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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10-06
 제목  초대교회의 확장가운데 박해 원인 및 과정, 그 결과에 관한 연구
 주제어  [교회사] [초대교회사]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초대교회의 확장가운데 박해 원인 및 과정, 그 결과에 관한 연구


- R. Niebuhr의 '대립유형'(Christ against Culture) 범주를 중심으로 -

 

 

목 차

 

Ⅰ. 서 론 

Ⅱ. 초대교회의 확장과 박해의 원인

  1. 초대교회의 확장 원리
  2. 초대교회의 박해 원인
   1) 정치적 원인
   2) 사회적 원인
   3) 종교적 원인
   4) 오해와 편견 

Ⅲ. 로마제국의 초대교회 박해과정 및 그 결과

  1. 로마제국의 초대교회 박해 과정
  2. 초대교회의 박해 결과
   1) 배교자의 등장
   2) 순교자와 변증가의 등장

Ⅳ. 결론

참고문헌

 

 

 

H. R. NiebuhrⅠ. 서 론 

 

  라인홀드 니버(H. R. Niebuhr)는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의 관계를 다섯가지 범주로 구분한다. 그 가운데 '교회 중심적 배타주의'(Ecclesiocentric Exclusivism)는 그리스도교만이 진리를 소유하고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보는 태도이다. 이는 자신의 종교적 믿음 체계를 절대 진리로 확신하고 받아들이지만 타종교에 대해선 배타적이고 비타협적인 태도를 지닌다(행 4:12). 이러한 태도는 지상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하며, 인간 구원을 위한 유일한 수단이며 원천으로 생각한다. 즉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가 절대적이다. 한편 초대교회의 입장을 살펴볼 때 이는 니버의 '교회 중심적 배타주의'(Ecclesiocentric Exclusivism, Christ against culture, 대립유형)의 유형에 속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초시간적, 초공간적인 그 어떤 것이 아니다. 기독교신앙은 역사를 뚫고 들어와 일어난 실존의 사실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곧 하나님 자신이 문화속에 들어오셨듯(Incarnation),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또한 시간과 공간의 특수성아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불가피성에 접하게 되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인 동시에 하나의 사회적 기구로서의 역사적 존재이다. 물론 초대교회 역시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특수상황속에서 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초대교회의 확장과 그에 따른 박해의 원인을 살펴봄과 동시에 박해가 가져다준 결과가 무엇인지 연구하고자 한다.
  논자는 초대교회 박해의 자취를 연구하면서 몇가지 의문을 갖게되었다. 먼저 극심한 박해가운데서도 초대기독교인들이 이에 굴할 수 없었던 이유와 초대교회의 확장원인이 무엇이며, 많은 종교가운데 유독 초대교회가 로마정부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받아야만하는 이유가 무엇이고, 박해를 통하여 이루고자 했던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본 연구를 통하여 이러한 과제를 하나씩 풀어보고자 한다.

 

 

Ⅱ. 초대교회의 확장과 박해의 원인

 

  1. 초대교회의 확장 원리

  예루살렘 교회는 오순절 이후 급성장했으나 미처 그 시야를 예루살렘 밖으로 향하지는 못했다. 그런 가운데 스데반의 순교와 뒤따른 박해는 예루살렘 교회에는 큰 타격을 주었지만 결과적으로 기독교 확산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기독교 확장의 제 2의 물결을 일으킨 사람은 바울이었다. 다메섹 도상의 체험을 계기로 30년간 로마 세계의 복음화를 위하여 선교의 선봉에 선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도착하여 세계의 중심지에 복음을 전파하였고 순교하였다. 당시 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로마는 기독교운동이 일찍부터 시작된 듯 하다. 아마도 오순절 때 예루살렘에 왔던 유대인들이 복음을 로마에 전파한 듯하다(행 2:10). 즉 로마교회는 바울이 주후 57-58년 겨울 그의 로마서를 보냈을 때 벌써 꽤 번영하고 있었다. 이후 주후 64년 네로가 로마의 대화재와 관련시켜 기독교를 박해할 때에는 로마에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어 이들중 다수가 순교했던 것이다. 대로마제국의 수도로서의 권위와 힘을 배경으로 한 로마교회는 네로 박해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힘차게 발전하여 주후 100년경에는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큰 공동체로 성장하였다. 바울 사도의 이방선교 외에도 베드로, 요한을 비롯한 사도들도 세계각지로 흩어져 기독교 확장에 공헌하였다. 그 외에도 많은 무명의 평신도들이 기독교 확산에 힘썼다. 이처럼 초대교회는 역동적 신앙을 가졌었다. 사도들은 주님의 지상명령을 받아 모두 선교사가 되었다. 교회를 개척할 뿐 아니라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였다. 초대교회가 성장한데는 '교육', '교제', '성찬과 예찬', '기도', '경외심', '구제', '성전에 모이기를 힘씀',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음', '찬미', '칭송을 들음' 등이 있었기 때문으로서 이것은 초대교회 확장의 원리이다.
  한편 초대교회의 확장에 있어서 로마제국이라는 요소가 단순히 박해자로만 남지는 않는다. 구조적인 통일성과 통신수단의 용이성으로 인해서 로마제국은 기독교를 박해했지만 기독교의 팽창에 필요한 각종 수단들을 제공했다. 제국이 취했던 현명한 행정조직은 교회의 조직에 큰 영향을 미쳤고 로마의 법전은 교회법의 제정뿐만 아니라 라틴신학의 용어를 캐내는 좋은 채석장이기도 했다. 그리고 로마가 기독교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은 실제적이고, 도덕적이고 인간적인 관심이었다. 이러한 요소들은 서양 기독교에게 실용적인 면모와 심오한 윤리적 감각을 부여했으며, 성 어거스틴의 「고백론」같은 심오한 심리적인 예민성을 지닌 작품이 탄생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게 되었다. 기독교는 고립적 진공상태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세상 한복판에서 일어난 것이다.

 

  2. 초대교회의 박해 원인

 

  1) 정치적 원인
  로마 정부는 이방종교에 대하여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취했다. 기독교가 로마 정부 당국에 의하여 유대교의 한 분파로 생각되는 한 멸시와 미움을 받을지언정 고유한 민족 종교로서 합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로마 정부가 기독교의 실상을 분별할 수 있기 전에 제국의 주요 도시에 이미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기독교가 새로운 종교라는 사실을 밝혀지고 또 급속히 제국내에 퍼지게 되자 불법 종교로 진압의 대상이 된 것이다. 특별히 로마정부는 기독교 박해 전에도 몇가지 이유를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국가가 비기독교적이라고 생각하여 호의를 갖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편에 서지 않는 것은 악과 깊이 관련된 것으로 보아 기독교인과 로마제국내의 이교도와 큰 간격이 생기게 된 것이다. 또 유대인들의 로마 제국에 대하여 심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교회 안에도 이와 같은 유대적 요소가 있게 된 것이다. 한편 당시 기독교교인들은 황제숭배를 단호히 거절하였는데 이는 로마정부로부터 반역 행위의 혐의를 받았으며 기독교도는 국가 모반의 음모를 꾀하는 무리들로 간주되었다.

  2) 사회적 원인
  사회적 문제도 박해의 한 요소가 되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사회의 하층 계급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당시 영향력있는 상층 귀족 계급의 무시와 증오를 받았다. 켈수스(Celsus)는 기독교인들을 무식한 대중들로 보았는데 오리겐은 '켈수스에 대항하여'(Against Celsus)라는 작품속에서 이 문제에 관하에 켈수스를 반박하지 못한 점은 실제로 초대 기독교신자들이 비천한 계층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인데 이들의 판단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실제 처음 3세기 동안 기독교 신자들의 다수가 사회 하류층 출신이었다는 증거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특히 복음서나 바울의 서신에 등장하는 신자들은 그것을 증거한다. 당시 이교 사회에서는 소수의 특권층이 다수의 하층계급의 사람들이나 노예들로부터 섬김을 받는 귀족적인 사회구조의 지속을 원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만인의 평등을 주장하였다. 나아가 기독교인들은 이교사원이나 극장, 오락장소 등에서의 모임에 참여하지 않고 당시에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사회관습들을 따르지 않아 미움을 받게 되었다. 사회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공동체적인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인류에 대한 증오를 가지고 있다고 로마인들은 인식하고 있었다. 

  3) 종교적 원인
  기독교인들은 그들 자신이 섬기는 신 이외에는 다른 신들을 숭배하는 것을 전적으로 부인했기 때문에 이교도의 미움을 받았다. 즉 이교도의 분노를 산 것은 그들의 제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또 세신들을 숭배함으로 이교도들을 공평하게 대하는 것을 부정한 점이다. 그것은 곧 전통적 종교를 부정하는 것이며 이는 전반기 박해의 자극이 되었다. 또한 로마인들의 미신적 사상도 한 몫을 차지하였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이방의 신들을 노엽게 한 연고로 자신들에게 재해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4) 오해와 편견 
  기독교에 대한 일반적인 비난과 오해는 그리스도인의 관습과 신앙에 대한 풍문에서 나왔다. 기독교가 퍼지면서 그리스도교인들이 새벽이나 저녁에 자주 모임을 갖게 되자 그 모임의 내용을 잘 알지 못하는 이교도들이 질투와 의심에 사로잡혀 그들의 상상에서 나온 헛소문이 떠돌았다. 예를 들면, 기독교인들이 공동체적 생활을 하면서 새벽이나 저녁에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먹으며 행했던 성만찬 의식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밤중에 동굴에 모여 폭음, 폭식하고 자식을 죽여 인육을 먹고 교회지도자들의 성기를 경배하고 평화의 키스도 왜곡되어 건한 사회 습속을 해치는 근친상간을 하는 저속한 무리들로 비추어져 일반인들의 왜곡된 상상력을 자극하였고 이것의 박해의 명분을 찾던 로마제국에게 박해의 한 빌미를 제공하기에 충분하였다.

 

 

Ⅲ. 로마제국의 초대교회 박해과정 및 그 결과

 

  기독교는 처음부터 핍박을 받고, 그 속에서 자랐을 뿐 아니라 그 역사를 순교의 피로 쓰기 시작했다. 예수의 탄생부터 시작된 박해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를 비롯해서 교회 역사에 끊임없이 크고 작은 핍박이 있어 왔다. 기독교 역사는 박해의 역사요 수난의 역사였다. 사실상 기독교 순교사는 기독교 자체의 역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박해사를 연구하는 것은 기독교 역사의 핵심을 연구하는 것이요 무엇보다도 중요한 부분을 다루는 것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1. 로마제국의 초대교회 박해 과정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제국과 갈등에 빠지게 된 것은 어떤 근본적인 원칙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우연에 의한 것이었다. 로마제국에 의한 박해는 주후 64년에 네로 황제에 의하여 처음 일어났다. 주후 64년 로마에는 대화재가 발생해 도시를 황폐화시켰다. 네로는 방화의 협의를 받을 정도로 인기가 없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을 속죄양으로 삼기로 결심했다. 이 네로 치하의 박해는 오래 계속된 것은 아니라 뒤에 따른 다른 박해의 전례가 되었다. 한편 네로는 68년 로마 상원의 지원을 받은 반란에 의해 퇴위되어 스스로 자살의 길을 택하였다.
  도미티아누스 황제 치하(주후 81-96)에서 상황은 또다시 심각해졌다. 칼리굴라와 네로의 경우를 예외로 한다면, 황제들은 지나치게 열광적인 신민들이 황제에게 신적인 영예를 바치는 것을 전통적으로 금지시켜 왔었다. 도미티아누스는 이와는 정반대의 견해를 취했으며, 자신을 '주와 하나님'으로 부르게 하고, 이러한 황제숭배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들은 반역의 혐의를 갖고 의심스럽게 여겼다.
  트라야누스 황제(98-117)는 자신에 대한 숭배가 강제적인 충성 시험수단으로 상용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위기는 지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12년 소아시아 비누니아(Bithynia) 지방의 총독이던 소 플리니우스(Pliny the younger)는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황제에게 문의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교가 도시뿐만 아니라 시골에도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을 말해준다. 플리니우스는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지 않은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처형했고, 시민권을 가진 다른 사람들은 재판을 받도록 하기 위해 로마로 압송하기 위해 대기시켜 두었다. 플리니우스는 그리스도인들이 처형당한 선례를 알고 있었고 망설임 없이 이를 시행했던 것이다.
  이제 로마 정부는 그리스도인들이 고결한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로마의 옛 종교적 전통에 대해서는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적대적이며 그 일탈에 있어서 지나치게 완고하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서는 동정을 거두어들이고 관용을 배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스도교는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였으며, 2세기의 여러 사람들이 순교의 죽음을 당했다.
  한편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는 모든 지방 총독들이 앞장서서 박해를 가하는 것을 만류했다. 몇몇의 지방 총독들은 실제로 교회를 보호하기도 했으며, 이에 고마움을 느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의 총독이 비록 이교를 신봉하기는 하지만 죽은 후에 상급을 받을 것이라고 믿기도 했다. 2세기 후반 무렵에 그리스도교는 사회의 상류층에 침투하고 있었으며, 많은 고위 인사들은 밤에 잠이 깼을 때 부인이 철야 기도에 참석하기 위해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당황스러워 하기도 했다. 코모두스(Commodus, 주후 80-92) 황제의 첩이었던 마르키아(Marcia)는 그리스도인이었으며, 로마교회를 위해 상당한 정도로 박해를 완화시켜 줄 수 있었다.
  3세기 이전에는 로마 정부가 그리스도교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인해 교회는 활동 공간을 넓혀가고, 내적인 비판적 문제들에 대처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2. 초대교회의 박해 결과

  1) 배교자의 등장
  로마제국의 박해기간동안 많은 사람들이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배교했다. 후에 이들 가운데 다수가 그 죄를 뉘우치고 교회로 돌아오고자 하여 자연히 이들을 용납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는 교회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교회는 박해로 말미암아 야기된 내적인 문제들을 해결해야 했다. 북아프리카와 로마에서는 3세기 중엽 데키우스의 박해 때에 이교의 제단에 제물을 바쳤던 배교자들과 무수한 사람들이 박행 굴복하여 타협하였다. 디오클레티안의 박해 때 박해 자들에게 성서를 내주었던 배교자들 중에서 회개한 사람들을 처리하는 문제로 두 차례 심각한 논쟁이 벌어졌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교회와 전혀 교제하지 못하게 하기를 원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어느 정도 근신기간을 둔 후에 받아들이기를 원했다. 도나투스 논쟁은 디오클레티안 황제의 박해에서 야기된 것으로서 콘스탄틴시대까지도 해결되지 않았다. 디오클레티안 시대의 박해로 말미암아 교회는 신약성서의 정경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논쟁으로 야기된 결과가 항상 파괴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로 인해 교회는 권위있는 정경을 발달시키게 되었으며 최종적으로 교회를 약화시키지는 않았다.

 

  2) 순교자와 변증가의 등장
  로마제국의 박해로 말미암의 순교자와 변증가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택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헤드마스(Hermas),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서머나의 폴리갑(Polycarp)이 있다.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시리아지방 안디옥의 감독으로 주후 30-35년경에 태어났다. 그의칠십여 평생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의해 잉태된 자'라는 별명으로 불려졌다. 그에 대한 전설에 의하면,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무릎에 앉히고 축복하셨던 그 어린아이가 바로 이그나티우스였다고 한다. 2세기 기독교 사회에서 이그나티우스에대한 존경과 신망이 얼마나 두터웠는가를 짐작케 하는 이야기이다. 폴리갑, 이레니우스, 유세비우스 그리고 제롬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주후 108년경 트라얀황제의 치세에 로마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로마로 압송되던 중 서머나에서 자신을 위해 구명운동을 하고있던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탄원합니다. 나에게 '불합리하게 친절하지'' 마십시오. 내가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에게 도착하도록 내가 야수들을 위한 먹이가 되도록 하십시오. 내가 순수한 빵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을 정도로 나는 하나님의 밀이고 나는 야수들의 이빨에 의해 갈아지고 있습니다. 내가 일단 잠에 떨어져서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들이 나의 무덤이 되어서 육신의 어떤 것도 뒤에 남겨놓지 않도록 야수들을 달래는 것이 좋습니다. 세상이 더 이상 나의 몸을 보지 못할 그때, 나는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수단들을 통하여 내가 하나님에게 희생이 되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후에 이그나티우스는 콜론세움으로 알려진 격투기장에 끌려오게 되었다. 이곳은 대형 원형 경기장으로 약 45,000명의 관중으로 수용하는 곳으로 기독교 순교자들의 죽음을 구경하는 것은 당시 로마인들에게 큰 즐거움이 되었다. 이그나티우스는 순교직전 최후의 감사를 드린후 사자들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였다. 사자들이 그를 덮친후 남은 것이라고는 몇 개의 뼈들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후에 슬퍼하는 그의 친구들이 이 뼈들을 모아 매장을 할 때에 그들은 이그나티우스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더욱 좋은 곳"(빌 1:23)으로 갔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편 폴리갑(Polycarp)은 사도 요한의 제자로 주님의 제자들의 뒤를 바로 잇는 사도라는 면에서 '속사도 교부'(Apostolic Father)라고 불려지는데, 그는 2세기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순교자였다. 86세에 체포되어 처형된 폴리갑이 순교한 연도는 확실하지 않지만, 다만 그는 155-160년이나(트라얀 황제의 통치기) 161-180년(우리에게 '명상록'으로 잘 알려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통치기)중의 어느 해, 2월 22-23일에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장한 병사들이 한 노예 소년을 앞세우고 폴리갑을 체포하러 왔을 때, 폴리갑은 그들이 먹고 마실 식탁을 준비하게 하였다. 순교의 제물을 앞에 두고 그들이 먹고 마시는 동안 폴리갑은 한 시간의 기도시간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거의 두 시간을 향해 가고 있는 그의 기도는 아무도 제지하지 못했다. 이윽고, 기도를 마치자 압송되어 경기장에 들어서게 되었다. 폴리갑의 명성과 고령을 생각한 지방총독이 말하였다. "맹세하라. 그러면 내가 너를 석방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욕하라!" 죽음을 벗어나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절대절명의 순간에 폴리갑의 입이 열렸다. "86년 동안 나는 그의 종이었습니다. 그 동안 그분은 나에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나를 구원하신 왕을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 로마의 신(神), 가이사에게 맹세할 것을 요구하는 추상같은 명령 앞에서 폴리갑의 무릎은 결코 굽혀지지 않았다. 죽음을 앞둔 폴리갑은 기둥에 묶인채 하늘을 우러러 큰 소리로 기도했다.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당신은 오늘 이 시간 나로 하여금 성령의 불멸 안에서 영과 육의 영원한 생명의 부활로 그리스도의 잔 안에서 순교자들의 숫자에 포함되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속이지 않고 진실하신 하나님이신 당신이 미리 예비하셨고 계시하셨으며, 이제 성취하신 대로, 부요하고 받으실 만한 제물로 오늘 당신 앞에 순교자들 가운데 나를 받아주옵소서." 마침내 그는 화형을 당했다.
  배교자와는 달리 순교자, 변증자, 호교론자들은 이교 세계에까지 큰 영향력을 끼치면서 교회사상 특히 사상사적인 면에서 볼 때 최초의 기독교 신학의 기초를 놓은 자들이란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Ⅳ. 결 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생애 중에 그를 따르는 자들이 세상에서 박해를 받을 것을 말씀하셨다(마 10:16-23; 마 24:9-13). 초기 교회의 확장 과정에서 그 예언의 말씀은 사실로 나타났다. 기독교가 그 종교적 진리를 위하여 재래 종교와는 다른 비타협적인 자세를 취하자 로마제국의 권력과 충돌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후 313년 로마제국에서 완전한 종교적 자유가 허용되었고 로마제국의 박해는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즉 박해란 시련을 통하여 기독교는 더 정화되었고 4세기 이후에는 로마 제국의 지배적 종교가 되었으며 그 이후 서양문명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초기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박해를 이기고 오히려 로마제국을 기독교화 함으로 현대 문명의 주류를 이룬 서양 문명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는 많은 핍박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가 되어 교회는 꾸준하게 성장하였다. 핍박이라는 기독교 장애물이 오히려 기독교를 성장시키는 수단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이상에서 로마제국의 초대교회 박해의 원인 및 과정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하여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다. 본 연구를 통하여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복음전파가 현대의 우리에게도 가능하기까지는 하나님의 카이로스가 초대교회의 순교를 통하여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곧 초대 1세기와 2세기의 박해 그리고 수세기 동안 온 세계를 돌면서 복음은 수많은 순교자를 만들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이 때 초대 성도들의 굽힘없는 절개의 믿음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던져주는 교훈은 크다하겠다. 즉 '복음과 문화'라는 이중구조 견지의 교회사 속에서 과거는 현재를 비추는 귀한 유산임을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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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dwick H., 「초대교회사」, 박종숙 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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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nzalez J. L., 「기독교사상사1」, 이형기외 공역,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88.
_____________., 「초대교회사」, 서영일 역, 서울: 은성,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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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호 편저, 「기독교 순교사」, 서울: 혜문사, 1977.
정상운 외, 「알기쉬운 교회사」, 서울: 이레서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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