 이러한 정복이 이스라엘 지파들의 연합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각 지파의 개별적인 것이었는지에 관한 것이다. 여호수아서13:1-6a를 제외하고 정복 설화들의 대부분은 후대의 정리라고 여겨진다. 또, 사사기 1장에서도 보듯이 가나안의 정복은 매우 오랜동안 계속되어진 사건으로써 일사 분란한  여호수아의 정복 과정은 다분히 어떤 형태의 짜여진 기록임이 틀림없다.
  세째로 여호수아서 24장의 세겜 총회와 결부시켜 볼 때, 중앙 지역의 군사적 공격에 관한 기사가 없이 그 땅의 중심부에 모일 수 있었던 이스라엘의 총회는 다분히 그 지역의 다른 민족들과 평화 협정을 통해서만 가능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점이다.

② 평화 이주설(A Gradual-Peaceful Inflitration)
  이 가설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점유는 평화적 유입, 조약 체결, 그리고 자연적인 인구증가에 의한 것이었다. 이들은 성경의  전승들 사이의 상호 모순적인 성격을 밝히는데 성공하면서 지지를 얻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평화적 유입, 현지 민족들과의 평탄치 못한 융합, 그리고 다윗 시대에 와서야 겨우 성취된 이스라엘의 정치적, 군사적 승리라는 길고 복잡한 과정을 이론화(체계화)하였다. 이들의 이론을 뒷바침해 주는 성경의 기록들 가운데 족장들은 대체로 거주민들과 화목하게 지냈으며, 또 가나안 도시의 전주민들이 므낫쎄에서는 이스라엘의 씨족이 되었으며(수12:17,24;17:2-3), 유다가 공공연히 가나안사람들과 결혼하기도 하였다(창38장)는 기록들을 제시한다.
  다시 말하면 이 주장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기존 거주 지역에 평화롭게 침투하여 정착해 나가면서 인구가 증가하고 가나안인들에게 충분한 위협적인 존재로 커지기까지 아주 완만한 속도로 빈터(공지)로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주설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이스라엘인들이 통합되지 않은 채 각기 다른 시기에 다른 방향에서 가나안으로 들어 갔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이집트  탈출 사건에 관하여 매우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이 기록이 부분적으로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들은 이 사건을 일부만이 경험한 사건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주설 지지자들은 이스라엘의 기원의 특성을 설명함에 있어서 고고학적 증거의 역사적 가치를 무시하거나 평가 절하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③ 사회혁명설(A Peasant Revolt or an Internal Social Revolution)
  이스라엘은 도시 국가의 군주들과 지배층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그들의 독자적인 사회 정치적, 종교적 질서를 확립한 토착 가나안 민중의 부분(sector)이었다는 주장이 최근에 전개되었다. 이 설은 정복설과 이주설의 주요  요소들을 이용하여 그것들을 재정리하고 뉘앙스를 달리하여 이스라엘 정복에 관한 새로운 개념을 세웠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정복 과정이 귀족적인 관료들로 구성된 도시 국가들로부터 억눌리고 소외된(marginated) 가나안 사람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계획되어 온 사회적 혁명의 과정을 통하여 이룩되었음을 강조하면서, 성경의 무력 투쟁은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도시국가의 억압과 고질적인 부패는 가나안 원주민들의 농산물 수탈, 현물세, 강제부역, 징용 등으로 나타나며, 이러한 사회적 부담에 항거하는 가나안 민중들은 이에 동조하는 여러 다른 부족들과 협력하면서 동맹을 맺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 때를 맞추어 기존 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소외되어 이집트 탈출한 히브리인들의 도착과 함께 야훼 종교는 이들의 혁명 이데올로기로 작용하여 효과적인 혁명을 완수하는데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는 가설이다.
  그러나 가나안의 사람들 가운데는 이러한 혁명에 동조하거나 반대하였던 그룹들도 있어서 일관성있는 일사 분란한 사건으로 보기에는 여러 다양한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예를들면 아모리와 시혼의 백성들(민21:27b-30), 여리고의 라합과 그녀의 일가 친척들(수2장;6:22-25), 베델의 정보원들과 그 가족들(삿1:22-26)등은 "동조자"로 나타나며, 이스라엘의 내정에 간섭하거나 상관 없이 존재했던 므낫쎄의 세겜과 다른 도시들(창48:22;수24장;삿9장), 상부 갈릴리의 도시들(수11장), 그리고 예루살렘(수10:1-5;15:63;삿1:1-8;19:10-15)등은 "중립자"로, 마지막으로 독립을 유지하면서 이스라엘의 정복을 지원했던 베냐민의 기브온과 후리족속들(수9-10장;삼하4:1-3; 21:1-14), 메르즈(삿5:23), 수꼿과 브누엘(삿8:4-17), 그리고 켄 족속(삿1:16; 4:11;삼상15:6-7;30:29)등은 "동맹자"로 나타난다.
  이상에서 살펴 본 세가지 이론은 나름대로의 증거를 제시하면서 당시의 정복과 정착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으나, 그 어떤 한 가지의 주장이 전적으로 옳다고 판단하기에는 상호간의 이론적-역사적 장점과 약점을 지니고 있다. 다만 이스라엘이 팔레스틴에 정복, 정착하기까지의 오랜 세월동안 위의 가설들이 제시하는 단순화된 묘사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였음이 분명하다. 오히려 성경은 이러한 여러 가설을 모두 종합적으로 뒷바침해 주고 있는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고 여겨진다(cf.삿6:8a-9).
  여호수아서와 사사기 모두는 이집트 탈출을 통한 이스라엘의 구원과 가나안 사람들의 축출, 그리고 가나안의 신 숭배 거부와 야훼만을 섬길 것 등에 관한 주제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가나안 사람들을 축출한 이유를 진술함에 있어서는 두 책이 서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여호수아서에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사람을 축출한 것은 원주민을 몰아 내고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사사기에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사람을 축출한 것은 가나안 땅에서 자기들을 억압하던 왕들을 몰아내고 자유를 쟁취하기 위함이다.
  또, 여호수아서의 본문에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했다는 암시는 있으나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받았던 억압의 주제가 겉으로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는 않다.

(3) 지파의 정착(Tribal Settlement)과 그 이후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과 정착의 방식에 대한 논의는 초기 이스라엘의 공동체의 사회 구조의 연구와 더불어 중요한 논쟁의 주제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전통적으로 학자들의 관심과 질문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그 땅을 점령하였는가? 라는 지리적, 역사적 문제에 관한 것이었는데, 보다 사회학적 관심으로 이 사건을 바라보게 되었다. 즉,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복잡한 다양한 종족들이 결합되어 있었으며, 지파라는 조직으로 편성되었다 하더라도 각 지파간에 얼마만큼 적절한 협조가 되었는가? 또 산악 지방을 장악하고 하나의 통일적인 사회 공동체를 갖춘 이스라엘의 공동 목표는 무엇이었으며, 가나안 정복의 과정에서 흡수한 비이스라엘계 주민들(수9장;삼하21:1-9)과는 어떤 형식으로 존재했으며, 지파간의 결합 구조는 무엇이었는가?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땅 점령과 정착 과정, 그리고 이스라엘의 사회 체제와 구조를 한 묶음 속에서 이해하자는 것이다.

① 목축 유목설(Pastoral Nomadic Model)
  앞서 말한 정복론자와 평화 이주론자들은 이스라엘의 사회 구조를 기본적으로 목축 유목민으로 규정하고, 그들이 가나안을 침공하거나 정착하였다는 입장에 서 있다. 즉, 많은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사회 구조는 유목민들의 체제를 갖추고 유목 문화의 형태를 띤 공동체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이러한 가설은 철저하게 재평가되고 있다.
  물론,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언급되는 이스라엘 민족의 이동은 계절적인 이유로 인한 유목 문화적 이주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집트 탈출같은 사건에서 나타나는 이주는 유목민의 계절적 집단 이주로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이들의 땅(토지)에 대한 철저한 개념도 유목민적인 문화적 개념이 아님을 간과할 수 없다.

② 종교적 동맹설(암픽티오니)
  이 가설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그리이스와 고대 로마 및 에투루스칸(Etruscan) 도시 국가들의 제의 동맹과 유사한 것으로, 성소에서 행해진 야훼 제의를 중심으로 한 12부족의 종교동맹체였다. 델피(Delphi)의 아폴로 동맹에 의해 가장 잘 입증된 이 고전적인 종교, 정치 제도가 그리이스인들에게는 임픽티오니(Amphictyony)로 알려져 있는데, 일반적으로 이 말의 어원은 "이웃 구역의 주민들" 또는 "[공동 성역] 주변의 거주민들"을 의미하는 용어로 추정된다. 쉽게 말하면, 이스라엘의 종교적 동맹은 중앙 성소가 있고, 부족 대표들을 중심으로 한 평의회가 있으며, 이들의 결정은 12부족들 사이에서 구체적으로 시행되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중앙 성소로는 세겜(13세기), 실로(11세기), 베델, 길갈, 기브온(10세기)등에 위치하였을 것이다. 이 시대의 사사들의 역할은 바로 평의회의 집행관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설은 본질적으로 국가 이전 형태에 속하는 사회 조직 내에서 계약과 법이 갖고 있는 기능을 설명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나, 그것이 이스라엘  사회 전반을 설명해 주고 있지는 못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 이론의 출발점은 이스라엘 부족들이 군주제 이전 시대에 이미 공통된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연합되었다는 사실을 객관화 하였으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였는가?에 관하여는 설명을 하고 있지 않다. 또, 이들의 결정적인 약점 가운데 하나는 부족간의 동맹 체제가 군주제 이전의 이스라엘에서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다만 부분적인 종교적 제휴 형태로써 협력하는 개별적인 부족들만이 있었다는 역사적 증거에 관하여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③ 사회 종교적 재부족화설(Socioreligious Retribalization Model)
  이 이론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유목민, 용병, 각종 장인, 그리고 하층민들로 구성된 잡다한 연합체로써 가나안에 들어와 가나안 안에 살고 있던 같은 부류의 계층들과 제휴함으로써 보다 큰 사회 집단으로 확대 되었으며, 그러한 힘을 바탕으로 하여 도시 국가들의 군사적, 정치적 지배권으로부터 탈출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이 가설은 이스라엘의 동맹 체체가 처음부터 사회적, 경제적 단위를 기초로 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즉 가나안의 사회 경제적 현실이 이 곳으로 이주해 들어온 이스라엘의 종교적 신앙과 연합하여 새로운 부족동맹을 결성하여 정착 이후의 새로운 이스라엘의 기초를 놓고 있다는 점을 설명한다. 그런 점에서 가나안인들은 이스라엘인들이 되었다.
그러나 이 가설에서 주장되는 것은 집단의 끊임없는 공통의 위기가 이스라엘의 일체감을 강화시켜 주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한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통일성이 사사시대의 위기들보다 선행하였으며(삿5장), 이러한 공동체 의식은 여호와 신앙에 근거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신앙이란 이스라엘의 이집트에서의 종살이 경험과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한 평등주의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과 지파간의 체제는 극히 복잡한 과정에서 생겨났다는 것이다. 각 지파 체계는 여러 출신 배경을 가진 종족들로 채워졌으며, 의심할 나위 없이 이스라엘이 팔레스틴에 정착하여 생활을 시작한 후에야 비로서 표준적인 형태의 사회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정복 사업이 마무리 된 후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의 대표자들은 세겜에 모여 엄숙한 선언을 통하여 여호와의 백성이 되고, 오직 그 분만을 섬기기로 서약하였다(수24장). 이 서약은 이스라엘이 하나의 민족으로 표준적인 형태를 갖춘 최초의 사건으로써 시내산 사건을 재확인하고 확대시킨 것이기도 하였다.

(4) 정착과 사사들의 역할
  이스라엘이 팔레스틴에서 정착 생활을  시작하면서 왕정이 시작되기까지 약 200여년 동안 이스라엘은 비교적 느슨하게 조직된 지파체제로  유지되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에 이스라엘에는 중앙정부나 단일한 국가 체제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상비군조차 가지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강한 이웃 나라들과는  구별되는 강인한 신앙과 전통을  가지고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해 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여호와의 영"에 의해 능력을  입은 사사들(shoftim,"판관")의 역할은 어느정도 인정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사사들이 사회,경제적 요소에  얼마나 충실한 지도자 였으며, 얼마 만큼의 종교적 신앙의 수호자였는가?를 밝혀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점령지는 잘 균형 잡힌 하나의  영토를 이루고 있지 못하였다. 이스라엘의 초기 정복은 주로 산악 지대로써  평지의 원주민들이  가지고 있던 철병거가  활동하기에 좋지 못한 지역에 주둔하였다(삿1:19;수17:16). 아람왕 벤하닷은 이스라엘의 이러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하였다:"저희의 신은 산의 신이므로 저희가 우리보다 강하였거니와 우리가 만일 평지에서 저희와 싸우면 정녕 저희보다 강할찌라"(왕상20:23).
  이러한 현상은 이스라엘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일어난 것으로써 "골짜기 땅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에게는 벧 스안과 그  향리에 거하는 자든지 이즈르엘 골짜기에  거하는 자든지 다 철병거가 있나이다"(수17:16)하였다. 그 외에도 여러 지파에서 이러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삿16-19장).
  가나안 정착 이후의 이스라엘의 역사에 관하여는 주로 사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이스라엘의 역사적 주기성(the historical periodicity)을 하나의 역사를 보는 관점으로 정하여 기록하고 있다. 즉, 사사기 기자는 1)여호수아 이후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2) 하나님께서 이방의 왕을 세워 그들을  지배하게 하여 고통을 당케하시다가,  3)이러한 위기의 시기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사사,shofet)를 보내어 이들을 무찌르고 구원하신다는 역사의 패턴으로 통일 왕국을 이루기까지의 역사를 반복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들 사사-옷니엘(유다 지파), 에훗(베냐민 지파), 기드온(므낫세 지파), 드보라(에브라임 지파), 입다(길르앗 지파), 삼손(단  지파), 삼갈(비이스라엘 사람)등-는 '구원자-심판자'(deliverer-Judges)의 이중기능을 가진 자로 묘사되어 나온다.
  본래 사사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이스라엘의 전체 지파를 묶는 구심점이 없던 시대에 활동하였다(삿21:25). 그들은 때로는 지파 동맹을  통하여 적들과 싸웠으며, 중앙 성소에서의 공동의 종교 제의를 통하여 그들의 이상을 실천해 나갔다.  이들은 가나안의 도시 국가들로부터의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수탈 및 종교적 지배로부터 자신들의 평등 이념을 기초로 한 해방 공동체를 지켜 나가려는 종교 공동체의 성격을 가지고 투쟁해 나갔던  것이다(cf.삿1:1-2:5). 그런 점에서 그들은 "거룩한 전쟁"을 수행하는 "야훼의 용사"들이었다.
  사사시대의 전기간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하나의 국가를 창건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증거를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또한, 가나안의  도시국가의 체제를 모방하려는 움직임도 전혀 없었다. 사사 기드온이 왕위를 거절한 이야기(삿8:22-28)와 요담의  풍자적 우화(삿9:7-21)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실제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왕정 제도는 그 개념 자체가 부정적인 것이었다. 이는 이스라엘이 오직 여호와만이 자신들의 지도자임을 믿는 신정정치의 이상을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사사들의 정복 과정에서 가정 현저하게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적은 역시 블레셋(Philistines)이었다. 이스라엘은 적어도 그들과 200년이 넘는 투쟁을 해야만 했다. 불레셋은 기원전 13세기경 힛타이트 제국이 멸망한 이 후 에게(Aegean)문명의  원류에 뿌리를 두고 발생한 해양 민족(the Sea People)으로서 새로운 근동의 질서를 세워  나갔다. 성경에 의하면 이 해양 민족인 블레셋은 갑돌(Caphtor,암9:7)에서 부터 왔다. 또 예레미아는 "갑돌섬에 남아있는 블레셋 사람"(렘47:4)에 관하여 언급한다. 이 섬은 오늘의 크레테섬(Crete)를 말한다. 이들은 기원전  1220년 경 메르넵타(Merneptah) 제5년에 이집트 델타 평원에 나타나는 것을 시작으로 가나안의 해안 평야에 상륙하였다.
  이들은 지리적(geographical),  인종적(ethnical), 어원적(philological) 관점에서  볼 때 인도-유럽계(Indo-European)로 인정된다. 또,  고고학적 발굴이 활발하게 진행  되면서 이들의 기원이 점차 확실하게 밝혀지고 있는데, 특히 이들이  사용한 도자가(pottery)는 사이프러스(Cyprus), 로저스(Rhodes), 또는 남쪽 아나톨리아(Anatolia)에서 발견되는 미케네  도자기 제품(Mycenaean ceramic ware)으로써 검붉은 색깔을 가진 것이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팔레스틴의 여러 도시들-므깃도(Meggido), 텔 카실(Tel Qasile), 텔 젬메(Tel  Jemmeh), 텔  엘 파라(Tel el-Farah),  텔 아이툰(Tel  Aiytun), 아스글론(Ashkelon), 벧산(Beth-shean,삿16:23;삼상5:1-7;대상10:10)등-에서도 똑같은 형태의 것들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블레셋의 다곤(Dagon) 신,혹은 바알 제불(왕하1:2ff.)을 그들의 신으로 섬겼다.
성경에서는 이들의 다섯  방백(방백)으로 가자(Gaza), 아스글론(Ashkelon), 아스돗(Ashdod), 갓(Gath), 에글론(Ekron)을 말하고 있다(수13:3). 이 지역은  모두 지중해 남부 해안 지대로써, 한 수장을 중심으로 하나의 통일된 국가 체제를 유지한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은 각각의 도시국가를 건설하고 중앙 성소를 중심으로 연맹(league)을 이루며 살았다.
  적어도 이들은 다윗왕  때(10세기)까지 이스라엘의 가장 강력한  적이었다. 사무엘 때에 실로의 법궤가 블레셋에게 빼앗기는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으며(삼상4-7장), 사울왕은 길보아에서 벌어진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망하기도 하였다(삼상31장).

 

제2장  제1차 성전시대(1024 B.C.E -586 B.C.E.)

1. 왕정의 확립

  고대 이스라엘의 군주제는 4세기 동안 지속되었는데, 그것은 부족간의 동맹 체제보다 두 배나 긴  기간이었다. 사울과 다윗, 그리고 솔로몬 왕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동안  이스라엘은 왕권을 보다 체계적으로  확립해 왔으나, 솔로몬의 사후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나뉘어 졌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721년 B.C.E.에 앗시리아로부터, 남 왕국 유다는  586년 B.C.E.에 바빌로니아로부터 멸망할 때까지 왕을 중심으로한 군주제를 실시하였다.
  지금까지 이 시대의 역사를  위한 기본적인 질문들은 사울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는가?  그의 왕권은 어떻게 다윗에게로  넘어 갔는가?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솔로몬은 성전을 어떻게 건축하였으며, 왜 그의 사후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분열되었는가?에 촛점이  마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들은 새로운 형태의 성경 문학 비평을  통하여 성경 안에 자리잡은 각 전승 간의 차이(다양성)와 그 차이의 원인을 보다 깊게 파악하게 됨으로써 위의 질문들에 관하여 대답하게 되었다.

(1) 자료
①연대기
  이스라엘의 연대  추정 문제는 계속 논쟁  중인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로마제국 이전의 시대에는 절대  년표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매 해를 왕의 통치년도를 기준으로 표시하였다. 더구나  그리스도교적인 연대 측정 방식은 기원 6세기에 비로서 실시된 것이기  때문에 서로 다른 국가들의 연대를 상호 관련 시켜서 배열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 연구 과정을 통하여 비로서 할 수 있는 일이다. 특히, 성경에 나오는 북이스라엘의 연대표는  당시 남왕국의 연대로 표시된 것이기 때문에 더욱  까다롭고 힘들게 기록되어있다. 또한  히브리어 성경(MT)과 헬라어 성경(LXX) 사이의 서로 다른 연대기록 중 우리는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 신년의 시작은 가을인가 봄인가?  한 왕이 즉위한 그 해를 통치 원년으로 계산하였는가? 차기왕과의 공동 섭정  기간(co-regency)은 누구의 통치 기간으로 잡았는가?하는 질문들에 관하여 우리는 확실한 통일성 있는 답을 하기에 매우 곤혹 스러움을 느낀다.

② 신명기 역사
  왕정 시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사무엘서와 열왕기서는 앞서 언급한 여호수아서나 사사기서와 마찬가지로 신명기적 사가의 입장이 반영된 역사 자료들이다. 특히 왕정 시대의 역사를 기술함에 있어서 신명기 사가의 특징은 역대 왕들의 치적을 율법의 순종  여부에 따라 평가하면서  1)분단 왕국 통치자들의 연대별 대조 배열과 2)예언과 성취의 도식으로 나타난다.
  이 기술은 유다의 개혁을 주도한 요시아왕의 통치 말기(622-609년 B.C.E.)에 된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러차례  "오늘까지"라는 공식구가  사용되고 있는데(왕상8:8; 9:21;10:2;왕하8:22등) 이것이  바로 기록자의 시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나아가 이러한 자료는  바빌로니아 멸망 이후 제2차 편집 과정을 거쳐 오늘의 책으로 확정짓는 과정을  겪게 된다. 다시말하면 이스라엘의 쇠퇴와 이를 다시 세우려는 개혁을 위한 요시아의 선전책자 내지 희망에 찬 개혁을 돕고 고취시키기 위하여 전왕조의 역사를 약속과 성취라는 도식에서 고찰하였던 것이다.

③ 고고학
  군주시대에 관한 고고학적 자료는 현저하게 많아서 성경의 기술과 함께 상당부분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므깃도, 하솔, 그리고 게셀(왕상9:15-17)의 발굴로 인하여 솔로몬  시대의 도시의 모습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단, 사마리아의 발굴로 북이스라엘의 종교적 제의  형태와 정치적 힘의 정도, 그리고 라기스와 예루살렘의 히스기야 성벽 발굴등을 통하여 제1차 성전의 멸망과 그 과정을 보다 확실히 알 수 있게 되었다.

④ 예언서
  몇몇 예언서들은 왕정 시대의 사회 경제적 생활 전반에 관하여 매우 중요한 역사적인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예컨데 북왕국에 대해서는 아모스와 호세아서가, 남왕국에 관하여서는  이사야와 미가서 그리고 예레미아서가 바로 그러하다.

(2) 군주제 발생의 요인
  이스라엘에 왕권이  발생하게 된 직접적인 요인으로  가장 널리 인정 받는 것은 중앙 집권화된 블레셋을 비롯한 모압, 암몬의 군사적 위협의 증대때문이라는 사실이다(삼상8:19-20). 특히 블레셋은 1150년 B.C.E. 이후에 이스라엘의 남부 해안 평야의 지배권을 확고히 장악하였고, 1050년 B.C.E.에 이르러서는 산악 지대의 이스라엘 중심부까지 심각한 위협을 가해왔다. 이스라엘 지파의 중앙 성소인 실로가 파괴되면서 법궤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다(삼상4:3). 블레셋은 당시 과두 지배 체제를 유지하면서  강력한 철병거 등의 기동력있는 공격력을 갖추고 효율적인 전투를  수행해 왔다(cf.삼상13:19-22;삼하8:4).  적어도 이러한 블레셋을 이스라엘의 느슨한 지파 동맹  체제로는 막아낼 수 없었으며, 이스라엘은 이에 대응할 수 있는 통합된 군사력과 지도력을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삼상8:20;12: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론과  더불어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이스라엘의 사사 시대가 이어지면서 각 지파 혹은 계층간의 갈등이 점차 심화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제사장 가문의  사제권 남용(삼상2:12-17)이나 뇌물 수수(삼상8:1-3)등은 이러한 사회의 특징을 말해 주고 있다. 이러한 계층간의 갈등은 새로운 체제와 질서를 요구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요구가 바로 왕을 세우는 제도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내적 요인은  왕 제도의 발생을 완성 시키는 충분한 원인이 되지  못하였다.  예언자들은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군주제를  반대하였다(삼상8:10-18). 예언자들의 사상에는 군주제란 곧 신정 정치의 타락된 형태로 이해하고 있었으며, 왕이 백성을 억압하고  세금을 거두어 가며, 자녀들을 전쟁터로 내보내는 기능을 하게  될 것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즉, 왕은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야기시키는 원인이 된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결국 이스라엘의 왕 요청 행위는 이스라엘 백성의  평등주의 이데올로기(cf.삼상8:11-17)와  야훼에 대한 신뢰에서 이탈한 것이라고 보았다(삼상12:19).
  그러나 결국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하여 왕을 임명함으로써 모순된 전승을 통일없이 합하여 놓았다(삼상8:4-22;9:15-16). 다시 말하면 성경의 자료는 왕의 임명이 이스라엘의 전통에서 볼 때 비신앙적인 행위임을 분명히 언급하면서도 왜 그를 임명할 수  밖에 없는가?에  관한 설명이나 변명  없이 사울을  초대 왕(혹은 '지도자',cf.삼상9:16)으로 임명하고 만다.
  물론  기본적으로 성경 안에는 고대 근동의 왕의 개념과는 달리 왕을 신격화 하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왕은 다만 하나님의 대리자일 뿐이며, 야훼께서 친히 왕권을 주도하신다는 사상이  여전히 깊게 깔려 있다. 신명기 역사가는 왕이 되기 위한 기본 요건으로  타국인을 왕으로 세우지 말  것, 말(마)을 많이 두지 말 것, 아내를 많이 두지 말  것, 자기를 위하여 은, 금을 많이 쌓아놓지 말 것 등을 규정하고 있으며(신17:14-17), 또 왕은  반드시 율법을 자기 곁에 두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교만하지 말도록 정하고 있다.
  왕권에 대한 초기 이스라엘의 전승은 찬성자들(정치적 이유)과 반대자들(신학적 이유)의 갈등 구조가 깊은 골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들의 이러한 전승은 후기 예언자들에게까지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호8:4a;13:9-11).

(2)사울(1030-1010 or 1012-1004 B.C.E.)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서 베냐민 지파의 농부의 아들이었다. 그는 왕으로 나아오기  전에는 준수한(bahur tov)  지파 영웅으로 부상했던 인물이었다(삼상9:1-2). 그는  왕이나 예언자(cf.삼상10:10-11;19:18-24)로서의 기능이나 역할 보다는 군사적 기능이  보다 강조된 카리스마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왕(Melek)보다는 지도자(제후/사령관,nagid)로 불리웠다(삼상9:16;10:1).
  사울의 주요 업적은 중앙  산악지대에서 블레셋을 몰아 내는 일이었다. 그는 수도라기 보다는  사령부를 길갈(삼상11:14-15)에 두었으며,  호화로운 왕궁도 없었다. 왕의 대표적인 기능으로  여겨진 세금을 거두거나 군대를 징집하기 위한 국가기구를 두었다는 흔적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가 한 일 가운데 국가 조직을 위한 기초로서 일부  법령들을 세우는 일(삼상14:32-34;28:3,9), 제사장의 직무를 부정하게 넘겨 받았던 일(삼상13:12;14:35),  또는 그의 사촌에게 군대 지휘를 일임하였던 일(삼상14:50ff.)등 매우 초보적인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음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그의 가장 돋보이는 기능은 이웃의 국가들과의 전쟁 지휘자의 역할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사울의  통치 기간은 모두 전쟁으로  얼룩져 있었다. 암몬인들과의 전투(삼상11장), 블레셋과의 전투(삼상13장 이하)에 이어 아람인, 모압인, 에돔인들과의 전투에서 그는  "향하는 곳마다 이기는" 승리자로 등장한다(삼상14:47-48). 그의 전투에서의  신앙은 "야훼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삼상14:6b)에서 보듯이 "하나님이 싸워 주시는 전쟁"(a Holy War)이었다.
  그러나 사울은  제사장직의 남용으로  사무엘과 갈등을 겪었으며(삼상13:8-15), 아멜렉 사람들과의 전투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전리품의 일부를 취함으로써 하나님이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게(nahamati)"(삼상15:7-11,cf.15:17-22,27,35)되었다. 그의 최후는 이스라엘의 가장 큰 적수였던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맞이하게 된다(삼상31장). 길보아산에서의 전투에서 그는 전통적인 지도력을 상실한채 그의 세 아들들과 함께 전사한다.
비록 그의  아들들이 전사하였다 하더라도  사울의 후계자가 세습적으로 이어져 내려오지 않는 것은 아직까지 이스라엘의 왕조가 왕위의 세습적인 전통을 아직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보기 보다는 다윗에게로 이어지는 왕조의 세습을 정당화 하려는데 기인된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다윗이 왕이 된 이 후에도 여전히 사울의 가문과 측근들 사이에서 왕위  찬탈을 기도하였다는 기록(삼하2:8-10)과 두 가문 사이에서 오랫동안  전쟁이 계속되었음(삼하3:1)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하겠다.

(3) 다윗과 솔로몬
① 다윗(1010-970 or 1004-965 B.C.E.)
  베들레헴 유다 지파 출신의 다윗은 수금을 잘 타는 음악의 천재였으며(삼상16:16), 사울왕의  부하(사병)로써   사울의 우울증(cf.삼상16:14-23,"여호와의 악신")을 음악으로 달래주는 촉망받는 자로 등장하였으나, 엘라 골짜기에 진 치고 있던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Goliath)을 죽인 후 백성들의 여론이 사울보다 다윗에게 기울어 졌다(삼상18:7). 이 일을 기화로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생기면서(삼상18:10-16)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군사를 이끌고  다니는 사울을 피하여 여러 해 동안 망명하여 생활하고 있었다(삼상19-30장).  사울이 죽은 후에 그는 유다로 돌아와 "유다 사람들이 와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melek)을 삼아"(삼하2:4)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그러나 북부의 사울계 세력과 남부의 다윗계 세력 사이에는 누가 이스라엘의 전역을 지배할 것인가? 하는 세력다툼을 7년 이상 계속 하였다(삼상16:14-삼하5장).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지지하던 부하 아브넬은 그가  행한 사울 왕의 첩과의 통간을 이스보셋으로부터 지적  받자, 화가나서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더불어 다윗을 수장으로  추대하는 쌍무 협약(쌍무협약)을  체결함으로써 결국 사울 가문과의 경쟁에서 다윗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삼하3:6-39;5:1-5).
  다윗은 블레셋을 결정적으로  쳐부수고(삼하5:17-25), 암몬과 모압 및 에돔, 그리고 시리아에 이르는 지역과 멀리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러 국경을 넘어 그의 세력을 뻗어 나갔다. 그는 그가 7년 6개월간 통치 하였던 수도 헤브론으로부터 여부스족이 머물고  있던 예루살렘으로  옮기고(삼하5:1-12;왕상2:10-11), "다윗성"(yirdavid)을 행정중심으로 하는 국가 기구를 설립하였다. 부족 동맹의 상징인 법궤를 수도 예루살렘의 천막으로 옮겨 성소에 안치시키고(삼하6:1-23;시78:60), 아비아달과 사독을 국가 사제로 임명함으로써 확실한 국가적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삼하8:15-18). 다윗은 예루살렘을 정치적 수도만이 아니라 그의 종교적 수도로 만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다윗은 명실공이 이스라엘의 통일 "왕"이되었다.
  다윗의 제국은 상당히 큰 규모였다. 팔레스틴의 전지역-동부와 서부, 사막과 바다에 이르기까지-은 물론 북쪽  시리아 지역에 이르는 접경을 장악하였다. 그에게 속한 속국들로부터 많은 조공을 거두어 들이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거의 완벽한 행정  기구를 두고 관료들을 임명하였다(삼하8:15-18;20:23-26). 지방의  하위 관리들도 갖추었다.  그는 호구조사(삼하24장)를 통하여 징집과 세금 징수의 기초를  놓았다. 예루살렘의 종교 제의를 위한 기구도 설치하였다.
  다윗왕에 관한 성경의  입장은 매우 특별하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왕에게 이르시기를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하였으며(삼하7:11b-16), 다윗의 마지막  기도에서도 이르기를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케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삼하23:5). 이처럼 다윗왕은 하나님이 세우신 가장  이상적인 왕(the Ideal King)으로서  하나님은 그의 가문(the Houseof David)과  무조건적인 계약(unconditional covenant)을  세우시고 대대로 그의 집을 견고하게 세워  주시기로 약속하셨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그의 가문에서 메시아(Messiah)가 나오도록 예언하고 있다(사9,11장).
  다윗의 임기중 일어난 그의 아들 압살롬의 반란(삼하14:25-15:37;18:1-33)은 진압되었으나, 그가  나이 많아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하자"(왕상1:1) 왕위 계승을 위한 유력한  후계자로 아도니야와 솔로몬이었다(왕상1:5-2:46). 아도니야는 다윗왕의 군사령관이었던 요압의 지지를 얻고 있었으며, 솔로몬은 그의 어머니 밧세바의 후광과 브니야의 지지를 업고 있었다. 성경에서는 구체적인 이유를 말하고 있지 않지만 아도니야의 구테타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솔로몬이 왕위를 계승한다(왕상1:1-53).  이러한 왕위 계승 과정에서 한쪽은 이득을 보았고, 다른 한쪽은 엄청난 손해를 보았다.

② 솔로몬(970-931 or 965-926 B.C.E.)
  치열한 왕위 쟁탈전을 벌인 후에(왕상1:5-53) 다윗왕의 계승자가 된 솔로몬은 다윗이 자신의 부하의  아내를 취하여 얻은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부와 지혜, 그리고 명예의 상징이었다.
  이 시대의 국제 무대에서는 이집트의 쇠퇴, 앗시리아의 침묵으로 이스라엘은 가장 안정된  시대를 맞이하던 때였다. 그는  그의 경쟁자였던 아도니야를 지지하는 강력한 파벌을 "철권"으로  진압한 후(왕상2:13-24) 왕국의 부를 증대하기 위하여 야심적인 정치개혁을 착수한다. 특히  그는 옛 사제 가문의 하나인 에비아달이 속한 가문을 축출하고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독 계열만을 존속시킴으로써 왕권과 사제직 사이의 관계를 밀착시켰다.
  외국과의 외교적인  동맹 정책과   이를 통한 대상무역(왕상10:22)과 무기판매, 통행세 부과(왕상10:14-15), 광업등으로 수입을 늘리고, 곳곳에 군사적 요새를 건설하고(왕상9:15-22), 대규모 전차 부대(왕상10:26-29)를 둠으로써 막강한 군사력을 키워 나갔다. 그는  또한 새로 창출된 부로 화려한 건물을 지었는데, 대표적인 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과 자기 궁이었다(왕상6:1-7:51). 이러한 엄청난 공사는 국민들의 강제부역을 위한 행정조처를 필요로 하였으며, 모든 국민은 적어도 1년 중 1개월은 의무적으로 이 일에 부역되었다(왕상5:14).
  이렇게 시작한 경제적 대변혁은 심각한 국면들을 야기시켰다. 마치 고대 근동의 절대 군주처럼 군림한 그의 강제적이고 억압적인 경제 개발은 상호 모순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 셈이다.  즉, 비생산자들인 특권 상층계급은 생산자들인 하층계급으로부터 착취를 자행하였으며, 과대한 건설과 외국산 목재와 금속등의 수입은 국내경제의 한계를 넘는  일로써 외채의 지불 능력을  상실한 솔로몬은 급기야 북쪽 갈릴리 영토의 일부을 떼어 팔아버리는 실정을  하기에 이르렀다(왕상9:10-14).
  이러한 과중한  세금(왕상4:7-19)과 강제  부역(왕상5:13-18), 그리고 솔로몬의 사치 생활(왕상4:22-23)은 백성의 원성(원성)을 사게 되었고, 솔로몬 통치 말기에는 북부의 부역 감독관이었던  여로보암이 저항 세력을 규합하였다가 이집트로 피신해야만 하였다. 솔로몬이 죽은  후 그는 귀국하여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기도 하였다.  결국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실정으로  인하여 발생한 계층간의 갈등과 빈부의 격차를 유발하여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분열 왕국 시대를 맞이해야만 하였다. 선지자 아히야는 분열의 예고를 상징적으로 행하였다(왕상11:29-33).
  성경이 전하고 있는 솔로몬 시대의 평화와 번영, 그리고 안정고 화려한 생활(왕상10:23-25,27a-29), 그리고 그의 지혜(왕상4:29-34)는 다분히 과장적이라 하더라도 신빙성이  많은 것들이다. 솔로몬의 책이라고  일컬어 지는 시편과 지혜서들이 지금과 같은 형태를 갖춘 것은 분명히 포로기 이후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와 지혜서들은 이스라엘에서 매우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는 문학 양식들이다. 특히 다윗과 솔로몬이 중앙  집권식 제의 제도와 궁중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궁중 관료들이 시문학과 지혜문학을  연마할 좋은 여건이 조성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성경이 이 시대부터 창작, 수집 및 집대성 된 것들을 모두 솔로몬 시대의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③ 군주제가 지속적으로 끼친 주요한 구조적 영향들
  다윗과 솔로몬의 이스라엘은 고대 근동의 다른 국가들의 우산국의 형태에서 벗어나 명실공히 "계급적 왕권제"(Hierarchic Kingship)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왕권제는 솔로몬 사후의 분열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특히 왕에 대한 개념이 지금까지의 그 것에 비해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즉, 고대 이스라엘의 왕에 대한 개념은 신의 대행자라는 절대  권력적인 측면과 이스라엘의 왕은 오직 하나님이시다는 신정 정치적 개념이 동시에, 때로는 각각 형성되었다. 이러한 변화들은 그동안 내려오던 이스라엘의 사회, 정치, 경제등의 커다란 변혁을 가져다 주게 된다.

㈎ 정치적 중앙 집권화
  이스라엘은 왕을 세움으로써 이제 그가 과세권과 징집권을 갖고 백성들에 대한 그리고  백성들을 초월하는 권력을 독점한  중앙 집권적 국가가 탄생하게 되었다.이러한 권력을 집행하기  위하여 군대와 권력을 위임받은 관료가 탄생하였으며, 이 권력을 가진  관료들의 영향력은 사회 구석 구석까지 미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그 동안 부족과 부족의 족장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온 사회 구조와는 엄청난 차이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특히 왕정의 시작부터 왕정  제도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존재 했었으며, 왕정이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지지 않았던 역사를 더듬어보면, 왕권을  전적으로 이교도적인 것으로 여기는  세력이 아직 존재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다윗과 솔로몬의 군주제는 이러한 왕권에 대한 종교적 불신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포용하거나, 그들과의  긴장을 메꾸는 역할을 충실히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 사회적 계층화
  신흥 국가에서의 권력 독점이란  항상 특정한 사회 집단의 독점을 의미한다. 국가의  부를 생산 대중들로부터 비생산  계급으로 이전시키는 국가 정책은 지배 관리 계급뿐 아니라 정부의 허가와 독점 허락 등으로 특정한 인물이나 계층에게 특권을 부여해 주었다. 따라서 지주와 농민,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의 계층화가 생겨나며, 이들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가는 과정을 반드시 겪게 된다.

㈐ 국제 관계의 확산
  국가의 영토가 확대되고  대외적인 관계-외교, 무역, 국방 등-교류의 빈번한 활동은 국내의 정치  변화에 여러 가지로 작용하게 되어있다. 특히 솔로몬 이후의 국제 무역과  외교는 외국과의 문화적 교류와  생활 범위의 국제화를 꾀하게 됨으로써 국내의 그것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받게 된다.

(4)남북 분열의 원인과 그 의미
① 남북 분열의 원인
  솔로몬이 죽고난 후 다윗에 의해 세워진 국가 체제는 무너져 내리고, 926년 B.C.E. 고대 이스라엘은 르호보암의 남유다과 여로보암의 북이스라엘로 분열되고 말았다. 국가 이전의  영웅 시대도 아니고 막강한 국가도 아닌 이스라엘은 약2세기 동안이나 분열 왕국의  형태로 유지되었다. 여기서 먼저 우리는 왜 이스라엘은 분열되었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며, 분열 이 후 남북 관계는 어떻게 유지 되었는가?에 대답해야 할 것이다.
  다윗 왕조와  예루살렘의 시각에서 볼 때  북왕국 이스라엘은 반역의 무리였다. 그러나 여로보암과 이스라엘의 시각에서 볼 때는 다윗 왕조야말로 사울 왕국을 찬탈한 반역자였으며, 각 지파의 전통과 독자성을 제한하고 백성들의 재산과 인권을 침해한 달갑지 않은 통치자들이었다. 다윗 왕조의 시각에서는 남북 분열은 하나의 반란이었으며, 이스라엘의 시각에서 볼 때는 이스라엘의 정통성의 회복이요, 다윗 왕조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사건이었다.

㈎ 정치적 원인
  남북 분열의 원인은 실수를 범한 르호보암(왕상12장)에게서보다 솔로몬의 실정(실정)과 그 이전의  역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처음부터 사울의 왕권은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에서 가장  작은 베냐민 지파의 지지를 얻어 세워졌다. 그러다가 다윗왕은 '유다 지파 사람들'의 지지(삼하2:4)로 왕위에 오른 후 나중에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와서 다윗과 계약을 맺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을 부었다(삼하5:1-3).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지파간의 세력 갈등과 관계의 구분이 있었다.다윗왕은 각 지파를 하나의 국가로 이끌어 가기 위해 그의 수도를 남쪽 헤브론으로부터 35Km 북쪽의 예루살렘으로 옮겨 공정성을 꾀하였으며,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놓음으로써 남북의 종교적 통일을 시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각  집단들은 별개의 세력을 가지고  중앙 정부에 협력 또는 반대하였다. 이러한 세력들은 새로운 왕의 등극 과정에서 막후 세력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솔로몬이 왕위를 이어받아 등극하면서  그가 취한 일련의 개혁들은 매우 편파적인 것들이었다. 우선 그를 지지한 국가 관리들을 보면 제사장 사독, 예언자 나단, 왕비 밧세바, 용병대장 브나야등은  모두 남쪽 유대 출신들이었으며, 그의 경쟁자인 아도니야를 지지한 인물들은 민병대장 요압, 아나닷 출신의 제사장 아비아달등 주로 북쪽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지역간의 편차와 차등 정책은 국가 내에 지속적으로 남아 작용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그의 부왕 솔로몬과 같이 차등 정책을  발표하자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켜 분열되게 된다(왕상12:11,16).
  "온  이스라엘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뇨?(ma        lanu  heelek bedavid)...다윗이여  이제  너는 네  집이나 돌아보라..."(12:16)

㈏ 종교적 원인
  여로보암이 솔로몬의 부역 감독관으로  있을 때 실로 출신의 예언자 아히야가 장차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의 10지파의 왕이 될 것을 예언한 적이 있어, 이를 솔로몬이 알게  되자 그는 이집트로 피난하였었다(왕상11:29-40). 아히아의 이 발언은 매우  강력한 정치적인 발언으로써 이러한  반역 행위를 조장하였다. 야훼종교의 기원을 밝히기는 매우 어렵지만 북쪽의 실로는 적어도 법궤가 머물던 곳으로써 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다윗은  이 법궤를 남쪽 예루살렘으로 옮겨버렸다. 그리고 실로의  성소는 불레셋에게 파괴되었다(렘26:9). 솔로몬 시대에는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지고,  지방 성소들이 그 종교적 세력이 점차 약화되면서 불만을 갖게 되었다.   이는 남북이 분열된 이 후 북이스라엘이 취한 정책을 보면 쉽게 이해 될 수 있다. 즉, 북쪽 이스라엘 지도자는 예루살렘 중심적인 종교권력을 분산시키고자 벧엘과 단에 성소를 건축하고 예루살렘으로 내려가는 순례자들의 행렬을 막고, 레위 제사장들을 쫓아 내고,지방성소의 제사장들로 대치하였다(왕상12:25-33).

㈐ 경제적 요인
  솔로몬의 대규모 관료제도와 과도한  건축 및 군사력 증강은 지출을 확대시켰으며, 이를 위한 과다한  세금 징수와 강제 노동은 국민들의 불만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솔로몬의 천재적인 모든 재능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에 이러한 노역에 불만을 가진 여로보암이 이러한 정책에 반대 의사를 표시하다가 쫓겨나기도 하였다(왕상11:26-12:33). 이러한  불만은 북쪽 백성들이 유다 사람들보다 인구도 많고 군사력도  더 크게 지닌 자들이었으나 그들의 힘이 분산되고 지리적으로 단결되지  못한 이유로 인하여 얼마간  억압당하다가 '과중한 세금과 강제부역'이라는 고통을  당하면서 그 결집력이 생겨나  다윗의 통치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 국제적 요인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통일  왕국은 주변의 여러 나라들의 세력 약화를 틈타 정복과 우호적인 관계 유지라는 양면 정책이 효과적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이집트 제22왕조의  시삭(Sheshonk I)은 솔로몬에게  쫓겨온 여로보암을 보호하고 환대하였다(왕상11:40,LXX의 왕상12:24). 또, 시삭은 솔로몬에게서 쫓겨난 에돔왕의 아들 하닷을 보호해 줌으로써(왕상11:14-22) 다분히 이스라엘의 분열을 조장하였다.
  나아가 시리아, 두로, 암몬,  모압, 에돔들의 주변 국가들은 솔로몬의 통치에서 벗어 나려고 몸부림 쳤으며, 기회 있는대로 이들의 분열을 조장하였다.

② 분단의 결과와 그 의미
  분열을 유발한 것이  무엇이었든 그 분열의 결과는 비참하였다. 이스라엘의 번영은 남북의 분열로 인하여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대부분의 영토를 주변 국가들로부터 빼앗겼으며, 이스라엘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북이스라엘의 다윗왕가 거절은 남과  북의 이분법적 사상을 싹트게 하였으며, 이것은 상호간의 정통성 주장으로 이어져  이스라엘의 사상적 분열을 초래하게 되었다. 물론 두 나라간의 교류는 어느 정도 계속되었으나,  이러한 사상은 더 이상 통일에 대한 가능성을 한 번도 시험하지 않을  정도로 굳어져 갔다. 특히 종교적인 분열은 두 민족간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으며, 결국  북(사마리아인)과 남(유다인)의 영원한 분열을 가져다 주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분열은 일부  예언자들을 통하여 새로운 이스라엘의 통일이라는 희망을 싹트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 왕조의 회복이 이스라엘의 이상이요 희망이라는 사상은 바빌로니아 포로  이후에나 나타나는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 사상은 결코 분열 이 후에 형성된 통일에 대한 기대와는 관련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할 수 있다.

(5)남북 왕조의 역사
  분열 왕국의 계속되는 역사는 열왕기서의 나머지 부분(왕상12:21-왕하25장)에 나오고 있다. 개별적인 왕들에 대한 보도들은 고정된 표현과 형식들로 작성되어 보존되어있다. 이러한 일정한 틀 안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먼저, 공시적 연대기(synchronoism)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공시적 연대기란 왕의 통치 기간 옆에 기록되는 연대가 "...왕 ...년", 혹은  "...세에 왕이 된 ..."등의 방식으로 표시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연대기는 고대 근동의 종합적인 연대기 체계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이러한 연대의 기록이 고대 여러 나라들의 연대기와 비교하여 왕국 시대의 연대기를 확정짓는 중요한 자료로 이용된다.
  남북의 통치 햇수  계산 법은 각기 달라  사실적인 연대 구분이 매우  어렵다. 북이스라엘의 경우 니산(Nissan)월을 새해의 시작으로 보았고, 또 왕이 죽었을 때 그가 사망한 해를 그의 마지막 통치의 해로 계산하였다. 그리고 정상적으로 같은 해 새 왕이 즉위하면서 같은 해의 남은 기간을 첫번 통치의 해로 계산하였다. 반대로 유다에서는 앗수르의  계산법을 따라 티슈리(Tishri)월을 새 해로 지켰으며, 새로운 계승자가 왕위에 올랐던 그 해의 나머지 기간을 햇수로 셈하지 않고, 그 왕이 만 1년을 다스리게 되는 해부터 계산에 넣었다.
  둘째로 왕들의 행적과 진술(진술)에 대한 평가의 기준은 예루살렘 성전 밖에서 수행되었던 예배를 허용하였느냐? 아니냐?에 따라  철저히 시행되었다. 이러한 신명기 사가의  신학은 주전 7세기 요시아에 의해 확정되면서 모든 역사를 그러한 시각에서  평가하기 시작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원칙에 따르면 북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은 유죄 판결을 받게 된다. 그 밖에 남유다의 왕들 중에서도 상당 수가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히스기야, 요시아왕만이 무조건 인정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왕의 기록에 대한 결어(결어)  공식은 사용된 자료의 출처를 밝히고 있다. 유다 왕들에게는 "유다왕의 실록"이, 이스라엘왕들에게는 "이스라엘왕의 실록"이 그것이다. 동일한 원칙에서 "솔로몬의 실록"도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이 보존되어 있지 않음은 큰 유감이 아닐 수 없다.

① 북이스라엘의 역사(931-721 B.C.E.)
  북왕국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으로부터 마지막  왕인 호세아에 이르기까지 19명 의 왕이 통치하였는데, 오므리 왕조와 예후 왕조를 제외하고 비교적 짧은 통치 기간으로 마감하고 있다. 19명의 왕 가운데 8명이나 암살되는등 비교적 안정되지 않은 파란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 여로보암 왕조와 바사왕조(931-884 B.C.E.)
  통일 왕국 분단의 직접적인 원인은  솔로몬의 억압적인 정책과 시정 방침에
있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초대 왕이 된 여로보암이 이끄는 에브라임의 노동자 집단의 반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구동맹의 관계가 깨어지고, 사울 시대로부터 잔존해 있던 지파간의 갈등이 다시 시작된 셈이다.
  여로보암 1세는 세겜을 수도로 정하고(왕상12:25), 즉각 단과 베델에 금송아지를 세우고 제의를 시행함으로써 예루살렘의 성전 제의를 대치시키는 개혁을 단행하였다(왕상12:27-30). 그는 레위인들을 몰아내고 자신의 사제를 임명하였으며,  절기의 날짜를 임의로 바꾸어  버렸다(왕상12:31-33). 이러한 종교 정책은 유다로부터의 완전한 정치적 독립과 함께 종교적 독립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통치하던 시기에 이집트의  시삭이 쳐들어 왔으며(왕상14:25,926년 B.C.E.), 다마스커스의 아랍족과의 전쟁도 간헐적으로 있었다. 남쪽 유다와의 관계는 경계를 정하고 그 경계를 수비하는 정도의 마무리가 있었다. 여로보암과 바사 왕조는 모두 단기간 통치하다가 구테타에 의해 타도 되었다.

㈏ 오므리 왕조(880-841 B.C.E.)
  군사 구테타의 산물로 정권을 장악한  오므리는 4년에 걸친 내전에서 승기를 잡고 보다 강력한 중앙 집권적인 군주 국가를  만들어 나갔다(왕상16:21-23). 그는 사마리아에 화려한 수도를 건설하였으며(왕상16:24), 페니키아, 다마스커스 및  유다와 군사 동맹을 맺고 무역을 실시하였으며, 모압을 정복하고 봉신국으로 삼았다(왕하3:4). 오므리는 외국에서 볼 때도 '오므리 왕국'(bait hmuri)으로 표기 되었다.
  오므리 왕조의 정책은 북이스라엘을  강력한 국가로 만들었다. 물질적으로 상당한 번영을 누렸으며, 오므리에 의해 착공되고 아합에 의해  완공된 수도 사마리아는 고고학이 밝혀 준대로 탁월한 기술과 화려한 시설들을 갖추고 있어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고 있었다. 또, 하솔과 므깃도의 마병장과 수로용 터널은 이시기에 건설된 것으로 알려졌다.
  왕위에 오른 오므리의 아들  아합왕(869-850년 B.C.E.)은 853년 B.C.E.에 카르카르(Qarqar)에서 일어난 전쟁에 앗시리아의 샬만에셀 3세에게 대규모의 전차 부대를 파견할 수 있는 정도의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스라엘의 국제적  지위도 격상되었다(ANET,278-279). 또 그는  사마리아에 상아궁을 짓고 화려한 생활을 하였으며(왕상22:39), 시돈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왕상16:31), 바알을 섬겼다. 아합은  이즈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해 백성을 죽이기까지  하는 죄를 범하였다(왕상21:1-16).
  아합은 이처럼 국가의 부흥과 번영을  가져온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를 가장 악한 왕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는 나봇의 포도원  사건(왕상21장)이나 이방 여인 이세벨과의 결혼, 바알 신 숭배등 신명기 사가의 입장에서 볼 때는 용납될 수 없는 일들을 저질렀다. 이러한 오므리 왕가의 잘못된 종교 정책은 이 때에 활동한 유명한 선지자 엘리야(Elijah)에게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왕상17-19장).
  무엇보다도 길르앗 출신의 예언자  엘리아는 종교적으로 어두운 억압의 시기에  이스라엘의 신앙과 종교를 새롭게 일으킨 예언자로서 이스라엘의 역사에 우뚝솟은 인물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합의 후계자인 아하시야(850-849년 B.C.E.)는 유다의 왕 여호람에게 자기의 딸 아달리야를 아내로 주어 남북관계가 우호적으로 유지 되었으며, 군사 지원을 요청할 수도 있었다. 사실상 이스라엘은 주도권을 잡고 그 힘을 행사한 것이다.
  북이스라엘에서는 오므리 왕조에 대한 반감이  계속 고조되고 있었다. 이 저항 운동의 지도자는 엘리야의 후계자인 엘리사였다. 그는 국가 정책에 대한 비판을 계속하면서 "선지자 집단"(bene hanebi'im)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들은 열열한 애국자들로서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들이었다. 여전히 옛 질서와 민중들에 뿌리를 박고 여호와의 언약과 율법에 비추어 왕과 왕권을 자유롭게 비판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던 자들이었다. 결국 이들은 오므리 왕조의 몰락을 몰고 간 인물들이었다.

㈐ 예후 왕조(841-752 B.C.E.)
  이 시기는 이스라엘이 아람 사람들로  받은 굴욕적인 경험의 시기와 8세기 초 앗시리아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아람의 그늘로부터 조금은 벗어 날 수 있던 시기로 크게 나누어 진다.
  오므리 왕조는 극심한  타락과 호화스러운 생활로 인하여  백성들로부터 점차 멀어져 갔으며, 백성들의 불만이 계속 번져 나갔다. 특히 길르앗  출신의 선지자 엘리사는 그의 제자를 통하여 라못 길르앗에 사는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붓고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다(왕하9:1-3). 예후는 곧 혁명을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왕 요람과 남쪽 유다의 왕 아하시아를 처형하고(왕하9:14-29), 또 아합 왕비인 이세벨과 아합 가문의 모든 남은 자들을 대량으로 학살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왕하9:30-10:11).
  이러한 예후 왕조의 피의 숙청은 오므리 왕조의 정책에 의거하고 있던 주변 국가와의 동맹 체제를 한꺼번에 파괴시키고 말았다. 이세벨의 처형으로 두로와의 관계는 단절되었으며, 아하시아의 처형은 남유다와의 관계를 급속도로 냉각시켰다. 이러한 주변 국가와의 동맹 체제 와해는 이스라엘의 물질적인 번영의 주요 원천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는 해로울 수 밖에 없었다.
  예후는 이러한 혁명을 저질러 놓고  국가를 정상으로 회복시킬 만한 능력이나 효과적인 조처를 전혀 취하지 아니하였다. 예후 왕조의 마지막 왕인 스가랴는 살룸에게 암살 당함으로 왕조의 막을 내리게 되었으며, 그 후 다섯 왕들 가운데 4명이 암살 당하는등 매우 불안정한 말기 현상을 노출 시키고 있었다.
  예후 왕조는 바알 숭배를 근절하기 위해 사마리아의 바알 제단에 모든 사제들을 불러 모으고 신전과 바알 숭배자들을 모두 처형하였다(왕하10:18-27).  "이렇게 하여 예후는 이스라엘에서 바알 숭배를 뿌리 뽑았다"(왕하10:28). 그러나 외형적으로는 혁명을  통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종교 개혁을 통하여 고대의 신앙을 회복하였으나 그는 그의 피 흘림의 댓가를 치러야만 하였다(호1:4).
  이 시기에 활동하였던 예언자 아모스와 호세아는 그의 착취와 불의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심판을 선언하였다. 특히 아모스는 소수에게 편중된 부와 권력의 구조를 비판하였으며, 경제적 착취를 날카롭게 고발하였다.

㈑ 북왕국의 붕괴(752-721 B.C.E.)
  예후 왕조가 붕괴된 이 후  세계 정세는 이스라엘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해 지기 시작하였다. 앗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 III세는 정복에 나서  가장 막강한 군사력과 무기들을 동원하여 주변 국가들을 차례로 정복해 나갔다. 주전  743년 그는 상부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하였으며, 북 시리아의 아르파드(Arpad)왕국과 하맛(Hammat) 왕국을 정복하였다. 그  후 그는 이집트를 정복할 계획을 세우고 팔레스틴을 침공하였다.
  이 시기에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와 남유다의 웃시아같은 유능한 왕이 있어 새로운 재기를 위해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다. 여로보암 2세(786-746년 B.C.E.)는 북쪽 다마스커스와 동부 아람족을 정복하고 이스라엘의 국경을 넓혀 나갔으며, 18세의 젊은 나이로 유다의 왕에 오른 웃시아(783-742년 B.C.E.)는 예루살렘을 개수하고 군대를 재편하는 동시에  새로운 무기를 수입하여 에돔 및 서북 아라비아 부족들을 공격하여 교역로를 활짝 열기도 하였다(대하26:6-9,11-15). 남북 관계도 매우 원만하여 솔로몬 시대의 이스라엘에 손색이 없을 만큼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이러한 면모는 상대적으로  동시대의 이스라엘 사회 내부의 부패가 진척되면서 번영이 망국병으로 번져나갔다. 이 시대의 이스라엘 사회의 두드러진 부패상은 빈부의 격차였다. 부자들의 탐욕은 부정직한 관행을 낳았으며, 권력을 이용한 재산의 강탈과 토지의 몰수는 가난한 자들이 구제받을 길이 차단되어 버렸다(암2:6f.;5:10-12;8:4-6).
이러한 사회적 부패는 종교적  부패와 보조를 같이 하였다. 대부분의 성소에는 예배자들로 붐볐지만(암4:4f.;5:21-24), 순수한 형태의 여호와 신앙은 더 이상 유지되지 않았다. 가나안의 토착신 '바알'과의 혼합주의는 여호와의 신앙과 구별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드고아 목동 출신의 아모스와 사랑했던 아내의 배반을 경험한 호세아의 강력한 항의를 받았다.
  여로보암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스가랴는 단지 6개월의 통치  후에 야베스의 아들 살룸에게 암살당하였고, 살룸도 한  달 뒤에 가디의 아들 므나헴(745-737년 B.C.E.)에  의해 살해되었다. 므나헴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왕위에 오르자, 그의 군관이었던 베가가 일어나 그를 살해하고 왕권을 장악하였다.
나라 전체는 내란으로  치닫고 있었으며, 이스라엘의 몰락은  가속화되었다. 예언자 호세아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언한 것은 결코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다(호9:11-17;13:9-13).
  드디어 북이스라엘은 호세아왕 때 앗시리아의 살만에셀 V세의 공격을 받고 3년 동안의 포위를 견디지 못하고 수도 사마리아는  721년 B.C.E.에 함락되고 말았다(왕하17:1-6).  귀족들은 포로로  끌려 갔으며, 이 지역은 앗시리아의 총독이 다스렸다. 더구나 이 지역에는 앗수르인들이 이주해 들어와 살면서 혼혈 정책과 함께 이스라엘 민족의 혈통과 종교적 전통이 말살 되어 갔다.
  다윗과 솔로몬의 억압 정치로부터 벗어나려고 독립하였던 북이스라엘은 군주들의 계속되는 억압과 권력 남용으로 결국 막을 내리게 되었다. 성경은 멸망의 원인은 이스라엘이 야훼의 법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방의 신을 섬겨 야훼의  눈에 벗어났기 때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왕하17:7-18). 그리고 열방에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2의 광야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cf.호2:14-15).

② 남왕국 유다의 역사(931-586 B.C.E.)
㈎ 남북 분열부터 북이스라엘의 멸망까지
  남북 분열 이 후 남쪽  유다 왕국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큰 변화를 겪지 아니하였다 하더라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한 중앙 집권화  현상은 날로 심화되어 갔다. 르호보암으로부터 마지막 왕 시드기야에 이르기까지 19왕은 모두 다윗의 후손으로 다윗 왕가를 계승해 나아갔다. 이들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대부분 종교적 관점에만 치중되어 있기 때문에 경제, 사회적 측면에 관한 사실등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이 시대에 활동했던 이사야, 미가, 스바냐, 예레미야, 에스겔등의 예언자들의 활동을 통하여 부부적으로나마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
  남북 분열 이  후 남쪽 유다의 경우 역시 북쪽과  마찬가지로 종교적으로는 매우 타락한 상태에 머물러있었다.  르호보암의 우상  숭배는  극심하였고(왕상14:21-28),  그의 뒤를  이은  아비얌(15:1-8), 아사(15:9-24) 역시 마찬가지였다. 북 오므리 왕조 때에 유다는 사실상 봉신국이나 다름이 없었으며, 예후 왕조의 혁명으로 인하여 그 관계가 악화되었다. 북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 때의 남유다의 왕 여호사밧은 공명정대하고 유능하였다. 그는 사법제도의 개혁에 착수하여 소송절차를 정상화하여 부정을 뿌리뽑고, 분할되어 있던 행정 구역을 재편함으로써 재정문제도 조정하였다.
  그러나 북부 이스라엘과의 동맹의 결과  그의 뒤를 이어 계승한 여호람은 오므리 가문의 왕비 아달랴를 맞이해야 했다(왕하8:16-24). 그들은 합법성이 인정되지 않은 그의 정권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목격한 유다는 당분간 앗시리아의 위성국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 아하즈와 히스기야(722-686 B.C.E.)
  북 이스라엘의 멸망은 남유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군사적으로 늘 위협이 되고 있었던 이스라엘의 멸망은 오히려 보다 강한 앗시리아로 부터의 충돌 위험 앞에 더 큰 부담이 되었으며, 이러한 국제 정세의 변화에 유다는 대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북 이스라엘의 멸망 직전의 유다 왕은 아하스 였다. 반앗시리아 연합 세력에 가담하지  않았던 유다는 즉각적인 재난을 피할 수는 있었으나, 그는 앗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에게 막대한 금,은과 함께 사절단을 보내어 보호를 요청하였다(왕하16:1-16).
  이러한 상황에서 유다의 경제  상태는 몹시 피폐하였다. 대부분의 영토는 주변의 에돔에게 빼앗겼으며, 앗시리아에게 바칠 조공을 위해 성전 금고는 바닥이 났다(왕하16:8,17).
이 무렵  앗시리아의 사르곤 2세는 바빌로니아의  군주 마르둑 아팔리디나(Marduk-apaliddina)의 공격을 받고 바벨로니아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였으며, 남쪽의 이집트는 비교적 강력한 지위를 회복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점차 앗시리아의  봉신국들의 반란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유다의 국론이 양분되기 시작하였다.
  예언자 이사야는 앗시리아에게 반기를  들고 이집트를 신뢰하는 것을 격력하게 반대하였으며(사20장), 유다가 즉시 어떻게  행동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 점차  유다는 기울어져 가는 앗시리아로부터 독립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북이스라엘의 멸망과 함께 왕이 된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715-687 B.C.E.)는 대대적인 종교 개혁을 통하여 바알과 아세라  신상들을 부수고 불 살랐으며, 사르곤에  이어 산헤립이 왕위를 계승하자 히스기야는 분명히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앗시리아에게 반기를 들고 그들의 지배에서 벗어 났다(왕하18:1-8). 히스기야 제14년, 즉 701년 B.C.E.  앗시리아의 왕 산헤립(704-681 B.C.E.)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유다를 침공하였다. 라기스(Lachish)를 점령하고(왕하18:13-16)  예루살렘으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이사야의 예언대로 유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산헤립의 군대를 진멸하고 말았다(왕하19:1-35).
  히스기야는 예루살렘에 터널을 파서 기혼 샘의 물을 성 안에 있는 실로암 연못으로 끌어 들이는 대규모의 토목 공사를 실시하였으며(왕하20:20;대하32:30),  예루살렘 성벽 확장 공사를 대대적으로 시행하였다(사22:10). 고고학적으로 보면 이 때 예루살렘은 구약시대 가운데 가장 큰 예루살렘이 되었다. 그 이유는 아마 북이스라엘의 멸망 이 후 북쪽 주민들의 상당 수가 남으로 이주해 온 결과로 여겨진다.

㈐ 므나쎄(686-642 B.C.E.)
  히스기아의 뒤를 이어 20세에 왕이 된 므낫세는 친 앗시리아 정책을 추구하면서 그에 의존하였다. 사실상 앗시리아의  예속국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는 앗시리아의  문화와 종교 제의들을 받아 들였으며, 예루살렘 성전  앞 마당에는 앗시리아의 하늘의 여왕인 이스타르의 상징과 별의 신들을 위한 제단이 세워지기도 하였다(왕하21:1-9). 야훼 신앙은  사라지고 가나안의 바알 종교와 앗시리아의 종교가 혼합된 종교형태가 극심하게 번져 나갔던 시대였다.

㈑ 요시아(641-609 B.C.E.)
  국내적으로 외부 종교와의 극심한 혼합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동안 국제적으로 매우 큰 변화가 시작었다. 앗시리아는 형제들 끼리의 권력 다툼으로 그 세력이 점차 약화 되어 갔으며, 신흥 바빌로니아가 서서히 일어 나기 시작한 때이다. 예언자 나훔과 하박꾹은 앗시리아의 멸망을 예견하고 있었으며,예레미아는 신흥  세력에 의해 일어나게 될  유다의 커다란 위기를 예고  하였다. 결국 앗시리아는 612년 B.C.E.에 신흥 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 나느웨성이 정복되고 말았다.
  아몬왕의 뒤를 이어 8세에 등극한 요시아는 이스라엘의 역대 임금 중에서 가장 훌륭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622년 앗시리아와의 정치적, 종교적 관계를 단절하고, 성전 수리 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한 법전을 중심으로 한 신앙의 복구를 추진하였다(왕하22:3-20). 대대적인 종교 개혁을 통하여 모든 이방 제의와 관습, 우상을 청소하였으며(왕하23:4-18), 유월절 절기를 회복하여(왕하23:19-23), "요시아 처럼 야훼께로 돌아가 마음을 다  기울이고 생명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모세의 법을 온전히 지킨 왕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왕하23:25)고 극찬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종교 개혁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두 예언자는 스바냐와 예레미야였다.
한편 612년 신흥 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 수도 니느웨를 빼앗긴 앗시리아는 이집트의 느고 II세와 동맹을 맺고 니느웨 탈환을 위해 유프라데스로 출병해 줄것을 요청하였다. 요시아왕은 그의 영토에 들어와 메소포타미아로 향하고 있는 이집트의 느고왕을 맞아 므깃도(Meggido)에서 싸우다가 609년 B.C.E.그만 전사하고 만다(왕하23:29-30;대하35:20-24). 유프라테스로 계속  진격한 느고의 군대는 하란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고, 메소포타미아는 확고하게 바빌로니아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 여호야킴, 여호야긴, 시드기야(609-586 B.C.E.)
  요시아가 죽은 후 유다는 친이집트  인사인 요아하스가 왕위를 이어 받았으나 3개월 만에 이집트로 끌려 간 후 거기서 죽고(왕하23:31-34), 요시아의 아들 여호야킴이 왕위를 이어 받았다.
  609년 B.C.E. 이집트의  느고의 원정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605년 그는 완전히 패퇴하고 말았다.
  여호야킴이 통치하는 동안 바빌로니아 느브갓네살은 유다를 포함한 이집트 국경에 이르는 전 지역을 정복하였다(왕하24:1-7).
  뒤를 이어 받은 여호야긴은 바빌로니아의 예루살렘 침공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가 겨우 3개월 간의 통치의 끝을 맺게 되었다(왕하24:8-12). 뒤를 이어 왕이 된 시드기야는 589년 바빌로니아 왕에게 반기를 들었다. 예언자 예레미아는 왕과 백성에게 이러한 행위를 즉각 중지 할 것과, 결국 예루살렘 이 멸망하여 모든 유다인들이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갈 것과, 얼마 후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을 예언하였다. 바빌로니아의 대응은 신속하였으며, 그의 군대가 588년 1월 예루살렘을 봉쇄하고(왕하25:1;렘52:4. cf.렘21:3-7), 이듬해 여름까지 완강하게 버틴 예루살렘은 예레미아의 예언대로 성벽이 뚫리며 불 탔고, 페허가 되고 말았다(왕하25:1-12;렘39:1-10;52:4-16).
  여리고 부근에서 붙잡힌 시드기야에게는  어떠한 자비도 베풀어지지 않았다. 시드기야왕의 아들들은 왕이 보는 앞에서 처형 되었으며, 그 자신도 눈이 뽑힌 채 사슬에 묶여 바빌로니아로 끌려가 거기서 죽었다(왕하25:6f.;렘52:9-11). 대부분의 귀족들과 주민들은 바빌로니아로 포로로 잡혀갔으며, 바빌로니아의 느브간네살은  그달리야를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하고  미스바를  그  수도로 정하였다(렘40-44장.cf.왕하25:22-24).
  이로써 586년 B.C.E. 남유다 왕국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으며, 바빌로니아에서의 긴 유배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 사건은 모세로부터 시작된 야훼  신앙을 중심으로 결속된 신앙 공동체가 무너지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다시 이방인의  노예로, 방랑자로 돌아간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수난의 시작은 제2의 탈출을 꿈꾸는 새로운  희망을 낳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새로운 희망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어두운 역사속에서도 하나님의 미래를 기다릴 수 있는 용기를 얻게 해 주었다.

(6) 분열왕국의 남북관계
① 분열 초기의 남북관계
  남유다는 영토가 작고 가난했지만 동질적인 주민이 어울려 살았고 지리적으로 비교적 주변과 격리되었기 때문에 확고한 왕조 전통을 바탕으로 정돈되어 갔다. 유다 내부의 왕조는 비교적 큰 변화없이 안정되었고, 동질적인 경향의 주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다만 분열 초기의 다윗 왕조는 남쪽의 유다와 베냐민 지파에  대한  통치권을  강화하는데  주력하였다. 소위  "르호보암의  방어선"(대하11:5-12)이라 불리우는 성들을 살펴보면 외적의 침략을 방어하는 국경선의 도시들이 아니라 유다 내부의 산지에 자리잡고 있는 도시들이다.
  한편 북이스라엘은 영토가 넓고 비옥했으며, 그리고 옛지파 동맹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주민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지리적으로 외세의 영향을 받기가 쉬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왕조의 전통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북쪽의 여로보암(931-910 B.C.E.)은 독립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일련의 조처들을 적절하게 취하였다. 세겜을 수도로 하였고(왕상12:25),  벧엘과 단을 종교  성소로 건설하였으며, 예루살렘과의 정치적, 종교적 결별을 선언하였다.  종교제의 뿐 아니라 달력과 축제일도 변경하여 독자적인 국가의 합법성과 정당성을 이룩해 나갔다.
  북쪽의 정치는 매우 불안정하였다. 여로보암은 그의 아들 나답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2년이 채 못되어 살해 되었으며(왕상15:25-27), 그 역시 아들 엘라에게 왕위를 계승 한 뒤  2년 만에 시므리에게 구테타를 당한다(왕상16:8-10). 첫 50년동안에 세차례나 구테타에 의해  정권이 교체되었다는 사실은 북왕조의 세습이 인정되지 않았던 전통이 현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뒷바침해 준다. 이러한 혼돈 상태를 북왕조는 오랫동안 견디어 내야 했다.
남북의 경계가 불분명한 연유로 국경선에서는 소규모의 국지적인 충돌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 유다왕 아사(911-870 B.C.E.)가 외국 군대인 시리아를 끌어들여 북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남북관계는 한층 악화되었다(왕상15:16-22).
  이러한 국내 정세의 불안정은 외세의 잦은 침략을 불러 들였다. 르호보암(931-913  B.C.E.) 제5년 이집트 시삭의 침입(왕상14:15), 블레셋의 침략(왕상15:27;16:15), 유다왕  아사의 요청으로 시리아 군대의 북이스라엘 침략(왕상15:16-22;대하16:1-6)등이 그것이다.

② 이스라엘의 봉신인 유다
  쿠테타를 일으키며 왕위에  오른 북이스라엘의 오므리왕(880-874 B.C.E.)은 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남유다  왕국을 봉신으로 만들었다(왕하3:7;왕상22:4). 그의 왕조는 오므리,아합,아하지야로 이어져  내려오는 동안 거의 남쪽의 유다를 지배하였다.오므리 왕가의 공주  아달리야가 다윗왕가의 왕 여호람의 왕비가 되기도 하였으며, 여호람은 남북을 동시에 통치하는 왕이 되기도 하였다.
  이 시대의 남북관계는 두  왕가가 각각 존재하는 통일 국가로 보아도 무리가 아닐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외세와의  전쟁을 위해서는 하나로 출전하였으며(주전853년 카르카르 전투,ANET,278-279;왕하3:4-27;대하25:5-13), 왕실은 서로 사돈을 맺고 친밀히 교류하였다.
  오므리 왕조를 뒤엎고  등장한 예후왕(841-814 B.C.E.)은 이스라엘의 왕족뿐 아니라 유다의 왕족을 학살하였다(왕하9:14-10:14). 예후의 시각으로 볼 때 이 둘은 모두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예후  왕조도 유다를 지배하였으며, 유다의 몇 차례의 반란이  실패로 그치고  말았다(왕하14:11-14).  그 후  유다의 아하스왕(731-716B.C.E.)은 친 앗수르 정책을 펴면서 독립을 선언 하였다(왕하16:1-16).

③ 남북간의 교류
  오므리 왕조와 다윗 왕조 사이의 유대 강화는 두 국가간의 분쟁과 마찰을 약화시킨 것은 사실이나 남북 통일을 위한 노력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는 단지 오므리 왕조의 세력 확장의 결과로 얻어진 부산물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는 당시 두로와 시돈과의 정략 결혼을 통하여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였으며(왕상16:31), 모압을 정복하였고 에돔에는  섭정왕(deputy)을 두었다. 따라서 그는 주요 교역로를 확보하였으며, 나아가 유다와의  우호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어느정도의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이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들-엘리야,엘리사,아모스,호세아, 미가등-은 두 왕국을 오가면서  예언 활동을 하였으며, 정치,군사,경제등 각 분야에 걸친 남북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기 때문에 어느정도 하나의 민족, 하나의 공동체라는 개념을 지속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남북  관계는 721년 B.C.E.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먼저 멸망당하고, 그의 영토에 편입되면서  깨어졌으며, 이 때 북 왕국의 많은 피난민들이 남쪽 유다로 모여들면서 예루살렘의  인구는 급증하게 된다.그리고 앗수르는 남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집단으로 추방시키고, 그 대신 다른 민족들을 그 곳으로 이주 시켰다.
  이로써 남북으로 분열된 고대  이스라엘은 통일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북이스라엘은 721년 B.C.E.  앗수르에게, 남유다는 586년 B.C.E.바빌로니아에게 각각 멸망당한다.

3. 제2차 성전시대(538 B.C.E.-70 C.E.)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잇는 시리아-팔레스틴 회랑 지대의 남단에 위치하여 독립해서 살아오던 이스라엘은 6세기 B.C.E.에 접어 들면서 그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지리적, 사회적, 정치적 틀이 크게 변하기 시작하였다.
근동 지방의 국제 정세의 변화와 이에 따른 이스라엘의 멸망은 민족의 강제적 이동과 추방,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의 이민등으로 인하여 새로운 질서가 생겨나게 되었으며, 다양한 문화와 사상들의 교류로 말미암아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발생한 새로운 사조(사조)들은 이 시대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  삶의 터전을 잃고,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를 거쳐 헬라, 로마로 이어지는 열강들의 지배 과정을 겪으면서 과거의 전통과 새로운 사조들과의 충돌과 갈등을 통하여  다양하고 복잡한 사상을 낳게 되며, 이것은 곧 이스라엘의 새로운 종교 전통으로 연결되어 발전하게 된다.
  흔히 "신구약  중간사"(The Intertestamental Period)라  일컬어 지기도 하는 이기간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로니아의  포로 생활을 거쳐 본토로 귀향하게 되는 과정과 그로 인하여 발생한 사회 구조의 변화 및 사상 체계, 그리고 헬라, 로마로 이어지는 새로운 지배 체제와 헬레니즘과의 충돌로 인하여 발생한 문화적 변화, 그리고 예루살렘의 멸망등 약 600여년의 과정에서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기간이다. 아울러  이러한 시대에 태어난 예수 공동체의 본질과 특성을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더불어 고찰하게 됨으로써 초기 기독교의 역사적 배경과 아울러 신학적 본질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연구가 될 것이다.

(1) 바빌로니아 포로시대(586-538 B.C.E.)
① 성전 멸망과 바빌로니아 유배(류배)
  721년 B.C.E.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로부터 멸망  당한 후 남유다는 여러 왕들의 개혁과 발전 의지를  통하여 독립을 계속 유지해 왔다. 드러나 약소 국가인 유다는 강대국인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사이에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Zedekia)는 예언자 예레미아의 강력한 권고(렘27장)에도 불구하고 국제 질서의 변화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채 바빌로니아와 맺은 맹약을 깨뜨리고 이집트에게 기울어 지고 말았다. 이러한 약소 국가의 반역은 대제국 바빌로니아의 느브간네살 왕을 머뭇거리지 않고 신속하고 강하게 불러들인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589년 B.C.E.정월  예루살렘은 포위 되었으며, 3년  5개월 동안의 포위는 급기야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예레미아는 이미 선언하기를 "바빌로니아 왕을 섬기지 아니하리라하는 선지자의  말을 듣지 말라...내가 그들(유대인)을 그 땅(바빌로니아)에 머물러서 밭을 갈며 거기 거하게 하리라"(렘27:9b,11) 하였다.
  예루살렘의 함락과 성전의 파괴는  이스라엘의 삶을 크게 변화 시켰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수도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 신앙적 삶의 뿌리를 두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바로 이러한 모든 삶의 터전을 상실한 채 바빌로니아에서의 유배 생활을 시작해야만 했다.

② '이산'(Dispersion)과 '포로'(Exile)
  예루살렘 멸망 이 후 가장 중요한 외적인 변화 가운데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산'(리산)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바빌로니아 '포로'(포로)는 유다가 완전히 멸망 당한 이후에 일어난 일시적인 강제 이주를 암시하는 것으로써 유다 백성의 극히 일부만이 바빌로니아로 포로로 잡혀갔다는 사실만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성경의 보도에 의하면 4,600명의 유다 백성이 세 차례에 걸쳐 추방 되었으며, 그 가운데 약 13는 제2차 추방 때에 강제 이주 되었다(렘52:28-30). 아른 자료에 의하면 제1차 추방 때에 약 1만명이 추방 되었다(왕하25:14-17).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제 이송된 왕족, 국가 관리,  사제, 군대 장관 및 기술자 등을 모두 합쳐도 이 숫자는 고작 당시의 전주민의  5%를 넘지 않는다. 물론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였으며(cf.애2:11-21;4:9f.), 상당  수의 사람들은 자의  및 타의에 의해 팔레스틴을 빠져 나가 바빌로니아보다 훨씬  가까운 이집트(왕하25:26;렘42장) , 페니키아, 시리아, 요르단 동편 등지로 펴져 나갔다. 많은 경우 이들은 불확실하고 불리한 팔레스틴의 생활  조건보다는 나은 것으로 믿어지는  지역으로 이주하여 흩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틴에  계속 남아 거주하였던 다수의 유대인들(겔33:24)은 나름 대로의 생활  문화를 유지하면서 살았다. 그들은 비록 정치적 독립을 상실한 땅에서 살아간다 하더라도  나름대로의 전통 문화와 관습에 충실하였다. 적어도 이들은 새로운 이방 문화와의 접촉을 통한 영향을 적게 받고 살았다는 점에서 민족적, 종교적 긍지를 어느 정도 가지며 살아온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진정한 구심점은 그들에게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멸망은 백성들을 이산 집단과  계속 팔레스틴에 머물러 살아가는 거주 공동체로 나누어  놓았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이러한 두 집단 사이의 구조적 차이는 점차 커져  갔던 것이다. 나아가 바빌로니아로부터 귀향하게 될 때 이산 공동체 가운데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않고 여전히 바빌로니아에 남아 살게 되는 집단이 있게 되는데,  소위 바빌로니아로부터 돌아온 복귀 공동체와 팔레스틴에 남아 있던 거주 공동체 사이의  갈등은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특징으로 요약된다.

③ 바빌로니아의 유대인
  바빌로니아에 잡혀간 유대인들은 유다의 정치적, 종교적, 지성적으로 지도층에 속한 자들이었다. 이들은  비록 수적으로는 소수였지만 이스라엘의 신앙에 새로운 방향성을 부여하면서 이스라엘의 장래를 설계하게 될 사람들이었다.
바빌로니아의 식민 정책은 비교적 온건하였다. 북이스라엘을 멸망 시킨 앗시리아의 경우  식민지의 지도자들을 추방하고  본토인들을 이주, 혼혈(혼혈) 시킴으로써 식민지의 백성들을 지배자 집단과 동화시킴으로써 식민지의 정치, 종교, 사회,문화를 모두 파괴하고 말살시키는  것과는 달리, 바빌로니아의 느브간네살은 제국 국민의 집단 이주등의  정책은 실시하지 아니하였다. 다만  미스바에 그의 직위 관청을 가지고 있었던 그달리야를 임명하여, 폭넓은 권한을 가지고 그 땅의 주민들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그달리야가 그 땅에 남아 있던 왕족에게 암살을 당한 후(왕하25:25;렘41:1-3) 주변의 암몬,  에돔 사람들이 팔레스틴에 들어와  약탈을 일삼았던 점을 고려한다면, 바빌로니아의 팔레스틴에 대한 관심은 그다지 크거나 중요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나아가 느브간네살의 후계자인 아멜 마르둑(Amel Marduk,561-559 B.C.E.)은 감옥에 오랫동안 갖혀있던  여호야긴왕을 석방시켜 자유롭게  하는등 유대인들에게 비교적 우호적이었다(왕하25:27-30;렘52:31-34).
이러한 바빌로니아의 식민 정책은 바빌로니아로 강제 이송된 유대인들의 포로 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포로민들의 생활 상에 관하여  자세한 기록이 없다 하더라도, 그들은 주로 황폐한  농업 지역에 정착하여 조밀한 포로 수용소같은 집단을 건설하고 살았으며(cf.겔3:15;스2:59;8:17;시137), 어느 정도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렘29:5-7;cf.겔8:1;14:1;33:30f.). 토착민들과  포로민들 사이의 법적인 차별은 발견되지 않으며, 비교적 안정된 가운데 생활해 나갔던 것으로 여겨진다.
  유대인들의 전혀 새로운 문화적 배경을 가진 바빌로니아에서의 포로 생활은 그들로 하여금 전통적인 유대의 신앙과 전통에 관하여 재정립을 요구하였다. 성전 예배기능을 계속할 수 없었던 이들로써는 새로운 예배 형식을 개발해 내지 않으면 안되었고, 예배에 필요한 문서들의  작성을 요청 받게 되었다. 여기서 율법 교사들의 역할과 지위가 부각되기 시작하였으며, 다양한 의견을 가진 다양한 종파들이 각각 생겨나기 시작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가려는 희망과 소원은 암담한 그들의 현실 속에서 점차 싹터오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꿈꾼 희망은 제2의 이집트 탈출 같은 정치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야훼의 전적인 능력으로 인한 종말론적 회복이었다: "내가 너희를 만민 가운데서 모으며, 너희를 흩은 열방 가운데서 모아내고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에게 주리라"(렘11:17).

④ 팔레스틴의 유대인
  팔레스틴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가난한 땅의 백성들"(Am Ha-aretz,왕하24:14;25:12)이라 불리웠는데, 이들의  경제적 조건은 매우 열악(렬악)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의 황폐해진 도시와  농경지에 관해서는 고고학적 발굴 결과가 증명해 주고 있으며, 이는 과다한 과세와 소작으로 인한 영세성이 주 원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유대인의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고 보전하는 주체로서 그 역할을 담당하였다.  폐허가 된 예루살렘은 세겜,  실로, 사마리아 등지에서 온자들과 함께 예배가 드려졌으며(렘41:4-8),  이 제의는 추방을 면한 하위직 사제들이 관장하는 동물 희생 제사였다. 특히 성전 멸망을 기념하는 금식 기간 중에는 애가와 시편 70편, 105편, 106편등이 공적으로 읽혀 졌다(슥7:2-7;8:18-19).
  한편, 일부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중앙 집권화로 인하여 뒤로 물러났던 이전의 지방 제단들이 복구 되면서,  이스라엘 종교의 혼합주의적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도 하였다(렘44:16-17). 특히 사마리아인들의 그리심산 제의는 대표적인 이 시대의 모습이었다.

⑤ 포로생활과 이스라엘의 신앙
  이스라엘에 몰아 닥친 엄청난 재앙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신앙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지  않으면 않되도록 하였다: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거처로 삼으신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이 이방인들의 손에의해 무너진 것은 어떤 이유에서이며, "영원한 기업"으로  삼으시겠다는 다윗왕에 대한 약속은 파기된 것인가?하는 질문과  함께 절망에 빠지게  되었다(사63:19;겔33:10;37:11). 이러한 질문들은 이 시대에 이르기까지 한번도  제기된 적이 없는 질문들이었는데, 지금까지의 이스라엘은 언제나 인종적으로나 제의적으로 잘 정의된 하나의 단일 공동체를 의미했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을  망가뜨린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이스라엘의 신앙은 이러한 질문들을 단순한 물리적인 생존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에 관한 신학적 해명을 제시하면서 미래에 대한 소망의  불꽃을 살려 나갔다. 이러한 작업은 백성들과 함께 바빌로니아로 잡혀갔던 예언자 예레미아와  에스겔에 의해 준비되었다. 이들은 멸망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새로운  미래를 위해 이스라엘을 준비시키는 과정으로 해석하면서 하나님과의  "새로운 계약"을 통하여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해 나갈 것을 역설하였다(렘31:31).
  특히 그들은 귀환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의심할 여지없이 포로 공동체의 대부분은 자기들의 처지가 잠정적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미래에 대한 유토파아적인 꿈은  강력하게 형상화 되었다(겔40-48장). 이러한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이상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의식 속에서 싹터 나갔으며, 이것은 곧 이방 제의나 문화와의 단호한 격리주의적 조처로 이어지면서 불가피하게 배타주의적 성격을 띄게 되었다.
  이러한 신학적 경향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이 세계를 선과 악의 대결 구도로 이해하게 하면서, 하나님의 공의와 악의 문제에 관하여 많은 관심을 갖도록 하였다. 바로 이 시기에 쓰여진  작품들에서 천사, 사탄, 악마, 귀신 등의 주제가 자주 등장하기 시작하며, 아울러 하나님의  사후 심판과 상급에 관한 신앙이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예정된 '하나님의  날'에 있을 임박한 심판과 미래에 대한 완성의 희망은 점차 일관된 체계를 갖춘 종말론적인 역사 의식으로 발전해 나가면서, 묵시문학과 묵시문학적 사상의 태동(태동)을 가져 다 주는 기회가 되었다.
  또, 그들은 성전 없이도  이룩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를 구상하면서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해  나갔다. 이스라엘의 신앙을  지켜주는 두 기둥-성전과 율법-중에서 파괴된 성전에 대한 재건의  희망과 열정이 식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율법을 보다 강조함으로써 성전대신  율법을 중심으로 한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재편과 신앙적인 삶을 이어나가려는 이들의  노력은 당연한 것이었다. 즉, 새로운 공동체의 재건이라는 목표는 바로 율법을  통하여 이룩될 수 있다고 믿었다. 성문화된 토라가 바로 이 시기에 정리되어  편집된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필연적으로 율법  중심의 유대교(Judaism)를 출현시켰다. 율법은 이제 단순히 공동체와 그 일원들을 규제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 공동체를 창출하고 결속하며 정체성을 부여해 주는 주체가 된 것이다.

(2) 페르시아 시대의 이스라엘(536-332년 B.C.E.)
① 고레스의 칙령(칙령)과 이산 공동체의 귀향
  메소포타미아 동쪽 고지대에서 발흥한 페르시아의 고레스(Cyrus,539-529B.C.E.)는 539년 B.C.E.에 바빌로니아의 수도에 무혈 입성하였다:"나 고레스, 세계대국의 왕, 위대하고 힘있는 왕, 바빌로니아의 왕, 수메르와 아카드의 왕, 세계 4대 강들의 왕, 캄비세스의  아들... 내가 평화롭게 바빌로니아에 입성하였을 때 나는  군주들의 궁전에서  환호와  기쁨으로...통치자의  권좌를 세웠노라..."(Cyrus Cylinder, 22-23줄).
  바빌로니아의 힘은 느브갓네살이  죽자 급속도로 기울었다. 신비빌로니아의 마지막 왕인 나보니두스(Nabonidus,555-539  B.C.E.)의 실정(실정)에 불만을 품은 바빌로니아의 관리들과 사제들은 고레스의  편이 되어 환영과 함께 무혈 입성을 가능케 하였다.  이로써  페르시아는 동쪽의 인도 국경으로부터  서쪽의 그리이스 맞은 편 에게해, 남쪽의  이집트에 이르는 바빌로니아 제국의  2배가 넘는 영토를 다스리는 대제국이 되었다.
  고레스는 일부 피지배 민족들에게  상당한 자율권을 부여하고, 그들의 고유한 문화 및  종교 생활을 존중하는  이른바 개화된 페르시아  정책을 발표하였다. 538년 B.C.E. 신년 축하식(New Year Festival)에서 고레스는 [고레스 칙령](The Edict of Cyrus)을 발표하였는데,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에 관하여 언급하였다:"칙령. 고레스왕 원년에 고레스왕은 지시한다:예루살렘  성전에 관한 일, 그 성전은 사람들이 제물을  드리는  제단을  다시   세워라.  그  건물의  크기는  다음과  하라..."(스6:3-5;cf.1:2-4). 성경의 이 본문은 칙령의 언어인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다.
적어도 고레스의 이 칙령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꿈같은 사실이었다. 예언자 이사야는 고레스를  일컬어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사45:1)라 하였으며, 동시에 "그는 나의  목자"(사44:28)라 불렀다. '기름 받은'의 히브리어는 메시아(Messiah)를 의미하는 말이며,  '목자' 역시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고레스에 대한 이사야의 칭호는 곧 그의 등장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인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 왕조의  회복(cf.사11:1-10;54:10)과 성전의 중건(사44:28,45)이라는 그들의 꿈같은 희망을 이방의  왕 고레스를 통하여 이루시는 역사를 하나님의 승리라는 구원사적 사건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② 성전 건축과 반대자들
  고레스의 칙령이 포고된  직후 페르시아의 왕실은 포로민 유대인들의 대표단을 예루살렘으로 파견하여 공동체 재건을 위한 정지(정지) 작업을 하도록 지시하였다(스1:5-11;5:13-15). 이  일을 맡은 첫번째 유다  총독(nasi leyehuda,스1:8)은 다윗 왕가에 속한 세스바살(Scheschbazzar)이었다.
  그는 제1차로  약 42,360명의 귀향자들을  이끌고 바빌로니아에게 빼앗겼던 제기(제기)들을 찾아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스2장,느7장). 그러나 어느정도의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 상부 도시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가 시행한 가장 중요한 일은 예루살렘 성전의 기초를 놓는  일과 귀향자들의 거주지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그는 성전 건립을 위하여  금전과 헌물을 봉납받았고,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여러가지 갈등과 재정난으로 인하여 고레스의 후계자인 캄비세스 2세(Cambyses II,529-522  B.C.E.)의 통치 기간에 이르기  까지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또한 세스바살이 취한 귀향자들의  지방 분산은 일종의 강제 형식을 띤 조처였기 때문에 상당한 반발과 불만이 내재된 것이었다. 이러한 불만은 성전 재건이라는 명분에 얼마동안 잠잠하였으나, 점차  지역간의 갈등과 충돌로 말미암아 벽에 부디치게 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특히 귀향 공동체와 그 땅에 계속해서 머물러 살던 토착민 공동체 사이에 점차 심화되는 현상을 낳게 된다.
한편, 페르시아의 왕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 원정 후 메데인들의 폭동 소식을 듣고  귀국  길에  시리아에서  사망하고,  그의  뒤를  이어  다리우스  1세(DariusI,522-485 B.C.E.)가 등극하였다. 그는 여러 지방에서 일어난 폭동을 진압한 후 확고한 왕권을  가지게 되었으며, 520년  B.C.E. 예루살렘에 스룹바벨(Zerubbabel,스3:2)을 임명하였다.
  유다 총독(pehah)  스룹바벨은 유다의 첫번째  총독(nasi)인 세스바살의 조카요,여호야긴의 손자였다(학1:1). 그는 선임자의 사업을 계속 추진하였다. 특히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 사업은 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업이었다:"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에 이른지 이년  이월에...무릇 사로잡혔다가 예루살렘에 돌아 온 자들이 역사를 시작하고"(스3:8) 비로서 성전의  초석을 놓았다. 그들은 큰 소리로 기뻐하며 찬양하였다(스3:11). 그리고 그는 적절한 협력자를 찾았다. 역시 포로에서 귀향한 대제사장 여호수아(Joshua,학1:1,14)와  예언자 학개와 스가랴가 바로 그들이었다.
  성전은 520-515년 B.C.E. 동안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의 감독하에 착실히 건설되었다(스5:1-2;학1:1-2:9;슥4:9). 그러나  성전 공사는  다리우스 1세  제2년인 520년 B.C.E.에 강제로 중단되었으며(스4:23-24), 이 때 예언자 학개와 스가랴는 성전 재건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백성들을 격려하며(학1:2-3), 큰 힘을 북돋아 주었다.
  이 때의 자세한 상황은 자세히 알 길이 없지만 매우 큰 좌절과 역경을 겪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먼저, 팔레스틴의 유대 공동체는 극히 작은 규모였다. 당시 유다의 인구는 약  20,000명을 넘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희박한 인구 밀도(느7:4)는 성전 공사를 어렵게 만드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경제적인 궁핍은 그 자체가 힘겨운  과제였다. 흉작(학1:9-11;2:15-17)으로 양식이나 의복을 구하는 일 조차  어려웠다(학1:6). 이러한 와중에서 가장  곤혹스러운 사실은 성전 공사를 방해하는 자들의 문제였다. 계속해서  유다 땅에서 살아 왔던 유대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이주자들의 유입과 성전 건축을 원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사업은 감당하기 벅차고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드디어  예루살렘 성전은 "다리오왕  제6년 아달월 3일에 필역하였다"(스6:15). 성전 봉헌일인 이 날은  마침 유월절 축제와 겹쳐 큰 축제를 겸하여 치루어졌다(스6:16-22). 이 해가  바로 516/5년 B.C.E.였다. 이로써 예레미아의 예언("이나라들은 70년 동안 바빌로니아 왕을 섬기리라",렘25:11)과 다니엘의 예언("예루살렘의 황무함이 70년만에  마치리라",단9:2b), 그리고 스가랴의 예고("70년 동안...금식하고 애통하리라",슥7:5)가 이루어 진 셈이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제의 공동체를 세워나갈 준비를 완료한 셈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성전 재건의  가장 큰 장애가 되었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자들"과 "그 땅의 백성"(am haaretz,스4:4) 사이의 갈등 때문이었다. 소위 이들의  갈등은 표면적으로 유다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귀향한 자들에게 성전 건축을 함께  하자고 제안하였으나, 스룹바벨이 이를 거절한데서 비롯된다(스4:1-6).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우리가...홀로 건축하리라"(스4:4a)한 데서 그들이 제안을 거절한 이유를 추론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귀향 공동체가 "그  땅의 백성"들과 함께 성전 건축을 할 수 없었던 이유를 밝혀야 할 것이다. 아울러 도대체 "그 땅의 백성"들은 누구였는가?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먼저  두  집단  사이의  갈등은  페르시아가  파견한  사마리아의 총독  닷드내(Thatnai)와 스달보스네(Sether Bosnai)로부터 표면화 된 것으로 여겨진다(스5:3).
  이들은 지방  총독으로서 예루살렘이 행정적,  종교적 중심지로 부흥하고 발전하는 것에 반대하였으며,  고레스왕의 칙령을 실천하는  방식에 있어서 위험한 요소들을 지적하면서 저지하려 하였다(스4:12-16).
나아가 성전 건축을 반대하였던 자들을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스4:1)이라 불렀으며, 연구에 의하면 이들은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 당한 후에도 여전히 팔레스틴에 머물러 살았던 사마리아인(Samaritians)으로  알려졌다. 귀향한 유대인들은 그들을 가르켜 귀족이나  제사장 그룹에 속하지 않은  자들을 통칭하던 "땅의 백성"이라는 칭호로 불렀던 것이다. 결국  예루살렘 성전 멸망 이후 귀향 공동체와 토착민 공동체 사이의 갈등은 성전이 재건되던 시기에 이르러 매우 첨예하게 대립되었으며, 이는 개혁 주도 세력과 수구 세력간의 다툼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③ 에스라와 느헤미아의 개혁운동
  515년 B.C.E. 성전 재건  이 후 458년 B.C.E. 학사(sofer) 에스라(Ezra)가 부임하기까지 반세기가 넘는 동안의  유대인 공동체에 관하여 우리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은 더이상 언급되지 않으며, 이는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된 후 총독보다는 성전의  대제사장의 역할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특히 성전 건축에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던 사마리아의 귀족들 조차 예루살렘의  종교적  리더쉽을  인정하고  예배한  것으로  알려졌다(슥2:11;8:23;사56:3-7).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전 건축 이 후 유대인 공동체가 무엇인가 분명치 않은 채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그 공동체의 장래가 여전히 불투명했다는 사실이다.
  구약 성경에서  아하수에로(Ahasuerus,스4:6)로 나오는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Xerxes, 486-465 B.C.E.)는  다리우스 왕가를 잇는 왕으로서 페르세폴리스와 엑바타나에 세운 그의 거대한 건물이 증명하듯이 매우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즉위할 때에" '땅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 건축에 관하여 상서(상서)하는 기록이 있으나(스4:6) 연대기적으로 맞지 않는다.
  한편, 크세르크세스의  아들이며, 그의 후계자인 아르닥크세르크세스(ArtaxerxesI, 464-424 B.C.E.),  즉 성경의 이름으로는 아닥사스다(Arthahsastha,스4:7)인 그는 이집트까지 그의  세력을 뻣어 나갔는데, 이  때 팔레스틴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유대 학사 에스라와 유다 총독 느헤미아를 파견하여 유다의 새로운 변화를 위한 전기를 마련한 것이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왕  제7년(457년 B.C.E.)에...예루살렘으로...올라왔다"(스7:7-8).  그는 "이스라엘  하나님 야훼께서 주신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sofer,스7:6)였으며, 제사장 가문의  고급 관리였다(스7:1-5). 그는 바빌로니아로부터 백성들, 제사장들, 레위인들,  노래하는 자들, 문지기들 도합 약 1,500여명과 그 외의 많은 재물을 가지고 귀향하였다(스8장).
  에스라의 주요  관심은 모세의 율법을 이스라엘의  민법과 종교법의 토대로 삼고 이에 준하는 개혁을 단행하여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를 재건하는 일이었다. 특히 그는 당시의 귀족들과 제사장  계층 사이에 유행하던 이방 여인들과의 결혼, 즉 국제 결혼을 강력히 거부하면서 예루살렘에 성회를 베풀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이 땅의 족속들(me-amei  ha-aretz)과 이방 여인(min ha-nasim ha-nakriot)을 끊어 버리라"(스10:11)고 설교하였다. 그리고 에스라는 "이방 여인을 취한 자의 일을 조사"(스10:16-17)하여 그 명단을 모두 공표하였다(스10:18-44).
  여기까지 에스라에 관한 기록은 끝을 맺고 있는데 아마도 그의 과격한 개혁 조치들은 여러 귀족들로부터 상당한 반대에 부디쳐 더 이상 추진하지 못한채 중단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라는 새로운 모세로 인정되었으며(느8:4은 출24:1,9의  모방이다),   가장  위대한  율법학자로   일컬어지게  된다(IV  Ezra14:37-47).  그가 취한 일련의 조치들은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이 모세의 율법을 토대로 세워진 공동체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성공 여부를 떠나 큰 의미를 가진다.
  한편,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아(Nehemiah)가 유다 총독으로 부임하게 된 것은 "아닥사스다왕 제20년"(느1:1;5:14)이었다. 햇수로는 444년 B.C.E.인 셈이다. 그는 본래 페르시아의 환관으로 활동적이고 유능한 사람이었다. 총독으로서 그는 예루살렘을 요새화하고 정착 생활 양식과  지방 행정을 재조직할 수 있는 충분한 권력을 가진 지방 장관으로 유다에 파견된 것이다.
  그가  파견되던 때의 예루살렘은 아직 요새화 되지 않은 인구가 매우 적은 도시였다(느2:3-5). 예루살렘에 도착한 그는  성문과 성벽, 그리고 새총독의 관저를 건축하였다. 역시  많은 반대와  방해에도 불구하고 이  일은 52일만에 완성된다(느3-4장;6:15).
  느헤미아는 주요 개혁 사업(느1:1-7:4;11:1-13:31)을 활발하게 진행하였으나, 부임한지  12년  후인   432년  B.C.E.에  페르시아로  돌아간  것으로  여겨진다(느5:14;13:6a).  그 다음해인  431년 B.C.E.에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와 활동하였으나 그 기간에  관하여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느13:6ff.).  에스라와 마찬 가지로 그는 반대자들로부터 조직적인  방해를 받으면서(느4:7-12) 더이상  그의 목표를 수행할수 없는 어떤 상황이 벌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그가 취한 일련의 조치들은 앞서 언급한 대로 성벽을 재건하는 일로써 성전이 재건된 이 후 70년이 지나도록 무너진 성벽에 여전히 머물러 살던 백성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나아가 그가 취한 조처들 가운데 핵심적인 내용은 일종의 도시 통합(synoecism)이었는데, 이것은 종종  아테네 중앙 정부 통치하의 아틱(Attica) 전체의 통합과 비교된다.  그는 예루살렘 축성과 더불어  유다 인구의 1/10을 추첨으로 선별하여 예루살렘으로  이주시킨 것이다(느11:1). 이  조처는 성벽 재건을 강력히 반대하고  나선 사마리아의  산발랏(Sanballat,느4:1) , 암몬의  토비아(Tobiah,느4:3), 아랍의 게셈(Geshem,느2:9),  그리고 아스돗인(느4:7)에게 상당한 힘으로 작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느헤미아는  농업과 상업의 이유로 안식일이  잘 지켜지지 않는 것에 반대하여 엄격한 안식일  준수를 강행하였다(느10:31;13:15-22). 또 외국 여인들과의 결혼을 반대하였으며(느10:30;13:23-31),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잃어버린 사실을 책망하였다(느13:24,cf.8:8).
  그가 취한 가장 강력한 조치가운데 하나는 역시 부채 탕감(seisachtheia)이었다. 느헤미아는 특권을  이용하여 이익을 얻는 부자들과  이로 인하여 부채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가난한 자들 사이의 계층 분화가 유다의 안정을 해치는 심각한 위협이 되자 취한 조치였다.   이 개혁은 종종 594-593년 B.C.E. 아테네의 솔론(Solon)이 취한 조처에 비교되곤 한다. 느헤미아는 자신과 측근들에게 지급되는 식량권 조차 포기한다(느5:14-19). 그러나 이와 같은 급진적인 개혁은 두 계층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보다는 한 쪽만을 위한 개혁 조치였다는 점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결국 그가 취한 조처는 "그 땅의 사람"들과의 분리 정책으로써(느10:29-31) 상당수의 귀족들의 반대에 부디쳐 페르시아로 돌아가고 만듯하다. 그의 뒤를 이어 그의 형제 하나니(Hanani)가 유다의 총독으로 부임하였으나 ,  그가 취한 조치들에 관하여는 기록이 없다.
  페르시아의 개막과 함께 큰  희망으로 시작된 귀향과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의 역사는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목표를  달성한 듯하나 유대 사회의 내면적 갈등과 분열은 이 시대의 흐름을 혼돈으로 규정하도록 하고 있다. 이 공동체는 그런 애매한 상태로는 존속할 수도 없었고, 과거의 체제를 되살릴 수 있는 능력도 가지지 못한 매우 불완전한 시대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많은 문학 작품이 생산 되는데, 이들 가운데 일부는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로부터 받은 영향과 풍조를 반영하고 있다.

④ 페르시아 시대의 유대인의 종교생활
  느헤미야 이후부터  알렉산더 대왕의 등장까지  팔레스틴의 역사에 관하여 성경은 침묵하고 있으며, 그  이외의 자료도 매우 빈약하여 우리가 아는 바가 매우 적고 불확실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대에 쓰여진 많은 문학 작품들을 가지고 있어 이들을 통하여 이 시대의 다양한 시대적 특징을 어느정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적어도 이  시대는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모든 유대인-팔레스틴내의 유대인과 디아스포라의 유대인-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였다.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에 세운 그들의 성전에서 예배하였으며, 이집트의 엘레판틴에 머물던  유대인 공동체는 자신들의 성전과 제의 형식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이들이 예루살렘의 성전과의 교류를 단절하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전통적인 유대교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사실은 유대교의 종교적 삶이 예루살렘에 집중되어 통합되어 있지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러한 사실은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서도 입증된다.
  이러한 다양한 시대적인  상황은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의 관계를 악화시켜 나갔으며, 이러한 갈등은 포로기 이 후의 계층간의 갈등, 특히 포로로부터 귀환한 공동체와 그 땅에  남아 있었던 공동체 사이의 갈등과 더불어 에스라, 느헤미아의 개혁 조처들로 인하여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분리되어 간 것으로 보여진다.
  이 시대의 다양한  종교 제의와 더불어 계층간의  다양한 사상 구조는 이 시대에 쓰여진 작품들에서도 나타난다. 성전 재건과 더불어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공동체와 팔레스틴 공동체 사이의 갈등,  이방 문화와의 혼합 현상, 메시아 도래와 유대인의 구원이라는 주제등이 이 시대의  많은 작품의 주제가 되고 있으면서도 각각의 작품은 저자가 속해있는 공동체의 입장을 대변해 주고 있다.
  에스라-느헤미아서를 통해  우리는 유대인의 종교 생활의 일면을 볼 수 있는데, 특히 분리주의자(Separatists)와  동화주의자(Assimilationists) 사이의 갈등이 잘 드러나 있으며, 토빗(Tobit)과 유딧(Judit)서에서는 공통적으로 이 시대의 예배 의식의 발달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나아가 룻기(Ruth)와 에스더(Esther)서를 통하여 이방 문화와의 동화를 정당화해  나가는 과정과 함께 유대인의 민족 구원이라는 신앙과의 조화를 잘 엿볼 수 있다.
적어도 우리가 이 시대의  역사와 유대교의 종교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를 종합적으로 말한다면 유대교가  이방의 여러 문화들과의 접촉을 통하여 내외적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해  가고 있었으며, 그러한 변화의 과정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정착에 많은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이 시대를 매우 어두운 침체기로 만들고 있었다는 사실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어떤 통일적인 종교 생활보다는 다양한 생활 방식, 가치관, 사상 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다.

(3) 알렉산더 대왕의 등장과 헬레니즘
① 알렉산더 대왕(336-323년 B.C.E.)
  소년 시절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받은 마게도니야의 빌립의 아들 알렉산더(336-323년  B.C.E.)가   희랍의  도시  국가들을   통합한  후  그라니쿠스(Granicus)와 이소스(Issus)에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Darius) 군대를 패퇴시키고 새로운 역사의  무대에 오른 것은 334/3년  B.C.E.의 일이었다. 이집트로 진군하는 알렉산더를 맞은  시리아-팔레스틴은 거의 전쟁다운  전투를 하지 못하고 저항없이 항복하였다.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은 바빌로니아와 수사, 페르세폴리스  및 인더스강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33세의 나이로 병에 걸려 죽었지만, 그의 짧은 생애는 고대 오리엔트의  삶과 역사에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로써 약 1,500여년 동안이나  팔레스틴에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쳐왔던 이집트, 바빌로니아, 페르시아등은 4세기 B.C.E. 이 후 그 세력이 약화되면서 팔레스틴의 역사의 무대로부터 물러나게 되었다. 알렉산더의 등장은 팔레스틴뿐만 아니라 근동의 정치사 및 문화사의 새로운 장을 맞게 된다.

② 동방과 서방의 만남과 헬레니즘(Hellenism)

  알렉산더의 원대한 꿈은  동방의 인도까지 점령하면서 서서히 실현되기 시작하였다. 그의 꿈은 다름아닌 동서 세계의 통합(Cosmopolitanism)이었다. 그의 이상은 희랍의  스토아(Stoa) 철학에 기초한 것으로써  '하나의 세계', '하나의 시민권'을 꿈꾸는 통합을 중요한  개념으로 이해하였다. 나아가 그의 동서 문화의 통합이라는 꿈은 단지 한 문명이 다른 문명을 침식하고 정복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문화를 통합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자연히 발생하게 되는 혼합주의(Syncretism) 현상을 그 바탕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특징의 사상 체계를 헬레니즘(Hellenism)이라 부른다.
이러한 꿈은 그가 비빌로니아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33세의 젊은 나이로 죽게 되면서 직접적인 실현의 빛을 보지는 못하였으나, 그의 영향력은 수 백년동안 동서양의 사상적, 정치적, 경제적 교류의 길을 열어 놓았다.
  특히 팔레스틴은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이러한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는 길목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으며,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유대인과 비유대계 그룹간의 정치적 사건,  종교적 경향, 사회적 특성, 문화적 혼합등의 상호 작용을 통하여 급진적인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이 시기에 쓰여진 벤 시라(Ben Sira)서는 헬라 문화가 유대  전통 문화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유대인들은 헬라 문화와의 접촉과 헬라 사고 방식의 흡수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편, 알렉산더와 그의 후계자들은 그의 사상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파해 가기 위하여 도시(Polis)를  건설하고, 도시 문화를  정착시켜 나갔다. 시민들에게 시민권(Politeia)을 부여하고,  원로원을 두어 소위 민주  의회 제도를 정착시켜 나갔다.
  도시는 극장,  목욕탕, 경기장, 및 체육관의  시설을 갖춘 헬라식으로 건설되었다. 이 시기에  건설된 헬라식 도시로는 세바스테(사마리아), 프톨레미(악고,행21:7), 스키도폴리스(벧산), 필라델피아(암만)등이 있다.
  확산된 그리이스  문화 중에서 가장  결정적인 영향력은 헬라어(Greek)를 통하여 퍼져나갔다. 이오니아 방언이 가미된 아틱(Attic) 방언인 코이네(Koine)는 새로 출현한 세계의  공용어로 발전하였으며, 근동에서  사용되던 아람어(Aramaic)를 밀어내고-물론 얼마간은 이중 언어(lingua  franca)로 남아 있었지만- 정치와 행정, 상업과 철학을 위한 언어로 자리잡아 갔다.
  팔레스틴에 많은 그리이스의 문학과  신화가 소개 되면서 당시 시민들의 생활 양식, 신앙, 철학 등은 바뀌어  나갔다. 그들의 이름은 점차 헬라식 이름이 가미된 이중 이름을 가지게 되었으며, 도시의 이름들로 바뀌어 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유대인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헬라 문화와 사상은 그들로 하여금 그 문화에  몰두하도록 하여 유대인의 고유한 율법과 관습을 저버리도록 만든 경우도 많았으며, 이러한 태도에 심한 적개심을 가진 전통적인 유대인들도 생겨나게 되면서 점차 두 계층간의 심각한 위기 상황의 국면으로 달려가게 되었다.

③ 알렉산더의 후계자들(Diadochi)
  323년 B.C.E. 알렉산더 대왕의 갑작스러운 죽음 후 마게도니아와 그리이스의 장군들의 권력 장악을  위한 투쟁은 시작 되었다. 소위 힘겨루기에서 승리한 자들을 헬라어로 디아도키(Diadochi)라  부르는데, "후계자"라는 뜻이다. 알렉산더의 고향 마게도니아를 차지한 안티고누스(Antigonus)와 이집트 및 리비아를 차지한 프톨레미(Ptolemy),   그리고   시리아-팔레스틴과   페르시아를   장악한  실룩커스(Seleucus)가 그들이다.
  프톨레미와 실룩커스 왕국 사이에 위치한 팔레스틴은 320년 B.C.E.부터 프톨레미의 지배를 받아 오다가 200년 B.C.E.부터는 실룩커스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팔레스틴은  일종의 자치구로써 게루시아(Gerousia) 라  불리우는 원로회에 의해 통치되었다.

㈎ 프톨레미 왕조(320-200년 B.C.E.)
  헬라어로 '전사(전사)'라는  의미의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는 알렉산더의 가장 유능한 장군 가운데 하나였다. 알렉산더가 죽자 그는 재빠르게 이집트를 장악하였으며,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정하고  팔레스틴 정벌을 나섰다. 312년 B.C.E. 가자에서 승리한 그는  예루살렘과 유다를 차지하면서 그 세력을 시리아-팔레스틴 전지역으로 뻗어 나갔다. 그는 상당수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을 이집트로 끌고가 리비아의 동북부에 정착시켰다.
  그는 마게도니아의 안티고누스로부터 공격을 당하였으나 격퇴하였으며, 페니키아 해안의 통치권을 확보하였다.  그의 후계자인 프톨레미 I세(306-285년 B.C.E.), 프톨레미 II세(285-246년 B.C.E.), 그리고 프톨레미 III세(246-221년 B.C.E.)로 이어지는 왕조는 셀룩시드 왕조와 경쟁 가운데 고대 이집트의 땅을 헬라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만들어 갔다.
  그 가운데서  프톨레미 왕조의 수도인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는 가장 왕성한 상업과 무역, 놀라운 문화를 이룩하였으며, 당시 수 십 만권의 장서를 갖춘 도서관(Museion)은 너무나 잘 알려진 곳이었다. 또 이곳에서는 프톨레미 II세의 명령으로 히브리어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되어 희랍어 성경(Septuagint,LXX)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희랍어 성경의 출간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간의 의사 소통을 위한 길을 열어 놓는 계기가 되었으며,  동시에 헬라 사상이 유대인들의  정신 세계에 영향을 미칠 길도 마련된 것이었다.
  이 시기의 유대인의 이집트 거류는 급속히 증가하였으며, 프톨레미 1세는 다수의 유대인을 이집트의 용병으로  데려가 거주시켰다(아리스테아의 편지 4:12). 알렉산드리아는 흩어진 유대인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이집트의 도처에 흩어져 살았다.
  팔레스틴 자체는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조에게 있어서 그리 중요한 곳이 되지 못하였다. 다만 페니키아 지방의  풍부한 삼림(삼림) 자원을 이집트 지역으로 옮기기 위해 악고(Acco)라  불리우던 항구를  크게 만들면서  프톨레미아(Ptolemia, cf.행21:7, "돌레마이")라 칭하였다. 해안과 내륙을 연결하는 도로가 건설되면서 팔레스틴은 행정적,  경제적 발전의 기초를 놓아갔다.  이집트에서 발견된 제논 파피루스(Zenon Papyri) 는 이러한 팔레스틴의 경제 및 행정 상황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예루살렘은 이러한 프톨레미 왕조의 정책에 의해 마치 중심부에서 격리된 성역처럼 취급되었으며,  유대인의 정신적 지도자인  대제사장에 의해 상당히 자치적으로 다스려 졌다. 대제사장은 매년  약 20달란트를 황실에게 지불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정치적, 종교적 권한을 모두 가지고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를 보내고 있었다.
주전 3세기 말, 셀룩시드 왕조의 안디오커스 III세(Antiochus,222-187년 B.C.E.)는 예술 애호가요 여성 찬미가인 프톨레미 IV세(221-204년 B.C.E.)를 공격해 왔다.
  프톨레미 IV세는 218년  B.C.E. 라피아(Raphia)에서 그들을 격퇴시키는데는 성공하였으나, 프톨레미  왕조 내의 귀족들은 서서히  반기를 들기 시작하였으며, 왕국은 점차 쇠퇴해 갔다.
이 때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인 오니아스 III세(Onias)는 매년 내는 황실세를 중단하였다. 그러자 프톨레미  왕조는 유다를 군사적 식민지로 만들겠다고 위협하였다.
이 때 재력있는 토비아  가문의 요셉(Joseph,son of Tobias)이 황실세를 대신 비불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셀룩시드  왕조의 공격은 급기야 200년 B.C.E. 프톨레미  V세(204-180년 B.C.E.)를 팔레스틴으로부터 몰아 냄으로써 팔레스틴은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게 되었다.

㈏ 셀룩커스 왕조(200-167년 B.C.E.)
  200년 B.C.E. 파네이온(Paneion)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안디오커스 III세(222-187년 B.C.E.)는 팔레스틴에서 100년을 통치하던 이집트의 프톨레미를 쫓아낸 후 소아시아, 트로이카, 및 마게도니아로 진격하였다. 동쪽으로부터 서쪽으로의 정복 길인 셈이었다.
  그러나 그는 패전을 거듭하면서 엄청난 전쟁 배상금의 부채를 안고 187년 B.C.E. 엘리마이스(Elymais)에서 암살 당하고  말았다. 선왕의 부채를 안고 후계자의 자리에 오른  셀룩커스 IV세(187-175년 B.C.E.)는 그의  동생이었다. 그는 부채를 값기 위해 예루살렘의 성전 금고를 탐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팔레스틴을 정복한  안디오커스 III세는 이집트의 프톨레미 V세를 자신의 사위로 삼아 예루살렘으로부터 받던  황실세를 계속 받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지도록 하였기 때문에, 이  일을 맡았던 토비아 가문의  요셉은 계속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셀룩커스  IV세가 등극하면서 예루살렘의 성전 금고를 탐내게 되면서 유다의 귀족들과의 정치적 갈등이 시작되었다.
  당시 예루살렘의 성전  금고는 요셉의 아들 힐카누스(Hyrcanus)가 관리하고 있었는데, 시리아의 총독  헬리오도로스(Heliodorus)는 예루살렘 민중의 소요와 반감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 일을 중단하였다. 유대인들은  이 일을 기적으로 축하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헬리오도로스는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하여 셀룩커스 IV세를 암살한다.
  그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동생 안디오커스 IV세(175-164년 B.C.E.)는 그의 선왕이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패전하면서 얼마동안 로마에 볼모로 잡혀갔던 적이 있었다. 귀국길에 헬리오도로스의  음모에 관한 소식을 접하고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삼아 왕위에 오른 것이다.

  그는 선왕의  정치 노선을  이어 받았다. 나아가  스스로를 제우스의 에피파네스(Epiphanes,"신의 현현")라 불렀으며,  자신을 올림피아의 제우스로 숭배하도록 하였다. 그는 예루살렘에 제우스 신전을 짓고 이러한 자신의 정책을 시행하기 위하여 문화적, 종교적 강압 정책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그의 정책이 토착 종교를 탄압할 의향을 가지고 시작된 것은 이니었다 할찌라도, 과거로부터 전승되어 오던 소수 민족의 토착 제의를 헬레니즘적인 삶의 양식으로 대치시켜 나갔다는 의미에서 격력한 반발을 불러 일으킬 만한 정책이었음은 확실하였다.
  이러한 그의 정책은  예루살렘의 개방적인 헬라주의자들에게는 협력과 지지를 얻었으나, 유대 율법에 충실한 자들에게는 심한 반대에 부디치기 시작하였다. 적어도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안디오커스는 가장 나쁜 폭군이었다. 나아가 프톨레미 왕조의 정책과는 대조적인 셀룩시드  왕조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감은 서로 다른 이상을 가진 유대 민족  내의 서로 다른 계층간의 갈등을 자극하였으며, 급기야 시민전쟁으로 비화되기에 이르렀다.

(4) 마카비(Maccabee) 전쟁(167-164년 B.C.E.)
① 마카비 전쟁의 배경
  안디오커스 4세는 이집트 원정을  떠나기 전에 먼저 유다의 헬라화 정책을 발표하였다. 보수적인  사독 계열의  대제사장 오니아드(Oniads)  3세의 동생 야손(Jason)은 그의 형과는 달리 매우 진보적이고 헬레니즘적인 성향을 가진 자였는데, 그는 왕에게 헬라화를 위한  일련의 조치들을 제안하면서 174년 B.C.E.에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II Macc.4:1-9).  야손은 예루살렘 성안에 경기장(Gymnasion) 과 청년 훈련소(Ephebeion)를 건축하고,  청년단을 결성하는 권한을 얻는 조건으로 왕에게 150 달란트를 바쳤다(2 Macc.4:9). 그는 온갖 형태의 헬라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였다.
  안디오커스(Antiochus) IV세가 제1차  이집트 원정(170-168년 B.C.E.)에 나간 사이에 야손은 171년 B.C.E. 성전 경비 대장의 형제요 사제 가문(Zadokite)에 속하지 않았던 마넬라우스((Menelaus)에 의해 축출되었다. 그 역시 왕에게 돈을 바치고 대제사장의 직을 사들인 자였다(2 Macc.4:23-26). 그의 임기 동안 예루살렘은 그리이스식 도시로 건설되었으며,  체육 학교(gymnasium)를 세워 유대 청년들에게 그리이스의 운동 경기를 보급시켰다.  또한 왕에게 약속했던 뇌물을 조달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성전의 기물들을 내다 팔기 시작하였다(II Macc.4:27-32).
  제2차 이집트  원정(168년 B.C.E.)을 실패하고  돌아온 안디오커스 4세는 자신의 실추된 정치적 위신과 경제적  부담을 해결하기 위해 팔레스틴의 땅과 민족을 제의적으로 헬라화 시키는  종교 정책(1 Macc.1:41-51)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예루살렘성전    위에  '파멸의 우상'(shikutz  meshemem)을 세웠으며,  율법책을 불살랐다(1.Macc. 1:54-57). 그리고 성전의  기물들을 약탈해 갔다. 이러한 종교 정책의 목적은 반유다적(anti-semitic)이라기 보다는  그 당시의 만성적인 재정 적자의 상황과   그  때에   사용된  방법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바와   같이  반이집트적(anti-Egyptian)이고 친시리아적(pro-Syrian)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그동안 헬라주의자(Hellenizer)와 전통주의자들 사이의 종교-문화적 갈등과 계층간의 정치적 대립의 양상을 폭발시키는 작용을 하였으며, 이는 안디오커스 3세로부터 어느정도 보장된 유대인의 종교적  자유를 빼앗는 명백한 배교 행위로 간주 되면서 유대인들은 일종의 문화 투쟁을 벌였다.
  더우기 정통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분노는 훨씬 더 커서 이 행위를 '황페케하는 가증한 일'(단11:31;12:11)로 규정하였다. 이것은 종교적 자유를 위한 투쟁의 성격의 것이었다. 이러한 저항은 느헤미아와 그를 따르던 자들이 행했던 개혁 운동의 영향을 받은  자들에 의해 진행되었다. 그들은  율법에 충실한 자들로써 제사장 가문의 출신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러한 저항은 마따디아의 다섯 아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후 그의  아들  중  가장  유명한  유다 마카비(Judas Maccabee)의 이름을 따서 '마키비  일가', 혹은 '마카비 전쟁'이라고 일컬어 졌다.
이 가문은 귀족에 속하지 않은 지방의 사제 가문으로서(1 Macc.2:1) 토비아 가문과는 달리 헬레니즘화를 거부하였다.
  결국 유대의 헬라화 과정은  두 집단 사이의 적대 행위에 의해 이용되었으며, 두집단 사이에 있었던 많은  유대 백성들은 분명한 입장에 서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전쟁은 유다와 헬라와의 대결이라는  형식보다는 유다 공동체 내의 헬라주의자들(Hellenizing Party)과 민족주의자들(National Party) 간의 시민 전쟁(Civil War)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특히 헬라의 정책에 동조하면서 개인의 이익을 누리던 제사장을  포함한 귀족 계층들은 종교적으로 전통적인 율법에 대한 이해를 크게 달리하면서 헬라화 정책에 앞장섰으며, 그들은 헬라식 교육과 생활을 장려하던 자들로서 헬라 문화를 통한 유대교의 개혁을 부르짖었다. 이에 반대하는 전통주의자들은 적극적으로 이에  맞서 급기야 시민 전쟁의 양상으로 번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마카비  전쟁에 관하여 적고 있는 마카비서에서 가장 잘 나타나 있다.

② 유다 마카비, 요나단, 시몬(167-141년 B.C.E.)

  167년 B.C.E.안디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는 정치적,문화적 통합(unification)을 목적으로 다음과 같은 칙령을 내렸다:
*유대인들은 이교도들의 관습을 따를 것.
*성소 안에서 제사 행위를 금함.
*안식일과 기타 축제일을 지키지 말 것.
*성소와 성직자들을 모독할 것.
*이교의 제단과 성전과 신당을 세울 것.
*돼지와 부정한 짐승을 희생 제물로 잡아 바칠 것.
*사내아이에게 할례를 주지 말 것.
*음란과 더러운 일로 스스로 몸을 더럽힐 것.
*율법서를 저버리고 모든 규칙을 바꿀 것.
*이상과 같은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1 Macc.1:44-50).

  이 무렵 모디인(Modi'in)에는  마따띠아(Mattathias)라 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제사장 가문의 아들이었다.  그는 정부가 파견한 제의 관리들에게 "왕의 영토에 사는 모든 이방인이 왕명에 굴복하여 각기 조상의 종교를 버리고 그를 따른다 작정하였다 하더라도 너와 내 아들들과 형제들은 우리 조상들이 맺은 계약을 끝까지 지킬 결심이오"(1 Macc.2:19-20)라 말했다.  이에 개의치 않고 제의를 드리려고 나선 한 유대인을 쳐  죽이고, 이어 왕의 사신까지  죽여 버렸다(1 Macc.2:23-26). 그는 그의 다섯 아들을 데리고  유다 광야로 나아가 그곳에서 의병을 조직하고 헬라주의의 신봉자들과 맞서 싸웠다.  그들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종교의 자유와 예루살렘에서의 성전 제의의 회복이었다. 이  때 율법에 열심인 하시딤(Hasidim) 도  합세하였다(1 Macc.2:42;cf.단11:33).
  166년 B.C.E. 마따띠아가 유언을 남기고 죽은 후  그의 세째 아들인 유다 마카비(Judas Maccabee,166-160)가 지휘관이 되었다.  그는 그가 전사한 160년까지 "사자처럼 용맹했다"(1 Macc.3:4). 그는 종교적인 인품보다는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역량을 가진 유다 민족의  영웅이었다. 그와 그의 군대는 유다의 여러 도시를 다니면서 "하나님을 배반한 자들"(1 Macc.3:8)을 찾아 진멸시켰다. 시리아의 군대 장관은 리시아(Lysias)였으며, 그에게는 "하나님을 배반한 유대인들"(1 Macc.3:15)이 따르며 전투에  참여하였다. 유다 마카비는  벧 호론(Beth-Horon), 엠마오(Emmaus), 벧쥬르(Beth-Zur)등지에서 승리하였다(1 Macc.3:10-4:35).
  이어 예루살렘에서 "황폐케하는 가증한 것"인 제우스 제의를 제거하였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가증한 것이 들어  선 이 후 3년 반(단7:25,cf.계12:6)만인 주전 164년 12월 25일에 레위인의 희생 제사를 부활시킨 것이다(1 Macc.4:36-58). 이를 기념하는 축제가 해마다 열렸는데 그것이 바로 하누카(Hanukkah), 즉 성전 봉헌일이었다(1 Macc.4:59; 요10:22; 2 Macc. 10:1-9).
  주전 164년 안디오커스  4세가 페르시아에서 갑자가 사망하자(1 Macc.6:1-16) 그의 뒤를 이어 등극한 안디오커스 5세(164-162 B.C.E.)는 그의 나이 겨우 10세였다.
  이 때 시리아의 군대  장관 리시아(Lysias)는 섭정관이 되어 유다 반란군을 본격적으로 토벌하기 시작  하였다. 그들의 군대는 벧 사가리야(Beth-Zacharia)를 격파한 후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1 Macc.6:28-54).  그런데 바로 이 때 왕위를 노리는 리시아의 정적(정적) 필립비(Philippi)가 페르시아로부터 시리아를 공격해 오자 리시아는 급히 철군하고 말았다(1 Macc.6:55-59).
  이어 셀류커스의 아들 데메드리오 I세(Demedrio I,162-150)가 등극하면서 헬라주의자 알키모스(Alcimus)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1 Macc.7:9). 또 그가 임명한 니가노르(Nikanor) 장군은 사정없이 유대인을 공격하였다. 예루살렘을 포위한 그는 벧  호론   전투에서  사망하게  되는데,  유대인들은   이  날을  나카노르의  날(Nikanor'day)로 경축하였다(1 Macc.7:50).  그러나 그 후 얼마동안 유지된 그들과 의 평화는  주전 160년  베레아 전투에서  이스라엘의 영웅  유다 마카비가 전사(1Macc.7:1-9:22)하게 되자 곧 깨어지고 말았다:"유다가 죽은 후 이스라엘 전 영토에서 율법을 저버린 자들이 머리를 들기 시작하였고 악을 일삼는 자들이 사방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1 Macc.9:23).
유다 마카비의 후계자는 그의 막내 동생 요나단(Jonathan,160-142년  B.C.E.)이었다(1 Macc.9:28-12:53). 그는 형 유다와는 달리 그가 지닌 비상한 외교술로 그가 활동하던 기간에 일어난 국제 정치의 변화에 매우 적절히 대응하였다. 즉 셀류커스 왕가의  데메드리오  1세  보다  안디오커스  왕가의  알렉산더  발라스(Alexander Balas,150-145 B.C.E.)에게 더 접근하면서 이익을 취하였다. 또 로마와 스파르타와의 관계를 맺으면서  국제 정치의 변화에 적절히  대처하였다. 그는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였는데 데메드리오 I세가 화친을 요청하면서 얼마간의 평화의 기간을 맞이한다. 요나단은 152년 B.C.E.  예루살렘 성을 수축하고 맞은 초막절에 스스로 대제사장(kohen hagadol)이 되어 사제복을 입었다(1 Macc.10:21).  이로써 마카비 일가의 힘은 견고해 졌으며, 이어 주전 150년에는 요나단이 왕으로서 자색 옷을 입고 당당히 나서게 되었다. 이로써  일각에 왕과 대제사장의 역할을 한 몸으로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헤스모니안 일가가  유다의 공식적인 통치권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게  된다. 동시에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진 후 계속되어 오던 사독 가문의 제사장의 전통은 무너지게 된 셈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외교적 기술은 한계를 가지게  되었다. 왕이 되려는 야망을 가진 시리아의 야전군 사령관인 트리폰(Tryphon)은 요나단을 매우 강력한 경쟁자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주전   143년   벧  산(Beth-Shean),   즉  스키토폴리스(Scythopolis) 전투에서 요나단을 포로로 잡아 처형하였다(1 Macc.12:39-53).
  요나단의 뒤를 이은  시몬(Simon,142-135년 B.C.E.)은 요나단과 유다  처럼 많은  성과를 올렸다.  특히  그는  요나단과는 정  반대로  데메드리오 2세(145-138B.C.E.)와  동맹을 맺으면서  그로부터 세금을  면제  받는 특권을  얻게 되었다(1Macc.13:31-40). 무엇보다도 시몬은 "유대인의 대사제(haKohen haGadol, s)이며, 사령관(sar haTzaba,   s)이며, 지도자(nasi'  Hayehudah,   s)"(1 Macc.13:41-42)로 불리우게 되었으며, 이것은 곧 이스라엘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는  독립적인 화폐를 주조하였으며(1 Macc.15:6), 이 주화들은141-136년 B.C.E.경부터 사용되었다. 주화의 표면에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이면에는 한 세겔 또는  반 세겔의 액면이 부각되었다. 이로써 모디인에서의 반란 이후 25년간의 전쟁이  끝나고, 주전 586년 예루살렘이 멸망한  이 후 약 444년 만에 처음으로 주전  142년에 다시 독립국가를  세우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79년 동안(142-63 B.C.E.)에 걸친  헤스모니안 왕국(Hasmonean Kingdom) 의 자유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종교적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이들의 노력은 '정치적 자유'를 얻는데까지 이른 것이다.
  시몬은 그가 이끄는 군대를  욥바(Jaffa)에 보내 안디오커스 IV세 아래 주둔하고 있던 외국인들을 몰아 냈으며, 게젤(Gezer)을 점령하고 그곳에 자신의 왕궁을 짓고 (I Macc.13:43-48), 그의 아들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를 그 도시의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나아가 시몬은 141년 B.C.E.예루살렘 요새를 점령하고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환호소리도 드높게  비파와 꽹과리와 거문고 소리에 맞춰 찬미와 노래를 부르며 요새안으로 들어왔다"(I Macc.13:51). 이 날을 경축일로 정하여 지켜 나갔다.
  또 시몬은  로마와 스퍼르타와 동맹을  갱신하였으며(I Macc.14:16-24), 온 유다백성들은 모여  시몬에 대한 찬사를  보내며 그의 지도에  따를 것을 다짐하였다(IMacc.14:25-49).
이러한 번영과 평화의 시대는 1 Macc.14:8-15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들은 "...백성은 평화롭게 자기 땅을  가꾸었고,...노인들은 거리에 나와 앉아 이야기 꽃을 피우며 태평세월을  구가하였고...율법을 저버린  자들(poshe'i batorah)과 악한들을 모두 없애 버렸다.성전을 아름답게 꾸미고 기물들을 많이 갖추어 놓았다"고 적고있다. 이는 마치 묵시문학적 환상(암9:11-15;미4:4;사32:15;35:1-10등)의 성취된 모습으로 느껴질 정도이다.
  마카비의 다섯 형제가 영웅적인  헌신으로 싸우던 30년간의 마카비 전쟁은 134년B.C.E. 시몬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지마는 존폐의  위협에 놓였던 이스라엘을 구한 영웅적인 기간이었으며, 유다는 다시금  종교적 자유와 더불어 정치적 자유를 이룩한 한 왕조의 막을 열어놓은 계기를 마련하였다.

② 미쉬나(Mishnah)
㈎ 미쉬나의 형성과 특징
  제2차 성전 멸망 이후  율법에 대한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구전으로 내려오던 현자들의 많은 가르침이 마침내 기원 2세기 말경 수집되어 기록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편집된 책이 미쉬나(Mishnah)이다.
  미쉬나란 히브리어로  '반복한다','연구한다'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성경, 특히 토라의 해설인  미드라쉬(Midrash), 그리고 토라와 상관없이 내려온 전통적인 법과 규례에 관한 설명인 할라카(Halaka)가 포함되어 있다. 미쉬나 편집을 위한 수집과 편집 작업은 '미쉬나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야브네의 아키바(R.Akiva)와 여호수아(R.Yoshua ben  Hananya), 엘리에젤(R.Eliezer ben Hyrcanos),메이르(R.Meir)   및    그의   동료로부터    시작하여   유다    나시(Rabbi   Judah Ha-Nasi,c.180-220년 C.E)가 담당하였으며, 여러 시대에 걸처 수백명의 랍비들에 의해 첨가, 수정되어 최종 확정되었다.
  미쉬나가 취급하고 있는 내용은 매우 다양할뿐 아니라 상호 대조되는 자료들이 함께 편집되어 있다. 미쉬나의 마지막 편집자의 목적은 법규를 변경할 수 없도록 최종 확정 짓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 가능한 해석들을 종합하여 나타내고자 함에 있다. 그런점에서 미쉬나는 법 교재라기보다는 문학 작품으로 규정된다.
  표현의 방식이나 특징에 있어서 현자와 랍비간의 대화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들이 선택하고 사용하는  어휘나 문장은 취급하는 내용과 더불어 미쉬나의 문학적 가치를 잘 대변해  주는 증거가 된다. 나아가 자주 사용하고 있는 두운법(alliteration),  교차배열법(chiasmus),  반복법(repetition),  그리고  대구법(parallelism)등의 많은 수사학적 표현  방식 역시 미쉬나의 문학적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미쉬나의 편집 원칙은  할라카를 한 법전으로 묶는다는 의도 하에서 이루어  졌으며, 특별한 교육적  원칙에 의해 좌우되었다. 아카데미아에서 구두로 가르쳐온 내용을 체계적으로 묶는 작업  자체가 교육적 기능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기 때문에 교육적 원칙이 편집의 원칙 가운데 중요하게 인정된 것이다. 이러한 의도 하에서 다음의 몇 가지 편집 원칙을 정리해 볼 수 있다:
(1) 미쉬나는 익명(익명)이 많이  사용되는데, 이는 특정한 주제와 가르침이 특정한 상황의 제약을 가능한한 받지 않도록 보편화하는 과정을 반영한다.
(2) 토론 과정에서 상호 다른  입장과 의견이 소개된다. 경우에 따라서 다른 견해를 매우 길게 소개한다. 이러한 과정을 학생이나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경험하고 선택하도록  함으로써 최종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보다 자연스럽고 확실하게 해 나간다.
(3) 각기 다른 장소에서(경우에 따라서  각기 다른 시대에) 이루어진 복잡한 토론을 소개한 후  이를 한 대화의 형식으로  묶은 다음 최종적으로 의견을 결정할 때 가장 권위있는  랍비를 내세워 토론을 종결하는  형식을 따르고 있다. 따라서 각기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  각각 살던 랍비들이 같은 토론의 한마당에 등장하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4) 한 주제의 최종 결론을  얻어 내기 위하여 매우 폭넓은 다양한 자료를 선택하여 취급하고 있다. 이는  아카데미아에서 가르치기 위하여 사용된 많은 자료를 그대로 선택하여 기록함으로써 교육적 효과를 유지하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 미쉬나의 구조
  미쉬나는 모두 6개  조(조,Orders,sedarim)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 조는  몇  개의  항(항,tractates,massekhtot)으로,  각  항은  다시  몇 개의  장(장,chapters, perakim)으로, 각  장은 다시 몇 개의 절(절,mishnayot)로 나누어 진다.
전통적인 미쉬나의 편집에 따르면  모두 6조 63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3세기에 60 항으로 최종 확정, 편집되었다. 

③ 탈무드(Talmud)
  3세기 중엽에 미쉬나가 완성된 후 약 2세기 반에 걸쳐 미쉬나에 대한 주석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  시기를 우리는 탈무드 시대(Talmudic Period)라 부른다. 히브리어의 '탈무드'란 '라마드'(lamad,"연구하다"), 림마드(limmad,"가르치다" 또는 "주석하다")라는 말로 이전부터 계속되어 온 주석과 가르침을 총괄적으로 포함하는 어휘이다. 탈무드는 그런 의미에서 미쉬나의 주석일뿐 아니라, 미쉬나의 확장이라고 볼 수 있다.
  탈무드에는 [팔레스틴 탈무드]와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있다. 이 두 탈무드는 각각 편집 시기와 장소가 다르다 하더라도 둘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니다. 팔레스틴 탈무드의  가르침과 내용이 바빌로니아 탈무드에서 발견되기도 하며, 편집 구성에 있어서  모방이 있기도 하다. 또, 바빌로니아에서 팔레스틴으로 건너온 랍비들이 큰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두 탈무드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역시 편집 형식과 내용이다. 편집 형식에 있어서 팔레스틴 탈무드가 보다 단순하며, 여러 조항의 차이를 보인다.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보다 후기에 편집되었기 때문에  팔레스틴 탈무드보다 후기 자료가 재편집되어 첨가되어있다. 전승에 대한 해석에 있어 두 탈무드는 각각의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상황의 차이때문에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 팔레스틴 탈무드
  4세기 말에 완성된 팔레스틴  탈무드는 팔레스틴 내에 있던 많은 아카데미의 현자들의 할라카적 가르침과 결정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초기의 가르침이 비교적 원형의 변경없이 기록되어 있으며, 역사적 구성과 문학적 표현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특히 제한된 주제의 토의를  하나로 묶은 Sugya("과정")라 불리우는 문학적 단 위는 탈무드  시대의 모든 문학적 성격을  규정짓는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점에서 팔레스틴 탈무드의 가장 특징적인 가치가 있다.
  아모라 시대에 팔레스틴의 가장  중요한 토라 연구 도시로는 갈릴리 지방의 티베리아(Tiberias)와   지포리(Sepphoris),   남쪽의 룻다(Lydda)와   가이사랴(Caesarea)이다. 특히 로마  총독부가 자리잡은 지중해의 가이사랴는 4세기 중엽 팔레스틴 탈무드의 가장 오래된  자료의 편집 장소로도 잘 알려진 학문의 도시였다. 탈무드의 초기 편집  자료인 Bava Kamma, Bava Metsia, Bava Bartra등은 "가 이사랴의 탈무드"라고 불리워지며,  이는 보다 후기에 티베리아에서 편집된 탈무드의 자료를 "티베리아 탈무드"라  부르는 것과 비교된다. 팔레스틴 탈무드의 대부분은 최종적으로 4세기 말 티베리아에서 편집되었다.
  티베리아에서 편집이 종료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한 학파의 작품이라는 뜻은 아니다. 지포리, 룻다 및  가이사랴의 학자들과 랍비들의 각기 다른 해석과 주석이 종합되었을 뿐이다.  이 곳에서 편집된  팔레스틴 탈무드는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완성된 이 후에도 팔레스틴과 이집트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탈무드로 그 권위를 인정 받아  왔을 뿐만 아니라, 남부 이탈리아와 소아시아 지역에 이르는 유대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7세기 팔레스틴이  모슬렘에 의해 정복되고, 8세기 바그다드(Bagdad)가 칼리프(Caliph)의 수도가 되면서  바빌로니아의 영향력이 아랍 세계는 물론 모든 유대인의 문화에도 지대하게 미치면서, 팔레스틴  탈무드의 권위와 지위는 점차 바빌로니아 탈무드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스페인과 남부 프랑스 등지에서는 11세기에도 팔레스틴 탈무드에 관한  언급을 계속하고 있음이 확인되고 있으나, 팔레스틴 탈무드의 영향력은 바빌로니아 탈무드에게 거의 넘겨주게 된 셈이었다.

㈏ 바빌로니아 탈무드
  제1차 성전이 멸망하고 유다의  귀족과 중요한 역할을 해 오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간 후부터  바빌로니아는 유대교의 중요한 장소로 그 기초를 놓아 갔다. 특히 페르시아 고레스의 칙령 이 후 예루살렘으로 귀향한 바빌로니아 유대인 공동체는 새로운 유다  건설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팔레스틴과 바빌로니아 사이의 많은 인적, 물적 교류와 더불어 학문적 교류 역시 빈번하였다.
  그러다가 제2차 유대  반란 이 후 팔레스틴의  정치적 상황이 바빌로니아의 그것에 비하여 보다 억압적이었으며,  유대인의 자유로운 학문 연구를 보장해 주지 못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바빌로니아의  유대인 공동체가 자료 전승과 관리 및 체계적인 학문 연구에  보다 유리한 조건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빌로니아의 중요한 현자들이  팔레스틴으로 건너가 팔레스틴의 토라 연구의 주도권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초기  바빌로니아  유대인  공동체의  중심은  메소포타미아  북쪽의 니시비스(Nisibis)와 중부의 네하르데아(Nehardea)  및 후잘(Huzal)이었다. 그 후 아모라시대에는 중부의 네하르데아와 품베디타(Pumbeditha), 그리고 남부의 수라(Sura)와 마타 메하시아(Matha Mehasya)등으로 그 중심이 이동해 왔다. 그리고 지역 사이의 도시인 마호자(Mahoza)와 나레쉬(Naresh)등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도시들에서 이루어진 미쉬나에 관한 토론과 해석은 팔레스틴 학파의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각각의 지역이 서로 다른 정치적, 문화적 상황 속에서 이해되고 해석되었기  때문이며, 때로는 두 지역간의 권력 다툼에서 온 결과라고 여겨진다.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독특한 성격 가운데 하나는 특정 자료의 주제를 해석함에  있어 모든 해석의 가능성들을 변증법적으로 주도면밀하게 정리하였다는 점에 있다:
  미쉬나에 나오는 용어의 새로운  개념을 많이 정리해 놓았으며, 각기 대비되는 가르침이나 해석들을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찾기 위한 목적을 향해 교묘하게 조직적으로 정리해 놓았다. 이  과정에서 가르침의 용어들을 재해석하는 기술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보다 포괄적으로 발전된 해석을 가능케 하도록 유도한다.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편집에 관한 문제는 아직까지 정확하게 해결되지 않은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전승에 의하면 아쉬(Rav Ashi,d.427년 C.E.)의 '가르침'을 마지막으로 편집이 끝난 것으로 알려져 있어(b.Bava Metsia 86a) 그가 곧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최종 편집자로  인정되어 왔으나, 그 이 후에도 여러 차례의 편집과정이 지속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팔레스틴 탈무드가 완성된  후에도 오랫동안 계속적으로 발전해온 것은 후기 유대  전승에 있어서 그것이 최고의 권위를 갖게된 원인으로 작용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보다 방대한  문학 작품으로써 방대한 주석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중요성을 가중시켰으며, 결국 일반적으로 탈무드(The Talmud)하면 바빌로니아 탈무드를 지칭할 만큼 되었다.
  바빌로니아가 아랍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아랍문화의  중심지가 되면서 유대문화의 명성이 퍼져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점차 아랍의 억압이 심화되어 가면서 그 역할이 위축되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무드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종교, 사회사에 있어서 민족적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가장 강력한 도구로써 작용하였으며, 이방 세계 안에서  점진적인 붕괴의 과정속에서 살아가는 유대인들의 삶의 뼈대를 놓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7) 콘스탄틴 황제와 유대-기독교 논쟁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변화 가운데 하나는 역시 324년 C.E.로마의 콘스탄틴 황제의 기독교 공인이다.  첫 기독교 황제인 그는 팔레스틴에 정치적, 종교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새 황제는 유대인 사회에서 유대인들의 역할을 제한하였으며, 유대인의 법적 지위는  점차 제약을 받게 되었다. 또한 수많은 기독교의 순례자들이  소위 [성지](Terra Sancta)를  방문하면서 많은 교회를 세우고, 도시에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팔레스틴에 인구 통계학적 변화를 가져다 주기도 하였다.
  특히 유대교와 기독교의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발생한 신학적 논쟁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이제 그 논쟁은 신학적 논쟁이라기 보다는 정치적 쟁점이 되었으며, 신학적 해결 보다는 정치적 해결 쪽으로 기울어 졌기 때문이다. 이제 산헤드린과 회당의 활동은 로마  기독교 법률의 통제하에 머무르게 되었으며, 유대인과 기독교인 사이의 결혼을 금지하는등  이러한 변화는 4-5세기에 이르러 점차 심화되어 갔다.
  팔레스틴에 대한 비잔틴 제국의 통치 방식도 산헤드린을 중심으로 한 유대 자치기구의 역할을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나갔다. 팔레스틴을 세 구역-제1구역(Palestina Prima)은 가아사랴를  수도로 한 유다-사마리아 및 아두메, 베레아 지역으로, 제2 구역(Palestina Secunda)은 갈릴리와 데가폴리스 및 골란으로, 제3 지역(Palestina Tertia)은 페트라를  수도로 한 네겝 지역-으로 각각 나누어 통치하였다. 이러한 통치 정책은 각 지역의 유대인의 활동을 분리 시킴으로써 그 힘을 약화시키는데 기여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책에  반대하며 갈루스(Gallus)에  대항하는 유대인의  반란이 351년C.E. 지포리에서 일어났다. 이  반란은 갈릴리와 룻다에까지 퍼져 나갔으나 예루살렘까지 미치지는 못하였다. 이  반란은 기독교와 교회에 대한 반란이라기 보다는 갈루스의 부도적한 통치 행위에 대한 거부 행위였다.
  이러한 기독교의  세력 하에서 363년 C.E.봄,  콘스탄틴 황제의 조카인 율리안황제(Julian,361-363년 C.E.)의 예루살렘  성전 재건 계획은 당시 기독교에 대한 황제의 공격이었다. 70년 C.E.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은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유대교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로부터 떨어져 나간 증거였다.
  나아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유대인의  성전이 파괴된 채로 남아 있는 한 더 이상 유대교는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하였다.
이 때에 로마의 황제  율리안은 예루살렘에 유대인을 위한 성전 재건을 명령하였으며, 그 공사는 즉각  착공되었다. 그러나 이 공사는 천재 지변(지진)에 의해 즉각 중단되고 말았다. 그리고 율리안 황제는 그로부터 수 주일 후에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말았다. 율리안 황제의  성전 재건의 목적은 기독교의 정당성을 파괴하려는 것이었으나, 이 정책의 실패는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유대교가 하나님에게로부터 버림받았음을 확증하는 사건이었다.
  율리안 황제의 정책과 성전 재건 실패가 기독교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커서 이사건 이 후 로마의 정책을 놓고 벌이는 기독교와 유대교간의 경쟁과 논쟁이 산발적으로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 사건은  기독교와  유대교의 합법성(legitimacy) 문제를 결정 지을만한 중요한 문제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이 후 데오도시우스  1세, 호노리우스, 아르카디우스, 데오도시우스 2세등으로 이어지는 비잔틴 동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기독교 교회를 제국내의 유일한 세력으로 확대시켜 나갔으며, 그 이외의 '이단'(heretics)들을 제거해 나갔다. 유대인 및 유대인  기독교인들의 교리는 이에 속한  것으로 간주되어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8) 산헤드린의 페지와 아랍의 등장
  4세기 말까지는 비교적 유대인의 자치 행정 기구는 원활하게 움직여 나갔으나, 5세기에 들어 서면서 '나시'의 지위는 크게 퇴보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가말리엘(R.Gamaliel)은 기독교 제국의  반유대 칙령들에 대해 크게 반박하면서 미움을 사 415년 C.E.에 강등(강등)되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유대의 '나시'나 지도자들에 대하여 그들의 영적 퇴보와 도덕적 타락을 지적하면서 나쁜  평판을 퍼트려 나갔다. 드디어 429년 C.E. 데오도시우스 칙령은 팔레스틴 내의  산헤드린과 '나시'의 폐지를 선언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교회의 것으로 몰수하고 말았다. 이로써 산헤드린은 성전멸망 이 후 약 3세기 반에 걸쳐 유다의 최고 기관으로 유지되어 오면서 '다윗 가문의 남은자'로서 행한 그 역할을 마감하게 되었다.

5. 팔레스틴의 새주인들
(1) 비잔틴(325-640 C.E.)
  서방 세계가 콘스탄틴 대제(Constantine I,306-337년 C.E.)의 통치를 시작으로 점차 기독교화 해 나가는 동안 유대인들의 지위는 제한되기 시작하였다. 곳곳에 예수의 사역과 관련된  장소를 '성지'(Terra Sancta)로 규정해 나가면서 골고다의 [성묘교회](Church of the Holy Sephuchre)를 비롯하여 베들레헴의 [구주탄생교회](Church  of  Nativity), 그리고  감람산  위의  [승천교회](Church of Ascension)등 많은 교회가 세워졌으며,  비잔틴 세계에서 몰려오는 많은 성지 순례자들을 맞아들이기  시작하였다. 또한 많은  중요한 신학적 교리가 확정되기에 이른다.
  339년 콘스탄틴 2세는 유대인과 기독교인들 사이의 결혼을 금하였으며, 유대인의 경제 활동,  특히 농업 생산에 많은  제약을 가하였다. 유대인의 법적 지위는 점차 제약을 받게 되었는데,  이는 기독교가 반유대적 신학을 설교하고, 그 교리를 정립시켜가는 과정에서 얻게된 하나의 결과였다.
  5세기 초엽 데오도시우스 2세가  통치하는 동안 교회는 빠른 속도로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갔으며, 각종 법령과 행정력으로 교회의 영향력은 커갔다. 특히 팔레스틴에 기독교인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 하면서 열광적인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5세기 후엽에서부터 유스틴 황제(527-565년 C.E.)가 즉위하기까지 기독교는 교회내의 각기 다른 종파간의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문제의 신학 논쟁이 계속되는 동안 팔레스틴 내의 유대인들은 그들의 지위가 어느정도 증진되면서 곳곳에 많은 회당을 짓고  발전을 도모하였으나, 비잔틴의 군사력이 부활되면서 유대인은 보다 많은 박해를 받게 되었다.
  유스틴 황제가 즉위하면서 유대인에 대한 즉각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 유대인의 권리와 재산 보호의  법적 근거를 제거해 버렸으며, 유대교에 대한 지위를 하락시켜 나갔다. 이 시기에 일어난 많은 신학적 논쟁과 더불어 정치적으로 팔레스틴에서는 사마리아인들의 반란(529 C.E.)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가장 중요한 혁신 조처  가운데 하나는 유대법을 국가법과 동등한 규정으로 적용시켜 나갔으며, 기독교 내의  각종 제도를 유대교의 그것들로부터 분리시켜 나갔다. 나아가 성경 해석에  있어서 유대교적인 전통과 관점으로부터 떠나 기독교적인 성경해석 방식에  의해 해석해 나갔다. 이를  위해 유대인의 성경 해석서인 미쉬나를 금서로 지정하기도 하였다.  미쉬나는 하늘의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지상의 인간의 작품이며, 유대 랍비들의 해석은 성경의 가치를 모두 부인하고 있는 까닭이다.
  교황 그레고리 1세(Pope Gregory I,590-604)는 유대인을 기독교인과 맞서 하나님의 선택권을 놓고 싸우는 관계로 규정하고 있다. 그는 욥기를 해석하면서 유대인의 고집스러운 태도를 비판하였다. 기독교는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일을  반복적으로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선택이 유대교로부터 기독교로 옮겨오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유대인은  에서요, 이방인였던 기독교인은 야곱이었다. 동시대의 교부들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기독교와 유대교의 궁극적인 차이를 주장하였다.    그는 이러한 신학적  입장에서 유대인들의 행동을 제약하였다. 유대인의 회당을 새로  짓는 일을 금하였으며, 법으로 기독교인이 되지 않은 유대인들을 차별하였다.
  이러한 비잔틴  시대의 유대인들은 다른 어떤  제국의 통치 기간과 마찬가지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였다. 614년 페르시아가 팔레스틴의 변방에까지 이르자, 과거 바빌로니아에서 페르시아로부터 얻은 유대인의 구원과 같은 갑작스러운 구원을 기대하며  강력한 메시아적 흥분을 가라앉치지 못하였다. "페르시아가 팔레스틴에 이르렀을 때, 유다의 남은 자들은 페르시아와 연합하여 기독교인들과 맞서 싸웠다"(Sebeos,ch.24).  유대인들은 갈릴리로부터  가이사랴, 룻다를 거쳐 614년 5월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을 정복하였다.
  예루살렘을 정복한 페르시아는 기독교인을 추방하고 교회를 파괴하였다. 이 시기에 마르 사바(Mar Saba) 같은 수도원이 불타고 수 천명의 수도사들이 화형되기도 하였다. 예루살렘에 새로 시작된 유대인 공동체의 지도자는 느헤미아 벤 후시엘(Nehemiah ben Hushiel)과  에브라임 벤 요셉(Ephraim ben Yosep)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희생제사를 재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페르시아의 친유대  정책은 3년이 채 못되어 617년 역전되어 친기독교, 반유대인 정책으로  돌아서면서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처형되고 유대인의 지위는 예전처럼 돌아갔다.
  622년 비잔틴의 황제 헤라클리우스(Heraclius)는 군대를 강화하여 페르시아 정벌에 나서  엑바타나 전투에서  승기를 잡고 페르시아의  영토를 되돌려 받았다.
  629년 비잔틴의  황제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기독교의 예루살렘을 복원시켰다. 그는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에게  어느정도의 관대한 조치를 취하였으나 얼마후 성직자들의 강요로 깨어지고 말았다.  성직자들은 황제의 위증죄에 대한 책임을 강요하게 되면서 결국  유대인을 예루살렘과 그 주변으로부터 추방하도록 명령하고 말았다.
  교회는 유대인을  이집트와 주변 사막으로  추방하였으며, 이에 반대하고 나선 유대인들을 처형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박해와 더불어 유대인을 강제로 개종시키는 공적인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적어도 기독교 제국 내의 유대인들은 기독교의 신앙을 거부한 구약의 수호자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이었다.
  이러한 유대인과 기독교인 사이의 갈등은 640년 팔레스틴의 새주인으로 떠오른 아랍의 등장과 함께 종말을 고하고, 유대인들은 이제 수 세기 동안 새로운 "악한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아랍의 등장과 함께 모슬렘과 기독교의 갈등이 시작되었으며, 같은 뿌리를 가진 세 종교와 민족의 갈등은 팔레스틴을 새로운 국면으로 치닫게 하였다.  가장 확실한 변화는 이제  더이상 팔레스틴이 유대인의 삶의 중심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2) 모슬렘(640-1091 C.E.)
  메카와 메디나를 중심으로  무함마드(Muhammad,570-632 C.E.)에 의해 창시된 모슬렘교는 페르시아와 비잔틴 제국을 차례로 정복하고, 바빌로니아로부터 스페인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  1099년  십자군이  들어오기 전까지  움마야드(Umayyad,  661-750), 아바시드(Abbasid,  750-974),  그리고 파티미드(Fatimid, 975-1171)로 이어지는 통치를 계속하였다.
  모슬렘의 등장은 유대인의  기독교와의 갈등이나 증오심과는 다른 성격을 나타낸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갈등이 유대교의  율법의 유효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기독교의 교리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에 비하여, 유대교와 모슬렘의 만남과 갈등은 유일신 사상을 지지하는 두 법전-유대교의 모세법과 이슬람의 코란경- 사이의 긴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역사적으로 유대인 공동체는  아라비아에서 오랫동안 머물러 살면서 이 지역의 이웃 문화와 상당한 접촉이 있어왔다. 특히 아랍인들과는 인종적, 언어적으로 친족이었다. 그런 점에서 모슬렘의 경전인 코란(Koran)은 유대교의 많은 전통과 관습을 보존하고 있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하나님의 "마지막 예언자"로 이해되면서, 그리고 그들의 신이 "유일신 알라"(Allah)로 신봉되면서, 이러한 신앙을 인정할 수 없는 유대인들은 "이단"일뿐만 아니라 이교도였다. "움마"(Umma,"믿는 자의 공동체")에 속하지 않는 자에게는 칼과 순교를, '움마'에 속한 자에게는 완전한 법적 지위를 보장해 주었다.
  638년 예루살렘을 정복한  모슬렘은 예루살렘의 솔로몬의 성전터에 691년 C.E.에 오마르(Omar  ibn al-Khattab,634-644,무함마드의 후계자)  사원(Dome of the Rock)과 710년 C.E.에 엘 악사 사원(El Aqsa Mosque)을 각각 세우면서, 예루살렘은 메카(Mecca)와 메디나(Medina)와 더불어 모슬렘의 3대 성도 중의 하나가 되었다. 한편, 비잔틴 시대에  세워진 많은 교회가 이 시대에 대부분 파괴되며, 이로 인하여 유럽의 열정적인 기독교도들을 자극하여 성지탈환을 목표로 한 십자군 형성의 동기가 된다.
712년 이슬람  제국이 동쪽 인도의  국경으로부터 피레네의 전지역을 통치하게 되면서, 흩어진 대부분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모슬렘의 통지권안에 들어오게 된다. 9세기에  들어 서면서부터 유대인의  지위는 특별히 취급되기 시작하였다.
  유대인의 거주,  이전의 자유가 조금씩 제한  받기 시작하였으며, 상업활동 역시 크게 제약을 받았다.  나아가 새로운 아랍 문화의  영향은 유대인들의 언어 생활 및 종교 생활에까지 미쳤다.  아랍어가 유대인의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완전히 대체시키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10세기의  유대 종교 사상은 대부분 아랍어로 기록되어 있다.
  이 시기의 유대교는 이성주의적 종교 문화적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 플라톤적, 신플리톤적 이성주의가 다양한 유대교의 사상을 설명하는 기준이 되었으며, 대부분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종교 해석의 경향을 띄게 되었다. 이집트에서 태어나 팔레스틴으로  건너와 종교학교(Yeshivot)를 세우고  가르친 사디아 가온(R.Saadiah Gaon,882-942)은 합리주의 종교 사상을 세워 나갔다. 그리스 철학과 아랍 사상의  영향을 받은  그는 [신앙과  견해에 관하여](Book  of Beliefs and Opinions)라는 책을 아랍어로 출판하면서, 이 시대의 이러한 사상적 경향을 가장 잘 대표하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인간의 지성을 모세의 법과 동등한 가치와 지위를 가진 것으로 이해하면서 지성적이지 않은 모든  것을 가치없는 것으로 간주하기도 하였다. 모세 법은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하나의 '전통'으로, 이 전통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의 경험이나 행동에 근거하여 선택된 것이므로 이성적인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이는 가치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아랍의  지배 하에  있던  유대교의  또  다른  하나의  종교 사상은  카라이트(Karaites,"소명자","선전가")라 불리우는  사람들로써, 유대 지도력에 반발하면서 탈무드의  전통을 거부하고  나선 베냐민 벤  모세 알-나하벤디(Benjamin ben Moses al-Nahawendi, c.830-860)로부터  부흥되었다. 이들은 유대인과 토라 사이의 직접적이고 개별적인  접촉을 무시하는 전통을 비난하면서, "스스로 토라에서 샘을 찾으라.  그리고 선생들의 의견에  의존하지 말아라"고 역설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10세기의 합리적인  개인주의의 발달로 개인의 이성적 책임이 강조되면서 다른 어떠한 권위도 부인하는 사상에 기인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모든 이슬람 제국에  펴저 나갔으며, 특히 10세기의 예루살렘은 금욕적이며 개인적이고 합리적인 종파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아벨레이 찌온]("시온의  통곡자들"), 또는  [쇼산임]("장미")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슬퍼하면서도 성전의 회복을 위해 갈망하던 집단임을 잘 나타내 보이는 칭호라 하겠다.

(3) 십자군(1091-1291 C.E.)
  '성지'가 모슬렘에 의해 지배되던  때, 중세 유럽에서는 세속 군주와 성직자 사이의 대립이 첨예화되어  가고 있었다. 세속 군주들은 지배권을 강화함으로써 봉건적인 정치 구도를  깨뜨려 중앙 집권적인 정치체제로 나아가려 하였으며, 성직 매매등 교회안의  부패를 척결한다는 명목으로 성직자의 임명권까지 차지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교황 그레고리 7세는 교황권을 강화하고, 교회의 일에 대한 세속 군주의 개입을 일체 금지시키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확립된 교황의  권위는 1095년 교황 우르반 2세(Pope Urban II)에 의해 소집된 십자군(십자군,crois s) 운동의 시작으로 그 절정에 이르렀다. 성지 탈환과 기독교 왕국의 재건을 목표로 한 십자군은 여러차례의 실패를 거듭하면서 급기야 1099년 7월 15일 예루살렘을 탈환한다. 또 시리아와 이집트 사이의 메카로 향하는 모슬렘 '순례자의  길'을 점령하였다. 이 때 많은 유대인들은 학살 당하였거나 노예로  잡혀 이탈리야등지로 팔려갔다.  예루살렘의 유대 공동체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으나, 갈릴리의 유대인 지역은 다치지 않았다. 당시 가장 큰 유대인 도시 가운데 하나였던 람레(Ramleh)는 분산되고 말았다.
  첫번째 왕으로 등극한  발드윈 1세(Baldwin I,1100-1118)는 팔레스틴에 머물던 대부분의 유대인과 모슬렘교도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회당과 사원을 파괴했으며, 곳곳에 기념 교회와 요새등  많은 건축물들을 남겼다. 이 때 남긴 건축물의 주요 장소들로는  아부고쉬(Abu Ghosh),  아쉬켈론(Ashkelon),  악고(Acco), 가이사랴(Caesarea), 티베리야(Tiberias),  헤브론(Hebron), 예루살렘, 님루드(Nimrud)등이 있다. 십자군의 진출은 유럽으로부터의 많은 기독교 순례자들을 이 곳 성지에 보내어 방문하게 하였다.
1096년 여름,  유럽에서는 십자군에 의한  유대인들의 대량학살이 이루어졌다. 십자군은 유대인에게 기독교의 신앙을 받아들이든가? 아니면 고집을 가지고 죽임을 당하던가?를 선택하도록  강요하였으며, 많은 유대인은 강요된 개종을 선택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학살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순교자'들에 대한 경외심을 낳게하여, 외적인 정치적 압력을 내적인 신앙심으로 더욱 견고히 해 나가는 기회로 삼게 하였다.
  황제 헨리 4세는 유대인의  종교적 지위를 보장해 주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교황과 기독교인들의  반대로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적어도 십자군이 지배하는 세계 안에서는  유대교도든 모슬렘교도이든 간에 자신들의 종교적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살아 남기 위해서는 오직 개종만이 있을 뿐이었다. 결국 일부 유럽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도성을 만들고 외부로부터  방어하려 했으나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점차 유대인의 정치적, 법적 지위는 쇠퇴해 가기 시작하였다.
  십자군의 종교적 위세 속에서 유대인만이 국교를 신봉하지 않는 자들의 대표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교황과 황제와의 갈등 속에서 유대인은 언제나 교회 지도자들의 악선전의  도구로 이용되어 기독교  대중들의 폭력과 박해를 정당화하였다.
  적어도 십자군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반기독교의 상징이 되었다. 동시에 기독교에 있어서 유대교는 화해할 수 없는 신앙의 적이었다. 이러한 적개심으로 희생된 많은 유대인들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죄없는 희생양'이었으며, 십자군들에게 있어서 '정당한 댓가'였다.
  그러나 십자군은 1187년 살라아딘(Saladin)장군으로부터의  패전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을 내어 주고,  1250년 카이로의 마멜룩(Bahri Mamelukes)으로부터의 참패로 말미암아  팔레스틴의 대부분의 해안 평야를  모슬렘에게 다시 빼앗기게 되며,  1291년 십자군의 최후의 보루였던 악고(Acco)가 무너짐으로써 팔레스틴에서의 약 200년동안의 십자군 시대는 그 막을 내리게 된다.

(4) 마멜룩(1291-1517 C.E.)
  팔레스틴이 또 한차례 모슬렘의 손에게 넘어간 것은 터어키 지역에서 이집트로 온 '종들'(Mamluks)의 후예인  마멜룩이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13세기 초의 일이었다. 본래 마멜룩은 이집트의 군대에서 종사하던 노예들로서 알-말릭 나시르(Al-Malik al-Nasir  Muhammad)가 이끄는 그들이  지배자들을 전복시키고 남부 러시아 및 발칸 반도 주변의 새로운 노예들을 규합하여 이룩한 강력한 군사 봉건제도의 정권이었다.
  이들은 이집트와 팔레스틴, 시리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정복하고 통치하였다.  이들은 처음부터 기독교와  대항하여 싸우는 '성전'(Holy War)을 일으켜 이집트의 기독교인 콥틱(Coptic)교를 박해하였으며, 이는 점차 모슬렘과 비모슬렘  간의 적대  의식으로 발전하였다.  마멜룩 제1왕조인 바흐리스(Bahris,1250-1381)와 제2왕조인  시르카시안(Circassians, 1381-1517)의 통치하에서 이집트 내의 유대인들은 많은 박해를 받았다.
  마멜룩이 이집트에서의  권력 다툼과 몽고로부터의  시리아 방어 등 내외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동안 팔레스틴에는  침체기를 맞게 되며, 이로 인하여 팔레스틴은 종교적으로 가장 심한 쇠퇴기를 겪게 된다. 특히 십자군이 세운 많은 건축물과 교회들은 무참히 파괴되었다.
  1260년 다마스커스가  정복되면서 기독교인과 유대인에  대한 폭동이 일어났으며, 팔레스틴의 나사렛  교회가 파괴되었다. 많은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이 생매장을  당하기도  하였으며, 이러한  박해는  아샤라프  칼릴(al-Malik al-Ashraf Khalil,1290-93)이 통치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1301년 기독교와 유대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중되어 카이로에 있는 모든 교회와 회당이 문을 닫게 되었다. 정부는 기독교인에게 파란 터어반(회교도가 머리에 감는  두건)을, 유대인에게는 노란  터어반을, 그리고 사마리아인에게는 붉은 터어반을 각각 쓰게 하였다. 1354년에 이르러 강제로 개종을 명령하였으며, 비모슬렘 교도는 모든 공직으로부터 추방하였다. 그 외에도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에게 말을 타거나 공중 목욕탕에 출입하는 일등이 금지되었다.
  이 시기의 팔레스틴 유대인  공동체는 그 힘이 쇠잔하여 예루살렘을 비롯한 악고, 욥바등의 경우 거의 이름조차 사라지게 되었으며, 이집트와 시리아의 수도에는 아직까지 대규모의 유대인  공동체가 남아 있었으나 주변 지역은 쇠퇴하였다. 가자와 람레 및 나블러스(세겜)등에서 어느 정도의 경제 활동이 계속되었으나 이러한 상태에서 중산층의 유대인은  몰락하여 갔으며, 유대인의 경제적 수준은 형편 없이 가난하여 갔다.
  아랍 문화 세계에서 팔레스틴은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모슬렘의 교육이나 종교 활동은 지속되었다. 모슬렘의 학교인 마드라샤(Madrasas)가 많이 세워졌으며, 많은  사원들이 건설되었다. 람레의 백사원과 예루살렘의 콰이트 바이 사빌(Qait bay Sabil) 사원, 그리고 룻다의 교량 건축은 유명하였다.

(5) 터어키(1517-1917 C.E.)
  터어키의  오토만 제국은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셀림 1세(Selim I,1512-20)는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와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1517년에는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아랍 세계를 통합하고 팔레스틴에 들어와 약 400년 동안 새주인으로 등장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등장한 그의  아들 슐레만 1세(SuleimanI,1520-1566)는 아시아와  팔레스틴을 다스리는 오토만  제국의 황제로 군림하였다. 그가 점령한 지역을 봉건국으로 삼고 그 땅을 나누어 봉건 군주로 하여금 다스리도록 하였다.
  이때 팔레스틴은 모두 4개의 지역(sanjak bey, 터어키어로 '표준 단위'를 일컫는 말이다)-예루살렘, 가자, 나블러스,  그리고 사페드-으로 나뉘어 졌다. 각 지역은 군사, 경제, 법률 기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벽을  수축하였으며, 이 때 재건된 예루살렘 성벽은 오늘날 구도시(Old City)로  남아있다. 대부분의 지역 주민들은 농업에 종사하였다. 특히 유목민인 베두인(Bedouin)을  농업 활동에 활용하여 많은 약초, 밀, 보리, 콩등의 작물을 생산토록 하였다.
  이 시대의  인구는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올리브,  꿀, 과일, 목화등의 생산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주로  아랍인들의 경제 활동이 돋보였다. 1492년과 1497년 스페인의 유대인들이 대량 학살과 대추방을  맞으면서 유대인들이 팔레스틴으로 이주해 들어온 것도 바로 이 시기를 전후한 때였다. 이들은 주로 나블러스, 헤브론, 가자, 사페드 등지에 정착하였다.  갈릴리 지방의 여러 도시에도 흩어져 정착하였다. 오토만 제국의 초기에 팔레스틴에는 약 1000여 가구의 약 5000여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이 시기에 유대인들은 다시금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며 희망을 불태웠다. 이러한 희망은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을 자극하여  많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귀향을 서두르게 하였다.  스페인으로부터 1526년에 약  200여 가구가, 1554년에는 다시 338가구가 이주해  들어왔다. 이  시기에 예루살렘에는  다빗 아비 짐라(R.Davidibn Abi Zimra, c.1485-c.1575)같은 훌륭한 지도자가 있었다.
사페드(Safed)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농업과 각종 산업을 발전시키면서 터어키 정부로 부터 인정을 받아 '왕국의 수입을 증가시켜주는 유대인'이라는 명성을 얻어 나갔다.  16세기 중엽 사페드의 유대인의 숫자는 10,000여명으로 늘어났으며, 팔레스틴의 새로운 도시로 부각되었다.
  사페드는 토라 연구의 중심지로 부상하였으며, 유대 신비주의의 발상지로도 유명하다. 요셉  카로(R.Joseph Caro)에  의해 쓰여진  카발라(Kabbalah)와 조하르(Zohar)라 일컬어 지는 유대  신비주의의 책은 토라의 신비주의적 연구의 대표적인 책으로 내려오고 있다.
  오토만 제국의 쇠퇴기는  무라드 3세(Murad III,1574-95), 그의 아들 무함마드3세(Muhammad  III,1595-1603),  그리고  아흐메드(Ahmed  I,1603-17), 무스타파(Mustafa I,1617-18, 1622-23),  무라드 4세(Murad IV,1623-40)으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맞이하게 된다. 레바논 지역에서 세력을 가지고 있던 두르즈(Druze)의 마안(Ma'an)족 추장 파크르  알-딘(Fakhr al-Din II,1590-1635)은 사페드와 아이윤(Ajlun)등 오토만 제국의  영토를 점령하고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시리아와 사이프러스등지에서 역시 독립을 위해 힘을 모으고 있던 십자군들과의 연합의 결과였다. 16-17세기 오토만 제국은  그 외에 여러 지역에서 일어난 세력들로 인하여 쇠퇴의 일로를 걷고 있었다.
  무스타파 2세(Mustafa II,1695-1703)가  통치하는 동안 오토만 제국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러시아의 남하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의 중요한 성지가 이들에게 점령당했으며, 세금 징수권과  모슬렘의 사법권을 박탈당했다. 18세기 초에는 갈릴리 지역의 대부분의 영토를  자히르(Zahir al Omar)가 받아 통치하면서 이집트와 동맹을 맺고 다마스커스를 점령하고, 십자군 함대의 지지를 얻어 가자, 욥바등을 점령하였다.
  한편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점령은  콘스탄티노플을 매우 놀라게 하였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다음  해 팔레스틴의 오토만 제국의  영토에 들어와 가자, 람레, 룻다 및 욥바등을  어렵지 않게 점령하였다. 해안길을 따라 팔레스틴을 점령해 올라간 나폴레옹은 예루살렘을  정복하지는 않았다. 그의 목표는 북쪽으로 가는 정복의 길을 열어놓은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북쪽으로 진군하면서 하이파를 정복하고 악고를 포위하였다. 그런데 이 때 나폴레옹의 군대에게 큰 재앙이 내렸다. 전염병으로 많은 군인이 죽자 그의 군대는 이집트로 퇴각하고 말았다.
  17세기 말,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사이에서 메시아 운동이 발효하면서 팔레스틴으로 이민이 시작된다. 유다 하시드(Judah Hasid)와 하임 말라크(Haim Malakh)가 이끄는 메시아  운동가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서 팔레스틴으로 이주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많은  유대인들을 이끌고 이주해 왔다. 오는 길에 많은 이들이 죽는 어려움을 당하나 그들의 이주는 점차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예루살렘에 약 1,200여명의 유대인들이 공동체를 이룰 정도였다.
  유럽에서 온 이들을  아쉬케나짐(Ashkenazim)이라 부르는데, 이들에 대한 아랍 정착자들은 심각한 배타심으로 경계하였다. 이들의 모습이나 복장이 유럽풍의 분위기였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  띄었다. 아랍인들은 안식일에 이들의 회당을 공격하고, 방화하는 등 많은 충돌이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루살렘에 더 이상 머물 수  없게 된 유대인들은 갈릴리  북쪽 지역-사페드,티베리아 등으로 이주해 갔다. 이 곳은 당시 가장 큰 유대 공동체를 이루고 발전하였다.
  이 시기의 팔레스틴의 경제 상태는 매우 악화되었다. 경작지 마다 폐허처럼 변해 있었으며, 마을들  마다 가난하였다. 유럽에서 이주해온 유대인들은 어느 정도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터어키 제국과 협상을  통하여 경작지를 사들이며 농사를 시작하였고, 또 유럽과의 기초적인 무역을 이루기도 하였다. 이들이 생산한 면과 설탕, 커피 등이 주요  상품들이었다. 인구도 급증하면서 18세기 말엽 팔레스틴에는 약 30만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터어키의 통치기간  중에 팔레스틴과  시리아에 대한 9년  동안의 이집트 통치(1832-40)는 유대인들의 정착을  유리하게 해 주었다. 터어키와 이집트와의 갈등이 고조되는 동안 보다  많은 유대인들이 이주해 들어왔으며, 양측으로부터 유대국가 건설을 위한 지원을  동시에 받을 수 있었다. 유럽에서 계몽된 유대인들-아브라함 베니쉬(Abraham Benisch)나 몽테피오르(Montefiore), 알버트 코헨(Albert Cohen)등-이 들어온 시기도 바로 이 시기를 전후해서였다.
  19세기 말-20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점차 터어키의 이집트와의 갈등과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의  건설(1859-1869년)등의 영향으로  팔레스틴은 전체적으로 황폐해 갔으며, 인구도 급격히 감소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기간을 틈타 유럽과 러시아 등지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헬쩨(Teodor Herzl)을 중심으로 한 소위 시온주의(Zionism)  운동을  전개해 나가면서 새로운 이스라엘 건립을 위한 준비를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아가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한 터어키는 1917년 팔레스틴을 새로운 주인인 영국에게 내어주었으며, 급기야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한 활발한 발걸음을 내딛게 된다.

6.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
(1) 디아스포라의 유대 사회와 문화
  성전 멸망 이  후 유대인들의 삶은 총체적으로  '떠돌이 생활' 그 자체였다. 제1차 성전 멸망으로부터 시작된  유랑의 세월은 바빌로니아를 중심으로 한 근동 지방을 비롯하여, 이집트, 아프리카  북부로 이어졌으며, 제2차 성전 멸망과 이어 계속된 제2차 유대 반란은 로마  세계 전체로 유대인을 분산시켰다. 그 후 비잔틴 제국의 유대인 박해와 모슬렘의  추방은 유대인들을 스페인을 비롯한 동부 유럽과 서부 유럽에 이르는 지역에 이르기까지 확산시켜 놓았다.
  이들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들은 팔레스틴에  머물러 살고 있던 유대인들과 어느 정도의 교류를 가지고 있었으나, 점차 팔레스틴의 지위가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그것보다  우위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면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 갔다.
  대부분의 디아스포라  유대인 공동체는 예루살렘에로의  귀향이 하나의 이상이요 꿈이었다. 열강들의 영토에서 자신들의 법적, 종교적 지위가 약화되면 될수록 그들은 시온에로의 갈망이 더욱 불타 올랐다. 그러나 그러한 열망이 한쪽에서는 서서히 식어 가면서 디아스포라의 신학을 정리해 나갔다. 자신들이 속해 있는 문화와 전통속에서 고유한 유대교의 전통을 어떻게 재해석해 나가며, 정착해 나가느냐?하는 것은 현실적인 삶 속에서 하나의 필연적인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속해있는 문화에 점차 동화되어 가면서 살아가기도 하였으며, 어떤 이들은 타문화를 거부하며 박해와 죽음까지도 감래하였다. 이러한 다양한 디아스포라의 삶은 각 지역의 정치적 변화와 문화적 변동과 더불어 그 방향을 결정해 나가야 했으며,  적어도 현대 이스라엘이 독립할  때까지 수 천년동안 계속되었다.

① 중세 유럽의 유대인-아쉬케나지
  아쉬케나지(Ashkennazi)는 성경에서  야벳의 자손  중 고멜의 후예이다(창10:3;대상1:6). 지금의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 북부에 모여 살던 이들은 커다란 왕국을 이루며,  바빌로니아를 치기도 하였다(렘51:27). 바빌로니아 탈무드에서 고멜(Gomer)은, 비록 그  이름이 북서부 시리아의 게르마니카를 가리킨다하더라도, 게르마니아(Germania)로 묘사하고 있다(cf.BT Yoma 10a).
  이 용어가 어떻게 사용되기 시작하였는지에 관하여 불분명하다 하더라도,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역사에서 이  용어는 북서부 유럽에 정착하여 살던 유대인 공동체를 총괄적으로 묶어서 부르는 이름이다. 특히, 독일과 프랑스에서 살던 유대인들은 아쉬케나지의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동부 및 남부  유럽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의 모든 유대인들을 지칭하고 있다.
  아쉬케나지의 문화적인  뿌리는 남부 이탈리야와  북부 프랑스였다. 12세기 야콥 메이르 탐(Jacob b.Meir Tam)은 아쉬케나지의 문화를 일으며 나갔다. 특히 이 지역의 유대인들은 전통적이고, 근본적이며, 엄격한 유대 사상과 관습등을 유지시켜 나갔다. 예루살렘 성전 멸망 이 후 다양한 시대와 환경 속에서서 살아가면서 이들은 외적인 영향보다는 내적인 전통을 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특히 성경과 탈무드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이러한  작업을 수행해 나갔다. 이들의 연구의 주된 관심사는 할 라카적인 원리를 찾으려는 것이었다기 보다는 성경의 주석적인 활동이었다. 아쉬케 나지의 이와같은 노력과 전통은 유대교의 학문적 전통의 뿌리가 되었다.
  15-6세기 서유럽의 유대인들이 동부로 대거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그 중심이 보헤미아, 모라비아, 폴란드, 리투아니아 등지로 옮겨갔다. 이들은 히브리어와 독일어를 합성하여 자신들이 고안해  낸 이디쉬어(Yiddish)를 사용하였으며, 이 언어를 사용하여 많은 제의시(제의시)등을 창작해 나갔다.
  17세기 스페인의 유대인  학살로 인하여 많은 유대인들(스파라딤)이 동부 유럽으로 이주해 들어오면서 급속도로  아쉬케나지의 인구가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 곳에서도 1648년의 폴란드 대학살 및 18세기 러시아의 박해등으로 말미암아 아쉬커니지 유대인들은 오스트랄리아, 남아프리카, 미국등지로 흩어져 분산(분산)되어 갔다.

② 중세 아시아의 유대인-스파라디
  역사적으로 스파라디(Sepharadi)는 스페인과 포루투갈에 살던 유대인의 후예들을 일컫는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 오바댜 1장 20절에 나오는 말로써 스페인을 일컫는 라틴어 'Hispania'와 동의어로  보고 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스파라디는 아쉬케나지가 아닌 모든 유대인들을 통칭하기도 한다.
  전승에 의하면 유대인의 스페인  진출이 솔로몬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이러한 전승의 역사적 근거는  찾을 수 없으며, 다만 711년 C.E. 모슬렘의 팔레스틴 정복 때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이 곳까지 이른 것으로 여겨진다. 정치적, 언어적으로 스페인의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의 유대인들과 교류가 있었던 증거가 있으며, 바빌로니아에 버금가는 문학과 철학등의 창작활동이 활발하였다.
  1148년 알모하드(Almohad)의 박해 이 후 스페인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집중(집중)되면서 유대 공동체에는 적지  않은 압력과 박해가 가해졌다. 1391년 박해 때에 많은 유대인들이 추방되거나 강제로  기독교로 개종되었다. 또 1492년 유대인 추방령이 포고되면서 스페인에  살던 유대인들은 대부분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터어키 등지로 떠나야 했으며, 이 칙령은 공식적으로 1968년까지 유효했었다.
  적어도 중세 유대인의  디아스포라 역사에서 스파라드의 인구가 아쉬케나지와 비교할 때 약 1/10정도 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역할은 활발하고 중요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던 시대의 문화와 잘 조화를 이루면서 유대인의 새로운 전통을 많이 창출해 냈다. 스페인어 혹은 히브리어와 스페인어를 조화시켜 만든 라디노(Ladino)어로 된 성경 주석, 시, 드라마, 법전 및 신비주의 카발라 작품등 많은 문학 작품들을 생산해  냈다. 1553년에 라디노어로 쓰여진 페라라 성경(Ferrara Bible)은 가장 유명한 책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2) 중세 유럽의 유대인
① 중세 유대인들의 경제 활동
  유대 역사에서 중세라  함은 640년 아랍-모슬렘의 통치 시대로부터 십자군시대를 거처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을 거쳐 17세기 유럽의 변화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 이 시기의 특징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지위와 자치권을 위한 투쟁의 시기로 요약할 수  있다. 특히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유일신 신앙을 가진 모슬렘과 기독교와의 관계  속에서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은 살아  나가야 했으며, 이 두 정복자들 안에서 받은 여러  가지의 고난과 박해의 시기로 규정할 수 있으며, 동시에 이러한 삶 속에서  자신들의 지위와 자치권을 보장받고 인정받으려는 노력과 함께 정치적-사회적 삶을 영위해 나가던 시기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중세 유대인들의 경제 생활은  가장 특징적인 역할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유대인들은 기본적으로 가내  수공업과 무역을 중심으로 점차 커 나갔으며, 디아스포라의 곳곳에서 이러한 유대인들의 경제 활동은 점차 확대되어 갔다.
  특히 기독교 세계 내에서의 유대인들의 경제 활동은 유대인들의 재력을 바탕으로한 지위를 확보해 나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봉건 영토내의 먼 지역에 여행하여 새로운 상품을 소개하거나  들여옴으로써 지역간의 교류를 활발히 하는데도 기여하였다.
  11세기에 접어  들면서 유대인들은 각 지역마다  지점을 두어 무역과 상업활동을 체계적으로 해 나가기 시작하였으며, 온 가족이 이러한 활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봉건 군주들 조차 이들의 이러한 상업 활동을 인정하면서 많은 이익을 나누어 가졌다. 상업을 통하여 점차 많은 돈을 번 유대인들은 이 돈을 일반인들에게 대여해 줌으로써 이자를 받고, 금융제도를 발전시켜 나갔다. 이들은 번 돈으로 금과 은을 사들였으며, 이러한 상업 활동은 순환적으로 계속되면서 많은 이익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경제 활동은 종종 지방 원주민들로부터 오해와 미움을 사기도 하였으나, 여러 지역에서  금융과 상업에 관한 한  유대인들의 숙련된 활동이 크게 인정 받게 되었다.
  중세 유대인들의 경제적  지위는 매우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 제국 내의 유대인들 가운데는 남녀 노예들을  가지고 있었던 상류층이 많았으며, 모슬렘의 스페인에서도 유대인들은 화려한 생활을 영위하였다.

② 중세 유대인에 대한 종교적 증오심
  유대인들에 대한 기독교의 기본적인 태도는 중세 이전, 후기 로마 제국 내에서 사실상 구체화되었다. 즉,  하나님의 유대인 선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그 선택이 이미 기독교로 옮겨왔다는 신학적 이해는 4세기 이후 확대되었다. 교황 스레고리 1세(Pope Gregory I,590-604)는 유대인을 아직도 교회와 대적하며 싸우는 자들로 보았으며, 유대인의 회당을 새로 건축하는 일등을 금지시켰다. 같은 시기의 교부들 역시 반유대적 설교를 하였다.
  나아가 7세기 또 하나의  유일신 신앙을 가진 이슬람교가 등장함으로써 유대인에 대한 종교적 태도는 원칙적으로  부정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모슬렘의 스페인 안에서 유대인들은 개종을 강요당했으며, 개종하지 않은 유대인들의 자녀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박탈하였다. 기독교와 모슬렘 간의  갈등과 투쟁 역시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사이가 나빠지면서 서로 적개심을 갖게 되었다.
  모슬렘의 정복은 모슬렘 제국 내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의 지위를 바꾸어 놓았다. 모슬렘 교도들에게 있어서 유대인들은 단순히 이단일 뿐 아니라 비신앙인이었다. 소위 모슬렘 신앙을 신봉하는  공동체인 움마(Umma)에 속하지 않은 이들은 모두 적이었다. 모슬렘 안에서 탁월한  법과 실천 강령을 가지고 있던 수니파(Sunnite) 교도들은 알리의 추종자들인 혁명적인 시아트(Shiites) 교도들보다 비교적 관용적인 사람들이었다. 1008년 이집트가 시아트파에 의해 점령되면서 이집트 내의 유대인들은 심각한 박해를 받게 된다. 참수형에 처해지거나 광야로 추방당하게 된 것이다.
  한편, 1096년 라인 계곡에서  집결한 십자군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하기  시작하였다. 마인츠(Mainz)에서는 기독교 개종을 거부한 약1,000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했으며, 1099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하였을 때에는 유대인들을 회당에 모아놓고 불을 지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모슬렘과 십자군에 의한  종교적 박해는 유대인들에게 [순교자에 대한 기도](Kiddush Hashem)를 낳게  하였다. 즉, 개종하느냐? 죽느냐?의 갈림길에서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간  이들로 부르며, 이들을 위한 기도를 통하여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신앙적 구심력을 더욱 공고히 해 나가는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이러한 사건이 계속되자 왕  헨리 4세(Henry IV)는 강제로 개종한 모든 유대인들에게 본래 위치로 되돌아 갈 것을 허락하여 많은 유대인 도시와 공동체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으나, 이러한 조처는  지속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어떠한 방식으로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보호해 줄 힘이나 스스로 자신들을 방어할 희망을 찾지 못하게 되자, 학살에 반대하는  군사적인 행동을 감행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다다랐다. 유대인들은 폭동을 일으켜 도시 밖에 성채를 구축하고, 그 안에 사는 비유대계 사람들을 밖으로 보낸 후 맞서 싸워 나갔다. 영국의 요크(York)에서는 이렇게 하여 고립된 유대인들이 포위를 당하여 견디지 못하고 모두 자결하고 말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중세의  유대인들은 점차 그 사회와 고립되어 가기 시작하였으며,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해 가면서 내면화 되어갔다. 경제적인 지위도 점차 약화되어 갔다. 이 때에 생겨난 새로운 종교 사상은 대부분 내재화, 신비화되어갔다. 대표적인 집단 가운데 카라이트(Karaites)가 있는데, 이들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종교 전통이나 제의, 탈무드등을 거부하면서 오직 토라와 유대인 사이의 개별적이면서  직접적인  접촉을  강조하였다.  카라이트의  지도자는  베냐민  모세(Benjamin ben Moses al-Nahawendi)였다.

③ 중세 유대인의 법적 지위
  중세 유대인의 지위는 항상 세속 정부의 인가(인가)에 의해서만 그 역할을 보장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유대 지도자들은 항상 그들의 자치권을 얻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 왔다. 중세 사회에서 유대인들이 받은 정치적, 종교적 대우라는 것은 보잘것 없는 것이었으나 유대인들의 경제적 지위는 만만치 않았다. 서부 유럽의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돈을 빌려주는 일에 종사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교회와 제국, 교황과 황제 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고조되면서 유대인의 종교적 지위를 위협하는 교황의 입장과 유대인의 경제적, 법적 지위를 보장해 주려는 황제의 노력이 상호 교차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중요한 기능을 가지게 된 것이 유대인의 경제력과 그들의 대부(대부) 행위였다. 돈이 많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돈을  빌려주게 함으로써 그들의 법적  지위를 보장해 주거나, 심지어 죄를 지은 유대인들에게 면제부가 되도록 해 준 경우도 있었다. 이는 중세 봉건 제도 하에서 농노들은  봉건 군주에게 충성하고, 봉건  군주는 농노들을 보호해 주는 한 형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황제의 행위는  적어도 교황의 눈에는 부정적인 것이었으며, 더구나 교부들에게 있어서 예수를  살해한 유대인들은 가인처럼 인식되었다. 황제의 지위 마저도 결정 지을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된 교황은 유대인들을 억압하였다. 중세 유럽 사회에서 유대인에  대한 실질적인 법적 차별은 없었으나 관습과 일반인들의 의식 속에서 유대인은 증오와 미움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대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폭력적인 저항뿐 이었다. 유대인들은 곳곳에서 기독교 어린이들을  살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살상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더 큰 곤경에 처하도록 하였을 뿐이었다. 1286년 뮌헨에서는 "유대인들이 기독교 어린이들을 잡아다가 그 피를 뽑아 마신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였으며,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이 사실을 문자적으로 믿었다.
  급기야 황제 프레드릭 2세(Frederick II)는 사제들을 불러 이 사실을 조사하도록 명령하였으며, 여러 지역에 걸친  지역에서의 조사 결과 사실이 아님이 보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믿지 않았다. 이러한 이야기는 이 사건을 계기로  영국으로부터 유대인이  추방된지  거의  한 세기나  지난  1387년에  쓴 쵸서(Geoffrey Chaucer)의 칸터베리  이야기(The Canterbury Tales)에서도 그 배경으로 삼고 있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④ 중세 유대인의 종교사상
  중세 디아스포라 유대인  공동체 내에서 근본적인 변화의 징조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2세기 말경이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의 지도 체제는 귀족적인 계급구조의 형태를 띄고 있었다. 토라 연구에 있어서 전문적인 지식층이 이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이들의 권위와 역할은 거의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이러한 지도  체제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정치적 박해 속에서 이러한  체제는 더 이상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형태의 체제는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새로운 형식의 지도 체제와 사상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지도력의 권위를  주장하고  나선 사람은  모세  벤 마이몬(Moses  ben Maimon, 1135-1204)이었다.  스페인에서 추방당해 이집트로 건너가  유럽에서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제도를 발견한  그는 과거의 제도를 거부하고 보다 강력한 정신적지도자를 요구하게 되었다. 그는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권위만을 강조하고, 탈무드학교에서 많은 돈을 받고 가르치는 행위등을 비판하고 나섰다.
  그는 합리주의자로서 전통과 신앙을 이성과 철학을 바탕으로 설명해 나가면서 전통적인 유대 사상을 수정해 나갔다. 그는 유대 사상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종합하려 하였으며, 유대 상류 사회의 많은 지지를 얻었다. 특히 그는 명확하게 체계화된 철학으로  유대교의 유일신 신앙을  설명하였다. 그는 메시아의 인성(인성)을 강조하였으며, 이스라엘의 구원을  보다 사회적인 성격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합리주의 철학으로 설명된 유대 신앙은 아직까지 이성적(리성적)인 사고에 익숙하지 않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많은 비난과 논쟁을 거쳐야만 했다.
  메이르  벤 하레비(Meir  ben  Todros  ha-Levi Abulafia)와  메나헴  벤 솔로몬(Menahem ben Solomon Hameiri)는 마이몬의 합리주의적 태도와 해석에 관해 심각한 우려를 표시하면서 그의 이론을  반박하였다. 특히 마이몬의 육체의 부활을 거부하는 해석과 합리적 알레고리적 해석에 관해서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다. 그는 "헬라의 지혜"와 모세의 토라는 결코  종합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마이몬에 반대하는 학자들은 유대교의 밀의적(밀의적)이며 신비적인 교리를 강조하였다.
  이러한 두 학파간의 갈등과 논쟁은 결코 쉽게 끝나지 않았다. 15세기까지 계속된 이 논쟁은 결국  두 학파의 주장은 상호  보완적이며, "이성과 신앙은 길을 밝히는 두개의 등불"이라는 결론으로 어느 정도 매듭을 짓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해와 차이는 여전히 유대인의 문화와 종교적 전통속에 깊게 흐르는 두 줄기의 물줄기가 되었다.

⑤ 유대인의 재이주
  많은 박해 속에서 유대인들은 힘들고 위험한 곳으로부터 새롭고 안전한 삶의 거처를 찾아서 떠나야  했다. 이들의 이주는 이슬람 세계로부터 기독교 세계로,기독교 세계에서 다시 다른 기독교 세계로, 서쪽으로부터 동부나 북부로 이주해 갔으며, 주로 도시로부터 소도시나 시골로, 유럽의 중요 국가로부터 변방의 국가로의 이동이었다. 서부 유럽에 살던 많은 유대인들은 동부나 북부 유럽으로 대량으로 이주해 나갔으며, 주로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모라비아, 실레시아 등지로 옮겨갔다.
  특히 스페인의 카톨릭 지도자들은 1391년부터 1492년이 이르는 기간 동안에 스페인내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을 모두 추방하였으며 , 이는 또 다시  고향을 잃은 자들처럼 처참하게 쫓겨가야 했다.
  이들은 주로 한 곳에 보다 큰 집단적인 정착을 실시하면서 스스로 자신들의 경제적, 사회적, 정신적 기회를  만들어 나가는 새로운 형태의 정착운동을 벌여나갔다. 나아가 이 시기에 쫓겨난  많은 유대인들은 팔레스틴에로의 복귀를 서둘렀다. 순례단과 함께 팔레스틴으로 이주한  유대인들도 상당수에 이르렀다. 이들 가운데는 은행가나 상인들이 많이 있어,  팔레스틴의 경제적 이익과 부합되어 이주가 용이하기도 하였다.

(3) 유럽의 변화와 유대인 공동체
① 17-8세기의 유럽 사회의 태도
㈎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14-15세기에 걸친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문예부흥(Renaissance)은 근대화의  시발점으로 인정된다. 나아가  16세기 종교개혁은 중세사회가  지니고  있던   가치관이  파괴되면서  세속주의(Secularism)와  개인주의(Individualism)가 새로운  사회의 가치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종교'와 '정치'의 분리 원칙이 세워지게 되는 동시에 한쪽에서는 극단적인 종교주의가 증가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신앙은 통치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종교와 국가 사이의 강력한 경쟁 관계를 만들었다.

㈏ 종교적 관용(Religious Tolerance)과 유대인에 대한 존경심의 증가
  설교가 로저 윌리암(Roger  Williams)은 1644에 쓴 한 에세이에서 "기독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을  두는 것을 금지 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명령이다. 종교의 자유, 즉 이방인과 유대인, 터어키인이나 기독교인들의 예배나 사상은 모든 국가나 지역 안에서 인정되어야만 한다"고 썼다.
  존 로크(John Locke)는 [관용에 관한 편지](Letter Concerning Toleration,1689)에서 "이방인도 모슬렘이나 유대인들도 그들의 종교때문에 시민권이 제한 되어서는 결코  않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소위  17세기  말의 종교관용  이론(Theory of Religious Tolerance)의 기초인 것이다.
  보다 중요한 영향은 17세기의 히브리, 유대 문학에 대한 유럽의 관심으로부터 시작된다. 기독교 유대주의자들(Christian  Hebraists)은 유럽대학 안에서 히브리 유대학 강좌를 두었다. 성경은 고대 이스라엘의 정치사상, 사회 및 국가에 대한 권위있는 책으로써,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구약사상은 계몽된 국가의 정치, 사회 발전의 좋은 례서로 인정되기 시작 하였다.

㈐ 상업이론과 유대 변증학
  유럽 사회의 새로운 정치적, 경제적 사상은 유대인들을 향한 유럽인들의 태도에 큰 변화를 주었다. '국가의 복지'(Walfare of the State)는 유럽 사회의 원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  주장은 "모든 인간은 종교에 의하여 판단되지 아니하며, 국가에 대한 유용성(Usefulness)에 의해 판단된다"는 것이다. 유럽의 인구 증가와 그에따른 인간의 경제적,  상업적 행위를 중시하게 된 것이다. 17-18세기의 사람들은 상업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론(Mercantilist Theory)을 받아 들이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유럽 사회의 유대인의 통합을 지지하게 된다.
  이러한 실용주의적 변화에  따른 유대인들의 지지는 1638년 변증가인 시몬루짜토(Rabbi Simone Luzzato)가 쓴  [베니스의 유대인에 관한 소고](Essays on the Jews of Venice)에 잘 나타나 있다:"유대인들이 사는 곳은 어디에서나 무역과 상업이 넘쳐 흐른다". 특히 영국에서는  철학자 존 토란드(John Toland)의 [대영제국과 에이레의  유대인 귀화를  위한 근거](Reasons  for Naturalizing  the Jews  in Great Britain and Ireland,1714)에서 "유대인들을 영국으로 데려오는 일이 왜 이익이 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또 몽테스크(Montesquieu)는 "기독교는 무역이나 상업적 이익을 위하여 고리대금을 엄격히  금지했는가 하면, 왕은 또한 유대인들의 재산을 압수하고 추방시켰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들의 돈을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옮기기 위해 어음(letter of  exchange)를 고안해 냈다"면서 유대인들이 유럽의 경제 발전을 위한 긍정적인 역할을 강조했다.

㈑ 계몽주의와 유대인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은 서유럽과 중앙  유럽에서 교육받은 유럽인들의 유대인들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놓았다. 이들은 종교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개인의 동등한 가치를 인식하게 되었으며, 국가 안에서 구별된 신원을 보존하는 것을 역사적   집단의  실존으로   받아  들였으며,   나아가  '구별주의자'   유대인  집단('seperatist' Jewish group)을 비록 그들이 위선적일 망정 인정할 정도 였다.
  독일 작가인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은 [유대인](The Jews,1749)에서 유대인을 정직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증명할 목적으로 이 책을 쓴다고 밝히고 있을 정도이며, [현자 나단](Nathan the Wise,1779)에서는 유대인을 이론이나 실제에 있어서 자연  종교의 제안자로 보았다.  이 책 속에서  그는 유대인들을 "선민"(chosen people)으로 간주하자 현자인 나단이 대답하기를 "나는 나 자신의 백성을, 너는 너 자신의 백성을  선택하지 않았다... 나는 먼저  인간이요 다음이 유대인이며, 너도 먼저 인간이요 나중이 기독교인이다"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유대인들이 유럽에서 기생적(parasitic)인 모습으로 발전되는 것은 배격되었다. 토너(Clermont Tonnerre)는 1789년 12월 프랑스 국민의회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하였다:"우리는 한 국가  안에서 유대인들에게 독립된 정치기구나 계층을 두는  것을 허락해서는 않된다. 각자  개인적인 자격으로 시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이러한 우리의 입장을 받아 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을 추방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국가 안에서 비시민 단체(a groupof non-citizen)나 국가안의 국가(a nation within a nation)를 둘 수 없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그들은 이것을 받아 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 리신론자들(Deists)과 철학적 합리주의자들(Philosophical Rationalists)
  유대인들을 하나의  단체로 인정하려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그것은 곧 "국가 안의  국가"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18세기 영국의  리신론자들은 자연종교(natural  Religion)를  지지하며, 계시종교(revealed religion)를 반대하는 자들로써,  모든 종교 사상을 합리주의적으로 보려는 자들이었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유대 성경은 지어낸 거짓말이요, 그들의 조상과 영웅들은 부도덕한 악당이요,  예언자들은 좁은 마음의 광신주의자라는 것이다. 이들은 종교적 기적이나 환상등을 거부하는  자들로써 이러한 사상을 가진 종교는 모두 미개한 것이므로,  유대인들은 야만족이요 잔인한  민족이라는 것이다. 초대교부들의 반유대논쟁의 부활이었다.
  프랑스의 사상가 볼테르(Voltaire)는  그의 철학사전(1756)의 "유대인" 항목에서 "큰 국가가 작고  알려지지 않은 노예국가로부터 법이나  신앙을 가져올 수는 없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전적으로 무식한 민족이며,  오랫동안 폭력과 증오, 반역과 인색함으로 살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화형에 처해지지 않았다"고 소개했다. 또 홀바하(Holbach)는 반유대주의에 입각하여 유대인을 "간단히 말해서 약탈 민족이다"라고 정의해 버리기도 하였다.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Fichte) 역시  유대인들을 "도덕적 타락"과 "국가 안의 국가"라는 두 원리에  입각하여 비판하면서, 1793년에는 유대인에게 동등한 시민권을 부여하는 일에 반대하는 글을 발표하였다:"그들이 이 권리를 계속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목을  자를 수 밖에 없다. 만일  이들에게 시민권을 준다면 그들은 다른 시민들을 짓밟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18세기 이러한 논거의 주장자들은  전세계에 이 일을 알리는 작업을 계속하였다. 철학자 칸트(I.Kant)는 [의사단의  전쟁](The War of Faculties,1798)에서 "유대인을 안락사(euthanasia)하는 방법은 그들의 종교적 도덕성과 순수함, 오래된 법규들을 그들로 하여금 포기하도록 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설파하였다.

㈓ 통합의 방법으로써의 유대인들의 개량(improvement)
  리신론자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18세기 유럽의 교육받은 계층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종교나 신앙을 버리거나 변경하지  않고도 그들의 권리를 증진시키는 통합의 길이 있다고 주장했다.
  돔(C.W.Dohm)은 [유대인의  시민 변형](Civil Transform  of the Jews,1781)에서 유대인들의 동등한 시민권과 직업 선택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면서 그들이 가지고있는 기술을 격려했다. 나아가 그들의 예배의 자유, 회당을 열 수 있는 권리 및 학교에서 과학이나 예술에 종사하는  일도 허락하도록 제안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들에게 국가를 위해 봉사하도록  하는 훈련이 되어있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훈련의 부족은 그들이  온전한 시민권을 부여 받은 후에 실시해야 하는데,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기독교나 국가에 대한 증오심이 표출될 가능성을 유발시킬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한 것임을 경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제안하기를 영향력 있는 정부 밑에서 새로운  교육을 통한 개량 방법이 창안,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돔의 주장은 다른  여러 나라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목사인 아베 그레고리(Abb  Henri Gregoire)는 [유대인의 육체적,도적적,정치적 문예부흥 소고](Essays on the Physical,Moral  and Political Renaissance of the Jews,1789)에서 "모든 유대인들의 모임은  정부가 임명하는 대표가 의장이 되어야 하며, 모든 토의는 그  국가의 언어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785년 폴란드에서 온 유대인들을 개량하기 위하여 모든 서류에 그들의 언어 사용을 금지시켰으며, 군 복무를 의무화 하였다.

㈔ 프랑스 혁명기의 유대인들에 관한 토의들
  프랑스 국민의회 및  독일 국민의회는 유대인들의 법적 지위문제를 결정하기 위한  비중있는 토의를 계속하였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유대인들의 인권, 즉 거주 이전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 등을 박탈하자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주창하는 것은 꺼려하였으나, 유대인들의 정치적 문제 및 시민권 부여에 관해서는 그 논쟁이 계속되었다.
  1789년 12월 프랑스 국민의회에서 목사 및 보수주의자들은 '유대인'(juif)이라는 말은 종교적 분파(sect)의 이름이  아니라 자신들의 법을 가지고 있는 한 민족으로 규정하면서, 이들에게 시민권을 주는 것은 영국사람이나 화란사람들이 프랑스 시민이 될 수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로베스삐에르(Robespierre) 같은  급진주의자들은 유대인들의 나쁜  성격을 강조하면서 '시민이 될만한 적절한 자격을 갖춘 시민에게만 공민권을 주어야 한다'고 차등 권리제를 주장하였다.
  1796년의 독일 국민의회에서도 프랑스에서와 비슷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유대인들은 가나안 땅으로부터 추방당했으며,  그들의 희망은 오직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가는 것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땅에서 사는 모든 유대인들은 나그네로써 살고 있으며, 또 전능자로 오실 메시아를 늘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다른 땅에서의 거주 자체를 하찮은 것(unworthy)으로 여기고 있다."
이에 반해 유대인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자들은 "유대인들은 우리가 그렇듯이 한 인간이며, 그들의 행동 역시  다른 민족이 가지고 있는 것같이 취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지금 유대인들은 한 백성(a people)으로서 생각 되는가? 아니면 한 국가(a nation)로 생각 되는가? 이들에게 주어진 이름은 신앙의 이름인가? 국가의 이름인가? 그들은 그들의 국가를  잃은 이래 그들 스스로를 한번도 국가로 부른 적이 없으며, 한 신앙의 백성으로 부르고 있을 뿐이다"라고 옹호하였다.
  결론적으로 17-18세기의 유대인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태도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1) 종교적 관용이론  혹은 상업주의적 이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유대인을 한 인간으로, 또한 경제적 가치로  봄으로써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자는 입장이며,  2) 다른 하나는 유대인을 정치적으로 '국가안의 국가'로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두 주장이 계속  됨에도 불구하고 17-18세기의 유대인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태도는 시온주의 운동을  위한 매우 커다란 변화로 인정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종교개혁으로 인한 정교분리 운동, 합리주의자들의 계시종교의 거부, 교회 전통과 조직에 대한 비판 및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자유 및 인권에 대한 존중이라는 커다란 유럽의 변화에 따라서  유대인들의 정치적, 법적, 철학적 전통에 대한 관심의 폭이 증가되었기 때문이다.

② 전체주의 국가에서의 유대인의 법적 지위
㈎ 중앙집권화와 지방주의의 대결
  중세 유럽 사회는 기본적으로 각 사회 단체간의 협력 및 정치-사회적 지위가 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절대  왕조 국가(Absolutist Monarchy)를 강화시킨 중앙집권주의자(centralist)와 전체주의자(absolutist)는 이러한 중세의 상황에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특히 독일에서는 각 단체와의 협력과 유대 공동체의 자치력에 정면으로 부딪쳤다. 절대 권력의 집중은 유럽에서의 유대인들의 법적 지위를 상실케 했다.

㈏ 동부 유럽의 유대인들
  이 시대에 폴란드는 왕정이  기울고 대신 귀족 계층의 세력이 증가 하였다. 따라서 유대인의 지위는  왕보다 귀족 계층의 태도에 의해 결정되었다. 유대인들은 주로 대지주들에 의해 보호되었다. 이들은 유대인들의 고용효과를 누리고 있는 자들로써  다른 계층(사제,도시 중간층  및 소작농)의 비판으로부터 유대인들을 보호해 주었다. 그러나 이  대신에 이들로 부터 당하는 시달림 또한 고달픈 것이었다. 사유 재산이 없었던  유대인들은 대지주의 땅에서 살았으며, 그 때문에 공민과 지주 사이의 갈등을 직접 경험하게 된 것이다.
  특히 폴란드의  사제들은 유대인 박해의 배후 세력이었다. 이들은 유대인들에게 교회 예배 참석을 강요했으며,  반유대 시위에 학생이나 도시 불량배들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17세기  중엽에서 18세기까지 고문과 잔악한  박해가 많이 기록되어 있다.  1740년대와 50년대에는  거의 매년  종교적 광신주의자들의  피의 모독(blood libel)이 있었다. 최악의 사건은 1768년 폴란드 귀족사회의 반대 단체와의 충돌이 있었다. 쩨렌쯔니악(Zhelezniak)이 이끄는 깡패들이 동부 폴란드를 장악했으며, 그들 중 일부는 우만(Uman)의  중요한 한 성채를 공격하여 많은 유대인들과 귀족들을 살해 했으며, 이  때에 처형된 사람은 20,000여명으로  그 중 수천명의 유대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요약하면,이 시대의 유럽에 살던  유대인들의 지위는 매우 보잘것 없었으며 전체주의자들의 태도는 거의  중앙집권적인 통치의 힘을 위하여 소수민족이나 단체들의 자치적 힘을  거의 인정하지  않았다. 한편,"계몽된"  전체주의자들은 소수 민족을 "변형" 시켜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그들의 인권을 존중하면서 유대인들의 통합을 꾀하였다.

㈐ 계몽주의의 결과와 프랑스 혁명
  16세기의 종교개혁으로 인한  변혁 만큼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유럽의 변화는 전체주의의  몰락과 개인주의의 탄생으로  나타났다. 개인의 양심의 자유와 평등이 존중되었으며,  이는 곧 유대인들의 법적  지위를 위한 투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중세 종교, 사회  조직의 체제가 붕괴되면서 인식된 유대인들의 '자리매김'은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통하여 이룩된다.
  프랑스 혁명은 평민들의 귀족들에 대한 불만과 혁명 사상으로서의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이루어 졌다.  계몽사상은 17세기에 시작된 과학자들-갈릴레오, 뉴턴, 테카르트, 호이헨스, 파스칼등-에  의해 이룩된 과학 혁명과, 사회 과학자들-로크(사회계약론), 콩도르(낙관주의), 아담  스미스(자유 방임론), 루소(자연법, 교육, 인간불평등 기원론), 볼테르(리신론)등-에 의한  인간의 리성 발견을 기본 원리로 하고 있다.
  1789년 8월  말 루이 16세의 삼부회가  사라지고 프랑스 국민의회가 발족하였다. 국민의회는 [인권선언](Declaration of the  Rights of Man)에서 다음과 같이 공포하였다:"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가지며, 어떤 인간도 자신의 신앙으로 인하여 침해 받지 아니한다".
  이보다 조금 앞선 1786년  미국의 버지니아에서 선포된 [종교 자유를 위한 헌장](Acts for establishing Religious Freedom)에서도 역시 "모든 인간은 어떤 종교의 예배, 장소, 사역에 강요  받지 아니하며,...어떤 종교적 입장이나 신앙에 의한 고통에서 배제된다. 모든 인간은  종교 문제에 있어서 그들의 입장을 지키기 위해 논쟁하거나 고백하는 것은 자유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물론 이와같은 선언이 유대인들의  법적 지위를 인정하는 논리적 근거가 된 것은 사실이나 즉각 이 개념이 실천-시행된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단지 프랑스 혁명의 정신과 목적을 반영하는  추상적인 원칙 - 다양한  부분의 관심, 전통 개념과의 상호 균형 -의 선언일 뿐이었다. 앉아서 이러한 권리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 나폴레옹(Napoleon)과 유대인
  1793년 국왕인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도덕 공화국을 세운 자코방파는 대중들의 지지를 얻기에는 그들의 이상은 너무 추상적이고, 그 실천은 너무나 폭력적이었다. 1795년 가을, 불만에 찬  파리 시민들이 봉기 했을 때 국민 의회를 위기로부터 구출해 준 나폴레옹은 해방의 원칙(Emancipatory Principle)을 지키려는 자들과 이를 반대하는 자들 사이에서 발생한 정치적인 충돌을 계기로 권력을 얻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급기야 1799년 국가  지상주의(Statism)를 내세우며 중앙집권적인 군주제를 부활기키면서 황제에 등극하였다.
  그는 외국과의 전쟁에서 계속 승리함으로써 유럽 전역에 걸쳐 그 세력을 뻗어 나갔다. 그러나 프랑스의 팽창주의는 여러 나라들의 강력한 반발을 일으켰으며, 스페인, 독일,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이탈리아등지에서 민족주의 운동을 일으키게 하는데 기여하였다. 마침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는 그를 엘바섬에로의 유폐(유폐)로 막을 내렸다.
  한편, 유대인에 관한  문제는 알사스-로렌(Alsace-Lorraine) 지방의 주민들이 유대인들에게 빚 문제를 제기하면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결국 이 문제는 프랑스 국민의회에 상정되어 유대인을 위한  특별법(special laws for the Jews)을 제정하려고 하자, 이 법이 평등 원칙에 위배된다 면서 거부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1년동안 유대인에 관한 모든 안건을 토의할 기구를 두도록 하였으며, 동시에 [유대인 저명인사 의회](The Assembly of Jewish Notables)를 구성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1806년 7월 이  기구가 설치되어 유대인들에게 제기된 12개의 질의서 -일부다처 및 이혼에 대한 유대인들의 의견, 프랑스와 프랑스 국민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 유대 자치 기구의 권위 문제,  유대인들의 고리대금업과 직업문제 등 -를 토의하여  응답하도록 하였다.  이 의회는  1807년 2월에  [대산헤드린](The Great Sanhedrin)으로 개편되어 이 문제를  토의한 후, 9개 결의안을 발표하였다. 나폴레옹에 따르면 이 결의안은 프랑스안에서 "모세종교의 조직"을 발표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1808년 3월에는  유대인들의 지위를 규제하는 두 칙령이 공표되었다:1)프랑스 안에서  공동체의 계급적  조직(hierarchical organization  of community in France)을 규제하며, 모든 개인 또는 단체의 일은 파리에 있는 중앙 감독원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2)불명예스러운 선언(D cret  Infame)으로 불리워지기도 하는 이칙령은 유대인에 대한 모든 대부(loans)를 통제하며, 무역 거래를 위해서는 특별허가를 받아야하며, 아울러 다른 지역에서 프랑스의 북동지역으로 이주하기를 원하는 자는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의 이와 같은  변화된 조처는 다른 전체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국가안에서 유대인을 통합하려는 의도를 실천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으며, 동시에 국가를 종교보다 우위에 두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 영향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다시 게토(Ghetto)로 돌아 갔으며,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동등권은 국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폴레옹에 의해 수여된 것이다"라는 말이 만들어진 것이다.
  요약하면 17-18세기 유럽의 정치적,  사회적, 정치적 변화는 유대인들의 법적 지위에 서서히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특히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유대인들에게도 전적인 동등권이 주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권력의 개입과 함께 인정됨과 동시에 그들의 목적에 이용되어 왔다. 절대군주들 처럼 이들은 그들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이 일을 진행 시켰으며, 유대인들을 "통합"(integrate)하고 "개혁"(reform)하려는  의도가 컸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조항들은 자주 바뀌기도 하였으며, 그  시행이 지연되기도 하였다. 17-18세기 말까지는 적어도 유대인들의 완전한 법적 동등성을 확보하기 위한 과도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③ 동유럽 유대인들의 내적 투쟁
㈎ 정통 유대교의 쇠퇴
  유럽에 있던 유대교의 외적인 상태와 정신적 상황의 변화는 그들의 신앙과 사상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주었다. 즉 그들은 1,500년 이상 지켜온 율법-탈무드 전통이 점차 쇠퇴해 가면서  전통적인 랍비들의 경건성이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즉 계몽주의와 더불어 정통 유대교의  율법주의는 쇠퇴해 갔으며, 주변 세계와의 접촉과 교류, 특히 유럽의  새로운 교육제도와의 만남으로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1,800년경 서유럽에서는 존경받을 만한  탈무드 학교가 없어졌으며, 동유럽에서 조차 이러한 학문적 전통은 낡은 형태에서 벗어 나지 못하였다.

㈏ 신비주의의 발효(Jacob Frank와 그의 종파)
  극단적인 사회주의를  배격하는 폴란드의 유대  사회는 그것과 대조되는 신앙과 종교를  일으키기 위해 신비주의를  발효시킨다. 1750년 야콥 프랑크(Jacob Frank)는 포돌리아(Podolia)  태생으로 [남은  안식주의자](Sabbatean Remnants)의한 분파를 만들었다. 이들은 "탈무드에 반대하는 유대인"으로 규정되어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했으나  여전히  하나님의  성육(incarnation)하심과  삼위일체(trinity)를 믿으면서 예루살렘에서의 이스라엘의 구원을 거부하던 자들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는 탈무드를  공개적으로 불태웠으며, 그를 비판한 주교가 갑자기 죽자 더욱 기승을 부렸다.
  1759년   프랑크 신봉자들은 "유대인들이  제의의 목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의 피를 사용하고 있다"고 소문을  퍼뜨리기도 하였다. 기독교로 개종하겠다는 그의 요청이 교회에 의해 거절되면서  그는 13년간이나 체스토코바(Czestochowa) 성채에 감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따르는 수백명의 유대인들은 계속적으로 불어만 갔다.
  프랑크는 카발라식 안식주의자(Kabbalistic Sabbatean) 전통을 정치 사상의 흔적으로 연결시켰다:"폴란드는 선택된 땅이요,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군대의 힘이 필요하다". 그는 군대를 조직하였으며, 다른 나라들과는 다른 정치적 제도를 구상하기도 하였다.
  1772년 러시아가 폴란드에  들어오면서 프랑크는 다시 석방되어 독일의 오펜바하(Offenbach)에 정착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가 죽고 난 후 그의 딸이 지도자가 되었으나 19세기 초에 이 운동은 사라지고 만다.

㈐ 바알 쉠 토브(Ba'al Shem Tov)와 하시딤 운동(Hasidism)의 시작
  "선한 사람들의  주인"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랍비  바알  쉠 토브(R.Israel ben  Eliezer Ba'al Shem Tov,1700-1760) 은  포돌리아(Podolia) 태생으로 가난하게 살았다. 젊어서 그는 회당의 보조 교사였으며, 몇 년간의 명상과 독신생활 이후 그는 기적을  만드는 사람(Ba'al Shem or Miracle Worker)이 되었다. 그후 그는 종파의 지도자가 되어  몇 장의 편지외에는 남긴 것이 없지만 그의 가르침과 인격은 큰 힘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는  당시의   금욕적인  카발라주의자들(ascetic   kabbalists)과  안식주의자(sabbateans)들과  접촉하기도 하였으며,  나아가  밀의적(밀의적)  신비주의 원리(esoteric mystical theories)을 발전시켜 나갔다. 당시에는 극단적 밀의종교가 널리 퍼져 있었으며, 칸트 철학자였던 솔로몬 마이몬(Solomon Maimon)은 밀의적 실천을 통하여 죽음을 서둘렀던 자로 잘 알려져 있었다.
하시딤의 신앙에  의하면 "의(Zaddik)은 세상의  기초이다". 온 세상은 그로부터 나왔으며, 모든 영적, 물질적  부요함은 그에게 통제된다. 의은 하나님의 결정조차 바꿀수 있는 유일의 힘이다.
  또한, 하나님과의  교제(devekuk,'붙다','풀')는 특별히 중요하다. 화해(memuza,'mediating')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필요하다. 하시딤의 기본 원리는 "하나님을 위해 비워 놓을 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신은 모든 영역에 존재하기 때문에 의의 지도자들의 중심 목적은  모든 물질세계의 세포(kelipot)에 감추어져 있는 신의 빛을 표출시키는 일이다.
  이들의  가르침의  핵심은 열정,  백열상태(life  of  fervor)와  초월적인 기쁨(exalted joy)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들은 '초월', '영원', '위'등의 용어를 즐겨 사용하였다.하시딤 운동은 메시아에 대한  대망 사상을 약화 시키지는 않으나 이를 현재적, 내재적 개념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1747년  새해에 그가  경험한  신비적인  환상은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의 수레(divine Chariot)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았으며, 그의 가르침이 온 세상에 널리 알려져 두루  퍼지게 된다는 약속을 받았다는 것이다. 1760년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그때까지 이것은 '운동'(movement)으로 제도화 되지는 않았다.

㈑ 하시딤 운동의 구체화
  마기드(Maggid,'설교가',cf.삼하15:13)는 14세기  중세 때의 "떠돌아 다니며 설교하는 사람"(Wandering  Preacher) 혹은 "대중 설교가(Public Preacher)로서 16세기에는 "조직되어 있지 않은 지식계급"(non-establishment intelligentsia)으로 불리우는 사람들이었다.
  도브 바엘(Dov Baer of  Mezhirech)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바알 쉠 토브의 제자들은 하시딤  운동의 여러  사상들을 구체화  시켜 나갔다.  특히 랍비  야콥 조셉(R.Jacob Joseph of Polonnoye)은 첫 번째 하시딤 운동에 관한 책인 [야콥 조셉 전승](Toledot Jacob  Joseph,1780)을 출판하였다. 그는  기도를 하시딤 운동의 기본강령으로 강조하였다. 또, 동물의 제의적 도살,  공동식사, 안식일이나 절기 식사중에 행하는 의에 관한 설교등이 특별히 강조 되었다.
  그 외에도  여러 대설교가들(Great Maggidim)으로써  레비 이삭(R.Levi Issac of Berditchev),  미카엘(R.Jehiel  Michael  of  Zloczow),  엘리멜렉(R.Elimeleh of Lyzhansk)등 많은 랍비들이 있다.

(4) 반유대주의(Anti-Semitism)
① 반유대주의의 실상과 허상
  우리는 앞서 중세 유럽인들이 토의하였던 유대인에 관한 입장을 정리해 보았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만나지게 되는  유럽인들의 경향 가운데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 의식이  매우 깊게 깔려있다는 점이다.  어디서부터 이러한 문제의 발단(발단)이 있는가? 특히 종교적 관점에서의 차별은 단지 중세의 정치적 경향으로 치부하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아 보인다.
나아가 근세를 지나 현대로  오면서 시작된 유대인의 독립 운동인 시온주의의 기원이 "반유대주의는 시온주의를 낳았다"는 말로 요약되고 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현대 이스라엘의 독립을 향해가는 유대인들의 시온주의  운동의 배경을 이해 하기 위해서 반드시 반유대주의를 집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
  우리는 먼저 반유대주의의 정체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의 시작도 점검해 보아야 한다. 이 이념이  형성되고 발전되게 되는 여러 동기들과 그 과정도 중요하게 취급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반유대주의는 또 다른 이념적 허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② 반유대주의(Anti-Semitism)는 존재 하는가?
  유대인에 대한 미움은 한 시대의 유대인에 대한 나쁜 감정일 뿐인가? 아니면 무엇인가 오랜 역사적  과정에서 발전된 하나의 체계적 이념인가?  이러한 질문은 반유대주의의 정체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질문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반유대주의가 하나의  실체로 이해되기에는 너무나  추상적이며, 조작된 허상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구체적인 양상으로 나타난다는데 있다.
이스라엘의 전수상  이쯔학 샤미르(Izhak Shamir)는  "나는 지구상의 어디에서도 반유대주의라는 이름의 망령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유대인을 미워하는 사실만이 존재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프랑스의 지성인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반유대인 사상은 그것이 무엇인지  환영을  가지고   있지  않다(no  illusion).  반유대주의는  형상이  없다(no imagination). 그것은 처음부터 비합리주의(irrationalism)에  바탕을 두고 생겨났다. 다만 그것은 유대인에  대한 단순한 '의견'(opinion) 이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반유대주의는 하나의 죄악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것을 이루기 위해 준비한다. 유럽인들은  그것이 바로 유대인을 죽이는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고 역설하였다.
  이처럼 반유대주의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불확실성이 문제로 제기되고 있는 한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논의할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구석구석에서는 유대인 공동묘지가  파헤쳐진다든가 유대인에게 불이익이 불법적으로 자행된다든가 하는 구체적이며 조직적인 반유대적 행동들이 수없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보이지 않는 유대인에 대한 미움의 뿌리가 존재할 뿐 아니라, 그것이 오랜  역사적 뿌리를 가지고 자라나  하나의 실체로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사실은 나치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Holocaust)을 통하여 확인 되었을 뿐이다. 이 사건은  유대인들의 문제를 하나의 '집단적 사건' 또는 '실체적 현상'으로 보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먼저 반유대주의의 정체를 분명하게  파악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의 기원을 역사적 맥락에서 점검해 보아야 한다. 이 아이디어가 형성되고 발전되게 되는 여러 동기들과 그 과정도 중요하게 취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가 파악하려는 반유대주의는 또 다른 허상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③ 반유대주의의 기원(Origin)과 정체(Identity)
  반유대주의는 하루 아침에  탄생되지 않았다. 반유대주의의 역사는 유대인의 역사 만큼이나 오래된  일로써 수 세기에 걸쳐 축적되어온 문제이다.  에집트의 바로왕이 단지 노예들의 인구가  불어 난다는 막연한 이유로 인하여 히브리 노예들에게 행한 박해, 수산궁의 하만이 모르도개와 그의 백성에게 행한 대학살의 음모 ,헬라 시대의 마카비 전쟁을  통한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의 갈등, 로마시대의 제1차,2차 유대 반란을 통한 대학살과 도미티안(Domitian), 하드리안(Hadrian) 황제등의 개인적 감정을 넘어서는  유대인을 향한 로마 정책, "아말렉이 너희에게 어떻게 하였는지를 기억하라"는 말씀- 여기서 강조하는 점은 적(아말렉)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적이 너에게 한  일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등 수없이 많은 원인이 불명료한 미움과 박해 사건들이 성경안에도 기록되어 있어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타국인들의 이해의 정도를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유대인에 대한 미움과 박해의 원인을 유형별(typological)로 분류해 봄으로써 역사적으로 발전되어  온 반유대주의의 뿌리와 정체를 함께 파악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 종교적 반유대주의(Religious Anti-Semitism)
  고대 이스라엘 사람 혹은  유대인에 대한 미움은 소수의 유일신 신앙 공동체(the Monotheistic Minority)와  다수의 이방 제국(the Mighty Pagan Empires)과의 갈등의 결과로 설명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종교 사상은 유일신 신앙에 기초하고 있다. 유일신  사상은 원칙적으로 다신교를 숭상하는 열국들과의 종교적,정치적 타협을 거부한다. 따라서  그러한 태도는 늘 힘센 열국들로 하여금 소수의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박해를 가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박해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단순히 정치적 박해로  이해되지 않고 종교적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를  또한 가지게 한다. 수산궁의 하만에 의한 유대인 박해는 어디까지나 정치적 박해였음에도  불구하고 에스더서는 종교적 해석을 통하여 유대인들의 승리를 칭송한다.
  근대 유럽 사회에서 유대인들이  박해 받은 근거로 제시되었던 것이 바로 유대인들의 독특한 종교  관습이었다. 안식일을 지키며, 까다로운 음식법(Kashurut)에 따라 살면서 결코 동화되지  않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성격은 지배 계층인 유럽인들에게 있어서 늘 눈에 거슬리는 혐오감이 되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성격은  종종 '선민'(chosen people)이라는  용어로 규정되기도 하였다. 적어도 이러한 종교적 반유대주의는 유럽의  근대 사회가 태동 되면서 개인의 권리가 그의 종교에 의해  차별되지 않아야 한다는 사상이  펼져지던 17-8세기 이전까지는 매우 설득력있는 박해의 근거로 이용되었다.

㈏ 사회적 반유대주의(Social  anti-Semitism)
  1세기 로마 제국  내에서의 반유대주의는 유대인 박해의 근거로써 "유대인들의 반사회적 경향"을 들고 있다(Pliny the Elder). 다시 말하면 로마 사람들의 눈에 비추어진 유대인들은 로마  사회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지니고 있다고 비추어졌으며, 바로 그 원인이  로마로부터 유대인들이 박해 받게 되는 까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적어도 로마인들의 눈에 비추어진 유대인의 그러한 배타적 생활 방식은 물론 유대인 입장에서  보면 앞서 설명한 대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종교적신앙이 그들에게는 반사회적 경향으로  비추어진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적어도 로마인들에게 있어서 유대인들은 현상적으로 반사회적 경향을 지닌 반로마주의자들로 분류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알렉산드리아의  아피온(Apion)과 마테토(Manetho), 로마의 타키투스(Tacitus)나 세네카(Seneca)에서도 발견된다.
  이러한 지적은  중세 유럽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속한 사회에서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기보다는 유대인끼리만 모여 살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주변의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며 살아왔다는 것은 어느정도 사실이다. 물론 유대인들  입장에서 볼 때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한 변명이 없지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타인의 눈에 비추어진 유대인의 모습은 그러하였다.

㈐ 신학적 반유대주의(Theological anti-Semitism)
  기독교 세계에서 반유대주의는 예수를 박해한 유대인들 스스로 짊어지게 된 '피 값'이라는 의식이  팽배하게 지배하면서 얻어지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과의 관계 변화의  싯점을 유대인들에 의한 예수의  처형 이 후로 잡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초기 기독교는  점차 유대교를 비판하고 거부하여, 그들로 부터 분리되어 나옴으로써 '자율적이며 독자적인' 종교로 발전해 나갈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가장  강력한 역사적 근거로써 예수의 유대인에 의한 박해 받음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는 기독교의  자기 동일성(Self-identity) 확보를  위한 유대인 혹은 유대교에 대한 신학적 거부로 설명된다. 특히 기독교의 구속사적 신앙(Heilsgeschichte)에서 볼 때, 유대인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를 죽임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백성이 되었으며,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낡은 이스라엘(Old Israel)은 새  이스라엘(New Israel)로  대치되었으며, 옛 계약(Old  Covenant)은 새 계약(New Covenant)으로  교체 되었다. 구약(Old  Testament)은 신약(New Testament)의 빛 아래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그들이 당한 모든 역사에서의 고통은 하나님의 섭리(계획)하심이라는 신학에 의해 뒷받침 되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을 박해하는 일에  대한 도덕적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이 '하나님의 계획'과 '자기들의 폭력'을 구별하지 않았다는데 그 오류가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입장에 서 있는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에 대한 신학적 태도와 윤리적 논점을 혼돈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이 의식은  2,000년간의 기독교 교회사에서 일관되게 주장되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기독교 교회는 시대마다 일어난 유대인 박해사건을 '유대인의 예수 배척의 귀결'로  보았고, 유대인들은 이를 '무고한 피흘림'으로 이해했다. 적어도 중세의 교회는 이러한 시각에서 유대인들을 판단하고 박해하였다.

㈑ 정치적-인종적 반유대주의(Political-Racial Anti-Semitism)
  근세-현대에 오면서 이러한  여러 유형들의 반유대주의 사상들은 유대인들의 시민으로서의 동등한 권리를 제한 함으로써 보다 정치화 되어 갔다.  특히 유럽 사회에서의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비인간화는 유대민족에 대한 생물학적 인종차별(racism)로 나타나기에 이른다.
  이러한 형태의 새로운  반유대주의(Der neue Antisemitismus)는 그 동안 계속되어 오던 여러 형태의 반유대주의의 종합적인 축적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현상은 단순히 한 쪽 측면-그것이 종교적이든,사회적이든,정치적이든 간에-에서만 해석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박해는 역사적으로 타  민족에게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러한 정치적 반유대주의는 늘 지배 체제-그것이 로마의 네로 황제이든 독일의 히틀러이든지 간에-의 유지를 위한 정치적 수단 또는 목적으로 이용되어 왔다.

④ 현대 반유대주의
㈎ 특성
  현대  반유대주의(Modern  anti-Semitism)는  초기  반유인  운동(Early anti- Jewishness)와는 구별된다. 초기는  주로 유대교의 종교적 관습 및 전통에 대한 이방세계 혹은 기독교 세계의 증오로부터 시작 되었다면, 현대의 그것은 수세기에 걸쳐 내려온 이러한 유럽인들의 유대인에 대한 의식이 유대인에게 정치적, 조직적 박해의 형태로 나타난다.  유대인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반유대적 감정은 그런 점에서 매우 이념적이고 종교적인  것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나, 드러나는 현상은 잠재의식적 수준을 넘어서는 매우  정치적인 것이어서 그 현상이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적어도 유럽인들의 눈에 비추인 유대인의 배타적 신앙과 생활 방식으로부터 싹트기  시작한 반유대주의는 급기야  유대정신(Jewish spirit)의 파괴를 선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독일에서는 유대인의 인종적 열등함이 강조 되면서 인종차별주의자(racist)와 연합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현대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의 역할이나 영향에 대해 투쟁하려는 목적을 가진 유럽인들의 조직 및 정치적 정당의 확산이라 특성지울  수 있다.이는 유럽 사회가  지닌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법으로써 "Jewish Question"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이념적 뿌리(ideological roots)
  17-18세기의 유럽의 변화는  합리주의적 사상의 지지자들이 이끄는 반전통주의자 써클(anti-traditionalist circles)을  만들었다. 이들은 특히 그들의 전통 및 종교적 신앙과 분리될  수 없는 유대인들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한편, 유럽사회주의자(Socialist)들은 유대인의  사회적 역할과  유대교의 본질사이의 관계를 부정적인 태도로 보았다. 이들은  유럽 공산주의의 발전에 있어서 유대인들의 반사회적 경향(anti-social tendency)을 강하게 비판했다.
  또 사회적 진화론(social Darwinism)은 인간의 역사나 사회의 발전을 자연과학적인 적자생존 이론에 적용시키면서,  인간은 생존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으로부터 적응, 발전해 나가는  것이기며, 따라서 우생학적으로 열등한 '종족'(race)은 도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유대인들은 아리안족(Aryans)과는 달리 정치적으로나 문화적 성취력,도덕적-사회적 가치로 볼 때 열등한 '종족'으로 규정하였다.

㈐ 사회적 뿌리(social roots)
  유럽 사회의 변화는 정치의  민주화를 가져왔고, 이는 보다 많은 국민들이 보다 넓은 정치 영역에  참여하여 책임을 나누는 역할이 보다 더 강조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변화가 보다 큰 반유대주의를 부축이게 된 것이다.
  유럽에서의 '자유사회'(free society)는  보다 자유로운 경제적 경쟁, 이 결과로 야기되는 독점상태의 몰락을 가져  왔다. 그러나 경제적  자유주의는 국제적 길드(gilded International)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오히려 이익이 되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경제적 힘은 '악한 유대인'(evil Jews)이라는 중세의 망령을 다시 불러 일으키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유럽의 경쟁자   혹은  반대자들에게   있어서  유대인   경제가인  로스최일드(Rothchild)는 세계  경제와 증권 시장을 지배하는  지배자의 상징이었다. 또 막스(K.Marx)와 라살(Lassale)은 유대인  혁명가의 상징으로, 보에르네(Boerne)와 하이네(Heine)는  극단주의적  문학가  혹은  저널이스트의  상징으로, 번하르트(Sarah Bernhardt)는 극장을 지배하는 상징으로 등장하였다. 이러한 요소들은 반유대주의자들로 하여금 보다 큰 정치적 힘으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 독일에서의 반유대주의 운동의 조직
  독일에서의   반유대작가들의  활동은   카톨릭   잡지인  [게르마니아](Germania) 로부터 시작된다.  저널이스트인 오토 글라가우(Otto Glagau)와 윌리암 마르(Wilhelm Marr)는 유대교와 독일주의  사이의 생사를 건 투쟁으로써 국가의 문제들에 관한 여러편의  기사를 쓰면서, '반유대주의'(anti-Semitism)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다.
  1878년 기독교 사회운동가 당을 만든 아돌프 스토커(Adolf Stoecker)는 반유대적 연설을 통하여 유럽인들을  자극, 선동하였으며, 1879년말과 1880년에 이르러 독일은 반유대주의 운동은 중심이 되었다.
  역사가이며 교수였던 하인리히  트로츠키(Heinrich Treitschke)는 유대인들이 독일 문화와 사회에 동화되어 가는 것 자체를 독일-유대적 잡종('mongrel')문화의 탄생이라 하여 거부하였으며, "유대인은 우리의 불행"(the Jews are our misfortune)이라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가장 극단적인 주장을  한 사람은 두링(Eugen Duehring)으로써, 그는 유대민족의 여러 성격을 공격할 뿐 아니라 유대인 피에 대한 중상 모략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는  고대 히브리 민족이 행하던 인간제사(human sacrifice)를 공동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는 사건으로 보아 반유대주의의 근거로 삼기도 하였다.
  이러한 독일 내에서의 반유대주의  운동은 동유럽 전체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러시아 지도자였던 알사코브(Aksakov)는 1881년에 "최근 유럽문화를 리드해 나가는 독일에서 시작된 반유대주의 운동은  종교적 불관용, 미숙한 무지등에서 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이것은 너무  뒤늦게 일어난 대중의 각성의 증거이다. 서유럽의 기독교 세계는 이 일을 주시할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반유대주의의 첫 국제' 회의는  1882년 말 드레스덴(Dresden)에서 열렸다. 이 회의는 "유대인때문에 위험하게 된 기독교 국가의 정부와 국민들에게 드리는 선언문"이라는 제목으로 회의 결과를  출판을 하였다. 이 문서는 모든 도시에 유대인과 투쟁하기 위한 위원회를 두도록 요청하고 있으며, 이 위원회는 [국제 기독교 동맹]으로 단일화 하자고 제의하였다. 1883년에 열린 제2차 회의에서는 이 운동의 연합 이념으로 두링의 이론을 채택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이 운동의 기초를 인종주의에 두려는 것을 반대한 사람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헝가리에서는 국회부의장이었던  이소크치(Isoczy)가 반유대 발언을 시작하였다. 그는 유대인들의  추방을 주장했다. 모든  유대인을 팔레스타인으로 보내 그곳에서 유대국가를 세우도록 충고하였다. 오스트리아에서도 돈(재정)과 말(언론)을 통제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추방을 선언했다.

㈒ 동유럽 국가의 정부의 공식적 정책(official government policy)으로서의 반유대주의
  러시아에서의 반유대주의 운동은 알렉산더 II세때 까지만 하여도 정부의 공식적인 정책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1881년 혁명으로 인하여 죽고 알렉산더 III세가 등장하면서 진보적  경향에 대한 어떠한 양보도 하지 않았다. 다시말하면 러시아 안에서 유대인들의  수가 점차 불어나고 그들의 경제적 지위와 힘이 향상 되자 러시아인들은 이들에게서 위협을 느끼게 된다. 급기야 1881년 4월 29일  러시아의   남서지방에서  반유대인   폭력 시위를   시발로  엘리짜베가르트(Elizavetgrad)에서도, 키에브(Kiev)에서도, 5월에는 오데사(Odessa)에서 연속으로 일어났다. 살인과 약탈, 방화와 강간등이 도처에서 자행되었다.
  특히 젊은 유대인들은 중학교나 고등교육 연구소등에서 교육받을 기회를 박탈 당했으며, 정부가 반유대주의 신문을 발행했고, 반유대 정책을 정권 통치의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1911년 키에브(Kiev)에서  발생한 사건 중 "유대인들은 그들의 제의의 목적으로 필요한 기독교인의 피를 얻기 위해 기독교 소년을 살해했다"는 이유로 구속된 멘델 베일리스(Mendel  Beilis)는 러시아 안에서 유대인들을 공식적으로 박해하는 보다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루마니아에서는 유대인들의 은행  소유를 법으로 금지하였고, 정부는 반유대주의 운동 단체들에게 재정 후원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유럽 각지에서의 유대인 박해운동은 유대인들의 독립을 위한  이념 확립 및 국민 운동으로서의 시온주의 운동을 더욱 불러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7. 현대 이스라엘의 건설과 중동의 평화
(1) 시온주의의 태동과 그 이념
① 시온주의
  '시온주의'(Zionism)란 용어는 19세기 말 나단 번바움(Nathan Birnbaum)이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이다.   그는   1890년   4월   1일자   잡지인[Selbstemanzipation]에서 시온주의를 "에레츠  이스라엘을 향한 과도기에 설치한 민족적-정치적 시온주의자 정당  기구"라 정의하였다. 그는 이 글에서 '시온주의'를 정치적 개념으로  정의하였다. 그 후 시온주의의 아버지인 헬쩨(Herzl)은 [유대국가](The Jewish State,1896)에서 이 개념을 재천명하였다.

② 헬쩨의 생애와 사상
  현대 시온주의의 아버지인 헬쩨은 1860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의류상이었으며, 전통적인 유대 종교 가문이었다.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헬쩨은 문학에 관심을 갖고 비엔나로 옮겼으나 로마법 전공을 위해 법학부에 등록하였다. 1884년  그곳에서 박사학위를 마친 그는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비엔나에서 종종 일어나고 있는 반유대주의자들의 유대인에 대한 폭력 사건을  경험하면서, 유대인 문제에 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887년  베를린의 한 신문에 기고하면서  그의 입장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1891년 10월 파리에 있는  Neue Freie Presse에 고용이 허락된 그는 정치, 문화 운동의 중심지인 그곳에서 수년간 근무한다. 그는 그 시대의 많은 새로운 정신을 배웠다. 특히 그는 유럽의 반유대주의와 급진적인 사상을 많이 배우게 된다. 1893년 그는 교황의  알현을 신청하면서 만일 교황이 반유대주의 추방을 위하여 힘써 준다면, 많은 유대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겠다는 제안을 준비할 정도 였다. 그러나 교황은 그를 만나 주지 않았다.
  그는 이 일을 포기하고 큰 꿈(a mighty dream)을 꾸며 Utopia를 그려 보았다. 그는 당시 유대인 박애주의자였던 바론 헤르쉐(Baron von Hirsch)를 만나 "당신은 많은 돈을 가진 유대인이요, 나는 정신을 가진 유대인입니다"라며 제휴를 건의했다. 당대의 부자인 로스촤일드(Rothchild)는 그에게 500 프랑을 기부하기도하였다.
  그는 36세가 되던 1896년  2월에 [Der Judenstaat]를 출판하였다. 이 책의 출판과 함께 정치적 시온주의 운동은 시작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하나의  이상적인 유대국가 건설을 꿈꾸며, 이미 실질적인 기본 구상을 하고 있다.  그의 시온주의의 궁극적 목표는 단연코 "유대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 "우리의 첫 과제는 지구 한  모퉁이에 우리의 상당한 요구를 충족시킬만한 영토를 찾이하여  국제법의 보호를 받으면서 독립국가로서의 주권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는 도덕적이고 합법적이며 인본주의적 운동일뿐 아니라 우리 국민이 오랫동안 열망해 오던 목표로 지향된 것이다".
  그는 토마스 모어(Thomas More)의  유토피아 사상과 그의 사상 사이의 간격을 강조한다. 그는 과거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가능성의   출발을   삼는다.   이러한   박해의   총체적   경험은   반유대주의(Anti-Semitism)로 불리운다. 유대인들에게는 유토피아의 꿈보다는 현실의 고통에서 이해되는 해방이  더 크고 중요한 주제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힘이란 곧 유대인들의 비참함이다"라고 말한다. 재정도 없이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은 곧 유대인들의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자유와 행복, 그리고 영광은 유대인 국가의  건설을 통하여 이룩할 수 있다는 확신에 찬 젊은이들이 이러한 사상들을  보다 많이 선전해 주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자의적 노력을 강조하였다.
  헬쩨은 반유대주의자들의 표어인  "우리는 우리를 초청한 국가의 국민으로 살면 충분하다. 우리는  그들이 없으면 굶어 죽게  될 것이다"라는 주장에 관하여 비판하면서, "이러한 동화를  강요하는 발상은 유아적인 오류이며, 나아가 우리 유대인들은 우리의 주인이  되어줄 국가(host nation)를 요청한적이 없다"고 강조하면서 구습에 의존하지 않은 새로움을 창조해 나갈 것을 역설하였다.
  유럽 사회에서의 유대문제를 해결해  나가기 위해 그가 제시한 방법은 다음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18세기  산업혁명 이후 노동자는 생산의 도구로 전락되어 기계에 종속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인간은 문명보다 우위의 존재이다. 이러한 문명을 초월하는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이 되기 위한 노력이 계속 되어야 한다. 전기의 발명으로 우리는 새로운 빛을 얻은 것 같이 빛으로 인간성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한가지 문제가 바로 유대인 문제(JEWISH QUESTION)이다. 이 문제는 우리들 자신만의 문제라기 보다는 억압받는 다른 존재들을 위한 문제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문제는 사회적-종교적 문제라기보다는  문명국가들과 더불어 정치적으로 풀어나가야 할 민족적 문제이다. 우리는 한민족, 하나의 민족이다.
  박해와 압제는 우리 유대인들을 멸종시키지 못했다. 지구상의 어느 민족도 우리가 가진 것 같은 투쟁과 고통이 없었다. 강한 유대인들은 박해가 멈출때 우리의 줄기를 다시 회복하게 될 것이다. 단순히 우리의 복장, 관습, 전통, 그리고 언어를 되찾는 외적인 비슷함(external conformity)뿐 아니라, 느낌이나 태도에서 동일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 동안 우리는  타민족들과의 잡혼(intermixture)에  의하여 유대인의 의식을 없이 하려는 억압을 받아왔다. 유대인들의 경제적 지위나 군사적-행정적 힘, 혹은 부의 축적이  반유대주의의 논리였으나 이러한 주장  중 그 어느것도 논리적 타당성이 없다:다윈(Darwin)의 채색 기능(chromatic function)이나, 기독교인들의 유대인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압력등은  장소마다 지역마다 하나의 억압의 논리였다. 모든 영역에서  이러한 논리로 전개시켜 나아가는 인위적 반유대주의는 죄이다.
  아무도 재벌이나  힘을 가진 자들이  아닌 자들이 민족을 이식(이식)하기에는 힘이 부족하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큰 꿈을 결코 그만 둔 적이 없다:"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NEXT YEAR IN JERUSALEM).
  지금이 바로 그 꿈을  영향력있는 사상으로 변화시키기에 적절한 시간임을 확신한다. 이것은 곧 실현될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사랑스러운 전통(습관)을 희생시키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다시 되찾을  것이다. 우리의 옛 집은 새 것이 준비되기 전에는 포기되지  않을 것이다. 자포자기는 가난을 가져오며, 번영은 부를 만들어 줄  것이다. 도덕적인 사람이란 개인 재산의 영역을 넘어서는 사람인데 우리는  먼저 사상적 안정을 도모하는  사회를 건설해야 하며, 나중에 유대인 정착 은행인 회사(Company)를 만들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물질적 본능을 자극하여 시온주의 운동에 동참케 함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1897년 제1차 시온주의 총회(Zionist Congress)에서 그는 "여기 나는 유대 국가를 세웠노라"고 선언하면서,  "빠르면 5년, 늦어도 50년안에는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그는 이 운동을 세속적인 복고운동과 관련시키거나 국수적인 종교운동과 연계하려는 것을 강하게 배격하였다.  그는 개인적으로 인본주의와 제정분리를  주창하였다. 그는 이 운동을 오직 "땅이 없는 백성, 백성없는 땅"(a people  without a land, a land without a people)의 논리로 해석해 나갔다.
  1901년 그는 터어키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가서 팔레스틴에로의 유대인 이민에 관하여 토의코자 하였다. 그 해 5월 "시온주의자의 자격으로서가 아닌 유대인의 대표, 그리고 영향력있는  저널리스트의 자격"으로 입국을 허락받아 이 문제를 제의 하였으나, 술탄 황제는 구체적으로 팔레스틴에 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다.
  헬쩨은 그 후 터어키의  빚  3,000만 파운드를 값아 주기 위한 모금을 실시하기도 하였으나, 터어키에 이민하여  시민권을 얻게 해 준다는 통보를 받았을 뿐이었다. 그는 계속하여 터어키 정부에 유대인들의 팔레스틴 이주는 위험하지도,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을  것이라는 점을 설명하였고, 오히려 산업이나 충섬심에 있어서 유익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나아가 그는 1902년 예루살렘에 대학을 설립할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으나, 터어키 정부는 오히려 젊은 세대가 고등교육을  통하여  위험하거나  급진적인  사상 등  '건강하지  못한  정신'(unhealthy spirit)을 배우는 것을 더 이상 원치 않았다.
  1902년 터어키로부터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한 헬쩨은 그의 외교적 활동의 중심지를 런던으로 옳기게 된다. 영국에서는 유대인 이민에 관하여 대중들의 의견은 대체로  좋은 편이었다. 헬쩨은 계속해서  로스촤일드가의 지원을 얻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1903년 영국 정부로부터 "왜 우간다 제안(Uganda Proposal)을 받아들이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게 된다. 우간다 제안이란 영국이 시온주의 지도자에게 제안한  것으로 아프리카의 우간다에  독립하라는 제안이었다. 우간다는 풍부한 자원과 설탕 및 면의 생산지로써 유럽인들에게는 아프리카의 노른자라고 일컬어지던 땅이었다.
  그러나 헬쩨은 종이에  시나이 반도와 이집트, 팔레스틴과 사이프러스를 그리면서 그곳을 원한다고 하였다. 얼마 후 헬쩨은 식민국(Aliens Commission)의 의장인 헤르포드(James Hereford) 경을 만나 이 일을 상의하였고, 그의 식민지 비서인 챔버린(Joseph Chamberlain)으로부터 영국령 지중해 남동쪽에 유대인 자치구를 두겠다는 생각에 원칙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는 응답을 받았다.
  그의 계산은  이집트의 엘  아리쉬(Wadi el Arish)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El Arish Project). 영국이 제시한 엘 아리쉬 안에 대해 헬쩨은 즉각 "우리는 이집트로 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결국 이 제안들-우간다 제안과  엘 아리쉬 안-은 모두 원위치로 되 돌려졌다. 헬쩨은 영국 의회가  우간다냐? 팔레스틴이냐?를 토의에 부치기도 전에 "우간다는 시온이 아니며, 시온이 될 수 없다"고 분명히 선언해 버렸으며, "유대국가의 건설은 팔레스틴만을  목적으로 한다. 선조들의 땅을  향한 염원은 결코 변하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일부 시온주의자들 가운데는  우간다를 받아들인 후 이를 전초 기지로 삼아 시온으로 가자는  과정론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노르다우(Nordau)는 "시온이야말로 최고의 이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달성될 수 없다. 구원은 오직 우간다를 통하여 올 것이다"라고 외쳤다.
  제6차 시온주의 총회(6th Zionist Congress,1903년 8월 23-28)가 러시아 바슬리(Basle)에서 열려 이 문제를 토의한 결과 찬성 285명, 반대 178명, 기권 98명으로 특사를 파견하기로 결의하였으나,  회의 얼마 후 처음부터 이 안을 거부하던 동유럽의 젊은 유대인이 노르다우를 살해하려다 미수로 그친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은 즉각 성명을 통하여 이 사건은 리더쉽에 대한 정치적 반란이 아님을 밝혔으나, 시온주의자들의 정신적 큰  충격으로 남게 되었다. 이 사건은 시온주의 운동을 분열시킬 수 있는 위험한 사건이었다.
  1903년 헬쩨의  건강이 악화되면서도, 그는  왕(Victor Emmanuel III)과 교황(Pius X)에게 진정하였다.  왕과 교황은 "우리는 이  운동에 호의적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태도였다.
  헬쩨은 제7차 시온주의 총의에 참가할 수 없었다. 그는 건강이 악화되어 결국1904년 7월 3일 4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병상에서의 고통은 가까운 친구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의 죽음의 소식은 전 유럽의 유대인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노예의 속박을 벗어나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던 "새로운 모세"(New  Moses)로 일컬어졌다. 그는 그의 조상들의 땅에로의 귀향이라는 야망을 불태웠고, 모세처럼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그는 "시온주의를 계획한 사람들은  그것의 찬연한 결말을 보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라는 자신의 말대로  가나안을 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는 정치적 시온주의의 창시자로서 본래 정치적 사상가는 아니었다.
  그는 죽기 얼마  전인 1902년 반정치공상(half political fantasy), 반과학소설(half science fiction)인 [낡고 새로운 땅](Altnueland)를 출판했다.  이 소설은 두 명의 내레이터가 팔레스틴을 방문하여 현대 유대국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곳에  점차 인구가 늘어나고 현대 기술, 관개 시설을 갖춘 이상적인 국가가 만들어지게 되며, 모든 여자들은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고, 교육은 무료이며, 범죄자는 징벌하는 대신 재교육을 시키고, 관용이 법원의 원칙이 되고, 완전한  정교분리를 갖춘 국가를 그리고 있다. "나그네가 우리처럼 집같이 느끼는 곳이  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그가 그린 국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의 환상은 분명히  지극히 낙관주의적이며, 계몽 사상으로 묶어진 발전적인 이상사회를 그리고 있다. 그의 이러한 환상에는 사회주의 운동의 중요성이 무시되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꿈은 정확히 그의 예언대로 50년만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그에 대한 모든 비판을 멈추게 한다.

(2) 헬쩨 이후의 변화들
  헬쩨가 죽은 후  시온주의 운동은 태줄이 떨어진  것처럼 힘이 없게 되었다. 생전에 그는 많은 비판과 공격을 받긴 하였으나, 그가 죽고 나자 생전에 그가 노력했던 많은 일들-콘스탄티노플과 여러 유럽의 소들 다니면서 이룩해 놓은 외교적 노력-은 허사로 돌아가게 될 위기에 처해졌다. 역시 그는 위대한 예언자요, 통찰력있는 지도자였음이 확인  되는 것이다. 우간다 문제는 여전히 미결인 채로 남아 있었으며,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는 이 운동의 구심점은 더욱 없어졌다.
  더구나 러시아 시온주의 운동의  문제는 더욱 일을 복잡하고 방향없이 만들고 말았다. 이들의 운동은 러시아 짜르 정권(Czar regime) 밑에서는 불법적인 운동이었다. 이들에게는 이러한 법적 제제가 운동을 크게 위축시키는 원인이었으며, 유럽의 시온주의 운동은 방향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헬쩨가 죽은 얼마 후 그가 남긴 일기를 묶어 출판하자는 제의가 나오자, 노르다우는 "그의 일기를 출판하는  일은 헬쩨의 이름을 몰락시키는 일이다. 이것을 읽는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바보스럽고 사기꾼이었는지를 알게 해 줄 뿐이다"라며 반대할 정도였다.
  1905년 7월 바슬리에서 열린  제7차 시온주의 총회에서는 우간다 제안이 공식적으로  부결되었다.  그리고  보다  적극적인  "실용적 시온주의자"(Practical Zionist)의 의견이 수렴되었다. 이들은 "디아스포라의 현재적 상황 내에서 가능한 일을 하자"는 실용주의적  입장에 서 있는 자들로써 이러한 일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정치적 협상을 통한 총체적 완성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들은 유대인에 대한 정치적,정책적  결정을 위한 노력보다 중요한 것은, 팔레스틴에 유대인들을 이주시켜  농업을 개발하고, 학교를 건설하면서 살 것을 주장하였다.
  헬쩨는 어떤 드러난 성공도 없이 20년 가까이 이들의 이러한 주장을 반대해왔었다.그는 늘 팔레스틴에 대규모의 개척만을 꿈꾸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터어키의 정치적 동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적은 돈과 인력을 가지고 작은 규모의 개척지를  확보하면서 점진적으로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 단지 자원을 낭비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물론 정착자들의 안전이나 터어키인들의 박해가 문제이긴 하지만.
  헬쩨는 "터어키로부터 완전한 보증을  받기 전에는 한 사람도, 1페니도 이 나라(터어키)를 위해 쓸 수  없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정치적 큰 해결을 무조건 기다려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큰 규모의 해결을 얻기 전까지는 모든 프로젝트는 뒤로 미루어야 했다. 따라서 이 슬로건은 다른 실천적 작업(Practical Work, Gegenwartsarbeit)- 작은 규모의 사람들이 팔레스틴에 정착하여 살아가는  일 등 -을 진행하고  있는 많은 이들의 생각을 무효화했다. 이러한 '참여자들'(Practician)들도  물론 이러한 헬쩨의 원칙을 반대한 것은 아니나, 적어도  포괄적인 특허장(comprehensive charter)를 얻는 것보다 유대인의 현재의 위상을 보다 강하게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 문제는 제7차 시온주의 총회에서 협상하여 그 종결을 보았다:"시온주의 운동은 팔레스틴에서 농업과 산업을 통하여 유대인의 지위를 공고히 해 나감을 원칙으로 삼는다"고 선언하였다. 이  일을 위해 새로운 대표로 실용적 시온주의자인  와르버그(Warburg)  교수,  우시쉬킨(Ussishkin),  그리고  코간  번스타닌(Kogan-Bernstein)을 선출하였으며,  정치적 시온주의자(Political Zionism) 쪽에서  그린버그(Leopold  Greenberg),   칸(Jacobus  Kann),  그리고  마르모렉(Alexander   Marmorek)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상임위원회(Inner  Action Commitee)의 의장으로 울프슨(David Wolffsohn)이 선출 되었다.

① 울프슨(David Wolffsohn)
  49세의 젊은  나이로 상임위의장이 된  울프슨은 시온주의 운동을 보다 젊게 이끌어 갔다. 그는 리투아니아(Lithuania)에서 태어나 전통적인 유대교육을 받았다. 그는 젊어서부터 시온주의 운동에 참여하면서 유대인들이 결코 시들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차  있었다. 헬쩨은 그를 최고로 인정하여 후계자로 여겼었다.
  그러나 그가 헬쩨이 죽은 후에 실용적인 시온주의를 제창하였다. 울프슨은 헬쩨의 사상을 모방하기 위해 언제나 최선을 다하였지만, 그는 헬쩨만큼 인격이나 능력에서 미치지  못하였다. 울프슨에 관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는 평범한 교육받은 인간이지 능력, 판단력, 다이나미즘, 리더쉽 등에서 부족한 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정당치 못하다. 물론 그는 지적이거나 원대한 디자인이나 새로운 큰 생각을  가지고 있지 못했으나, 초기 시온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던 환상을 많은 경우에서 필요한  평형을 유지해 나갔다. 그는 헬쩨이 이룩해 놓은 많은 접촉들을 지속하였다.  파리에서 로스촤일드를, 그리고 밤버리(Vambery)를 만났으며, 콘스탄티노플에도 두 번이나  갔다. 그가 1907년 10월에 터어키를 방문하였을 때에는 터어키가 새로운  재정 위기를 만났던 때였다. 그때 그는 예루살렘이 아닌 팔레스틴에 5,000명의 유대인 가족을 이주시키는 안을 제출하였다.
  그들은 오트만 터어키의 신민이 되어 군 복무를 할 것이며, 대신 25년간 세금면제 혜택과 그들이 소유할 수 있는 한 지역을 줄 것을 제안한 것이다. 이 때 터어키는 자기 정부가 진 빚을  값기 위해   2600만 파운드를 빌려줄 것을 제안하였으나, 울프슨은  200만 파운드를 제안했다. 그러나 이 울프슨의 제안은 당시 이운동의 1년 예산이  4,000에 불과했던 것에 비추어 볼때 무모한 제안이었다.
  1908년 터어키의 혁명과  이로 인한 황제의 폐위사건은 시온주의자들의 애국심을 다시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커다란 변화는 많은 시온주의자들을 지나치게 낙관적인 기대를 갖게 해 주었다. 그러나 아무도 이 일을 위해 나설 사람이 없었다. 울프슨은 처음부터 "젊은 터어키"(Young Turks)와 협상을 해야 하는지에 관하여  매우 망설이고  있었다.  1909년  6월에 2일  수상(Grand  Vizir) 후세인(Husain Hilmi  Pasha)과 협상하였으나 진전이 없었다.  그는 보다 큰 식민지를 팔레스틴에 만들고 있었다. 결국  다음 2년간은 협상을 중단하기로 했다는 최종 통보를 받고 말았다. 터어키 제국 안에는 유대인 정착지를 만들 수 없다는 통보를 받은 초기 시온주의자인  노싱(Nossig)은 결국 팔레스틴을 떠나 버리고 말았다.
  1911년 터어키와 이태리 사이의 전쟁이 시작되자 시온주의자들의 운동은 더욱 활기찼다. 터어키가 약화된  틈을 이용하여 보다 많은 이민자들이 팔레스틴으로 들어 왔으며, 외국인으로 땅을 매입하는 일이 보다 쉬워졌다. [Jeune Turc]지가 이태리를 공격하고 나서자, 유럽의 시온주의자들은 이러한 주장을 비판하였다. 그들은 어떤 편에 설  것인가?를 결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적어도 시온주의자들은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날때까지도 국제정치적 감각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당시까지만을 보면 대체로 시온주의자들의 외교적 대상은 독일이었다. 런던의[Times]지는 "시온주의는 단지  독일 외무부의 놀이개"라는 기사를 실을 정도였다.   1906년 바이츠만(Haim Weizmann)은  처음으로 발포어(Balfour)를 만났다. 여러 시온주의 운동의 지도자들도  1912년 런던에 와서 여러 영향력있는 정치가들과 접촉하였다. 프랑스는 거의  매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고, 폴란드에서는 시온주의자들이 추방되었다는 루머가 나올 정도였다. 러시아에서는 1910년 여러 명의 시온주의 책임자들이  체포되었으며, 사무실은 불법 모금의 죄목으로 폐쇠되어야 했다. 러시아에서의 시온주의  운동은 러시아 혁명 이후 더 이상 활동할 수 없게 되면서 반유대주의의 세력이 확산되어 갔다.

② "종합적" 시온주의("Synthetic" Zionism)
  시온주의의 목적에  관한 토의는 터어키에서의  혁명 이후에 다시 일기 시작하였다. 울프슨은 다소  비현실적인 주장을 하였으나, 1905년 7차 시온주의 총회의 새 의장으로 선출된  노르다우는 터어키가 독재 정권이 무너지면서 외교적 노력을 통한 총체적 타결이 보다 현실성이 커졌다고 주장하였다.
  상임위의장으로 선출된  울프슨은 7인 위원회를 두고, 각 지방의장을 두었다:런던에 그린버그를, 헤이그(Hague)에   화란의 은행가인 칸(Kann)을, 파리에 마르모렉(Marmorek)을,  베를린에  와르버그(Warburg)를,  오데사(Odessa)에 코간(Kogan-Bernstein)을, 그리고   예카테리노슬라브(Yekaterinoslav)에  우시쉬킨(Ussishkin)을 각각 임명하였다.  이로써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실용주의자들과 정치적 시온주의자들 사이의 갈등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로써 8차 시온주의 총의에서 바이츠만이 사용한 "종합적" 시온주의가 탄생한 것이다.
  여기서 그들은  "팔레스틴 안의 정착 행위를  정치적으로 협상이 끝난 이후로 미루지 않는다"는 결정에 따라 크고 작은 이주가 계속되게 되었으며, 나아가 여전히 큰 성취를 위해  노력하되 이 목표는 실천적 노력에 의해 얻는다는 원칙을 정하게 되었다.
새 지도자기  된 와르버그(Otto Warburg)는 식물학 교수로서 이 운동에 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농업  정착을  강조했다. 레빈(Shmaryahu Levin)은 시온주의 세데의 교육가로서  가장 덕망과 영향력을 갗춘 인물이었다. 나훔(Nahum Sokolow)은  가장 영향력있는 문필가로서, 자칭 바이츠만의 제자였다. 중요한 외교적 임무를 수행했다. 야콥슨(Victor Jacobson)은 러시아에서의 시온주의 운동을 일으킨 자였으며, 콘스탄티노플의 시온주의 운동의 첫 대표자로서 1913년 11차 시온주의 총회에서 부의장이 되기도 하였다.
  울프슨은 제11차 시온주의 총회(1913년 9월 2-9)에서 "다음 총회에서 뵙자"고 인사 하였으나, 그에게는 이것이 마지막 인사가 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얼마동안 중단된  후 제12차 시온주의 총회가 열리던 1921년까지 그는 살지 못하였다. 전쟁 발발  직 후인 1914년 9월 제2대 시온주의 운동의 의장은 죽고 말았다.

③ 시온주의의 확산(Zionist Movement of the local federation)
㈎ 러시아
  러시아는 시온주의 운동의 본산지라고 여길 만큼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들은 헬쩨이나 울프슨의 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며, 러시아의 법적 테두리 안에서 그들의 활동이 제한 받았기 때문에 건설적인 역할을 하지는 못하였다. 1905년 이후 시온주의자들 중 일부는 러시아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하였으며, 보다 많은 에너지를  이 운동에 사용하였으나, 1905-6의 러시아 혁명으로 이 일은 큰 억압을 받게 된다.

㈏ 독일
  독일에서의 시온주의  운동은 러시아와 같은  장애는 없었다. 1897년 첫 연맹회의가 콜로그네(Cologne)에  세워진 이래 울프슨(Wolffsohn), 보덴하이머(Bodenheimer)같은 지도자의 힘이 크게 작용하였다. 시온주의 운동 기금인 세겔의 지불자(shckel payers)는  1901년의 1,300명에서 1914년 8,000명으로 늘어났다(이 숫자는 미국,러시아 다음으로 많은 숫자였다).
  쿠르트(Kurt Blumenfeld)는 독일의  설득력있는 지성인으로서, 시온주의 운동밖에서 저명한 사람들의 지원을 얻어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1909-1911 독일연맹의 비서(secretary)였으며, 후에는  세계 기구의 비서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독일에서의 이 운동은 이 운동에 연합한 소수에 비해 다수의 반대자들이 있었다. 첫째로 독일은 프랑스나 오스트리아에 비해 반유대주의 현상이 매우 적었다.  나아가 독일은  Rechtstaat로써  어떤 시민도  정당한  법의 절차(due process of law)없이는 체포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쿠르트가 모든 시온주의자들에게 팔레스틴으로의  이주를 준비하라고 선전했을때, 그들은 그가 인위적으로 독일 유대인들의 뿌리를 뽑으려는 정책을 시행하려는 것이라고 그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독일에서는 적어도 제2차 세계대전을 맞이하기 전까지는 시온주의자들의 이상이 그렇게 매력적인 운동이 아니었다.

㈐ 영국
  헬쩨는 항상 영국을 특별히 중요한 나라로 강조해 왔다. 그가 1895년 9월 런던의 한 작은 유대인  협회에서 유대 국가 건설에 관한 그의 이상을 발표하고, 1896년 7월 유대군중과 처음으로 만난 이래 그는 런던을 그의 외교무대로 삼아 왔다.
  물론 처음에  로스촤일드나 다른 영국계  유대인들은 헬쩨의 새로운 신앙(new faith)을 받아들이는 것을 꺼려하였다. 그러나 헬쩨의 제자들은 이 일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영국의 결정적인 역할을 맞게 되었다.
  헬쩨 이전부터 영국에서는 시온을  사랑하는 자들(A Lover of Zion)의 운동이 몽테피오리(Montefiores)나 몽타그(Montague), 아비그돌(D'Avigdors)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팔레스틴에  유대인의 정착촌을 건설하는 일을 위하여 플리톤적인 동정심을 가지고 있던 자들이었다.
  헐버트(Herbert Bentwich)나 장그빌(Israel  Zangwill) 같은 이들은 1897년에 "마카비 순례단"(Maccabean Pilgrimage)를 조직한 자들이었다. 1898년에는 알버트(Colonel Albert Edward  Goldsmid)가 주동이 되어 영국시온주의 연맹을 결성하였다. 이 운동에 협조하던  자들은 대부분 동유럽에서 막 건너온 자들로써 몽테피오리(Sir  Francis  Montefiore),  요셉(Joseph  Cowen), 그린버그(Leopold Greenberg)등이 헬쩨의 협조자였으며,  그가 죽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정치적 시온주의자들로 남아 있던 자들이었다.
  영국도 독일과 마찬가지로  이 운동에 대부분이 냉담하였고, 어떤 이들은 비판적이었다. 우간다 결의(제7차   시온주의   총회,1905)  이후  지방주의자(Territoliaists)들의 운동이 약화되자, 이들은 오히려 지방주의를 찬성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우간다  안이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는 전단계로 보았기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이 운동의 기선을 제압할 수 있는 기회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뭏튼 헬쩨을 지지하는 자들과 이념을 달리하는 자들 사이의 갈등은  계속되어 1909-10에는 급기야 아무도  이 연맹을 이끌어갈 의장을 뽑지 못할 정도였다.
  1912년 이후  젊은 지도자들 -  시몬(Leon Simon), 노르만(Norman Bentwich),헤리(Harry Sacher),  이스라엘(Israel Sieff), 마크(Simon  Marks) -은 1904년이래  맨체스터에 살아오던  당대의 지도자 하임 바이츠만(Haim Weizmann)과 함께 이 운동의 재개를 선언하였다. 이것이 "맨체스터 시온주의 학파"(MANCHESTER SCHOOL OF ZIONISM)이다. 이로써  과거의 낡은 갈등은 물러나고 새로운 연합 운동이 시작되었다. 1914년에는 역국 시온주의 연맹에는 모두 50개의 지부를 갖게 되었다.

㈑ 미국
  헬쩨의 제1차  시온주의 총회에서의 선언 이후  미국은 거의 이 일에 관심을 가지지 못하였다.  팔레스틴은 더 이상 미국 유대인들에게는 정의와 평화와 사랑을 실현시키기 위한 터전이 못되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몇몇의 유대인들- 구스타프(Gustav Gottheil), 번하드(Bernhard Felsenthal) - 만이 이 일에 동참하여 1898년 7월에 뉴욕(New  York)에 연맹을 세웠다. 이들은 점차 미국에 있던 많은 여러 단체들 - 히브리어 회화클럽(Hebrew speaking club), 유대 교육협회(Jewish educational society), 회당기구(Synagogue organizations)등 -과 제휴하여  1917년에는   [미국  시온주의   기구](ZOA,Zionist  Organization  of America)를 세웠다. 유럽과의  지리적인 거리로 말미암아 거의 독자적인 운동으로 얼마간 계속되었다.
  이들의 운동은 주로 미국  동부가 중심이 되었다. 24세에 연맹의 의장이 되었던 랍비  스테반(Rabbi Stephen Wise), 팔레스틴에  일찌기 이주하여 살던 랍비유다 마그네스(Rabbi  Judah Magnes), 그리고  1904년부터 1912년 물리학자였던 헨리(Harry Friedwald), 연맹의  의장이 된 리차드(Richard Gottheil)등이 중심인물들이었다.
  유럽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미국 연맹은 브랜다이스(Brandeis)가 주도해 나갔다. 그는 미국 법관 중에서 가장 존경받던 인물로서 후에 미국 대법원장에 선출된 자였다. 그는 본래 전혀 유대인의 생활이나 문학, 전통과는 동떨어진 환경에서 성장한  자였으나, 자기가 유대인임을 발견하게 된 임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평가되고 있다.  즉,시온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곧 존경받는 일이 된 셈이다.
  물론 미국의 이  운동이 그에게서만 이룩된 것은  아니다. 1차대전 이후 레빈(Shmaryahu Levin)은  유대 교육의  촉진을 위해서  일한 자였으며,  힐렐 실버(Abba Hillel  Silver)와 뉴먼(Emanuel Neumann)이  주축이 되어 [헬쩨-시온 클럽](Doctor Herzl Zion Club)을 만들기도 하였다.
  1912년 시온주의 여성 기구(Zionist Women's Organization)인 HADASSA가 설립되어 "팔레스틴에는 유대 기관과  기업을 세우고, 미국에는 시온주의 이상을 촉진하다"는 취지문을 선언하게  된다. 이 여성운동은 오랫동안 헨리타(Henrietta Szold)가 이끌어 왔다. 그녀는 2차대전 이후(73세때) 유럽에서 나치의 학정에서 살아  남은  젊은 유대인들을  팔레스틴으로  이주시키는  [청년 이민단](YOUTH ALIYA) 운동을 리드하기도 하였다.

㈒ 남아프리카
  1905년 7월  요한네스버그(Johannesberg)에서는 남아프리가 시온주의연맹이 탄생하였다. 이미 이곳에서는  20년 전부터 일어난 운동의 결과로 4,000명의 회원과  60개의 지부를 갖게 되었다.  이들은 처음부터 헬쩨이나 울프슨에 대한 지지도가  매우 높았다. 1906년에 울프슨이  이곳을 방문하였을 때는 가장 열광적인 환영을 받기도 하였다.
  이곳에서의 두드러진 결과가운데 하나는  유대 공동체 밖에서 이 운동을 위한 매우 중요한 인물을 얻은 것이었다.  밀너(Milner)와 스무트(General Smuts)가 그들이었다. 이들은 영국의  발포어나 조지(Lloyd George)처럼 시온주의 운동의 결정적 과오들을 벗어나게 해주는 역할을 해 준 인물들이었다.
  결론적으로 시온주의 운동은  여전히 소수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그 메세지는 널리 퍼져 나갔다. 카이로나 알렉산드리아에서도, 로져스(Rhodes) 섬에서도, 불가리아(Bulgaria)나 피지(Fiji)섬에서도 시온주의 연맹이 세워져 활동하였으며,카나다, 튜니스,스위스 등지에서도  이 운동이 시작되었다.  특히 [유대 민족 기금](JEWISH NATIONAL FUND)이  만들어져 세계로부터 작은 기금들을 모으기 시작한 일도 이때 시작  되었다. 시온주의 운동은 잘 정돈되어 갔으며, 유대인 세계에 점차 영향력이 미치기 시작하였다.

(3) 제1차 세계 대전과 시온주의 운동
① 하임 바이츠만(Haim Weizmann)
  하임 바이츠만(1874-1952)은 현대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이었으며, 시온주의 기구의 의장을  역임한(1920-31,1935-46)바 있는 과학자였다. 그는 1874년 11월 27일  러시아 핀스크(Pinsk)근처 모텔(Motel)이라는 마을에서 목재상을 하는 오제르 바이츠만(Ozer Weizmann)의 15명의 자녀 중 하나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성경과 히브리어  문법을 배웠으며, 그가 남긴 11세 때의 편지에서 "왜 우리는 우리를  연민의 눈초리로 쳐다보며 무덤이나 제공하는 유럽의 왕에게 의지해야 하는가? 유대인들은  죽어야 하는가? 그러나 영국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 것이다. 결국 우리는 시온으로 가야 한다. 유대인이여 우리 함께 시온으로 가자!"라고 쓰고 있다.
  핀스크에서 과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그는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유대인으로서는 러시아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매우 어렵자, 1892년 독일로 건너가 [Darmstadt Polytechnic]에 입학한다. 그곳에서 두 학기를 공부한 그는 베를린의  공[Institute of Technology in Charlottenburg]에서 생화학을 전공한다.
  베를린에서  그는  처음으로  시온주의  지성인들  -  메나헴 시르킨(Nachman Syrkin), 모츠킨(Leo Motzkin), 레빈(Shemaryahu Levin)등 -을 만난다. 이 시기는 시온주의의 이념 논쟁이 가장 활발하던 시기로써 유대 민족주의의 문화와 정신을 가장 잘 말해주고 있던 때였다. 1897년 제1차 시온주의 총회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1898년 2차 회의에는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 해에 그는 그의 박사학위를 마치고 첫 화학  특허품을 발명하여 팔기도 하였다. 그의 실력이 인정되어 가가 27세 되던 1901년 제네바 대학(Geneva University)의 조교가 되었다.
  그의 삶은 학문과 시온주의 운동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곧 시온주의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헬쩨이 강조하는 외적인 노력, 즉 창조적인 사회적 변화를 꾀하려는 것에는  거의 개의치 않는 외교적인  노력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에 관하여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헬쩨가 터어키 정부로부터 허가장을 얻기 위해 유럽의 고관들을 만나러 다니는  동안, 그와 그의 동료들은 히브리 문화를 선전하였고, 그들이 발행하는  잡지 [Eine juedische Hochschule]에는 시온주의자들의 정신적 본부 및 과학적 보루가 될 히브리 대학을 세울 것을 제창하기도 하였다.
1903년 우간다 논쟁으로 인하여 시온주의 운동이 균열을 가져오게 되자, 그는 사실상 헬쩨의 반대 입장에  서게 된다. 1904년 런던으로 건너간 그는 시온주의자로서, 그리고 과학자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 1905년에는 멘체스터 대학(Manchester University)에서 강의를  시작하였으며, 7차 시온주의 총회에서 확대 상임 위원회의 위원에 선출되어 보다 구체적인 참여를 하게 된다. 이듬해 베라 바이츠만(Vera Weizmann)과 결혼한다.
  1906년 그는 갑자가 당시  영국 수상이던 발포어(Arthur James Balfour)를 맨체스터에서 만나, 시온주의자들의 이상을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발포어는 늘 시온주의자들이 우간다 제안을 왜 거부하였는지에 관하여 수수께끼처럼 생각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현실을 모르는 결정을 한 반우간다주의자들을 만나보고 싶었던 차였다.  발포어가 젊은 바이쯔만에게 왜 우간다를 거부했느냐고 묻자, 그는 발포어에게 되묻기를 "만일 내가 당신에게 파리를 제안한다면, 당신은 런던을 포기하겠는가?"하자 그는 "결코 그렇지 않다. 런던은 내 조국의 수도가 아닌가?"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바이쯔만도 "예루살렘은 런던이 늪지였을 때 우리 나라의 수도였었다" 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이 발포어가 시온주의자들의 꿈에 사로잡히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07년 제8차 시온주의  총회에서 그는 '정치적' 시온주의자들과 '실용적' 시온주의자들을 하나로 묶는 "종합적  시온주의"를 제창하여 그 동안의 갈등을 하나로 연합하는 작업을 이룩하는데 주축을 이루었다.
  학문적으로도 그는 맨체스터에서 명성을 날렸으며, 1914년에는 하이파에 세워진 공과대학(Technion)에서 독일어 대신 히브리어로 강의하도록 하는 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히브리어가 당시에 과학을 위한 언어로는 많은 제약이 있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였으나, 유대인의  뿌리를 단절시키는 독일어 강의는 적극 반대했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비이쯔만을 유대 역사의  변두리로부터 중심으로 옮겨오게 하였다. 적어도 1916년까지  바이쯔만은 영국정부 내에서 시온주의에 대한 지지를 얻어내지는 못하였다. 영국이 시온주의를 지지하게 된 것이 언제부터인가?를 정확하게 계산할 수 없으나, 대체로 영국이 미국의 유대인들에게 관심을 보이기시작한 때라고 여겨진다. 즉,  미국의 대통령 윌슨의 친구이기도 하였던 대법원장 브렌다이스가 시온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영국은 미국과 더불어 팔레스틴을 프랑스의 손에 넘겨주지 않도록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바이츠만은 전쟁 발발 직후  영국의 승리를 예견하였다. 전쟁 초반 독일이 우세해 갈 때도 그는 이러한  예견을 바꾸지 않았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가족과 함께 스위스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곧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친구들에게 매우 희망적인 기회가 올 것을 말하기도 하였다.당시 [Manchester Guardian]의 편집장이며, 바이쯔만에 의해  동유럽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의 비극과 팔레스틴에로 향한 그들의 메시아적  꿈에 관해 많은 설명을 듣고 시온주의에 끌려 들어왔던 스코트(C.P.Scott)는 당시의 재무장관이었던 조지(Lloyd George)를 만날 것을 권하였다. 1915년 1월  바이쯔만은 헬쩨시대에 시온주의에 관해 들었던 적이 있었던 조지를 처음으로 만났다. 바이쯔만은 "그는 매우 종교적인 분이었다.
  그와 당시 다른 동료들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틴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결코 꿈만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들은  성경을 믿고 있었으며, 시온주의는 성경이 표현하고 있는 하나의 사상이라고  말하였다"고 적고 있다.  여기에 힘을 얻은 바이쯔만은 외무장관 그레이(Edwaed  Grey), [Manchester Guardian]의 군사 담당관 헐버트(Herbert Sidebotham)등과 연쇄 접촉을 통하여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1917년 몇몇 영국계  유대인들과 의회 의원들의 반대가 있었으나, 국회의장 조지(Lloyd  George)와 수상  발포어는  그해 11월  2일  그 유명한  발포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선언이야말로 유대인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전환점이 되었다. 이 선언은 유대인을 위한 권리장전(Magna Carta)이었다. 이 선언이야말로  국제법이 시온주의자들의 꿈을 처음으로 인정해 주는 사건이었으며, 2000년동안 잃어버린  조상들의 "약속의 땅"을 다시 찾는 역사적 선언이었다. 역사가는 바이쯔만의  역할을 "제1차 세계대전의 가장 위대한 외교적 업적"이라고 적고있다.
  1918년 그는  영국정부로부터 시온주의자  최고책임자로 임명되어 팔레스틴에 파견된다. 앞으로의 정착과 국가  발전을 구상하며, 그 계획을 추진하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의 영웅 알렌비(Allenby)장군은 그를 환대하였으나, 영국 통독부는 바이쯔만의  낙관적인 미래에 대해 다소 부정적이었다. 그것은 아랍 민족주의(Arab Nationalism)의 세력이 큰 장애가 되었기 때문이다.
  바이쯔만은  아카바로  건너  가  아랍민족주의의  대표인  에밀 화이잘(Emir Feisal,son of the sharif Hussein of Mecca)을 만났다. 이 때 영국정부는 아랍대표에게 그들에게도 팔레스틴이 아닌 시리아나 이락쪽에 독립국가를 만들어 줄것을 약속하였다. 화이잘은 이러한 내용에 동의하는 계약서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화이잘은 시리아나 이라크에 있는 그의 연맹들로부터 그와 같은 결정에 동의를 얻어내지 못하였기 때문에 바이쯔만에게 이 약속을 취소할 것을 통보하였다.
  1920-30년대에 바이츠만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일하였다. 그는 1920년 런던에서 열린 시온주의 총회에서 새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유대인 내부에  또 한차례 싸움이 시작되었다. 바이쯔만의 적대자였던 몽테피오리(Claude Montefiore,유대 종교적  민족주의자)나  울프(Lucien Wolf,반시온주의 단체인  [Conjoint Committee]를  이끄는 저널이스트)가 적극적으로 시온주의를 반대하고  나섰다. 이들은 "유대교는  추상적인 종교 원리를 수집해 놓은 종교"로 보았으며, "유럽의 유대인들은 유럽 사람들의 동적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시온주의 운동은 잘못된 이상주의자들의 오도된 헛된 꿈일 뿐이다"라는  것이다. 이들은 주로  프랑스계 유대인들로서 외교계에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던  무서운  적들이었다. 또한  인도의  외무장관이었던 몽타그(Ediwin Montagu)도  내각안에서 시온주의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영국 의회의 유일한 유대인 의원으로서 발포아 선언에 관한 토의에서 유대인을 오직 종교적으로만 이해함으로써  그들을 위한 정치적 독립을 강하게 반대했던 사람이었다.
  이들은 1) 주로 유대인을 오직 종교적 공동체로만 이해 해야 한다고 하는 랍비들이었으며, 2) 시온주의가 지나치게 유대인의 전통적인 가치를 무시하는 세속적인 운동이라는 것이 시온주의를 반대하는 주원인이었다.
  바이쯔만은  이들과도  협상해야 했다.  그러나  종교적  민족주의자들의 공리(postulates)와는 도무지 대화가 되지 않았다. 울프는 팔레스틴 안에 있는 유대인들의 완전한 종교적 자유와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면서, 그들이 이민할 경우에 그들이 살게 될 도시와 마을에 완전한 편의 시설까지를 요구하였다. 이들과의 협상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당시 영국  정부 안에는 대체로 두  그룹의 사람들이 있었다:1) 유대 팔레스틴 건설을 반대하는 정치가 혹은 고관들로써 그러한 생각은 비현실적인 것이요, 영국 정부를 위해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가진 자들과, 2) 전반적으로 시온주의 사상에는 호감을 가지고 있으나, 팔레스틴이 영국 보호령이 되려는 계획에 끼어 들어 책임을  지는 것은 꺼려 하는 종류의 사람들로 구분된다. 이들은 이 일을 프랑스나 미국과 함께 협의하는 안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이들 중에 외교, 군사전문가들은  팔레스틴이 대영제국의 방위에 중요한 지역임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조지(Lloyd George)는 친시온주의  정책가의 대표로서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1905년 그의 도움으로 맨체스터에서  처음으로 만난 발포어도 또 다른 지원자였다. 이 때 그는 유대인들의 독특한 애국심을 느꼈으며, 왜 유대인들이 우간다로 가는 것을 거부했는지를 이해했다고  적고있다.  1915-16에 두 번째로 그를 만난 바이쯔만은 영국이야말로 팔레스틴에 자기들의 집을 짓겠다는 그들의 이상을 구현할 수 있는 후원자임을 거듭 강조했다. 그를 잘 아는 측근들에 의하면 발포어는 성격이 매우 돌같은  심장을 가진 자였으며, 타고난 냉소주의자였는데, 바이츠만과 그의  생각에 관하여는 늘 경의를  표하였다. 발포어는 성경을 살아있는 실제라고 믿었던 자였다.

② 발포어 선언
  시온주의는 제1차 세계 대전의 반발로 인하여 큰 변화를 갖게 되었다. 시온주의 운동은 본격적으로 대규모 운동으로 바뀌어 갔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중요한 정치적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전쟁 발발 당시 베를린에  있던 시온주의 집행부는 2명의 독일계, 3명의 러시아계, 1명의 오스트리아 시민권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쟁 중에 시온주의 세계기구는 전혀 기능을 가질 수가 없었다. 시온주의 총회도 역시 1913년 제11차 회의 이후 1921년의 12차 회의 때까지 모임을 가질 수 없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중립의 위치와  태도를 지킨다는 약속은 했지만 실제로 이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은 전쟁 중에 각각 '자기의 조국'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유대  국가 독립을 위해 어떤 결단이 유리한가?하는 질문 사이에서 갈등을 갖게 되었다. 이  문제는 전쟁 이 후에도 상당히 많은 진통을 겪게 하는 일이었다.
  독일 시온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독일을 위한 애국심을 강조하여 젊은 회원들에게 '조국'을 위해 군대에  입대할 것을 요청하였다. 독일은 세계의 정의와 질서와 진리를 위해 싸우므로 러시아, 영국, 그리고 프랑스는 이들의 부속물로 여겼다. 오펜하이머(Franz Oppenheimer)는  "이 전쟁은 거룩한 것이요, 단지 자위적인 것이다"라고 말했으며,  스트라우스(Ludwig Strauss)는 "강한 독일이 압제자들을 해방시킬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전적으로 독일을 지원할 것을 호소하였다.
  오스트리아의 휴고(Hugo Zuckermann)는 전쟁터에서 오스트리아의 국기를 보며 숨지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그  자신이 얼마 후 전사하였다. 엘리아스(Elias Auerbach)는  전쟁이 발발하자 팔레스틴의 하이파로부터 독일로 돌아가 군의관으로 봉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독일  및 오스트리아의 시온주의자들의  애국적 열정은 돌이켜 보건대 잘못된 것이었으나, 러시아에 대항하여  싸운 이 전쟁은 대체로 가장 큰 유대인들이 집결되어있던 동유럽과 미국의  일치된 입장이었다.  전쟁이 일자 서부 러시아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보다 많은 박해가 있었으며, 해외로 추방하기도 하였다. 러시아나 폴란드 지역의 시온주의 지도자들도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필연적으로 믿고  있었다. 러시아가 승리한다면  동유럽의 유대인들에게는 보다 많은 박해가 예상될 것이며,  반대로 러시아가 패배하면 그들은 해방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이츠만,  아하드   암(Ahad  Ha'am,Asher  Ginzberg),  야보틴스키(Jabotinsky), 루텐버그(Rutenberg),  노르다우(Nordau)등은 일방적으로 독일만을 응원하는 것을  위험하다고 생각하거나 반대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친독일파였다.
  독일 연맹의 전의장이었던 보덴하이머(D. Bodenheimer)는 독일 외무장관을 만나 "러시아 유대인  해방을 위한 위원회"를 설치해  줄 것을 건의하여 1914년에 허가를 얻었으며, 이 위원회는 동유럽의 유대인들을 해방하기위한 계몽에 힘쓰며, 독일이 서부 러시아를 점령하는데 힘을 쓴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동유럽 유대인들의  정치적, 문화적 자치권 운동은 폴란드와 발틱 국가들의 민족운동의 목적과 갈등을 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만다. 또, 이 운동은 오히려 러시아  정부로 하여금 1914-15년에 반유대  조치의 명분을 주게 되었으며, 결국 보덴하이머는 그의 동료들에 의해 이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유대 민족 기금]의 의장직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중립을 지키기 위한  모임이 모츠킨(Motzkin)의 주도로 1914년 12월 코펜하겐(Copenhagen)에서 모였을 때 바이츠만이  제안한 의견 - 전쟁 중에 시온주의 집행부의 기능을 잠정적으로 중지하고, 이 일을 미국에 양도하자는 안 - 이 부결되었고, 대신 본부는 베를린에서 런던에 둔다는 결의를 하였다. 그러나 누가 이러한 결정를 할 권한이 있느냐?는 반발과 함께 이러한 결정 자체가 집행부를 보다 무기력하게 만든 셈이 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결정은  곧 전쟁 중 집행부는 어떤 국가의 행정부와도 협상 할 수 없다는 것을 결의한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영국의 승리는  곧 시온주의의 승리이다"라는 바이츠만의 생각은 옳았다. 1914년 12월 터어키는 전쟁에 참여했고, 그는 런던에서 많은 정치가들과 접촉하였다. 곧 영국에서 중요한 친시온주의 선언이 준비되고 있다는 뉴스가  흘러  나왔다. 드디어  1917년  10월  4일  영국정부는  발포어 선언(Balfour Declaration) 을 발표하였다. 이로써 런던은  비록 팔레스틴은 1918년까지 터어키의  손에 있었다 하더라도, 세계  시온주의 운동의 중심이 되었으며, 베를린은 이 권한을  양도하여야 했다. 런던은 이어 독일과 터어키 정부도, 팔레스틴에 대규모의 이민의 문을 열 것과 그곳에 정치적 문화적 자치권을 인정하는 이와 유사한 발표를 해 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발포아 선언은 시온주의 운동의 다양한 힘을 하나로  묶게 해 주었으며, 팔레스틴의 미래에 대한  의견을 만장일치로 통일시켜 주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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